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03화
“우…… 운 공자, 당신의 심정을 이해해요. 다만 당신의 요구는…… 천단각 본부에서도 응답할 수 없을 거예요.”
아비가 쓴웃음을 보였다.
그녀는 옥한성 분점 책임자에 지나지 않으니, 본부에서의 지위는 낮은 편이었다.
더욱이 그녀의 아버지도 이리 큰 결정을 내릴 수 없어, 운청휘의 요구는 사실상 불가능했다.
“승낙 여부는 나중에 가리고, 그저 소식을 전하기만 하면 된다. 한마디 더 하자면, 사흘 뒤 조건을 지키지 않을 시…… 천단각 본부를 멸망시키겠다.”
운청휘의 말투는 평온했으나, 마지막 말을 할 때는 몸에서 숨 막히는 한기가 뿜어져 나왔다.
한순간에 주위의 온도는 한파를 맞은 듯했다.
“운 공자, 설마……!”
아비는 뭔가 말하고 싶었지만, 몸을 사로잡은 한기는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
어느새 등은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통제할 수 없는 전율이 그녀를 지배하고 있었다!
“운 공자, 당신의 요구를 전달하겠어요!”
숨을 깊게 들이쉬고 나서야, 아비가 겨우 말을 내뱉었다.
“그럼, 부탁하지.”
운청휘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구석에 웅크려 있는 송병을 힐끗 보았다.
이윽고 운청휘가 손가락을 가볍게 튕기자, 청색 화염이 송병에게로 날아갔다.
외마디 비명과 함께, 송병의 온몸이 청색 화염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잿더미가 되는 건 찰나에 지나지 않았다.
이렇듯 송병이 죽었으나, 아비는 조금의 아쉬움도 없었다.
심지어 그를 원망하는 마음도 있었다. 아둔한 송병이 운청휘의 무위도 모르고 독단적으로 일을 저질렀으니, 어찌하겠는가!
“그럼 사흘 뒤에 만나지.”
운청휘가 예의를 갖추고, 몸을 돌려 떠났다.
“운 공자, 잠시만……!”
아비가 망설이다가 결국 운청휘를 잡았다.
“무슨 일이지, 아비 소저?”
운청휘가 몸을 돌렸다.
“오늘 만보 경매장에서 경매가 열리는데, 신비로운 물건이 나올 예정이라고 하네요. 본래는 폐관 중이라 참석하지 않으려 했지만, 이렇듯 나와버렸으니…… 운 공자께서 함께 가시지 않겠어요?”
아비가 운청휘를 바라봤다.
“내가 무섭지 않나?”
운청휘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운 공자께서 제게 악의가 없으신데 왜 운 공자가 무서울까요?”
아비는 반문하며 운청휘에게 가련한 눈빛을 보냈다.
“그럼 가지!”
본래 목가와 기가를 방문하려 했던 운청휘였지만, 아비의 초대를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우선 그녀와 경매장에 가도 잃을 게 없으니, 선뜻 승낙했다.
-백 영감, 내가 떠나고 사람을 보내 운 공자의 방금 말을 본부에 전해주세요.
아비가 백 영감에게 음을 보냈다.
-네, 아비 아가씨.
백 영감 또한 음으로 답했다.
-아비 아가씨. 어찌 운 공자와 연루되셨습니까? 만약 본부에 인왕경의 고수가 있거나, 반절 인왕경의 각주들이 알기라도 하면…….
백 영감이 보기엔 운청휘는 사흘 뒤에 죽을 운명이었다. 그런 사람에게 굳이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있을까?
-백 영감, 사흘 후에 재앙을 당하는 것이 천단각 본부가 아닌 운청휘라고 보는 건가요?
아비가 고개를 저으며 음을 전했다.
-운청휘는 바보가 아니에요. 우리에게 이 소식을 전하라는 것은 배짱이 있다는 것이죠!
아비는 자신이 사람을 잘 본다고 자부했다.
운청휘를 처음 보았을 때 느꼈던 비범함은 단지 무위 때문이 아니라, 그의 기질과도 연관이 있었다.
사람은 스스로를 위장할 수 있으나, 기질만큼은 위장하기 어려웠다.
옥한성 책임자로서 아비는 신분이 높은 이들을 많이 봐 왔지만, 운청휘와 같은 느낌을 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운청휘 앞에서 그녀는 자신이 한없이 작아지는 것 같았고, 눈앞에 있는 운청휘가 군왕처럼 느껴졌다.
이는 그녀에게 저절로 몸을 낮추게 하는 충동을 일으켰다.
운청휘의 신식은 아비와 백 영감의 대화를 포착했다.
하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두 사람의 대화는 도리에 어긋나지 않았고, 어떤 결례도 되지 않았으니까.
오히려 아비가 백 영감에게 한 말이 의외였다.
-백 영감, 사흘 후에 재앙을 당하는 것이 천단각 본부가 아닌 운청휘라고 보는 건가요?
아비가 이렇게나 운청휘에게 믿음이 있을 줄이야?
이 각여를 걷고 나서, 아비는 운청휘를 호화로운 경매장 앞으로 안내했다.
경매장 정문에는 커다란 현판이 걸려 있었고, 현판에 ‘만보 경매장’이라는 글귀가 쓰여 있었다.
아비의 신분을 고려해, 둘은 3층 귀빈실로 안내되었다.
만보 경매장에서는 가장 높은 등급의 귀빈실로, 옥한성 전체를 따져도 대가문의 가주들만 들어갈 자격이 있었다.
“경매는 이 각 뒤에 시작됩니다. 저희가 정성을 다해 다과를 준비했으니, 공자님과 함께 드시죠.”
직원 한 명이 공손하게 말하더니, 쟁반에 과일과 떡을 담아 내왔다.
운청휘가 떡을 가져가 맛을 보더니 눈이 이채를 띠었다. 명계에 온 지가 꽤 되었지만, 이렇게 맛있는 음식을 먹을 기회가 없던 터였다.
“맛이 나쁘지 않군.”
운청휘가 가볍게 중얼거리며 이번에는 과일을 집었다.
수박처럼 생긴 과일은 과육이 붉고, 적당한 두께의 녹색 껍질을 두르고 있었다.
입에 넣으면 따뜻하고 달콤한 맛이 확 퍼졌는데, 씹을 필요도 없이 입에서 녹아내렸다.
“운 공자, 적염과를 좋아하나요?”
운청휘가 즐거워 보이자, 아비가 웃으며 말을 걸었다.
“적염과라고? 이름이 괜찮군.”
운청휘가 고개를 끄덕이며 아비를 봤다.
“맛이 좋군. 내 입맛에도 맞고.”
“운 공자께서 좋아하시면 만보 경매장에서 조금 더 얻어 가져다드리겠어요.”
아비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적염과는 분화구에서만 자라는데, 정주 전체를 뒤져봐도 화산은 없어요. 이는 만보 경매장이 인력을 동원해 정주 밖에서 가져온다는 뜻이죠. 게다가 3층 귀빈실의 고객에게만 내오는 과일이랍니다.”
“그렇군!”
운청휘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렇다면, 아비 소저에게 감사하지.”
시간이 빠르게 지나갔다.
어느새 아래의 대청에는 수천의 인파가 모여들었고, 경매를 주관하는 경매사들도 천천히 무대로 올라갔다.
“다들 아시다시피, 저희 경매장에서는 한 달 간격으로 대형 경매가 열립니다. 이번에도 예외 없이 신비한 물건들을 준비했습니다. 지금, 노부는 경매의 시작을 알립니다!”
노인 경매사의 외침이 끝나자마자, 몇 명이 함께 반짝이는 유리 상자를 무대로 올렸다.
안에는 고서가 들어있었는데, ‘화명장(化冥掌)’이라 쓰여 있었다.
“화명장? 저것은 성주 ‘옥여루(玉如意)’의 독보적인 절기인데? 성주가 어째서 이것을 경매에 내놓은 거지?”
“화명장 3단계까지의 심법이고, 그 후의 구결은 따로 성주에게 구매해야 한다는군.”
“내가 말했잖아, 성주가 어떻게 ‘화명장’을 경매에 내놓았겠어. 역시 그런 생각이었구나!”
“화명장 4단계 이후의 구결이라면, 어마어마하게 비싸겠는데…….”
주변의 술렁임과 함께, 경매가 시작되었다.
시작가는 30만 명석이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100만까지 치솟았다.
몇 번의 경쟁 끝에, 3층 귀빈석의 누군가가 명석 110만 개로 낙찰받았다.
이어서 연달아 경매 물품이 나오고, 반 시진이 지난 후에는 경매의 중반까지 진행되었다.
운청휘는 무료한 얼굴로 경매를 지켜보고 있었다. 옥한성은 결국 작은 곳이라, 경매에 나온 물건들도 그가 보기엔 시시한 것들뿐이었다.
“이어서 준비한 물품은 신비한 고목입니다. 이 고목의 종류를 저희 경매장에서도 알아내지 못했고, 기운을 느낄 수도 없어 평범한 나무토막으로 보일 뿐이지요. 그러나 저희가 공적경의 고수를 청해 전력으로 공격해 보아도, 흔적조차 남지 않았습니다! 비록 용도를 알 순 없다고 하나, 이 강도만으로도 지고의 보물이 아니겠습니까? 이에 노부는 10만 명석으로 경매가를 시작하겠습니다!”
경매사의 설명이 끝나기가 무섭게, 사방에서 적지 않은 야유가 터져나왔다.
쓰임새도 모르고 기운도 느껴지지 않는데, 고작 단단함만으로 보물이 되겠는가?
그렇다면 바윗덩어리를 가져다놓는 게 더 높은 값을 받을 터였다!
야유만이 오가고, 가격을 부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어느 얼간이가 명석 10만 개나 들여 쓸모도 없는 나무토막을 살까?
한데, 그 얼간이가 3층 귀빈실에 있었다!
“10만 명석!”
“운 공자, 설마……?”
아비가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운청휘를 바라보았다.
방금 가격을 부른 이는 다름아닌 운청휘였으니까.
“왜 그러지, 아비 소저?”
운청휘가 아비를 봤다.
“운 공자가 옥한성에 오신 지 얼마 되지 않아 만보 경매장의 간사함을 잘 모르십니다. 그들은 매번 이런 규모의 경매에서 기이한 물건을 내놓죠. 하지만 그들이 내놓는 기이한 물건들은 함정이랍니다.”
아비가 멈추지 않고 말했다.
“이 고목은 고작, 겨우, 겨우…….”
아비는 말끝을 흐렸다. 다른 이들에게 운청휘가 얼간이로 보이는 것은 싫었다.
“하하, 그런가!”
운청휘가 웃으며 말했다.
“이전의 경매는 누가 함정에 빠졌는지 모르지만, 이번의 경매는 정말로 대단하군.”
“네?”
아비가 별안간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설마 운 공자께서 이 고목의 비범함을 발견하셨나요?”
운청휘가 고개를 끄덕이며 솔직히 털어놓았다.
“내 고향에서 저것을 세계수라 부른다.”
한때 우주 전체를 구성하고 있었다는 세계수. 그 전설은 진위가 불분명하지만, 적어도 그 고목에는 짙은 목황선기가 담겨 있었다. 운청휘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얻어낼 작정이었다.
더불어 그의 영라 반지에는 두 개의 세계수가 담겨 있었다.
하나는 혈살군에서 우연히 얻었고, 하나는 홍가의 보물 창고를 약탈하여 얻어냈다.
경매장의 사람들은 세계수를 만보 경매장이 마련한 함정으로 여겼고, 누구도 손을 들지 않았다.
덕분에 운청휘는 손쉽게 10만 명석에 세계수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곧, 두 자 길이의 세계수가 귀빈실로 옮겨져 왔다.
“운 공자, 아비에게 세계의 나무가 무슨 용도인지 알려 주시겠나요?”
귀빈실 안에서 아비가 참지 못하고 말했다.
“구체적인 건 나도 잘 모른다. 다만 확신할 수 있는 건, 내게는 적잖은 쓰임새가 있다는 뜻이지.”
운청휘는 여유롭게 말했다.
지금의 무위로도 세계수에 있는 목황선기를 흡수할 수 있으나, 굳이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자양분으로 쓰는 것은 일회용일뿐더러, 많은 무위를 얻을 수도 없다.
더욱이 그에게는 마종이 있으니, 굳이 목황선기를 탐낼 이유가 없었다.
“이것까지 합치면 세계수는 세 그루가 되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