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5화
황혼 무렵, 마당에서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려왔다.
“축하드립니다, 묵 어르신. 안유가 황대선의 눈에 들면 선녀가 될 것입니다!”
“선녀가 되지 못해도 황대선의 첩이 되면 누군들 묵 어르신을 존경하지 않겠습니까!”
“묵 어르신, 내가 기련 마을의 촌장으로서 마을 사람들을 대표해 감사를 드리오! 안유가 부디 덕담을 하여 내 아들을 선문에 들게 해 주면 소원이 없겠소.”
그들의 언사를 들어보니, 기련산 부근의 마을은 매년 황대선에게 제물을 바치는 듯했다.
진상품은 금은보화나 수렵물, 귀한 약도 아닌, 혼인하지 않은 소녀였다.
일단 소녀가 간택을 받으면 3년간은 황대선의 보호를 받는다고 했다.
만일 간택받지 못하면 그 마을에는 역병이 돌아 무수한 사람들이 죽는다는 말까지 들려왔다.
“이상하군.”
운청휘는 무언가 의문점을 떠올린 듯 미간을 좁혔다.
“바깥에 있는 이들은 보통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무인들도 성경 단계에 불과해.”
열흘간 지내면서 묵해와 묵안유만을 만났고, 그들은 보통 사람이기에 그리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마을 사람 대부분이 무위가 없는 건 다소 기이하게 느껴졌다.
이곳의 천지 영기가 혈살군의 두 배 이상이라, 천부적으로 타고났다면 월경의 무인도 될 수 있을 터였다.
그러나 정작 밖에 있는 이들은 성경의 단계에 그치니, 의혹이 생기지 않을 수가 없었다.
‘자질은 나쁘지 않으니, 최소 양경까지 수련해 볼 수도 있을 터인데…….’
운청휘는 기련 마을을 벗어나, 마음 속의 의문을 풀고자 했다.
조금 걷고 있던 참에, 그의 신식에 이상이 감지되었다.
운청휘는 곧바로 기련산의 중심부까지 날아들었다.
‘선천경 족제비의 몸에 낙인을 찍었으니, 어딜 가든 알아차릴 수 있다.’
기련산 안으로 만 리 가까이 들어가니, 그의 신식이 무수한 궁전과 저택을 발견했다.
그 안에는 무수한 영수들이 살고 있었는데, 대부분이 족제비였다.
선천생령이 대략 500여 마리였고, 영단경이 100여 마리에 달했다.
반절 현경이 30여 마리, 현경이 4마리. 심지어 반절 영변경과 영변경도 한 마리씩 있었다.
신기하게도 영변경의 영수는 족제비가 아니라 새였지만.
“헤헤, 사흘만 지나면 일 년에 한 번 있는 풍년이구나!”
“기련산 근처의 수천 개의 마을을 매수한 건 정말 탁월한 선택이었어! 수천 명이 넘는 소녀들을 공물로 받고 있지 않나!”
“노조께서 즐기시고 남은 것은 하인들에게 주시는 것이지!”
“쯧쯧, 반절 현경과 현경의 장로들이 부러워. 그들은 매년 어린 것들을 맛볼 수 있잖아. 우리는 그저 그들이 놀고 남은 것들만 가지잖아.”
“헤헤, 그냥 만족해. 우리는 어쨌든 영단경이잖아. 선천생령들도 우리가 놀고 남은 것들을 가지잖아. 안 그래?”
신식을 통해 영단경 족제비 몇 마리의 대화를 들은 후, 운청휘의 눈매가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이곳 기련산은 족제비족이 통치하고 있었으며, 기련산에 뿌리내린 마을은 그들의 식량 창고나 다름없었다!
‘음? 사람들의 기척? 갇혀 있군.’
지면에서 삼백 장 아래, 지하 감옥에 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갇혀 있었다.
성별은 다양했는데, 모두 발가벗겨진 채였다.
개중에서도 기운이 있는 남자들은 악다구니를 쓰고 있었다.
“황대선은 무슨, 이들은 흉수나 다름없어!”
“백양마을의 촌장 아들로 태어나 고생 끝에 선문에 왔거늘, 선문은커녕 족제비 우리였구나!”
족제비들이 선천생령에 도달하여 변신하게 되면, 그들의 심미안은 차츰 인간 쪽으로 기울어진다.
그러니 남녀 족제비는 서로가 무척 추하게 보일 것이고, 자연스레 인간에게 눈을 돌리게 되었다.
이곳에 갇힌 남녀의 구 할은 그들의 욕구를 푸는 용도로 쓰였다.
운청휘의 마음속에 분노가 솟구쳤다.
다른 몸이 이곳에 있어 융합할 수만 있다면, 곧바로 이 자리에서 족제비족을 멸망시키고도 남았다.
인간을 지배하다니, 운청휘가 용납할 수 있는 선을 넘었다.
“후……!”
운청휘는 깊이 심호흡을 하고 화를 억지로 참으며 물러났다.
머릿속에 대진이 어른거렸다.
돌아가서 재료를 구하는 즉시 포진을 하여 족제비들의 씨를 말릴 작정이었다.
운청휘가 기련 마을로 돌아오는데, 묵해와 묵안유의 집에 몰려 있는 사람들이 수천 명에 달해 있었다.
그러나 이전처럼 축하를 위해 모인 인파가 아니라, 모두 성을 내고 있었다.
“묵해, 묵안유, 우리 기련마을은 외부인을 들이지 않는 게 규칙이거늘, 감히 외부인을 대려와?!”
“이는 황대선이 정한 규칙이다! 네놈들이 외부인을 구했다는 소식이 황대선의 귀에 들어가면 마을 전체가 화를 입는다고!”
“안유가 선녀가 되면 잘 보일 생각이었는데, 이제 보니 안유는 희망이 없겠구나!”
“촌장님, 일단은 안유를 잡아서 사흘 후에 안유가 선택되지 않는다면 죽입시다!”
“만약 그녀가 선택되면 우리는 황대선에게 이 일을 말해서 구체적인 처리를 맡깁시다!”
“묵해는 이 자리에서 죽여 마을의 다른 사람들에게 경고해야 합니다!”
“할아버지, 여러분, 우선 진정하세요!”
그때, 짐승 가죽옷을 입은 약관의 청년이 손을 흔들며 큰 소리로 외쳤다. 그는 송경서(宋轻书)라는 청년으로, 기련 마을 촌장의 아들이었다. 이변이 없다면 차기 촌장이 될 사람이기에, 자연히 사람들은 그를 주목했다.
“일단 안유는 잡아 두고, 황대선이 사흘 후 사람을 보내면 그때 보내면 됩니다. 묵해는 이 자리에서 죽여야 하는 것도 맞지요.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그 외부인을 찾아내 진압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모든 사람이 송경서의 말에 찬성했다. 그러자 송경서가 두 사람을 돌아보았다.
“안유, 운청휘라는 외부인을 기련산에서 구해왔다고? 그럼 어디에 있는지도 말해야지.”
묵안유는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다.
그녀가 운청휘를 구한 일은 묵해 외에는 가장 친한 친구들만 알고 있었다.
한데 어찌 온 마을 사람들이 이 일을 다 알고 있단 말인가? 가슴속에 배신감이 피어올랐다.
유일하게 위안이 된 것은, 이 자리에 운청휘가 없다는 점이었다.
‘적어도 오라버니의 목숨은 구했으니, 다행이야.’
묵안유는 속으로 생각하며 한편으로는 절망에 빠져들었다.
‘만약 청휘 오라버니와 혼인했다면 그 신들린 척하는 황대선의 간택은 피할 수 있었을 텐데…….’
“촌장님, 경서 오라버니. 안유는 선녀가 될 자격을 잃었어요. 차라리 제가 안유를 대신해서 가는 게 어떨까요?”
그때, 소녀 한 명이 불쑥 나섰다.
십대 후반으로 보이는 소녀는 꽤 예쁜 얼굴에 푸른 무명옷을 입고 있었다.
곧장 걸어나온 소녀는 묵안유를 향해 차가운 시선을 보냈다.
“안유, 너를 자매처럼 생각했는데 마을을 배신하다니! 이제부터 나 황금연(黄金燕)에게 너 같은 자매는 없는 걸로 생각하겠어!”
묵안유는 황금연을 올려다봤다.
그녀의 두 눈에 서러움과 분노가 가득했다. 황금연은 그녀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운청휘를 구했다는 소식을 퍼트린 소녀였다.
“황금연, 우선 물러나라. 일단 운청휘의 행방을 알아본 후 다른 일을 의논하겠다.”
송경서는 일단 황금연을 물러나게 한 후, 묵안유를 바라보았다. 그의 두 눈에 살기가 등등했다.
“안유, 만약 할아버지를 살리고 싶거든 어서 운청휘의 행방을 말해. 그렇지 않으면 이 자리에서 네 할아버지를 죽이겠어!”
“나를 찾고 있었더냐?”
별안간 운청휘의 담담한 목소리가 울리더니, 허공에서 뚝 떨어진 듯 묵안유와 묵해 앞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네놈이 운청휘냐?”
난데없는 출현에 송경서의 동공이 살짝 움츠러들었다.
그는 성경 9단계의 무인으로, 기련 마을에서는 가장 뛰어난 무인 중 한 명이었다.
다만 그의 무위로는 감히 운청휘의 실력을 헤아리지 못하니, 마음 속에 작은 불안이 피어올랐다.
그가 은밀하게 아버지에게 눈짓을 보냈다.
촌장이 신호를 알아차리고 손에 단도를 든 채 묵안유와 묵해의 뒤로 접근했다.
“운청휘. 우리 기련마을은 외부인을 환영하지 않는다. 네놈은 무슨 꿍꿍이로 기련마을에 들어온 것이냐?”
운청휘는 묵묵히, 멸시하는 눈빛으로 송경서를 바라볼 뿐이었다.
송경서의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대답하지 않겠다? 그럼 원망하지 마라. 먼저 네놈을 사로잡아 고문을 가할 테니! 참, 저항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그렇지 않으면 네 생명의 은인들까지 고통스러워질 테니까!”
송경서가 말을 마치고 급히 그의 아버지를 바라봤다.
“아버지, 묵안유와 묵해를 데려가세요. 소자가 운청휘를 사로잡는 과정에서 감히 반항한다면, 그들을 죽여 주세요!”
“걱정하지 말거라. 묵안유와 묵해는 사사로이 외부인을 마을로 데려왔으니, 어차피 엄벌에 처할 생각이었다!”
송경서의 아버지인 촌장이 서둘러 대꾸했다.
그는 또 다른 사람들과 함께 묵안유와 묵해를 붙들고, 목에 비수를 들이대고 있었다.
촌장과 그의 일가가 묵해와 묵안유를 제압하자, 송경서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이제는 다 잡은 먹잇감이었고, 승리는 그의 코앞에 있는 듯했다.
촌장의 가족 중 한 명이 짐승 가죽으로 엮은 밧줄을 들고 운청휘에게 다가왔다.
“조금이라도 반항하면 묵안유와 묵해는 네놈 때문에 죽는 거다!”
송경서가 의기양양하게 소리치는 것을 신호로, 밧줄을 든 자가 운청휘를 묶으려 했다.
그러나 밧줄은 운청휘에게 닿기도 전에 푸른 불꽃에 휩싸여 순식간에 잿더미로 화했다.
그 순간, 송경서의 안색이 파랗게 질렸다.
제단을 지키는 노인도 이처럼 손끝 하나 대지 않고 물건을 없애는 수단을 보였는데, 지금 그의 눈에는 운청휘와 노인이 동급으로 보인 터였다.
펑!
운청휘는 잽싸게 몸을 날려 송경서를 걷어찼다. 얼이 빠져 있던 송경서는 그대로 날아가며 입에서 피를 한 움큼 뿜어내었다.
“서, 설마…… 내 영해(灵海)를 폐한 거냐?”
운청휘는 단순히 발길질을 한 게 아니었다. 송경서의 눈에 공포와 절망이 어렸다.
그는 비틀거리며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그의 눈동자가 데굴데굴 구르더니 촌장에게 향했다.
“아버지, 묵해를 죽여 버려요! 어서요!”
송경서의 떨리는 시선은 운청휘에게도 향했다.
“운청휘, 멈추는 게 좋을 거야. 생명의 은인들이 네놈 때문에 죽는 꼴을 꼭 봐야겠어?”
“날 황대선에게 바쳐 한 자리라도 얻어보고 싶었더냐?”
마침내 입을 연 운청휘의 목소리에는 경멸하는 기색이 가득했다.
성인 남성이 황대선의 휘하에 들어가면 득도는커녕 여자 족제비의 노리개가 되건만, 눈앞의 송경서는 헛된 기대에 부풀어 있지 않은가.
“황대선은 모르는 게 없고, 못하는 것이 없으니, 선인이 아니고 뭐겠냐! 황대선의 휘하로 들어갈 수만 있다면 나 송경서도 선인이 되는 건 꿈이 아니다!”
송경서는 악에 받쳐 소리를 질러 댔다.
“미련한 놈이로군.”
더 이상 그와 말을 섞기 싫었던 운청휘는 가볍게 손을 내저어 오행의 힘을 방출했다.
퍼억!
그 한 번으로, 송경서의 몸은 조각 난 고깃덩이가 되었다.
“겨, 경서야!”
아들의 죽음을 목격한 촌장의 얼굴이 시퍼렇게 질렸다. 이윽고 분노가 치민 그는 손에 든 비수를 묵해에게 찔러넣으려 했다.
그러나 비수가 묵해의 목에 닿기도 전에, 비수를 든 촌장의 손이 바닥으로 툭 떨어지고 말았다.
눈 깜짝할 사이, 이어진 오행의 힘은 촌장의 가슴을 꿰뚫었다.
촌장은 비명 한번 질러 보지 못하고 숨이 끊어져 허물어졌다.
사람들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파악하지조차 못했을 때, 운청휘가 가볍게 손을 휘둘렀다. 그에 황금연이 밧줄에 묶인 것처럼 그대로 운청휘의 손아귀로 빨려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