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마귀환 1권
서경 신무협 소설
1.환생
하늘같은 경지에 오른 마왕이라는 뜻의 천마.
그런데 나는 천마로도 모자라 신과 같은 반열에 올랐다는 뜻의 신마로 불렸다.
그런 내가 지금 죽어가고 있지.
왜 죽어가고 있냐고?
재수도 정말 더럽게 없지, 교의 숙원인 무림정복을 위한 위대한 발걸음을 내딛자마자 절대검신 독고황이란 놈이 날 떠억 하니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야.
첫 인상이야 당연히 같잖았지!
나완 다르게 수염도 하얗고 풍성하며 머리도 치렁치렁할 뿐더러 다 늙은 영감탱이가 영웅건 따위나 쓴 채 눈웃음이나 살살치는 게 꼭 기생오라비 같았거든.
그런데 막상 붙어 보니까 그렇게 다를 줄이야…….
그 영감탱이, 정말 별호에 나와 같은 신(神)이라는 글자 당당히 박아서 다닐 만하더라니까?
본교의 전설로 불리는 규천마력을 나름 한계치라고 자부하는 9성까지 익혔는데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어.
죽을 때까지 사용할 일 없을 줄 알았던 내 진원진기까지 깡그리 폭발시켜서 쏟아냈는데도 알량한 검 한 자루로 그냥 쓱쓱 다 파헤쳐 버리더라고.
어찌나 허무하던지!
그래서 지금 이 모양 이 꼴이야.
심장에 검 한 자루 대롱대롱 달고 있고, 나를 천마에서 신마라고 불리게 해 줬던 규천마력은 하늘로 뭉게뭉게 흩어지고 있고…….
내 무공에 그동안 쌓여만 온 신교의 힘이라면 그깟 무림 충분히 정복하겠지 싶어 말년에 재미 좀 보려고 나선 길인데 이 무슨 개망신 아니 개죽음이야 정말?
하도 피를 많이 흘렸더니 이젠 의식까지 흐려진다.
저 인간 내공의 정체가 도대체 뭘까?
그래도 나름 신교에서조차 전설로 통하는 규천마력인데 어떻게 이렇게 쉽게 흩어낼 수 있지?
무림의 마지막 수호자를 자처한 절대검신 독고황.
좋아, 인정한다. 내가 졌다.
정말 너무 치사하지만, 어찌나 다급한지 독고황 그 자식 얼굴에 침까지 퉤 뱉어 봤다. 구경꾼들 보든 말든 눈에 흙도 몇 줌 쫙 뿌려도 봤었다.
그래, 알아. 나 치사한 거.
그런데 뭐?
그렇게까지 해서라도 이겨 보려고 발버둥 친 것일 뿐이잖아? 이기는 게 최고야! 틀려? 게다가 나는 고리타분한 정파 나부랭이도 아니라고.
하아! 어쨌든 결론은, 그렇게까지 했는데도 못 이겼다.
그래서 죽어가는 이 순간까지도 솔직히 무지하게 창피하고 부끄럽고 뭐 그렇다는 거야.
근데…….
내 투쟁심은 조금 많이 다른 것 같다.
패배를 인정하긴 하는데, 인정하는 만큼 정말 더 이기고 싶다고 넘어서고 싶다고 끊임없이 외친다.
어떻게 하든 독고황이란 놈의 무공에서 약점을 찾아 죄다 파헤쳐 버린 후 내 규천마력으로 짓뭉개버리고 싶다고 부르짖는다.
기생오라비 같은 그 얄미운 놈의 면상을 짓뭉개버릴 수만 있다면, 정말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마선(魔仙)에의 꿈조차 버릴 수 있을 것만 같다.
제엔-장! 이젠 정말 의식이 끊길 것 같다.
죽음이 코앞이란 뜻이다.
그래도 나름 신마라고 불렸던 사람이라서 그 정도는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알 수 있다.
그건 그렇고…….
아, 다시 한 번 더 붙어 보고 싶다. 그리고 정말 이기고 싶다.
절대검신 독고황.
그 녀석이 펼치는 무공의 약점은 대체 뭘까?
어, 어떻게 해야 이길 수 이, 있……을…….
***
상당히 여성스럽게 꾸며진 방에서 내 눈이 떠졌다.
‘뭐지?’
다시 한 번 눈에 힘을 주었다. 하지만 여전히 주변은 온통 여성스러운 것들 천지였다.
창문마다 온통 분홍빛 비단들이 하늘거렸고 곳곳에 꽃과 서화가 걸려 있었으며 여인들의 지분 냄새마저 은은하게 풍기고 있었다.
‘이것들이 다 미쳤나? 감히 신마의 방을 어떤 정신 나간 녀석들이 저딴 식으로 꾸며?’
신마이기 전에 사내로서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각오해라. 누군지는 몰라도 절대로 그냥 넘어가지 않을 테다.’
목에 핏대가 확 솟구칠 무렵 쑥뜸향이 돌연 내 콧속으로 솔솔 파고들었다. 그 향 내음 덕분인지 들끓던 분노가 슬그머니 가라앉았다.
‘뭐야? 내 방이 아닌가?’
자세히 보니 정말 아니었다.
‘그러면 어디지?’
독고황에게 지독하게 당하고 정신을 잃었으니 어쩌면 의방일 수도 있겠다.
‘근데 무슨 놈의 의방이 이렇게 생겨 먹었어? 여 교도들 전용 의방이야?’
아무래도 뭔가 심상치 않았다.
여 교도들 전용 의방이란 것도 웃기는 판국에 신교에 분홍빛 비단천지라니! 어림도 없는 일인 것이다.
나는 규천마력을 일주천 시킴과 동시에 퉁기듯 몸을 일으켰다. 그런데, 몸이 눈곱만큼도 일으켜지지 않았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어라? 내 규천마력(叫天魔力)! 내 규천마력 어디 갔어?’
단전이 아예 텅 비어 있었다.
장강의 물결처럼 도도하게 흐르던 나의 규천마력이 코딱지만큼도 남아 있지 않았다.
아니, 자세히 살피니 뭔가 남아 있긴 했다.
‘병아리 모이만큼 찔끔 남아 있는 이걸 내공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말이지…….’
심지어 그 찔끔 남아 있는 것조차 규천마력이 아니었다.
대뜸 심장에 꽂혀 있던 검과 풀풀 새어 나가던 규천마력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심장에서 검은 연기처럼 규천마력이 콸콸 새어 나가더니만 그러면 그때?’
아예 바닥이 났단 말인가?
이렇게 깨끗하게 텅텅 비어 버릴 정도로?
‘제엔-장. 내가 그 규천마력 익히고 모으느라 얼마나 죽을 고생을 했었는데…….’
어찌나 억울한지 절로 고함이 터져 나왔다.
“크아아아!”
이거 어째 고함을 질러도 소리가 개운치 않게 나온다.
‘규천마력이 가득했었을 때 질렀다면 이 건물 전체가 무너질 듯 덜덜 떨렸을 텐데.’
지금은 겨우 모기보다 조금 더 큰 정도다.
사자후를 예상했건만 기지개켤 때 내는 신음소리 같다.
드르륵.
‘그래도 효과는 있었네.’
누군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왔다. 내 앞에 딱 섰다.
걱정 가득한 눈빛, 하나 맹세코 모르는 여인이다.
‘대체 누구지?’
누군지는 몰라도 무지 어여쁘다.
순간적으로 신교의 절대자 신마다운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흠, 오늘 밤 내 침소에 들일까?’
사내들이란 문지방 넘을 힘만 있어도 그 생각을 한다더니 내가 딱 그 짝이었다.
‘그러면 어때? 누군지는 몰라도 이 신마님을 모시게 되었으니 쟤도 팔자 핀 거지 뭐.’
나를 모셨으니 최소한 신교의 그 많은 거친 놈들 손에서는 안전해질 것 아니겠나? 신교처럼 험한 곳에서 저렇게 어여쁜 여자가 살아가는 데 있어서 그건 정말 큰 힘이 되어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
나와 눈이 마주친 여인의 눈이 휘둥그레지는가 싶더니 이내 잽싸게 밖으로 뛰어 나갔다. 동네방네 들리도록 크게 고함을 질렀다.
“용 공자님께서 깨어 나셨어요-오.”
덕분에 나도 다시 한 번 어리둥절해졌다.
뭐? 용 공자? 내가?
내 이름은 진무량. 나는 신교의 교주다.
“여, 여봐라 얘야. 네가 아직 뭘 잘 몰라서 그러는 것 같은데…….”
왜 이렇게 목소리가 가늘게 나오지?
죽을힘을 다해 입을 열었는데도 어째 모깃소리처럼 힘이 없다. 그 사이 두어 번 더 고함을 지른 여인이 다시 방으로 들어왔다.
내 말을 듣지 못했는지 아니면 자신의 감정만을 마구 쏟아내겠다는 것인지 제 할 말만 마구 쏟아냈다.
“정말 다행이에요, 공자님. 정말 너무 다행이에요.”
내 곁으로 바짝 달라붙었다.
눈물마저 글썽이며 물수건으로 내 얼굴과 손을 정성스레 닦기 시작했다. 그때마다 살그머니 코끝을 스치는 기분 좋은 내음이 내 심장을 오랜만에 뛰게 했다.
‘뭐, 그건 다 좋은데…….’
어째서 자꾸만 공자님이라고 하는 것이냔 말이다!
그게 당최 이해가 가지 않는다.
더더군다나 신교의 교주인 나 신마 진무량을 향해 저런 해맑고 따듯하고 살가운 태도라니!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지?’
정상적인 상황은 결코 아니다.
‘이곳이 정말 신교가 맞는다면 감히 나 신마 진무량을 저렇게 대할 수 있는 배포 큰 여인은 없을 터인데…….’
신교 오궁의 하나인 환희궁의 궁주라고 해도 나를 대할 때는 두려움에 고개를 땅에 처박지 저렇듯 살갑게 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여, 여봐라…….”
아, 미친다. 목소리에 왜 이렇게 힘이 들어가지 않지?
규천마력을 상실한 여파인가? 아무리 힘을 주려 애써도 모기마냥 앵앵거리는 정도다.
“나는 말이다…….”
“아차! 내 정신 좀 봐!”
여인이 손뼉까지 치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공자님 시장하시지요? 요런 맹추, 계속해서 아무것도 드시지 못했는데 어찌 시장하시지 않으시겠어?”
꼬르륵.
거짓말처럼 뱃속에서 천둥소리가 쳤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공자님.”
“나, 나는 위대한 신…….”
“제가 지금 당장 주방으로 달려가서 공자님의 원기를 돋울 음식을 준비해 올게요.”
쌔-앵.
여인은 또 내 말은 듣지도 않은 채 제 할 말만 내뱉은 후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
나는 기가 차기도 하고 규천마력을 잃은 후유증으로 인해 기력도 없어서 그냥 잠시 멍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한 무리의 인간들이 우르르 몰려 들어왔다. 나를 향해 생뚱맞은 소리를 자꾸만 내뱉었다.
“허허허. 용 공자, 정말 깨어나셨구려.”
“천지신명이 도우셨네, 하하하하하.”
“하하하. 십년감수했네, 이 사람아.”
머리가 하얗든 아니면 애송이들이든 죄 나를 용 공자라고 지껄인다.
게다가 스스럼없는 하대까지?
꿈틀!
내 눈두덩이 거칠게 요동쳤다.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북풍한설과도 같은 차가운 살기가 치밀어 오르기 시작했다.
‘내가 무공을 상실한 걸 다 알았다 이거지?’
절대검신 독고황이 이렇게 원망스러울 수가 없다.
‘규천마력만 모두 사라지지 않았다면……?’
하다못해 대천자마공의 내공이나 천마진결의 힘만이라도 남아 있었다면 벌써 보기 좋게 한 대 후려 쳤을 것이다. 그랬다면 이 방 안에 하늘거리던 분홍색 비단이 온통 붉은 핏빛으로 보기도 좋게 떡칠이 되어 있었으리라.
‘제-엔-장.’
스르륵.
분노를 이기지 못한 나는 다시 까무러치듯 잠에 빠졌다.
***
다시 눈을 뜨니 내 눈을 번쩍 뜨이게 할 만큼 예쁜 여인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처음으로 눈을 떴을 때 보았던 여인과는 사뭇 다르게 차가워 보이긴 하지만 아름답긴 매한가지여서 내 입꼬리는 저절로 하늘을 향해 치솟으려 꿈틀댔다.
그런데,
“정신 차렸는가, 용 공자?”
뒤쪽에 있던 어쭙잖은 인간 하나가 나를 보고 또 용 공자라고 우겨대기 시작했다! 어제 나를 향해 함부로 하대를 남발하던 녀석들 중 하나다.
‘이제 겨우 수염에 흰색 물 조금 든 새파란 애송이가 감히 나 신마에게 하대라니!’
순간적으로 짜증이 확 치밀어 올랐다.
비록 독고황에게 패배하긴 했지만 나 역시 절대의 경지를 이뤘던 몸, 내공은 이미 모두 사라져 버렸지만 마음이 일어나니 몸이 합당하게 반응했다.
자연스럽게 손이 들렸다.
마치 규천마력을 흩뿌리듯 부드럽게 전면을 휘어 감았다. 규천마력 아니 신교 삼대 지존신공 중 가장 약한 천마진결의 힘만 건재했어도 저 짜증나는 인간의 대가리는 이미 사라져 버렸을 것이다.
그런데,
덥석.
대가리가 날아가도 시원찮을 판국에 내 손을 대뜸 낚아챘다. 다른 손으로 내 손등을 툭툭 토닥이며 한껏 안쓰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괜찮네, 괜찮아. 누워 있게. 그렇게 일어나려 애쓰지 않아도 되네.”
뭐라는 거야 이 애송이가?
나는 방금 마음이 일면 자연스레 육체가 따라 움직이던 절대의 경지 때문에 규천마력을 뿌리려고 움직였던 거야 이 시건방진 인간아!
그렇게 크게 외치고 싶었지만 사실은 입만 살짝 뻥긋하는 것이 다였다. 독고황 그 자식에게 당한 상처가 어지간했는지 말도 잘 나오지 않았다.
‘어제 그 예쁜 아이 앞에서는 모기같이 작은 소리일망정 말이라도 나왔었는데…….’
몸도 피곤하고, 이젠 입도 열기 귀찮다.
하여간 남자들이란!
여인을 대할 때와 사내를 대할 때가 이렇게 다르다.
나는 새삼스레 사내라는 존재의 본성에 생각이 미쳤다.
내 손을 낚아챈 어쭙잖게 머리만 하얀 애송이 녀석이 계속해서 주둥이를 나불거렸다.
“이레 동안이나 정신을 잃었었네. 어서 일어나고 싶은 마음은 이해하네만, 아직은 무리야.”
그래? 내가 이레 동안이나 누워 있었어?
그렇다면 조금 이해가 가긴 한다.
독고황 그 망할 자식의 검에 심장도 뚫렸었고 규천마력도 다 빨려 나가 버렸으며 이레 동안 내내 꼼짝도 하지 않고 누워만 있었을 테니까.
‘근데 왜 자꾸만 나를 보고 용 공자라고 하지?’
정말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스르르.
그 사실에 신경 좀 썼더니 눈이 저절로 감겼다.
힘들더라도 질문 아니 심문을 좀 해서 왜 자꾸만 나를 용 공자라고 하는지 그 이유를 알아내고 싶은데 아무리 애를 써도 천근만근처럼 자꾸만 내려앉았다.
자식들이 눈치는 또 있었다.
“우리는 이만 나가보겠네, 용 공자.”
“조리 잘 하시게나.”
“그래, 어서 기운 차리고 일어나야지.”
“허허허. 한숨 푹 자고 일어나시게. 이젠 정말 곧 쾌차할 거네.”
그 말을 끝으로 쳐들어왔을 때처럼 우르르 다들 함께 몰려 나갔다. 나와 눈이 마주쳤던 이름 모를 여인이 마지막으로 일어났다.
‘거 참, 다 좋은데 날 바라보는 시선이 왜 이렇게 측은한 거야?’
이제는 확실히 알겠다.
누군지는 몰라도 저 여인은 나를 동정하고 있었다.
‘신마 꼴이 말이 아니군.’
독고황에게 몇 대 얻어맞았기로서니 저 따위 계집아이에게 동정이나 받아서야 어디 되겠나? 속에서 뜨거운 무엇인가가 울컥 치밀어 올랐다.
‘어째서 나를 용 공자라고 부르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하여간 다들 조금만 기다려라.’
단전이 박살나지 않은 이상 나는 재기하고야 만다.
나는 할 수 있다.
‘어차피 한 번 밟아 봤던 길이야.’
장담하건대 10년.
지금 내 나이가 한창 혈기 왕성한 나이인 70살이니까-이건 어디까지나 신교 기준이다- 80살 즈음에는 다시 옛 실력을 모두 되찾을 수 있을 거다.
‘그러기 위해서는 몸 상태를 정확히 알아야만 해.’
나는 내공이라고 부를 수도 없는 그 코딱지만 한 내공을 조심스레 불러 일으켰다.
‘이걸 내공이라고 정말…….’
스스로의 몸 상태를 들여다볼 수준도 되지 않는 내공에 너무나 한심했지만 나는 주의 깊게 내부를 관조하며 한 줌의 내공을 12정경에 골고루…… 드르렁. 쿠울.
***
또 하루가 지나서야 정신이 돌아왔다.
짧다면 짧고 길다고 하면 긴 시간,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올 때마다 동정의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던 그 발칙한 여인의 입을 통해서였다.
“그러니까 제 한 몸 가누기도 힘들어 하시는 분이 왜 나서셨어요?”
“뭐, 뭐라고?”
후유증 때문인지 아직도 말이 잘 나오지 않는다.
아니, 심장에 칼 맞았던 후유증 때문이 아니라 너무 기가 막혀서인가?
“용무린 공자님께서는 신주오가 중에서도 지혜로서 무력을 뒤덮는 비룡문의 소공자, 그 뛰어난 두뇌를 생각하면 태어날 때부터 허약한 몸은 결코 약점이 되지 못해요.”
갈수록 태산이다.
나 신교의 교주 진무량을 태어날 때부터 허약했던 비룡문의 소공자 용무린이라고 계속해서 우긴다.
“자, 잠깐만!”
“……?”
“내, 내가 용……무린이라고?”
어째 목소리조차 내 목소리가 아닌 것 같긴 하다.
이제 어지간하면 목소리가 돌아올 만도 한데 아직도 힘이 하나도 없다. 그래서인지 여인은 당당하기 짝이 없는 태도로 쐐기를 박듯 대답했다.
“예. 용무린, 신주오가의 당당한 일원인 비룡문의 소공자가 바로 그대예요.”
헐! 저렇게 당당한 태도를 보니 나도 살짝 헷갈린다.
‘내가 원래 진무량이 아니라 용무린이었나?’
신교에 흘러든 고아가 대부분 다 그러하듯 성씨와 이름은 모두 다 죽지 않고 지옥수련을 마친 후 내가 스스로 지은 것이다.
‘심장에 칼 맞고 쓰러진 나를 본 비룡문의 누군가가 소공자의 표시 같은 걸 막 발견해 낸 것인가? 나도 모르는 엉덩이의 반점이라던가 아니면 등의 북두칠성 점 같은?!’
그게 정말 말이 돼?
막장 경극 공연을 하는 것도 아니고…….
피식.
생각만 해도 웃긴다. 풀썩 웃음이 터졌다. 내 몸엔 그런 점 따위가 있지도 않다.
“왜 웃죠?”
“웃기지. 암, 웃기고말고.”
“……!”
여인은 하나도 안 웃긴 것 같았다.
다소 심각한 표정으로 내 얼굴만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였다.
‘어라? 내 손, 내 손이 왜 이러지?’
이제야 겨우 천천히 들어 올릴 수 있게 된 내 손을 무심코 바라본 내 눈은 튀어나올 듯 휘둥그레졌다. 신마라는 이름에 걸맞도록 커다랗고 사내답던 내 주먹이 계집애의 섬섬옥수마냥 새하얗고 보들보들한 게 아닌가?
“도, 동경. 동경 좀 가져와 봐.”
“동경요? 갑자기 동경은 왜요?”
“빨리-이!”
내 목소리에서 무엇인가 느껴진 것인가?
시야에서 잠시 사라졌던 여인은 이내 한 손에 동경을 가지고 돌아왔다.
“허억!”
동경을 들여다본 내 입에서는 기함성이 튀어 나왔다.
그 안에는 자랑스러운 신교의 교주 진무량이 아니라 밀가루 반죽으로 잘 빗어놓은 듯 허여멀건한 애송이 하나가 들어 앉아 있었다.
“이, 이게 나라고?”
“그럼 용 공자지 누구예요?”
자꾸 나서지 좀 마라 이 계집애야.
그렇지 않아도 사람 지금 헷갈려서 돌아버릴 지경인데.
“……이제 겨우 약관이나 되려나?”
“이제야 겨우 정신이 돌아오나 보죠? 맞아요, 용무린 공자. 공자께서는 지금 정확히 약관의 나이 스물이에요.”
“……!”
헐! 할 말이 없다.
심장에 칼 한 번 맞았더니 50년 정도씩이나 갑자기 팍 젊어져 버리다니!
‘이거, 심장에 칼침 한 번씩 맞을 만한데?’
개이득이란 바로 이런 것인가?
나중에 한 70살쯤 나이가 들어 먹어 보일 때 쯤 해서 다시 한 번 심장에 칼 한 자루 푹 박아 넣어 볼까? 하는 생각마저 다 들 정도다.
‘그건 그런데……. 아, 또 졸린다.’
잊을 만하면 치료를 위해 퍼 먹이는 약 때문인지 시도 때도 없이 자꾸만 졸린다.
‘그래, 이건 꿈일지도 몰라.’
어쨌거나 지금도 비몽사몽간이잖나?
확실히 꿈에서 깨고 나면 다시금 신교의 교주 진무량으로 되돌아가 있을지도 모른다.
쿠우울…….
***
하루하루 기력이 돌아왔다.
생각만 해도 피가 거꾸로 솟을 것처럼 아까운 내 규천마력이 돌아오고 있다는 뜻이 아니라 육체의 힘이 겨우 일어나 앉을 수 있을 정도가 되어 간다는 말이었다.
‘약이 바뀌었나? 아니면 이제 몸이 좀 나아가는 것인가? 어째 까무러치듯 잠에 빠져 드는 일이 갈수록 줄어드는 것 같네?’
정신까지 훨씬 또렷해졌다.
그 덕에 다행히 현재 맞이한 상황을 정확하게 인식할 수 있었다.
‘꿈은 확실히 아니야.’
어찌된 영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더 이상 신교의 교주 진무량이 아니다. 신주오가 중 한 자리를 당당히 차지하고 있는 비룡문의 소공자 용무린이었다.
‘그런데 신주오가는 또 어디서 굴러먹던 개뼈다귀 같은 놈들이지?’
맹세컨대 신교의 교주로 활동할 무렵에는 들어보지 못한 놈들이다.
‘하여튼 그것은 차차 알아보면 되는 거고, 중요한 것은 바로 이거야. 어찌된 영문인지는 몰라도 내가 이 용무린이라는 놈이 되어 버렸다는 사실, 그게 가장 중요해!’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지 정말 고민 많이 했다.
하지만 결국에는 명료하게 결론을 내려야 할 순간이 올 수밖에 없었다.
‘결론은 하나뿐이야.’
나만 보면 안쓰러운 시선을 보내던 그 시건방진 여인 백리소옥의 입을 통해 수집한 정보를 모두 종합해 보면 결론은 하나밖에 없었다.
‘나 신교의 교주 진무량이 용무린이라는 애송이 녀석으로 환생을 한 거야.’
그것 말고는 달리 이 기이한 상황을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
꿈이 아닌 이상, 전신의 뼈가 거의 다 부서지고 심맥마저 크게 상한 이 애송이의 몸이 내 몸인 것이다.
‘태어날 때부터 이 애송이의 몸으로 환생을 한 것인지 아니면 이 애송이가 크게 다친 후 내가 들어오게 된 것인지 그것도 아니면 머리를 다치면서 전생의 기억이 깨어나게 된 것인지는 나도 아직 몰라.’
확실한 것은 이제 진무량은 더는 없다는 것, 나는 용무린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한 번의 기회를 더 얻었다고 좋아해야 해? 아니면 이런 허접한 몸뚱이로 태어난 것을 저주해야 해?’
정말 헷갈린다.
다시 삶을 살아야 한다면 두말할 필요 없이 신마의 교주 진무량으로서 사는 것이 제일이다.
‘숨만 겨우 헐떡이는 이런 몸뚱이라는 것은 대체……?’
왜 이렇게 몸이 아프고 힘든 것인지는 아직 모른다.
아무도 내게 그 이유를 알려주지 않았다.
한참을 고민했지만 결국 현실을 직시했다. 스스로를 축하하기로 마음먹었다. 어쨌거나 심장에 칼침 오지게 맞고 죽었어야 할 몸 다시 한 번 기회를 얻은 것은 확실하기 때문이었다.
‘마선계에서 내 기도를 들어준 것일지도 몰라.’
죽어가던 순간 나는 간절히 바랐었다.
마선계로의 꿈을 포기하는 한이 있더라도 군림의 길을 막은 내 운명의 적 절대검신 독고황을 이기고 싶다고, 그놈의 약점이 무엇인지 정말 너무 알고 싶어 했었다.
‘그래, 맞아. 마선들께서 그 기도를 들어준 것일 뿐이야.’
이름 따위 뭐가 중요할까?
기회가 왔으면 잡으면 그만이다. 껍데기가 어떻든 나는 신교의 절대자 신마다.
‘좋아. 다시 한 번 시작하자.’
이미 한 번 걸었던 길이다.
비록 현재 차지하고 있는 몸뚱이가 구역질 날 정도로 한심하긴 하지만, 늦어도 10년이면 과거의 힘을 모두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크크큭. 기다려라, 절대검신 독고황. 10년 후에 네놈을 다시 찾겠다.”
아마, 화들짝 놀랄 거다.
제 놈은 완전히 꼬부랑 할배가 되어 늙어죽기 일보 직전이었는데 나는 반로환동이라도 해 버린 듯 50년이나 젊어져 있으니 이 어찌 통쾌한 일이 아니겠는가?
“대천자마공부터 시작하면 되겠지?”
신교의 지존신공 중 하나인 대천자마공.
최소한 그 정도는 익혀둬야만 마선지공의 입문이랄 수 있는 규천마력을 향해 나아갈 수 있게 된다.
“보자, 대천자마공의 구결이 어떻게 되더라?”
그때였다.
드르륵.
“하하하. 용 공자가 깨어나셨다고?”
“하하하. 그러면 우리가 보러오지 않을 수가 없지.”
“용 형, 우리가 왔다네.”
생판 모르는 얼굴의 애송이들이 또 쳐들어왔다. 이제 수련 좀 해 볼까? 하면 꼭 방해하고 난리다.
‘친군지 그냥 아는 놈들인지는 모르겠는데, 하여간 더럽게 들락거리는구나.’
진득하니 뭘 할 수가 없다.
시시때때로 들어오는 의원과 시비, 백리소옥과 늙은이들 혹은 고만고만한 또래의 애송이들 때문에 수련은 살짝 뒤로 밀릴 수밖에 없었다.
“하하하. 어서 떨치고 일어나시게.”
“맞네. 그래야 우리 무부(武夫)들에게 그 뛰어난 시를 들려주고 멋들어진 산수화도 한 장씩 그려줄 수 있지 않겠는가?”
“하하하. 내 여동생은 용 형제가 그려준다고 약속한 초상화만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네.”
“이 친구 좀 보게! 말은 똑바로 해야지.”
“으응?”
“어디 초상화를 기다렸겠는가? 우리 용 형제의 조각 같은 얼굴을 기다렸지. 아니 그런가?”
“와하하하. 맞네, 맞아. 내 여동생은 삼절일학 용무린 공자가 깨어나기만을 가슴 졸이며 기다렸다네.”
갈수록 태산이다.
시, 서, 화……. 하나 같이 무예와는 거리가 멀어도 아주 먼 것들뿐이다.
‘나 신마 진무량에게 시를 읊어달라고?’
그 옆에 있던 녀석은 한술 더 떠서 산수화와 여동생 초상화를 찾고 난리다.
‘콱, 그냥!’
절로 주먹이 불끈 움켜쥐어진다.
‘살려달라는 비명을 시처럼 노래 부르게 하고 뿜어져 나온 피로 천지사방을 그림처럼 붉게 물들여 버렸으면…….’
속이 다 후련하겠다.
나는 치밀어 오르는 살기를 겨우 억누른 채 이 말만 불쑥 내뱉었다.
“모두 꺼져.”
***
하루 뒤!
“……!”
나는 새로 얻은 정보로 인해 한동안 멍하니 상념에 잠겨야만 했다. 신주오가가 바로 내 원수 절대검신 독고황의 사후 제자들이 세운 가문이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하아. 혼란스럽네, 정말.’
기분 정말 오묘했다.
신마혈사라 불리던 그 날의 전투로 인해 전생의 나는 확실히 죽은 것이 맞는다고 한다.
‘내가 다시 환생으로 기회를 갖게 된 것은 맞는데…….’
생각할수록 기가 막힌다.
어떻게 따지든 내 원수는 독고황인데 하필이면 환생을 그놈의 제자 중 하나의 후예를 택해서 해 버리다니!
‘어쩌지?’
복수할 대상이 이미 죽고 없어졌다는 소식에 김이 팍 샜다고 표현해야 하나?
솔직히 가부좌를 틀 정도만 되면 필사적으로 몸을 회복한 후 곧바로 십만 대산을 향해 군림의 길을 다시 한 번 떠나려고 했었다.
한데, 신마대전이 끝난 지 무려 70년이라고 한다.
세월이 벌써 그렇게 흘러 버렸다니!
십만 대산으로 향하던 내 생각이 확 바뀌었다.
“젠장. 가면 뭐해? 거기도 이미 다른 놈이 다 차지하고 있을 텐데.”
70년이란 시간이 흘렀으면 틀림없다.
신교의 주인은 이미 다른 누군가로 바뀌어 있을 것이다.
게다가 신교의 무공을 궁극으로 익혀 봤자 결국에는 규천마력 9성으로 끝이다. 신교 역사상 최고의 천재라고 불렸지만 결국 그 정도가 한계였다.
“그런데 여긴 또 다른 기회가 있단 말이야?”
잘만하면 죽는 순간까지 그토록 궁금해하던 절대검신 독고황의 모든 것을 아예 내 것으로 만들 기회가 있을 것 같았다.
“차라리 그게 더 낫지 않을까?”
기왕 무공을 바닥부터 다시 시작할 바에야 규천마력마저 마구 썰어 버리던 절대검신 독고황의 무공을 배운다면 더 좋을 것만 같았다.
“괜찮은 생각인데?”
생각할수록 현명한 판단으로 느껴졌다.
하지만 심장 한 쪽은 여전히 계속해서 부글부글 끓었다.
원수에게 복수를 하기는커녕, 그 후손 중 하나의 집안에 환생을 한 데서 오는 괴리감 때문이었다.
“복수를 하자니 현실적으로는 지독한 패륜이고 잊자니 심장이 터져 버리려고 하고…….”
진퇴양난도 이런 진퇴양난이 없다.
그때였다.
드르륵.
다시 한 번 문이 벌컥 열리고 한 무리의 애송이들이 들이닥쳤다.
“하하하. 용 형, 우리 왔다네.”
또 그 애송이들이다. 귀찮아 죽겠다.
내 표정이 이상했는지 애송들 중 하나가 나름대로 나를 위로하는 말을 꺼내들었다.
“하하하. 운적풍, 그 친구는 우리가 용 형을 대신해 혼쭐을 내주었다네.”
“크하하하. 맞네, 친구. 나 상관웅이 친히 운적풍 그 친구를 상대했었네.”
용무린이 아닌 신마 진무량으로 불릴 때였다면 감히 나를 향해 고개조차 들지 못할 정도의 애송이들 수다로 몇 가지 정보를 더 입수할 수 있었다.
‘나 참, 창피해서 이거 어디 원……!’
드디어 내가 왜 여기 이런 모양으로 누워 있게 되었는지 알게 되었다.
‘운적풍이라고 했지?’
독고황에게 배운 장법으로 일가를 이룬 가문 운룡장.
그 운룡장의 현 소공자인 운적풍이란 녀석이 나를 이 모양 이 꼴로 만들었다고 한다.
‘아무리 대가리 쓰는 게 전부인 놈이라고 해도 그렇지. 어떻게 사내자식이 약관의 나이를 처먹도록 무공 수련 하나 하질 않았지?’
솔직한 감상으로는 맞아 죽어도 싸다고 생각한다.
힘도 없는 주제에 남을 돕는답시고 함부로 나섰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이런, 이런……. 우리 용 형의 화가 아직도 풀리지 않은 모양이구려.”
“하하하. 사내라면 그 또한 당연한 일 아니겠나? 용 형제. 나는 다 이해하네.”
입만 열면 자꾸 그놈의 용 형, 용 형제를 찾는다.
듣기 무지하게 거북하다.
약관 스물의 나이로 환생한 것을 인정하기는 하지만 의식은 아직 고스란히 신마 진무량이었기 때문이다.
‘저 시건방진 주둥이를 콱 그냥!’
언제고 묵사발을 내 주리라.
마음은 굴뚝같지만 아직 먼 훗날의 일이다.
‘그건 그렇고 정보 좀 종합해 보자.’
며칠 동안 주워들은 정보가 머릿속에서 쫙 정리가 되기 시작했다.
일단 나 신교의 교주 신마 진무량은 70년 전에 죽었다.
현재는 나를 죽인 원수 절대검신 독고황의 다섯 제자 중 무공은 쥐뿔도 없이 대가리만 굴릴 줄 아는 비룡문이란 곳의 소공자 용무린으로 태어난 상태다.
‘처음부터 그렇게 태어나서 죽도록 얻어맞고 전생의 기억을 되찾게 된 것인지 아니면 이 몸이 죽고 나서 내가 바로 들어왔는데 시간이 이렇게 흐른 것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지만, 하여튼 이 몸이 현재 나라는 것만큼은 사실이야.’
그리고 내가 누워 있는 이곳은 독고황에게 검법을 사사한 백리청우란 녀석이 세운 백리세가다.
‘빌어먹을! 기왕 원수 놈의 제자들 중 하나를 택해서 태어날 것이면 이곳에서나 태어날 것이지…….’
절대검신 독고황의 특기가 뭔가?
당연히 검법이다.
특히 절대의 경지라 자부하던 9성 경지의 내 규천마력을 쓱쓱 썰어 버리고 짓쳐들어 내 심장을 박살내 버렸던 독고황의 이름 모를 검법은 아직도 기억에 생생했다. 미세한 움직임 하나까지 고스란히 내 머릿속에 들어 있었다.
‘그건 그렇고, 일 년에 한 차례씩 다섯 가문의 후기지수들이 모두 모여서 단합을 꾀하는데 올해는 백리세가에서 주최를 했다는 것이지?’
그래서 나 역시 여길 왔는데 그놈의 운적풍이라는 애송이와 시비가 붙었고 결국에는 이 모양 이 꼴이 되었다는 웃기는 이야기였다.
‘다른 세가는 이 회합에 가문의 어른들과 또래의 후기지수들도 많이 참여한 듯한데, 왜 내 집안인 비룡문에서는 딸랑 나 혼자 온 것이지?’
아니, 지금은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래, 나를 이 꼴로 만들어 놓은 그 운적풍이란 애송이는 지금 어디에 있지?”
흠칫!
거침없는 내 말에 침상 옆에 서서 주절거리던 애송이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자신들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용무린의 새로운 모습에 놀라워했다.
그때였다.
드르륵.
“나를 찾았나?”
벌컥 문이 열리고 지금껏 코빼기도 뵈지 않던 운적풍이란 애송이가 안으로 들어섰다.
애 새끼, 눈깔 쭉 찢어진 것 좀 봐.
한 눈에 봐도 성깔 좀 있어 봬는 애송이가 틀림없었지만,
피식.
나는 풀썩 싱거운 웃음부터 나왔다.
이 신마님께 있어 이제 겨우 약관 언저리의 애송이란 성깔 나부랭이 있어 봤자 솔직히 웃길 뿐이었다.
“너냐? 운적풍이란 애송이가?”
아직 침대에 누워 있는 신세라 나름 정중하게 질문만 던졌다. 과거 신마 시절이었다면 녀석은 벌써 한 줌 피 떡이 되어 있을 것이다.
꿈틀!
녀석의 눈두덩이 사납게 요동쳤다.
하지만 이내 상황을 이해한 듯 야비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직 제정신이 아닌 듯하군. 내가 절제하지 못했네. 미안하네.”
말은 미안하다고 하는데 눈깔의 독기는 전혀 풀리지 않았다. 그렇게 짓밟아 놓고도 아직 나를 향한 분노가 다 풀리지 않은 것으로 보였다.
‘오냐, 그래야지. 그래야 밟는 맛이 있는 거야.’
그건 그렇고 저 덩치는 내게 거짓말을 했네?
상관웅라는 이름의 덩치.
실컷 내 대신 운적풍을 손보아 줬으니 이제 그만 화 풀라는 식으로 떠들던 녀석.
“근데 대체 무슨 손을 봐줬다는 거지? 글자 그대로 정말 손만 봐준 건가? 사이좋게 술 한 잔씩 나누면서?”
의도야 알겠는데…… 어린 아이 어르는 것도 아니고, 그런 거짓말은 하지 말아야지.
“그, 그게…….”
나와 눈이 마주친 상관웅이 얼굴을 살짝 붉혔다.
기분 풀어주려고 한 말을 설마하니 저렇게 꼬투리를 잡을 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됐고!”
내 눈은 다시 운적풍이란 애송이에게로 향했다.
녀석의 활활 타오르는 듯한 시선을 아무렇지도 않게 정면으로 받아내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우드득. 와득.
부러졌다 겨우 이어지고 있던 뼈마디가 여기저기에서 비명을 질렀지만 차가운 심장으로 그냥 무시해 버렸다. 아니, 되레 씽긋 웃기까지 했다.
‘이 정도 고통쯤이야 신교의 지옥훈련에 비하면 싱거운 수준이니까…….’
몸을 다 일으켜 앉은 나는 운적풍이란 애송이의 눈을 똑바로 쏘아보며 손가락 세 개를 들어 올려 보였다.
“석 달.”
“……?”
“기다려라. 정식으로 널 찾아가도록 하마.”
“너 이 새끼……!”
애송이가 되도 않게 이를 드러냈다.
나는 녀석의 말을 가볍게 씹어 버린 후 하고 싶은 말을 마무리를 지었다.
“강호인의 은(恩)과 원(怨)은 확실히 정리할수록 좋지 않던가?”
“……!”
설마하니 이런 말까지 들을 줄은 정말 몰랐다는 듯 애송이의 입이 쩍 벌어졌다. 그러더니 갑자기 웃기 시작했다. 잠시 후에는 마치 미친놈이라도 되는 듯 격렬한 웃음을 터뜨렸다.
“크크큭. 크흐하하하하하!”
아, 그 애송이 녀석 정말 시끄럽게 구네.
독심술이라도 익혔나?
녀석의 웃음이 갑자기 뚝 끊겼다.
표독한 눈빛으로 나를 쏘아보더니 씹어 뱉듯 말을 툭툭 내뱉었다.
“좋아. 기대하지. 석 달 후라고?”
애송이가 돌아서면서 다시 미친 듯 쳐 웃기 시작했다.
“크크큭. 크흐하하하핫!”
녀석이 사라지기가 무섭게 주변에 늘어서 있던 녀석들이 다투어 입을 열었다.
“이 친구야. 대체 어쩌려고 일을 이렇게 벌였는가?”
자꾸만 친한 척하는 이 녀석은 백리검가의 장손인 백리천월이었다. 자꾸만 날 측은한 시선으로 바라보곤 하는 백리소옥의 오라버니인 셈이다.
‘그래, 그래. 너는 내가 딱히 미워하지는 않으마.’
나를 위해 제 방까지 내어준 어여쁜 백리소옥을 보아서라도 그럴 필요까지는 없다.
“크음. 친구가 이처럼 사내다운지 내 미처 몰랐네. 말만 앞세워 친구를 우롱한 나를 실컷 욕하게.”
이 녀석은 상관웅, 손 쓸 생각도 없던 놈이 말로만 정의로운 척하는 부류다.
‘됐다, 이 녀석아. 호기로운 척 좀 그만해라.’
녀석은 곰의 탈을 뒤집어 쓴 여우였다. 호기로운 척 말은 해도 눈은 번들거리며 가라앉아 있다. 그대로 믿다가는 십중팔구 뒤통수가 근질근질할 것이다.
“용 형, 무슨 복안이라도 있는 게요?”
얘가 그나마 제일 낫다.
벽소추.
독고황에게 도법을 사사한 벽운성이 세운 벽력도가의 장손인데, 진실 된 눈빛으로 보나 복안이 있느냐고 먼저 물어보는 신중함으로 보나 지금까지 봤던 녀석들 중 제일 갑이었다.
‘도법은 나도 직접 수련 안 해 봐서 모르겠는데 촌음을 아껴서 수련하고 또 수련해라. 신교에는 너만 한 애들 그야말로 천지다, 천지.’
언젠가는 알려 줄 날이 있겠지.
그때를 그리며 나는 씽긋 웃어 보였다. 아무것도 아닌 듯 툭 입을 열었다.
“그 따위 애송이 하나 때려잡는데 복안은 무슨!”
“……!”
애들이 왜 자꾸 입을 쩍쩍 벌리지?
내 말이 그렇게 안 믿어지나?
“지금부터 몸 좀 단련하면 충분하다. 석 달? 솔직히 그것도 꽤 넉넉하게 잡은 거야.”
내 눈을 지그시 들여다보던 벽소추의 고개가 천천히 끄덕여졌다.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눈빛! 좋아, 믿겠네. 부디 열심히 수련하게, 친구. 석 달 후 친구 옆에는 내가 함께 있도록 하겠네.”
어쭈? 제법인데?
여차하면 네가 나서서 내 대신 운적풍 그놈의 공격을 막으려고 하는 거지?
‘흠, 그런 정도로 생각이 있는 녀석이 왜 운적풍이 날 이 모양으로 만들었을 때는 나서지 않았을까?’
살짝 의심스런 생각이 스쳐 지나는 순간 벽소추의 입이 다시 열렸다.
“그때는 늦지 않도록 하지.”
아하! 이 몸이 쳐 맞을 때 너는 자리에 없었구나?
조금 늦게 도착한 거야? 알았어.
‘그럼 통과.’
기뻐해라 벽소추.
너는 앞으로 이 몸의 총애를 독차지하게 될 거다.
***
내 선전포고가 백리세가에 퍼지는 것은 그야말로 한 순간이었다. 백리세가의 가주까지 찾아와서 우려의 뜻을 피력했고 백리세가에 도착해 있던 상관세가의 인사들까지 돌아가며 찾아와 귀찮게 굴었다.
상황이 그러니 당연히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특히 시비들이 소문에 열중했었는데, 일부러 들으라고 하는 것인지 자꾸만 내 방문 앞에서 수다를 떨어댔다.
“우리 용 공자님 이제 어떻게 해?”
“한없이 순하고 착한 분이신데 정말 큰일이네.”
주로 내 염려였다.
한 녀석도 내가 이길 것이란 생각은 안 했다. 시비들 사이에 석 달 후 내 패배는 이미 기정사실이었다. 죽지나 않으면 다행이라는 투였다.
‘신마 체면이 정말 말이 아니구나.’
와, 진짜 자존심 팍 상한다.
절로 주먹이 콱 쥐어졌다. 더불어 맹세 엇비슷한 걸 속으로 하게 되었다.
‘기다려라. 폭력이란 이런 것이구나, 하는 것을 이 몸이 손수 보여 주도록 하마.’
비 오는 날 먼지가 나도록 탈탈 털어 주리라.
그런 즐거운 상상을 끝으로 병아리 눈물만큼 남아 있는 내공을 이용해 기경팔맥과 12정경의 현재 상태 파악에 나설 찰나였다.
스르르.
하여간 내가 무공 익히는 꼴은 죽어도 보지 못하겠다는 것인지 또 누가 들어왔다.
무척이나 어여쁜 시비다.
환생 후 처음으로 눈을 떴을 때 나를 당혹하게 만들었던 여인이나 차가운 백리소옥에 비하면 당연히 격이 많이 떨어지지만 예쁜 건 예쁜 거다.
그건 그렇고,
‘하여간 하루라도 빨리 이놈의 집구석을 완전히 벗어나야만 해.’
그러기 전에는 절대로 본격적인 수련에 돌입할 수 없을 것이라는 비관적인 생각마저 들었다.
‘그런데, 넌 대체 뭔데 표정이 그러니?’
나와 눈이 마주친 시비가 참으로 오묘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혹시라도 나를 막 사모하고 그러는 앤가?’
그랬으면 정말 좋을 텐데…….
‘어림없겠지?’
궁금증은 바로 풀렸다.
시비는 눈물을 글썽이더니 풀썩 무릎을 꿇었다.
“용 공자님 죄송해요. 저 때문에 공연히 공자님께서 곤욕을 치르셨네요.”
아하, 네가 바로 운적풍이 술 먹고 대화 좀 나누려 했었다는 그 시비로구나?
“곤욕은 무슨!”
무슨 일이 있었는지 솔직히 기억에도 없다.
“저희 아랫것들은 다 알고 있답니다. 용 공자님이 아니었다면 저는 그날 운적풍 공자에게 끌려가서 몹쓸 짓을 당했을 것이에요.”
오호라, 그랬단 말이지?
‘듣기로는 내가 주제도 모르고 운적풍이란 놈에게 먼저 시비를 걸었다고 하던데…….’
그 이면에는 이런 일이 숨어 있었던 거다.
‘어쩐지…….’
이런 허약한 몸뚱이를 가진 주제에 포식자에 가까운 운적풍에 대한 뜬금없는 시비는 역시 너무 생뚱맞은 일이다, 싶었다.
“괜찮다.”
과거의 용무린이었다면 어림도 없는 일이었겠지만 어쩐지 호감 가득한 시비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이런 말을 덧붙이고 싶어졌다.
“네가 무사한 것으로 되었다. 어여쁜 네 행복이 지켜진 것만으로도 나는 족하구나…….”
화르륵.
시비의 얼굴이 도화빛으로 물들었다.
‘오오오! 먹혀들었어!’
사내는 문지방 넘을 힘만 있어도 그(?) 생각이 든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겠다는 듯 나는 70년 만에 실로 야릇한 상상의 나래를 폈다.
“고, 공자니-임.”
시비의 입에서 대뜸 코맹맹이 소리가 났다.
‘그래, 뛰어 들어. 내 품에 콱 안기란 말이야.’
그냥 한 번 안아 보기라도 하자.
약속할게. 솔직히 그 짓 할 힘도 없다, 아직은…….
그때였다.
드르륵.
느닷없이 문이 활짝 열렸다. 청수한 인상의 중년인이 말도 없이 안으로 성큼 들어섰다.
“마, 말씀 나누시어요.”
파바박.
불에 덴 듯 화들짝 놀란 시비는 얼굴을 분홍빛으로 가득 물들인 채 그대로 밖으로 뛰어나가 버렸다.
‘아으, 아까워라!’
조금만 시간이 더 있었다면 어쩌면 저 시비를 품에 안았을 수도 있었는데, 저 망할 놈의 인간 때문에 산통이 다 깨졌다.
‘넌 또 뭐야?’
나는 억하심정을 한껏 담아 사내를 노려보았다.
솔직한 심정으론 욕이라도 한 바가지 퍼부어 주고 싶었지만 아직 용무린이라는 녀석의 주변 인물들에 대한 정보가 적다 보니 나름 조심하는 거였다.
“미안하구나, 아들아.”
뭐라고? 아들? 아드-을?
‘미리 조심하기 참 잘 했네.’
신주오가의 하나인 비룡문의 현 가주이자 지금 차지하고 있는 용무린이란 녀석의 아버지 용대명의 등장에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무인들의 모임 따위에는 나가기 싫어하는 것을 잘 알면서도 억지로 보냈던 아비의 불찰이구나.”
이게 대체 뭔 소리래?
‘나는 본래 여기 오기 싫어했다 이건가? 여긴 저 양반이 강제로 보낸 것이고?’
대충 짚은 것인데 정확했다.
용대명이 바로 신주오가의 화합이네 뭐내 하는 구질구질한 핑계로 서재를 떠나기 싫어하는 용무린을 억지로 백리세가로 내몬 장본인이었다.
“백리세가에 도착하자마자 들었다. 운적풍 그 아이에게 석 달 후 대결을 청했다고?”
어째 분위기가 말리기라도 할 기세다.
“이미 결정된 일입니다.”
먼저 선수를 쳤다. 딱 잘라 말했다.
하지만 용대명 역시 물러서지 않았다. 얼음처럼 냉철한 태도로 묵직하게 말을 이었다.
“우리 가문은 절대검신 조사께 지혜를 중점적으로 물려받았을 뿐 기초적인 십팔반무예 외에 따로 절기를 사사한 것이 없다. 석 달 후……. 그동안 부상을 다 회복하는 것만으로도 벅찰 것이 빤한데, 정말 가능하다고 보느냐?”
부상회복에 더해 무공까지 익혀내어 운적풍 녀석을 박살내야 하는데, 사실 그것은 누가 봐도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긴 했다.
그러나 나는 그딴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다.
비룡문에 독고황의 독문무공 중 일부가 없다는 사실에 실망했고 아쉬웠을 뿐이다.
‘내 원수 절대검신 독고황의 무공 중 하나를 날로 먹을 절호의 기회였는데…….’
가만, 그러고 보니 비룡문은 원수의 후예가 아닌 건가?
‘아니, 후예는 맞지. 무공을 받지 않았을 뿐이지.’
살짝 헷갈린다.
후예인 듯하지만, 또 한 편으로 생각하면 후예라고 볼 수가 없는 일이다. 무림이란 대지에 무예대신 지혜만 받아서는 결코 후예라고 할 수는 없으니까.
‘중요한 것은 무예와는 거리가 먼 집안이라는 거잖아.’
그 사실을 확실하게 알게 되자 생각이 살짝 달라졌다.
원수에게 복수를 하기는커녕, 그 후손 중 하나의 집안에 환생을 한 것에서 오는 괴리감, 그 진한 괴리감이 조금쯤 희석되어 버린 것이다.
‘직계 혈손도 아니고 무(武)를 사사한 것도 아니잖아. 엄밀하게 따지면 절대검신 독고황이 비룡문 선조의 글 선생 정도인데 뭐…….’
무인에게 적통후예란 무공을 오롯이 이은 사람이다.
도대체가 직계 혈손도 아니고, 그 무예를 전부 이은 것도 아닌데 직계 또는 제자라 부를 수 있을까? 무인에게 단순히 지식 좀 나누어 받았다는 것 정도로는 후예 또는 제자라 부르기 뭣한 상황 아닌가?
‘무인이라면 당연한 법이지.’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그런 저런 생각을 하자니 괴리감이 다시 조금 더 희석되어 사라졌다.
‘그러면 대체 절대검신 독고황의 무공은 어떻게 얻어야 하는 거야?’
속마음을 들여다보기라도 하는 듯 정보가 쏟아졌다.
“조사님께서 잠드신 곳을 가꾸고 돌보는 것이 우리 가문의 숙명, 그것이 바로 조사님께서 네 증조부께 기관 진식과 진법을 사사하신 이유다.”
이렇게 또 하나 정보가 수집되었다.
‘내 원수 절대검신 독고황이 죽어서 묻힌 곳이 따로 관리되고 있었구나? 그 안에 뭔가 있나 보지? 기관 진식 운운하는 것이 말이야?’
어쩌면 내 원수 독고황의 무공이 긴 세월 동안 나만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팍 들었다.
용대명의 입에서 고급 정보가 계속해서 쏟아졌다.
무림을 진동시키는 신주오가에 대해 보다 정확히 알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교류라는 시답잖은 핑계로 1년에 한 번씩, 그리고 성산의 일로 10년에 한 번씩 신주오가의 후기지수가 모두 모이는 이유는 너도 잘 알고 있을 거다.”
그걸 알면 내가 점쟁이이게?
생각이야 그랬지만 내 표정은 흔들림이 없었다. 누가 봐도 잘 알고 있다는 듯 보일 거다. 미미하게 고개까지 살짝 끄덕이고 있었으니까.
“사람은 가르치지 않으면 도를 잃고, 사람이 아닌 사람을 가르치면 오만하여 도를 누설한다…….”
다소 생뚱맞은 말이었지만 나름 무공의 완성을 위해 이것저것 온갖 잡동사니 책 깨나 읽었던 사람이라 대뜸 알아들었다.
‘황제내경의 기교변대론에 나오는 말이잖아!’
머리 좋은 인간들은 저래서 문제다.
그냥 간단하게 축약해서 비인부전(非人不傳)이라고 말하면 될 것을 꼭 저렇게 있어 보이게 배배 꼬아서 두루뭉술하게 말을 한다.
“합당한 사람이 아니면 진신절기를 전수하지 않겠다는 조사님의 뜻에 따라 10년에 한 번씩 후기지수들을 모아 성산에 데려간 것이 어언 일곱 번, 벌써 70년이 흘렀지만 아직도 문은 열리지 않았지.”
오호라. 이건 정말 희소식이다.
독고황의 진신절기는 아직 누구에게도 풀리지 않았다.
“그동안 본가는 무가(武家)가 아니라는 이유로 성산(聖山)에 입산하지 않았지만…….”
용대명의 눈에 안타까움이 스쳤다.
자신의 고집으로 장손을 10년의 회합에 보내 놓은 이 결정이 어떠한 결과를 가져왔는지 직접 보게 되니 마음이 아팠던 것이다.
“미안하구나. 아비의 실수다. 글만을 벗 삼던 네게 너무 무리한 부탁이었…….”
이게 대체 무슨 소리야?
무리한 부탁 아니야. 겁나게 잘 내린 결정이었다고!
나는 잽싸게 용대명의 말을 중간에 툭 잘랐다.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어떤 부탁을 했었는지는 빤하다.
“도전할 겁니다.”
다소 의외라는 듯 휘둥그레진 눈으로 나를 바라보던 용대명의 얼굴에 그제야 살짝 미소가 돌았다. 조금은 흥분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무릇 대명천지를 태양이 밝힌다면 마땅히 밤에는 달이 두루 비추이는 법, 비록 문(文)으로서 부족함이 없는 가문의 수장이었지만 늘 무(武)를 그리워하였더니라.”
당연한 말 아닌가?
동서고금을 통틀어 글만 잘 써서 나라를 세웠다거나 천하를 통일했다는 말은 들어보질 못했다.
‘암. 문무겸전(文武兼全)은 당연한 거야.’
힘만 있고 대가리가 돌아가질 않으면 어딜 가나 이용만 당하다가 죽기 딱 좋게 된다. 반대로 머리가 아무리 좋아도 정작 힘이 없으면 마지막엔 죽 쒀서 개 줘야하는 경우가 생긴다.
“빼어난 머리를 타고 나는 대신 천형(天刑)과도 같은 병약한 몸을 타고나는 것이 우리 가문의 혈통, 하지만 전에도 네게 이야기했듯 조사님의 신공이라면 뛰어넘는 것이 불가능하지만은 않을 터…….”
젠장. 이것 하나만은 확실해졌구나.
‘운적풍이란 애송이에게 자신 있게 약속했던 석 달이라는 시간이 사실은 넉넉하지만은 않다는 거네.’
아예 대놓고 천형과도 같은 병약한 몸이라고 하지 않나?
어쩐지 아무리 약기운 때문이라고는 해도 너무 잘 까무러치다시피 잠에 빠져든다 했다.
‘하, 별 수 없이 다시 한 번 지옥훈련 치른다고 생각해야 하겠구나.’
그렇지 않고서는 도저히 석 달 만에 나름 경지에 오른 운가 애송이를 짓밟아줄 정도로 육체를 단련하고 내공을 쌓기란 힘이 들 것이다.
“가문의 숙원을 이뤄주기 위해 네가 노력해 주는 것만으로도 이 아비는…….”
말과 동시에 용대명의 손이 내 손을 살짝 덮었다. 지그시 힘을 한 번 주었다. 단순히 체온이라고만 치부할 수 없는 따스함이 가득히 전해져왔다.
“한량없이 고맙구나, 아들아.”
아들아!
‘거 참…….’
정말 이상도 하지?
단순하기 짝이 없는 말 한 마디와 내 손을 한 번 살짝 잡아준 것뿐이었는데 기분이 대체 왜 이렇지? 왜 아득히 깊은 심연에서부터 뭔가가 울컥하고 치솟는 것이며 심장이 뜨거워지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