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44화
자리에 있던 이들 대부분은 그 말뜻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적어도 그의 목소리에 새겨진 공포만큼은 뚜렷하게 느낄 수 있었다.
유일하게, 진가의 사람들만이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릴 뿐이었다.
진상상을 비롯한 진가의 사람들은 가토왕의 분신이 기령에게 한입에 먹히는 광경을 목격했었다. 더욱이 또 다른 인왕경의 분신도 기령이 삼키지 않았던가?
과거 진가에 강림한 난쟁이족의 인왕경 분신 둘은 기령에게 흡수당했고, 하나는 운청휘가 마종을 심은 후 빼앗았다. 진가의 사람들은 그날의 산증인이었다.
“오, 오해입니다. 가토왕이시여! 소인은 그가 영주에서 이름을 떨쳤다고만 들었지, 나머지는 알지 못합니다! 더욱이 운청휘는 우리 사토족이 아니라 하가를 공격했습니다!”
반절 인왕경이 울먹거리며 말했다.
그가 아무리 어리석어도, 지금의 상황에서 가토왕의 분신이 얼마나 공포를 느끼는지 알 수 있었다. 더욱이 가토왕의 분신이 두려워하는 존재라니, 운청휘와 어린 신동은 얼마나 두려운 존재란 말인가?
“가토왕의 분신이 왜 허공에서 멈춘 거지? 설마 진짜로 어린 신동에게 놀란 건가?”
“어린 신동뿐 아니라 운청휘도 있다구!”
“운청휘는 아직도 알려진 바가 없지만…….”
“아직도 부족하다고? 운청휘는 홍가의 둔천사를 빼앗았고, 대붕왕과 공작왕의 추격에서도 살아남았잖아?”
“듣자 하니 운청휘는 진법 대사여서 둔천사에 진법을 설치했다던데?”
“진짜 무위는 운청휘가 거의 공적경인데…… 많아야 반절 인왕경이야!”
“그렇다면 운청휘가 우리를 놀라게 할 수 있을까?”
“저자는 인왕경의 분신이잖아! 분신이라고 해도 전투력으로는 이 자리의 반절 인왕경을 몰살시킬 수 있어!”
구경꾼들 사이에 운청휘, 어린 신동, 가토왕 분신에 대한 열띤 논쟁이 이어졌다.
별안간 누군가 언성을 높였다.
“가토왕의 분신이 했던 말을 자세히 곱씹어 본 사람은 없나?”
“무슨 말인데?”
“가토왕이 했던 말을 떠올려 봐. 자신을 죽게 하려는 게 아니냐고 화를 냈잖아.”
“그럼 이미 분신이 운청휘와 어린 신동에게 당한 적 있다는 거야?”
“정말 그랬다면, 가토왕의 분신에게는 끔찍한 상황이겠어!”
무리들이 술렁일 때, 진가 쪽에서 한 젊은이가 솟구쳐 올랐다.
곧 한 사람이 그 청년의 모습을 알아차렸다.
진가의 소가주이자 영주 8대 공자 중 한 명인 진상상이 아닌가!
“진상상? 여기에 와서 무엇을 하는 거지?”
“자네들 못 들었나? 운청휘가 둔천사로 도망쳤을 때, 진상상과 함께였다고 하네!”
“들었지만, 헛소문인 줄 알았지! 지금이야말로 믿겠군!”
“진상상이 저리 나선 건, 운청휘의 편에 선다는 뜻인가?”
“그건 아닌 것 같은데? 진가가 정말 운청휘 편에 섰다면 좀 더 일찍 나섰어야지!”
적지 않은 이들의 시선이 진상상에게 쏠렸다.
그러나 진상상은 운청휘에게서 삼백 장의 거리를 두더니, 허공에 뜬 채 가만히 뒷짐을 지었다.
그가 장내를 쭉 훑어본 후 담담하게 말했다.
“그대들은 추측할 필요가 없다네. 가토왕의 분신 하나는 확실하게 어린 신동에게 죽었으니까!”
“네 말을 어떻게 믿지? 증거는 있느냐?”
누군가 갑자기 소리쳤다.
“응?”
진상상의 눈빛이 어두워지더니, 입을 연 사람을 빠르게 찾아냈다.
홍가의 영변경 젊은이였다.
“네놈 따위가 뭔데 본 공자의 말에 참견하는가?”
진상상의 매서운 시선이 그자를 노려보았다. 만약 홍가의 다른 일원들이 없었다면 진작 음혈광도를 빼어들 태세였다.
“홍가는 이렇게나 존비가 없구나!”
진상상은 그와 비슷한 또래였지만, 오히려 굽어보는 태도로 말하고 있었다.
“상상, 방금 말한 것이 사실이더냐?”
교룡족 안에서 외침이 터져 나왔다.
교룡족의 소주, 용오천이 묻고 있었다.
그는 진상상과 개인적인 친분이 있었고, 운청휘와도 좋은 인연을 맺었기에 나선 터였다.
“그래, 사실일세. 그날 친히 목격했네!”
고개를 끄덕인 진상상이 용오천에게 가벼운 웃음을 지었다.
와아!
주변의 군중들은 일제히 들끓었다.
진상상이 친히 증언했으니, 운청휘의 진가는 새로이 태어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더욱이 가토왕의 태도로 미루어 보아, 이전에 다른 분신이 당했다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대붕족을 비롯한 운청휘의 적대 세력들은 안색이 변했는데, 그중에서도 공작족의 표정이 가장 복잡했다.
그들은 본래 운청휘와 좋은 인연을 맺을 수 있었으나, 은혜를 갚지 않고 배은망덕한 길을 선택한 이들이었다.
“이 일은 반드시 족장님께 말씀드리겠어!”
“흥, 바로 가지!”
“족장님께서 마음먹는다면 반드시 운청휘를 죽일 수 있어!”
“이대로 운청휘를 내버려둔다면 우리 공작족에게 있어 큰 화근이 될 거다!”
“다만 걸리는 건, 상고 유적 내에서 인왕경은 제 힘을 내지 못한다는 점일세. 유적 내에서는 운청휘를 죽일 수 없지 않나.”
공작족의 고위층들이 일제히 숙덕거렸다.
잠시 후, 그들은 전송 옥석을 통해 이곳에서 일어난 일들을 고스란히 공작왕에게 전달했다.
대붕족도 마찬가지로 대붕왕에게 소식을 전했고, 홍가와 풍가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나마 풍가는 운청휘와 상대적으로 원한이 적었다. 아직 풍가의 가주는 운청휘와 정식으로 대립하지 않았으니까.
다만 홍가는 둔천사를 뺏기고, 보물 창고까지 털렸다. 이미 홍가는 운청휘를 죽이기로 마음먹은 상태였다.
운청휘와 기령은 허공에 시선을 두고 있었는데, 운청휘의 시선은 그저 잠잠할 뿐이었다. 어떤 노여움도, 기쁨도 읽을 수 없는 눈빛이었다.
반면 기령은 입술을 할짝였는데, 배고픈 거지가 한 상 가득 차려진 음식을 눈앞에 둔 듯했다.
기령에게 있어 가토왕의 분신은 맛있는 요리나 다름없었으니까.
-운청휘, 못 참겠어!
기령이 운청휘에게 음을 보냈다.
-서두르지 말도록. 우선 그를 제압한 후에 말하자꾸나.
운청휘는 고개를 저으며 기령을 말리는 음을 보냈다.
이곳에는 사람이 많으니, 기령의 능력을 보일 필요가 없었다. 남의 무위를 삼키는 능력이 알려지면 좋은 꼴을 볼 리 없을 테니까.
진상상도 그 점을 고려하여 기령이 가토왕의 분신을 죽였다고만 했을 뿐, 그 방식까지는 말하지 않은 터였다.
허공에서 망설이던 가토왕의 분신은, 결국 아래로 향했다.
“우, 운 공자. 제가 몰라 뵈었습니다. 이곳에 계신 줄은 몰랐지요. 부디 너그러이 소인의 분신을 풀어 주시길 부탁드리겠습니다.”
지면에 착륙한 가토왕의 분신은 운청휘의 삼십 장 앞까지 걸어간 후, 겸손하게 청했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체면을 세워 주면, 흐뭇해진 운청휘가 자신들을 놓아주리라는 계산이 깔려 있었다.
저자세를 보이는 한편, 그는 언제든 필사적으로 나설 준비를 마쳤다!
“우선 붙잡은 그 난쟁이를 내려놓아라! 그건 내 전리품이야!”
기령이 먼저 답하는데, 두 눈이 득의양양하게 반짝였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가토왕의 분신은 어엿한 인왕경의 모습이었지만, 지금의 저자세는 황궁의 태감 못지않았다.
지켜보던 이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오늘 처음으로 인왕경의 분신을 본 자들도 있었는데, 그들의 상상 속 인왕경의 모습이 산산이 부서지고 있었다.
가토왕의 분신은 만개한 국화꽃처럼 웃으며 연신 굽신거렸고, 위엄마저도 바닥에 내팽개친 듯했다.
그는 기령에게 넘긴 반절 인왕경이 공원의 힘으로 만든 밧줄에 묶이는데도, 내내 웃고만 있었다.
‘이렇게 많이 삼킬 수 있다니, 횡재가 따로 없군! 가토왕의 분신까지 삼킨다면, 바로 공적경에 도달할 수 있을 거야!’
계산을 마친 기령은 지금 당장 둔천사로 돌아가지 못하는 게 한스러울 뿐이었다.
하가의 반절 인왕경 1명, 공적경 10여 명.
난쟁이족의 반절 인왕경 3명, 공적경 100여 명.
더불어 가토왕의 분신까지 합하면, 육 할의 확률로 공적경에 다다를 수 있건만!
평소라면 모든 전리품을 운청휘와 동등하게 나눴을 테지만, 선겁을 앞두고 그가 자신에게 모든 전리품을 넘기는 지금이 절호의 기회였다.
“네놈의 이름이 가토왕이라고?”
기령의 득의양양한 음성이 이어졌다.
“소, 소인의 성은 사토, 이름이 가토입니다. 본체가 인왕경이라 가토왕이라 불립니다.”
가토왕의 분신은 조금도 거역하지 못하고 굽실거리는 자세로 대답했다.
“성이 사토고 이름이 가토? 이게 무슨 황당한 이름이야! 하지만 내 머리가 명석하여 알아들었으니 됐어!”
기령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비록 기령의 태도가 기고만장하다곤 하나, 기령에게 호감을 가진 이들의 눈에는 사랑스러운 광경일 뿐이었다.
그들의 눈에 기령의 외모는 참으로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심지어는 기령을 데려가고 싶어 하는 자들도 은연중에 있을 정도였다.
“네, 맞습니다, 소인 가토입니다!”
가토왕의 분신은 지치지도 않고 굽신거렸다.
비록 그의 마음속에서 분노가 넘실거려 바다를 불태울 지경에 이르렀다고 해도, 절대 드러나지 않았다.
“가토야, 내 외모가 어떠하냐?”
기령이 콧대를 세우며 물었다.
“네, 하늘 아래 그 누가 어린 신동의 외모를 따라가겠습니까? 그 용모로 빙산을 녹이고, 화산이 격동하며, 천지를 뒤흔들 정도로 준수하십니다!”
이어지는 아부에 사람들은 기함을 했다.
“가토왕이 난쟁이족 왕의 태감이 아니었을까?”
“하하하, 난쟁이족은 인간들의 황실과 비슷한 곳에 천황을 세우고, 그곳에 태감들을 잔뜩 들여놨다던데. 그곳 출신인 모양이야!”
“가토왕이 태감이라고? 하하하하……!”
여기저기서 웃음소리가 번졌다. 심지어 운청휘를 적대하는 이들마저도 웃음을 참지 못했다.
난쟁이족, 그중에서도 인왕경을 굴복시키는 일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은은한 쾌감을 안겨주었기 때문이다.
다만, 이어지는 기령의 말들은 그들의 미소를 앗아갔다.
“내 외모를 그렇게 칭찬했다면, 그 충성심을 한번 보여 봐! 무슨 맹세까지는 요구하지 않겠지만, 적어도 투항하겠다는 의지는 봐야지.”
기령이 말하며 손가락으로 삼백여 장 밖에 있는 대붕족을 가리켰다.
“배가 고파. 날개 구이를 먹고 싶거든? 대붕족의 반절 인왕경 몇 명을 죽이고 와.”
기령의 말에 대붕족은 바늘에 찔리기라도 한 듯 머리털이 쭈뼛 곤두섰다.
반절 인왕경 몇몇은 즉시 병기를 꺼내 들었고, 가토왕의 분신을 노려보기까지 했다.
공작족, 홍가, 풍가의 분위기도 살얼음판을 걷는 듯했다.
지금은 기령이 대붕족을 공격하게 하지만, 그 화살이 자신들에게 오지 않으리란 법은 없었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