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68화
“원래는 봉마비를 찾고 네놈을 죽이려고 했거늘. 네놈이 스스로 찾아올 줄은 몰랐군!”
공작왕의 아름다운 얼굴에 냉랭한 살기가 떠올랐고, 다시금 손을 휘두르니 법원의 힘이 방출되었다.
운청휘는 받아치는 대신, 신형을 날려 공격을 피했다.
그가 있던 자리에는 삼천 장에 달하는 구덩이가 파였다.
역시 인왕경의 전투는 문명을 파괴하는 전투라 할 수 있었다.
그저 가볍게 날린 공격 한 번이었건만, 지면이 초토화되었다.
“응? 설마 진법인가?”
공작왕이 미간을 찌푸리더니 움직임을 멈췄다.
일찍이 그녀의 분신이 운청휘와 함께 지냈기에, 그가 진법에 조예가 깊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고작 진법일 뿐, 우리를 곤란하게 만들 수 있겠는가?”
대붕왕이 코웃음을 쳤다.
그는 단번에 공작왕을 지나쳐, 기령과 운청휘를 잡으려 했다.
대붕왕은 담력이 큰 사람이니, 자신감을 무기로 지닌 이에겐 어떤 수단도 통하지 않으리라.
단번에 사살황천진 안으로 대붕왕의 신형이 파고들었다.
다음 순간, 대붕왕은 귀를 찌르는 처절한 비명을 들었다. 곧 그의 앞에 네 마리의 거대한 짐승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청룡, 주작, 백호, 현무……. 이, 이것은 사성수의 사상?”
대붕왕은 땀을 뚝뚝 흘렸고 전대미문의 위기를 느꼈다.
“공작왕, 그대의 말처럼 여기에 진법이……!”
대붕왕은 급히 공작왕에게 자신이 본 것을 알리고 싶었으나, 말을 끝마치지 못했다.
공작왕은 보이지 않았고, 눈앞의 세계는 더없이 어둡고 황량하게 변해 있었다.
진법 밖에서 공작왕은 미간을 찌푸렸다.
대붕왕이 움직이기는커녕, 미동도 없이 허공에 떠 있는 게 아닌가.
“환상!”
공작왕은 대번에 대붕왕의 처지를 알아차렸다.
“공유, 나를 죽이고 싶지 않더냐! 이 기회를 놓친다면 다시는 기회가 없을 것이다!”
운청휘의 쩌렁쩌렁한 외침이 들려왔다.
“환상이면 또 어떠한가. 본왕의 무위로 환상 따위를 깨지 못하겠는가?”
공작왕이 코웃음을 치며 진 안으로 들어섰다.
그녀는 나름대로 속셈이 있었다.
아무리 환상에 빠져 있다 한들, 운청휘의 무위로는 그녀를 상처 입힐 수 없었다.
그 사실을 아는 만큼 그녀는 환상에 맞서기로 한 것이다!
“세 인왕이 나를 대신해 널 대접할 것이다. 잘 즐겨 보도록!”
핏빛 주작을 마주한 공작왕은, 귓가에서 어른거리는 운청휘의 목소리를 들었다.
“말하지 않은 게 있군. 이 환상에서 죽게 된다면 네 영혼도 죽는다. 모쪼록 즐겨 보아라. 본제가 준비한 혈주작을!”
운청휘는 말을 마치고 기령을 끌어안고 진법 범위를 벗어났다.
“선배님들, 공격하시죠.”
운청휘의 신호가 떨어졌다.
그러자 세 신형이 운청휘 앞에서 모습을 드러내었다.
진법 밖에서 본 공작왕과 대붕왕은 환상에 잠긴 듯 허공에 떠 있을 뿐이었다.
운청휘는 곧바로 기령을 안고 상공으로 솟구쳤다.
무려 만오천 장을 올라간 후에야, 운청휘는 부상을 멈추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이 높이에서라면 모든 국면이 보일 터였다.
물론 단순한 감상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전투 상황을 알고 싶다면 신식만 내보내면 그만이었다.
단지 세 인왕의 공격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서였다.
별안간 아래쪽에서 천지를 뒤흔드는 굉음이 들려왔다.
숨 쉴 틈도 없이, 주변의 대지는 초토화되고 쑥대밭을 이루었다.
세 왕은 천 장 허공에 떠 있었는데, 그들의 주변도 엉망이 되긴 마찬가지였다.
온갖 불빛과 연기가 자욱하게 피어올랐다.
“이대로 대붕왕과 공작왕이 버틴다면, 이 대지는 폐허가 될 거야, 운청휘.”
기령이 말했다.
“이 작은 세계를 너무 우습게 봤어.”
운청휘가 고개를 저었다.
“이곳의 구조는 천성대륙보다 단단하다. 다만 다른 인왕이 올까 걱정이구나.”
운청휘가 말한 인왕이란 나머지 다섯 인왕이었다.
그들은 모두 적대적인 입장이니, 나타나면 실로 곤란했다.
“만약을 위해 이 구역과 외부를 차단하는 진법을 포진하지!”
운청휘는 사살황천진을 중심으로, 반경 삼백만 장 내로 영력을 감추는 진법을 설치했다.
이제,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바깥에서 알 수 없다. 설령 용이 포효해도 들리지 않을 터였다.
그렇게 이 각이 지난 후.
대붕왕과 공작왕은 인간에서 금수 형태로 변해 있었다.
“그들이 부상을 당했어!”
기령이 기뻐했는데 그들의 예상과 비슷했다.
“영수는 무의식중에 공격을 받으면 자연스레 본체로 변신하기 마련이지!”
물론 여기서 만족할 운청휘가 아니었다.
가령 진법을 사이에 두고 있지 않았더라면, 세 인왕들을 시켜 근거리에서 공격할 터였다.
이 각이라면 공작왕과 대붕왕을 격파하기 충분한 시간이었지만 변신하는 데 그쳤다.
이는 세 인왕이 실력을 숨기는 게 아니라, 이 세계가 붕괴할까 봐 힘을 아낀 탓이었다.
다시금 이 각이 지나고.
공작왕과 대붕왕의 찬란한 날개는 갈기갈기 찢겨 있었다.
제방을 뚫은 강처럼, 피가 사방에서 터져 나왔다.
“운 공자…… 계속 공격해야 하는가?”
구인왕은 공격을 서서히 멈추고 운청휘를 바라봤다.
이때 반경 100리 내에 있는 대지는 깊이 수만 장이나 되는 거대한 구멍으로 변했다.
“노부는 이대로라면 이 세계가 침몰할까 걱정이라네!”
구인왕의 걱정도 무리가 아니었다.
설령 영주라 해도 그들이 전력으로 하는 공격을 감당하지 못하는데, 하물며 작은 세계는 어떠하겠는가?
“걱정 말도록, 이 세계는 천성대륙에도 견줄 수 있다.”
운청휘의 말에 구인왕은 마음을 놓고 공격을 이어 갔다.
그들의 대화를 들은 다른 인왕들도 계속해서 대붕왕과 공작왕에게 공격을 퍼부었다.
다만 그들의 마음에는 작은 의문이 고개를 들었다.
운청휘가 어찌 이 세계의 공간 구조가 천성대륙과 견줄 수 있음을 알고 있을까?
애석하게도, 세 인왕은 운청휘의 오판을 알지 못했다.
운청휘도 스스로의 오판을 알지 못했다.
이는 그가 예상치 못한 이변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동시각. 대륙 임해의 끝.
소인왕의 육신을 차지한 능천진선은 ‘태을규금결’의 수련에 미친 듯이 열중하고 있었다.
그의 주변에는 겹겹의 진법이 둘러쳐져 있었는데, 인왕이라도 그를 발견할 수 없었고 진법을 깨트릴 수 없었다.
“역시 운제께서 예상하신 것이 옳았다. 적어도 사흘, 그 안에 인왕경에 도달하겠지. 이번에는 시간을 허투루 낭비하지 않겠다!”
수련을 진행하면서도 능천진선은 암암리에 바깥 세계의 소식을 감지하고 있었다.
어느 순간, 지상에서 가벼운 흔들림이 감지되었다.
가벼운 진동이라 능천진선은 순간 자신이 착각한 것은 아닌지 의심했다.
“응? 누군가 전투라도 하는 건가. 아냐, 바다에 무슨 일이 생겼군!”
능천진선의 신식은, 해안가로 밀려 들어오는 물고기 떼를 발견했다.
그 수가 매우 많고, 종도 다양했다.
어찌나 많던지, 능천진선의 신식으로도 그 수를 다 헤아릴 수가 없었다.
이 물고기들은 미친 듯이 해안으로 몰려왔는데, 그 모습이 괴이하기 짝이 없었다.
능천진선도 이런 일은 처음이라 눈여겨보았다.
그의 신식으로도 물고기가 중독되었거나 다른 이상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남은 가능성은, 이 물고기들은 극렬한 공포에 빠져 살아남기 위해 해변까지 밀려왔을 터였다.
잠시 망설이던 능천진선은 결국 호기심을 억눌렀다. 그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일은 인왕경에 도달하는 것이지, 물고기 떼의 흐름 따위가 아니었다.
그러나 서너 시진도 지나지 않아, 능천진선은 진법 안까지 밀려들어오는 물고기 떼를 느꼈다.
운청휘가 포진한 진법은 공격력이 없는 이들에게는 적용되지 않기에 일어난 일이었다.
능천진선은 결국 수련을 멈추고 허공으로 떠올라 상황을 살폈다.
‘설마 어느 생물이 물고기들을 죄다 쫓아내고 있단 말인가?’
능천진선은 곧 고개를 저었다.
이 넓은 바다에서, 이만한 물고기들을 한 방향으로 몰아낼 수 있는 생물이 있겠는가?
의혹을 품은 능천진선은 무려 세 시진 가까이 날아간 끝에야 원인을 찾을 수 있었다.
바다의 한복판에서, 거대한 소용돌이가 끊임없이 해수를 집어삼키고 있었다.
더욱이 소용돌이는 점점 넓어져, 육지로 확대되고 있었다.
발버둥치던 물고기 떼는 소용돌이에 휩쓸렸고, 거센 물살에 산산조각이 났다.
능천진선은 문득 운청휘와 기령이 이 해역에 왔음을 떠올렸다.
설마, 이 변고가 그들과 관련이 있는 것일까?
“어찌 되든 운제께 알리러 가야 한다!”
능천진선은 곧바로 몸을 돌려 육지로 향했다.
갈 때와는 달리 두 시진만에 돌아온 육지는 밀려나온 물고기들로 빼곡하게 채워져 있었다.
“젠장, 운제께서 주신 전송 옥석을 왜 잊고 있었을까!”
뒤늦게 운청휘가 주고 간 전송 옥석을 떠올린 능천진선이었다.
그는 육지로 계속 질주하는 동시에 옥석을 꺼내어 간결하게 전달했다.
“큰일입니다. 바다에 거대한 소용돌이가 나타나 바다를 집어삼키고 있습니다. 소선이 보기에는 육지가, 아니, 이 세계 전체가 붕괴할 것 같습니다!”
* * *
대붕왕과 공작왕의 상태는 처참했다.
기령은 해맑게 웃으며 둘을 바라보았다. 두 눈에는 감출 수 없는 빛이 반짝이고 있었다.
“운청휘, 공작왕은 양보할게. 적어도 대붕왕은 내게 줘, 헤헤!”
기령은 흘러내리는 군침을 닦으며 웃었다.
그래, 둘이니 그들이 각각 하나씩 삼킬 수 있으리라. 운청휘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둘을 삼키면 우리의 실력은 질적으로 도약할 거야! 그때가 되면 저 인왕들의 도움이 없어도 다른 인왕을 죽이겠지. 그뿐이야? 영주 전체에 있는 적들은 모두 우리의 무위를 상승시킬 자양분이 되는 거야!”
기령이 흐뭇하게 말을 이었다.
그간의 경험을 통해, 기령은 무위의 회복을 간절하게 갈망하고 있었다.
전성기의 기령이 인왕경 따위의 핍박을 받을 줄 상상이나 했겠는가?
운청휘의 갈망도 못지않았다.
특히나 동생 채아의 혼이 흩어져 혼수상태에 빠져 있는 것을 생각하면, 하루라도 빨리 무위 전체를 회복해야 했다.
애초에 영주에 온 목적도 참천신검을 찾기 위함이 아니었던가. 참천신검이 있어야 명계로 건너갈 수 있었다.
‘이곳을 떠나면 즉시 참천신검을 되찾겠다!’
운청휘가 속으로 중얼거리며 앞으로의 계획을 세우던 그때.
“무슨 일이지?”
운청휘의 안색이 급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