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09화
운청휘가 고개를 끄덕였는데, 조용히 덧붙였다.
“성녀가 떠나려고 한다면 나도 말릴 수 없군.”
“나중에 또 만나죠!”
해당성녀가 서둘러 인사를 하고 법칙의 힘을 뿜어내더니, 한 줄기 섬광이 되어 대전 밖으로 돌진했다.
그렇게 옥한성 밖으로 질주한 해당성녀의 해사한 안색은 점점 침울해졌고, 종래에는 완전히 일그러졌다.
“운청휘, 나 해당은 네놈의 구족을 멸하고 네놈과 관련된 모든 사람을 죽이겠다고 맹세하마!”
“시간이 늦었군. 아비, 우리도 가도록 하지. 소운, 능비. 이만 가겠다.”
운청휘가 돌아가자 대전 안에 붐비던 이들도 각자 자리를 비켰다. 어느새 넓은 길이 운청휘와 아비를 위해 트여 있었다.
소운과 능비는 운청휘를 뒤따라가고 싶었지만, 꾹 눌러 참았다.
그들에게는 딸린 가족이 있었고, 가족을 곤란하게 할 수는 없으니까.
운청휘가 죽인 막소휘, 갈취한 해당성녀의 배후에는 명왕 여정추가 있으니, 후환이 두려웠던 까닭이다.
“우리도 가죠. 빨리 집에 돌아가 이 소식을 보고하자!”
상석에 있던 기재들도 서로 마주보더니, 얼른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기가와 옥가의 자제들이 죽고, 가주들이 죽었다. 기재 막소휘가 살해당하고 해당성녀가 갈취당하고……. 정신없는 일이 벌어졌으니 옥한성, 아니, 정주 전체에 큰 변화의 바람이 불 듯했다.
이어 옥 성주는 모든 손님들을 해산시켰고, 일각도 되지 않는 시간 만에 성주부의 일이 옥한성 전체에 퍼져나갔다.
마치 역병이 일듯, 소문은 빠르게 퍼져나가며 전례 없는 파문을 만들어 내려 했다.
천단각에 돌아온 후, 운청휘는 폐관에 들어 상처 치료에 전념했다.
해당성녀의 아공간 반지에는 200여만 명석이 들어 있었고, 다른 사람들에게 빌려온 2천만 명석을 더해 2천 2백여만 명석이 운청휘의 손에 들어왔다.
운청휘의 계산대로라면 2할까지 그의 몸을 회복시킬 터였다.
그 정도라면 어떤 인왕경도 단번에 죽일 수 있다!
부상이 나아가면서 명석을 소모하는 속도는 점점 빨라졌고, 수중의 명석을 전부 소모하는 데는 하루아침밖에 걸리지 않았다.
“딱 2할 회복했군!”
운청휘의 온몸에 힘이 차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처음 명계에 왔을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상태였다.
얼마 후, 점심을 가져온 아비가 한참을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운 공자, 해당성녀를 우롱한 것이 아비 때문인가요?”
“반은 맞췄군.”
운청휘가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해당성녀는 여러 차례 기재들을 시켜 운청휘를 겨냥하게 만들었고, 그 결과 막소휘의 우롱까지 이어졌다.
운청휘는 일부러 단번에 해당성녀를 죽이지 않고 은혜를 베풀어 주었다.
다만 아비와의 관계를 고려해 2천만 명석을 갈취하고 화풀이를 한 셈이다.
“아비 소저. 해당성녀와 무슨 원한이 있는 거지?”
운청휘가 고개를 들어 아비를 봤다.
“저는 한때 도화원의 제자였습니다. 해당과는 성녀 자리를 놓고 다투는 관계였죠.”
과거를 회상하는 아비의 눈에 옅은 원망이 배어 있었다.
그녀는 아직 더 할 말이 있는 듯했다.
운청휘가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며 기다리니, 과연 아비가 다시 입을 열었다.
“외부인들은 모르지만, 도화원은 여정추가 만든 곳이에요. 여정추는 성녀의 기준을 정해 두었는데, 천부적인 재능이 탁월할 뿐만 아니라 반드시 처녀여야 하죠. 마침내 제가 성녀가 되었을 때, 해당이 저를 위해 축하연을 열어 주었어요. 당시 저는 해당을 자매처럼 여겨서 기쁜 마음으로 참석했죠. 연회에서 해당이 주는 술을 마시고 잠들었는데, 일어나 보니 제 옷은 도화원 심판각에 가 있더군요. 종주, 즉 해당의 아버지와 도화원의 간부들은 제가 성녀의 자격을 잃었으니 자격을 박탈하고 해당을 성녀로 내세우겠다고 선포했어요.”
그녀의 말을 듣고, 운청휘는 침묵에 잠겼다.
아비는 최대한 담담하게 말하려 했으나, 그 일을 말할 때 그녀는 적잖은 동요를 일으켰다.
성녀 자격 박탈은 아비에게 큰 충격이 아니었으나, 영문도 모른 채 청백지신을 잃었다는 건 그녀에게 몹시도 모욕적인 일일 터였다.
“아니…….”
운청휘가 갑자기 한숨을 쉬었다.
“당신의 말과 달리, 나는 그렇게 보이지 않는군.”
아비는 운청휘를 놀란 듯 보더니 고개를 숙여 수줍게 말했다.
“구체적으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는 저, 저도 모릅니다. 의식을 잃었으니까요. 다만 확실히 순결을 잃었다고 했어요.”
“대강 알겠군!”
운청휘가 고개를 끄덕였다.
“해당이 비록 당신을 모함했지만, 그녀의 목적은 자격의 상실이었겠지. 다만 해당은 퇴로를 남겨 두었다. 만약 일이 폭로되었을 때 여정추에게 용서를 빌 여지를 남겨둔 것이지.”
아비가 말을 듣고 안색이 달아올랐다.
“운 공자의 말씀은 제게 아무 일도 없었다는 건가요?”
“그렇다.”
운청휘가 고개를 끄덕였다.
후우우…….
별안간, 아비의 주변에서 강력한 소용돌이가 일어났다.
이 순간, 그녀는 벽을 넘었다!
어떠한 전조도 없는 돌파에 운청휘마저 조금 놀랐는데, 곧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때의 일로 인해 아비는 심리적인 압박감에 억눌리고 있었으리라.
다만 운청휘가 확신을 주고 사실을 밝힌 까닭에, 그녀를 억누르던 고통이 사라졌다!
아비의 이번 돌파는 그녀를 영변경으로 안내하는 돌파였다.
운청휘는 한 시진 내내 그녀의 호법을 섰고, 한 시진이 지나자 아비를 감싸고 있던 기운이 천천히 차분해졌다.
아비는 영변경을 돌파했을 뿐만 아니라, 2단계가 되었다!
‘아비의 재능을 생각하면 충분히 공적경에 도달했을 경지다. 다만 심리적인 압박으로 인해 수련의 속도가 늦어졌을 터. 이제는 어떤 부담도 없으니, 수련 속도가 몇 배나 증가하겠군.’
운청휘가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아비가 천천히 기운을 갈무리하고 눈을 떴다.
그녀의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기쁨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운 공자, 제…… 제가 영변경 2단계가 되었어요!”
아비가 단번에 운청휘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꽃향기와 같은 향긋한 향이 운청휘의 가슴까지 스며드는 듯했다.
“콜록콜록……!”
운청휘가 헛기침을 하더니 조금 뒤로 물러서서 그녀와 거리를 두었다.
“우, 운 공자, 아비가 실례했어요!”
아비가 얼른 시선을 돌렸는데, 고운 얼굴은 잘 익은 과실처럼 붉게 물들어 있었다.
아비의 돌파가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옥한성에는 극렬한 지진이 일었다.
대지가 두 동강 나며, 옥한성 바깥까지 갈라졌다.
다행히 거리 위주로 갈라져 있었기에 건축물에는 큰 영향을 주지 않았다.
“명석모가 오늘 나타난 것인가…….”
운청휘는 우선 아비를 두고 옥한성 바깥으로 질주했다.
아비의 말에 따르면 오늘 밤 천단각 본부의 사람이 옥한성에 도착한다고 했다.
생각지도 못하게 명석모가 나온 시기와 겹친 것이다.
이때 소운과 능비가 명석모가 나타난 곳으로 향하고 있어, 운청휘는 신식을 이용해 두 사람을 따라가고 있었다.
‘명석모가 나타난 게 이런 곳이라니, 의외군.’
한 산맥에 도착했을 때, 운청휘의 눈이 이채를 띠었다.
이곳은 그가 명계에 도착했을 때 본 산맥으로, 이곳에서 목만청, 기방 등의 목숨을 구해주었다.
“음? 명석모가 하나가 아니군!”
운청휘의 신식은 땅 밑 깊은 곳에서 잠들어 있는 빼곡한 명석들을 감지했다.
운청휘가 이전에 봤던 명석들과는 달리, 이 명석은 하나같이 죄다 천근 이상의 무게가 나갔다.
하나가 반 근도 되지 않는 명석에 비하면 천지차이인 것이다.
부피뿐만 아니라, 색깔도 보통 명석과 정반대였다.
보통의 명석은 검은빛을 띠고, 하나의 검은 알처럼 보이는 반면 이 명석은 투명하여 박옥을 연상케 했다.
하나같이 저승의 기운을 품고 있지 않았다면, 운청휘도 이것들이 명석모라 믿지 않을 터였다.
“명석모가 하나 나오는 줄 알았는데, 명석모 광산이 있다니!”
운청휘의 호흡이 절로 거칠어졌다. 명석모로 구성된 광맥이 땅 아래에 잠들어 있었다!
더욱이 명석모 안에서는 소량의 선기가 느껴져 운청휘의 가슴을 설레게 했다.
이 명석모를 손에 넣는다면, 치료약을 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선기를 흡수하여 무위 증가도 노릴 수 있었다.
“놀랍군. 명석모 광산인 것도 모자라, 대라금선이 사는 곳이라니.”
신식으로 천천히 훑어보니, 광맥은 직선이 아니라 굽이굽이 둘러져 하나의 원을 형성하고 있었다.
일종의 동굴 벽이 광맥으로 이루어진 셈이다.
“그렇군. 이 광맥은 본디 석광이었지만 대라금선의 선기를 흡수하며 명석모 광산이 된 것이로군.”
이 발견에 운청휘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그렇다면 명계에는 대라금선이 존재했다는 뜻인데, 진선 바로 위의 등급인 선인이었다!
선계에서도 대라금선은 일방의 지배자가 될 자격이 있는 존재였다.
“음?”
삼천 장 상공에 떠 있던 운청휘의 시선이 한 곳에 머물렀다.
명석모 광맥에서 심한 진동이 일기 시작했다.
카가가각……!
깊이 삼천 장의 지하 광맥이 별안간 지상으로 솟구치는 것이 아닌가!
온 대지가 파도치는 바다처럼 너울거렸고, 흙바람과 먼지가 뒤엉켜 피어올랐다. 거대한 바위들마저 꿈틀거리는 통에 육지가 바다가 된 것만 같았다.
더욱이 귀를 찢을 듯한 굉음! 대지가 내뱉는 고통의 신음이었다.
“건곤이 존재하는군. 이를 겨자씨에 담을 수도 있는데, 그 안에 모든 동굴이 들어가 있다. 이는 선제만이 할 수 있는 수단이 아닌가?! 그렇군, 대라금선이 아니라 선제의 동굴이었다!”
운청휘가 놀라움을 이기지 못하고 소리쳤다.
명석모 광맥이 둘러싸고 있는 중심에는 숨겨진 공간이 있었는데, 선제의 신식으로도 포착할 수 없는 공간이었다.
이것이 세상에 나오니 거대하고 휘황찬란한 궁전을 이루었다!
더욱이 이 궁전은 오랜 세월을 견딘 듯 웅장하고 적막한 기운을 내뿜고 있었는데, 족히 1만 년은 된 듯했다.
‘허원선부(虚元仙府), 이럴 수가!’
운청휘는 속으로 놀라 소리를 질렀다!
‘이것은 허원(虚元) 노인이 남긴 선부다!’
허원 노인. 운청휘만이 부르는 명칭이었다. 선계 생령들은 모두 존경심을 담아 그를 허원 선제라고 불렀지만.
10대 선제 중 유일하게 선고 시기부터 존재한 인간 선제!
‘역시 허원 노인이 남긴 선부로군. 선제의 신식으로도 내부를 알 수 없다니, 대단하군. 다만 허원 노인은 줄곧 선계에 있었을 텐데, 어찌 명계에 흔적을 남긴 것이지?’
운청휘가 당혹스러움에 미간을 찌푸렸다.
10대 선제 중 인간 선제는 3명으로, 운청휘와 지요여제, 허원 선제였다.
다만 운청휘와 허원 선제의 관계는 좋은 편이 아니었다.
심지어 천성대륙으로 넘어오기 전에는 한바탕 싸우기까지 했다.
그 전투는 선계의 우주 바깥까지 확장되었고, 이 과정에서 사라진 별이 수만 개는 족히 될 터였다.
물론 그들의 관계에 악감정이 있다기보다는, 허원 노인의 입버릇이 화근이었다.
그는 운청휘를 볼 때마다 운 기생오라비라고 불렀는데, 지요여제가 운청휘를 보살피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아니라면 운청휘는 선제가 될 수 없다며 조롱하기 일쑤였다.
운청휘는 그 별명을 들을 때마다 치를 떨었다. 오직 대등한 선제가 아니라면 감히 운청휘를 그리 부를 엄두도 못 냈을 테지만.
“허원선부…….”
잠시 추억에 잠겨 있던 운청휘는 선부를 보며 한 가지 생각을 떠올렸다.
억지로라도 자신을 주인으로 인식하게끔 허원선부를 제압하리라!
그리하여 언젠가 선계로 돌아갔을 때, 허원 노인 앞에서 이 동굴을 꺼낸 후, 손바닥으로 짓눌러 뭉개줄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