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8화
대외적으로는 황대선이라는 별칭을 내세웠지만, 족제비의 이름은 황동래였다.
지금 그의 얼굴은 하얗게 질렸고, 중병을 앓는 늙은이처럼 기운이 죄다 쇠해 있었다.
“그건 공작 왕족의 계승자와 관련이 있는 건가?”
붕비가 무언가를 추측하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소주, 송구하오나 소인은 최소 하루를 쉬어야 회복할 수 있습니다. 하루만 더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황동래가 헐떡거리며 붕비에게 말했다.
“기다려 주마!”
붕비가 고개를 끄덕였지만, 눈에는 냉기가 돌았다.
“내일도 성공하지 못하면, 정신력이 더 깊은 요족을 찾아가겠다. 그리되면 네 처지가 어떻게 될지 말하지 않아도 알겠지?”
“소, 소인은 최선을 다해 소주의 연화를 돕겠나이다!”
황동래가 깜짝 놀라 다급하게 무릎을 꿇었다.
이 공작 알은 붕비가 상고 전쟁터에서 찾아낸 것으로, 이전에 사라진 족장이 입적하기 전에 태어난 게 확실했다.
왕의 핏줄을 이은 공작 알은 공작족에게 있어 큰 의미를 지녔을뿐더러, 모든 이족이 탐내는 물건이기도 했다.
그리하여 붕비는 알을 손에 넣은 뒤 공작족에게 돌려주지 않았고, 대붕족에도 비밀로 하여 이곳에서 연화할 작정이었다.
만약 알을 가지고 있는 것을 들키면, 그는 사방에서 압박을 받을 터였다.
“자네가 인간 소녀를 많이 길렀다던데?”
별안간 붕비가 화제를 돌렸고, 그의 눈이 게슴츠레한 빛으로 번뜩였다.
붕비의 비위를 맞출 기회가 아닌가! 황도래는 속으로 기뻐하며 얼른 아뢰었다.
“소인이 오늘 신행 대열을 보냈는데, 반 시진에서 한 시진 사이에 돌아올 것입니다. 수백 명의 인간 소녀가 올 테니, 소주께서 마음껏 고르십시오.”
황동래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어떤 소녀이든 소주께서 만족하시리라 자부할 수 있습니다!”
붕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방을 하나 내어 주게. 인간 소녀들은 도착하는 대로 내가 머무르는 방에 보내 주고.”
“네, 소주!”
몸을 일으킨 황동래는 굽신거리며 앞장섰다.
“소주, 소인이 안내하겠습니다!”
그들은 희희낙락하며 밖으로 향했다.
공작 알을 도둑맞는다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는 게 분명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곳은 족제비 소굴의 최심부이자 지하로 삼백여 장을 더 들어와야 하는 장소였다.
황동래의 허가 없이는 어떤 족제비도 출입이 금지된 곳이었다.
더불어 이곳에 침입자가 있다면, 붕비가 가장 먼저 알아차릴 수 있었다. 겹겹이 진을 쳐 놨기 때문이다.
운청휘는 족제비 소굴로 잠입하며 기척을 완전히 죽였다. 그는 신식을 펼쳐 순찰대 한 무리를 피했고, 대전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다.
대전에 들어선 운청휘는 토 속성 오행의 힘을 발휘하며 지면을 부서뜨렸다.
순식간에 몸이 아래로 꺼져 들었는데, 삼십 장을 내려갔을 즈음 하나의 진법을 마주쳤다.
운청휘는 간단하게 신식으로 자신을 진법에 융화시켜 붕비의 진법을 통과했다.
이 각도 걸리지 않아, 운청휘의 몸은 공작 알 앞에 도착해 있었다.
공작 알 주변에도 겹겹이 진이 설치되어 있었으나, 운청휘는 신식으로 가볍게 진을 통과한 후 영라 반지에 알을 집어넣었다.
그대로 돌아서려는데, 뜬금없이 머릿속에 소도도가 스쳐 가는 게 아닌가.
운청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만약 소도도였다면, 공작 알을 훔치고 무엇을 했을까?
이윽고 운청휘는 땅에 글자를 새겨 두었다.
<황동래가 훔친 것이 아니다.>
밤이 깊어갈 무렵, 운청휘는 기련 마을로 돌아와 공작 알을 살피기 시작했다.
이리저리 살핀 끝에, 공작 알은 인완경의 공작이 환생한 알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뜻밖에도 귀중한 물건을 얻은 셈이다.
한편, 족제비 소굴에 머무르고 있는 붕비는 인내심이 다 닳아 있었다.
거의 한 시진을 기다렸건만 인간 소녀는커녕 아무도 자신의 방을 찾지 않았다.
마침내 싫증난 기색을 드러낸 그가 족제비를 시켜 황동래를 불러오라 명을 내렸다.
“뭐라고?”
그러나 황동래는 잠시 외출 중이었고, 그 보고를 받은 붕비의 눈에 노기가 어렸다.
붕비는 곧장 보고하는 족제비를 끌어당겨 무수한 조각으로 찢어 버렸다.
“당장 일각 내로 황동래를 본 소주 앞에 데령해라. 그렇지 않으면 이 소굴을 파괴하겠다!”
붕비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족제비 소굴을 뒤흔들었다.
붕비는 대붕족의 소주인 만큼 침착함을 길러왔으나, 이 순간만큼은 이상하게 초조하고 짜증이 나 있었다.
무언가가 잘못되어 간다는 느낌이 엄습했다.
“당장 움직이지 못해?!”
붕비의 목소리가 울리자, 족제비들은 부들부들 떨며 황급히 황동래를 찾아나섰다.
이윽고 붕비는 방을 벗어나 공작 알이 있는 장소로 향했다.
가는 도중에 확인하니 진법을 건드린 흔적이 없어 붕비의 짜증이 다소 가라앉았다.
그러나, 공작 알이 있던 자리에 도착한 순간.
붕비의 분노 어린 고함 소리가 족제비 소굴을 뒤흔들었다.
“아……!”
마침내 붕비는 엄습했던 초조함의 이유를 알았다.
공작 알을 도둑맞았고, 그의 직감이 이를 알아챈 것이다.
“황동래가 훔친 것이 아니다!”
바닥에 쓰인 글씨는 붕비의 성질을 더 돋울 뿐이었다.
그가 지상으로 폭주하듯 솟구치자, 그 여파로 대전이 부서져나갔다.
“죽어! 이 쓸모없는 것들, 다 죽으라고!”
폭주한 붕비가 손을 대는 곳마다 폐허가 되었다.
단숨에 백 마리의 족제비가 고깃덩어리가 되었으나, 붕비의 분노는 식을 줄 몰랐다.
쾅! 쾅! 쾅!
붕비가 연거푸 바닥을 내리치자, 면적이 삼백만 장이 넘는 족제비 소굴은 단번에 폐허가 되며 족제비들이 붕괴의 여파에 휩쓸렸다.
선천경 족제비들은 팔 할 이상이 죽거나 다쳤으며, 영단경의 족제비들도 절반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황동래 휘하의 현경 족제비 네 마리는 붕비의 폭주를 알아차린 순간 일찌감치 피신한 상태였다.
“지, 진정하십시오, 소주! 소인 왔나이다!”
멀리서 황동래의 다급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는 붕비가 이토록 분노하는 이유를 몰랐기에, 허겁지겁 해명을 늘어놓았다.
“소인이 보낸 신행 대열이 돌아오지 않아 가보던 참이었습니다. 소주께서 소인을 찾으셔서 급히 돌아왔습니다.”
붕비는 대답하는 대신 황동래의 목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몸을 날렸다.
수십만 장의 거리였지만, 그는 눈 깜짝할 새에 황동래의 눈 앞에 살기등등한 모습을 드러내었다.
황도래가 입술도 달싹이지 못하는데, 곧바로 붕비가 그의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당장 공작 알을 회수해 와! 그렇지 않으면 죽이겠다!”
붕비가 으르렁거리듯이 말하는데, 그에게서 주체할 수 없는 살기가 넘실거렸다.
운청휘가 공작 알을 연화시킬지, 지켜볼지 망설이는 사이.
별안간 ‘빠각’ 하는 파열음이 들려왔다.
그 소리에 고개를 돌린 운청휘는 알의 표면에 빠르게 번져가는 균열을 발견했다.
균열은 알 전체로 퍼져나갔고, 마침내…….
빠득, 캉!
알껍데기가 산산이 조각나더니, 그 안에서 오색찬란한 머리칼을 가진 소녀가 몸을 일으켰다.
소녀는 신식으로 봤을 때보다 아리따운 외모를 지녔고, 자란다면 이염죽이나 채아를 능가하는 미인이 될 듯했다.
“인간!”
소녀의 목소리는 청아했지만 냉랭했고, 눈빛은 더없이 싸늘했다.
운청휘의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소녀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여기는 어디야?”
그러나 소녀는 아랑곳하지 않고 질문을 던졌다.
“마배령에 속한 기련산이다.”
운청휘는 담담하게 대답하며, 이대로 손을 써서 소녀를 굴복시킬까 하는 유혹에 잠시 시달렸다.
“마배령, 기련산? 여기는 또 어딘데?”
어린 소녀가 다시금 질문을 던졌다.
“……음? 기억을 하지 못하느냐?”
운청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소녀는 공작령의 공작왕이었을 텐데, 영주의 지리를 모른단 말인가?
“열반에 들기 전, 습격을 당했어. 그 때문인지 기억이 온전하지 않아.”
소녀는 숨김없이 자신의 상태를 털어놓았다.
“습격의 순간과 내가 공작족의 왕이었다는 건 기억 나. 그 외의 다른 기억은 흐릿해.”
미간을 찌푸리던 소녀가 덧붙였다.
“그 습격마저도 누구의 기습을 당한 것인지 희미해. 한데, 너는 다른 인간과 다르구나?”
별안간 소녀의 궁금증은 운청휘에게 향했다.
“음? 무엇이 다르다는 것이냐?”
자신에게 화살이 날아오자, 운청휘는 뜻밖이라는 표정으로 물었다.
“너를 파악할 수 없으니까.”
소녀의 대답은 간결했다.
“나는 왕의 환생이니, 인왕경 이하의 무인은 단번에 무위를 알아볼 수 있지. 하지만 너는, 파악이 되지 않아.”
운청휘를 뚫어지게 바라보던 소녀의 눈이 별안간 휘둥그레졌다.
“게다가 너, 신식을 가지고 있잖아! 서, 설마 나처럼 환생이라도 한 거야?”
소녀는 큰 충격이라도 받은 듯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질문을 퍼부었다.
“게다가, 너 환생하기 전에 선인이었겠지?”
소녀가 운청휘의 신식을 아는 것은, 황동래가 붕비의 정혈을 흡수시키려는 순간 운청휘가 신식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소녀는 그의 정체를 알았다는 듯 자신만만했지만, 운청휘는 별반 동요가 없었다.
선인은 무슨! 그는 수천만의 선인 위에 군림하는 선제였거늘.
“이리저리 말을 늘어놓는 걸 보니, 기억을 되찾게 도와달라는 뜻이더냐?”
운청휘가 물었다.
“그래. 날 도와주면, 세 가지의 보은을 하겠어.”
소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공작족의 전승지에 나만이 열 수 있는 기연을 숨겨 두었지. 그것을 얻으면 순식간에 인왕경의 무위를 가질 수 있어. 게다가 나의 보은 세 가지라면, 가치는 말하지 않아도 알 테지?”
잠시 고개를 주억거리던 운청휘가 피식 웃었다.
“그런 것보단 널 굴복시켜 영원한 충성을 받아내는 게 더 쉽지 않겠느냐?”
“너는 나를 항복시킬 수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