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9화
운청휘는 손가락을 베어 정혈을 한 방울 짜낸 후, 그것을 비석에 떨어트렸다.
곧, 비석은 그를 주인으로 받아들였다.
“마지막 말을 온전히 이해하진 못했으나, 반드시 그리하겠다.”
운청휘의 다짐을 알아들은 듯, 거대한 힘은 마침내 거두어졌다.
불가사의한 일이 한 차례 지나갔으니, 할 일을 할 시간이었다. 운청휘는 홍가 보물 창고에 있는 무수한 무공서와 법보, 천재지보를 남김없이 긁어모아 영라 반지에 넣기 시작했다.
이 각 후, 영라 반지는 홍가 보물 창고의 보물을 전부 집어삼켰다.
반지에 들어갈 수 없는 몇몇 보물들은 남김없이 파괴해 버렸다.
말이 밤새 여물을 먹지 않으면 살찌지 않듯, 사람도 부수입이 있어야 부자가 되는 법이다.
공작족과 홍가의 보물 창고를 연달아 약탈한 운청휘는 그 말을 더더욱 실감했다.
추후 시간을 내어 폐관 수련에 들고, 두 세력의 보물 창고에서 얻은 보물들을 죄다 연화할 작정이었다.
두말할 것도 없이, 그의 무위는 천지가 개벽할 정도로 폭증하리라.
“영단경 극경이니, 지금의 전투력이라면 반절 인왕경도 굴복시킬 수 있겠군!”
작게 중얼거린 운청휘는 홍가의 보물 창고를 떠났다.
이미 신식을 펼쳐 6명의 반절 인왕경을 파악해 두었는데, 그중 2명은 기령이 말한 찬명사 위경륜과 진법 대사 풍음인 듯했다.
“태원멸원진을 배치할 정도의 수준이니, 풍음이라는 사람은 진법에 제법 조예가 있나 보군. 위경륜도 만만치 않은데, 반절 인왕경이라는 무위를 제쳐두고서라도 천기의 기가 있다. 찬명사로군. 나머지 4명의 반절 인왕경도 홍가의 사람들이 분명할 터.”
빠르게 확인을 마친 운청휘는 허공으로 날아가며 신식을 펼쳤다. 신식으 태원멸원진 전체를 덮자, 신식을 느낀 기령이 눈을 부릅떴다. 잔뜩 감격한 기령이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풍음, 당장 이 몸을 놓아주어라! 내 주인이 오고 있으니, 이대로라면 너를 용서치 않을 것이다. 그리고 위경륜, 찬명사 따위의 수준을 내게 논하지 마라! 내 주인의 눈에 찬명사 따위는 시정잡배와 다름없다! 홍가의 일원들도 들어라! 육진과 야합하여 나를 오랫동안 가두었겠다! 이 빚을 곧 청산할 테니, 비참하게 죽기 싫다면 당장 무릎을 꿇고 이 몸에게 용서를 빌어라!”
태원이 되어 태원멸원진에 중심에 갇힌 기령의 목소리는 사방 천지로 퍼져나갔다.
홍가의 반절 인왕경 4명을 비롯하여, 풍음과 위경륜마저 그 말에 반응을 보였다.
그들은 각자의 분야에서 특출난 존재였으니, 어디를 가든 남들의 존경을 받곤 했다. 한데 이런 말을 듣고 참을 수 있겠는가? 홍가의 반절 인왕경 한 명은 당장이라도 기령의 가죽을 벗길 기세였다.
“홍 형, 멈추시오!”
진법 대사 풍음이 급히 길을 막으며 이를 악물고 말했다.
“이 짐승을 태원으로 만들었으니, 운청휘를 없애고 우리가 이 짐승을 천천히 괴롭히자구!”
한편, 기령의 욕설을 들은 운청휘는 실소를 금치 못했다.
다만 그는 기령의 말이 허풍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혼돈 영수는 좋은 패가 아니다.
절정기에는 운청휘라는 선제와도 대등했으며, 몇 달간 감금된 지금은 살기가 극에 달했으니 조만간 홍가에 파란이 일어날 것은 불 보듯 뻔했다.
“운청휘, 기왕 왔으니 죽는 게 어떠하냐?”
풍음의 음성이 진법을 통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곧, 풍음은 수십만 장 하늘 위에서 붉은 그림자가 다가오는 모습을 목격했다.
풍음이 비록 운청휘를 자세히 본 적은 없지만, 직감적으로 그가 운청휘임을 알아차렸다.
솨! 솨! 솨! 솨! 솨!
연거푸 다섯 번의 인기척이 나더니, 다섯 개의 그림자가 풍음의 곁으로 다가왔다.
찬명사 위경륜과 4명의 홍가 일원들이었다.
“당신이 운청휘인가?”
찬명사 위경륜이 풍음 옆에서 입을 열었다.
“그대의 몸에 무슨 이상한 점이 있길래 그대의 운명을 추측할 수 없는 것인가?”
위경륜은 의혹에 가득 찬 눈을 가늘게 떴다.
대붕족, 공작족, 홍가에서 운청휘의 행방을 알아내달라고 요청했을 때, 사실 그는 운청휘의 존재를 계산해낼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대상을 바꿔 진상상을 계산하여 둔천사의 행방을 알아낸 것인데, 그 복잡미묘한 존재인 운청휘가 눈앞에 있었다.
하여 위경륜은 찬명술을 동원하여 몰래 운청휘를 계산해 보려 했지만, 또다시 실패했다.
육안으로는 얼마든지 운청휘를 볼 수 있었지만, 운명의 궤적은 도무지 운청휘를 감지하지 못했다.
이런 상황은 찬명사가 된 이후로 처음 겪어보는 일이었다.
“고작 찬명사가 한 사람의 운명을 관통해 볼 수 있겠느냐? 그 나이에 그리 순진한가?”
운청휘는 가소롭다는 듯이 위경륜을 바라보았다.
“그렇지 아니한가?”
위경륜이 곧바로 반문하더니 말을 이었다.
“그대와 진상상이 탄 둔천사의 행적이 드러난 이유를 모르겠나? 내 술책이 통했기 때문이라네.”
“지도를 들고 계산하는 일을 누가 하지 못한다고? 그 후엔 확률 놀음일 뿐.”
운청휘가 시큰둥하게 말했다.
“찬명사는 계산에 능할 뿐이지, 하늘을 알고 운명을 예측하고 천기를 읽는다는 건 헛소리에 불과하다!”
위경륜이 듣고 노발대발하며 호통을 쳤다.
“건방지구나, 감히 계산으로 존귀한 찬명사를 모욕하다니!”
“모욕이라? 찬명사가 계산에 정통한 건 사실이 아니더냐? 정 믿지 못하겠다면 내기를 하자꾸나. 네가 이기면 나 운청휘는 찬명사가 천기를 읽어내는 걸 인정할 뿐 아니라 네가 원하는 대로 해 주마. 다만 네가 진다면, 영원히 내 노예가 되도록!”
운청휘의 시선은 한없이 그윽했다.
“하겠나?”
“내기의 내용은 무엇인가?”
위경륜은 이를 갈면서도 침착하게 물었다.
“새 한 마리의 운명을 계산하도록.”
운청휘가 별안간 손을 뻗자, 아래에서 뻐꾸기 한 마리가 빨려들어왔다.
이 뻐꾸기는 영수도 흉수도 아닌 평범한 짐승이기에, 어떠한 영력의 파동도 느껴지지 않았다.
위경륜은 그 뻐꾸기를 본 순간,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운청휘는 지금 그를 모욕하고 있기에 한낱 가금류의 운명을 계산하도록 시키는 게 아닌가?
위경륜이 화를 참으며 말했다.
“좋아, 내기를 하지! 그러나 누군가 번복하는 것을 막기 위해 사전에 하늘에 맹세를 하세!”
“물론이다.”
운청휘가 선선히 하늘에 대고 맹세를 하자, 위경륜도 맹세했다.
이어, 위경륜이 입을 열었다.
“무지한 후배여, 내가 네놈을 이기고 후회라는 두 글자를 어떻게 쓰는지 알게 해 주마!”
곧 위경륜의 손에 부적으로 뒤덮인 나침반이 나타났다.
나침반에 달린 바늘은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고, 위경륜은 곧바로 뻐꾸기의 운명을 계산해 들어갔다.
“잠깐!”
별안간 운청휘가 손을 흔들어 위경륜을 저지했다.
“이런 계산은 무의미하군. 차라리 생과 사를 계산하도록.”
“푸훗!”
‘태원’이 되어 대진 중앙에 갇힌 기령이 웃음을 터트렸다.
“역시나 운청휘로군. 이 내기는 끝난 거나 다름없어!”
뻐꾸기는 운청휘의 손에 붙들렸으니, 자연히 생사도 운청휘의 마음에 달려 있지 않겠는가?
“이건 사기야!”
위경륜은 그 자리에서 노발대발했다.
“내가 만약 살아 있다고 말하면 네놈이 죽일 거잖아? 반대로 내가 죽었다고 말하면 네놈은 그것을 풀어 줄 거고.”
운청휘는 천연덕스러운 표정으로 위경륜을 바라보았다.
“무소불위의 천명사가 아니더냐? 자네 논리에 따르면 내가 뻐꾸기를 죽일지 살릴지는 자네 계산에 달려 있겠지.”
“위 형, 녀석과 대화하지 말죠. 우리 같이 공격하여 녀석을 제압하죠!”
풍음을 비롯한 4명의 반절 인왕경이 살기를 뿜으며 소리쳤으나, 위경륜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운청휘를 노려볼 뿐이었다.
한참 후, 숨을 깊게 들이마신 위경륜이 분노를 가까스로 억눌렀다.
“…졌네!”
이를 악문 위경륜이 가까스로 말을 내뱉었다.
그가 뻐꾸기 한 마리의 운명을 계산하지 못해 이 지경까지 올 줄 누가 알았을까.
알았더라면 절대 운청휘와 내기하지 않았을 것이다.
더욱이 운청휘가 일부러 찬명사를 비하하여 그의 마음을 흐트러트리고, 자연스레 이 내기로 끌어들여 수를 쓸 줄은 몰랐다.
“지고도 주인 앞에서 무릎을 꿇지 않는 건가?”
운청휘의 말투는 강압적으로 바뀌어 있었다.
망설이던 위경륜은 별안간 몸을 날렸고, 운청휘와 삼백 장 거리를 둔 채 무릎을 꿇었다.
“패배를 인정합니다. 소인…… 위경륜, 주인님을 뵈옵니다!”
하늘에 맹세를 했으니, 위경륜은 감히 거스를 수 없었다.
찬명사에게 하늘은 무엇보다 확실하고 위대한 존재였으니. 어찌 하늘의 노여움을 무시할 수 있을까!
“저…… 정말로 운청휘를 주인으로 모시다니!”
위경륜이 무릎을 꿇는 모습에 나머지 다섯 사람은 분노해 어쩔 줄을 몰랐다. 어느새 위경륜을 부르는 호칭도 격하되어 있었다.
위경륜은 그들을 싹 무시한 채, 운청휘를 바라보았다.
“저는 사부님의 명을 받아 세 세력이 주인님을 잡는 일을 도왔습니다. 비록 지금은 주인님을 섬기는 몸이나, 사부님의 명을 거역할 수도 없습니다. 주인님께서 홍가를 상대하신다면, 소인은 그저 방관할 수밖에 없습니다.”
위경륜은 물러설 수 없다는 듯 확고히 말했다.
그가 운청휘를 주인으로 인정했으니 명령을 따르는 건 당연하나, 사부의 명령도 무시할 수 없었다.
그가 정한 태도라면, 운청휘를 거스르지 않고 사부의 명령도 어기지 않는 셈이 된다.
“사부의 명령은 하늘보다 큰 법이다. 이번 전투는 관조하도록. 단, 이번이 마지막이다.”
운청휘가 말을 마치니, 손에서 마종이 나타나 위경륜의 몸으로 빨려들어갔다.
위경륜의 말은 그럴듯했으나, 속셈이 숨겨져 있음을 알았기에 해 둔 장치였다.
이번 전투를 방관한다고 하나, 운청휘가 불리해져 패배하면 그가 운청휘와 한 내기는 자연스레 무효가 되지 않겠는가?
필승을 자신하는 운청휘였지만, 만약을 대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네가 태원멸원진을 포진했다고 들었다. 진법에 꽤나 조예가 있는 듯한데, 나와 내기하지 않겠는가?”
운청휘는 위경륜을 한쪽으로 물린 뒤, 풍음에게 시선을 주었다.
위경륜이 겪은 일을 보았으니, 풍음이 어찌 선뜻 내기를 할까.
그는 코웃음을 치며 태원멸원진을 발동했는데, 반경 삼만 장을 모두 덮었다.
진법 안에는 강풍이 휘몰아치고 벼락이 내리꽂히며 종말을 암시하는 듯했다.
“나와 내기를 하고 싶다면, 네놈이 ‘태원멸원진’에 들어가는 전제가 있어야 한다!”
대진 안에서 풍음이 외쳤다.
“그러지.”
운청휘는 곧바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망설이지 않고 태원멸원진 안으로 들어섰다.
그 안에서 휘몰아치는 강풍과 번개가 운청휘를 덮쳤지만, 곧 그가 현력으로 방패를 형성하자 그대로 맞부딪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