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84화
“운청휘가 정말로 인왕경에 도달한 것인가?”
인왕들의 안색이 약간 변했다.
“그건 아니라네. 본왕이 운청휘와 마주했을 때 인왕의 기는 느껴지지 않았네!”
초인왕이 기억을 되짚었다.
“인왕경이 아니라면 다행일세!”
그나마 인왕들이 한시름 놓을 수 있는 소식이었다. 만약 운청휘가 인왕경에 도달했다면 운청휘를 사로잡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워진다.
더욱이 운청휘의 옆에는 ‘소인왕’도 있지 않은가?
“자네들 아직도 이곳에 머무르려는 것인가? 운청휘가 그대들의 본거지를 도살하길 바라는가?”
나인왕이 문득 홍인왕, 풍인왕, 진인왕을 일깨웠다.
아직 이 세 인왕의 본거지는 공격당하지 않은 상태였으니.
“본왕은 이미 족속들을 이동시켰으니, 운청휘를 단시간 내에 찾을 거라네!”
진인왕이 교활하게 웃으며 말했다.
“본왕도 족속들을 이동시켰다네!”
“본왕도!”
풍인왕, 홍인왕도 말했다.
“족속들을 이동시켰어도 우리가 이곳에 오래 있을 수 없으니, 운청휘를 위해 포위망을 준비하세나!”
세 왕들이 앞다투어 말했다.
“우리는 모두 진인왕의 본거지 염성(炎城)으로 가서 운청휘를 기다리세!”
진가의 수도인 염성은 그 풍요로움과 호화로움이 말할 것도 없었다.
염성의 전송진 부근에는 높이가 99층에 달하는 주루가 있었는데, 남영 최고의 주루 중 하나인 ‘남영 주루’였다.
일곱 왕은 남영 주루의 꼭대기층에 자리를 잡은 채, 술을 마시며 꼬박 하루를 보냈다.
이따금 나인왕, 초인왕, 대붕왕, 공작왕이 주루의 창가를 서성이며 전송진 쪽을 바라보긴 했다.
“진인왕이 너무 날뛰었구려, 우리 본거지가 모두 소멸된 것을 알면서 한가롭게 술이나 마시고 있다니!”
“운청휘가 나타나면 우리가 진인왕을 놀라게 해야겠군.”
“그 말은, 염성에서 전력을 다해 싸우겠다는 것인가?”
“진인왕이 비록 족속들을 이동시켰으나, 이곳은 진가가 경영하는 염성일세. 이곳이 무너지면 진인왕도 꽤나 마음이 아프겠지.”
막성(莫城)은 남영의 환승지로 쓰이는 성으로, 남영 6성과 연결된 전송진이 많았다.
개중에는 염성으로 가는 전송진이 있어, 운청휘 일행은 막성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운제 대인, 홍인왕과 풍인왕이 족속들을 이동시켰으니, 염성도 같은 결과일 것 같습니다.”
전송진에 들어가기 전에 능천진선이 참지 못하고 말했다.
운청휘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변이 없다면 진인왕도 족속들을 이동시켰겠군.”
“그런데도 염성에 가야 합니까?”
능천진선이 의혹을 참지 못했다.
“가지 않는다면, 일곱 왕이 기껏 준비한 선물을 못 받지 않나.”
운청휘는 흥미롭다는 듯이 답했다.
“운제, 설마 일곱 왕이 염성에 함정을 파놓고 우리를 기다린다는 것입니까?”
능천진선의 말에 운청휘가 고개를 끄덕였다.
“풍인왕과 홍인왕이 본거지를 비웠으니, 염성에 있는 게 당연하지 않겠느냐.”
그들은 대화를 주고받으며 전송진으로 들어갔다.
금빛 섬광이 일었고, 그들은 눈 깜짝할 새에 염성에 도착해 있었다.
“일곱 왕이 다 모였다니, 괜찮은 선물이군!”
전송진을 나오자마자 신식을 펼친 운청휘는 주루 꼭대기층에 있는 일곱 왕을 알아차렸다.
남영 주루, 낯설지 않은 곳이다.
염성에 왔을 때 저곳에서 식사를 하기도 했고, 위기에 처한 진가의 소식을 듣기도 했으니 말이다.
“지난번에는 진가를 구하러 왔건만, 이번에는 진가를 멸망시키러 왔구나.”
운청휘로서도 복잡한 기분에 한숨을 내쉬었다.
“천성대륙이든 선계든 본질은 다를 게 없군. 약육강식을 따르니 생명의 은인이라 한들 이익 앞에서는 입장을 바꿔 대니.”
운청휘는 드물게 씁쓸함을 느꼈다.
일찍이 진가 전체를 구해냈을 때만 해도, 진가의 가주가 이리 배은망덕할 줄 알았겠는가?
“운청휘가 왔다!”
남영 주루의 꼭대기층, 창가를 시시각각 내다보던 네 왕이 운청휘의 종적을 발견했다.
진인왕, 홍인왕, 풍인왕도 창가로 향해 운청휘 일행을 목격했다.
-저들이 염성을 소란스럽게 하기 전에, 우리 셋이 ‘소인왕’을 상대하지!
진인왕이 홍인왕, 풍인왕에게 전음을 보냈다.
-알겠네. 저들 넷이 단번에 운청휘를 사로잡는다면 염성을 구할 수 있겠군!
홍인왕과 풍인왕은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본거지는 여전히 건재하기 때문에, 자연스레 진인왕의 염성도 보호해야 한다.
진, 홍, 풍 세 왕은 제일 먼저 출동했고, 운청휘 일행의 상공으로 날아갔다.
“소인왕, 어서 오너라!”
그들은 여전히 능천진선의 존재를 모르기에, 그를 ‘소인왕’이라 부르며 달려들었다.
“가도록.”
운청휘의 허락이 떨어지자, 능천진선은 곧바로 허공으로 용솟음쳐 세 왕과 전투를 벌였다.
“보아하니 우리의 생각을 진인왕 등이 알아챘군.”
나인왕, 초인왕, 공작왕, 대붕왕이 서로를 쳐다보며 말했다.
“그래, 염성을 파괴시키는 것보다 운청휘를 벗겨버리고 싶어!”
“본왕도 마찬가지라네!”
네 왕은 말을 하는 동시에 주루를 박차고 나와 운청휘에게 쇄도했다.
운청휘는 묵해 등을 보호하며, 허공에서 네 왕과 대치하게 되었다.
능천진선이 세 인왕과 전투를 벌이니,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치듯 허공이 번쩍이고 귀를 찢는 굉음이 연달아 울려 퍼졌다.
인왕의 전투를 처음 목격하는 이들은 흥분에 휩싸여 허공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더욱이 1대1의 전투가 아닌, 1대3이니 놀랄 수밖에.
“맙소사, 진인왕을 봤어!”
“진인왕과 함께 있는 이들은 홍인왕과 풍인왕이군!”
“얼마 전 하가 가주가 상고 유적에서 죽었는데, 또 다른 인왕이 죽는 걸 볼 수 있는 건가!”
“힘들지 않을까. 인왕의 강대함은 우리의 상상을 훨씬 초월해. 1대1이든 1대3이든 인왕의 /@죽음은 나타날 수 없다구.(목숨은 쉽게 거둘 수 있는 게 아니네.”
“그 말이 맞네. 인왕 한 명은 인왕 열 명을 상대할 수도 있지.”
“뭐, 우리는 여기서 구경이나 하세!”
염성 사람들 대부분이 능천진선의 전투에 시선을 주었다.
운청휘와 네 왕의 대치에는 주의를 기울이는 이들이 거의 없었다.
그들은 그저 대치하고만 있을 뿐, 어떠한 공격도 주고받지 않았으니까.
“공유, 오랜만이군!”
운청휘가 공유를 보며 말했다.
“나를 기만하면 공작족을 소멸시킨다고 했던 말을 기억하나?”
이는 공작족의 배은망덕한 행태를 일컫는다.
“운청휘, 본왕이 네놈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기억을 안겨 주마!”
절세 미녀인 공작왕이었지만, 노발대발하며 흉악한 인상을 풍기니 사뭇 섬뜩했다.
“그렇군, 기대하지.”
운청휘는 개의치 않으며 나인왕과 초인왕을 바라보았다.
“그대들과는 원한이 없건만, 물불을 가리지 않고 나를 핍박하러 오는가?”
“짐승 새끼, 날뛰지 말고 우리에게 순순히 꿇어라!”
“본왕은 네놈의 영혼으로 죽어간 족속들을 추모할 것이다!”
나인왕과 초인왕이 음침한 얼굴로 콧방귀를 뀌었다.
“짐승 새끼, 본왕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느냐? 빨리 말해라, 그렇지 않으면 더는 말할 기회가 없을 테니까!”
대붕왕은 운청휘가 그를 쳐다보지 않자 입을 열었다.
“인왕경의 새 고기는 맛이 괜찮으니, 너를 죽여 구워 먹도록 하지.”
운청휘가 영라 반지에서 뼈만 남은 날개 하나를 꺼내 흔들어 보였다.
상고 유적에서 운청휘의 진법에 걸린 대붕왕은 날개를 하나 잃었다. 그 후 한쪽 날개를 운청휘가 구워 먹고 뼈만 남긴 것이다.
“아아아, 짐승 새끼, 네…… 네놈이 감히 본왕의 날개를 구워 먹다니!”
길게 포효한 대붕왕이 운청휘를 잡으러 달려들었다.
“이런 속도로 나를 상대하겠다고?”
운청휘는 비웃음을 남기며 묵해 등을 데리고 삼천 장 밖으로 물러났다.
“법력 감옥!”
초인왕이 호통을 내지르며 법원의 힘으로 만든 감옥을 운청휘 쪽으로 내던졌다.
“이리 보잘것없는 재주로 나를 상대하느냐?”
운청휘가 경멸을 숨기지 않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가 손뼉을 치니 펑 소리와 함께 법력 감옥이 산산이 부서졌다.
“인왕이 고작 이 정도?”
운청휘는 마지막까지 비아냥거림을 잊지 않았다.
“아아아, 짐승 새끼야, 참으로 오만하구나!”
화가 난 초인왕이 법원의 힘을 연달아 열 번 내뿜었다.
운청휘는 가벼운 몸짓으로 이를 피했고, 허공을 스쳐 간 법원의 힘은…….
콰르릉! 쾅!
전부 수천만 장 바깥의 지면을 폭격했다.
다만 성 바깥의 범위에 떨어져, 다친 이는 없었다.
“본왕이 나서겠네!”
나인왕이 재차 나서더니, 법력으로 만든 수천 개의 화살로 하늘을 덮었다. 긴 포물선을 그린 화살들이 일제히 운청휘를 덮쳐 갔다.
“실망스럽기 짝이 없군. 인왕의 공격이 이 정도에 불과한가?”
운청휘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묵해 등을 데리고도 화살을 손쉽게 피해냈다.
“도망치는 재주가 가상하구나. 본왕의 주먹도 피해 보거라!”
공작왕이 마침내 참지 못하고 주먹을 휘둘렀다. 겉으로 보기에는 가냘픈 옥수였으나, 그 손에 천지를 파괴할 위력이 담겨 있었다.
“힘은 세나, 그뿐이다. 한없이 느리군.”
운청휘의 건조한 음성이 공작왕 뒤에서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