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4화
“그럼 익 도련님, 그들을 머물게 할까요?”
홍화의 물음에, ‘익 도련님’이라 불린 청년이 고개를 저었다.
“방금 말하지 않았습니까. 운씨라는 자 옆에 여섯 살 정도 된 어린 소녀가 있었다고. 그 사람을 잊은 건 아니죠?”
홍화는 무언가를 깨달은 듯 얼른 고개를 조아렸다.
“알겠나이다. 소인 풍가 쪽에 소문을 퍼뜨리러 가겠습니다.”
* * *
“운청휘, 너 정말로 운가에서 온 거야?”
선실, 공유가 별안간 운청휘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내 성이 운씨이니 당연하지 않느냐.”
운청휘는 스스럼없이 말하며, 덧붙였다.
“다만 다른 운가일 뿐이지만. 저들은 나를 다른 가문과 착각하는 모양이군.”
“8대 세가는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어. 네 가장은 금방 들통날 거야.”
공유가 참지 못하고 귀띔을 했다.
“그들끼리 열심히 머리를 굴리겠지. 내가 가장했음을 알면 그들도 나름대로 추측하지 않겠느냐.”
그녀의 말을 정정하는 운청휘의 눈이 희미하게 번뜩이고 있었다.
“영주 운가는 좁은 땅의 작은 일가일 뿐이니, 이 운청휘가 그들의 일원으로 어찌 가장할까.”
운청휘는 가감없이 말했다.
그와 영주 운가를 연결지어 생각하는 사람의 생각을 말릴 생각 따위 없었고, 굳이 오해를 풀고 싶지도 않았다.
다만 확실한 것은, 그는 선제로서 다른 사람으로 위장 따위 하지 않는다.
그들이 착각하게 내버려둘 뿐이다.
홍화에게 성만 밝힌 것도, 엄연히 그가 운씨 가문의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다만 이름은 홍화에게 밝힐 필요가 없었다.
이는 선제로서 갈고닦은 운청휘의 오만함에서 기인한 것으로, 그의 이름을 알 자격이 있는 이에게만 아낌없이 알려 줄 생각이었다.
어차피 운청휘는 둔천사를 빌려 조금 더 빨리 공작령에 갈 생각뿐이지, 분란을 일으키려는 의도는 없었다.
만약 그들이 영주 운가의 사람이 아니라는 이유로 자신을 공격하려 든다면, 운청휘로서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 펼쳐지겠지만.
어느새 둔천사의 창밖으로 보이는 하늘에는 검은 빛이 드리우고 있었다.
하인들이 저녁을 내왔지만, 그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어두웠다.
운청휘는 굳이 신경 쓰지 않으며 식사를 마치고, 수련에 빠져들었다.
밤의 장막이 짙게 드리운 한밤중이 되어서야, 운청휘가 눈을 뜨고 중얼거렸다.
“자원이 부족하군. 이 육신으로 돌파하기는 아직 멀었느냐.”
선천경 9단계에 들어서고 십여 일이 흘렀지만, 무위의 증진은 미미했다.
이는 마종을 죄다 소진했기 때문이고, 선석마저 성공 거수에게 흡수시켰기 때문이었다.
다만 운청휘에게도 한 가닥 희망은 있었다.
누군가 그를 자진해서 자극하고 있지 않은가.
그렇다면 이런 망망대해나 다름없는 곳에서도 그 눈치없는 인간에게 마종을 심을 수 있으리라.
운청휘는 자신을 건드리지 않은 이는 먼저 손대지 않았다.
그의 마음이 여려서가 아니라, 그의 행동에 위와 같은 철칙이 있기 때문이다.
만약 그가 그 철칙을 깨고 행동하게 된다면, 상대는 반드시 극악무도한 자여야 했다.
어느새 묵해와 묵안유는 깊은 잠에 빠져들고, 공유도 눈을 감은 채 가부좌를 틀고 있었다.
그녀는 수련을 하며 얕은 잠에 든 듯했다.
운청휘는 방에 몇 겹의 방어진을 설치한 후, 영혼을 분리하여 둔천사의 정상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많은 진법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운청휘가 마음먹고 염탐하고자 한다면 그 안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다만 둔천사를 조종하는 진법에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에, 운청휘는 다소 조심스럽게 움직이기로 했다.
운청휘는 정상의 선채로 향했다.
약 사백 평 남짓한 선채에는 단아하게 꾸며진 주방과 식당, 목욕실까지 갖춰져 있었다.
또한 세 개의 선실 중 두 개의 선실은 영변경의 무인들이 지키고 있었고, 한 선실 앞에는 현경 무인이 서 있었다.
다만 현경 무인이 지키는 사랑방 안에서는 희미한 숨소리가 들려왔다.
많은 이들이 깊은 잠에 빠져들어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은 뒤에야 희미하게 들려오는 숨소리였다.
운청휘는 신식을 펼쳐 숨소리가 들리는 선실을 들여다보았다.
그 안에서는 남녀가 분주하게 몸을 뒤섞고 있었다.
‘저자는……!’
열심히 움직이는 청년을 본 운청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청년은 다름 아닌 풍가의 자제, 풍소우였다!
‘이번에는 도망칠 수 없을 거다!’
운청휘의 영혼이 살기를 줄줄 내뿜었다.
풍소우는 운청휘가 반드시 죽이고자 마음먹은 이들 중 한 명이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가 감히 채아에게 흑심을 품고, 이를 행동으로 옮기려 했으니까!
운청휘는 살기를 갈무리하며 다른 두 명의 영변경 무인이 지키는 선실도 조사했다.
두 무인 중 한 명은 약관의 절세 미녀였고, 반절 영변의 무위였다.
다른 한 명도 약관의 청년이었는데, 무위는 동등했다.
다만 운청휘는 청년을 본 순간 꺼림칙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그간 각양각색의 인물을 봐왔지만, 첫눈에 이러한 느낌을 주는 이는 처음이었다.
운청휘는 세 선실에서 신식을 거두어들이고, 2층으로 신식을 내뻗었다. 그곳에도 세 개의 선실이 있었는데, 안에도 영변경의 무인이 지내고 있었다.
한편, 조종실에서도 영변경 무인이 둔천사의 조종을 통제하고 있었다.
‘모두 6명의 영변경, 17명의 현경, 100여 명의 영단경, 나머지는 모두 선천생령의 종들이군.’
이때 운청휘는 둔천사의 모든 사람을 신식으로 파악해냈다.
‘이 둔천사는 홍가의 자산. 홍가가 나를 건드리지만 않는다면 나도 손대지 않겠다. 하지만 풍소우, 네놈은 공작령에 도착하는 즉시 죽여주마. 그때 홍가가 나를 겨냥한다면, 홍가도 멸문시켜 버리겠다.’
각오를 다지며, 그의 영혼이 육신으로 돌아왔다.
다음 날 점심 무렵.
둔천사 정상의 선실에서 두 명의 청년과 한 소녀가 함께 식사를 들고 있었다.
“홍익(洪翼) 형, 공작령까지 얼마나 걸립니까?”
그중 한 청년, 풍소우가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그의 표정이 꽤나 초조해 보였다.
풍소우의 시선은 다른 청년 홍익에게 향했는데, 홍익의 표정은 느긋했다.
풍소우의 속내 따위를 모르겠는가? 그러나 홍익은 내색하지 않고 천천히 답했다.
“최소한 보름은 걸릴 거요.”
“풍소우. 둔천사를 타고 갈지 전송진을 통해서 갈지 처음에 물었잖아. 둔천사를 고른 건 너니까 불평하지 마.”
옆에 있던 소녀가 날카롭게 말하며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풍소우를 향한 눈빛에는 은밀한 혐오감이 번뜩이고 있었다.
그녀와 홍익은 반절 영변의 무위로, 또래 중에서는 남영의 8대 공자 중 다음가는 존재였다.
그에 반해 풍소우는 반절 현경의 무위인 데다 돌파한 지도 얼마 되지 않았다. 천부적인 소질을 보자면 그녀와 홍익의 시중을 드는 것도 감지덕지해야 할 처지였다.
그런 풍소우가 이 자리에 있는 건 남영의 8대 공자 중 한 명인 그의 형 덕분이었으나, 그의 태도는 뻔뻔하기 짝이 없었다.
물론 소질이 낮은 것만이 풍소우를 혐오하는 이유는 되지 않았다. 다만 풍소우의 그간 행실이 워낙 악명이 높다 보니, 동석하는 것이 불쾌할 따름이었다.
“하흡(何吸), 나는 홍익 형과 농담하는 게 아닐세!”
풍소우는 곧바로 꼬리를 내렸다.
서글서글한 성격의 홍익은 대하기 쉬웠지만, 송곳처럼 날카로운 하흡 앞에서는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풍소우는 속으로 투덜거렸다.
‘네가 오는 줄 알았으면 둔천사에 안 탔지!’
풍소우가 이번 혼사 대열에 참석한 것은 풍가의 대표이기도 했지만, 공작령의 이족 미녀들을 보기 위함도 있었다.
암시장에서는 공작족 여인을 볼 수가 없으니, 공작령에 직접 도착해서 그들의 문물 속에서 직접 여인을 찾으려는 생각이었다.
공작족은 인간 못지 않게 문화가 발달하여, 인간 세상에 있는 것들은 그들도 갖추고 있었다.
예를 들면 도박장이나, 기방 따위가 있겠다.
더욱이 풍소우는 공작령으로 향하는 길에 이족 미녀들을 만나고 싶어했지만, 하흡이 두 눈을 부릅뜨고 있어 죄다 허사가 되었다.
식사를 마친 후, 하흡은 홍익에게만 인사하고 쌩하니 나가 버렸다.
“풍 형, 하흡은 본디 저런 성격이니 너무 마음에 담아 두지 마시오.”
홍익이 서글서글하게 웃으며 풍소우에게 한 잔을 권했다.
풍소우는 홍익과 잔을 부딪친 후, 단번에 들이켰다.
“남자들의 외출이 쉽지 않게 되었소.”
풍소우는 불만이 가득했다.
“그 말이 맞습니다. 제 잘못이니 벌주를 마시지요!”
홍익이 소탈하게 웃자 술을 한 잔 더 따라 마셨다.
“이왕 마음을 쓴 김에 제 조건을 들어주는 건 어떻습니까?”
풍소우는 홍익을 이용하려는지 슬쩍 운을 떼었다.
“곤란하게 만들진 않겠습니다. 둔천사가 요족 성지를 지나가면 요족 여인 몇 명만 데려오지요.”
“풍 형, 그야말로 곤란한 것입니다. 공작족과의 혼인을 위해 가는 길인데 나쁜 소문이 퍼지면 혼인이 성사되겠습니까? 홍가와 풍가, 하가까지 엮여 있는 일입니다.”
홍익이 난처한 표정을 보였다.
이번 혼인의 주인공은 홍익이며, 대외적으로도 홍가와 공작족의 연합이었다.
다만 홍가는 오래전부터 하가, 풍가와 긴밀한 접점이 있었기에, 암암리에 세 가문이 공작령과 연합하는 형태가 될 터였다.
본디 풍가는 가문의 대표로 다른 이를 보내려 했지만, 풍소우가 억지로 이 자리를 꿰찬 것이다. 그리고 그 음흉한 속내를 드러낼 참이었으나, 홍익의 거절로 무산되었다.
풍소우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조금 더 참아야겠군…….”
“불편하시더라도, 조금만 참아 주십시오.”
홍익이 무언가 떠오른 듯 말했다.
“그러고 보니, 어제 둔천사에 새로운 탑승객이 있습니다. 그중 두 명은 풍 형이 흥미를 가질지도 모르겠습니다.”
“어?”
“한 명은 열여덟에 제법 예쁘장하고, 다른 한 명은 더 어리지만 그래도…….”
이어지는 말은 음으로 전했기에, 오직 두 사람만이 알 수 있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풍소우의 표정이 헤벌쭉 풀어지기 시작했다.
“그게 사실입니까?”
풍소우는 두 눈을 번쩍이며 입맛을 다셨다.
두 청년은 그 후에도 한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잔잔하게 사흘이 흘러간 후, 둔천사는 어느 호수의 상공을 지나고 있었다.
비가 그치고 날이 갠 터라, 호수의 양 끝에는 은은한 무지개가 드리워져 있었다.
창문을 통해 불어오는 산들바람이 얼굴을 기분 좋게 간지럽히고, 맑고 투명한 호수의 풍경이 마음을 부드럽게 녹여가고 있었다.
“둔천사가 멈췄어!”
선실에서 수련에 몰두하던 공유가 눈을 뜨며 중얼거렸다.
그녀의 두 눈은 신묘한 푸른 빛을 띠고 있어, 마치 푸른 비취를 보는 듯했다.
똑똑!
그때, 바깥에서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나더니 홍화의 목소리가 울렸다.
“운 공자님, 저희 도련님께서 이곳의 아름다운 경치를 보시고는 정상층에 술자리를 마련했으니, 운 공자를 초대하고 싶습니다.”
“음?”
둔천사의 주인이 자신을 초대하다니, 운청휘로서도 뜻밖이었다.
“설마 홍문연인가?”
공유가 옆에서 말했다.
“홍문연이라면, 바라던 바군.”
운청휘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최근 무위가 선천경 9단계에서 멈춰 있었기에 몹시 답답한 차였다.
홍문연이 열린다면 무위를 시험할 좋은 기회가 아닌가.
운청휘는 곧바로 홍화를 따라 그를 초청한 술자리로 향했다.
정상층의 선실에는 마루가 달려 있었는데, 훤하게 트인 덕분에 아래의 호수를 그대로 볼 수 있었다.
홍익과 하흡이 먼저 와서 잔을 주고받는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