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9화
“거절? 이 무대는 우리 공자께서 정한 것인데 운청휘가 거절한다고?”
검동이 불쾌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하인 주제에 어딜 나서!”
소도도가 불쾌하다는 듯 받아쳤다.
“결투를 하는 건 내 형제의 결정이다. 네놈 주인이 선물을 주는 게 자유이듯, 싸우는 건 출전하는 이의 자유이니 다른 이들이 강요할 수 없지!”
검동의 눈빛이 순간 어두운 빛을 띠었다.
설마 결투를 거부할 줄이야. 무인으로서 부끄럽지도 않단 말인가?
어쨌든, 이 무대는 풍소우가 원해서 만든 것이 아닌가. 검동은 이대로 물러날 수 없었다.
“운청휘, 그것이 네놈의 뜻이냐?”
검동의 날카로운 시선이 눈을 감고 앉은 운청휘에게 닿았다.
두어 번 호흡할 시간이 지났음에도, 운청휘는 묵묵부답이었다.
검동의 눈에 살기가 스물스물 번져나왔다.
“천검종 따위에 이렇게 오만방자한 녀석이 있었다니!”
이를 지켜보던 풍소우도 미간을 찌푸렸다.
“검동!”
풍소우가 검동을 향해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이를 마주한 소도도의 안색이 천천히 변하더니 벌떡 일어났다.
“멈춰!”
소도도가 급히 말했다.
“아무나 내 형제에게 접근할 수 없다! 내 형제와 싸우고 싶거든, 우선 이 몸을 꺾고 지나가도록!”
소도도가 이 말을 할 때 반절 영단의 기를 전부 내뿜었다.
“반절 영단?”
소도도의 기세를 느낀 풍소우가 비웃음이 가득한 표정으로 코웃음을 쳤다.
“네가 웃을 여유나 되는가? 그 정도 무위라면 영주의 쓰레기도 네놈보다는 강하겠구나!”
풍소우를 도발하던 소도도는 아차 싶었다. 궁우신이 풍소우에게 얼마나 아첨하고 있던가? 자신이 풍소우와 척을 지어도 좋을 게 없었다.
그는 재빨리 화살을 공생에게 돌렸다.
“공생, 우선 나를 넘어가야 할 걸세!”
갑자기 표적이 된 공생은 난처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이 천검종에서 소도도의 위치를 누가 모를까. 공생이 아무리 무모하다 해도 소도도와 정면으로 대결할 생각은 없었다.
“공생, 소도도가 싸움을 원하니 한번 싸워 주게. 모든 뒷감당은 우리 공자께서 하겠네!”
검동이 나직히 속삭였다.
궁주도 아첨하는 그 풍소우가 자신의 뒷배가 되어 준다는데, 소도도를 겁낼 이유가 사라지는 셈이다. 공생의 눈에 곧바로 독기가 어렸다.
“소도도, 붙어 보자!”
이에 소도도가 지지 않고 무대 위로 몸을 날렸다.
스으으…….
두 사람의 뒤로 영단경의 힘이 넘실거렸으나, 영단경 2단계의 공생에 비하면 소도도는 하잘것없는 수준으로 보였다.
그러나 소도도는 물러서지 않고 곧장 공생에게 돌격해, 힘껏 맞부딪쳤다.
쿵!
무대가 위태롭게 흔들렸다. 그나마 진법이 있어 충격파를 견딘 듯했다.
“반절 영단이라더니, 참으로 약하군!”
자욱하게 일어난 연기 너머로 공생이 코웃음을 쳤다.
“죽이는 것도 3합이면 충분하겠구나. 패배는…… 1합만으로도 충분해!”
소도도의 수준을 가늠한 공생이 영단경의 힘을 퍼부었다.
자욱한 연기 위로 솟구치는 소도도의 모습이 언뜻 보였다가, 쿵 소리와 함께 그대로 바닥을 나뒹굴었다.
푸우……!
입에서 피분수를 뿜어낸 소도도의 가슴에는 손바닥 자국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공생은 단 일격으로 소도도를 나가떨어지게 한 것이다.
“쓰레기보다도 못한 놈이구나!”
이를 지켜본 풍소우의 눈에 비웃음과 경멸의 시선이 걸렸다.
“소 사형……!”
강해와 엽추월이 허겁지겁 달려와 소도도를 일으켜 세웠다.
“소도도, 네놈이 졌다. 이제 운청휘를 올려보낼 차례가 아닌가?”
무대 위에서 여유롭게 서 있던 공생이 일부러 큰 목소리를 냈다. 그러자 모두의 시선이 눈을 감고 앉아 있는 운청휘에게 향했다.
“헤헤, 언제까지 자는 척을 할 수 있을까!”
운청휘의 모습은 평화로웠으나, 다른 이들의 눈에는 자는 척하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운 사형께 도전하려면 우리를 넘어라!”
강해와 엽추월이 투지를 불태우며 선언하곤, 소도도를 부축해 자리로 돌아갔다.
“네놈들 두 명은 나를 모욕하려는 게냐?”
그들의 말에 공생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소도도는 종주의 제자고 절반이나마 영단경에 도달했으니 이 무대에 설 자격이 있었지만, 강해와 엽추월은 내문 제자에 불과했다. 이 자리에 함께 있는 것조차 마음에 들지 않은데, 운청휘를 감싸고 나서니 공생의 자존심도 꽤나 상한 터였다.
“저들이 운청휘를 대신해 싸운다고 하니, 받아들이게. 공생, 자네에게는 일 다경도 걸리지 않는 일이잖나?”
검동도 마찬가지였는지 불쑥 입을 열었다.
“그리고 이 대결에 명확한 규정은 없다네.”
이어지는 말에 연회장에 있던 사람들의 안색이 변했다. 공생도 눈치 빠르게 검동의 말을 알아들었다.
이 자리에서 강해와 엽추월을 죽여도 문제가 되지 않을 터, 그렇다면 어물어물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그가 강해와 엽추월을 향해 기세등등하게 외쳤다.
“강해, 엽추월. 너희는 각각 선천경 4단계와 5단계렷다? 이렇게 하지. 네놈들을 핍박했다는 오명을 쓰고 싶지 않으니, 나도 선천경 5단계로 무위를 낮추겠다. 너희는 합동하여 덤비거라!”
서로를 바라본 강해와 엽추월은 곧바로 무대 위로 몸을 날렸다. 세 사람은 이렇다 할 말도 없이 곧바로 공세를 펼쳤다.
다만 강해와 엽추월은 정면으로 부딪칠 생각은 없었기에, 공생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재빠르게 공격했다가 멀어지곤 했다.
공생은 여유로운 표정으로 그들의 공격을 막아내었고, 이따금 피식 웃어 보였다.
비록 무위를 선천경 5단계로 내렸다고 하나, 영단경에 이르기까지 쌓아온 전투 경험과 무공 실력까지 사라지진 않았다. 같은 단계라 할지라도 그들을 까마득히 뛰어넘고 있었다.
“진 장로, 운 형제는 언제쯤 일어나겠는가?”
한 줌의 단약을 복용한 소도도가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그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지만, 몸을 가눌 순 있는 듯했다.
“이미 사부님께서 말씀하신 방법으로 깨웠으니, 일 다경도 걸리지 않을 걸세.”
진관해가 어두운 안색으로 답했다.
그는 내심 운청휘의 영혼이 빠져나가 있음을 알아차린 상태였다.
“일 다경? 저 둘은 그마저도 못 버틸 거네!”
소도도의 안색도 급격히 어두워졌다.
“무위를 낮췄어도 저자의 전투 경험은 강해와 엽추월을 까마득하게 추월하네. 눈 깜짝할 사이에 패할 게 분명해!”
“네놈들은 이미 한 사람이 10번 공격했으니, 이제는 내 차례구나!”
그때, 공생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목청을 높였다.
“풍옥(風獄)!”
공생이 손을 휘두르자, 풍 속성 오행의 힘이 단번에 두 개의 우리가 되어 삼십여 장 떨어져 있던 강해와 엽추월의 몸을 둘러쌌다.
그들이 깨트리고 나올 틈을 주지 않겠다는 듯, 공생의 손이 분주히 움직였다. 곧이어 화살 형태로 모양을 잡은 바람이 수백 개나 형성되더니, 두 사람을 향해 쏜살같이 날아갔다.
푸슉!
섬뜩한 파육음이 연달아 울렸다. 무대 아래에 있는 이들의 눈동자에는 셀 수도 없이 관통당한 강해와 엽추월이 비칠 뿐이었다.
“썩 내려가거라!”
공생이 냉랭하게 말하며 강해와 엽추월을 무대 아래로 떠밀었다.
진관해가 황급히 그들을 받아 오행의 힘을 밀어넣었으나, 겨우 숨만 유지할 뿐 정신이 돌아오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부상이 너무 심각했다. 육신에 뚫린 무수한 구멍은 보기에도 참담했고, 이로 인해 체내의 경맥과 내장의 구 할이 파괴되었다. 말 그대로 목숨이 경각에 달한 상황이었다.
“다음은 진 장로, 자네가 나설 텐가?”
공생이 도발적인 시선을 보내며 진관해를 조롱했다.
진관해의 눈에 포악한 살기가 깃들었으나, 공생에게 등을 돌리고 있던 터라 아무도 보지 못했다.
별안간 서서히, 주변의 온도가 낮아지기 시작했다.
많은 이들이 몸서리를 칠 무렵엔, 눈을 뜬 운청휘가 아무 일도 없다는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있었다.
그는 강해와 엽추월에게 다가가 영라 반지에서 꺼낸 단약 두 알을 복용시켰다.
“저들의 목숨은 반드시 살려 놓거라. 사소한 일이 끝나면 그들을 구해 주마. 그리고 도도, 이 단약을 먹거라.”
진관해와 소도도에게 지시를 내린 운청휘는 단약을 소도도에게 건넨 후 고개를 돌렸다.
“나와 싸우고 싶다?”
조용하지만 무게 있는 음성이 울려 퍼졌다. 그가 두세 발짝 걸어 나가자, 순식간에 무대 위에 도달하니 한 걸음에 백여 장을 걷는 듯했다.
“축지법인가? 어느 정도 능력이 있구나!”
공생의 눈빛은 여전히 운청휘를 도발하고 있었다.
“자신만만하구나. 다만 착각하고 있군. 나는 싸우러 온 게 아니라, 너를 죽이러 왔다.”
평온한 그 목소리는 공생의 공격을 불렀다. 무수한 영단의 힘이 운청휘에게 날아들었다.
운청휘는 어떠한 오행의 힘도 쓰지 않고, 그저 주먹을 휘둘렀을 뿐이다.
펑!
쇄도하던 영단의 힘은 덧없이 흩어지고, 공생의 어깨에 일권이 작렬했다.
콰득!
공생의 어깨가 부서지는 소리가 났지만 운청휘의 공격은 멈추지 않고 반대편 어깨에도 쏟아져 들었다.
“아……!”
눈을 부릅뜬 공생이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비명을 내질렀다.
“남에게 이용당한 줄도 모르다니, 어리석군. 더욱이 이런 실력으로 나를 죽인다니.”
서릿발보다 차가운 목소리가 들린 후, 운청휘는 공생의 멱살을 잡아 허공에 내던졌다.
쾅!
그가 바닥에 닿기도 전에, 운청휘가 일으킨 오행의 힘이 그의 몸을 산산이 조각내었다.
주변에 기이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운청휘가 무대에 올라가고 일 다경도 되지 않아, 내내 공생을 압도하더니 이제는 그의 몸을 폭발시키기까지 했다.
“내가 공생을 일격에 죽였으니, 너의 공자라는 자가 내게 선물을 준다더냐?”
무대 위에 자리잡은 운청휘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그가 검동을 바라보며 말했다.
“건방지군. 우리 공자님과 인연이 그리 쉽게 닿을 줄 아는가! 공생을 죽였다고 해도 우리 공자님의 눈에 들 자격은 없다!”
검동이 냉랭하게 말했다.
“그래? 어찌해야 네 공자의 눈에 들겠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