제169화
천운왕조에 도달한 거수 운청휘가 마침내 한숨을 돌렸다.
“인간, 정겁을 이겨냈구나!”
거수 운청휘의 머릿속에 자연스레 한 장면이 펼쳐졌다. 그의 영혼이 정겁에서 겪은 일들이, 적나라하게 펼쳐지고 있었다.
기억을 모은 후, 거수 운청휘의 눈이 복잡한 감정에 휩싸였다.
“단순한 호감이 아니었군.”
지금의 운청휘는 18살로 알려져 있지만, 선계에서 3천 년을 보냈다.
그만큼 오랜 기간을 살아오면서 누구도 마음에 담은 적이 없었는데, 이유는 이염죽과 비슷했다. 누군가를 마음에 담아 둘 생각도 없었고, 무엇보다 그의 마음에 들어오는 이가 없었다.
정혼이 깨진 이후로 긴 시간을 홀로 보냈으니, 이염죽을 향한 마음이 착각이라 여겼다. 그러나 정겁을 통해 본 장면으로, 운청휘는 그의 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는 지금껏 호감과 애정의 감정을 구분하지 않고 있었을 뿐이다.
지하 삼백여 장 아래에서 솟구쳐 올라오자, 황무지는 어느새 새벽이었다.
저 멀리 동쪽 하늘에서 번져오는 희끄무레한 빛이 사막을 물들이고 있었다.
나란히 날아가는 동안, 운청휘의 눈은 옆에 있는 이염죽을 힐끔 바라보았다. 그녀의 손이 닿을 듯 말 듯한 거리에 있었다.
잠시 고민하면 운청휘는 내밀려던 손을 거두었다.
괜한 망신을 자초할 필요는 없었으니까.
“염죽, 어찌하여 네 몸에 천화의 기가 있지?”
말없이 일 각쯤 나아갔을까, 운청휘가 불쑥 그녀를 불렀다.
“염죽?”
그 호칭에 이염죽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지만, 대답했다.
“저승의 천화을 만났어.”
“저승의 천화라면, 열 손가락에 꼽는 천화가 아니던가?”
운청휘의 두 동공이 급격히 좁아졌다.
“맞아. 전설대로라면 저승의 불은 염라의 화신이고, 저승 세계를 지배한다고 하지. 그 저승의 불은 저승으로 가는 길목을 지키고 있어. 내가 그 천화를 손에 넣고 싶어.”
이염죽이 말했다.
“네 몸에 있는 한독은 천화로만 억제할 수 있으니, 천화는 네가 꼭 필요하겠군.”
고개를 끄덕이던 운청휘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나 저승의 천화는 저승 세계의 산물. 이곳에서 천화를 수복하는 일보다 열 배는 어렵겠군. 내가 저승에 들어갈 수 있더라면 너를 도왔을 텐데, 아쉽군. 이렇게 하지. 내 청연지심화를 빌려주겠다. 네가 저승의 천화를 수복한 후, 다시 돌려주기만 하면 된다.”
운청휘가 말하기 무섭게 그의 몸에서 푸른 화염이 스산하게 일렁이더니, 그가 가볍게 손을 흔들어 청연지심화를 이염죽에게 내밀었다.
“이렇게 진귀한 것을 내게 선뜻 빌려줘도 되는 거야?”
이염죽으로서도 뜻밖이었는지, 곧장 받지 못했다.
“하하. 물론 청연지심화의 신식에 낙인을 새겼으니 단기간에는 지울 수 없겠지. 그럼에도, 그걸 네게 주는 게 어떻단 말이냐?”
운청휘는 호탕하게 말하며 웃었다.
그는 진심이었다. 만약 이염죽이 저승의 천화를 손에 넣지 못한다면, 청연지심화에 새긴 신식을 지워 이염죽에게 줄 생각도 하고 있었다.
이유는 간단하지 않은가.
이염죽은 천화가 필요하고, 이염죽은 운청휘의 마음에 들어온 여인이므로.
잠시 망설이던 이염죽은 결국 청연지심화를 건네받았다.
“……고마워.”
그들은 나란히 흡혈 박쥐족의 성지 바깥으로 향했다.
이때 성지 밖에서는 수백만 마리의 흡혈 박쥐족이 저마다 초조한 얼굴로 그들의 귀환을 기다리고 있었다.
“족장이다!”
“응? 은공께서도 계신다!”
어느새 세 사람을 발견한 흡혈 박쥐족들이 웅성거리며 그들을 맞이했다.
김태연을 그들에게 맡긴 후, 운청휘는 이염죽과 함께 성지의 결계로 되돌아갔다.
성지에 들어가기 직전, 별안간 이염죽이 입을 열었다.
“아무리 내게 호의를 베풀어도, 나는 어떠한 마음도 느끼지 않아. 이해해 주길 바라.”
“이미 알고 있다.”
고개를 끄덕인 운청휘의 얼굴에 싱그러운 미소가 번졌다.
“네 수련을 생각하면, 네가 감정을 느끼는 건 헛된 꿈을 꾸는 일이나 다름없지. 그런데도 나는 그 이상을 원하는구나. 네가 나를 좋아, 아니 연정을 가지길 바라고 있다.”
“그건 불가능해.”
이염죽은 단호했다.
“불가능? 하하, 이 세계에서 이 운청휘가 해내지 못한 일은 없다.”
도발하듯 말한 운청휘가 이염죽을 응시했다.
“내기하지 않겠나? 네게 약속한 것을 말해 네 마음이 흔들린다면……, 내게 입 맞춰주는 것으로.”
“그래.”
이염죽의 말에는 어떠한 기대도 없었다. 그녀는 운청휘가 무엇을 약속하든, 자신의 마음이 흔들리지 않으리라 확신했다.
이 드넓은 세계에서도, 그녀의 마음을 흔들리게 하는 건 없었으니.
“되었다. 그 일을 이루고 나서, 다시 알려 주지.”
운청휘는 다시 말을 이었다.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반드시 약속을 지키겠다.”
시간을 되돌려, 이염죽의 부족을 부활시킨다.
예로부터 어떤 강자도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는 말은 내려오지 않는다. 그러한 경지에 이르려면 선제보다 더 높은 경계에 발돋움해야만 했다.
선제의 무위를 회복하는 게 시간문제라고 해도, 그 이상의 경계는 운청휘라도 단언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불안은, 운청휘의 마음속에서 고개조차 들지 못했다.
운청휘가 그만한 경지에 도달하면, 이염죽에게 시간을 되돌린다는 말을 전할 생각이었다.
“서로의 보완이 될 수 있도록, 한 가지 비밀을 알려 주마. 내게는 중요한 비밀이지.”
운청휘는 자신의 정체를 밝히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선제이자 선계에 군림하는 자였고, 그의 말 한마디면 백억 생령의 생사가 결정되는 존엄한 자가 아니였던가.
“관심 없어!”
이염죽은 차가운 한마디를 내뱉으며 결계 안으로 사라져 버렸다.
운청휘는 그 자리에 멍하니 서서 입술을 달싹였다.
뭔가를 말하고 싶었지만 머릿속이 혼란스러워 정리되지 못했다. 그저 머리를 얻어맞은 듯 얼떨떨하기만 했다.
‘나 운제가 지금껏 숨겨 왔던 사실을 말하려 했건만, 관심 없다는 반응을 보이다니?’
“운 공자!”
바로 그때 김태연이 그에게 다가왔다.
“운 공자, 방금 들은 이야기인데 천검종에서 온 이들이 저희 부족의 일원을 잡아 황성으로 갔다고 하네요. 운 공자께서 천운왕조를 지키라는 말씀을 남기신 뒤로, 저는 사자를 보내 황제 폐하와 우호 조약을 맺었어요. 그 후로 천검종의 사람들이 저를 찾지 못하고, 제가 천운왕조에 숨어 있는 줄만 알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인질을 잡아 저를 찾아내려는 것 같아요.”
* * *
천운왕조, 극광성.
성공학관의 원장 마라는 부원장들을 대동한 채 극광성 상공에 떠 있었다.
그의 양옆으로 거대한 몸집을 지닌 하얀 뱀 두 마리가 모습을 드러내었다.
멀리서 보면 그들은 위엄을 내뿜은 두 마리의 용처럼 보였다.
“마라, 내가 자네를 도와준 후, 린아를 데리고 떠나고 싶은데 동의하는가?”
마라의 오른쪽에 있던 빙백사가 돌연 약관의 아리따운 청년으로 모습을 바꾸었다. 운청휘가 사해왕조에서 마주쳤던 영단경 3단계의 빙백사, 장소걸이었다.
“쉬이이…….”
다른 하나는 변신하지 않았지만, 월경 9단계의 빙백사였고, 끊임없이 혀를 내밀며 눈은 번득였다.
“반대하지 않네. 하지만 그가 원치 않는다면 그의 의견을 존중해 주게나.”
마라가 입을 열었다.
“린아는 나와 함께 떠날 것이다.”
장소걸이 말하자, 마라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가 월경 9단계의 빙백사에게 다가가더니, 한 손을 빙백사의 이마에 얹었다.
곧, 기이한 힘이 빙백사의 몸에 들어갔다.
잠시 후, 그와 빙백사의 계약서가 공중에 나타나더니, 그대로 불타서 흩어져 버렸다.
“쉬이이…….”
마라는 그와 빙백사가 맺은 주종 계약을 없애 주었다.
빙백사는 뜻밖이라는 듯 눈을 크게 뜨고 마라를 바라보다, 곧 은은한 눈물을 흘렸다.
장소걸 또한 의외라는 눈빛을 보냈다. 마라가 대가를 요구하고 나서야 풀어줄 줄 알았건만.
그러나 마라는 운청휘를 알고 있었고, 장소걸은 감히 그에게 힘을 쓸 수 없었다. 그러니 서로에게 평화롭게 끝난 셈이다.
“마라, 곧 그대의 사람들에게 준비 하라고 하게. 천검종의 사람이 도착했네!”
별안간 장소걸이 소리쳤다.
그는 수십만 장 밖에서 접근하는 3개의 기를 감지한 터였다.
“장호백, 정말 쓸모없어. 정 노조께서 범인 몇 명을 잡아 오라고 했는데 그걸 실패하다니!”
“장호백, 이 일이 천검종에 전해지면 네놈은 톡톡히 망신당할 거다. 영단경 1단계의 전수 제자가 몇 명 잡는 것도 못 하다니!”
나란히 날아오는 3개의 신형에서 두 사람이 동시에 한 명을 조롱했다.
“흥, 고작 보통 사람이었다면 당연히 잡아 왔겠지! 젠장, 성공학관에서 영단경 3단계의 빙백사를 숨기고 있었다고! 살아서 소식을 전한 것 자체가 다행인 줄 알아!”
장호백이라 불린 이가 부끄러워하며 말했다.
“헤헤, 만약 영단경 3단계의 빙백사가 진짜 있다면, 종주께서 우리에게 주신 임무를 초과 달성한 것이잖아!”
“응, 하지만 지금 우리는 성공학관 사람을 황성에 데려가야 하지. 정 노조께서 준비를 마치셨으니, 우리도 서둘러야 해. 오늘 오후에 운청휘와 관련된 이들을 모두 참수한다더군.”
세 사람이 이미 극광성의 상공에 도착했다.
그들 앞에는 전투를 기다리는 성공학관의 사람들이 있었다.
“역시 영단경 3단계의 빙백사가 있어!”
천검종의 두 영단경 전수 제자는 한 번에 사람으로 변화한 장소걸을 봤다.
“린아, 도망치자!”
안색이 변한 장소걸이 다른 빙백사를 잡아 멀리 달아났다.
장소걸은 강한 위기감을 느꼈다. 장호백이 데려온 두 명의 천검종 사람들은 무위가 그보다 높았던 터였다.
“이미 늦었다!”
장호백의 옆에 있던 천검종 전수 제자가 냉소를 흘렸다. 그가 한 손을 휘두르니, 풍 속성 영단의 힘으로 만들어 낸 새장이 휙 날아갔다.
장소걸도 영단의 힘을 펼쳤지만, 단번에 몸이 새장에 부딪쳐 날아갔다.
그가 소중히 쥐고 있던 빙백사는 새장에 갇히고 말았다.
“짐승새끼가 내 상상보다 약하진 않았구나.”
공격을 날린 사내가 비웃음을 비추더니 다시금 한 손을 휘둘렀다.
그러나 직경 삼백여 장의 폭풍이 허공에 나타나, 장소걸을 향해 돌진했다.
장소걸은 크게 울부짖으며 뱀의 몸으로 변해 폭풍을 맞닥뜨렸다.
콰르릉!
거대한 폭발음과 함께 폭풍이 장소걸의 몸에 부딪혀 소멸했지만, 장소걸은 절반의 가죽이 벗겨지며 피를 토했다.
장호백과 다른 전수 제자는 성공학관 사람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끊임없이 영단경의 힘을 휘두르니, 성공학관의 사람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