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선제귀환-190화 (190/430)

제190화

궁우신은 더 이상 깃발을 쥐지 못하고 그대로 놓치고 말았다.

이때 운청휘가 번개같이 몸을 날려 검은 깃발을 움켜쥐었다!

그 순간, 바다처럼 웅장한 기가 운청휘의 몸 안으로 밀려들어왔다.

검은 깃발은 일종의 법보로, 궁우신의 낙인이 찍혀 있었지만 이를 지우는 건 지금의 운청휘에게는 손쉬운 일이었다.

그는 찰나의 순간에 궁우신의 낙인을 지우고 자신의 의지를 밀어넣었다.

“봉천진지진!”

운청휘는 검은 깃발을 흔들어 봉천진지진으로 궁우신을 가두었다.

이에 멈추지 않고, 검은 깃발을 통해 신식을 천검종과 서북쪽 황무지까지 확대했다.

“여기 있었군!”

운청휘가 돌연 안색을 바꾸었다. 흡혈 박쥐족의 성지, 그곳에 채아의 영혼이 있었다.

운청휘는 검은 깃발을 휘둘러 자신을 영혼 앞으로 이동시켰다.

-청휘 오라버니!

채아의 영혼이 운청휘를 봤고, 기쁨에 겨워 웃었다.

“채아, 육신으로 돌아가거라!”

강제로 채아의 영혼을 육신으로 밀어넣은 후, 운청휘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의 신식은 믿을 수 없는 기운을 감지했다.

채아가 머물던 대나무 누각에서도 그녀의 영혼이 느껴지고 있었다.

이번의 채아는 너무나도 슬퍼 보였고, 누각 구석에 웅크려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아……!”

별안간 운청휘가 포효하며 머리를 감싸쥐었다.

“채, 채아의 영혼이 흩어지다니!”

-청휘 오라버니!

그는 곧바로 대나무 누각 안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웅크려 있던 채아의 영혼이 눈물 자국이 선연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세상의 모든 생령, 즉 영혼은 칠백으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에는 기쁨, 분노, 슬픔, 두려움, 사랑, 미움, 욕망이 해당했다.

이 칠백이 모인 영혼은 온전한 영혼의 형태를 이룰 수 있었다.

흡혈 박쥐족의 성지에서 발견한 채아는 ‘기쁨’의 채아였기에 운청휘와 마주해도 기뻐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누각에서 발견한 채아는 ‘슬픔’이었기에 운청휘를 보고도 눈물을 멈추지 못했다.

“말도 안 된다, 어찌 이럴 수가!”

운청휘는 고통스러워하며 연신 비명을 질렀다. 그의 두 눈이 분노와 슬픔으로 일그러졌다.

한 사람의 영혼이 칠백으로 흩어질 만한 상황이란 무엇인가? 말 그대로 혼비백산, 무척이나 놀라거나 두려움을 느껴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운청휘는 일단 채아의 ‘슬픔’을 육신에 넣고 계속해서 천검종을 신식으로 훑었다.

-정지가, 감히 청휘 오라버니를 천형대로 끌어들여? 네놈을 죽이고 말겠어!

그때, 천형대에서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채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채아는 온 힘을 다해 천형대 위에서 날뛰고 있었는데, 마치 그녀의 앞에 불구대천의 원수가 나타난 듯했다.

“채아야!”

칠백은 모두 제 본능을 따른다.

지금 채아의 ‘분노’는 운청휘를 위해 순수한 분노를 불태우고 있었다.

“육체로 돌아가거라!”

운청휘는 검은 깃발로 채아의 ‘분노’를 이끌어 육신으로 되돌렸다.

“남은 것은 두려움, 사랑, 미움, 욕망이로군.”

운청휘는 빠르게 이동했다. 신식은 눈 깜짝할 새에 범위를 넓혀가고 있었다.

-하지 마, 하지 마! 제발……!

성성의 전송진 위에서, 공포에 떠는 채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서워하지 말거라, 나다. 오라비가 왔다.”

운청휘는 침착하게 말했지만, 끓어오르는 슬픔을 숨기기 어려웠다.

-청휘 오라버니!

공포에 질린 채아의 ‘두려움’은 주춤거렸지만, 이내 운청휘에게 다가왔다.

“겁먹지 말아라. 이 오라비가 너를 무사히 데려다주마.”

채아의 ‘두려움’을 달래어 채아의 육신으로 되돌린 운청휘는 잠시 한숨을 내쉬었다.

“응?”

그때, 운청휘가 불현듯 삼천 장 상공까지 신식을 펼쳤다.

그곳에 채아의 ‘욕망’이 있었다.

운청휘는 급히 검은 깃발을 흔들어 자신을 채아의 ‘욕망’ 앞으로 보냈다.

눈앞에 나타난 채아는 실오라기 하나도 걸치지 않은 채 향긋한 향을 뿜고 있었다.

운청휘는 호흡을 멈춘 채 신식으로 환화시킨 옷으로 채아의 몸을 감쌌다.

-청휘 오라버니…….

얼굴이 붉게 상기된 채아가 운청휘에게 몸을 기울였다.

“오라버니, 은애하고 있어요. 오, 오라버니께서도 저를 원하지 않나요?”

그녀의 목소리가 낮게 깔릴 수록, 운청휘는 마음이 시큰거리며 아파왔다.

그는 곧바로 채아의 ‘욕망’을 다독였다.

“돌아가자꾸나, 채아.”

채아의 ‘욕망’을 육신에 밀어넣은 후, 운청휘는 다시 천검종을 샅샅이 훑었다.

그러나 아무리 신식을 펼쳐도, ‘사랑’과 ‘미움’을 감지할 수 없었다.

이 둘은 가장 중요한 근본이나 다름없었다.

‘사랑’이 온전해야 인간이 자비의 마음을 알고, 본능에 따를 수 있게 되며 지혜를 가진 생명의 축에 들 수 있었다. 이는 미움도 마찬가지였다.

“그곳은 깊이 찾지 않았는데…….”

문득 운청휘의 생각이 삼계동에 닿자, 그는 곧바로 깃발을 휘둘렀다.

삼계동은 텅 비어 있었지만, ‘사랑’과 ‘미움’이 남긴 흔적이 있었다.

“저승으로 떨어졌군!”

운청휘는 한순간 시름에 잠겼다. 삼계동의 끝은 저승과 맞닿아 있었다.

하지만 곧 그의 눈이 반짝이더니 몸에서 영혼이 빠져나갔다.

오라비로서 여동생을 위해 무엇을 못하겠는가? 그는 두 번째로 저승을 향해 발걸음을 내디뎠다.

저승의 하늘은 회색으로 우중충했고, 대지는 검은 구렁텅이와 같았다.

운청휘는 신식을 펼쳐 아래에서 떠드는 무수한 영혼들을 찾아냈다.

-마침내 저승의 불이 항복했군!

-그 여자, 너무 무서웠어. 저승의 불을 꺾은 것도 모자라 통로도 강제로 열고 들어왔잖아!

-하지만 저승의 불이 부리던 영혼들을 해방시켜 주지 않았나. 덕분에 진짜 저승으로 갈 수 있게 되었지.

-남은 영혼은 수십만이지만, 순서를 기다리다 보면 우리도 갈 수 있어!

-그래, 며칠만 있으면 우리 차례야!

그들의 수런거림에 운청휘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이염죽이 저승의 불, 천화를 얻었단 말인가?

그러나 이염죽의 일은 나중에 생각할 일이었다. 그는 일단 손을 휘둘러 백여 개의 영혼을 단번에 끌어당기고 그들에게 묻기 시작했다.

-똑같이 생긴 두 소녀의 영혼을 보았느냐?

운청휘가 직접 물었다.

-하, 한 시진 전쯤 이곳을 지나갔어요.

-나도 봤어요. 살아 있었을 때도 그렇게 예쁜 여인을 본 적이 없었지. 게다가 둘이 쌍둥이처럼 똑같더군요.

-하지만 뭔가에 심하게 놀란 모양이었어요. 계속 한 사람의 이름을 중얼거리던데…….

또 다른 영혼이 말했다.

-내 앞을 지나갈 때, 동시에 한 사람의 이름을 말했어요. 무슨 오라버니였지? 일염(一炎)이라고 했나.

아마 이 영혼은 채아의 ‘사랑’과 ‘미움’이 하는 말을 얼핏 들은 듯싶었다. 그러나 덕분에 운청휘는 채아의 ‘사랑’과 ‘미움’이 이 곳에 있음을 확신했다.

-그 소녀들이 어디로 갔지?

운청휘가 불길한 예감을 무시하며 물었다.

-저승의 입구로요!

-흥, 그 여인들은 당당하게 새치기를 하더군요! 줄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모양이야!

-하지만 불쌍하잖아. 얼마나 놀랐는지 같은 말만 반복하고 있으니, 불쌍해도 나도 모르게 길을 내주게 되더군요.

그 말에 운청휘는 영혼들을 풀어 주고, 전속력으로 저승의 입구를 향해 날아갔다.

수십만 리 너머에서, 이염죽의 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염죽이라면 단번에 채아의 ‘백’이 이상하다는 걸 눈치 챌 테지. 보통의 영혼이 아니니.

운청휘는 희망을 이염죽에게 걸었다.

-그녀가 채아를 막아 주길 바라야겠군.

운청휘는 성공거수의 몸을 남겨 삼계동을 지키게 하고, 영혼은 저승에서 채아를 찾게 두었다.

인간 운청휘는 천검종으로 돌아왔다.

“채아는 어떤가?”

운청휘는 소도도를 보자마자 물었다. 소도도는 아직도 깨어나지 못한 채아를 지키듯이 꽉 안고 있었다.

“좋지 않네.”

언제나 가볍던 소도도마저 이 순간에는 낙심하여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런가.”

운청휘는 짧게 대답하더니 곧바로 궁우신에게 날아갔다.

이윽고 검은 깃발을 휘두르니, 궁우신을 가둔 봉천진지진의 규모가 조금씩 줄어들기 시작했다.

“우…… 운청휘, 무엇을 하려는ㄴ 거지?”

궁우신이 겁에 질려 운청휘를 바라보았다.

“네놈을 죽이고 영혼을 뽑아 기억을 빼내겠다. 그 후엔 영혼을 완전히 소멸시켜 주마.”

운청휘에게는 그의 말이 들리지 않는 듯했다. 이미 그의 살기가 극에 달해 있었다.

“아……!”

얼마 지나지 않아 처절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그의 몸은 봉천진지진이 줄어들며 오는 압력을 견딜 수 없었다.

“사, 살려다오! 어혼성숙비전과 도심종마대법! 그것을 원하지 않느냐! 이를 넘기고 네, 네놈에게 영원히 충성하겠다. 그러니 살려 다오!”

궁우신의 목소리가 다급하게 울려 퍼졌지만, 운청휘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깃발을 가볍게 흔들었다.

그 순간, 진법이 압축되는 속도가 점점 더 빨라지더니…….

우드득!

진법 안에서 완전히 우그러진 궁우신의 숨이 끊어졌다.

운청휘는 이를 놓치지 않고 손을 내밀어 궁우신의 영혼을 잡아챘다.

영혼의 비명은 더욱더 참담했지만, 운청휘는 아랑곳하지 않고 신식을 펼쳐 그의 영혼에서 두 가지 무공을 뽑아내었다.

‘음? 천검종도 풍무극광이 만들었단 말인가? 봉천진지진도 풍무극광의 작품이었군. 저승에 인간이 침입하지 못하도록 막는 역할이라…….’

궁우신의 영혼에서 무엇을 보았던 것일까. 운청휘의 얼굴에 놀란 기색이 가득했다.

“이럴 수가…….”

운청휘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풍무극광 혼자의 힘으로 봉천진지진을 만들었다니, 그가 진선의 무위를 뛰어넘었단 말인가? 그러한 존재라면 단 한 번의 호흡으로도 모든 대륙을 소멸시킬 수 있겠군. 그가 3천 년 전에 천성대륙을 떠난 게 다행인지도.”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