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58화
능천진선이 이리 시원스레 거절해 버리니, 소인왕은 속으로 분노할 뿐이었다.
그는 이를 악물며 화제를 돌렸다.
“그렇다면 운청휘와 혼돈영수를 어찌 처리하실 겁니까?”
-자네는 그의 상대가 아니니, 누군가는 그의 상대가 된다는 것이겠지!
능천진선은 어딘가 소인왕에 대한 불만이 가득한 모양이었다.
-잊지 말게나. 그대를 영흥제국에서 초청한 인왕경들은, 지금 유적 내에 있음을.
“그들에게 운청휘를 상대하게 할 것입니까? 다만 이 유적 내에서는 무위가 억압될 텐데요?”
소인왕이 물었다.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그들의 무위는 확실히 억압을 받겠네만, 본선이 진선이라는 것을 잊지 말게나!
능천진선이 조용히 말했다.
-며칠간 본선은 이 유적 내를 대략적으로 훑어보았네. 인왕경을 억압하는 이유도 알아냈지. 본선이 그 인왕경들을 도와 ‘원인’을 피하게 한다면, 그들이 유적 내에서도 본신의 힘을 발휘할 수 있다네.
* * *
소도도는 혼수상태에 빠진 소엽을 꽉 껴안고 있었다. 그의 눈시울은 충혈되어 있었고, 전신에서 슬픈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진상상은 그를 걱정했지만, 할 수 있는 일이 없어 그저 한숨만 내쉴 뿐이었다.
“소 소주, 소엽 아가씨의 기가 이미 사라질 정도로 약해졌는데…… 그녀를 계속 데리고 다니면 상황만 악화될 겁니다.”
진가의 반절 인왕경 한 명이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소도도는 고개를 살짝 돌리더니 담담하게 대꾸했다.
“자네들이 이곳에 온 목적은 봉마비를 찾기 위함이지? 자네들에게 폐가 되고 싶지 않네. 이쯤에서 헤어지세.”
말을 마친 소도도는 소엽을 끌어안은 채 천천히 나아갔다.
말이 나아가는 것이지, 정처 없이 헤맬 뿐이었다.
-진 소주, 저희의 목적을 잊으시면 안 됩니다. 이대로 시간을 소 소주에게 허비하시겠습니까?
진가의 반절 인왕경 몇몇이 진상상에게 전음을 보냈다.
진상상의 얼굴에 난처한 빛이 떠올랐다.
그는 당연히 이번 여행길의 목적을 잊지 않았지만, 형제인 소도도를 포기할 수도 없었다.
잠시 침묵한 끝에, 진상상이 입을 열었다.
“진범(陈帆), 진려(陈黎), 진연(陈渊). 그대들은 일가를 이끌고 봉마비를 찾으로 가시게. 나는 내 형제와 함께 제수를 구할 방법을 찾겠네.”
진상상이 말한 이들은 모두 진가의 태상 장로로, 반절 인왕경의 무위를 지니고 있었다.
-소엽을 구하겠다고요? 소주, 정말로 소엽 아가씨를 구할 수 있다고 보십니까?
-소주, 소엽 아가씨가 무슨 독에 걸렸는지도 모르는데, 어디서 해독법을 찾겠습니까!
-만약 바깥이라면 우리가 진가의 자원을 동원하여 찾을 수 있습니다. 허나 저희가 지금 상고 유적에 있다는 사실을 소주께서 잊지 마시길!
세 사람이 잇따라 진상상에게 음을 전했다.
“내 형제가 무엇을 찾으려는지 알고 있어. 이변이 없다면 그는…… 운청휘를 찾고 있을 거야!”
진상상이 중얼거리며 말했다.
“운청휘?”
그 이름을 듣자 세 사람은 어색한 침묵에 잠겼다.
운청휘는 그들에게, 심지어 진가 전체에 있어 생명의 은인이었다.
다만 운청휘가 상고 유적에 들어온 이유가 봉마비라는 걸 알게 된 이후로, 그들의 마음에도 간격이 생기고 말았다.
봉마비는 진가 가주가 노리고 있는 물건이니, 어찌 그들과 봉마비를 쟁탈하려고 한단 말인가?
그들이 보기에, 운청휘는 자신들과 협력하는 게 마땅했다.
-소주, 운청휘가 비록 강하지만 인왕경은 아닙니다. 소엽이 무슨 독에 걸렸는지도 모르는데, 운청휘가 해독하려고 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 아닐까요?
-소주, 소도도가 운청휘를 찾는다고 하니 차라리 보내주세요. 운청휘가 소엽을 구하지 못해도 소도도를 보호하는 데는 문제가 없을 겁니다.
운청휘를 언급한 후, 세 사람의 말투는 조금씩 달라졌다.
소도도에 대한 호칭도 변했고, 진상상은 이를 감지했다.
진상상이 눈살을 가볍게 찌푸렸다.
“두말하지 않겠소. 일가를 이끌고 봉마비를 찾으러 가시오. 나는 내 형제와 함께할 테니!”
수십만 장 바깥에 있던 운청휘와 기령은, 신식을 사용하여 이 대화를 모두 들을 수 있었다.
진가의 태상 장로 세 명의 태도는 운청휘의 안색을 어둡게 만들었지만, 진상상의 말은 운청휘의 마음을 누그러뜨렸다.
‘그야말로 내 형제가 될 자격이 있군.’
진상상의 됨됨이는 운청휘를 감동시켰고, 소도도와의 관계도 있으니 운청휘는 진상상을 형제로 받아들였다.
“운청휘, 소엽이 어떤 독에 중독된 건지 알 수 있겠어?”
기령이 옆에서 물으며 신석을 소엽의 몸으로 보냈다.
그러나 소엽의 몸에서는 묘한 힘이 관찰될 뿐이었다.
“독에 중독된 게 아니다.”
운청휘가 말했다.
“독이 아니라면 왜 혼수상태인 건데?”
기령은 이해할 수 없었다.
“소엽의 몸에 있는 힘을 발견하지 않았더냐. 싹트고 있는 생명이다.”
운청휘가 다소 굳은 안색으로 말했다.
“싹트고 있는 생명이라면……?”
기령이 듣고 안색이 크게 변했다.
“운청휘, 설마 어느 존재가 소엽을 통해 다시 태어나려는 거야?”
“비슷하다. 다만 태어나는 게 아니라, 빼앗는 것이지.”
운청휘가 수정했다.
“도도의 마음이 급할 테니, 이만 가 보지.”
운청휘가 기령을 재촉했다.
한두 번 숨을 내쉴 법한 시간이 지나고, 운청휘와 기령이 소도도 일행 앞에서 모습을 드러내었다.
“운 형제……!”
“운청휘!”
소도도를 비롯한 일행들은 운청휘와 기령의 등장에 어안이 벙벙했다.
“형제, 드디어 왔군!”
한 손에 소엽을 끌어안은 소도도가 다른 손으로 운청휘를 덥석 끌어안았다.
붉게 물들었던 눈에서 눈물이 넘쳐흘렀다.
사흘 전 소엽이 갑작스레 혼수상태에 빠진 후로 소도도의 심신은 붕괴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소도도에게 있어 소엽은 그의 생명보다도 중요한 존재였으므로.
운청휘는 그 점을 알고 있었기에 기령에게 소식을 들은 순간부터 무섭게 달려온 터였다.
운청휘는 곧바로 신식을 내보내 소엽의 몸을 확인했다.
혼수상태에 빠진 영혼을 찾아냈고, 신식으로 보호막을 만들어 그녀의 영혼을 감쌌다.
“도도. 소엽이 언제 어디서 혼수상태에 빠졌지?”
운청휘가 소도도를 보며 말했다.
“기괴한 사당 안쪽이었다네!”
대답은 진상상이 대신해 주었다.
기괴한 사당?
운청휘는 의아했으나, 곧바로 답했다.
“그 사당으로 안내 부탁하지!”
“알겠네!”
소도도와 진상상이 거의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진 소주! 아니됩니다!”
진가의 태상 장로 세 사람이 곧바로 반대하고 나섰다.
“진 소주, 그 사당은 기괴합니다. 천성대륙 전체를 살펴봐도, 쥐를 모시는 사당이 어디 있습니까?”
“기괴한 것을 넘어서, 저희마저도 그 사당에서 공포를 감지했습니다.”
“사당 근처에는 반드시 공포스러운 존재가 있을 것입니다.”
“더욱이 가주님께서도 전송 옥석으로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그 사당에 접근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곳은 저희 가주님도, 다른 인왕경도 건드리지 못하는 곳입니다.”
진가 태상 장로들의 말을 들은 순간, 운청휘의 동공이 수축하였다.
그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상상, 그 사당이 쥐를 모신다고 했나?”
진상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생김새가 보통의 쥐와는 다르고, 영수가 확실했네. 구체적인 정체는 모르겠네.”
소소도가 옆에서 거들었다.
“운 형제, 자네라면 그 쥐의 정체를 알지 않겠는가?”
“짐작은 할 수 있지만, 정확한 건 사당에 가 봐야 알 수 있다.”
운청휘의 목소리가 저도 모르게 무거워졌다.
천성대륙이든, 선계든 모두 사당이 성행하여 제사를 지내곤 한다.
다만 운청휘는 세간에 진정한 신은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들이 모시는 신이란, 그저 무위가 높은 무인이 아니었을까.
운청휘를 모시는 사당마저 존재하니, 그 가능성을 낮잡아볼 순 없었다.
다른 선제들을 모시는 사당도 있는 터였다.
‘사당을 열 자격이 있고 생령이 무릎을 꿇을 수 있다면 적어도 도조(道祖)의 존재다.’
운청휘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도조에 도달해야 향불의 기를 받을 수 있지. 물론, 도조가 아니더라도 천부적인 재능을 지닌 생령도 비법이 있다면 향불의 기를 받는데…… 가령, 서영서!’
“운 형제여, 우리 일행이 상고 유적에 들어왔을 때 기이하게도 이 사당이 나타났다네.”
진상상이 덧붙였다.
“음?”
기이하다는 표현에, 운청휘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의 추측은 점점 무게를 더하고 있었다.
“도도, 가보도록 하지!”
운청휘의 시선은 진상상에게 머물다 소도도에게 넘어갔다.
소도도가 고개를 끄덕이곤, 곧바로 운청휘를 따라 하늘로 솟구쳤다.
진상상은 그들을 뒤따라가고 싶었으나, 태상 장로 세 사람이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진 소주, 저희가 상고 유적에 들어온 목적을 잊지 마십시오!”
운청휘는 기령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앞장섰고, 소도도는 소엽을 끌어안은 채 뒤를 따랐다.
소도도는 진상상이 붙들려 있는 모습을 힐끔 보고 입을 열었다.
“운 형제, 상상은…….”
운청휘가 말을 끊었다.
“그들 일가의 일은 스스로 처리하게 하고, 우리는 우리의 길을 간다.”
기령이 비아냥거렸다.
“도도, 진가는 영주 8대 가문 중 하나고 대권을 장악하고 있는데 소엽이 중독된 일이 그들이 신경이나 쓸까.”
기령은 이미 신식으로 태상 장로들이 보낸 음을 들은 터였다.
진가는 이미 소도도와 소엽에게 마음이 돌아선 터였다.
소도도와 소엽을 객식구로 여겼고, 진상상의 체면이 아니라면 진작 그들을 버리거나 죽였을 터였다.
소도도는 곧바로 기령의 말뜻을 알아차렸고, 묵묵히 길을 재촉했다.
한편, 진상상은 운청휘 일행이 멀어지는 것을 보고 자책하며 입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