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9화
잠시 고개를 주억거리던 운청휘가 피식 웃었다.
“그런 것보단 널 굴복시켜 영원한 충성을 받아내는 게 더 쉽지 않겠느냐?”
“너는 나를 항복시킬 수 없어!”
소녀가 고개를 내저었다. 그 순간, 운청휘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이 소녀의 머릿속에는 복잡한 문양이 그려진 금제가 걸려 있었다.
운청휘의 눈이 살짝 커졌다.
“스스로 그리 악독한 금제를 심었단 말이냐……!”
이 금제는 소녀가 누군가에게 굴복하면, 스스로의 영혼이 파괴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소녀는 오히려 잘됐다는 투였다.
“나도 왜 이런 금제를 걸었는지 몰라.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편해. 누군가의 노예가 되기보단 영혼이 소멸되는 게 해탈하는 거나 다름없으니까.”
“……알겠다. 너를 공작족의 전승지로 데려가 주마. 대신, 내게 3번의 보은을 잊지 말도록.”
확실히, 이 소녀를 죽이는 것보다는 보은 세 가지를 얻는 게 나았다.
어차피 영주에 온 목적은 참천신검을 되찾기 위함이다.
운청휘의 짐작으로는 참천신검의 봉인지가 영주에서도 절정의 세력권 내에 있을 테니, 공작왕의 도움을 얻어 나쁠 건 없었다.
“계약하지 않아도 되겠어? 내가 나중에 잡아떼기라도 하면?”
운청휘의 간결한 대답에 소녀는 오히려 당황했다. 이런 기연을 얻으면 누구나 눈이 시뻘게져서 달려들어야 하는 게 아닌가?
“계약? 필요 없다. 누구도 나를 따돌릴 수 없으니.”
운청휘는 자신 있게 말했다.
만약 소녀가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면, 운청휘는 소녀를 비롯해 모든 공작족을 세상에서 지워 버릴 수 있었으므로.
“언제 나를 데리고 떠날 거야?”
소녀가 재차 물었다.
“다소 귀찮은 일이 있어 사흘 동안은 움직일 수 없다.”
운청휘가 말하는 귀찮은 일이란, 족제비족의 처분이었다.
한편, 만리 바깥의 족제비 소굴.
황동래는 거듭 맹세를 한 후에야 붕비에게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는 정말로 공작 알의 행방을 몰랐고, 억울하기 짝이 없었지만 붕비가 그의 사정을 봐줄 리 만무했다.
이 족제비 소굴에서 알이 사라졌으니, 어쨌든 그가 책임을 져야 했다.
붕비가 사흘의 기한을 주었으니, 그 안에 무슨 수를 써서든 알을 찾아와야 한다.
“크, 큰일입니다! 신행 대열이 습격을 당해 몰상당했습니다!”
황동래가 고민에 빠져 있는데, 대전 밖에서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
“뭐, 몰살?”
한숨을 푹푹 내쉬던 황동래는 보고를 듣는 순간 살기를 내뿜었다.
“습격을 당해서 죽었다? 수가 203명이나 되고, 영단경이 있었는데 말이냐?”
“단 한 명만이 살아서 돌아왔습니다. 상대는 반절 현경의 인간 무인이었다고 합니다.”
대전 밖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한없이 공손했다.
“고작 반절 현경의 무인이 그토록 날뛴단 말이냐? 좋아, 이리 된 이상 그 인간을 잡아서 화풀이를 해 줘야겠다!”
보고를 들은 황동래는 더욱더 분노하며 명령을 내렸다.
“4대 장로에게 그 인간을 생포하라는 명을 내리겠다!”
“네!”
황동래의 명령은 빠르게 네 장로들에게 전해졌다.
족제비족 중 무위가 가장 높은 이는 반절 영변의 황동래였고, 그다음이 현경의 경지인 네 장로들이었다.
황동래의 명을 받은 장로들은 다음 날 아침이 되자마자 기련 마을로 향했다.
4명의 현경과 30명의 반절 현경, 수백 명의 영단경과 선천경이 대열에 섞여 있으니, 사뭇 위풍당당했다.
운청휘는 제단이 있었던 마을 중심부의 상공에 우뚝 서서 다가오는 대열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그가 파 놓은 구멍은 깊이가 삼천여 장, 폭이 육백여 장에 이르러 있었다.
“예상보다 한참은 늦는군.”
돌아가서 소식을 전하게끔 일부러 한 족제비를 살려 주었는데, 쳐들어오는 속도가 느려도 너무 느렸다.
운청휘는 불만스러운 어조로 중얼거리며 다가오는 족제비들을 응시했다.
“인간, 네놈이 우리 족제비족을 죽였나?”
“배짱도 좋구나. 마배령은 요족의 근거지인데, 홀로 여기까지 오다니!”
“흥, 말해 무엇 하나. 고귀한 족제비족을 죽였으니 용서할 수 없다!”
네 장로들이 입을 열기도 전에, 뒤에 있던 족제비들이 운청휘를 비난하며 씩씩거렸다.
“장로님들, 저자의 무위가 저와 동등하니 제가 잡아 오겠습니다!)/”
반절 현경의 족제비 하나가 무리 중에 나와 네 명 장로에게 지시를 청했다.
“알겠다!”
그중 장로 하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저 인간은 생포해가야 하니, 공격할 때 주의하거라!”
족제비들이 달려들었지만, 운청휘는 요지부동이었다.
개중 반절 현경의 족제비가 코앞까지 당도하자, 그제야 운청휘는 영력화장을 생성해 족제비에게 휘둘렀다.
퍼엉!
미처 공격을 피하지 못한 족제비는 까마득한 구멍으로 떨어졌고, 그 안에 빼곡하게 붙어 있는 부적의 힘에 붙들렸다.
족제비는 버둥거릴 틈도 없이 무위가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그렇다, 이 구멍은 팔문금쇄진의 핵심지였다.
이 구멍에 떨어진 이는 무조건 힘의 이 할을 진법에 흡수당하며, 그 힘은 고스란히 운청휘에게 전달된다.
운청휘는 고의로 무위를 속인 후, 보다 무위가 높은 족제비족들이 자신에게 오기를 기다린 것이다.
“황소서(黄小鼠)를 일장으로 날려 버리다니……!”
족제비족 사이에서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장로님들, 저자의 무위는 반절 현경이 아니라 그 이상일지도 모릅니다. 더욱이 황소서는 적을 얕잡아 보았지요. 저희가 연합하여 저 인간을 잡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또 다른 반절 현경의 족제비가 나서자, 그 뒤를 4명의 족제비족이 따랐다.
“알겠네. 자네들의 무위를 전부 발휘하게. 자네들마저 당한다면 우리가 직접 나서야겠군.”
네 장로의 허락이 떨어지기 무섭게 다섯 그림자가 상공에 떠올랐다.
반절 현경의 족제비 다섯이 전력을 다해 힘을 방출했다.
촤아아-!
날카로운 파공음과 함께 그들 주변으로 힘의 파동이 몰아쳤다. 이들은 잽싸게 다섯 방향에서 운청휘를 포위하고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다섯 가지 현력이 하늘을 뒤덮으며 운청휘에게 쏟아져들었다.
한편, 운청휘는 이들과 오래 시간을 끌 생각이 없었다.
펑! 펑! 펑! 펑! 펑!
전력을 다한 것이 허무하게도, 다섯 족제비가 각각 일장을 맞고 구멍으로 떨어져 내렸다.
그들의 힘은 팔문금쇄진에 흡수될 테고, 그 힘을 받아들인 운청휘는 다시 무위가 상승한다. 마종을 연화하는 것도 좋지만, 시간이 걸리는 마종보다는 이 방법이 더 효과적이라 판단한 터였다.
“맙소사!”
“반절 현경이 다섯이다. 그런데도 적수로 부족하단 말이더냐?”
“보고가 틀려먹은 모양이군. 저자는 결코 반절 현경이 아니다!”
“우리 넷이 왔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큰일이었겠어!”
장로들은 아직까지 침착한 표정으로 상황을 관조하고 있었다.
“팔문금쇄진!”
장로들이 공격하려는 순간, 운청휘의 외침이 폭발적으로 터져 나왔다.
곧이어, 금빛의 찬란한 광채가 기련 마을 전체를 뒤덮기 시작했다.
그 자리에 있던 수백 족제비들이 대진에 포위된 것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이윽고 운청휘의 신형이 일렁이더니 그 자리에서 사라지고, 족제비족 사이에서 다시금 모습을 드러내었다.
펑펑펑펑!
셀 수도 없는 족제비들이 연달아 구멍으로 빠져들었다.
그럴수록 운청휘는 전신에 힘이 넘치는 것을 느꼈다. 대진은 탐욕스럽게 족제비들을 집어삼켰고, 운청휘의 급증하는 무위를 느낀 장로들의 눈에 공포가 어렸다.
그들 넷이 동시에 공격하는데도, 운청휘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한다!
심지어 두 번이나 공격에 실패해 아군을 죽이기까지 했다.
“젠장, 이 인간의 무위는 우…… 우리의 위에 있어!”
“삼 장로, 족장님께 연락해 주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모두가 죽습니다!”
“사 장로! 조심하시오!”
별안간 다른 장로들의 외침이 들려오자, 사 장로는 반사적으로 몸을 뒤틀었다.
그러나 운청휘의 영력화장이 한 발 더 빨랐다.
펑!
사 장로의 신형은 구멍으로 빨려들듯 떨어져 내렸다.
“큰일입니다. 그 인간 무인은 반절 현경이 아니라 현경이었습니다. 저희보다 높은 경계이며, 사 장로는 중상까지 입었……!”
삼 장로는 말을 미처 끝맺지 못했다. 어느새 다가온 운청휘의 일장이 그의 등에 작렬했으므로.
짧은 비명과 함께 삼 장로의 신형이 구멍으로 빠져들었다.
두 명의 현경 장로가 진에 흡수되니, 운청휘의 전투력은 쉴 새 없이 폭증하고 있었다.
남은 두 장로가 운청휘와 몇 합도 겨루지 못하고 구멍에 빠진 건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장로들마저 이리 쉽게 제압하는데, 남은 족제비들이라고 운청휘의 적수가 될 수 있을까!
일 다경도 지나지 않아, 족제비들은 모두 구멍에 빠지고 팔문금쇄진은 더욱 찬란한 빛을 뿜었다.
“상쾌해! 참으로 상쾌하구나!”
운청휘는 끝을 알 수 없는 바다같은 힘이 몸 안에서 넘쳐나는 것을 느끼며 즐거운 표정을 지었다.
어느새 운청휘의 눈은 수십만 장 떨어진 높은 봉우리로 향했고, 그가 산을 무너뜨리겠다고 생각했다.
다음 순간, 그 생각만으로 천지가 진동했다.
쿠르릉…….
거대한 배가 전복되어 바다에 침몰하듯, 산봉우리는 그대로 땅 밑으로 꺼져들었다.
“이제 황동래라는 대어를 낚을 시간인가.”
운청휘는 짧은 혼잣말을 하며 황동래가 오기를 기다렸다.
황동래의 무위라면, 족제비 소굴에서 이곳까지 느려도 일각 안에 도착할 테니.
그동안 운청휘는 부지런히 움직였다.
그의 손에서 마종이 하나 나타나더니, 그대로 구멍 속으로 떨어트렸다.
곧이어 선천경, 영변경, 반절 현경의 족제비들 모두의 몸에 마종이 심어졌다.
현경 장로 4명에게는 특별히 일급 마종을 심어 두었다.
운청휘가 마종을 심는 동안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고, 그의 신식이 두 그림자가 다가오고 있음을 알려 주었다.
앞선 자는 황동래. 뒤따라 오는 이는 불편한 심기를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는 붕비였다.
붕비를 알아본 운청휘는 걱정은커녕 눈을 번뜩였다.
“만약 소인이 일각 이내로 저자를 잡지 못한다면, 소주께서 부디 도와주십시오.”
기련 마을 입구에서, 황동래는 이동을 멈추고 공손하게 청했다.
붕비는 그에게 공작 알을 찾는 걸 맡긴 터라, 일단은 그를 보호할 생각이었다.
붕비가 고개를 끄덕이자, 황동래는 기련 마을 안으로 들어섰다.
그가 무위를 발휘해 움직였기에, 눈 깜짝할 새에 운청휘와의 거리를 수천 장까지 좁힐 수 있었다.
“네놈이 우리 동족을 죽였더냐?”
황동래의 음성은 예상외로 침착했다.
그러나.
운청휘가 입술을 움직이기도 전에 황동래가 분노를 터트렸다.
“무릎을 꿇지 못할까! 직접 부러뜨려 죽이기 전에!”
이런 자들을 수없이 상대해 온 운청휘다.
일언반구의 가치도 없다고 판단한 운청휘는 곧바로 팔문금쇄진을 발동시켰다.
이어서 황동래에게 맨주먹으로 덤벼들자, 황동래는 경멸을 감추지 못했다.
“그렇게 죽고 싶다니, 마땅히 들어줘야지! 죽기 직전까지 고통스럽게 해 주마!”
황동래는 곧바로 현력의 힘을 일으켜 운청휘에게 돌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