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선제귀환-277화 (277/430)

제277화

운청휘는 그 한마디를 남긴 채 밀실 안에서 연기처럼 흩어져 버렸다.

비록 교룡왕을 책망하진 않았지만, 그에게 좋은 인상을 가질 순 없었다.

기령과 도도 일행이 스스로 떠났고, 교룡왕이 그들을 막을 권리가 없다 한들 폐관 내내 신경 쓰지 않았다는 점이 실망스러웠다.

운청휘의 머릿속에, 교룡왕은 사귈 가치가 없는 사람으로 기억되었다.

교룡왕의 저택을 떠난 운청휘는 전송진을 향해 날아갔다.

그의 안색은 어두웠는데, 일부러 떠올리지 않으려 했던 문제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상고 전쟁터를 나온 후에도 기령과 연락이 되지 않는다.

그 안에서는 특수한 기운으로 외부 세계와 차단된다지만, 밖으로 나온 지금에도 연락이 되지 않는다는 건…….

윙윙윙!

이때, 참천신검이 운청휘를 달래듯이 가볍게 진동했다.

“걱정 말거라. 극복할 수 있으니.”

운청휘가 낮은 소리로 말했는데, 참천신검을 안심시키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이 살심을 억누르긴 힘들군.’

운청휘의 다음 목적지는 대붕족이 거주하는 ‘마배령’이었다.

마배령의 수도 붕성(鹏城)에 도착하니 그곳에 있는 수많은 요족들이 눈에 들어왔다.

대붕족이 대부분이었지만, 대붕족에 충성하는 다른 요족들도 여럿 섞여 있었다.

“하하하, 정말 통쾌하구나. 우리의 왕께서 이미 운청휘의 동료 넷을 학살하셨어!”

“듣자 하니 대붕족의 반절 인왕경에게 처형된 소소도는 운청휘의 의형제라지?”

“맞네. 게다가 처형 과정이 잔혹했다니까? 소도도의 손발을 자르고 목을 베었다더군.”

“오늘 처형된 진관해도 대붕족의 처형을 받았지!”

“진관해가 어떻게 죽었는지, 처참하게 죽었는지 말해 줘!”

“하하하, 진관해는 더 처참했지! 자네들도 알다시피 무위가 일정 단계에 도달하면 팔다리쯤은 없어도 버틴다네. 그래서 산산조각을 내었다지. 한데, 죽을 때까지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는 걸세.”

신식을 통해 흘러들어오는 대화를 듣고, 운청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천천히 상승하여, 천오백 장 허공에 멈춰 섰을 뿐.

이윽고 영라 반지에서 열여덟 개의 마종이 흘러나왔다.

상고 전쟁터에서 죽였던 반절 인왕경급의 흉수 마종이었다.

운청휘는 묵묵히 손을 휘둘러 마종을들 각각 제자리에 배치했다. 곧 거대한 그물 같은 진이 붕성 전체를 뒤덮었다.

진관해가 이곳에 있었다면 진의 정체를 알아차렸을 터. 그들이 처음으로 만났을 때 진관해가 썼던 그 ‘십팔나생문’이었다.

운청휘는 지금, 진관해가 즐겨 쓰는 진법으로 시작하려 하고 있었다.

“반절 인왕경의 마종으로 만든 십팔나생문대진. 관해, 이 부족한 사부가 내딛는 복수의 첫걸음이다!”

곧 운청휘가 열 손가락을 얽히니, ‘십팔나생문’이 발동되었다.

핏빛 점이 허공에서 천천히 퍼져나가더니, 붕성 전체를 뒤덮는 핏빛 막이 되었다.

그 안에 갇힌 요족 중 현경 아래의 요족은 단번에 한 줌의 피가 되었고, 진법을 키우는 양분이 되었다.

이어서 영변경 이하의 요족, 영변경의 요족까지 차례로…….

이 각도 지나지 않아, 붕성 전체는 연옥을 연상케 하는 피바다가 되었다.

무위가 고강한 이들이야 어떻게든 버틴다지만, 그들도 한 줌의 피가 되는 이들의 죽음을 막지는 못했다. 핏빛 안개는 점점 더 짙어졌다.

윙윙윙…….

참천신검의 진동이 더욱더 격렬해지고 있었다.

“계산, 계산이라. 당연하지. 제자를 추모하는 데 필요한 수억의 생령이다. 그리고 이건 시작일 뿐이지.”

운청휘가 말을 마치자 49개의 핏빛이 그의 몸으로 스며들었다.

이것은 업장(孽障)으로, 진정 극악무도한 자만이 업장에 물들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 운청휘는 단번에 49개의 업장을 물들였다.

잔혹한 학살을 벌인 운청휘는, 막대한 대가를 치르게 되었다.

선계의 선제들은 막강한 힘을 지녔지만, 운청휘처럼 수억 명을 죽이지는 않는다.

방금 운청휘가 물든 업장의 규모라면, 대라금선이라도 정신을 잃고 이성이 없는 살인 기계가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운청휘가 지금 이성을 유지하는 건 오직 선제의 의지 덕분이었다.

“다음은 공작령이군. 나의 형제 소도도에게 수억 명의 목숨으로 제사를 올려 주마.”

운청휘의 열 손가락이 얽히자, 진법이 가속화되었다.

그나마 버티고 있었던 공적경과 반절 인왕경의 요족들마저 사지가 찢기는 듯한 비명을 내지르다…… 피 안개가 되어 사라졌다.

붕성의 수억 생명이 목숨을 잃는 데는 고작 이 각도 지나지 않았다.

진의 효과로 외부 세계에서는 붕성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를 터였다.

운청휘는 다음 목적지인 공작령의 수도 공작성으로 향했다.

붕성에서의 일을 똑같이 벌여 주려 했으나, 문득 운청휘의 머릿속에 묵안유와 묵해가 떠올랐다.

북영 요족의 오지에 떨어졌던 자신을 구해준 노인과 손녀가 아닌가. 공유에게 이들의 신변을 맡겼지만, 이제 공유와 적대적인 관계이니 그들을 데려가야 했다.

운청휘는 공작보루에 도착한 뒤, 신식을 펼쳐 그들의 위치를 추적했다.

묵해와 묵안유는 작은 뜰에 감금되어 있었는데, 서른 명의 호위가 사방을 둘러싸고 있었다. 모두 현경의 무인들이었다.

‘이렇게 많은 이들을 배치한 걸 보니, 묵해와 묵안유를 인질 삼아 협박하려는 생각이로군.’

운청휘는 곧장 포위된 작은 뜰로 날아갔다.

“고작 일반인 두 명을 지키자고, 우리 같은 현경 고수가 밤낮으로 동원되어야 한단 말인가.”

“보통 일반인이 아냐. 운청휘와 관계가 깊은 자들이네.”

“나도 들었어. 특히 묵안유는 운청휘의 생명을 구했다지?”

“그러니 우리더러 지키게 하는 거겠지. 저들을 잘 지키고, 저들이…….”

한창 신나게 떠들던 호위가 별안간 무릎을 꿇었다.

“태상 장로, 어찌 오셨는지요?”

“태상 장로를 뵈옵니다!”

“태상 장로를 뵈옵니다!”

호위의 앞에는 공적경의 공작족 노인이 서 있었다.

“묵해와 묵안유를 데리고 나오게!”

태상 장로라 불린 노인이 말했다.

“네, 태상 장로님!”

두 호위는 즉시 명을 따라 묵해와 묵안유를 데리고 나왔다.

“궁주께서 노부에게 명을 내리셨네. 이들을 영주성으로 데려가야 하니 이만 물러가게.”

노인이 손을 흔들자, 공원의 힘이 두 개의 밧줄 모양으로 변해 묵해와 묵안유를 묶었다.

“태상 장로님, 저들로 운청휘를 위협하는 것인가요?”

한 호위가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그렇네!”

노인이 선선히 답했다.

“저들은 운청휘의 은인이니, 어린 신동을 대체할 수 있다.”

“어린 신동을 대신해요? 설마 궁주께서 어린 신동을 죽이지 않기로 한 건가요?”

호위가 또 물었다.

“아닐세. 본래는 어린 신동을 처형하려 했으나, 변고가 있어 진관해가 처형되었지.”

“변고? 무슨 변고죠? 어린 신동과 관련된 것인가요?”

“그렇다네. 어린 신동은 영흥 제국에서 끌고 갔다네.”

공적경의 태상 장로가 말했다.

“청휘 오라버니……!”

그때, 밧줄에 묶여 있던 묵안유가 소리를 질렀다.

순간 모든 이들이 묵안유가 바라보는 곳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들의 뒤에는 붉은 장포를 휘날리는 운청휘가 서 있었다.

“우, 운청휘…… 네, 네놈이 어떻게 이곳에?”

공작족의 태상 장로는 주춤주춤 물러나며 운청휘를 노려보았다.

“안유, 묵 할아버지!”

운청휘는 주변의 공작족을 외면한 채, 묵안유와 묵해만 바라보며 다가갔다.

수백 장의 거리지만, 운청휘에게는 한 걸음이나 다름없었다.

어느새 그는 묵안유와 묵해의 곁에 나타나 있었다.

“그동안 고생을 시켰군. 미안하다.”

운청휘는 진심을 담아 사과했다.

그가 나타났기 때문인지, 묵안유와 묵해를 묶고 있던 공원의 힘이 슬그머니 사라졌다.

“청휘 오라버니, 마침내…… 또 만나게 되었네요!”

묵안유는 기쁨에 겨워 눈물을 흘리고 운청휘의 품에 안겼다.

“청휘, 그동안 아무 일도 없었는가?”

묵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비록 그가 보통 사람이라곤 하나, 오래 살아왔기에 지혜가 있었다.

공작족이 그들을 구금하고 운청휘를 노리고 있으니, 상황은 충분히 추측할 만했다.

“나는 괜찮다. 도리어 폐를 끼쳤군.”

운청휘가 한 손으로 묵안유의 등을 두드리며 묵해를 (바라보았다.

“걱정하지 말도록. 너희의 고통은 천 배로 갚아 주마.”

운청휘가 눈을 가늘게 뜨며 낮게 중얼거렸다.

“천 배로 갚는다? 하하하, 운청휘, 아직도 자신의 처지를 모르는 게냐!”

“일곱 왕이 영주 전체에서 네놈을 찾고 있는데, 스스로 나타날 줄이야!”

“헛소리하지 마라. 운청휘, 네놈이 무릎 꿇고 잡히겠느냐? 아니면 우리가 친히 네놈을 잡으리?”

“우리가 나선다면 좋지 못한 꼴을 볼 거다!”

현경의 공작족 호위들이 냉소하며 한마디씩 던졌다.

그러나 그들은 몰랐다. 운청휘의 근처에 있는 태상 장로가 운청휘의 기세에 눌려 있다는 사실을.

이 순간, 공작족의 태상 장로는 이 미련한 녀석들을 죽이지 못하는 게 한스러울 따름이었다.

비록 일곱 왕이 운청휘의 주변인을 이용해 그가 나타나도록 유도한다지만, 그들은 엄연히 인왕경의 실력자들이었다.

눈앞에 있는 호위들은 그에 비하면 한낱 현경의 무위. 그런 그들이 운청휘에게 무릎을 꿇으라고 하고 있으니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운청휘가 어떤 사람이던가?

반절 인왕경도 일장에 죽이는 자였다.

무엇보다 태상 장로 자신은 운청휘의 기세에 눌려 말을 할 수조차 없었다.

“어? 태상 장로, 왜 그러세요? 안색이 왜 이렇게 창백해졌습니까?”

호위 한 명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태상 장로를 보았다.

태상 장로는 거의 울 듯한 표정이었는데, 마침내 정신을 차리자 가까스로 심호흡을 했다. 그가 힘겹게 목소리를 내었다.

“어…… 어서 빠…….”

“이상하군, 태상 장로께서 말도 제대로 못 하시다니.”

호위가 태상 장로의 말을 끊었다.

“태상 장로께선 헛소리하지 말고 빨리 운청휘를 잡으라고 하시는 거야!”

“그래, 우리가 어영부영 시간을 끄니 태상 장로께서 노하실 만해. 너, 너. 그리고 너. 운청휘를 사로잡아 와!”

대장 격으로 보이는 호위의 말에, 다른 호위 세 명이 동시에 운청휘를 공격해 들어갔다.

“너희들……!”

태상 장로는 조급하다 못해 결국 울상이 되었다.

저 백치 같은 자들은 죽음이 예정되어 있고, 자신도 무사하지 못할 터였다.

그가 하려던 말은 어서 무릎을 꿇고 사죄하라는 말이었지만, 이미 늦고 말았다.

펑! 펑! 펑! 펑!

연달아 네 번의 폭발음이 들렸다. 운청휘의 공격을 본 이는 아무도 없었으나, 달려들던 호위 넷이 공중에서 추락했다.

그들이 뿜어낸 피가 사방으로 튀었고, 고통스러워하며 바닥을 기게 되었다.

“맙소사…….”

남은 호위들이 이 광경에 경악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현경 넷을 단번에 죽이다니, 운청휘는 대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