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33화
“운청휘, 오랜만에 만난 걸 축하해야지. 이것부터 마셔!”
인간 모습의 기령이 잔을 가득 채워 운청휘와 부딪쳤다.
곧바로 잔을 비운 기령은 아직 부족했는지 다시금 잔을 채웠고, 이번에는 위경륜을 바라보았다.
“자, 너도 축하해야지! 운청휘의 노예가 되었잖아?”
위경륜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노예가 되었는데 축하할 일이겠는가?
그러나 그는 기령이 눈을 가늘게 뜨자 별수 없이 잔을 부딪치고 목을 축였다.
“싱겁구만, 다 큰 성인이 겨우 작은 술잔이라니.”
기령이 잔뜩 으스대더니 다음으로 풍음에게 시선을 주었다.
“자, 우리도 한잔하지. 군성문을 탈출해 노예가 된 것을 축하하자구!”
상황을 지켜보던 풍음은 얼른 큰 잔에 술을 담아 기령과 맞부딪쳤다.
세 사발을 비운 뒤에야, 기령은 만족했는지 음식에 손을 뻗었다.
구운 새끼돼지, 거위 구이, 양 다리 요리, 영단경의 흉수 요리가 이 각도 지나지 않아 기령의 뱃속으로 말끔히 사라졌다.
기령은 부푼 배를 두드리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보였다.
“최고야, 몇 달을 굶었는데 마침내 맛있는 것들을 먹다니!”
기령이 먹은 음식만 헤아려도, 천 근은 될 터였다. 위경륜과 풍음의 입이 떡 벌어졌다. 지금 기령은 어린아이의 모습이니, 적어도 체중의 스무 배 이상은 먹은 셈이다.
기령의 정체를 알고 있는 운청휘만이 아무렇지 않게 식사를 이어나갔다. 기령의 본체는 혼돈 영수이니 10만 근을 먹든, 100만 근을 먹든 별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쿵쿵쿵!
그때, 누군가 바깥에서 문을 두드렸다.
운청휘의 신식은 문 너머의 반절 인왕경을 발견한 터라, 위경륜에게 눈짓을 주었다.
“저는 진범(陈帆)으로, 진가의 태상 장로입니다. 염성에 오신 이유를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문을 두드린 자는 들어와 이름을 밝혔다.
이곳은 진가의 사업 중 하나로, 위경륜이 반절 인왕경의 기를 뿜었으니 주루의 책임자가 진가에 보고한 것이다. 그러자 곧장 진가에서는 사람을 파견했다.
“진 형님이시군요. 저는 풍음으로, 염성에 온 건 주인님과 볼일이 있어서라오.”
풍음이 일어나 손을 맞잡으며 공손히 답했다.
“풍음? 군성문의 풍음?”
그 이름을 듣자마자, 진범이 적의를 보였다.
군성문은 영흥제국에서 온 종파로, 교류가 잦았던 풍가나 홍가와 달리 진가와는 적대 관계였다.
“진 형님, 오해입니다. 풍음은 지금 군성문을 떠나 주인님의 휘하에 있습니다.”
위경륜이 얼른 나서서 해명한 후, 덧붙였다.
“소개가 늦었습니다. 위경륜이라고 합니다.”
그 말에 진범의 적의가 가셨다.
“신반귀산 위경륜?”
위경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자네들의 주인은?”
진범이 날카롭게 눈을 빛냈다.
비록 두 사람이 영흥제국에서 왔다고 하나, 하나는 군성문 소속, 하나는 흙보살의 휘하다. 두 세력에 속한 이가 한 주인을 모시고 있다니, 진범의 태도가 신중해질 수밖에 없었다.
질문을 던진 진범의 시선이 슬쩍 방 안을 훑었다. 언뜻 보니 기령은 그저 천진난만한 어린아이에 불과해 보였다. 그렇다면 남은 한 명, 운청휘가 그들의 주인인 듯했다.
‘설마 저 젊은이가 영흥제국의 황자인가?’
빠르게 머리를 굴리던 진범은 속으로 질겁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영흥제국의 황자만이 풍음과 위경륜을 동시에 부릴 수 있었으므로.
‘잠깐, 붉은 장포에, 등에 검집을 짊어진…… 서 설마 상상이 말한 운청휘?’
그러나 조금 더 살펴보니,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문득 진범은 진상상이 이야기했던 운청휘의 용모를 떠올리곤 속으로 탄성을 내질렀다.
“자…… 자네가 운청휘?”
진범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물었다.
“보아하니 상상이 이 운 아무개를 이야기했나 보군.”
마침내 운청휘가 몸을 돌려 진범을 마주하자, 진범이 곧바로 무릎을 꿇었다.
“운청휘, 자네가 상상에게 있어 더없는 형제라고 들었네. 부디 간청하건대, 상상을 구해주시게!”
난데없는 간청에 운청휘라도 안색이 변했다.
“어째서지? 현 가주라면 문제 없을텐데?”
“지금 진가를 장악하고 있는 것은 늙은 족장이 아니라……”
진범은 최근 진가를 비롯하여 영주에 일어난 일들을 빠르게 이야기했다.
진상상의 조부와 다른 7대 가문의 가주 및 3대 요왕이 상고 유적에 들어갔는데, 그중 하가의 가주가 유적에서 죽었다고 한다. 그때를 기점으로 그들의 소식이 묘연해졌고, 진가에는 스스로를 왕이라 일컫는 신비한 이들이 나타나 진가 전체를 굴복시켰다.
진상상을 필두로, 진가의 직계 자제들은 모두 감금되었다고 한다.
* * *
한편, 성공 거수 운청휘 일행도 염성에 도착해 있었다.
성공 거수 운청휘는 일행과 함께 객잔을 찾아갔고, 이곳은 남영 주루와 불과 삼만 장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곳이었다. 그의 무위라면 한 걸음과 별반 차이가 없는 거리였다.
“운 형제, 바로 진가로 가지 않는 것인가?”
소도도의 음성에는 초조함이 깃들어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곧 오랜 시간 헤어져 있던 쌍둥이 형제를 만나게 되지 않는가.
기대감과 긴장, 초조함이 뒤섞여 소도도는 속이 울렁거릴 지경이었다.
“일이 좀 생겼다. 며칠 기다리도록.”
성공 거수 운청휘가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진가의 변고를 소도도에게 전할 생각이 없었으므로.
삼만 장 바깥, 남영 주루.
“영주의 인왕경이 늘었다고 들었다. 어떤 세력인지 짐작이 되지 않는가?”
인간 운청휘의 물음에, 진범은 잠시 생각하더니 답했다.
“동영 난쟁이족의 왕인 듯하네. 진가 외에도 8대 가문의 나(罗)가, 초(肖)가에도 나타났지.”
운청휘의 안색이 점점 굳어졌다. 그가 알기로 영주의 인왕경은 남영 8대 가문의 가주, 북영의 3대 요왕까지 11명뿐이었다.
다만 동영 난쟁이족은 파악되지 않았으니, 적지 않은 인왕경이 살고 있으리라 짐작할 따름이었다. 한데 그들이 진가에 나타날 줄이야?
“그들이 상상을 어디에 가두었지?”
운청휘가 바로 물었다.
“우리 진가의 천뢰에 있다네!”
선뜻 답한 진범은 내심 기뻐했다. 저리 묻는 건 진상상을 바로 구하기 위함이 아닐까?
“응?”
별안간 운청휘가 미간을 찌푸렸다. 넓게 전개해 둔 신식에서 하흡을 발견한 것이다.
하흡은 반절 인왕경 한 명의 뒤를 따르고 있었고, 주변에는 십여 명의 호위와 함께였다. 그들은 운청휘가 있는 객실로 오고 있었다.
“그들이 왔군.”
그 말에 진범도 다가오는 이들을 감지하고 얼굴이 굳었다.
쾅!
객실의 문이 별안간 떨어져나가며, 하흡과 반절 인왕경 한 명이 안으로 들어섰다.
“진범, 그 잘난 진가도 이미 천황 폐하께 충성을 맹세했는데, 언제까지 버틸 건가?”
반절 인왕경은 다른 이들은 무시한 채 진범에게 바로 말을 걸었다.
음산한 기운을 뿜는 그자의 키는 키가 사척 반도 채 되지 않았다.
“동영 난쟁이족?”
운청휘가 무심하게 그자를 바라보았다.
“감히 우리 고귀한 사토족을 난쟁이라고 부르다니!”
그자가 분노하며 공포스러운 위압감을 방출하였고, 순식간에 운청휘를 압박하려 들었다.
그러나 운청휘는 한 손을 가볍게 휘두른 것만으로, 그자의 위압을 가볍게 흐트러트렸다.
“응? 네놈도 반절 인왕인가?”
키가 매우 작은 반절 인왕경이 의외라는 듯 운청휘를 훑어보았다.
“아주 좋아, 네놈도 우리 사토족에게 충성을 맹세하라!”
외부에서는 동영 난쟁이족이라 불렀지만, 그들은 스스로를 고귀한 사토족이라 불렀다.
운청휘에게는 무엇이라 부르든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어차피 그의 시선은 난쟁이가 아니라 하흡에게 가 있었으므로.
하흡도 이때 운청휘를 발견하고 경악하며 두 눈시울을 붉히고 있었다.
“왜 난쟁이족과 있는 거지?”
지난번, 하흡은 혼수상태였기에 진가에 맡겨졌던 걸로 기억하고 있었다.
그 질문에 하흡은 눈물을 쏟으며 운청휘에게 다가왔다.
“우…… 우리 하가의 노조께서 당했어. 사토키(佐藤木)가 그의 여인이 되라고 협박했는데, 그렇지 않으면 하가의 사람들을 죽여 버린다고 했어.”
하흡이 다시금 입술을 달싹였다.
“하가는 난쟁이족의 통제를 받고 있어. 운청휘, 상고 전쟁터로 사람들을 이끈 건 난쟁이족의 음모였어!”
“건방지구나, 우리 사토키 장군께서 충성을 맹세하라고 했는데, 귀가 먹었느냐?”
그때, 사토키의 뒤에 서 있던 중년인이 불쑥 끼어들었다. 그는 사토키보다 훨씬 키가 작은 사내였다.
운청휘는 고개를 숙여 중년인을 힐끔 바라보더니, 왼손을 살짝 휘둘렀다.
우르릉!
단지 그뿐이었으나, 중년인은 단숨에 날아가 형체도 알아볼 수 없게 되어 버렸다.
객실에는 기이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진범이 기쁨에 사로잡혔다. 운청휘가 일장으로 때려죽인 중년인이 공적 9단계에서도 8단계의 무인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정도라면 승산이 있을 터였다.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운청휘를 보던 사토키와 수행원들은 이내 노발대발하기 시작했다.
“감히 나 사토키의 사람을 죽이다니!”
사토키가 울분을 분출하며 운청휘를 향해 달려들었다.
운청휘는 두말없이 참천검집을 뽑아 검기를 분출했다.
검기가 사토키의 왼쪽 어깨를 향해 쇄도하더니, 눈 깜짝할 새에 그의 어깨를 베었다.
이에 기령이 눈 깜짝할 새에 영수묘로 변신해 입을 쩍 벌렸다. 이때만을 기다렸다는 듯 날랜 움직임이었다.
후우우……!
조그만 몸에서 믿기지 않는 흡입력이 뿜어져나오더니 사토키를 그대로 빨아들여 꿀꺽 삼켜 버렸다.
사토키는 비명 한번 질러보지도 못하고 기령에게 먹히고 말았다.
기령은 가볍게 트림을 하고, 수행원들 쪽을 바라보았다.
후우우……!
공적경과 영변경의 난쟁이족 모두, 기령의 한끼 식사가 되었다.
기령은 곧 땅에 앉아 체내의 힘을 연화하는 데 집중했고, 이 광경을 모두 지켜본 진범과 하흡은 넋이 나가고 말았다.
“바…… 반절 인왕을 단번에 삼켰어!”
진범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고, 이 광경을 두 번째 보는 풍음과 위경륜마저 진저리를 쳤다.
그러거나 말거나, 기령은 반나절 내내 움직이지 않았다.
마침내 무위가 현경 5단계로 폭증했을 무렵 기령이 눈을 떴고, 일행은 남영 주루를 떠나 진가를 향해 날아갔다.
진범의 말에 따르면 진가엔 현재 난쟁이족 인왕경 3명이 있다고 했다.
만약을 위해 운청휘는 언제든 다른 몸과 합체할 준비를 해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