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9화
마종을 거둔 후, 운청휘는 다시금 영라 반지를 뒤적여 깃발 36개를 꺼내들었다.
이번에는 진법 설치를 위한 평범한 깃발이었다.
이윽고 손가락을 깨물어 정혈 한 방울을 흘려낸 운청휘는 신식을 이용해 정혈을 36등분 한 후, 각각의 깃발 위에 떨어트렸다.
그리고 깃발에 새로운 부적을 새기는 작업을 반복했다.
이 작업은 꼬박 세 시진이 소요되었다.
마종에 새긴 부적과 깃발에 새긴 부적은 똑같았지만, 깃발의 역할이 조금 달랐다.
어차피 요혈연옥진은 마종만 있으면 발동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운청휘는 이 깃발로 무엇을 하려는 걸까?
진관해가 이 자리에 없어서 참으로 애석한 일이었다. 진법에 미친 그로서는 운청휘가 준비하는 ‘구천주선살진(九天诛仙杀阵)’을 꼭 보고 싶을 테니!
깃발과 마종을 영라 반지에 갈무리한 운청휘는 눈을 감고 명상에 들어갔다.
그는 아침이 되기까지 꼼짝도 하지 않았는데, 밥을 가져다주는 시녀가 식사를 두고 몸을 돌리려는 순간 눈을 번쩍 떴다.
“잠깐!”
“운 공자님, 무슨 시키실 일 있나요?”
시녀가 공손히 고개를 숙이며 물었다.
“가서 태상장로 매희에게 전하거라. 내가 족장을 보자 한다고.”
운청휘가 담담하게 용건을 전했다.
“가서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시녀는 공손히 대답한 후 조용히 물러갔다.
그녀가 떠난 후, 운청휘는 다시 방에 몇 가지 방호 진법을 설치하고 조용히 명상에 잠겼다.
꼬박 한 시진이 지나서야 시녀는 다시 돌아왔다.
일찌감치 신식으로 그녀를 발견한 운청휘는 재빨리 방에 있는 진법을 거두고 시녀의 말을 기다렸다.
“운 공자님, 태상장로께서 말씀하시길, 족장님께서는 출타 중이시어 공작보루에 계시지 않는다고 합니다.”
시녀의 태도는 여전히 공손했다.
“언제 돌아오는지는 아느냐?”
운청휘가 물었다.
“족장님께서는 빠르면 한 달이 걸릴 듯하니, 운 공자님께서는 부디 인내심을 가져 달라고 하셨습니다.”
시녀는 매희에게 들은 말을 그대로 전했다.
“나더러 한 달을 기다리라 하였느냐?”
한 줄기 스산한 기운이 스치며, 운청휘의 눈이 가늘어졌다.
“나가라!”
“운 공자님, 마지막으로 태상장로께서 전하시는 말씀입니다. 내일 연회가 있고, 운 공자님께 공작족의 준걸들을 소개해 드리고 싶으니 공자님께서도 모쪼록 준비하여 참가하시라고 하셨습니다.”
시녀는 조금 겁을 먹었지만, 꿋꿋이 말을 다 전하고 떠났다.
“내일은 내가 떠나기로 약속한 날이거늘, 연회에 참석하라?”
운청휘에게서 더욱더 싸늘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그날 밤, 운청휘는 신식을 이용해 하흡을 객실로 불러들였다.
하흡이 도착하자, 운청휘는 하흡에게 뭔가를 전한 후 하흡을 그의 방에서 지내게 했다.
하흡이 침대에서 쉬는 동안, 운청휘는 의자에 앉아 명상을 하며 밤을 보냈다.
아침 무렵, 공원이 이곳으로 오는 걸 감지한 운청휘가 하흡을 깨웠다.
“어제 내가 가르쳐 준 대로 하거라.”
하흡은 곧장 옷매무새를 흐트러트려 단정치 못한 느낌을 주었다.
이윽고 무위를 이용해 얼굴을 붉게 만드니, 남녀 간의 일을 막 마친 듯한 분위기를 풍겼다.
“운 공자님, 일어나셨습니까?”
살금살금 방 밖까지 다가온 공원이 곧바로 문을 열었다.
“아……!”
하흡이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서둘러 이불로 자신을 휘감았다.
운청휘도 ‘긴장’한 듯 허겁지겁 이불을 끌어당겼다.
“컥컥, 운 공자님, 죄송합니다!”
백치라 한들 방금의 광경에서 유추할 수 있는 건 한 가지 상황뿐이었다.
공원은 난감한 표정으로 서둘러 사과하며 방을 나갔고, 일 다경이 지난 후에야 문을 열고 들어왔다.
“공원, 그대들은 문을 두드리는 것조차 하지 못하느냐!”
운청휘가 화를 내며 물었다.
“운 공자님, 죄송합니다. 시간이 너무 촉박하여 노부가 두드리지도 않고 들어왔습니다.”
공원이 재차 사과했지만, 그의 태도는 뻔뻔하기 짝이 없었다.
그가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운 공자님, 시간이 촉박하니 흑암해로 가죠!”
“흑암해에서 연회가 열리느냐?”
운청휘가 물었다.
“그렇습니다!”
공원이 고개를 끄덕였는데, 약간 귀찮아 보였다.
“가지.”
운청휘가 하흡을 껴안고 그녀와 방을 나왔다.
“운 공자님, 이번 연회는 공자님만 가실 수 있습니다.”
그 모습에 공원이 미간을 찌푸리며 제지했다.
“하흡을 내 곁에 두는 게 익숙하다만.”
운청휘는 공원의 미간이 찌푸려진 것을 못 본 듯 계속 하흡을 끌어안았다.
“공자님 기다려주세요. 제가 물어보겠습니다.”
공원은 운청휘를 잠시 바깥에서 기다리게 한 뒤, 바람처럼 날아 공작보루 최심부에 도달하였다.
“태상장로님, 운청휘가 하흡을 데려가고 싶다는데…….”
공원은 그가 방금 본 장면을 매희에게 알려 줬다.
“이상하군. 족장님께서 말씀하시길, 임시 하인이라고 하셨건만.”
매희는 우선 의심을 품었지만, 동시에 눈에서는 짙은 경멸이 스쳐 갔다.
“……그래, 인간은 하반신으로 생각하는 종족이니, 임시 하인의 위치가 바뀌는 것도 없는 일은 아니었어. 함께 가라고 하세요. 더불어, 만약의 상황에서도 최대한 하흡의 목숨은 살려 두세요. 하가의 직계 자제는 괜찮은 흥정 조건이니까요.”
매희의 승낙을 받아내자, 공원은 가장 빠른 속도를 발휘해 운청휘에게 돌아왔다.
“하 소저를 데려가셔도 됩니다! 우리 가죠!”
공원이 말을 하며 독특한 힘으로 운청휘와 하흡을 감싸고 바깥 하늘로 날아갔다.
공원이 발휘한 힘은 영변경의 법칙의 힘을 뛰어넘는 힘으로, 공적의 무인이 발휘할 수 있는 힘이었다.
무인이 선천경에 이르면 오행의 힘을 터득하고, 영단경에 이르면 영단의 힘을 깨우치듯, 각 단계마다 쓸 수 있는 힘이 생기는 이치였다.
마찬가지로 공적 9단계에 이르면 쓸 수 있는 힘을 ‘공원의 힘(空元之力)’이라 불렀다.
잠시 후, 공원은 공작성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는 거대한 배로 두 사람을 안내했다.
“이것은 공작족의 ‘둔천사’인가요?”
나는 듯이 빠르게 이동하는 배를 보자, 하흡이 호기심을 참지 못했다.
일만 평에 달하는 배는 운청휘가 강탈한 둔천사보다 3배는 작았고, 연제된 기술이 거칠었다.
운청휘는 신식을 펼쳐 배를 살펴보았고, 아름다운 진법과 무수한 가속 진법을 발견해내었다.
그러나 영변경 무인 한 명이라면, 이 배를 거뜬히 파괴할 수 있으니 이들이 홍가의 둔천사를 탐내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공작성과 흑암해는 50여만 거리라는데, 이걸 타야 하느냐?”
진상상이 운청휘에게 준 지도에는 공작령도 포함되어 있어서 운청휘는 공작성에서 흑암해까지의 거리를 알고 있었다.
“후배들이 연회에 어서 가고자 하니, 어른으로서 그들을 만족시켜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공원이 넌지시 운청휘를 떠보았다.
“운 공자님, 듣자 하니 당신에게도 둔천사가 있다는데 저희 후배들의 시야를 넓히게 보여 주시지 않겠나요?”
“나중에 기회가 있을 것이다.”
운청휘가 담담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들의 목적은 둔천사였군…….’
옆에 있던 하흡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나중? 하하, 나중에 확실히 기회가 많겠죠!”
잠시 어리둥절해하던 공원이 곧 괴상한 웃음을 흘렸다.
“가죠!”
그가 운청휘와 하흡을 데리고 나는 속도를 높였다.
“여러분께 소개하겠습니다. 이분이 바로 둔천사를 소유한 운청휘 공자입니다!”
배에 올라타니, 20~30대의 청춘 남녀들이 그들을 에워쌌다.
공원은 우선 그들에게 큰 소리로 운청휘를 소개했다.
운청휘는 신식으로 그들을 살폈고, 모두 50여 명의 공작족이며 가장 무위가 낮은 이도 현경임을 알아차렸다. 대부분은 반절 영변이고 뛰어난 이 6명이 영변경에 도달해 있었다.
적어도 이들은 공작족의 젊은 세대 중 가장 우수한 이들이 분명했다.
“운청휘, 당신의 둔천사를 우리에게 보여 줄 수 있나요?”
“우리는 천성적으로 고귀하나 기술이 낙후하여 둔천사를 만들어 내지 못했습니다. 둔천사의 명성은 익히 들었습니다.”
“운청휘, 만약 둔천사를 보여 우리의 시야를 넓히게 해주면 우리는 인간에게 개방되지 않은 공작족의 명당으로 당신을 데려갈 수도 있어요.”
“더욱이 당신이 우리의 우정을 살 수도 있겠지요!”
그들은 운청휘에게 적극적으로 말을 붙였는데, 하는 말마다 ‘둔천사’를 언급했다.
더욱이 그들의 자태는 한없이 고상하고 거만하여, 말투에서 운청휘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을 경시하는 태도가 고스란히 묻어났다.
공원은 그들을 저지하기는커녕, 운청휘와 하흡을 그대로 두고 조타실로 가 버렸다.
“서두르지 말거라. 흑암해에 도착하면 둔천사를 볼 수 있을 테니!”
운청휘는 봄바람처럼 해사하게 웃으며 ‘높으신’ 공작족들을 달랬다.
그러나 마음속으로는 코웃음을 치고 있었다.
‘둔천사를 보고 울지나 말거라.’
이윽고 운청휘는 무리들 사이를 빠져나와 하흡과 함께 배 가장자리로 향했다.
-어쩌죠? 공작족이 당신의 둔천사를 넘보고 있어요.
하흡이 음을 보냈는데, 상당히 애가 타는 듯했다.
운청휘는 대답하지 않고, 속으로 피식 웃기만 했다.
‘그저 둔천사뿐이겠느냐?’
일찍이 둔천사를 뺏었을 때, 공유는 운청휘에게 둔천사를 팔 수 있냐고 물었었다.
그때 운청휘는 대수롭지 않게 여겨 거절했는데,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니 공유는 가벼운 마음으로 물은 게 아니었다.
더욱이 운청휘가 둔천사를 영라 반지에 넣었을 때, 공유는 심각한 눈빛으로 영라 반지를 보았다.
그때부터 공유의 관심은 둔천사보다는 영라 반지 쪽으로 기울었지만, 운청휘는 그리 마음에 두지 않았다.
공유와 거래를 한다면 얼마든지 하겠지만, 설마 그녀가 이런 식으로 나올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다.
기억을 회복한 후 처음으로 한 일이 배신이라니, 이게 정녕 공유의 의도란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