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4화
아직 삼 할의 힘이 남아 있었으나, 이 힘마저도 눈 깜짝할 새에 소진되고 있었다.
푹! 촤악!
운청휘는 연거푸 검을 두 번 휘둘러 남은 두 무인을 베어 버렸다.
“떠오르거라!”
풍 속성 오행의 힘을 불러내어 겨우 허공에 뜬 운청휘가 숨을 헐떡였다.
이번 전투에서 얻은 손실이 너무나도 컸다.
적 천 명을 죽이는 대신 아군 팔백 명을 희생한 것과 비슷한 상황이었다.
물론 이 전투에서 얻은 성적은 눈부셨다. 선천경 5단계의 무인이 현경 2단계의 무인 다섯 명을 상대로 목숨을 거두었으니, 어찌 찬란하다고 하지 않을까!
물론 운청휘는 새로운 몸이 있기 때문에 배수진을 치는 방식으로 대적할 수 있었지만.
한편 진관해 쪽도 고전하고 있었다.
비록 마혈석원진이 있다곤 하나, 진을 완벽하게 습득하지 못했기에 일격에 상대를 죽이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치열한 전투로 그는 여기저기 부상을 입었지만, 상대의 상황은 더 심각했다.
군성문의 장로는 머리를 풀어헤치고 있었고, 팔을 하나 잃은 채 지혈하기 급급했다.
운청휘는 개입하지 않고 그들을 지켜보았다.
저런 전투는 지금 자신의 수준으로 개입할 수 없었다.
“이럴 수가, 풍가의 다섯 객경들이 모두 죽다니……!”
진관해와 군성문의 장로가 마침내 운청휘 쪽을 돌아보았다.
이윽고 두 사람 모두 놀랐지만 진관해의 놀라움이 더 컸다.
운청휘는 그저 선천경 5단계의 무위가 아니던가. 그가 현경 무인을 모두 해치우다니?
“보아하니 그 기술을 써야겠군.”
군성문의 장로가 눈에 독기를 품었다. 부득이한 경우를 제외하면 쓰고 싶지 않은 기술이었으나, 지금은 이것저것 따질 겨를이 없었다.
“문주를 초대하옵니다!”
군성문의 장로가 별안간 손에 쥔 옥패를 부수며 크게 외쳤다.
다음 순간, 허공에 소용돌이가 치더니 마치 공간이 소용돌이에 휩쓸려 들어가는 듯했다.
반경 삼천 장의 하늘도 어둡게 물들며, 하늘의 위엄 같은 두려운 기가 소용돌이 안에서 휘몰아쳤다.
“소인 육호(陆虎), 문주님을 뵈옵니다!”
군성문의 장로 육호가 소용돌이 앞에 무릎을 꿇고 경외 어린 목소리로 외쳤다.
곧, 소용돌이 안에서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는데, 본체가 아니라 그림자인 듯 어딘가 비현실적인 모습이었다.
그의 눈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을 가볍게 훑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진관해는 머리가 터져 죽는 착각에 휩싸였다. 그의 무위로도 이러한 기는 감당해내기 힘들었다.
이때는 운청휘마저도 선제의 위엄을 은밀히 동원하며 상대의 기를 막아내야 했다.
“인왕경!”
상대의 무위를 알아차린 운청휘가 중얼거렸다.
인왕경. 말 그대로 사람 중의 왕을 뜻하는 경지였다.
“저승의 주인도 인왕경의 무위인데, 군성문의 문주가 인왕경이라니!”
운청휘가 중얼거렸고, 전에 없이 무거운 표정이 되었다.
“그저 그림자일 뿐인데도, 공적(空寂) 9단계의 무인과 같은 기로구나…….”
무인의 등급은 성경으로 시작하여, 월경, 양경, 선천경, 영단경, 현경, 영변경이 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 영변경 위의 경지가 공적 9단계이며, 더 위로는 인왕경을 두고 있다.
이것은 왕으로 봉해진 경계다.
이미 공간을 찢고 분신을 내보낼 수 있으며, 생각만으로 산천을 누비고 천지를 멸할 수 있는 경지였다.
-사, 사부님. 저, 저자는 군성문의 문주 임천옥(林千狱)입니다. 대, 대륙 최고의 강자이니, 저희라고 해도 무리입니다!
운청휘에게 전음을 전달하는 진관해의 목소리가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묵직한 위엄이 모두의 몸을 짓누르는 가운데, 임천옥이 운청휘를 바라보았다.
“네놈은 본왕의 기에 눌리지 않는 게냐?”
본좌라고도, 짐이라고도 하지 않았다. 그저 왕이라고 할 뿐.
그러나 그 위엄만으로도 하늘을 휩쓸 듯했다.
“육진이 죽기 전, 본왕에게 소식을 보냈지. 네놈이 열여덟 가지 오행의 힘을 터득했다 하였느냐? 마침 본왕도 일기화삼청(一气化三清)을 터득했으니, 네놈의 몸으로 새 분신을 만들면 되겠구나.”
임천옥은 다른 이들을 신경도 쓰지 않고 단번에 운청휘를 붙들었다.
이때 진관해는 임천옥의 눈에 들지도 않았다.
아무리 영변의 노괴라 해도, 임천옥에게는 땅을 기는 벌레와 같은 하찮은 존재였다.
힘을 소진한 운청휘는 저항 한 번 하지 못하고 그대로 임천옥에게 붙들렸다.
“사부님……!”
진관해가 급히 운청휘를 붙잡으려 했으나, 이미 인왕경의 위엄에 눌린 그의 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다음 순간, 임천옥의 소용돌이로 끌려들어간 운청휘는 그대로 모습을 감추었다.
공간의 흐름이 열리고, 운청휘는 정신도 차리지 못하는 속도로 군성문을 향해 끌려가고 있었다. 거의 전송진을 타고 가는 듯했다.
‘내 오판이군. 설마 문주가 나설 줄이야! 지금 죽으면 검집과 영라 반지는 저자의 손에 넘어가게 된다!’
운청휘의 안색이 더없이 어두워졌다.
이미 진관해가 있는 곳에서 헤아릴 수 없이 멀리 떨어진 상황이다.
그는 독기를 품고 이를 악물었다.
‘강제로라도 그 기술을 써야겠군.
손에 쥔 검집이 운청휘에게 화답하듯 부르르 떨렸다.
“선제진해 제2식, 검쇄공간(剑碎空间)!”
운청휘가 급히 검집을 휘둘러 공간의 흐름을 베었다. 그 순간, 그의 칠공에서 피가 왈칵 쏟아져나왔다.
선제진해의 제2식을 사용하려면 최소 영변경의 무위가 되어야 하지만, 무리하게 사용한 반동이 온 것이다.
콰르르…….
공간의 흐름이 마치 소멸하는 듯한 폭발을 일으켰고, 운청휘는 숨을 헐떡거리며 열여덟 가지 오행의 힘을 자신의 뒤에서 방출시켰다.
공간의 흐름 너머에 나타난 한 줄기 흰빛을 향해, 운청휘는 거침없이 떠밀려갔다.
다음 순간, 운청휘는 공간의 흐름을 벗어났다.
그러나 그가 모습을 드러낸 곳은 삼천 장 허공이었다.
이때의 그는 비행할 여력이 없었기에, 그대로 추락하고 말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어렴풋한 의식 사이로 희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할아버지, 깨어날 수 있나요?”
한 소녀가 낭랑한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깨어날 수 있고말고!”
한 노인의 목소리도 들려왔다.
“부상이 심각하긴 하지만 회복 능력이 아주 탁월해. 사흘이 지났을 뿐인데 생기를 되찾지 않았니? 게다가 외상도 스스로 치유되고 있으니, 이리 되기 전에는 아주 강력한 무인이었을 게야.”
노인의 말에 소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것 같았다. 이어서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할아버지, 제가 그를 기련산(祁连山)에서 구했는데, 손녀의 부탁을 들어줄까요?”
“아이고, 안유(颜瑜), 무슨 고생이니…….”
노인의 긴 한숨이 이어졌다.
또다시 하루가 지나고, 운청휘는 드디어 의식을 완전히 회복했다!
그는 정신을 차리자마자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은인들과 통성명을 나누었다.
그들은 노인 묵해(墨海)와 손녀 묵안유(墨颜瑜)로, 기련산 자락에 살고 있었다.
그들이 사는 곳의 이름은 기련마을(祁连部落)이라 했다.
아흔이 넘은 묵해는 평생 마을 바깥으로 나가본 적이 없는 듯, 운청휘의 물음에 거의 대답하지 못했고, 운청휘는 이들에게 바깥의 이야기를 물어도 소용없음을 깨달았다.
운청휘는 무위가 회복되는 대로 마을을 떠나기로 하고, 몸의 회복에 전념했다.
그의 모든 부상이 나은 건 열흘 뒤의 일이었다.
“청휘 오라버니, 아침 식사를 가져왔어요!”
방 밖에서 소녀의 낭랑한 목소리가 들렸다.
운청휘의 은인인 묵안유였다.
운청휘가 방문을 열고 묵안유가 들고 있는 죽 그릇을 받아 천천히 몇 모금 마셨다.
그는 문 앞에서 서서 머뭇거리는 묵안유를 힐끔 바라보았다.
“안유, 뭔가 말하고 싶은 게 있느냐?”
사실, 묵안유는 며칠 동안 운청휘에게 무언가를 말하려다 말곤 했다. 무언가 도움이 필요한 듯싶은데, 막상 입이 떨어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운청휘는 기련 마을을 떠날 생각이었지만, 그전에 묵가에 은혜를 갚을 생각이기에 다정히 물었다.
“청휘 오라버니, 혹시 혼인하여 아이를 두셨나요?”
묵안유가 얼굴을 붉히며 물었다.
“푸……!”
별안간 운청휘가 입안의 죽을 뿜어냈다.
“아…… 아직!”
운청휘는 부끄러워하며 속으로 생각했다. 내가 이렇게 젊은데 결혼해서 아이를 낳은 사람처럼 보이는 걸까?
“그…… 그럼 청휘 오라버니, 나를 부인으로 삼아줄래요?”
묵안유는 큰 부탁을 하는 걸 알기에 머리가 땅에 닿을 기세로 몸을 숙였다.
운청휘는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고개를 저었다.
“미안하구나. 혼인은 하지 않았지만, 마음에 둔 이가 있다.”
“그렇구나…….”
묵안유의 눈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운청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리 뜬금없이 아내로 삼아 달라고 하면, 필시 무슨 연유가 있으리라. 결코 자신을 연모하는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묵안유가 몸을 돌려 가 버리자, 잠시 망설이던 운청휘는 몰래 그녀의 뒤를 밟았다.
기련 마을은 산을 끼고 형성되었고, 대략 천여 명의 인구로 구성되어 있었다.
마을 주민들 대부분이 수렵으로 생계를 꾸려나가는 보통의 소부족이었다.
운청휘가 의혹을 품었다.
족제비가 아무리 오래 묵어 둔갑할 수 있어도 악명이 자자한 영수가 되기에, 선계든 인간 세계에서든 그 인상이 좋지 않았다. 구전이며 신화에서도 그들을 사악한 존재로 묘사했다.
인간에 비유해서도 속이 시커먼 사람을 족제비 같다고 이를 정도였다.
“안유, 피 세 방울을 남기렴. 황대선께서 모습을 드러내면 너의 피를 통해 선녀가 될 자격이 있는지 판단할 것이야.”
제단 뒤에서 앙상한 노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노인은 검은 옷을 입고, 얼굴도 검은 복면으로 감싸 제대로 된 생김새를 알 수 없었다.
인상적인 건 그에게서 고약한 악취가 난다는 점이었다.
운청휘는 신식을 펼쳐 노인의 정체를 꿰뚫어 보았다.
이 노인은 사람이 아니라 선천경의 족제비가 둔갑한 것이었다!
코가 매우 작고 입이 뾰족하며, 귀는 황색 털이 수북하니…… 참으로 추악한 모양새였다.
묵안유는 어딘가 절망한 표정으로 노인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노인이 은침으로 그녀의 손가락을 찔러 피 세 방울을 짜냈다.
“자, 이제 떠나거라. 사흘 후 내가 결과를 알려 주마.”
노인이 축객령을 내리자, 묵안유는 불안한 얼굴로 인사를 내리고 돌아섰다.
묵안유가 떠난 후, 노인은 제단 뒤로 돌아가더니 옥석을 하나 내놓고 그 앞에 공손히 좌정했다.
이는 전송 옥석으로, 일정 범위 내에 짝이 되는 옥석을 지닌 이와 소통할 수 있는 법보였다
“주인님, 소인 소녀 10명의 피를 수집했습니다. 당신께서 강림하실 때까지 기다릴까요, 아니면 소인이 송부할까요?”
노인이 공손한 말투로 전송 옥석을 향해 말했다.
“내가 지금 위에서 오신 귀한 손님을 접대하고 있으니, 자네가 보내게나.”
잠시 후, 전송 옥석에 목이 쉰 목소리가 들렸다.
“네, 주인님!”
노인은 공손하게 말하더니 곧바로 몸을 날려 기련산의 중심부로 향했다.
운청휘는 추격하는 대신 그 노인에게 몰래 낙인을 새겨 두었다.
그 후 운청휘는 묵해의 집으로 돌아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방에서 가부좌를 틀고 수련에 전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