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불사신기 (2/104)

2.불사신기

‘애송이가 분명한데…….’

희한하게 더는 그렇게 느껴지지 않았다.

나를 향한 애정 가득한 시선, 얼굴에 하나 가득한 미소, 절대적인 믿음이 깃든 손길의 뜨거움까지…….

툭툭.

용대명의 손이 내 등을 두어 번 두들길 때야 비로소 나는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아, 이것이 아버지의 정인가.’

너무나 새삼스럽고 당연한 사실을 그제야 불현듯 깨달은 기분이다.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

고아였던 내게 아버지라니!

언제 죽을지 몰라 한평생 혼인을 하지도 자식이나 제자를 둘 생각도 하지 않았던 내게 지금 진정한 의미의 가족이 생긴 것이다.

“아비는 그만 일어나 보겠다.”

“……!”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머릿속으로는 이해를 했지만 가슴은 받아들이지 못해 조금 혼란스러웠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신주오가는 절대검신 독고황 조사로부터 비롯된 한 집안이나 다름이 없다. 하지만 너는 엄연히 용무린, 나 용대명의 아들이지.”

그 말을 듣는 순간 내 입은 저절로 반쯤 벌어졌고,

“운적풍, 그 아해와 운룡장은 감히 내 아들을 이렇게 만든 책임을 져야만 할 것이다.”

나를 위해 무엇인가를 할 생각이다.

보나 마나 복수다.

‘복수, 나를 위한 복수…….’

신교의 교주이자 신마라 불리며 살았던 70년 한 평생, 그 누구도 나를 위해 진심으로 무엇인가를 해 주었던 것을 느껴보지 못했었다.

‘그저 마음에 들면 내가 빼앗았을 뿐이지.’

복수는 보통의 경우 내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녀석들에게 내가 했던 행위였다. 내가 크게 당하거나 부당한 일을 맞아 나보다 월등한 누군가가 나를 위해 복수를 해 줬던 적은 단언컨대 한 번도 없다.

‘거 참 기분 정말 묘하네.’

새삼스레 두 사람의 관계가 재정립되었다.

너무나도 확고하고 명료한 용대명의 의지 앞에 내 입에서는 자연스레 이 말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아, 아버지……!”

아주 단순하기 짝이 없는 말!

아버지!

하지만 그 말을 한 번 뱉어낸 순간 내 의식은 전과는 완전히 바뀌어져 버렸다.

‘그래, 어찌되었든 이번 생에서는 용대명 저 분이 내 아버지인 것이야.’

용대명을 내 아버지로 인정했다.

‘지금부터는 비룡문이 바로 내 가문인 것이지.’

용대명이 내 의지에 호응했다. 뜨겁게 내 손을 잡는다.

“오냐, 내 아들아.”

사람 참 간사하기도 하지?

전생이었다면 틀림없이 비웃어 버리고 말았을 말이 어쩌면 이렇게 귀에 착착 감길까?

오냐, 내 아들아.

단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던 말이었지만 무의식 속에서는 그만큼 바랐던 것인지 용대명의 한마디 한마디가 심장에 콱콱 틀어박힌다.

“너무 분해할 것 없다. 그저 잠시만 기다리려무나.”

“……!”

“평생 글만 읽어온 사람이긴 하나 운룡장의 가업 중 삼 할 정도는 달포 내에 문을 닫게 만들어 버릴 능력이 이 아비에겐 있느니라.”

무력과는 또 다른 종류의 힘을 말함이다.

용대명은 그 힘을 십분 발휘하여 운적풍에게 당한 내 복수를 운룡장에 대신 하겠다는 것이었다.

‘돈과 사람을 움직여 그렇게 만들 수 있다는 뜻이겠지?’

당연히 그렇게 될 것이다.

저렇게 지혜롭게 반짝이는 눈으로 내뱉은 말이 우습게 되는 것을 나는 지금껏 단 한 번도 보지 못했으니까.

‘달포 내에 삼 할이라!’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그보다 더 할 수도 있겠지만 내가 원하는 종류의 해결책은 아니었다.

“석 달!”

충분하지는 않겠지만, 그렇다고 모자라지도 않으리라.

“기필코 운가 애송이 놈을 짓밟아 버리겠습니다. 맡겨 주십시오, 아버지.”

내 말이 믿어지지 않아서였을까? 아니면 아직 입에 잘 붙지 않는 아버지란 말이 어색했기 때문이었을까? 용대명의 눈이 살짝 동그래졌다.

“그렇게 거친 말을 입에 담다니……. 시련이 너를 조금은 변모시킨 모양이로구나.”

아, 그 정도가 거친 거였어? 그래서 살짝 놀랐던 거야?

기가 막혀서 원.

‘용무린 이 녀석은 대체 얼마나 샌님이었던 거야?’

정말 한심하기 짝이 없다.

‘에잇, 상관없어. 과거야 어쨌든 지금의 나 용무린은 이런 놈이란 말이야.’

신마의 본성이 아직도 시퍼렇게 살아 있다.

시간만 내게 넉넉히 주어진다면, 물론 당연히 그렇게 되겠지만, 세상은 다시 한 번 절대고수의 강림을 맞이하게 되리라.

“대장부에게 이 정도는 시련이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이 정도로 변모될 저도 아닙니다. 그저 까맣게 잊고 있던 본성을 조금 깨달았을 뿐입니다.”

“……!”

용대명의 눈이 다시 한 번 동그래졌다.

하지만 이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대장부라……. 좋구나. 그렇다면 이 아비 역시 움직여야 하겠구나.”

움직여? 비룡문으로 돌아간다는 뜻인가?

아니면 아까 말했던 그 조치를 취한다는 뜻인가?

‘후자 쪽이면 싫은데?’

그놈들의 가업 따위야 내게 시간만 주어진다면 아예 풍비박산을 내 버릴 수도 있다. 그런 생각을 하는 나를 보며 아버지가 빙그레 웃으셨다.

“네게 어떤 복안이 있는 것인지 이 아비는 짐작조차 가지 않는구나.”

알면 귀신인 겁니다, 아버지. 흐흐흐.

‘어이구 낯간지러워라…….’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

아직 신마로서의 기억이 서슬파란데 용대명에게 자꾸만 아버지라고 하려니 온몸이 배배 꼬이는 느낌이다.

그런데 정말 희한하기도 하지?

배배 꼬이는 것과는 완전히 별개인 까닭 모를 행복함과 따듯함 그리고 흡족함이 심장 저 깊은 곳에서부터 치밀어 오른다는 것이다.

‘아버지, 가문, 내 가족…….’

평생 혼자였던 내게 그런 의미를 지닌 존재들이 생긴 것이 그제야 실감이 났다.

‘킁, 누가 이런 걸 바랐다고…….’

애써 의미를 폄훼했지만 내 콧날은 이미 시큰해졌다.

거침없는 삶을 살아왔긴 했지만 내 심장 깊은 곳 한쪽에서는 외로웠었던 것이 틀림없는 거다.

아버지, 가문, 내 가족과 같은 의미에 독고황과 혈연으로 엮이지 않았다는 안도감이 합쳐지니 내 심장은 용대명과 비룡문을 완전히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하나 운적풍 같이 앞선 아이와 대적하기 위해서는 작은 발판 정도는 있어야 할 터…….”

작은 발판? 혹시?

“몸조리 잘 하고 있거라. 곧 네게 작은 선물 하나 정도 건네주도록 하마.”

만세! 역시 기대하던 대로 선물이다.

‘뭐지? 가문 대대로 내려오던 만년삼왕 같은 것이라도 있어서 한 뿌리 턱 내주시려나? 아니면 천 년에 한번 겨우 꽃을 피운다는 천지구엽과?’

뭐가 됐든 다 좋다.

만년삼왕이나 천지구엽과처럼 끝내주는 물건들이 있다면 정말 금상첨화이겠지만, 솔직히 그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백년설삼이나 백년 갓 넘어 사람 형상 조금 닮아가는 인형하수오 정도만 있어도 좋겠다, 싶다.

“그럼 다녀오겠다.”

그 말을 끝으로 용대명은 밖으로 휭하니 나가 버렸다.

모처럼 만에 혼자 생각할 시간을 가진 나는 열심히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아버지께서 주신다는 선물이 딱히 영약이 아니더라도 이제는 결정을 해야만 해.”

신교의 마공은 일단 뒤로 미룬다.

궁극의 마공이라 할 수 있는 규천마력을 마선지경 코앞이 되도록 익혔음에도 절대검신 독고황에게 그토록 허무하게 졌는데 또 익힐 수는 없는 일이다.

‘마공을 익힌다는 것은 다시 한 번 신교로 복귀한 후 패권을 장악한다는 것을 뜻하는데…….’

신마라 불린 내가 죽은 지 벌써 70년이나 지났다.

누군가 그 자리 이미 차지하고도 남을 시간이다.

‘틀림없이 매력적인 자리이기는 한데, 이미 한 번 겪어 봤단 말이지.’

신교의 교주라고 모든 것을 마음대로 막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규율도 엄격하거니와 허구한 날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쥐락펴락해야만 한다.

‘아후라마즈다에 대한 신심도 별로 없었는데 뭐 하러 또 기어들어가서 믿는 흉내를 내며 살겠어?’

어차피 신교의 무공을 극의에 달하도록 익혀 봤자 절대검신 독고황의 후인을 만나면 죽는다. 그만큼 독고황의 무공은 신교의 무공과는 상극이었다.

“크크큭. 절대검신 독고황의 무공을 내가 몽땅 빼앗아 익힌 후 우리 비룡문을 제외한 나머지 가문 전부와 정파 놈들을 때려 부수고 다니게 된다면 그것 또한 통쾌한 복수가 되지 않겠어?”

그래서 마공을 일단 뒤로 미루는 것인데, 문제는 내 가문인 비룡문에 독문 무공이라고 해 봐야 동전 몇 문만 내면 알려 줄 사람 천지인 십팔반무예가 전부라는 거다.

“하다못해 인형하수오 정도만 되어도 그걸 내 것으로 소화시킬 내공심법이 있어야 한단 말이지.”

편하게 익힐 수 있는 것을 들자면 당연히 마공이 일 순위다. 신교 삼대 지존신공 중 하나인 천마진결로 시작해 대천자마공을 거쳐 다시금 규천마력을 익혀 내기만 한다면 며칠 전에 생각했듯 10년 내에 다시금 예전의 무위를 회복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그렇게 된다면 십중팔구 독고황의 무공을 빼앗는다고 해도 익힐 수는 없게 될 거야.”

내공심법은 함부로 익힐 수 없다.

대충 하나 골라잡아 익혔다가 나중에 독고황의 독문내공심법과 상성이 맞지 않는다면 그대로 끝이다. 내공의 부조화로 인해 바로 주화입마 신세가 된다.

“가만, 이 기회에 그 무공이나 한번 시도해 보는 것은 어떨까? 여건이나 조건이 지금 내 처지와 딱인데 말이야.”

순간적으로 내 머릿속을 스쳐지나가는 특이한 이름 하나가 있었다.

불사신기(不死身氣)!

신교의 삼대 지존신공인 천마진결, 대천자마공, 규천마력과 함께 보관되어 오던 무공으로 익혀내기만 한다면 삼대 지존신공 모두를 발아래 두게 될 것이라는 전설이 함께 전해져 내려오는 녀석이다.

“근원조차 알 수 없을뿐더러 신교의 역대 교주들 중 그 누구도 익혀낸 사람이 없다는 불가사의한 무공…….”

이번에야말로 그 무공을 익힐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어째서 그런 허무맹랑한 무공이 조사동에 삼대 지존신공과 함께 들어 있었는지는 나도 모르겠지만…….”

중요한 것은 불사신기에 대한 설명을 달아둔 장본인이 바로 마선이 되셨다던 전설의 천마조사라는 거다.

“일단 나는 그걸 시작해도 불사신기에 도전했다가 터져죽어 버린 멍청이들과는 달리 죽지는 않을 거야.”

불사신기를 익히다 주화입마로 죽어버린 놈들은 하나같이 삼대 지존신공 중 하나 혹은 두 가지를 이미 먼저 배웠다는 사실이다.

“생뚱맞은 생각일지도 모르겠지만, 어쩌면 불사신기는 독고황의 내공과 상성이 맞을 가능성이 농후해.”

주화입마를 예로 들었듯 불사신기는 신교의 삼대 지존신공과의 상성이 전혀 맞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은 어쩌면 그 반대의 경우에는 상성이 맞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뜻하지 않을까?

“좋아! 어차피 부러진 뼈마디도 다 붙지 않았으니 살짝 입문 정도만 맛이라도 볼까?”

불사신기가 극악무도한 이유는 그 수련법의 무식함도 한 몫 단단히 한다.

세상에, 허구한 날 수련자가 직접 자신의 뼈를 모두 부러뜨려야 한다니!

오로지 불사신기만 믿으면 저절로 알아서 뼈가 붙을 것이고 죽지도 않을 것이다.

하니 걱정 말고 절벽에서 그냥 몸을 날리거나 바위산을 굴러 내려오라는 식이니 그 누가 함부로 수련해볼 엄두라도 낼 수 있을까?

“흐흐흐. 나는 그런 모험을 할 걱정이 없단 말이지. 나도 모르는 사이 내 뼈를 몽땅 부러뜨려 준 운적풍이란 놈이 슬쩍 고마워지는데?

음, 그러니 나중에 모가지까지 뽑지는 말아야겠다.

모처럼 만의 너그러운 생각에 한층 풍요로워진 표정을 지으며 나는 천천히 가부좌를 틀기 시작했다.

그런데,

“끄으응!”

나도 모르게 비명이 살짝 흘러나왔다.

젠장, 이거 아직 하나도 안 붙은 거 아니야?

혹시나 하는 의심이 번쩍 든다.

정신을 잃고 있던 시간이 이레에 정신을 차린 후 다시 사흘이 지났다. 모두 합해 열흘이나 흘렀는데도 아직 살이 푸들푸들 떨릴 정도의 고통이라니!

“이, 이거 지옥훈련이 따로 없구나…….”

아니, 그에 비하면 솔직히 이건 약과다.

지옥훈련 과정 중에는 고통에 맞서는 법을 거쳐야 하는데, 그때는 아무런 표정을 얼굴에 드러내서는 안 된다. 얼굴에 한 조각의 고통이라도 떠오르게 된다면 그 즉시 탈락이다.

“탈락은 곧 짧은 수명 혹은 죽음으로 직결되지.”

잘 풀려야 하급 무사다.

그 시절을 생각하니 이 정도는 차라리 행복할 정도다.

단순히 뼈가 부러지고 근육이 조금 찢어진 정도의 고통만 참으면 되는 것이다.

“좋아, 웃어 주지.”

씨이익.

그렇게 마음먹자마자 내 입꼬리가 저절로 위로 들렸다.

고통을 발전의 자양분으로 삼아 버리니 눈빛은 한층 더 또렷해졌다. 백두간척에 홀로 선 듯 심장은 새파랗게 냉철해졌다.

불사신기의 입문결이 스르르 떠올랐다.

‘기경팔맥 12정경은 모두 잊어라. 그것들은 모두 작은 강줄기에 불과할지니 꼭 붙들고 바로 세워야 할 관념은 오직 하나 바다뿐이다.’

천마조사는 이 구절을 두고 전신세맥의 타통에 관한 깨달음일 것이라는 각주를 달아 두었다.

그런데…….

드르륵.

다시 소리도 없이 문이 열리고 누군가 또 들어왔다.

‘아, 그 예쁜 시비다.’

내 훤칠한 용모와 말발에 도화빛으로 얼굴을 물들이던 앙큼한 녀석.

“공자니-임. 벌써 이렇게 일어나 앉아 계실 정도로 회복 되셨어요? 감축 드려요.”

천성인지 정말 완전히 내게 반한 것인지 시비는 호들갑스럽게 다가와 세숫물을 내려놓았다.

“하하하. 그래야 너와 오순도순 정원이라도 빨리 거닐 수 있지 않겠느냐?”

흠칫!

왜 갑자기 몸을 떨지? 그렇게 좋은가?

하지만 시비의 입에서는 천만 뜻밖의 말이 흘러나왔다.

“제, 제가 몸이 많이 약해서……. 고뿔 때문에 어딜 돌아다니기가 조금…….”

으응? 갑자기 웬 고뿔?

‘그것도 이렇게 햇살이 따뜻한 봄날에 말이야.’

생긴 것 답지 않게 정말 몸이 허약한 모양이다.

“그러하냐? 그러면 다 나은 다음에 함께 정원을 거닐어 보도록 하자꾸나.”

움찔!

녀석이 다시 살짝 몸을 떤다. 그렇게 말해 주기를 기다렸었던 것 같다.

그런데…….

“세가의 규율이 엄해서 저는 그런 곳을 거닐 수가 없어요, 공자님. 웃전들에 걸리면 경을 쳐요.”

“하하하. 염려 마라. 나와 함께인데 누가 뭐라 하겠느냐?”

“코, 콜록! 아, 고뿔이 너무 심해서 저는 이만…….”

“아, 그러하냐? 어서 들어가 쉬어라. 빨리 나아야 나와 함께 정원을 거닐지 않겠느냐?”

“콜록! 콜록!”

정말 심한 고뿔이었는지 시비는 황급히 방을 벗어났다.

‘거 참, 몸 정말 약하네…….’

그렇게 멍하니 잠시 있을 무렵 다른 시비 하나가 불쑥 문을 열고 들어왔다.

“공자니-임. 세숫물 내어 갈게요.”

와, 이 시비도 꽤 어여쁘다.

그런데 어디서 많이 들어 본 목소리다. 내 방 밖에서 날 자꾸만 걱정해주던 시비들 중 하나인 듯싶다.

“문 밖에서 날 염려해 주던 것을 들었다.”

“어마? 들으셨어요?”

녀석의 얼굴이 발갛게 물들었다.

‘후훗. 너도 날 마음에 두고 있었구나.’

이놈의 인기란!

“그래, 내 몸이 다 나으면 함께 가까운 강가에라도 나아가 바람이라도 쏘이자꾸나.”

흠칫!

녀석도 역시 살짝 몸을 떨더니 갑자기 이마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아, 심한 고뿔 때문에 도저히…….”

“이런! 너도 그러하냐?”

이대로 있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병아리 눈물만큼의 내공 덕에 완벽한 탐색은 어렵겠지만 손끝의 감각만으로도 간단한 진맥 정도는 가능할 터, 도와주어야겠다.’

의원은 아니었지만 기의 흐름에 있어서는 그 누구보다도 더 해박한 지식을 지닌 나다. 체질에 맞는 약재 몇 가지 정도는 추천해 줄 수 있다.

“어디 손목 좀 내밀어 보거라!”

비틀.

“아, 현기증……. 너무 어지러워서 저는 이만…….”

견디기가 힘들다는 듯 시비는 곧바로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가 버렸다.

“거 참, 몸들 참 허약하네 진짜…….”

점심이 들어올 때는 또 다른 시비가 들어왔다.

뭐, 주근깨가 조금 많긴 했지만 나름 귀여운 얼굴이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인상을 딱딱하게 쓰고 다니니? 웃으면 꽤 귀엽겠는데 말이야.’

쟁반에 들고 온 간단한 보양식을 내려놓은 후 굳은 얼굴로 몸을 돌리는 시비를 보자니 문득 이런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얘도 고뿔인가?’

“너도 요즘 고뿔로 고생을 하…….”

“세가의 규율이 엄하여 시비들은 세가의 귀빈들과 함부로 말을 섞을 수 없습니다.”

신주오가의 일원답게 참 엄격한 가풍이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이만…….”

혼자 덩그러니 남게 됐다.

구수한 향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용봉탕을 향해 막 수저를 드리우는 순간 문득 신교에서 겪었던 몇몇 기억들이 아스라이 떠올랐다.

-소녀 갑자기 찾아든 고뿔이 너무 심하여 오늘은…….

-내궁의 규율이 지엄하니 먼저 신녀님께 호숫가를 거닐어도 되는지 여쭈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물어보는 애들마다 다들 그러했다.

어쩜 그리 하나 같이 몸들이 허약한지 물어보는 족족 고뿔에 오한 심지어는 원인 모를 복통까지 다양한 고통을 호소하며 물러났다.

“신교나 중원이나 하여간 여인들은 모두 고뿔을 달고 사는 모양이로구나. 쯧쯧쯧. 하여간 여기나 거기나 무슨 놈의 규율들은 그리도 뻑뻑한지 어디 원…….”

사람 사는 것은 신교나 중원의 거대 세가나 다 똑같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났다.

***

백리세가의 내원을 담당하는 주방에 용무린을 담당했던 시비 3인방이 은밀히 모여들었다.

“나를 위기에서 구해준 것은 고맙긴 해. 그런데 알고 봤더니 호색한이야, 호색한!”

“맞아. 내 손목을 막 잡아 보려고 하더라니까? 아예, 대놓고 내밀어 보래 손목을……. 내 참 어이가 없어서, 내가 유곽의 기녀야 뭐야?”

“삼절일학의 성품이 대쪽 같고 고고하다더니, 겪어 보니 말짱 거짓말이더라니까?”

“맞아. 눈에 띄는 시비마다 족족 추파나 던지고 말이야. 얼굴만 잘생기면 다야? 정말 기분 나빠.”

“바보들아. 그러니까 나처럼 처음부터 아예 딱딱하게 나갔어야지.”

“어떻게 그러니? 산수화라도 한 점 얻으려면 너무 그래서는 곤란해.”

“맞아, 내가 대삼이랑 사귀면서도 왜 꾹 참고 용 공자님에게 그렇게 생글생글 웃었는데? 그게 다 이름 높은 삼절일학 용무린 공자님의 낙관이 찍힌 산수화라도 한 점 얻기 위해서란 말이야.”

“아유, 산수화고 뭐고 나는 이제 더는 못하겠다. 어찌나 자꾸만 추근거리는지!”

“약관의 나이가 다 되도록 무예도 닦지 않아 힘도 없어 뵈던데…….”

“그러게 말이야. 어디 밤에 힘이나 제대로 쓰겠어?”

“맞아. 오호호호호호!”

시비들의 수다는 그렇게 한동안이나 이어졌다.

***

용봉탕을 뒤로 물린 후 나는 다시 기를 쓰고 자세를 다잡았다.

우드득. 투득.

다시 한 번 땀을 후두둑 흘리고 나서야 겨우 가부좌를 틀 수 있었다.

‘어디, 다시 한 번 시작해 보도록 할까?’

불사신기의 입문결 시…….

드르륵.

내 의지와는 전혀 상관이 없이 다시 문이 벌컥 열렸다.

달콤한 사향 냄새.

그 안에 살짝 감춰진 은은한 박하 향이 훅 밀려든다.

그녀다. 이 방의 본래 주인이자 백리세가의 금지옥엽인 백리소옥. 그녀가 이틀 만에 다시금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낸 거다.

‘근데 쟤는 왜 날 제 침대에 뉘인 것이지?’

날 바라보던 그 오묘한 동정의 눈빛이 답인가? 아니면 아끼던 시비를 구해준 일에 대한 대접인가? 그것도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나?

아니, 젠장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왜 다들 내가 뭐만 하려고 하면 다들 귀신같이 알고 나타나서 방해하고 지랄이냐고!’

꼭 뭐 좀 제대로 해 보려고 하면 기다렸다는 듯 이때다, 하고 나타나 방해질이다. 정신을 차린 후 사흘 내내 이 모양이니 정말 돌아 버리겠다.

‘하루라도 빨리 이 저주받은 집구석을 떠나야만 해.’

그러지 않고서는 석 달이란 시간이 촉박함으로 숨통을 조여 올 것이다.

나는 인상을 확 긁어 버렸다.

그런데 백리소옥은 되레 의외라는 듯 고개를 살짝 갸우뚱 틀고 마네?

‘내가 성질내는 게 우스워 보이나?’

정말인지 입가에 살짝 미소까지 짓네?

‘이게 정말 콱!’

사나이 성질 한 번 진짜 제대로 보여주려는 순간 백리소옥의 입이 한 발 빨리 열렸다.

“벌써 의연하게 자리에 앉으시다니……. 고통이 심하실 터인데, 의지가 정말 대단하시군요.”

목소리에서 진심이 느껴진다.

‘하여간 용무린 이 녀석은 대체 어떻게 살아왔기에 이 정도 고통 이겨냈다고 의연을 찾고 의지가 대단하다는 소리를 듣고 그러냐?’

한심하다는 생각과 동시에 치밀어 올랐던 노기가 슬그머니 가라앉았다. 과거 신마 시절에는 있을 수 없었던 일인데, 아무래도 규천마력이 깡그리 사라지면서 생긴 부작용 중 하나인 모양이다.

“운가 애송이 밟아 주려면 이제 슬슬 움직여야 할 시간이라서 말이야.”

놀라긴! 그러다 너 내가 진짜 운가 애송이 밟아주는 걸 보면 까무러친다?

“지금 영존(令尊)께서 10년의 회합에 참여하러 오신 여러 어른들과 대화를 나누고 계셔요.”

대화? 내게 말씀하셨던 그 선물 때문인 건가?

“다과를 내어드리는 과정에 잠깐 영존의 말씀을 들을 수 있었는데, 비룡문의 가주님께서는 나머지 신주오가의 일원들에게 절대검신 조사님의 심결 중 하나인 호심결을 용 공자님께 잘 풀어서 전해주시길 주장하고 계셔요.”

오오오! 독고황의 심결 중 하나인 호심결!

우리 아버지께서 그걸 이놈들에게서 빼앗아서 날 주시려는 게로구나!

“하-아!”

좋은 일에 웬 한숨이야?

“용 공자님. 운적풍 공자와의 석 달 후의 약조, 그냥 잊으시면 안 되나요?”

그냥 잊으라고?

“어림도 없는 소리! 그건 내 영업 방침이 아니야!”

왜 또 놀라지?

얘는 고뿔이 아니라 심장 쪽이 조금 약한가?

살짝 벌어진 입을 잽싸게 다물더니 백리소옥은 제법 단호한 목소리로 다시 한 번 쓸데없는 잔소리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용 공자님의 체질이 무공을 익히기에 적합하지 않음은 이미 비밀도 아니에요.”

“나도 잘 알아! 정말 한심하지. 하지만 상관없어.”

“어떻게 상관이 없어요? 체질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상승의 무공을 익힐 수조차 없는데?”

“그건 네가 걱정할 일이 아니야. 신경 꺼!”

“뭐예요?”

백리소옥의 입에서 살짝 앙칼진 목소리가 터졌다.

하지만 이내 내가 무공에는 완전히 젬병이었다는 것을 떠올렸는지 목소리를 낮추며 말을 이었다.

“겨우 호심결 하나를 믿고 복수를 그리신다면 그건 정말 큰 착각이에요 용 공자.”

“겨우 호심결 하나?”

이거 어째 느낌이 쌔하다.

“비룡문은 무가가 아니니 그 가치에 대해서 잘 모르시겠지만, 호심결은 절대검신 조사께서 다섯 가문에 모두 전수하신 일종의 호연지기를 기르는 심공에 불과해요. 그걸 익혔다고 단숨에 무적이 되는 신공이 아니란 말이에요.”

헐! 나 원 참 기가 막혀서…….

‘호심결이 겨우 그런 거였어?’

김이 팍 새는 느낌이다.

백리소옥은 쐐기라도 박겠다는 듯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기경팔맥 12정경은 작은 강줄기에 불과할지니 생각할 것은 오직 하나 바다뿐이다…….”

어? 이, 이거 뭐야?

살짝 빠지고 상이한 부분이 있긴 하지만 확실히 불사신기의 입문결이 맞다.

‘한데 그걸 어떻게 쟤가 알고 있는 거지?’

“바다에 이르면 모든 물줄기가 하나가 되나니 마음을 창대한 바다에 이르게 하여…….”

쌍둥이를 보는 느낌이랄까?

미세하게 빠지거나 살짝 다른 부분이 있긴 하지만 틀림없는 불사신기의 입문결이었다.

“휴우, 이건 뭐 주해고 뭐고 할 필요조차 없이 호연지기를 말하는…….”

“그 다음!”

“예?”

“그 다음, 네가 알고 있는 호심결 전부 읊어 봐!”

잠시 내 눈을 빤히 바라보던 백리소옥은 같은 신주오가 사이에서는 비밀도 아니라는 듯 거침없이 호심결을 처음부터 끝까지 읊어 나가기 시작했다.

‘이, 이럴 수가!’

불사신기다.

비록 입문결에 불과하지만 불사신기가 틀림없다.

‘어떻게 신교 조사동에 잠들어 있던 불사신기의 입문결을 얘들이, 아니 절대검신 독고황이 알 수가 있는 거냐고?!’

냉철한 내 머리가 무섭게 회전했다.

몇 가지 가능성을 면밀하게 살핀 후 가장 유력한 가설 하나를 추출해냈다.

‘불사신기가 어떻게 해서 신교 조사동에 삼대 지존신공과 함께 들어 있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거 하나만은 확실해. 불사신기는 독고황 아니 그놈의 선조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어!’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같을 수는 없는 거다.

“이게 다예요. 보통 우리 신주오가는 어린 아이들에게 본격적인 무공을 가르치기 전 호심결을 베풀어 준비를 시키는 데 사용해요. 아시겠어요?”

정말 그게 다란 말이지?

신교 조사동에 잠들어 있는 불사신기 원본처럼 오단공까지 있는 것이 아니라?

“좋아!”

불사신기의 입문결처럼 전신의 뼈를 몽땅 부러뜨리라는 구절은 호심결엔 없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답은 이미 나왔다.

“알겠다고요?”

불사신기다. 그걸로 간다.

“아버지께 내 말 좀 전해줘.”

설득이 통했다고 여긴 것인지 녀석의 입가에 다시금 보기 좋은 미소가 떠올랐다.

“뭐라고 전해드릴까요?”

“호심결 없이 간다고 말씀 드려. 그것이 내 의지라고.”

“알겠어요.”

백리소옥이 발딱 일어섰다.

“마지막으로 나는 나만의 길을 걷겠노라 말씀드리면 알아들으실 거야.”

“예-에?”

넌 정말 잘 놀라는 아이구나?

눈 좀 고만 부릅떠라. 너무 크니 쏟아질 것처럼 보여 불안 불안하단 말이다.

“아직도 복수를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인가요?”

“당연하지 않나? 나란 남잔 포기를 몰라. 나는 마음먹은 것은 기필코 해내지.”

“고리타분한 선비 쪽인 것이야 진즉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앞뒤 분간도 못하는 어리석은 사람인 줄은 미처 몰랐네요.”

“네 멋대로 생각해.”

“뭐예욧!”

눈에 힘 풀어라. 인상 잔뜩 써 봐야 귀엽기만 하다.

“나한테 인상 쓸 것 없다. 어서 우리 아버지께 내 말이나 좀 전해줘라.”

“보자, 보자 하니까 정말! 아까부터 말투가 그게 뭐죠? 나이도 내가 두 살이나 위인데, 이제는 감히 명령까지 내리는 건가요?”

음, 살짝 놀랐다.

‘나보다 두 살 아래가 아니라 두 살 위였어? 얼굴은 무지 앳되어 보이는데?’

나는 새삼스런 시선으로 백리소옥을 찬찬히 살폈다.

확실히 몸매는 성숙한 여인의 그것이었다.

‘너는 고뿔보다는 가문의 규율 쪽이겠구나.’

대화라도 나누자고 하면 어쩐지 그런 말이 튀어나올 것 같다는 생각이 팍 들었다.

“운적풍 그 망할 인간과의 혼사에 대한 반발심에 내 침대에 뉘였더니 내가 그리 우습게 보이나요?”

아하, 그래서 날 네 방 네 침대에 뉘인 것이었구나?

피식.

싱거운 미소와 함께 나는 그대로 침상 위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우드득. 투드드득.

아직 채 붙지 않은 부러진 뼈마디가 노래를 불렀다.

침상에 누워만 있는 동안 약해질 대로 약해진 근육과 신경이 화들짝 놀라 한꺼번에 들고 일어난 것 같다.

‘끄-으-응.’

비명이 절로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랐지만 나는 끝까지 얼굴 한 번 찡그리지 않았다. 그 흔한 신음소리 한 번 흘리지 않았으며 결국엔 내 발로 당당히 일어서며 말했다.

“명령과 부탁도 구분하지 못하나?”

“뭐예요?”

“됐다. 내가 직접 하지.”

-내공심법에 의한 운기도 결국엔 호흡, 우리가 평소 살기 위해 하는 것도 결국엔 호흡, 두 가지가 무엇이 다르던가? 바다는 바다일 뿐 그저 바다가 되어라.

불사신기 입문결 마지막 요결을 떠올리며 나는 내처 걸음을 내딛었다.

우드득. 찌릿 찌릿.

뼈마디마디가 당장에라도 부서져 내릴 듯 요동을 쳤고 근육과 신경은 이 무모한 짓을 어서 멈추어 달라고 악을 썼지만 나는 싹 무시했다. 모든 호흡을 불사신기 입문결로 대체한 후 그 요결에만 집중했다.

쓰으읍. 후우우. 쓰으읍. 후우우.

그랬더니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었던 그 작은 한 줌의 내공이 불현듯 치밀어 오르더니 상처 부위들을 향해 일제히 제 몸을 나누어 쫙 퍼지는 게 아닌가?

‘이, 이것은……?’

극한의 고통을 이겨내고 요결에 집중하자 그 작은 내공마저 불사신기의 요결에 정말 반응을 시작한 것이다.

‘틀림없어.’

병아리 오줌만큼 적은 양이었지만 그 사실만큼은 확실했다. 그 증거로 당장 줄줄 흘러내리던 식은땀의 양이 조금 줄었다.

‘이렇게 한 가지를 또 알게 되는군그래.’

불사신기는 여타의 내공심법처럼 앉은 자세에서만 행하는 좌공의 성격뿐만이 아니라 동공의 성격도 함께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씨이익.

나도 모르는 사이 내 광대가 하늘 높이 승천했다.

적잖이 기분이 좋아진 나는 백리소옥에게 그동안의 방값을 치렀다.

“운적풍 같은 애송이와 평생을 함께 하느니 나 같으면 녀석의 목을 날려 버리겠다.”

“뭐, 뭐예요?”

자신이 처한 상황에 안성맞춤인 적절한 충고라고 생각하는데 반응이 왜 저렇지?

“네가 자결하는 것보단 그게 낫잖아! 안 그래?”

“이, 이봐요!”

“나는 솔직히 여인을 몰라! 그 대신 같은 사내는 너무 잘 알지.”

백리소옥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마치 전혀 다른 생소한 사람을 보는 듯한 시선이었다.

“방값을 치른다 생각하고 최대한 객관적인 평가를 한 거다. 운가 애송이는 야비한 승냥이의 머리에 뱀의 심장을 지녔다. 너완 어울리지 않아.”

백리소옥이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어느 정도는 스스로도 그렇게 느끼고 있었던 것 같아 보였다. 그러더니 갑자기 고함을 빽 질렀다.

“나보고 어떻게 하라고요? 가문에서 이미 그렇게 결정을 내려 버렸는데? 내가 대체 뭘 할 수 있다고…….”

“네가 살아야 하는 네 인생이다, 멍청아!”

“……!”

“그 혼인이 싫으면 따르지 말고 거부를 해! 모두가 보는 앞에서 목에 칼이라도 들이대란 말이야.”

“어, 어떻게 그런……?”

“그게 힘들어? 그러면 네가 따로 마음을 주고 있는 사내와 함께 사랑의 도피라도 떠나 버리던지!”

“뭐예욧? 지금 저를 어떻게 보고…….”

“네 인생의 주인이 네가 아닌 다른 누구라면, 네 선택으로 만들어나가는 삶이 아닌 다른 누군가의 명령과 압박으로 결정되는 삶이라면, 일찌감치 접시 물에 코 박고 죽는 것도 그리 나쁜 선택은 아니지.”

“……!”

“여기까지! 나는 방값을 이미 치렀다. 남은 것은 오직 하나, 네 선택일 뿐…….”

그 말을 끝으로 나는 백리소옥의 방을 벗어났다.

조금씩 줄어드는 고통을 기쁜 마음으로 즐기며 회의 장소를 향해 천천히 움직였다.

***

회의는 아직도 계속되고 있었다.

“아무리 같은 신주오가의 일원이라고는 하지만 주해를 부탁한다는 것은 각 가문만의 무(武)를 사사해 달라는 요구가 아닙니까?”

“맞습니다. 호심결이 비록 다섯 가문에 모두 공평하게 베풀어진 내공심법이긴 하지만, 베풀어진 것을 그대로 간직하고만 있었던 가문의 것과 70년 동안 나름대로 발전시켜 온 가문의 것은 엄연히 다르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솔직히 후대를 이을 아이들에게 내공의 기초를 만들어 주기에는 호심결만큼 좋은 내공심법도 없는 편입니다.”

“그런 호심결을 아무런 대가 없이 통째 넘겨달라는 말씀은 조금 그렇습니다.”

상관세가의 대표로 참석한 상관종명과 운룡장 대표로 온 운전추의 목소리가 특히 높았다.

“동감이 가는 부분은 없지 않습니다만, 다른 가문도 아닌 신주오가의 일원인 비룡장에게 베푸는 것입니다.”

“솔직히 호심결 정도는 괜찮지 않습니까? 왜 이렇게 호들갑을 떠는지 당최 이해할 수 없군요.”

백리세가의 현 가주인 백리장천과 벽력도가의 벽운성은 반대의 의견이었다. 같은 일원인 비룡문의 요구에 응해야 한다는 쪽이었다.

그때까지 잠자코 침묵을 지키고 있던 비룡장주 용대명의 입이 불쑥 열렸다.

“그러니까 지금 상관세가와 운룡장의 말은 호심결 역시 각 가문이 지금껏 계승 발전해온 부분이 있으니 만큼 그것을 주는 대가로 우리 가문의 것인 기관지학과 진법의 하나를 넘겨주어야 한다는 뜻인 게요?”

“뭐, 말하자면 비슷합니다.”

“그렇습니다.”

피식.

용대명은 싱거운 미소와 함께 어깨를 한 번 들썩여 보였다.

“뭐, 어려울 것도 없는 요구로군요. 다들 알다시피 호심결은 절대검신 독고황 조사의 무공 중에서 기초 중의 기초에 속하는 것, 그에 합당한 기초 공부를 내어 놓지요. 조사께서 내어주신 책들 중 진법의 기초에 해당하는 진법강해록을 내놓겠습니다.”

“아, 아니 그것은 좀…….”

“진법강해록은 저잣거리에서도 살 수 있는 종류의 서책이 아닙니까?”

상관종명과 운전추가 당장 볼멘소리를 했다.

용대명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허! 조사님께서 직접 주해를 달아주신 기초 공부를 한낱 저잣거리의 서책과 비교를 하다니……. 더군다나 본 비룡장의 역대 어른들께서 발전까지 시켜 더욱 풍부한 지식의 보고가 된 서책을?”

그야말로 내가 하면 사랑이고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수작과 다를 바 없는 일이다.

“무가는 아닐지언정 같은 신주오가의 일원이라는 이유 하나로 본 비룡장의 장손에게 벌어진 일까지 크게 문제 삼지 않았거늘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겁니까?”

목소리를 높이던 상관종명과 운전추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눈만 데굴데굴 굴리며 딴청을 했다.

바로 그 순간,

‘하여간 그릇들 하고는…….’

문 앞에서 상관종명과 운전추의 말을 똑똑히 들었던 나는 그대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이렇게 직접 찾아올 줄은 생각지도 못했던 듯 모두가 놀란 토끼 눈을 한 채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아버지를 향해 단호한 어조로 내 의지를 건넸다.

“됐습니다, 아버지.”

“아들아!”

“호심결은 필요 없습니다.”

군데군데 빠지고 다르게 바뀐 것 따위 필요 없다.

나는 완벽한 불사신기를 오단공까지 이미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신교의 조사동 벽에 그것을 익히기 위해 노력해 왔던 역대 교주들의 주해까지 깡그리 외우고 있다.

“저는 저대로의 길을 개척할 것입니다. 충분합니다, 아버지. 저만 믿으시면 됩니다.”

정작 아버지 용대명은 가만히 있는데, 운전추란 인간이 불쑥 나섰다. 비아냥거렸다.

“천생 타고난 약골이야 그렇다지만, 무공이라는 게 어디 머리만으로 극복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나 보지?”

너야 그렇겠지. 나는 아니야.

나는 흔들림 없는 시선으로 운전추를 쏘아보며 강력한 내 의지를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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