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58화
“운! 청! 휘!”
막문천이 이를 뿌득 갈며 운청휘를 노려보았다.
“감히 고를 우롱하다니! 네놈이 한 행동이 어떠한 결과를 불러올지 모르는 건가!”
운청휘가 느긋한 표정으로 답했다.
“방금 네놈을 칭찬했는데 배은망덕하게 구는군. 하나 네놈 같은 자와 무슨 말을 더하겠는가? 더군다나 뒷일은 네놈이 걱정해야 할 터. 네놈이 나를 건드렸으니, 막가는 마땅히 멸문지화를 당할 것이다.”
운청휘는 말을 마치고 막문천에게서 마종을 회수했다.
영라 반지에 마종을 넣는 운청휘의 기분은 더없이 흐뭇하고 상쾌했다.
영흥제국에 온 뒤로 그는 탄탄대로를 걷고 있을뿐더러, 수확도 부족하지 않았다.
상고 전쟁터에서 얻은 마종, 사토 타케루의 지원군에게서 얻은 마종, 막문천의 분신에게서 얻은 마종까지. 도합 12개의 반절 인황경의 마종이 모였다.
마종을 갈무리한 운청휘가 잠시 상념에 빠져들었다.
‘인왕경에 도달한 후, 이 마종들이 나를 천성대륙에서도 견줄 자가 없는 존재로 만들어 줄 테지.’
상념에 빠져 있던 운청휘가 곧 고개를 들었다.
어쩌면 막문천의 본체가 천찬학관으로 오고 있을지도 모른다. 지금은 이곳에 머물러서 좋을 것이 없었다.
“우선 흙보살을 찾아가야겠군. 그가 세 번째 봉마비를 준다면, 나도 그와의 약속을 이행하지.”
옅은 중얼거림을 남긴 채, 운청휘의 신형은 허공에서 스륵 흩어져 흙보살의 저택을 향해 쇄도했다.
만약 막문천의 본체를 만난다면, 지금의 운청휘로서는 도망치는 것 외엔 길이 없었다.
물론 그 도망치는 수단은 천영어를 사용한다는 전제가 필요하다.
그 전에 해야 할 일이 세 번째 봉마비를 얻는 일이었다.
사실 운청휘는 봉마비를 강탈하는 것도 염두에 두었으나, 실질적으로는 불가능했다.
흙보살은 천찬학관의 원장인 동시에 선제인 ‘복제’가 환생한 몸이다. 그런 그에게서 물건을 강탈한다는 건, 사지로 들어가는 것과 똑같았다.
흙보살의 저택이 가까워지자, 운청휘는 신식을 내보내 위경륜을 먼저 감지했다.
위경륜은 저택의 한 정전에 있었는데, 흙보살과 함께인 듯했다.
“운 동포, 정말로 무심하구려. 막문천도 건드리다니!”
운청휘가 나타난 순간 흙보살이 운청휘를 바라봤다.
“그자가 먼저 나섰으니 어찌 가만히 있을까? 그렇지 않다면 반절 인왕경이 감히 인황경의 고수에게 덤빌 리가.”
운청휘는 뻔뻔하게 웃어 보이곤 말을 이었다.
“내가 온 이유를 모르진 않겠지.”
흙보살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운 동포. 봉마비는 줄 수 있으나, 보내주는 것은 아니네. 그렇지 않으면 나는 그대의 인과를 묻혀야 하네.”
흙보살이 또 인과를 운운하자 운청휘는 한숨을 내쉬었다.
복제는 까닭 없이 은혜를 베풀거나 물건을 주면 인과가 묻는다고 표현했는데, 그의 환생도 똑같은 말을 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후일을 기약해야겠군.”
운청휘가 예의를 갖추고 작별 인사를 하려고 했다.
“나중에? 운 동포는 떠나려는 것인가요?”
흙보살의 얼굴엔 의혹이 돌았다.
“방금 막문천의 분신을 죽였으니, 그가 이곳으로 올지 모른다. 지금은 그의 상대가 되지 않으니 떠나는 것 외엔 방법이 없다.”
운청휘는 전에 없이 초조한 표정으로 답하고 몸을 돌리려 했다.
“더는 지체할 수 없으니, 가 보겠다.”
“운 동포, 기다리시오!”
흙보살이 또 운청휘를 불렀다.
“무슨 일인가?”
돌아보는 운청휘의 얼굴에 희미한 짜증이 묻어 났다.
흙보살이 봉마비도 넘기지 않을뿐더러 도망치지 못하게 시간을 끄니, 답답할 수밖에.
“운 동포께서는 막안연을 기억하시나요?”
흙보살이 말했다.
“막가의 직계 자제가 아닌가?”
물론, 운청휘는 막안연을 기억하고 있었다.
다만 그녀에게 어떠한 호감도 없을 뿐.
이전에 막안연은 흙보살 앞에서는 운청휘를 도와 낙가와의 사이를 중재해 주겠다고 했지만, 정작 중재해야 할 때 나서지 않았다.
더욱이 낙가가 운청휘를 건드려 화를 당한 이후론, 역으로 운청휘를 질타하기까지 했다.
일련의 기억들이 있으니, 그녀에 대한 인상이 좋을 리가 없었다.
“안연은 막문천이 가장 아끼는 손녀입니다. 안연이 중재해 준다면, 동포와 막문천의 문제는 잘 해결할 수 있을 거예요.”
흙보살이 말했다.
“그럴 필요 없다.”
운청휘는 단칼에 거절했다.
“이만 가야겠…….”
“스승님, 안연입니다. 저를 찾으셨다고 들었습니다.”
운청휘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정전 밖에서 아리따운 목소리가 들려 왔다.
“들어오시게!”
흙보살이 말했는데, 온 사람은 다름 아닌 막안연이다.
“안연, 그대를 부른 것은 부탁해야 할 일이 생겨서라네.”
“운청휘와 저희 조부님의 얘기군요?”
막안연은 충분히 예상이 된다는 듯, 먼저 말해왔다.
흙보살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네.”
“스승님, 이 일은 제가 나설 것도 없어요. 조부님께서는 운청휘가 가진 무공을 원하시니, 운청휘가 얌전히 무공을 헌납하고 충성을 맹세한다면 마무리되는 일이 아닌가요?”
막안연은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말하며, 운청휘에게 경멸의 눈빛을 보내왔다.
그녀는 흙보살이 자신을 부른 이유가 운청휘의 부탁 때문이라 여기고 있었다.
자신과 막가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어찌 자신을 불렀겠는가?
운청휘는 묵묵히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었고, 흙보살은 미간을 찌푸렸다.
“안연, 그대를 찾은 건 중재를 부탁하기 위함이지, 운청휘에게 강요하라는 말이 아닐세!”
“스승님, 화해의 기초는 쌍방이 동등한 전제하에 하는 것인데요?”
막안연이 미간을 찌푸렸다.
“운청휘가 막문천과 동등하지 않은 것인가?”
“스승님, 농이 지나치니세요. 운청휘가 어찌 저희 조부님과 마주할 자격이 있을까요? 더군다나 스승님이 계시지 않았다면 운청휘는 저와도 대화할 자격이 없어요.”
막안연은 거만하고도 단호하게 못을 박았다.
“그녀의 태도는 잘 보았겠지.”
더 말할 가치가 없음을 느낀 운청휘가 몸을 일으켰다.
“중재할 생각이 없다면, 이만 가 보겠다.”
막문천이 찾아오면 도망칠 기회가 없어진다.
운청휘는 속으로 시간을 헤아리며 걸음을 옮기려 했다.
“운청휘, 정말로 뻔뻔하구나. 사정해도 모자랄 판에 중재라니. 물론, 네놈이 뭘 하든 들어줄 생각은 없어.”
이번에는 막안연이 운청휘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 뜻은?”
우뚝 선 운청휘가 막안연을 향해 깊은 시선을 보냈다.
이미 그의 마음 속에서는 짙은 살기가 일었지만, 흙보살의 체면을 보아 출수하지 않았을 뿐이다.
“별다른 뜻은 없다. 그저 이 자리에서 조부님을 얌전히 기다리라는 것이지.”
막안연은 아름다운 얼굴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미 조부님께 네놈의 위치를 알렸다. 정 떠나고 싶다면 조부님이 오신 뒤에 사정해 보든지.”
“그럴 생각이 없으니, 비키라는 것이다.”
운청휘의 두 눈이 실눈이 되었다.
“너무 겁 먹지 마. 조부님께서 원하는 것을 드리고 복종한다면, 목숨은 부지할 수 있을 테니.”
막안연은 운청휘의 두 눈이 가늘어진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기에 태연히 답했다.
“조부님께서는 충분히 호의를 베푸실 테니, 얌전히 기다려……!”
막안연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녀의 몸이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쾅!
단번에 막안연은 정전의 바닥을 나뒹굴었는데, 얼떨떨해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녀는 본디 영흥성원의 생도였고, 천찬학관의 초청을 받아 입관한 몸이었다,
그만큼 자신의 실력에 자신이 있었건만, 운청휘가 공격을 하는 순간까지도 눈치채지 못하고 무방비한 상태였다.
다만 운청휘가 일장을 날린 순간, 그의 몸에서 뻗어나온 절대적인 기세만큼은 그녀의 정신에 뚜렷하게 새겨졌다.
한편, 운청휘로서는 손속에 사정을 두었다. 흙보살의 체면을 생각해 그녀의 목숨을 거두지 않은 셈이다.
그렇다고 해도 막안연은 이 공격으로 인해 적어도 석 달은 요양해야 할 처지가 되었다.
“운청휘, 감히 나를 공격해?”
입에서 피를 한 움큼 토한 막안연이 창백한 안색으로 운청휘를 노려봤다.
“네 조부의 분신도 죽였거늘, 네가 두려울까? 흙보살의 체면을 봐 살려 주건만, 혀가 길구나.”
말을 마친 운청휘는 그대로 막안연을 짓밟으며 정전을 나섰다.
멀어지는 운청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흙보살이 쓴웃음을 지었다.
“운 동포, 정말로 손버릇이 험악하구려…….”
흙보살은 기운을 일으켜 막안연을 일으켜 세우고, 단약을 가져와 먹였다.
“안연, 운 동포는 나도 막을 수 없는 사람일세. 그러니 운 동포를 다시 보게 되는 날에는, 부디 자중하길 바라네.”
흙보살은 막안연을 위해 나서는 대신, 운청휘의 손을 들어주었다.
이 점이 막안연에게 짙은 분노를 일으켰지만, 스승인 흙보살에게 대적할 수 없어 고개를 숙였다.
“스승님의 가르침을 따르겠습니다!”
“……!”
정전을 빠져나가던 운청휘가 별안간 안색이 굳으며 시선이 하늘로 향했다.
수백만 장 밖에서, 급격히 가까워지는 한 사람이 있었다.
고작 숨 몇 번 내쉴 시간이었건만, 운청휘가 어찌할 틈도 없이 막문천이 흙보살의 저택 상공으로 날아들었다.
“운청휘, 어서 나와라!”
막문천은 길을 묻듯이 평온한 어조로 말했지만, 그의 목소리는 저택 전체에 울려퍼졌다.
무공을 익힌 사람이든 익히지 않은 사람이든,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영혼의 저편에서부터 차오르는 공포를 느껴야 했다.
이때 운청휘는 이미 신식으로 영라 반지 안을 훑고 있었다.
한시라도 빨리 천영어를 찾아 도망쳐야 한다!
“운 동포, 시간을 놓치게 했으니, 이 위기는 내가 해결하죠.”
운청휘가 막 천영어를 꺼내려는 순간, 뒤에서 흙보살의 목소리가 울렸다.
“음?”
그와 동시에, 만리 바깥의 하늘에서부터 무수한 먹구름이 빠르게 접근했다.
두꺼운 먹구름 속에서는 번개가 번쩍거리고 있었고, 금방이라도 대지를 내려칠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