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선제귀환-178화 (178/430)

제178화

그의 영혼이 대나무 누각 위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채아야. 3천 년 만에 마침내 정식으로 만나게 되겠구나.’

무수한 날들을 보내며, 꿈에서만 그리워하던 가족이 눈앞에 있다. 억제할 수 없는 감격스러움이 치솟았지만, 운청휘는 가까스로 마음을 다잡았다.

지금 우선해야 할 일은 채아의 안전과 부모님이 감금된 장소가 아니던가.

‘채아는 한 달에 한 번씩 부모님과 만날 테니, 장소를 알고 있겠군.’

생각을 마친 운청휘의 영혼이 서서히 대나무 누각의 지붕으로 내려앉았다.

솨아아…….

별안간 소름이 오소소 돋는 찬바람이 불어, 채아의 수련을 중단시켰다.

운청휘는 자신의 목소리가 채아를 격동시킬까 우려해, 일단은 바람을 일으켜 그녀를 수련에서 깨어나게 한 터였다.

“누구냐!”

채아 정도로 수련을 한 무인이 한낱 바람에 소름이 돋을 리가 없다. 그녀가 심상치 않음을 감지하고 곧바로 눈을 떴다. 별처럼 아름답게 반짝이는 눈동자는 곧장 운청휘의 영혼이 있는 곳을 향했다.

-나다, 채아야.

허공에서 운청휘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처…… 청휘 오라버니!”

설마. 두 눈으로 그리 말하던 채아가 온몸을 잘게 떨더니 외마디 소리를 내뱉었다.

-그래, 내가 돌아왔다.

대나무 누각 앞에 운청휘의 모습이 덧칠하듯 서서히 드러났다. 붉은 장포를 입고 검집을 멘 모습은 평소와 다름없었지만, 어딘가 비현실적인 느낌을 주었다.

“청휘 오라버니……!”

꿈에서도 그리던 모습이 눈앞에 나타나니, 채아는 감격을 이기지 못해 그대로 운청휘의 품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대로 운청휘를 통과해, 허공을 껴안았을 뿐이다.

-미안하구나. 지금의 나를 만질 수는 없다.

운청휘가 눈썹을 늘어뜨렸다. 당장 본체로 달려와 꽉 껴안아 주고 싶었으나, 그는 감격을 억누르며 화제를 돌렸다.

“14일 후, 궁우신과 싸워 너와 부모님을 구해내마. 내 반드시 약조하겠다.”

“오라버니, 오라버니께서 소식을 전한 후부터 이런 날이 올 줄 알고 있었어요!”

운청휘의 말에 채아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옥을 깎아 만든 듯 희고 고운 얼굴에 눈물이 어리니 더없이 애처로웠지만, 적어도 그녀는 비할 수 없는 기쁨에 잠겨 있었다.

외부인들에게는 높디높은 성녀로서 철저하게 감정을 제어해 왔지만, 혈육과의 상봉은 성녀의 가면을 벗게 만들기 충분했다.

-채아, 탈출할 방법을 생각해 두었느냐?

다만 지금은 회포를 풀 때가 아니었다. 운청휘가 곧바로 질문을 던졌다.

-네 몸에 있는 소도원마종을 꺼낼 방법을 찾았다. 다만 내 육신이 너를 만나야 하니, 성전 밖으로 나올 방법이 없겠느냐?

운청휘의 말에 채아는 어두컴컴한 동굴에서 한 줄기 밝은 빛을 본 듯 눈을 빛냈다.

이미 그녀의 마음 속에서 운청휘는 뭐든지 해낼 수 있는 전지전능한 존재에 가까웠다. 오라비를 향한 경외감이 어릴 때부터 자리잡은 탓이다.

이는 미래에도 변하지 않을, 그녀의 소중한 감정이었다.

“지금은 어려워요. 풍소우가 온 뒤로 궁우신의 경계가 삼엄해졌어요. 그가 돌아갈 때까지 이 성전 밖으로 나가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어요.”

말을 마친 채아의 얼굴이 붉어졌다.

궁우신이 왜 자신을 성전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겠는가. 호색한인 풍소우 때문이었지만, 왠지 운청휘 앞에서 상세히 말하기 부끄러웠다.

-그럼 며칠만 기다려 주겠느냐? 내 반드시 방법을 찾아오마.

고개를 끄덕인 운청휘가 불쑥 질문을 던졌다.

-부모님은 어디 계시느냐?

“네! 청휘 오라버니, 이걸 보세요.”

채아가 아공간 반지에서 동그란 수정을 하나 꺼내 보였다.

이는 회상정(回想晶)으로, 기억을 담아 그대로 보일 수 있는 기이한 물건이었다.

채아가 들고 있는 수정은 어둡고 고요한 동굴의 정경을 떠올려 보였다.

‘낙성산맥에 있는 그 동굴이 아닌가?’

어젯밤 다녀온 곳이니 낯설지 않은 광경이었다.

곧 회상정이 보여 주는 풍경이 동굴 내부로 변하며, 강렬한 죽음의 기운이 밀려 왔다.

얼굴이 보이지 않는 사람이 손에 깃발을 들고 가볍게 휘두르고 있었다.

이윽고 찬란한 금빛이 동굴의 어둠을 걷어내었다.

그 안에서, 운청휘는 그립고 또 그리운 이들의 얼굴을 보았다.

자신에게 눈매를 물려준 아름다운 젊은 부인과 얼굴의 윤곽을 물려준 수려한 중년인.

3천 년 만에 보는 이들이 다소 두려운 듯 서로 꼭 붙어 있었다.

-아버지, 어머니!

운청휘의 떨리는 목소리가 그들에게 향했지만, 회상정이 보여주는 장면은 계속해서 바뀌어 갔다.

채아가 계속해서 이동했기 때문인데, 빤히 주시하던 운청휘가 별안간 손을 들었다.

-채아, 잠시만 멈추거라!

이때 회상정은 금빛 세계 바깥의 경치를 비추고 있었다.

운청휘의 머릿속에는 자연스레 모래 바람이 부는 황무지가 떠올랐고, 그가 작게 중얼거렸다.

-서북쪽 황무지로군.

한번 알아보고 나니, 연이어 떠오르는 사실이 있었다.

‘동굴 밖에서 부모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던 것도, 저승에서 들을 수 있었던 것도 이 때문이었군.’

낙성산맥의 동굴은 천검종과 저승, 서북 황무지 세 공간이 만나는 곳이니 공안신루가 나타날 법했다.

운청휘는 금빛 세계가 서북쪽 황무지에 있고, 봉천진지진에 격리되어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다만 저승에 있는 명계의 숨결이 자꾸만 부모님에게로 새어드니, 나날이 몸이 나빠질 수밖에 없으리라.

-채아, 선천경에 이르며 오행의 힘을 몇 가지나 터득했느냐?

부모님이 계신 곳을 알았으니, 이제는 채아를 돌볼 차례였다.

그의 질문에 채아는 어쩐지 뿌듯해하는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오라버니, 잘 보셔요!”

그녀가 눈에 웃음기를 담뿍 담으며 말한 순간, 그녀의 뒤에서 오행의 힘이 하나씩 퍼져나왔다.

-이럴 수가……!

드물게도, 운청휘가 놀라는 모습을 보였다.

채아가 터득한 오행의 힘은 다섯 가지로, 이 자체로는 운청휘를 놀라게 할 수 없었다.

다만 그녀는 수 속성과 화 속성 외에도 왕자 오행의 힘 세 가지를 익혔던 것이다.

도덕, 질서, 인애!

선계에서도 극소수만이 터득할 수 있는 이 힘을 채아가 터득하다니? 놀라움도 잠시, 운청휘는 흡족한 미소를 띠며 그녀에게 적합한 무공들을 떠올렸다.

-네가 수련하기 적당한 무공이 둘 있구나. 초시인수술과 초시공화술이니, 잘 익혀 보거라.

말을 마침과 동시에 운청휘는 두 무공을 채아의 머릿속에 흘려 넣었다.

이로써 채아는 수 속성의 오행의 힘과 화 속성의 힘을 다루기 더욱 수월해질 터였다.

다만 도덕, 질서, 인애를 다루는 무공은 그가 선제 시절 창조해 두었어도 지금은 익힐 수 없었다. 일단은 그들은 영변경의 경지에 도달하는 게 우선이리라.

“청휘 오라버니, 신기한 무공을 가지고 계시네요.”

과연 운청휘의 여동생답게, 채아는 비상한 머리로 무공을 이해한 듯싶었다.

그녀가 눈을 반짝이더니 흰 손을 가볍게 휘저었다. 허공에 오행의 힘으로 피워낸 화염이 넘실대기 시작했다.

이윽고 아공간 반지에서 장검을 꺼내어 화염에 달구니, 검은 새하얗게 달아올랐다.

채아는 멈추지 않고 이번엔 수 속성 오행의 힘으로 물기둥을 형성해 검에 끼얹었다.

카강!

검은 그대로 두 동강이 나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훌륭하구나! 아주 좋다! 초시공화술과 초시인수술의 배합을 단번에 이해하다니, 참으로 대단하군.

운청휘가 아낌없는 찬사를 쏟아내었다. 과연, 채아의 자질은 그의 예상을 뛰어넘었다.

‘채아가 2년 만에 반절 영단까지 도달한 건, 구음한맥의 체질 외에도 비상한 이해력 덕분이로구나.’

무인의 천부적인 재능은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타고난 육신으로, 구음한맥의 채아처럼 해가 갈수록 폭발적인 무위의 증가를 보인다.

또 다른 하나는 이해의 재능으로, 방금 채아가 단번에 두 무공을 조합하여 사용했듯이 무공 구결의 이해에 탁월한 소질을 보이는 것이다.

채아와 같은 이들은 어떤 무공을 수련하든 한 달 정도 수련하면 철저하게 그 이치에 도달할 수 있게 되리라.

“그런데 청휘 오라버니, 그간 어떻게 지내셨나요? 말씀해 주실 수 없나요?”

운청휘의 안색을 살피던 채아가 문득 물었다.

-3년 동안…….

새록새록 피어나는 감회와 함께 운청휘가 입을 열려는 순간, 진관해의 다급한 전음이 흘러들었다.

-운청휘! 운청휘! 운청휘!

떠나기 전 진관해에게 부탁했던 것이 떠올라, 운청휘는 한숨을 삼켰다.

-나머지는 다음에 이야기하마. 당장 떠나야 한다!

운청휘는 돌아갈 채비를 서둘렀다.

진관해는 분별력 없는 이가 아니니, 이유도 없이 그를 깨울 리가 없다. 연회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 듯했다.

-잊지 말거라. 14일 후, 궁우신을 꺾고 네 마종을 없애 주마. 부디 기다려다오.

말을 마친 운청휘는 공중에서 스르륵 모습을 감추더니, 순식간에 연회장으로 되돌아왔다.

“이어서 운청휘와 공생(孔笙)입니다!”

검동이 건조한 목소리로 두 사람을 호명했다.

“공생은 영단경 2단계의 전수 제자인데, 운청휘는 누구지?”

“들어 본 적 없다면, 내문 제자겠지. 다만 급이 다른 제자들끼리 대결하다니, 희한하군.”

“벌써 잊었나? 천형대에서 정지가를 죽인 이가 바로 운청휘네!”

“그자가 운청휘였나? 내가 듣기로는 운청휘는 영단경의 무위를 지녔음에도 내문 제자에 머무르며 정지가가 자신을 얕보게 했다는군.”

“운청휘는 간교했지만 정지가가 멍청한 거지. 싸움에서 속임수를 간파하지 못한 쪽이 어리석은 게야.”

“하지만 정지가의 조부가 이태껏 운청휘를 살려 두다니, 신기한 일이로군.”

“하하. 자네는 아는 게 없구만. 운청휘는 그 소도도와 친분이 있다네!”

“그래서 그의 목숨이 지금까지 붙어 있었던 게로군!”

수군거림을 뒤로하고, 공생이 무대 위로 훌쩍 날아올랐다.

그러나 반 각을 기다려도 운청휘는 올라오기는커녕 모습도 드러내지 않았다. 자연히 공생의 얼굴에 경멸의 빛이 떠올랐다.

“누가 운청휘지? 나와 맞설 용기도 없는 게냐?”

검동이 담담하게 거들었다.

“운청휘는 전수 제자 정지가를 죽인 자. 그러니 운청휘와 공생의 대결은 공평하다 할 수 있습니다.”

말을 마친 검동의 눈길이 운청휘 쪽을 바라보더니 날카롭게 물었다.

“운청휘, 왜 나오지 않는거지?”

“내 형제는 출전을 거부하네!”

그때 소도도가 운청휘를 대신해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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