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선제귀환-208화 (208/430)

제208화

“그럼 사흘 후에 떠나지.”

운청휘는 권유를 마다하지 않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선의라면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이내 소심이 정성껏 준비한 요리를 내왔다. 동영에서 온 장구벌레 요리 같은 독특한 음식부터, 만년 설산의 백옥설련이나, 상쾌한 흑옥고도 준비되어 있었다.

공작족이 즐겨 먹는 연근과 고등어, 졸인 돼지고기, 양다리 구이 등 온갖 요리가 호화롭게 탁자에 차려졌다.

특이한 점이 있다면, 공작족은 조류의 고기는 먹지 않기 때문인지 내온 요리 중에는 조류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간만에 호화로운 식사를 마친 운청휘는 호화로운 객실로 안내를 받았다.

묵안유와 묵해는 공작족의 안배로 마련된 숙소로 향했는데, 이별에 앞서 묵안유가 머뭇거리다 운청휘에게 다가왔다.

공작족의 영토까지 오는 동안, 운청휘와 자신 간에는 좁힐 수 없는 거리가 있음을 깨달았지만, 그래도 묵안유의 마음에는 운청휘가 선명한 인상으로 남아 있었다.

그녀는 용기를 내어 물었다.

“청휘 오라버니, 저도 무인이 되고 싶어요. 제게도 무공을 전수해 줄 수 있나요?”

일찍이 운청휘가 살펴본 결과 묵안유는 무공에 재능이 없었다. 만약 조금이라도 재능이 있었다면 그가 먼저 무공을 권했을 터였다.

다만 묵안유가 먼저 말을 꺼냈으니, 운청휘도 인색하게 굴 수는 없었다.

“만약 이 무공을 3성까지 수련할 수 있다면, 네 핏줄에 깃든 잠재력을 일깨울 것이다.”

짧은 순간, 운청휘의 머릿속에는 무수한 무공이 스쳐 지나갔다.

그는 그중 가장 적합하다 판단되는 것을 묵안유의 머릿속에 심어 주었다.

다만 묵안유가 이 무공을 3성까지 수련할 수 있을지는, 운청휘도 확신할 수 없었다.

과연 그녀의 조상 중에 무인이 있어 무공에 잠재력을 갖추고 있을지는 모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무인이 없다면 그녀의 성과는 그저그런 수준에 머무를 터였다.

묵안유와 묵해를 보내고, 객실로 들어온 운청휘는 즉시 가부좌를 튼 후 명상에 잠겼다.

최근 그의 머릿속에는 한 가지 문제가 자리잡고 있었다.

영단경에 진입할 때 ‘심마선겁’을 다시 만나게 된다면, 이번에는 어떤 유형을 만나게 될 것인가.

선천경 때의 ‘정’이라면 자연히 이염죽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어느덧 운청휘에게서 쓸쓸한 기운이 스쳤다. 그의 마음을 처음으로 뒤흔든 여자이자, 뜻하지 않게 그를 처음으로 저버린 여자가 아닌가.

‘부디 기다려다오, 이염죽. 백 배, 천 배로 보상해 줄 테니.’

운청휘는 마음을 굳건히 다잡았다.

이어서 그는 심마선겁을 마주할 확률을 계산하기 시작했다.

이때는 선제의 신식으로 저승의 천기를 읽기 때문에, 심신의 소모가 극심했다.

반나절 후.

“푸……!”

운청휘가 입에서 큰 피를 뿜어냈는데, 안색이 몰라보게 초췌해졌다.

“이번에도 심마선겁이로구나. 역시 정이 문제로군.”

운청휘가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대상은 굳이 계산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염죽이었으니.

다음 날 아침.

운청휘가 머무는 객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운청휘, 공작성을 거닐고 싶어요!”

하흡이었다.

운청휘에게 마종이 심어진 후 그의 종이나 다름없는 신세였으나, 그녀의 처지는 그리 비참하지 않았다.

운청휘는 하흡을 괴롭히지 않았고, 거의 내버려 두다시피 했다.

그 덕분인지, 시간이 흐르며 하흡은 이전처럼 운청휘를 어색하게 대하지 않았다.

-다녀오거라.

운청휘는 음을 보내어 짧게 대꾸했다.

하흡이 돌아간 후, 운청휘는 다시 명상에 빠져들었다.

이미 영단경에 들어갈 무렵 심마선겁이 나타나고, 상대가 이염죽임을 알 수 있었다.

다만 아직 그가 알아차리지 못한 것이 있었다.

나타나는 지점과 내용, 그 결과가 이에 해당했다.

운청휘가 선천경에 들었을 때를 예로 들자면, 장신연 밑바닥이 지점이고 이염죽의 마음을 흔드는 것이 내용이었다.

그 결과는 그가 이염족의 일원들을 부활시킨다는 약속이었다.

이번에는 어떻게 바뀔 것인가. 이미 그는 이염죽의 마음을 한 번 흔든 적이 있으니, 똑같은 내용은 나오지 않을 터였다.

운청휘는 명상을 이어가며 가장 큰 가능성을 떠올려 보았다.

‘심마선겁에서 이염죽의 용서를 구하는 것뿐인가.’

또한, 그날의 선택이 다시 나타날 수도 있으니 여러 가능성을 고려해야 했다.

채아와 이염죽 사이에서, 어떠한 선택을 내려야 할 것인가.

쿵! 쿵! 쿵!

깊은 고민에 빠져 있는 운청휘의 귓가로 요란하게 문 두드리는 소리가 파고들었다.

운청휘가 미간을 찌푸리며 신식을 내보냈다.

또 하흡이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외출을 허락했을 텐데?”

“그……!”

운청휘의 심기가 불편해진 것을 느낀 하흡의 안색이 변했다.

그녀의 머릿속엔 저도 모르게 모두를 죽이던 운청휘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녀는 심호흡을 깊이 하며 빠르게 말을 이었다.

“나가려고 했는데, 무언가에 막혔어요!”

“막혔다니, 무슨 말이더냐?”

운청휘가 미간을 찌푸렸다.

“제 생각에는…… 공작족이 나가지 못하게 막고 있는 것 같아요.”

하흡이 용기를 내서 말했다.

“기다려라. 직접 살펴봐야겠군.”

곧 운청휘가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하흡을 데리고 나선 운청휘는 공작보루를 활보했다.

그는 신식을 내보내 공작보루 안에 공유의 모습이 없음을 확인했다.

‘소심과 매희 중 한 명만 남아 있군.’

매희는 공작보루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었다.

운청휘는 일 다경도 지나지 않아, 공작보루의 가장자리로 날아갔고 서서히 공작보루의 범위를 벗어났다.

“운 공자, 멈추세요!”

웅후한 기로 가득한 중년인의 목소리가 울리더니, 아래에서 열 명의 공작족이 날아들었다.

지난번 연회에서 공유는 많은 공작족 인사들을 운청휘에게 소개해 주었지만, 이 중년인의 얼굴은 처음 보았다.

“왜 부르느냐. 길을 막는 이유를 설명하도록.”

운청휘가 그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말했다.

“우선 운 공자께 소개를 드리겠습니다. 소인의 이름은 공원(孔原)으로, 공작족의 칠장로입니다. 반절…… 공적의 무위를 지녔지요.”

중년인이 운청휘에게 자기소개를 했는데, 자신의 무위를 말할 때 일부러 멈추었다.

“공원. 그리고 무위도 잘 알았다. 이만 가 보마.”

운청휘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하흡과 함께 다시 길을 가려 했다.

“멈추십시오!”

공원이 다시금 말하며 운청휘의 앞을 막아섰다.

“왜 자꾸 길을 막는 거지?”

운청휘는 귀찮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최근 공작성에 일이 생겼습니다. 안전을 위해서이니, 며칠만 외출을 삼가 주십시오. 운 공자.”

공원이 슬쩍 웃어 보였다.

운청휘는 무표정하게 그를 주시했다.

일찍이 신식으로 온 공작성을 살폈지만, 공작성에는 아무 일도 없었다.

“내가 만약 반드시 나가야 한다면?”

운청휘의 맑은 시선이 공원에게 닿았다.

“그리 나오신다면, 저희는 운 공자의 안전을 위해 행동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공원의 몸에서 담담한 반절 공적의 기가 나타났는데, 반절 공적이라 작은 기를 내뿜어도 공포를 자아냈다.

“공작성이 그리 위험하다면, 공작보루 안에만 있도록 하지.”

운청휘는 선선히 물러나더니 하흡과 함께 몸을 돌려 숙소로 되돌아왔다.

가는 내내 하흡이 분개하며 말했다.

“힘들게 공유를 데리고 왔더니, 지금 당신을 배신하고 가둔 게 아닌가요?”

“나만 갇힌 게 아니지 않느냐?”

운청휘가 아무렇지 않게 덧붙였다.

“지금이 농담할 때인가요!”

하흡이 눈을 치켜떴다.

“농담이겠느냐. 아까 네가 말하지 않았더냐, 나갈 수 없었다고.”

운청휘의 목소리는 조용했다.

“그렇다면 이대로 공작족에게 갇혀 있을 건가요?!”

하흡의 분노는 가시지 않았다.

“그리하지 않으면? 공적 9단계의 공작을 어찌 이기겠느냐? 조금 전, 돌파하려 했다면 눈 깜짝할 새에 제압당했겠지.”

운청휘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는 정말 아무렇지 않은 듯했다.

“하지만 내가 아는 당신이라면 그들의 적수가 되지 않아도 공격하는 게 옳았어요. 둔천사를 뺏을 때의 패기는 어디 갔나요!”

“나를 잘 아는 것처럼 말하는군?”

운청휘가 뜻밖이라는 표정으로 하흡을 바라보았다.

“마, 말장난이나 할 때가 아니라고 했잖아요!”

하흡이 분을 못 이겨 발을 굴렀다.

“진정하거라. 아직 이틀이나 있지 않더냐.”

운청휘가 여유롭게 하흡을 진정시켰다.

다만 이때 운청휘의 두 눈은 살짝 가늘어져 있었다.

“우선은 네 방으로 돌아가거라. 나는 해야 할 일이 있으니.”

운청휘는 망설임없이 화려한 객실로 훌쩍 날아갔다.

한편, 공원은 공작보루 깊숙한 곳으로 향해 누군가에게 보고를 올리고 있었다.

“태상장로님, 운청휘는 이미 돌아갔습니다.”

공원이 몸을 구부리고 공손한 표정으로 매희에게 말했다.

“그는 어떤 반응이던가요?”

매희가 물었는데, 예쁜 목소리는 꾀꼬리가 지저귀는 듯했다.

“인간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는 설설 기더군요!”

공원이 시시하다는 듯이 말했다.

“정말 그리됐다면 처리가 쉽겠군요. 8대 가문의 둔천사를 강탈했다더니, 운이 좋았나 보군요.”

매희가 혼잣말처럼 낮게 중얼거렸다.

방으로 돌아온 운청휘는 방문을 닫은 후, 여러 겹의 진법을 쳐 두었다.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기 위함이었다.

“공유, 이 일은 내 오해이길 바라야 할 거다. 그게 아니라면, 모든 공작족이 너로 인하여 멸망할 테니.”

운청휘가 낮게 중얼거렸다. 차분한 목소리였지만, 가늘게 뜬 두 눈에서 옅은 살기가 스쳤다.

운청휘는 영라 반지에서 영변경의 마종 4개를 꺼낸 후, 신식을 동원하여 마종에 부적을 새기기 시작했다.

한 시진을 꼬박 집중한 결과, 4개의 마종 위에는 복잡하고 난해한 부적의 문양이 떠올랐다.

진관해가 이곳에 있었다면, ‘요혈연옥진’에 꼭 필요한 부적임을 알아차렸을 터였다.

다만 진관해는 이 부적을 정석에 새겼다면, 운청휘는 영변경 무인의 마종에 새겼다는 차이가 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