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나는 신마다
나를 보고 눈물을 글썽이며 손발을 닦아 주던, 잽싸게 밖으로 나가 먹을 것을 마련해 왔던 여인, 그런데 왜 그동안은 얼굴도 보이지 않았을까?
“가신다고 들었어요, 공자님.”
고새 그 말을 들었어?
‘세가의 규율이 무척 엄하다고 했었지 않나?’
백리세가란 곳은 고뿔과 함께 소문 역시 참 빨리 도는 곳이구나, 싶다.
“가야지. 시간이 조금 촉박해서 말이야.”
“석 달 후를 말씀하시는 거죠?”
피식.
“그래.”
“……!”
표정이 왜 또 그러니?
혹시, 너 나 좋아하고 막 그러는 거니?
그렇지 않고서야 왜 날 볼 때마다 저런 표정을 짓는 것일까?
“그날 밤, 읊어 주셨던 시와 따뜻한 말씀 정말 너무나 감사했어요, 공자님.”
이건 또 무슨 소리야?
“……?”
내 눈은 자연스럽게 다시 한 번 동그래졌다.
‘너는 대체 정체가 뭐냐?’
여인의 입술이 살포시 열렸다.
“문은 무보다 강하다고 하셨죠? 자공의 연환계, 방통의 연환계가 그와 같다고 말이에요.”
‘으응? 내가 네게 그런 말을 했었어?’
진짜 나였다면 그런 말을 할 리가 없다.
‘이 풍진 세상, 무력이야말로 모든 것에 앞선다. 힘을 먼저 갖춰라. 세상은 이긴 자들만의 세상, 한 번의 패배로 죽거나 모든 것을 잃을 뿐이다.’
아마도 그렇게 외쳤으리라.
“깨달음이 무척이나 컸어요. 그동안 아득히 잊고 지내던 무엇인가를 그 기회에 되찾았다고나 할까요?”
사르륵.
말끝에 얼굴은 왜 또 그렇게 곱게 물들이는 거니?
‘음, 시간이 나면 산책이나 해 보자고 한번 해 볼까?’
고뿔 흔적도 없어 보이는데 이 아이는 어쩌면…….
“결심했어요. 돌아가는 즉시 가주님이신 저희 아버지께 말씀드릴 거예요. 본 제갈세가는 신주오가나 무림맹 사파연합 등에 소속되지 않는 문파들을 모아 중도연합을 추구해야 무림의 한 축을 지킬 수 있는 기둥이 될 수 있다고요.”
아! 넌 제갈세가의 여식이었었구나.
‘어쩐지!’
그냥 시비라기엔 너무 어여쁘고 품위가 있더라니.
방긋.
여인이 나를 보며 함초롬 웃었다.
“언제고 찾아와 제 초상화를 그려주신다던 약속 꼭 지켜 주어야 해요. 알았죠?”
초상화?
내가 그런 약속까지 했었다고?
상관세가 여식에게도 그러했다더니 이 여인에게도 그런 황당무계한 약속을 했었어?
“그, 그게…….”
내가 또 무어라 말을 꺼내기도 전에 여인은 발딱 자리에서 일어나 버렸다. 밖으로 나가려는 듯 문고리를 붙잡더니 다시 살짝 몸만 돌리고 말을 꺼냈다.
“그 말씀을 믿고 아버지께 상관세가와의 혼약을 없었던 일로 해 달라고 간청할 거예요.”
화르륵.
말끝에 여인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되도록 빨리 찾아와 주세요. 알았죠?”
‘나는 아직 네 이름도 몰라 이 아가씨야!’
기껏 찾아가 봐야 유행성 고뿔 어쩌고 아니면 가문의 규율이 지엄 어쩌고 할 것이면서 무슨…….
“기다릴게요.”
드르륵. 탁.
그 말을 끝으로 여인은 밖으로 나가 버렸다.
“……!”
나는 멍한 얼굴로 굳게 닫힌 문을 바라보았다.
피식.
그러다가 풀썩 웃음이 터졌다.
그 여인이 사라진 자리에 새하얀 손수건 한 장이 바닥에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체 저 손수건은 언제 떨어뜨린 거람?”
우윳빛 뽀얀 광채가 도는 손수건.
은은한 장미향이 배어 있는 그 손수건을 보는 순간 내 눈은 한 가지 가능성을 떠올렸다.
‘설마, 그건 아니겠지?’
우윳빛 뽀얀 광채가 도는 실은 천하에 드물다.
나는 재빨리 손수건을 집어 들고 확인을 해 보았다. 활짝 펼쳐 잡아 당겼다.
티이잉.
손수건이 내 미약한 힘으로도 한없이 늘어나려들었다. 허심(許心)이라 쓰인 글귀가 우스꽝스럽게 길어졌다.
“이, 이건?”
천잠사다. 내공을 주입하면 어지간한 도검으로도 끊어내기 힘들다는 천잠사로 된 손수건이었다. 아직 몇 가지 더 확인을 해 봐야만 하지만 진실로 천잠사라고 하면 내겐 아주 유용한 기물이 되어줄 것이다.
씨이익.
내 입가에 절로 환한 미소가 돋았다.
“하여간 내 말은 참 안 듣는 아가씨란 말이야.”
이 방에서 처음으로 눈을 떴을 때도 그랬다.
내 말은 듣지도 않은 채 자신의 할 말을 노래하듯 쏟아내더니 이내 음식을 해서 대령하기까지 했다.
“어쨌든 좋아. 상관세가와의 혼약을 없었던 것으로 하겠다고 했지? 네가 싫다면 그 누구도 널 갖지 못하도록 내가 만들어 주마.”
마음이 살짝 더 바빠졌다.
석 달 후 운적풍이란 애송이를 완전히 박살내야만 하고 아직까지 이름도 모르는 저 여인이 싫어하는 혼사도 막아 줘야만 한다.
‘어쩌면 쟤는 고뿔이나 규율 따위 운운하지 않을 것 같은데 말이지…….’
그런 상상만으로도 즐겁다.
없던 힘이 마구 솟구치는 기분이다.
“자, 그럼 어디 출발해 볼까?”
우드득. 투드득.
여전히 움직일 때마다 뼈마디가 울부짖는다.
하지만 확실히 고통은 확 줄었다. 움직임도 조금은 편해졌다. 불사신기 입문결 그것도 초입에 불과하지만 계속해서 동공의 형태로 운용한 덕인 것 같았다.
“아버지께서 조금 늦으시네? 모처럼 만의 만남이라 인사가 길어지시나?”
자주 왕래할 만큼 가까운 곳에 세워진 가문들이 아니니 그 정도는 이해해 주어야 할 듯싶었다.
“여기서 이러고 있을 일이 아니다. 나가자.”
가부좌까지 틀고 해야 하는 정식 수련은 지금으로서는 불가능하다. 불사신기가 지닌 동공의 묘용을 취하기 위해서라도 가만히 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던 나는 그대로 밖으로 나섰다.
“저쪽이 신주오가의 핵심들이 회의를 하던 대의청 쪽으로 가는 길이었지?”
회의는 그것으로 끝났을 것이다.
아마 지금쯤이면 다른 곳에서 흩어져 마음에 맞는 사람들끼리 삼삼오오 모여 담소를 나누고들 있겠지.
자박자박
때마침 저만큼 앞에 안면이 익은 시비 하나가 지나가는 것이 눈에 띄었다. 세숫물을 떠올 때마다 얼굴을 붉히던 바로 그 시비였다. 반가웠다.
‘물어보자.’
나는 손을 번쩍 들며 시비를 불렀다.
“마침 잘 되었구나. 반갑다. 여기에서 어디로 가면…….”
“코, 콜록! 아, 현기증이…….”
“이런, 고뿔이 아직도 낫지 않았구나.”
“옮길까 두렵습니다, 공자……. 콜록. 콜록콜록.”
저러다가 허파가 튀어나오는 것이 아닐까 싶게 거친 기침을 연신 토해내던 시비는,
성큼성큼. 파바박.
진정으로 내게 고뿔을 옮길 수 없다는 듯 잽싸게 발을 놀렸다. 어디론가 금방 사라져 버렸다.
“거 참, 굉장히 사려 깊은 아이로구나. 굳이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되는데…….”
소문은 빨리 퍼지지만, 이런 것을 보면 확실히 백리세가의 규율은 엄한 편이 맞는 것 같았다.
“에라, 모르겠다. 일단 다른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을 향해서 가 보자.”
시비들 말고 사내들을 만나게 되면 아버지가 담소를 나누고 계신 곳을 알아낼 수 있거나 밖으로 향하는 길목을 찾아서 기다릴 수도 있을 것이다.
“확실히 웅장한 면은 신교의 그것을 따라갈 수 없지만, 아기자기하고 오밀조밀한 맛은 있구나.”
가산을 중심으로 배치된 연못과 정원도 그러했지만 백리세가의 분위기는 전체적으로 괜찮은 편이었다. 안락하고 화사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이 하나도 없지?”
어째 점점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는 것만 같다.
왜 시비들은 물론이고 남자 하인들조차 하나도 눈에 띄지 않는 것일까?
“맞다. 내가 있던 방이 백리소옥의 침실이었지?”
그렇다면 이곳은 직계 혈손들이나 귀빈들만 주로 사용하는 내원이라는 뜻이다. 시비나 하인들을 비롯해 사람들이 적은 이유를 알 것 같다.
그때였다.
패액. 쉬쉬쉭. 팡. 파파팡.
많이 익숙한 소리와 함께 드디어 사내들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익숙한 소리에 끌린 내 발은 저절로 그곳으로 향했다.
“형님 내 장법 어때요?”
“오! 많이 좋아졌는데?”
“확실히 기초는 뗀 것 같다.”
“그렇죠? 이제 어지간한 놈들 정도는 다 눌러 버릴 수 있을 것 같죠?”
“방심하지 마 인석아. 나머지 가문들의 방계들도 다 너 정도는 해!”
장법 어쩌고 하는 말로 보나 나머지 가문들의 방계들 어쩌고 하는 말을 듣자니 답이 바로 나왔다.
‘운룡장?’
10년에 한 번씩 이뤄지는 성산에서의 일도 있고 하니 아예 올해는 직계 방계 할 것 없이 경험삼아 몽땅 끌고 온 모양이구나.
피식.
풀썩 웃음이 났다.
‘잘들 놀고 있어라.’
고만고만한 수준에 어떤 짓들을 하고 있을 것인지 빤해 보이는데 굳이 구경할 필요도 없어서 나는 그대로 발을 돌려 버렸다.
‘내가 너희들을 만나는 날은 운적풍 그 애송이의 피를 보는 날이나 될 거다.’
그때였다.
“으응? 거기 누구냐?”
내가 움직이는 소리를 들었는지 한 녀석이 고함을 버럭 질렀다.
“감히 무공 수련을 엿보다니!”
“거기 서랏!”
타닷. 타다다닷.
운룡장의 방계 식솔들로 보이는 사내 한 무리가 우르르 몰려 나왔다. 순식간에 내 앞을 가로막았다.
“이런 시건방진, 어라? 이게 누구야?”
“와하하. 삼절신공을 석 달 만에 대성해서 돌아오겠다고 만천하에 선포한 서생나리 아니신가?”
“아하! 백면서생 주제에 감히 소장주님께 도전을 했다던 그 멍청이?”
찧고 까불고 잘들 놀고 있다.
‘이것들을 그냥 콱!’
꾸우욱.
내 두 주먹이 저절로 불끈 쥐어졌다.
“여긴 어쩐 일이신가?”
“뭐 빤하지 않습니까, 형님? 저렇게라도 본 장의 무공을 몰래 훔쳐 파훼할 방법을 찾겠다는 것이겠죠.”
뭐가 어쩌고 어째?
너희 운룡장의 무공을 몰래 훔쳐서 내가 뭘 어떻게 한다고? 파훼-에?
‘절대검신의 진신절기도 아니고 그저 대충 아무거나 하나 던져준 것을 받아 익혀 세워진 너희 운룡장의 장법에 내가 겁을 집어 먹어서?’
기가 막혀서 코가 다 나올 지경이다.
피식.
실제로도 코웃음이 살짝 나왔다.
그게 녀석들의 심경을 조금 더 긁은 모양이었다.
“이런 시건방진 서생 놈이 감힛!”
“붓이나 잡던 서생 나부랭이가 감히 본 운룡장의 장법을 비웃다니!”
더 들어주기가 고역이다.
“그래서?”
나도 모르는 사이 발 하나가 슬쩍 뒤로 빠졌다.
우드득. 트드득.
채 붙지 않은 뼈마디와 누워만 있어 약해진 근육과 신경이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요란법석을 떨었다. 하지만 그대로 무시했다.
“……!”
“……!”
설마하니 저런 태도로 되물어 올 줄은 몰랐던 모양인지 녀석들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멍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병아리 같은 새끼들!’
후우우.
고요하고도 은밀하게 호흡을 고르며 불사신기의 입문결 요결에 따라 병아리 눈물 같은 내공을 전신으로 고르게 흘려보냈다.
“석 달 후는 석 달 후고, 너희들과는 지금 여기서 해결을 보자고?”
긴장 때문일까? 아니면 불사신기의 묘용 덕?
고통이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더없이 병약해진 근육에 촌각의 폭발력을 제공할 힘까지 천천히 고여 들기 시작했다.
후우우우우-우.
호흡이 무섭도록 깊이 가라앉았다.
더없이 차가워진 내 눈은 일말의 흔들림도 없이 녀석들을 한꺼번에 시야에 담았다.
트드득. 우드득. 꽈아아악!
불사신기로 아직 완전히 바뀐 것은 아니지만, 그 요결에 따라 충실히 움직여 준 나의 아주 작은 내공은 단련도 아니 되고 누워만 있어 약해진 근육과 신경에 촌각의 폭발력을 기어이 제공해 줬다.
‘이제 되었다.’
준비 끝. 어떤 방법으로든 마지막 살풀이는 가능하다.
“이런 시건방진 서생 놈이 감힛!”
“오만 방자한 놈!”
“네가 정녕 죽고 싶은 것이냐?”
픽.
나도 모르게 다시 한 번 코웃음이 터졌다.
‘너희들 따위가 나를?’
물론 지금이라면 가능하겠지. 몸 상태가 이보다 더 엉망일 수는 없는 시점이니까.
‘하지만 순순히 곱게 그 어쭙잖은 장법에 맞아 죽어줄 수야 없는 노릇 아니겠어?’
지금 너희들 서 있는 자세만 봐도 답은 빤히 나와.
‘이제 겨우 이류 턱걸이?’
다섯 놈들 중 불과 한 녀석만이 이류 완숙의 경지쯤 되어 보인다. 나머지는 다 거기서 거기다.
‘이렇게 쉽사리 심각한 상황으로 일이 치달아 버리게 된 것이 살짝 어처구니없긴 한데…….’
나는 걸어 온 싸움 앞에 절대로 꼬리를 말지 않는다.
비록 용무린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태어났지만 그 점은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거다.
“덤벼라!”
그렇게 살지 못할 바에야 차라리 통쾌하게 죽으리라!
“깡그리 짓밟아 주마!”
나는 신마다!
천마군림보로 한 걸음에 간격을 좁힌 후 천마진결의 힘을 휘몰아 천마진천장을 터뜨린다. 그 한 수로 저 다섯 애송이는 한 줌 핏덩어리가 되리라.
‘젠장. 마음만 굴뚝같지 이 몸뚱이로는 그렇게 할 수가 없구나.’
거의 다 부러지다시피 했던 뼈마디가 아직 완전히 붙지도 않았다. 거기에 더해 내공조차 병아리 눈물만큼 겨우 남아 있을 뿐이다. 그만큼의 속도와 파괴력은 지금 이 육체로는 도저히 이끌어낼 수 없다.
‘방법은 오직 하나뿐이다.’
끌어들인다. 살을 주고 뼈를 꺾는다.
그런데…….
움찔!
‘뭐, 뭐야! 분명히 백면서생인데 어떻게……?’
‘겁을 집어 먹었다고? 내가?’
‘저런 기세라니! 말도 안 돼!’
다섯 애송이들이 동시에 흠칫 놀랐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것은 본능이다.
아무리 팔팔한 상태라 한들 포식자인 호랑이에게 토끼가 함부로 덤벼들 수는 없는 법 아니겠나? 다섯 애송이들은 하찮게만 보던 내게서 풍기는 포식자의 향기를 맡아 버린 것이다.
‘이, 이런 추태를 보이다니!’
아득.
다섯 애송이들 중 그래도 가장 낫던 이류 완숙경지의 녀석이 이를 갈며 앞으로 나섰다.
“감히 소장주님께 무례를 범한 것으로도 모자라 본 장의 무공을 훔쳐본 놈이 사죄는 하지 못할망정…….”
용무린은 상대를 끌어들이기 위해 이죽거리기 시작했다.
“안 훔쳐봤다, 인마. 너희들끼리 찧고 까불고 떠들던 목소리 들은 게 다야.”
“……적반하장으로 만용을 부리다……. 뭐, 뭐라고? 이놈! 찧고 까불다니! 네가 정녕…….”
“아, 그 자식 정말 말 많네.”
점점 더 신마 시절의 본성이 튀어나오는 것 같다.
자꾸만 말이 거칠어지고 짧아진다. 입을 열 때마다 상대의 속을 박박 긁어댄다.
“너는 주둥이로만 싸우나?”
“……죽고 싶어서…….”
“오기 싫어? 그러면 내가 갈까?”
“환장을……. 이 빌어먹을 자식이 정말!”
스슥. 처억.
더는 참지 못하겠는지 녀석이 마보를 취하며 앙칼지게 외쳤다.
“오냐, 좋다. 내 너에게 산화장법의 무서움을 똑똑히 보여주도록 하겠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형님.”
“저도 함께 하겠습니다, 형님.”
쭉 늘어서 있던 애송이들이 한꺼번에 들고 일어났다.
요란하게 비슷한 자세들을 취했다. 그런데 웃기는 것은 그러면서도 바로 짓쳐들어오지는 못했다는 거다.
“아니다!”
산화장법의 무서움이 어쩌고 운운했던 녀석이 고개를 슬쩍 가로저었기 때문이었다.
‘아, 답답해.’
현재의 몸 상태로는 선제공격은 무리다.
방심과 빈틈을 노린 반격만이 녀석들에게 단숨에 치명타를 먹일 수 있다.
‘그래서 기다리고 있는 것인데…….’
지켜만 보려니 정말 한숨이 나와 미칠 지경이다.
‘하여간 이런 것들이 소위 정파라는 것들의 한계라니까!’
사파 혹은 마도 소속의 무리였다면 벌써 한꺼번에 짓쳐들고도 남았다.
“그래서는 아니 된다.”
애송이들 중 그래도 맏이라 이건가?
‘그나마 사태파악이 조금은 되는 녀석인 모양이네.’
확실히 그러했다.
“저 따위 백면서생 놈에게 어찌 본 장의 정예 다섯이 협공을 할 수가 있겠느냐?”
정예는 개뿔!
정작 다른 가문들의 후예들이 모여 안면을 트는 자리에는 함께 나가지도 못할 만큼 덜떨어진 방계 주제에 말은 청산유수다.
“아! 그것까지는…….”
“역시 형님이십니다.”
“그것은 되레 운룡장의 명예를 더럽히는 일이다. 너희들은 지켜만 보거라.”
“예, 형님.”
“알겠습니다.”
“……!”
애송이 동생들이 모두 물러났다.
‘대체 언제 들어올 거냐고!’
말은 그럴싸하게 했으면서도 녀석은 들어올 생각을 아직도 하지 않는다. 마치 생사대적을 만나기라도 한 듯 침착한 시선으로 내 자세를 훑고만 있었다.
‘이, 이럴 수가!’
녀석은 또 한 번 놀라고 있는 중이었다.
‘틈이 없다.’
처음에는 아우들이 물러나기가 무섭게 바로 짓쳐 들어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발이 떨어지지가 않았다. 전신 곳곳이 온통 허점투성이였는데 막상 치고 들어가려 하자 도저히 만만한 곳을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어떻게 하지?’
나는 경험과 실력 부족으로 막막해 하는 애송이의 자존심을 다시 한 번 쿡 찔렀다. 사정없이 이죽거렸다.
“왜? 차륜전 하려니 창피하냐? 괜찮아. 사양 말고 하고 싶은 대로 하라니까?”
저만큼 뒤에 쭉 늘어서 있던 오십보백보인 놈들이 더 난리를 쳤다.
“이놈! 말을 함부로 하지 마라!”
“너 따위를 상대로 차륜전이라니!”
“상대해 주는 것만으로도 창피한 노릇이거늘…….”
덕분에 애송이가 마음을 굳혔다.
‘그래, 창피한 노릇이지.’
언제까지 이렇게 있을 수만은 없다는 것을 깨달은 애송이가 커다란 고함소리와 함께 짓쳐들었다.
타닷. 휘익.
“하아아! 산화무여-엉!”
그놈의 장법, 이름 한번 그럴 듯하다.
파앙. 파파파파팡.
손 그림자들이 하늘하늘 흐드러지게 떨어지는 꽃잎 마냥 이리저리 흔들리며 잘도 치고 들어왔다.
‘지극히 정파다운 장법이로구나!’
쓸데없는 짓거릴 참 요란하게도 하고 있다.
초식이라는 것이 정말 제 위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이해와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달리 펼칠 수 있는 임기응변의 능력 그리고 그것을 뒷받침해 줄 수 있는 내공을 필요로 한다.
‘그런 것도 없는 놈이 무턱대고 틀에 박힌 방식으로 손만 휘두르면 다냐?’
가소로운 노릇이다.
후우욱.
마지막까지 기다리던 나는 녀석이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을 만큼 깊이 들어온 순간을 노려 튀어 나갔다.
“놈! 나의 승리다!”
아직 승부는 끝나지도 않았는데 녀석은 벌써부터 승자의 미소를 짓고 난리다.
‘어차피 저 요란한 손 그림자 중에 진짜는 많아야 셋.’
나머지는 빈틈을 유도하는 허수와 상대방의 공격을 밀쳐내는 방어가 섞여 있음에 다름 아니다.
‘허리. 단전. 명치.’
녀석의 계제가 더 높았다면 내공 부족인 이 상태로는 알아보기 힘들었겠지. 어쩌면 저 많은 손 그림자 모두가 진짜일 수도 있는 거다. 하지만 고맙게도 이류의 애송이라 한 순간에 모두 알아볼 수 있었다.
‘하나는 피해 버리고…….’
타닷. 멈칫. 휘릭.
진과 퇴 그리고 좌 혹은 우로의 회전을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엇박자의 운신.
피슷.
‘어? 왜 맞았지?’
허리를 노리고 사선에서 뚝 떨어지던 녀석의 손 그림자는 허무하게 스쳐 지나야 했건만 내 허리 살점을 한 움큼 떼어내고 멀어졌다.
‘급하다.’
어째서 이런 결과가 벌어졌는지 고민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손 그림자 하나가 단전을 향해 쑥 밀려들고 있었다.
‘이건 흘려버려야 해.’
휘릭. 멈칫. 타닷.
마찬가지의 엇박자로 휘돌아 거리를 단축했다. 단전으로 짓쳐드는 손 그림자의 파괴력이 가장 약한 곳에 있을 때를 노려 비스듬히 왼손으로 쳐냈다.
파악. 우두둑.
‘젠장, 거리가 조금 짧았다.’
분명히 정확히 놈의 손을 흘려낼 수 있을 만큼 딱 맞추어 내밀었음에도 불구하고 흘려내지 못했다.
육체가 시원찮은 것과는 다른 문제였다.
거리와 각도를 잘못 조절했기에 내민 손은 녀석의 힘을 분산시켜 흘려내는 대신 고스란히 끌어안았던 것이다.
‘손바닥과 팔목이 부러진 건가?’
하지만 나는 인상 한 번 찌푸리지 않았다.
타닷. 후우욱.
그저 짓쳐들었다.
‘마지막 하나는 몸으로 받는다.’
처음부터 이 한 수를 염두에 두고 깊이 끌어 들였다. 살을 주고 뼈를 꺾을 차례다.
뻐어어억! 투둑. 투드득.
이제 막 붙으려는 갈비뼈가 한꺼번에 서너 개 가량 우수수 부러져 나갔다.
‘크흐.’
숨이 턱 막혀 왔지만 그대로 무시했다. 마지막 한 발을 성큼 끝까지 내딛었다.
“타아아-하!”
덕분에 고스란히 드러난 녀석의 몸뚱이에 나는 참고 참았던 내 분노를 고스란히 쏟아 부었다.
뻐어억.
작살처럼 뻗어나간 수도가 정확히 녀석의 중완혈을 파고들었다.
“커헉!”
녀석이 입을 쩍 벌렸다.
그래그래, 명치를 맞았으니 너도 숨이 턱 막히겠지.
그런데 나는 더 미치겠다.
‘왜 거리가 또 짧지?’
머릿속에 그렸던 그림대로라면 녀석은 이미 절명 혹은 바닥을 나뒹굴어야 했지만 아직 멀쩡하다. 부족한 내공 대신 실으려 했던 몸무게가 전혀 실리지 않았다.
‘에라 모르겠다.’
이 희한한 상황에 대해 더는 생각할 시간이 없다.
‘생각보다 피해도 컸는데 이 기회를 헛되이 흘려보낼 수는 없지.’
수도를 거둬들이며 굽혀진 팔꿈치를 쭉 밀어 붙였다. 가슴 어림을 오지게 찍었다.
빠아악. 투둑.
오오! 이번 공격에는 몸무게가 조금 더 실렸다. 확실한 감각이 있었다. 녀석의 갈비뼈가 모르긴 몰라도 두 대는 확실히 부러졌을 거다.
투웅. 후우욱.
녀석의 갈비뼈가 부러지며 만들어낸 탄력에 밀려난 팔꿈치를 가차 없이 위로 긁어 올렸다.
퍼억.
‘환장하겠네, 정말.’
턱을 박살냈어야 할 이번 공격은 살짝 스쳐 올라가는 것으로 끝나고 말았다.
‘왜 자꾸 삑사리지?’
스슷! 파아아-!
녀석의 몸이 뒤로 슬쩍 밀리며 새롭게 생겨난 공간을 향해 성큼 거리를 좁혔다.
‘거리고 타점이고 혈도고 나발이고 간에 무조건 공격 또 공격이다.’
더는 그런 걸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활짝 열린 녀석의 가슴을 향해 나는 마음껏 손을 휘저었다.
빠박. 푸욱. 푹푹푹.
주먹으로 두 번 후려친 후 엄지손가락을 창처럼 세웠다. 그대로 녀석의 겨드랑이와 목을 연거푸 찍었다.
“허으으…….”
희미한 비명소리와 함께 녀석의 몸이 스르르 옆으로 기울었다. 바닥에 거칠게 내동댕이쳐졌다.
‘이런! 아직 더 때려야 계산이 맞는데 왜 벌써 쓰러져?’
뭔가 많이 손해본 느낌이었다. 짜증이 확 치솟았다.
“혀, 형니-임!”
“이 악독한 놈!”
웃긴다. 백면서생이라고 저희들 입으로 외치고도 모자라 이류씩이나 되는 놈이 내공이 수반된 장법을 펼쳐 놓고는 뭐가 어쩌고 어째?
“크크큭. 들어와! 사양하지 말라니까?”
“우와악!”
“노오-옴!”
악귀와 같은 눈이 된 애송이들이 물불 가리지 않겠다는 듯 나를 향해 짓쳐들었다.
피식.
어쩐 일인지 싱거운 웃음이 풀썩 터졌다.
파아아. 파파파파파-앙!
손 그림자가 소나기처럼 나를 향해 쏟아진다.
“크크흐하하하하-아-압!”
피할 수 없다. 아니 피하지 않는다.
오래지 않아 이 육체는 한계를 맞을 터, 줄 것은 주고 받아낼 것은 반드시 받아낸다.
타닷. 후우욱.
나는 거침없이 장영(掌影) 속으로 내 몸을 던졌다.
퍼어억. 뚜둑.
휘돌아 떨어지는 산화장에 이미 부러진 손바닥과 손목에 이어 팔뚝 어림까지 완전히 세 조각이 나 버렸다.
‘크흐, 이제 받을 것을 받아야지.’
받을 것은 바로 상대의 목숨!
피유웃.
마치 도검이라도 된 듯 짧게 그어진 수도가 내 왼팔을 부러뜨렸던 녀석의 목젖을 그대로 후려쳤다.
콰득.
‘아깝다. 목뼈까지 완전히 부러뜨렸어야 했는데…….’
또 삑사리다. 각도가 어긋났다.
머릿속에 떠오른 유려한 선을 오롯이 그려낼 수가 없다.
자꾸만 각도가 어긋난다. 부족한 내공 대신 싣고자 했던 몸무게도 실리지 않는다. 자꾸만 타점이 짧게 맞는다. 삑사리가 났다.
‘이 육체의 한계인가?’
겨우겨우 끌어 올린 촌음의 폭발력까지 벌써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다. 낭패다.
퍼어엉. 와드득.
왼쪽 갈비뼈가 또 몇 대 부러졌다.
‘젠장. 그렇다고 이대로 주저앉을 소냐?’
그럴 수야 없다.
“너도 내놧!”
휘릭. 터억.
쫙 펼쳐진 내 손끝에 녀석의 턱이 걸려들었다. 나는 주저 없이 녀석의 턱을 확 돌렸다.
와득.
‘젠장. 또?’
힘이 덜 실렸다. 손맛이 좋지 않다. 녀석의 턱이 완전히 돌아가지 않았다.
털썩.
하지만 녀석은 힘없이 옆으로 풀썩 쓰러졌다. 아쉽지만 지금은 이 정도로 만족하자.
“이 악귀 같은 놈아-아!”
뭐라는 거야 저 병신이?
뻐어억. 투득.
이번에는 내 왼쪽 정강이뼈가 수수깡처럼 부러졌다.
“크크큭. 그러면 네 것도 내놔야지!”
뼈가 부러지는 탓에 힘없이 낮아지는 내 무릎이 녀석의 무릎 관절을 살짝 옆으로 찍었다.
콰득.
‘크크큭. 이번에는 몸무게까지 제대로 실렸다.’
녀석의 무릎이 도저히 꺾일 수 없는 방향으로 꺾이더니 상체가 급격히 기울었다. 녀석의 얼굴이 내 코앞으로 훅 다가왔다.
후우욱!
한껏 뒤로 물러났던 내 이마가 맹렬하게 앞으로 튀어 나갔다. 그대로 녀석의 인중을 찍어 버렸다.
쩌어억!
“……!”
스르르. 털썩.
비명도 지르지 못한 녀석이 눈을 하얗게 뒤집어 까고는 그대로 옆으로 나뒹굴었다.
‘아우, 아까워라.’
사혈 중 하나인 인중이 아니라 코가 박살났다.
하지만 허옇게 드러난 코뼈와 퐁퐁 샘솟는 피를 보자니 꽤 속이 시원해졌다.
‘이제 한 놈 남았나?’
싸늘한 내 눈이 마지막 먹잇감을 찾아 움직였다.
“아으으!”
겁을 잔뜩 집어 먹은 녀석이 두려움에 떨고 있는 모습이 내 눈에 걸려들었다.
“크크큭. 마지막은 내가 먼저 가 주지.”
이제는 기다릴 시간도 없다.
이 허접한 육체에 촌음의 폭발력을 제공해 주었던 내공은 잠시 후 완전히 바닥을 보이게 된다.
이미 다리 하나를 쓰지 못하는 지경이 되었지만 나머지 한 발에 모든 힘을 모으면 저렇게 움직이지도 못하는 녀석의 앞으로 내 몸을 던지기에는 충분할 것이다.
‘끄으응!’
급격히 사라져만 가는 힘. 밀려들어오는 끔찍한 고통.
한계점이 바로 눈앞에 다가와 있었지만 나는 마지막 한 발을 기어이 내딛어버리고야 말았다.
타아앗!
“너도 내놔-앗!”
후우우욱.
남아 있는 모든 것을 실은 내 주먹이 녀석의 심장을 향해 밀려들었다.
그때였다.
“이, 이런!”
“멈추어라!”
휘스읏. 파아아-앙.
제법 짜릿한 외침과 함께 두 줄기의 그림자가 내 앞으로 파고들었다.
‘손목!’
감히 내 모든 것을 실어낸 마지막 공격을 막으려 들다니!
목표 변경이다.
휘릭. 슈우욱.
직선밖에 모르던 내 주먹이 가볍게 사선을 그려냈다. 내 손목을 낚아채려는 그림자를 떨쳐낸 후 연어처럼 위를 향해 거슬러 올랐다.
‘그것이 내가 그리려는 그림인데…….’
콰악!
결국 잡히고야 말았다.
‘후후훗. 이 육체로는 정말 어쩔 수가 없구나.’
분하지만 인정해야지 뭘 어쩌겠나?
씨이익.
나는 사내답게 환히 웃는 얼굴로 내 손목을 낚아챈 주인의 눈을 바라보았다.
백리장천.
이곳 백리세가의 가주인 그가 직접 나섰다.
“오, 오셨습니……이……까?”
에이, 조금만 더 버티지. 목소리조차 자꾸 힘이 풀리잖아.
창피해서 이거 어디 원.
“아들아!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
저만큼 뒤에 내 아버지 용대명의 얼굴이 보인다.
커다랗게 부릅떠져 있는 눈을 보니 어지간히 놀라신 것 같다.
‘아버지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일 수야 없지.’
나는 사력을 다해 호흡을 다스렸다.
쓰으읍. 후우우. 쓰으읍. 후우우.
모든 정신을 불사신기 입문결에 쏟았다.
필사적으로 호흡을 조절했다.
다행히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실낱같은 기운 한 줄기가 감각에 걸려들었다. 그 기운을 겨우 붙잡아 나는 목소리와 자세를 가다듬을 수 있었다.
“호심결은 필요 없다고 드렸던 말씀, 이젠 이해할 수 있으시겠지요?”
“……그래, 그렇구나.”
뜨거운 눈으로 지켜보던 용대명의 고개가 천천히 그리고 크게 끄덕여졌다.
“나만의 길을 개척할 것입니다.”
불사신기!
이미 한 번 걸었던 길을 불사신기로 채워 다시 한 번 걸어 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