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6화
능천진선의 제안은 뜻밖이라, 운청휘마저 멈칫했다.
이에 기령이 발끈하며 욕을 퍼부었다.
“이 호로자식아, 뭐라고 했냐! 용서하라고? 네놈이 지금 이 아버지와 농담 따먹기라도 하자는 거냐!”
기령으로서는 울분을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소인왕과 능천진선은 연합하여 기령을 공격했고, 운청휘가 제때 공격하지 않았더라면 기령은 영혼이 찢겨 완전히 소멸했을 터였다.
한데, 소인왕이 열세에 몰리니 능천진선이 뻔뻔하게도 이런 말을 꺼낸 게 아닌가.
-이 건방진 짐승 새끼가! 본선이 네놈을 못 칠 줄 아느냐!
능천진선이 다시 노발대발하며 화를 내기 시작했다.
“짐승 새끼라? 하찮은 진선 따위가 감히 입을 놀리는군.”
운청휘가 미간을 찌푸리며 내뱉었다.
그와 기령은 선제이며, 혼돈에서 태어난 혼돈 영수가 아닌가.
전성기에는 기침 한 번만으로 진선 따위는 우습게 죽일 수 있었다.
그런 이들을 감히 영혼만 존재하는 진선 따위가 우롱한다고?
“건방진 놈!”
운청휘는 다시금 참천검집을 휘둘렀다. 이번에는 선제진해의 제2식인 검쇄공간이 펼쳐지며 능천진선을 노렸다.
직경 삼만 장의 붉은 검기가 하늘을 빼곡하게 뒤덮는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마, 말도 안 돼! 저만 한 검기가 어디 있단 말인가!
검기는 순식간에 성령안을 뒤덮었다.
대폭음이 일어나진 않았지만, 하늘을 뒤덮은 거대한 연기가 농염하게 깔렸다.
뒤늦게 거센 충격이 천지를 뒤흔들었다.
무인들이라 할지언정 귀를 찢어놓을 듯한 폭음이 대지를 할퀴었다.
검쇄공간은 지금의 운청휘가 발휘할 수 있는 최강의 공격으로, 인왕경을 마주하더라도 몇 번이든 궁지로 몰아넣을 수 있었다.
단지 영혼의 존재로 있는 능천진선이라면 어떨까.
칵……!
빼곡히 모인 구름의 중앙에서 무언가가 터지는 소리가 났다.
성령안이 찢기는 소리였다!
“아……!”
삼천 장 허공 위에서 소인왕이 고통스러운 비명을 내질렀다.
성령안에 금이 가니, 왼쪽 눈에 성령안을 달고 있는 그가 가장 먼저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가 다급히 성령안을 눈에서 빼내니, 금빛이 찬란했던 성령안은 탁하게 흐려져 있었다.
더욱이 동공 안에는 금이 가 있었다.
“금이 가긴 했지만, 아주 망가지진 않았군.”
소인왕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능천진선, 괜찮으십니까?”
소인왕이 뒤늦게 능천진선을 걱정하며 물었다.
능천진선의 중요함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의 오늘은 모두 능천진선의 덕이었고, 그가 없으면 소인왕은 단번에 추락할 터였다.
-이대로 죽을 순 없지. 그러나 본선의 영혼의 힘이…… 칠 할은 망가졌네!
능천진선의 힘없는 소리가 들려왔다.
-우…… 우선 상처를 치료할 곳을 찾고 운청휘와 저 짐승 새끼를 수복해도 늦지 않는다네!
능천진선이 말했다.
“도망쳐야 합니까?”
소인왕이 미간을 찌푸렸다.
능천진선을 만난 후부터, 그에게 도망이라는 단어는 없었다. 늘 존귀함의 길을 걸어왔을 뿐.
그러니 치료할 곳을 찾아 도망쳐야 한다는 사실이 내키지 않았다.
-이대로 남아서 죽고자 한다면, 본선을 원망치 말거라.
능천진선의 소리는 무겁게 깔려나왔다.
동시에 능천진선은 소인왕에 대한 평가를 낮추었다.
사실 고를 수 있었다면, 능천진선은 소인왕에게 기생하지 않았을 터였다.
그는 천부적인 재능이 너무 낮은 데다, 잘난 체가 심했고 안하무인이니 갈수록 그와 공생하는 게 꺼려졌다.
‘소인왕은 쓸모가 없어, 적합한 몸을 찾으면…… 그에게 벗어나야겠어!’
능천진선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사실 그는 소인왕보다는 운청휘라는 몸을 더 원했다.
다만 원한이 있으니 운청휘의 몸에 기생하기가 쉽지 않으리라.
더욱이 운청휘가 소인왕처럼 쉽게 제어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알기에, 아쉬울 따름이었다.
“어딜 가느냐!”
그 순간, 운청휘가 천인오쇠의 우리를 발동하더니 순식간에 소인왕을 가두었다.
-이럴 수가, 운청휘가 천인오쇠도 깨우쳤다니……!
능천진선은 또다시 충격에 사로잡혔다. 선계에서도 몇 없는 이들만이 천인오쇠를 터득했기 때문이다.
-소인왕, 시간이 없으니, 그 기술을 사용하게.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이곳을 벗어날 수 없다네!
능천진선이 갑자기 재촉했다.
“그 기술이라면…….”
선택의 기로에 놓인 소인왕은 잠시 고민했으나,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눈에 한스러움이 스쳤다.
“운청휘, 이 빚은 반드시 열 배로 갚아 주마! 태을규금결의 혈방패!”
소인왕의 외침과 함께, 그의 온몸이 핏빛으로 물들었다.
다음 순간, 그는 하늘 저편으로 순식간에 멀어졌다.
“태을규금결……?”
재차 검쇄공간을 사용하려던 운청휘는 멍하니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저것은…… 본제가 선계에서 창조한 무공?”
“운청휘, 왜 그래?”
기령의 의아하다는 얼굴로 물었다.
기령이 보기에 운청휘가 곧바로 검쇄공간을 사용했다면, 소인왕을 놓치지 않을 수도 있었다.
“태을규금결이다!”
운청휘가 낮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태을규금결? 소인왕이 방금 쓴 혈방패가 그거야?”
기령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무공이 얼마나 대단하길래?”
기령은 운청휘가 태을규금결 때문에 놀라서 멈춘 거라고 여겼지만, 동시에 의아하게 여겼다.
운청휘의 신분이라면 온 우주에서 어떤 무공을 보아도 놀라지 않아야 했다.
“태을규금결은 내가 만든 무공이다.”
그리 말하며, 운청휘는 소인왕이 있던 자리를 바라보았다.
그의 동공에는 여전히 의문이 남아 있었다. 소인왕이 어찌 태을규금결을 쓸 수 있단 말인가?
“뭐라고?!”
기령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기령도 이제 운청휘가 멍하니 선 이유를 알게 되었다.
“운청휘, 네가 창조한 무공이 천성대륙에 떨어졌다는 건, 선계에서 천성대륙으로 통하는 길이 있다는 거 아니야?”
“그럴 수도 있겠군.”
운청휘가 고개를 끄덕였지만, 아직도 이해할 수 없었다.
“이상하군. 태을규금결은 몇 명의 심복들에게 전수했으니, 그들이 외부에 유출했을 리가 없다. 그러니 천성대륙에 우연히 떨어졌다고 볼 수는 없군.”
기령도 잠시 생각에 빠졌다.
잠시 후, 기령이 크게 외쳤다.
“운청휘, 선계에 있을 때 혹시 능천진선이 네 부하였던 거 아니야?”
“그럴 수도 있겠지만, 진선은 나를 볼 자격도 없다. 부하라고 해도 태을규금결을 전수할 리가 없지.”
운청휘의 안색은 여전히 어두웠다.
그의 전성기 시절, 진선은 운청휘에게 차를 따를 자격마저도 없는 조그만 존재였다.
운청휘의 심복이 태을규금결을 능천진선에게 전수할 가능성은 염두에 두지도 않았다.
그가 심복으로 여긴 이들은 운청휘가 잘 아는 이들이었고, 그들은 운청휘가 동의하지 않으면 누구에게도 전수하지 않을 테니까.
“운청휘, 태을규금결을 누구에게 전수했는지 잘 생각해 봐. 하나씩 배제하다 보면 답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몰라.”
기령의 설득에, 운청휘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한 번 생각했다. 내 심복들은 이 무공을 외부인에게 전수하지 않을 터.”
“그래도 운청휘, 네가 전수한 거잖아?”
기령의 그 말에, 운청휘의 머릿속에 뭔가 빠르게 스쳤다.
“그렇군!”
운청휘가 갑자기 말했다.
“그때 보았던 부상당한 위선(伪仙)이로구나!”
“부상당한 위선?”
선계에서 인선(人仙) 이하의 생령은 모두 위선이라 불린다.
인선은 등급이 가장 낮은 선인으로, 천성대륙에서는 성경의 무인이라 할 수 있다.
“선계에 있던 시절, 지요여제와 함께 각각 기회를 준 적이 있다. 상대는 부상을 입고 죽어가던 위선이었지. 그때 내가 준 기회가 바로 태을규금결이었다.”
운청휘가 기억을 더듬었다.
“그럼 능천진선이 그 위선인 거야?”
기령이 운청휘를 보며 말했다.
“십중팔구는 그럴 테지.”
운청휘가 말했다.
“그럼 그 위선이 능천진선인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지 않겠어?”
기령의 말에, 운청휘는 조금 난감해졌다.
“당시에 이미 선제였거늘, 또 어찌 신식으로 위선을 관찰하겠느냐.”
운청휘의 뜻은 분명했다.
그가 비록 그 위선에게 기회를 주긴 했으나, 위선을 직접 본 적이 없으니 신식으로 관찰해도 의미는 없었다.
즉, 반드시 알아본다는 보장은 없었다.
“이건 그만 생각하고, 잠시 폐관할 곳을 찾아보자꾸나. 소인왕과 능천진선을 직접 찾지 않아도, 그들이 스스로 찾아올 터.”
운청휘가 어깨를 으쓱였다. 귀중한 시간을 그런 인물에게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그 말이 맞아!”
기령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중에 그들을 잡아서 심문하면, 뭐든 알게 될 거야!”
잠시 후 기령이 또 말했다.
“그래도 운청휘, 싫은 소리를 조금 할게. 능천진선과 소인왕은 내 영혼을 찢어 죽이려고 했잖아. 나는 반드시 복수를 해야겠어!”
“당연한 이치다.”
운청휘가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위선이 정말 능천진선이라면, 그에게 줬던 모든 것을 회수하겠다!”
당초 그 위선은 무위를 잃었으나, 지요 여제가 그의 무위를 회복시켜 주었고 운청휘는 태을규금결을 전수하여 재기의 밑천을 마련해 주었다.
그 위선이 지금껏 얻은 모든 성취는 전부 두 선제 덕분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