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다시 걷는 길 (6/104)

6.다시 걷는 길

성큼 성큼 와락.

용대명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저 뛸 듯 다가와 나를 한 번 콱 껴안았을 뿐이다.

어찌나 뜨겁던지!

“수고했다, 수고했어.”

성공 여부를 묻는 것이 아니었다.

책만을 벗 삼던 아들이 아버지와 가문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아들인 후 당했던 고초와 망설임 없는 노력에 그저 고마워할 뿐이었다.

“아, 아버지. 도대체 며칠이나…….”

“그것이 무에 중요하더냐? 이 아비는 네가 이토록 헌앙한 걸음으로 모옥을 나서 준 것만으로도 족하구나.”

“사흘이었다.”

“그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너만을 기다리셨다.”

“이 사람들아. 어째 그런 소릴 하는 겐가?”

“하하하, 형님도 참……. 동경이나 들여다보고 그런 말씀을 하셔야지요.”

“아들이 대공을 이루기 위해 모든 것을 내던졌는데 나만 편할 수 없다, 하시면서 사흘 내내 수면도 거의 취하시지 않으셨잖습니까?”

교진운과 유백이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말을 덧붙였다.

‘그랬구나.’

새삼 아버지와 아들이란 관계의 뜨거움이 온몸으로 느껴지는 것만 같다.

울컥.

알 수 없는 무엇인가가 심장 저 깊은 속에서부터 치솟아 올랐다.

‘70평생 내내 나 혼자였었는데…….’

십만 마도인을 거느리는 신교의 교주였었지만 내내 고독하기만 했었다. 도대체가 눈만 마주쳐도 돌바닥에 고개를 조아리는 사람들뿐인데 무슨 놈의 교류란 말인가?

‘이제는 정말 나 혼자가 아니로구나. 내게, 이 신마에게 가족이, 그것도 나를 이처럼 아껴주는 아버지가 생긴 것이었어…….’

공연히 눈가가 촉촉해지는 듯한 기분, 그 달콤한 나약함을 떨치기 위해 재빨리 성과를 고했다.

“성공했습니다, 아버지.”

“그러하냐? 하하하. 장하다, 아들아. 정말 장하고 또 장하구나.”

용대명이 크게 웃으며 등을 두들겨 주었다.

교진운과 유백이 슬쩍 다가와 손목을 잡아 갔다.

“어디 한번 확인해 볼까?”

“의형께서 노심초사한 보람이 있는지 이 의숙이 한번 봐야겠다.”

맥문을 내어 놓는다?

신마 시절이었다면 어림도 없는 일이었을 것이지만 용무린은 흔쾌히 교진운과 유백에게 손목을 맡겼다.

두 사람의 기가 슬그머니 들어와 이리저리 움직이며 탐색하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만족스럽지는 못한지 두 사람의 표정이 꽤 오묘했다.

“확실히 음양쇠맥증은 사라진 듯하구나.”

“다 좋은데, 조금 아쉽구나.”

아쉬움의 정체를 다 안다.

절대검신 독고황이 남긴 칠채보왕단까지 사용한 결과치고는 이류에 불과한 내공이 많이 아쉬웠으리라.

하지만 나는 실망하지 않았다.

‘이류의 내공이라고 다 같은 이류의 내공이 아니라는 말씀이지.’

아직 확인해 보지는 않았지만 뭔가가 조금 달랐다.

겉으로 드러난 크기가 작아 보여 그렇지 실상은 추측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빙산과 하나가 되어 있는 듯 든든한 느낌이랄까?

“하하하. 이제 시작일 뿐입니다.”

“……그래. 대기는 만성인 법, 실망하는 것보다는 정진하는 자만이 가득 채울 수 있느니라.”

“……노력하고 또 노력하거라. 비룡문의 앞날이 오롯이 네 어깨에 달려 있느니라.”

“예, 알겠습니다.”

교진운과 유백의 진솔함에 결국 나는 그 두 사람에게도 마음을 열고 말았다. 두 사람을 내 의숙부로 완전히 인정을 했다.

“자, 여기서 이럴 것이 아니다. 가자, 아들아. 사흘 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수련만 했으니 가까운 객잔이라도 찾아 맛있는 것이라도 먹자꾸나.”

솔깃한 말이었지만 나는 고개를 살짝 가로저었다.

‘이제부터는 시간싸움인 거야.’

육체를 단련하고 기본적인 손발의 움직임을 내 의지와 하나로 묶어야 한다.

‘그 후 그 망할 놈의 삑사리 교정을 해야 해.’

그래야만 석 달 후 운가 애송이 녀석을 박살내 줄 수 있다.

“저는 지금부터 수련에 돌입할 것입니다.”

이미 한 번 걸어 보았던 길이다. 충분히 빠르게 돌파할 수 있다.

아버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지금부터? 끼니도 해결하지 아니한 채? 이곳 동백산 자락에서?”

“예, 아버지. 끼니 정도야 이제는 제가 알아서 할 수 있습니다. 성도와 가까워 산적도 없고 산은 적당히 높고 깊으니 산짐승도 적당할 것 같고……. 안성맞춤입니다.”

“……!”

본가로 돌아가 추뢰검사 교진운과 소요일영 유백 두 사람으로 하여금 무공의 길잡이를 부탁하려던 용대명의 고민이 깊어졌다.

“무예란 본디 사부의 따뜻한 배려 없이는 단어 하나 자구 하나의 해석에도 시간이 걸리는 법이다.”

“기본이 되는 자세의 확립 역시 시작이 중요하다. 자칫 버릇이 잘못 들면 상승의 경지로 나아갈 수 없음이야.”

다 안다. 무엇을 염려하고 있는지.

‘신마라 불렸을 만큼 높은 경지에 있던 내 전생의 기억이 오롯이 머릿속에 있는데 무엇이 두려울까?’

다 필요 없다. 그저 머릿속에 들어 있는 모든 것을 육체적으로 소화해 내는 것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따로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너무 심려치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

“……!”

교진운과 유백의 표정이 더욱 오묘해졌다.

그러더니 이내 풀썩 웃었다.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인정해 주었다.

“시련이 서생을 무인으로 만들었구나.”

“어쩐지 눈빛부터 완전히 달라졌다고 느껴지더라니!”

“알겠다. 뜻대로 해 보거라.”

“믿고 기다리겠다. 석 달 후라 하였으니 그 정도는 네 복중의 계획대로 실행해 보거라.”

평생을 두고 닦아야 하는 무예, 석 달 정도 길들여진 버릇 정도는 능히 잡을 수 있다는 자신감에서였는지 두 사람은 선선히 용무린의 계획에 찬성을 했다.

두 사람의 말을 경청하고 있던 용대명의 고개 역시 천천히 끄덕여졌다.

“언제나 그러했듯 이 아비는 너를 믿는다. 용맹정진하거라. 본가에서 기다리고 있겠다.”

마지막으로 따뜻한 시선을 한 번 보낸 용대명은 그대로 돌아섰다. 성큼 성큼 산 아래를 향해 내려갔다. 비슷한 시선을 보내던 교진운과 유백 역시 그 뒤를 따랐다.

‘거 참, 그새 이렇게 젖어들었나?’

느닷없이 홀로 남으니 기분이 정말 오묘했다.

70평생 경쟁자와 거센 내부 알력 틈바구니에서 홀로 버텨왔을 때도 느껴보지 못했던 외로움이라는 감정이 용대명과 두 의숙이 사라지자마자 찾아들다니!

“에라이, 뛰자! 차아앗!”

파앗. 파바바박.

외로움이란 생소한 감정을 씻어내려는 듯 용무린은 뛰기 시작했다.

“허억. 헉헉헉.”

금세 숨이 턱에까지 차올랐지만 멈추지 않았다. 그대로 내처 달렸다. 되레 고함을 질렀다.

“하아아-아!”

체력과 지구력은 모든 무공의 기본 바탕이다.

그리고 체력과 지구력을 키우는 데 있어서 가장 좋은 방법은 역시 뭐니 뭐니 해도 달리는 것이 제일이다.

파악. 파바바박.

제법 속도가 붙었다.

“허억. 허억. 허억. 허억.”

허파가 밖으로 튀어나오기라도 하려는 듯 숨이 거칠었다.

이류까지 올라온 내력을 사용하면 조금이라도 편해지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저 순수한 육체의 힘만 사용했다.

화끈.

불에 덴 것처럼 몸이 뜨거워졌다.

육체가 이 비상 상황을 맞아 적응하기 위한 체제에 돌입한 것이다.

‘좋아, 속도를 더 높인다.’

파악. 파파파파파파팍.

예열이 된 만큼 육체는 의지에 충실히 따라 주었다.

속도가 살짝 더 높아졌다.

“허억. 허억. 허억. 허억.”

쿵쾅 쿵쾅 쿵쾅 쿵쾅

허파와 심장이 터져 버리기라도 할 듯 격렬하게 움직였다.

이 육체의 한계다. 위험했다.

“더! 허억. 허억. 조금만 더어-어! 허억. 허억.”

나는 절대로 멈추지 않는다.

육체는 신기할 정도로 한계를 잘 기억한다.

여기에서 멈춰서 버린다면 내 한 계는 이 정도가 끝인 거다. 달려야 한다. 계속해서 한계를 깨뜨리며 앞으로 쑥쑥 나아가야 하는 거다.

“으아아아아-아!”

나는 천둥 같은 고함을 내질렀다. 절대로 지금의 한계 따위, 육체의 고통 따위에 굴복할 수 없다는 포효였다.

파악. 파파파파파팍. 후욱.

10리를 단숨에 돌파했다.

‘크으으…….’

이제는 허리까지 끓어질 듯했다.

하지만 나는 그래도 포기하지 않았다. 이를 악물고 내 몸에 끊임없이 명령을 내렸다.

‘버텨! 네 한계는 겨우 이 정도가 아니야! 뛰어넘어! 뛰어넘어 버리라고!’

타다다다닷. 휘이잉.

20리 돌파.

“허억. 헉헉헉.”

숨이 곧이라도 끊어질 것 같았다. 정말 위험한 순간이다.

‘지지 않아! 절대로!’

그때였다.

“후우욱!”

콱 막혀 터져버릴 것만 같던 폐부가 활로를 찾아냈다. 그동안 사용되지 않았던 모든 능력을 활짝 열었다. 폐부 깊은 곳으로 한 줄기 시원한 공기가 쭉 빨려들었다.

바로 그 순간 온몸에 새로운 힘이 돌았다.

근성이라고 불러야 할까?

아니면 오기?

한계점을 넘어서니 몸속 깊은 곳에 잠들어 있던 그 무엇인가가 솟구쳐 올랐다. 무한할 것만 같은 힘이 말단 세포 끝까지 스며들었다.

“바로 이거야! 바로 이거라고!”

환한 미소와 함께 용무린은 계속해서 뛰었다.

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하지만 그럴수록 몸은 개운했다. 새로운 힘이 계속 솟구쳤다. 이대로 언제까지나 뛸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물론 그렇지는 않았다.

풀썩! 데구르르르.

다리가 완전히 풀려 버렸다. 달리던 속도 그대로 산기슭을 나뒹굴었다. 데굴데굴 굴러 아래로 떨어졌다.

“커헉. 큭.”

구릉 아래로 마구 굴러 떨어지는 사이 크고 작은 돌멩이들이 가차 없이 용무린의 몸을 두들겼다.

콱! 퍼벅.

날카로운 돌 조각이 이마를 강하게 때렸다.

“크윽!”

어지간한 아이 머리만 한 돌이 가슴을 세게 찍었다.

“커허억!”

숨이 턱 막혔지만, 그렇게라도 겨우 멈춰서 다행이었다.

“크으으……. 다, 다음 단계로 어서…….”

호법이고 뭐고 생각할 겨를도 없이 나는 꾸역꾸역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불사신기의 두 번째 단계인 호신의 법문을 떠올리며 호흡을 가라앉히기 위해 죽을힘을 다했다.

‘수많은 물줄기가 대륙을 거치며 담아온 독성도 바다는 모두 씻어 버린다. ……다시 되살려 하늘로 올려 보낸다. 바다는 치유가 본성이다. ……바다가 치유한 모든 것은 다시 비가 되어 대지로 스며든다.’

허억. 허억. 허억. 허억.

심장은 터질 듯하고 허파는 그야말로 밖으로 튀어나올 듯 심하게 헐떡거리고 있었지만 모든 정신을 요결에 오롯이 모았다.

쏴아아아. 쏴아. 쏴아아아.

단전에서 일어난 불사신기의 내공이 불쑥 솟구쳤다.

휘이이-!

전생에서와 같이 임독맥을 타고 휘돌았으면 좋으련만 그대로 전신에 쫙 퍼져갔다. 지친 근육과 곤두선 신경을 골고루 어루만졌다.

“후욱. 후욱. 후우우-우!”

놀랍게도 호흡이 빠르게 편안해졌다.

참으로 신기한 노릇이었다.

일주천 이주천이라는 개념 자체가 들어맞지는 않았지만 전신에 쫙 퍼지는 불사신기의 내공으로 인해 육체가 피로를 빠른 속도로 씻어낸 것만은 분명했다.

“신기하군.”

임독맥을 하나로 이은 후 대주천을 하던 때와는 완전히 다른 생소한 느낌이다. 그러나 그것만큼 신묘한 기운이라는 것은 거짓 없는 사실이었다.

“그러면 바로 다음 단계로 가 볼까?”

첫 술에 배부를 수 없음을 누구보다도 잘 안다.

용무린은 기본적인 체력 배양과 함께 근력을 키우는 일에 나섰다.

“끄으응. 하나. 끄으응. 두울.”

적당한 크기의 돌을 찾아 들어 올렸다가 내려놓았다.

검을 휘두르든 도를 휘두르든 장법을 펼치든 내공보다도 더 중요한 체력과 지구력이 뒷받침 되어야 하기에 필연적으로 밟아야 하는 단계인 것이다.

“다, 다서-엇!”

투욱.

처음에는 정말 한심했다.

겨우 어린아이 머리만 한 크기의 돌멩이 무게에 쩔쩔 맸다. 다섯 회 들었다가 놓는 것이 다였다. 나무에 매달려 하는 턱걸이 역시 마찬가지, 세 개를 끝으로 뚝 떨어졌다.

“다시 불사신기다.”

육체가 지치면 언제고 그 자리에 주저앉아 가부좌를 틀었다. 짧은 시간에도 강력한 회복력을 자랑하는 불사신기의 공능이 육체의 한계를 자꾸만 확장시켰다.

“좋아, 갈수록 발전하고 있어.”

고마운 사실은 육체가 단련되어 갈수록 불사신기의 운용 역시 자연스러워져 본래의 공능이었던 동공으로서의 효능까지 점차 보이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수련하는 시간과 육체의 단련 정도가 그때부터 비약적으로 늘었다.

“육포라도 잔뜩 사서 들어올 것을 그랬나?”

배가 고플 때마다 그런 후회를 살짝 하며 산자락을 뒤졌다. 대충 먹을 만한 과일들을 따 먹고 해결했다.

팔에 힘이 조금 붙은 이후로는 돌팔매질을 해서 토끼와 산새들을 잡아먹으며 체력을 보강했고 수면을 취하는 대신 불사신기 수련으로 밤을 지새웠다.

그렇게 보낸 시간이 어언 한 달.

용무린은 동백산에 입산하기 전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거듭나기 시작했다.

군살과 기름진 곳은 눈을 씻고 봐도 없었다.

대호처럼 강인하며 고양이처럼 부드러운 근육이 전신을 휘감았다.

“이 정도면 다음 단계로 나아가도 되려나?”

더욱 혹독한 수련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기본 바탕인 육체를 이제야 얼추 만들었다. 시간 부족으로 인해 살짝 아쉬움이 들긴 했지만 다음 단계로 나아기가 위해서는 이 정도로도 충분해 보였다.

“좋아, 이제 부러뜨리자!”

저 무식한 불사신기의 요결에 곧이곧대로 따르기 위해서는 전신의 뼈를 자꾸만 부러뜨려야만 한다. 불사신기의 힘을 제대로 북돋기 위해서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며칠 전에 요 언저리에서 곰탱이 소리를 들었던 것 같은데 말이야…….”

용천무는 대뜸 동백산의 주름잡는 흑웅을 찾아 나섰다.

“곰탱아, 곰탱아. 어서 나오너라. 나랑 한 판 대차게 떠 보자꾸나.”

말이야 미련 곰탱이라 한다.

하지만 곰은 미련한 동물이 절대로 아니다.

호랑이를 제외하면 먹이사슬에서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폭군이나 다름없는 존재인 것이다.

‘앞발의 파괴력에서 살아남기 위해 노력하다 보면 동체시력과 반사신경도 극대화 되겠지.’

곰이 한 번 작심하고 휘두르면 황소의 두개골조차 단번에 깨질 정도다. 조금 무식하긴 하지만 생각대로 적당히 부서질 정도로 얻어맞는 일에 성공한다면 겸사겸사 좋은 일이 될 것이다.

“곰탱아! 빨리 좀 나와라! 나 시간 없단 말이다. 제발 수련 좀 하자.”

그렇게 외치며 얼마나 산을 헤매고 다녔을까?

바스락.

저만큼 앞에서 나뭇잎 밟는 소리가 들렸다.

“찾았다!”

거대한 흑웅!

성도와 가까운 동백산에 저런 녀석이 살고 있었나? 싶을 만큼 거대한 녀석이었다.

‘하, 그 자식 참…… 왜 이렇게 큰 거야?’

막상 녀석의 덩치를 보니 살짝 켕겼다.

아름드리나무와도 같은 두 발로 당당히 일어서니 만년거암이 앞을 가로막아선 듯 위압감이 확 풍겨 왔다. 두 팔을 쫙 폈을 때는 더 섬뜩했다.

‘그냥 조금 작은 녀석을 찾아 시작할까?’

그런 생각이 찾아듦과 동시에 가슴을 후벼 파는 냉철한 자각이 있었다.

‘천하제일신교에서조차 신마라 불렸던 나다!’

제 아무리 상황이 좋지 않다고는 하지만 저 따위 미물의 위세에 밀려 뒤로 물러난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인 거다.

“육체가 약해지니 마음도 약해진 것인가?”

피식.

그것마저 완전히 부숴 버릴 거다.

타아앗!

가벼운 미소와 함께 돌진을 택했다.

“덤벼라 곰탱아-아!”

내공을 배제한 순수한 육체의 힘으로 너를 넘어서 주마!

“쿠워어어-어!”

녀석이 흉포한 이를 드러냈다.

힘껏 들어 올린 앞발에 보기만 해도 섬뜩한 손톱이 삐죽 길게 솟아났다.

후우우웅.

거창한 바람까지 휘몰아쳐 오는 거웅의 앞발!

그 사이를 가볍게 비집고 들어간 내 주먹이 작살처럼 연이어 꽂혔다.

뻐억. 뻐버버버벅.

“쿠워어억!”

역시 씨알도 먹히지 않는다.

내공을 배제한 순수한 육체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하게만 느껴졌다.

‘빌어먹을 놈의 삑사리.’

정확하게 급소만 공격해도 부족할 판에 자꾸만 원하는 위치가 아닌 언저리만 때린다. 되레 거웅의 흉성만 자극했다. 녀석이 미친 듯 앞발을 휘두르고 이빨을 들이밀었다.

‘어디, 맛 좀 한번 보자.’

위력을 알아야 뼈를 부러뜨려도 적당한 수준으로 부러뜨릴 수 있을 것 아니겠는가? 용무린은 마음 독하게 먹은 후 거웅의 앞발에 슬쩍 팔을 가져다 댔다.

대가는 혹독했다.

콰드득.

“크흡!”

녀석의 공격을 정면에서 맞지 않고 옆으로 흘려냈음에도 불구하고 단 번에 팔의 감각이 없어졌다. 이번에도 마음과는 달리 각도가 좋지 못했고 속도까지 늦은 대가다.

“차아앗!”

뻐억. 뻐버벅.

하지만 멀쩡하게 남아 있는 한 팔은 계속해서 녀석의 관절과 목 심장과 겨드랑이와 같은 급소들을 사정없이 마구 찍었다.

퍼억. 퍼퍼퍼퍽.

신체가 의지를 정확하게 따라 주지 않은 탓에 정확하게 요혈이나 급소를 가격하지는 못하고 언저리를 두들겼지만 다행스럽게도 적당한 충격을 줄 수 있었다.

“쿠워어어!”

고통스러운 비명과 함께 흑웅이 살짝 뒤로 물러났다.

타닷. 후욱.

그 틈을 타 용무린 역시 뒤로 몸을 뺐다.

‘역시 아직은 한 대 맞으면 바로 뒤로 빠져야만 해.’

그 이상은 절대 무리다.

맞서는 것까지는 가능하지만 육체의 힘만으로는 거웅을 거꾸러뜨리기란 아직 역부족이었다.

“한 대 얻어맞았으니 오늘은 그만!”

타닷. 타다닷.

용무린의 발이 기묘하게 움직였다. 진과 퇴의 짧고 불연속적인 반복과 좌우로 휘도는 간단한 동작만으로 거웅의 간격을 헤집었다.

“공격 시자-악!”

뿌아악. 빠바박.

거웅의 복부를 살짝 딛고 뛰어 오른 용천무의 무릎이 눈부신 속도로 흑웅의 턱을 쳐올렸다.

“좋았어!”

이번에는 원하던 위치에 원하던 수준의 힘이 실렸다.

“쿠워어억!”

드디어 아찔한 통증이 느껴진 것 같았다.

공격을 하는 대신 흑웅은 주춤 뒤로 물러났다.

“어딜 가 인마! 이제야 감각이 되돌아오기 시작했는데?”

빠악. 퍼어억.

그런 거웅의 두 눈 어림에 야무지게 주먹을 꽂아 넣었다.

“아우, 아까워라!”

이번에는 조금 빗나갔다.

원했던 것은 정확하게 곰탱이의 눈동자를 때리는 것이었다. 하지만 많이 어긋나지는 않았다. 점점 더 이 육체에 적응하기 시작했다는 말이었다.

“워어어억!”

깨나 아찔했던 것 같다.

곰탱이가 느닷없이 몸을 돌리더니 뒤를 향해 냅다 뛰기 시작했다.

“후욱. 후욱. 후욱.”

한계치를 넘어선 움직임을 쏟아낸 내 육체에 그제야 피로가 몰려왔다. 고통과 턱밑까지 차올랐던 숨을 한꺼번에 토해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크크큭. 푸하하하하!”

용무린의 입에서 통쾌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한 발 또 나아간 것이다.

“좋아, 좋아. 점점 더 익숙해지고 있어.”

운룡장의 다섯 애송이를 상대할 때는 어째서 자꾸만 삑사리가 생기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고마워, 곰탱아.”

이제는 오롯이 알 수 있다.

어째서 마음속에 그려냈던 선과 그림을 똑같이 그려낼 수 없었던 것인지를…….

“푸후후. 과거의 육체와 환생을 한 이 육체는 신체 크기와 근육의 탄력 그 모든 것이 달라. 그 점을 이제야 깨닫다니 나도 참.”

그러니 자꾸만 원하던 곳의 언저리만 두들겼던 것이고 힘도 원했던 것 보다 작게 실리곤 했던 것이다.

“이제 알았으니 됐어.”

이쯤은 반복 수련을 통해 충분히 교정할 수 있다.

***

다시 한 달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거기 서-엇!”

“쿠워어어-억!”

동백산 기슭에 쫓고 쫒기는 추격전이 벌어졌다.

물론 쫓는 사람은 용무린이었고 쫓기는 것은 곰탱이였다.

“마지막엔 항상 맞아 주잖아 인마! 내가 널 죽이는 것도 아니고 가끔 맞아주기도 하는데 왜 이렇게 앙탈이야?”

“쿠어억!”

어림 반 푼 어치도 없는 소리 하지 말라는 듯 흑웅이 앙칼지게 부르짖었다.

“저게 그냥 확!”

파바바박. 후우욱.

누가 저걸 미련 곰탱이라고 부르겠는가?

동백산의 흑웅은 네발을 모두 사용해 동네 똥개처럼 잘도 뛰어 도망쳤다. 그 속도가 무척이나 빨랐다.

‘수련 상대로는 이제 곰탱이 말고 덩치만 큰 냥이가 적당한데……. 그 녀석들은 곰탱이보다 눈치가 더 빠삭하단 말이야.’

곰탱이와 함께 한 달 내내 시달린 동백산의 호랑이는 용무린의 냄새만 맡고서도 미리 도주를 감행하곤 했다.

그때였다.

화악!

거웅이 우뚝 멈춰 섰다. 다시금 두 발로 일어났다. 날카로운 손톱을 드러내며 두 발을 양 옆으로 쫙 펼쳤다. 더는 물러설 수 없다는 뜻이었다.

“하 그 자식도 참, 꼭 새끼들 있는 곳까지 쫓아와야만 발동이 걸린단 말이야.”

마주치기가 무섭게 턱이 홱 돌아가도록 오지게 얻어맞은 흑웅은 바보가 아니었다.

불사신기로 단련을 거듭한 용무린의 무서움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는 듯 도발에도 싸우려 들지 않았다. 소도 한 번에 때려잡는 앞발이 통하지 않는 상대라는 인식이 확실하게 각인되어 버렸던 것이다.

“나도 오늘이 마지막이야 인마!”

“꾸워?”

“시끄럽고, 덤벼라 곰탱아. 나 시간 없다.”

“꾸…….”

녀석이 자꾸만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용무린의 시선을 피했다. 한 달 내내 시달리다 보니 단단히 겁을 집어 먹은 모양새였다.

‘별 수 없나?’

용무린은 작은 돌멩이 하나를 집어 들고는 흑웅 뒤에 웅크리고 있는 새끼 곰을 향해 냅다 던져 버렸다.

빠악.

“캐애액!”

새끼 곰이 나 죽는다고 비명을 질렀다.

슬금슬금 용무린의 시선을 피하던 흑웅의 눈이 홱 돌았다. 포식자다운 살기를 쏟아냈다.

“쿠워어-어!”

파바박. 후우욱. 후우욱.

거친 고함을 토해내며 달려와 앞발을 마구 휘둘렀다.

“와랏!”

용무린 역시 피하지 않고 마주쳐 갔다.

투드득.

흑웅의 강력한 앞발이 용무린의 오른손이 만들어낸 방어를 훑으면서 떨어져 내렸다. 하지만 한 달 전과는 완전히 그 결과가 달랐다. 손톱에 긁힌 피부가 조금 갈라졌을 뿐 근육이 파열되지도 뼈가 부러지지도 않았다.

“타아아!”

뻐어억. 뻐버버벅.

용무린의 주먹과 손날 그리고 팔꿈치가 가차 없이 흑웅의 전신을 두들겼다. 슬격과 퇴각이 거웅의 발 관절을 모로 차 균형을 흩뜨렸고…….

뿌아아악!

어느새 쭉 뻗어 올라간 원앙각이 턱을 차 돌렸다.

“꾸워어어억!”

흑웅이 고통에 가득 찬 비명을 내질렀다.

후웅. 후웅.

마구 앞발을 휘저었다. 어떻게 하든 용무린의 공격에서 새끼를 지켜내겠다는 일념이었다.

타닷. 타다닷. 휘스슷.

종잡을 수 없는 엇박자를 타고 이뤄지는 진퇴, 바람인 듯 자유로이 휘도는 좌우 회전의 운신에 흑웅의 거친 공격은 그대로 허공만 할퀴고 지나갔다.

“좋아, 다음 단계 확인!”

이젠 더 이상 피하려 들지도 않았다.

그대로 흑웅의 앞발질을 코앞에서 육체의 힘만으로 받아낼 차례다.

후우우웅. 투우웅. 투드득.

용무린은 근력만으로 거웅의 힘을 그대로 튕겨내고 흘려내기 시작했다.

“우어억!”

하얀 이를 드러내고 들이민 이빨은,

와득.

턱을 그대로 잡아 반대로 비틀어 버렸다.

“쿠워어어어-어!”

심장이 터질 듯한 심정인지 흑웅이 미친 듯 고함을 터뜨렸다. 하긴, 당하는 입장에서 보면 그럴 만도 했다. 피했는데도 끝까지 쫓아와 항상 이렇게 두들겨 팼으니까.

“이제 마지막이다, 곰탱아! 때려!”

용무린은 공격과 회피를 모두 멈추었다.

흑웅 앞에 가슴을 환히 드러낸 채 호흡을 가다듬었다.

“우워어어억!”

후웅. 후우웅.

약이 바짝 오를 대로 오른 흑웅의 앞발이 용무린의 가슴에 뚝 떨어져 내렸다.

뻐어억. 퍼어억.

아찔할 정도의 충격과 함께 용무린의 몸이 뒤로 훌훌 날렸다.

‘서, 성공이다.’

피부는 확실히 쭉 찢어졌지만 근육은 크게 상하지 않았다. 심지어 뼈가 부러지지도 않았다. 한 달 동안 계속해 온 불사신기의 수련으로 인해 그만큼 육체의 능력이 상승한 것이다.

씨이익.

극심한 고통이 짜릿하게 전신을 휘감았지만 용무린은 되레 웃었다. 두 눈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독기를 머금고 흑웅을 쏘아보았다.

그 모습이 어찌나 두렵던지!

흑웅은 돌진해서 공격을 하는 대신 꽁무니를 말았다. 잽싸게 뒤로 물러났다. 새끼를 감싸 안고 몸을 웅크렸다. 완전히 굴복한 것이다.

피식.

독기 가득하던 차가운 미소는 이내 싱겁기 짝이 없는 것으로 바뀌었다. 그동안 시달리기만 해온 흑웅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잘 지내라 곰탱아. 지금처럼 새끼 잘 돌보고.”

“꾸워?”

용무린이 몸을 돌렸지만 거웅은 믿지 못하겠다는 듯 여전히 경계를 풀지 않았다. 그러든지 말든지 용무린은 동백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이제 산속에서는 이룰 수 있는 것이 더는 없었다.

“이젠 내공을 쓰는 놈들에게 좀 더 맞아야겠지?”

흑웅의 완력 앞에서도 쉽사리 파괴되지 않는 육체를 더욱 단련해 호신의 힘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이제 무인의 손에 몸을 맡기는 수밖에 없는 거다.

“정주쯤 되는 곳이라면 있겠지?”

하오문의 텃밭이자 하류인생이 하오문의 무인으로 거듭날 기회를 찾을 수 있는 곳 무투장. 용무린의 다음 행선지는 바로 그곳이었다.

“잊고 있던 실전감각도 다시 추스르고……. 겸사겸사 딱 좋겠다.”

평범한 시골 서생이 절세비급하나 손에 쥐고 산속에 들어가 십 년이고 이십 년이고 수련하면 곧바로 경세적인 고수가 될 수 있을까?

어림도 없는 소리다.

틀에 박혀 허공이나 나무에만 내지르는 수련은 그저 신체단련에 다름이 아니다. 모름지기 고수가 되기 위해서는 무수한 실전을 거쳐야만 한다.

‘그저 그런 수준인 놈들에게야 먹히겠지만, 일정 수준 이싱인 녀석들에게 걸리면 그날로 끝인 거야.’

한 순간에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실전, 살기 위한 온갖 꼼수와 임기응변이 난무하는 실전 속에 날카롭게 감각을 다듬어야만 결정적인 순간에 찾아드는 승부처에서 승자로 우뚝 설 수 있는 것이다.

“크크큭. 무투장아 기다려라.”

타다닷. 후욱.

정주를 향해 용무린은 놀라운 속도로 달리기 시작했다.

***

사흘 후.

용무린은 정주의 외곽 홍등가의 한 지하 장원 중앙에 설 수 있었다. 지하 장원은 가득 들어찬 도박꾼들의 열기에 이미 후끈 달아올랐다.

“우와아아! 패왕! 나는 네게 걸었다!”

“삼절일학을 아예 삼절고혼(三絶孤魂)으로 만들어 버려줘 패왕!”

“지랄! 삼절일하-악! 배당이 자그마치 150대 1이야. 제발 이겨줘라, 제발.”

“씨발, 누구라도 좋으니 그냥 화끈하게 피 좀 보자!”

“와하하하. 대가리를 깨버렷!”

온갖 종류의 광기 어린 악다구니가 용무린을 향해 뜨겁게 쏟아졌다.

‘저 중에는 정주의 세도가 자제도 있고 고위 관리 놈들도 있을 거야. 다들 숨어서 즐기고 있겠지?’

심지어는 군문의 실력자들도 정체를 숨기고 끼어 이 은밀한 유흥을 즐기고 있을 것이다.

불법에 불과한 무투가 이토록 자유로이 치러지고 도박까지 함께 이뤄질 수 있는 바탕에는 바로 평화롭기만 하고 밋밋한 그들의 삶 속에서 이곳에서야말로 화끈한 자극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리라.

후웅. 후웅.

“우와아아아-악!”

용무린의 상대로 나선 7척 거구의 사내가 철퇴를 두어 번 휘두르더니 거친 포효를 터뜨렸다.

‘좋아, 최소 이류는 됨직한 내공이로구나.’

제 아무리 타고난 용력이 있다지만 철퇴란 무기를 저렇게 바람 소리가 날 정도로 빠르게 휘두를 수 있다는 것은 내공이 돕지 않으면 힘들다.

‘충분해.’

저 정도 용력과 내공이라면 불사신기의 수련 상대로 최적이라 할 수 있다.

씨이익.

절로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제법 옛 생각이 나는구나.’

신교에서의 어린 시절 겪었던 지옥훈련은 거의 매일이 이와 같은 무투의 연속이었다.

단일 세력으로서 신교가 천하제일이라는 위치에 올라설 수 있었던 데에는 기본적으로 그와 같은 지옥수련을 딛고 올라선 자들이 구름처럼 많이 몰려 있기 때문이다.

때-앵!

드디어 종이 울렸다.

“차아아!”

거구의 사내가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가벼운 보법으로 거리를 좁혔다. 하늘 높이 들어 올렸던 철퇴를 그대로 찍어 내렸다

후우웅.

철퇴를 따라 묵직한 공기가 따라 움직였다. 내공이 깃들었기 때문이다. 흑웅의 앞발보다 훨씬 더 강력하다. 그대로 맞아 주었다가는 필시 머리가 터져 나갈 것이다.

‘어차피 맞아 주긴 해야 하지만, 처음부터 맞아 주기만 하면 많이 싱겁겠지?’

수련 때문에 뼈가 많이 부러져야만 하는 입장이지만 그렇다고 누군가와의 결투에서 무참하게 지는 것 또한 내 영업 방침이 아니다.

“일단 좀 맞자!”

타닷. 휘릭.

한 걸음에 사내의 가슴을 향해 뛰어 들었다. 그 단순한 움직임에 간격이 사라졌다.

빠박. 와득.

녀석의 명치와 겨드랑이에 두 번의 주먹이 꽂혔다. 마지막에 뻗어낸 주먹이 거슬러 올라가 턱을 살짝 돌렸다.

흔들.

7척 거구의 덩치가 순간적으로 흔들렸다.

‘좋았어.’

동백산에서의 한 달 수련으로 이 육체에 대한 적응이 완전히 끝이 났다. 삑사리가 더는 나지 않는다. 원하는 위치에 원하는 만큼의 힘을 고스란히 전해 줄 수 있다.

타닷. 스슥.

완전히 끝내 버릴 수도 있었지만 나는 중심을 잃은 것처럼 살짝 뒤로 빠졌다.

움찔.

‘방금 내 목이 돌아가 버릴 수도 있었다.’

그 점을 직감했는지 덩치가 살짝 몸을 떨었다. 행동이 조심스러워졌다.

“아우, 삼절일학 이 멍청아! 거기서 끝냈어야지!”

“삼절일학 힘내라! 내가 한 냥이나 걸었어! 내가 한 냥이나 걸었다고!”

“패왕, 이 병신아! 달려들어! 박살을 내란 말이야.”

“죽여-엇! 저 같잖은 삼절일학 놈을 완전히 삼절고혼으로 만들어 버리라고!”

용무린이 보여준 간단한 한 수에 후끈 달아오른 도박꾼들은 광기와 환호를 가감 없이 터뜨렸다.

“이야아아-하!”

후웅. 후웅. 후우웅.

도박꾼들의 욕설에 자극을 받았는지 덩치가 철퇴를 마구 휘둘러 왔다.

휘릭. 타닷. 후욱.

용무린은 간단하기 짝이 없는 엇박자의 진과 퇴 그리고 좌우로의 회전을 통해 철퇴 사이를 여유롭게 노닐었다.

빠악. 퍼억. 빠바박!

그 사이 슬쩍슬쩍 뻗어낸 주먹과 퇴각 그리고 팔꿈치와 슬격이 작살처럼 덩치의 전신요혈을 찍었다.

“크으흐, 이 쥐새끼 같은 놈이 정말!”

타닷!

덩치는 모든 것을 내던진 것처럼 방어조차 도외시한 채 철퇴를 날려 왔다.

‘지금이다!’

기다리던 때다. 줄 것은 주고, 받을 것은 받는다.

슬쩍 몸을 비틀어 철퇴 아래 가슴을 모두 들어낸 용무린의 손날이 덩치의 중완혈을 향해 쭉 뻗었다.

뻐어어어-억! 터얼썩.

둔탁한 소리와 함께 용무린의 몸이 뒤로 훌훌 날렸다. 거칠게 바닥을 나뒹굴었다.

“우와아아아! 패왕! 패왕!”

“패왕 만세-에!”

“이런 제기랄! 삼절일학 이 병신아! 잘 나가다가 왜 거기서 얻어맞아?”

“내 돈, 내 도-온!”

무투장이 광란의 도가니에 빠졌다.

하지만 바로 그 다음 순간,

털썩.

승자인 줄로만 알았던 덩치의 무릎이 힘없이 꺾였다.

울컥. 스르르. 쿠웅.

새빨간 울혈을 한 움큼 토해낸 덩치의 몸이 거짓말처럼 옆으로 쓰러져 버렸다.

“끄으응. 거 참 더럽게 아프네.”

심장이 박살나서 죽었을 것으로만 알았던 용무린이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한 순간 무투장에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뒤이어 무투장 전체가 떠내려갈 만큼 커다란 함성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우와아아아-아!”

“이야아! 150대 1의 전설이 벌어졌다.”

“삼절일학 만세-에!”

씨이익.

도박꾼들의 환호성을 한 몸에 받으며 용무린은 기분 좋게 웃었다.

‘기다려라, 운가 애송아.’

넉넉잡고 보름 정도면 기초수련이 모두 완성된다.

‘그때 너를 찾겠다.’

***

중앙의 무투장이 환히 내려다보이는 곳.

“호호홍. 정말 욕심나는 사내란 말이야.”

새빨간 입술을 요염하게 오물거리는 여인의 눈이 탐욕으로 물들었다.

“아직 채 다듬어지지 않은 원석을 보는 기분이랄까?”

마지막 순간에 한 차례 위험한 순간을 맞이하긴 했지만 사내는 위기를 훌륭하게 버텨내고 우뚝 일어섰다. 중완혈을 향해 찔러냈던 마지막 한 수는 정말 일품이었다.

“거침없이 파고드는 그 박력이라니! 오랜만에 심장이 짜릿해졌지 뭐야?”

보면 볼수록 욕심이 난다는 듯 여인은 입맛을 다셨다. 혀를 내밀어 입술을 할짝거렸다.

그때였다.

스슷.

여인의 뒤에 검은 안대로 눈 하나를 감춘 사내가 나타났다.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다녀왔습니다, 루주님.”

“어떻게 됐어?”

“삼절일학 용무린. 신주오가의 일원인 비룡문의 소공자가 확실했습니다.”

“호오, 그래?”

루주라 불린 여인의 눈가에 아쉬움의 빛이 살짝 스쳐 지났다.

“용모파기로 백리세가의 시비와 하인들에게 확인을 거쳤습니다. 비룡문의 문주 용대명과 두 의제인 추뢰검사 교진운 그리고 소요일영 유백의 부축을 받아 동백산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는 목격자까지 확보했습니다.”

“동백산이라……. 그곳 어딘가에서 가문의 천형인 음양쇠맥증을 완전히 치료했나 보지?”

“그런 듯합니다.”

“흐응, 무공의 기초야 어렸을 때부터 교진운과 유백이 잡아주었다고 보면 되고, 여긴 그저 외공의 완성과 실전감각을 끌어올리기 위해 온 것이 되나?”

“그것이 가장 타당합니다. 공연히 본 하오문의 정주 분타가 벌이는 무투 사업에 훼방을 놓기 위해 온 것은 아닌 것으로 보여 집니다.”

루주의 눈이 둥그렇게 휘었다.

“좋아. 자리를 한 번 마련해 봐.”

“자리라시면……?”

“미래가 기대되는 사내라면 낚시를 한 번 해 봐야 하지 않겠어?”

사내의 입꼬리가 슬그머니 위를 향해 말려 올라갔다.

“알겠습니다.”

고개를 깊이 숙여 보인 사내는 다시금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비록 혼자 몸이지만 가문의 숙원도 풀었겠다. 동백산에서 모종의 수련을 마치자마자 외공의 완성과 실전감각을 끌어올리기 위해 무투장을 찾을 정도잖아?”

문으로써 일가를 이룬 가문이 아무 생각도 없이 무가로의 변신을 꿈꿀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닐 게다. 그렇다면 확실히 세공 전의 보석일 확률이 농후했다.

“잡아두거나, 최소한 연결 고리 정도는 만들어 줘야 할 것 같단 말이야.”

반짝.

하오문 정주 분타인 화운루의 루주 소가령의 눈에 어린 탐욕의 빛이 더욱 진해졌다.

***

쩔그럭.

“여기 배당금.”

텁석부리 수염의 사내가 두툼한 주머니 하나를 용무린에게 내밀었다.

“얼마지?”

“모두 합해 은자 오십 냥이지.”

은자 다섯 냥은 패왕을 상대로 승리를 거둔 일에 대한 상금이고 나머지 마흔 다섯 냥은 철전 30문을 스스로에게 걸었던 것의 배당금이었다.

은자 한 냥에 쌀이 다섯 섬이나 하니 상당한 액수의 돈을 한꺼번에 딴 셈이다. 150 대 1 배당의 위엄인 것이다.

“호오, 짭짤한데?”

용무린은 받아든 주머니를 살짝 흔들었다.

쩔그럭.

묵직한 주머니가 둔중한 소리를 내었다.

“확실하군.”

품속에 주머니를 넣는 용무린을 향해 텁석부리 수염의 사내가 고개를 갸웃해 보였다.

“세어 보지 않나?”

“방금 세어 봤잖아.”

조금 전에 주머니를 살짝 흔들었을 때 났던 소리를 통해 그 숫자를 파악했다는 뜻이었다.

“……!”

텁석부리 수염의 사내가 눈을 가느다랗게 떴다. 잠시 후 지나가듯 툭 입을 열었다.

“술 한 잔 할 텐가?”

“술? 좋지. 시간도 사흘이나 지났고 첫 상대였던 그 덩치도 쓰러뜨렸고 하니, 어쩌면 오늘쯤 이런 제의가 올 것도 같았어.”

한층 더 오묘해진 시선을 보내던 사내는 말없이 뒤돌아섰다. 성큼 성큼 걸음을 옮겼다. 옅은 미소와 함께 용무린은 그 뒤를 따랐다.

***

화운루의 가장 깊은 곳에 위치한 내실.

용무린은 아찔할 만큼 아리따운 여인과 함께 술상을 마주할 수 있었다.

“받으시어요, 공자님.”

쪼르륵.

용무린의 잔에 진한 소홍주가 차올랐다.

“오늘 정말 너무 멋졌답니다. 호호호.”

정말 너무 반했다는 듯 여인의 교태가 노골적이 되었다.

용무린의 단단한 팔을 살그머니 매만졌다. 새초롬하게 눈을 뜨며 살짝 가슴을 내밀었다.

용무린은 술잔을 들어 올린 후 바로 들이켜지 않았다. 재미있다는 듯 희미하게 웃었다.

“어서 드시어요, 공자님.”

“용연향에 소홍주라……. 소홍주에 들어가는 약재만 두어 가지 바뀌었으면 마시고 나서 야단나겠는데?”

소홍주는 약재를 넣어 함께 숙성시키는 황주다.

그런 만큼 몇 가지 약재를 특수하게 배합하면 아무도 모르는 사이 사람 하나 정신 나가게 만드는 것은 손쉬운 일이었다.

“……!”

이미 모든 것을 꿰뚫어 본 듯한 용무린의 말에 잔을 권하던 여인은 눈에 띄게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며 용무린은 말을 이었다.

“나는 용연향과 함께 하면 음약으로 변하는 약재 따윈 즐기지 않아. 그냥 잘 익은 죽엽청이나 한 잔 마시고 싶은데 말이야? 어때? 허심탄회한 대화는 그때나 해 보도록 하지?”

“저, 그, 그것이…….”

당황한 듯 여인이 말을 더듬었다.

그때였다.

드르륵.

문이 벌컥 열리고 보기 드물 정도로 아리따운 여인이 성큼 안으로 들어섰다.

“되었다. 넌 나가 보거라.”

입술이 유난히 요염하게 빨간 여인, 이곳의 루주인 소가령이었다.

“예, 루주님.”

여인이 살았다는 듯 냉큼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는 가서 죽엽청이나 내어 오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루주님.”

잠시 후 용무린의 요구대로 잘 익은 죽엽청이 술상 앞에 놓였다.

쪼르륵.

자신의 잔에 술을 따르며 소가령이 입을 열었다.

“과연 삼절일학. 학문으로 일가를 이뤘다는 비룡문의 소공자다운 식견이군.”

용무린은 대답 대신 죽엽청을 병째 입으로 가져갔다. 시원하게 들이켰다.

소가령이 용무린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았다.

“어떻게 눈치 챘지? 언제나 서책을 끼고 살았다더니, 그 잘난 책을 통해 알게 된 지식인가?”

“책을 통해서라기보다는 경험이라고 해야 옳겠지. 용연향에 몇 가지 약재만 섞어 먹이게 되면 효과가 아주 뛰어난 음약이 된다는 것은 그냥 책만 읽어서는 알아차리기 힘들거든.”

“경험? 웃기는군. 이제 겨우 약관의 나이, 얼마 전까지만 해도 백면서생이었던 주제에 경험이라…….”

“믿기 싫으면 믿지 않아도 돼.”

용무린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걸렸다.

자신감과 여유로움이 하나 가득 그 미소에 묻어났다.

“……!”

호기심 가득한 시선으로 용무린을 들여다보던 소가령의 입이 불쑥 열렸다.

“잔에 따르지 않고 병째 마시는 이유도 그래서인가? 술잔에도 수작을 부려 놓았을까 봐서?”

“후후훗.”

용무린은 그저 웃고 말았다.

“아무리 봐도 백면서생을 갓 탈피한 강호초출인데 식견은 노강호라니……. 앞으로 비룡문을 눈여겨보아 둬야 할 것 같군그래.”

“그래, 그래서 내가 지금 이렇게 온 거야.”

“……무슨 말이지?”

“무슨 말은? 본가가 무가로 전향 하려고 하니 혹시라도 나중에 무슨 덕이라도 볼까 싶어서 용연향에 소홍주를 준비했던 것 아니야?”

“그, 그것은…….”

소가령이 뭐라고 변명을 하려 했지만 용무린은 그 말을 냉정하게 잘라 버렸다.

“굳이 그런 걸 쓰지 않더라도 하오문에는 한 번 기회를 주고 싶어서 내가 이렇게 직접 찾아온 거야. 오늘도 그렇고, 앞으로도 며칠 더 무투장에서 재미 좀 봐야 할 것 같아서 말이지.”

한 번 기회를 주고 싶어서 왔다.

마치 커다란 은혜를 베풀고 있기라도 한다는 모양새였다.

잠시 어이가 없다는 듯 입을 쩍 벌리고 있던 소가령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강호초출 주제에 너무 건방지군. 굳이 무투장의 질서를 어지럽힌 죄를 묻지 않더라도 이 자리에서 널 죽일 수 있다는 걸 모르는 모양이지?”

씨익.

용무린의 입가에 흰 선이 쭉 그어졌다. 얼음장 같은 목소리로 한마디 툭 던졌다.

“해 봐!”

소가령의 눈이 동그래졌다.

차갑기 짝이 없는 용무린의 말이 계속해서 쏟아졌다.

“내 장담하건대, 정주 분타를 시작으로 1년 안에 하오문을 세상에서 지워 버린다고 약속하지.”

뿌드득.

“가, 감히!”

소가령이 노성을 터뜨렸다. 표독한 눈으로 노려보았다.

용무린은 자신만만해했다. 한 점 두려움도 없었다. 해 보려면 어디 한 번 해 보라는 듯 소가령의 눈을 마주 쏘아보고만 있었다.

소가령은 살짝 어이가 없어졌다.

더불어 한층 깊어진 시선으로 용무린을 천천히 살폈다.

‘도대체 무엇을 믿고?’

단순한 강호초출의 터무니없는 자신감만은 아닌 듯 보였다. 여인의 직감이다. 절대적인 그 무엇인가가 아득히 깊은 심연에 숨어 폭발할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좋아. 믿어 본다.’

어차피 나쁜 뜻으로 찾아온 것도 아니다.

용무린의 말처럼 이것은 어쩌면 기회인지도 모르는 것이다. 무림이란 본디 이처럼 우연한 만남에 맺은 간단한 인연이 미래의 막대한 이득이나 구원으로 왕왕 되돌아오는 법이었으니까.

‘물론 그 반대일 경우도 많긴 하지만…….’

지금 느낌은 무조건 전자라고 외치고 있었다.

결정했다. 투자한다.

“기회를 주려고 왔다면서 말을 참 예쁘게도 하는군. 그래서야 어디 거래가 되겠어?”

쪼르륵.

퉁명스럽게 말은 했지만 소가령은 죽엽청을 자신의 잔에 따라 용무린에게 건넸다. 화해의 뜻이다. 용무린은 그 잔을 기분 좋게 받아 마셨다.

“내 영업 방침이야. 누군가 날 억압하려 하면 나는 무슨 수를 쓰든지 간에 그걸 박살내지.”

신주오가를 입에 담지 않는다.

그 말은 곧 자신의 힘만으로 그렇게 만들어 줄 자신이 있다는 뜻이었다.

‘그만한 자신감이라면 좋아. 손해는 보지 않겠어.’

소가령은 이 순간 자신의 결단이 훗날 자신의 구명줄이 되어 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외공과 실전감각 단련은 언제까지 할 생각이지?”

용무린은 쑥스럽다는 듯 웃으며 답했다.

“후훗. 이야기가 빨라 좋군그래.”

“…….”

“보름. 그 정도면 충분해.”

“보름이라, 우리 손해가 꽤 큰데?”

오늘만 해도 배당이 150 대 1이었다.

“아직 잘은 모르겠지만 어지간한 녀석 붙여 놓아 봤자 다 깨질 것 같단 말이야.”

용무린이 계속해서 이긴다면 물론 배당이야 낮아질 터이지만 무투장이 이익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승부를 만들어갈 수는 없게 된다는 뜻이다.

용무린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입을 열었다.

“돈을 내게 걸어.”

“……훗. 그래, 그러면 되겠군.”

소가령은 결국 웃고 말았다.

***

다음날.

“흠. 꽤 많이도 변했군.”

날이 새도록 소가령이 넘겨준 서책을 읽던 용무린은 드디어 책장을 덮었다.

지난 70년 동안 변화한 무림의 대소사에 관한 내용이었는데, 신마대전 이후 새롭게 정립된 무림 세력 판도는 꼭 알아두어야 할 것들이었다.

“좋아, 길어야 십 년이다.”

신마 진무량 때와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이 무림을 접수해 줄 생각이다.

“이젠 일어나 볼까?”

밖으로 나선 용무린은 그 길로 정주 외곽의 한 대장간을 찾았다.

땅! 따당. 땅! 따당.

이른 아침이었지만 망치질 소리가 무척이나 맑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괜찮군.’

망치질하는 박자가 자로 잰 듯 정확했고 소리는 청명했다. 대장장이의 솜씨가 그만큼 뛰어나고 질이 좋은 쇠로 훌륭한 물건이 만들어지고 있다는 뜻이었다.

‘과연 자신만만하게 소개해 줄 만한 곳이야.’

그때였다.

산발한 머리로 열심히 쇠를 두드리던 대장장이가 용무린을 향해 눈을 부라렸다.

“왜 남의 영업장에 와서 쳐 웃고 지랄이야? 볼일 없으면 썩 꺼져.”

어지간하면 기가 질릴 법도 하건만 용무린은 그저 씩 웃었을 뿐이다.

“이놈이 근데?”

“쇠 두들기는 소리가 참으로 좋소, 노인장.”

용무린의 입에서 처음으로 존대가 나왔다.

잠시 멈칫했던 대장장이 노인의 입술이 슬그머니 비틀려 올라갔다.

“네깟 놈이 그걸 정말 알기나 해?”

용무린은 대답 대신 아무렇게나 놓여 있는 주방용 칼 하나를 들어 올렸다. 손가락으로 살짝 퉁겼다.

타앙.

맑은 쇳소리가 기분 좋게 대장간을 울렸다.

“이런 주방용 칼에조차 청명한 소리가 나질 않소? 양질의 쇠와 노인의 정성이 하나가 되었다는 뜻 아니오?”

피식.

“입은 살았군.”

노인의 입가에 떠오른 미소가 더욱 진해졌다.

“어디 한번 골라 봐.”

정말 그만한 안목이 되는 것인지 보겠다는 뜻이다.

노인은 용무린을 대장간 뒤에 위치한 작은 내실로 이끌었다. 쇠를 두드리던 곳과는 달리 내실은 온갖 종류의 무기들이 즐비했는데 한눈에 보아도 뿜어지는 광채와 예기가 보통이 아니었다.

씨이익.

용무린은 여인을 대할 때보다 더욱 환한 얼굴로 내실을 훑어보기 시작했다.

“청강검, 원앙검, 협봉검 이건 언월도…….”

타앙. 타앙.

용무린은 하나씩 들어본 후 무게를 가늠했다. 중심과 균형이 잘 잡혀 있는지 살폈다. 일일이 소리를 들었다.

“정말 좋군요.”

말과는 달리 용무린은 어떤 것도 선택하지 않았다.

“이게 전부가 아닐 텐데…….”

용무린은 말꼬리를 늘이며 노인을 바로 보았다.

피식.

“젊은 놈이 눈치는……. 원하는 게 뭐냐?”

“만들어 주시려오?”

“당연한 일 아니냐? 대장간에 만들어져 있는 것들은 보통 뜨내기나 평범한 수준의 녀석들을 위해서야. 정말 좋은 작품은 주문이 들어오면 그때 만든다.”

역시나 제대로 된 대장장이다.

“좋소이다. 한철은 충분합니까?”

“염려 마라. 뭘 원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네 녀석이 원하는 물건 정도는 충분히 만들 수 있다.”

“그렇다면 좋소. 내가 원하는 것은 한 자루의 도와 한 자루의 검이오. 크기와 무게는…….”

용무린의 설명을 듣던 노인의 눈이 점점 더 커졌다.

듣기만 해도 어떤 용도로 사용할 것인지 눈에 빤히 그려졌기 때문이었다.

“……정녕 네가 말한 그 도검을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단 말이냐?”

씨익.

“내가 사용하지도 못할 물건을 주문하는 멍청이로 보이는 게요?”

종종 그런 놈들이 있기는 하지만 이번에는 아니었다.

용무린은 자신이 주문한 무기들을 자신의 손과 발처럼 다룰 자신이 있었다. 신교 시절, 자신이 신마의 자리에 오르기 직전까지 사용했었던 병기였기 때문이었다.

“기간은 얼마나 걸리겠소?”

“열흘, 아니 보름. 그래, 최소한 보름은 있어야 해.”

딱 좋다. 이곳에서의 수련을 마치고 운가 애송이를 찾아갈 때 함께 하면 안성맞춤이다.

“선금이외다.”

쩔그럭.

용무린은 화운루에서 벌었던 은자 50냥을 통째 노인에게 넘겨주었다.

“이게 얼마야? 으응?”

주머니 안에 가득한 은자를 확인한 노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설마하니 그 정도의 거금을 선뜻 선금으로 건넬 줄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은자 오십 냥입니다. 얼마를 더 원하시는지 노인장께서 직접 말씀하시구려.”

“허…….”

노인이 기가 막힌다는 듯 탄성을 쏟았다.

은자 오십 냥이라면 내실에 있던 보통의 검들을 송두리째 살 수도 있는 거금이었기 때문이었다.

“정녕 나를 믿는가?”

“믿소. 검명은 장인의 의지와 정성이 담겨야만 맑은 소리를 내는 법, 그 정도의 솜씨를 지닌 장인은 절대로 거짓을 입에 담지 않는다고 알고 있소이다.”

반짝.

노인이 눈을 빛내며 입을 열었다.

“스물다섯 근의 한철과 그동안 임자가 없어 고이 모셔만 두었던 흑철 그리고 운철까지 깡그리 내어 놓지. 장담하네. 보기 드믄 녀석이 나올 게야.”

“하하하. 미리 감사하오, 노인장. 그런데 나머지 대금은 얼마를 생각하시는 게요?”

잠시 생각에 잠겼던 노인은 생각지도 못했던 말을 입에 담았다.

“……그건 그때 보고 이야기 함세.”

“알겠소이다. 그럼 보름 후에 뵙도록 하지요.”

고개를 잠시 갸웃했던 용무린은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고 화운루를 향해 움직였다.

***

보름이란 시간은 그야말로 쏜살같이 지나갔다.

“우와아아! 삼절일학 이겨라!”

“지랄! 오늘이야말로 분광검 종극이 이길 거라고!”

“맞아! 삼절일학의 실력은 거품이야. 언제나 마지막에 운 좋게 이겼을 뿐이라고!”

“저 자식, 순 운빨이라니까?!”

용무린의 승리를 점치는 사람보다는 여전히 그와 맞선 상대의 우위를 예상했다. 그만큼 용무린이 싸움에 있어서 수위 조절을 잘했다는 뜻이었다.

‘오늘은 50대 1인가?’

처음과 비교하면 많이 줄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벌어들인 은자를 한꺼번에 투자했으니만큼 대장간에 충분히 값을 치를 수 있을 것이다.

스르릉.

수염이 덥수룩하게 난 중년의 사내가 느릿하게 검을 뽑아들었다. 중단에 세웠다.

종극.

하오문 소속이 아닌 낭인으로 무공 수위는 이류라는 언질을 소가령으로부터 이미 들었다.

‘내공 수위만 이류야. 나머지는 달라.’

뿜어내는 기세로 보아 역시나 내공은 이류가 분명했는데 자세만큼은 일류를 넘어선 여유가 엿보였다. 그만큼 많은 싸움을 치러봤다는 뜻이리라.

‘최소 백전을 치른 사내라는 뜻.’

온실의 화초와도 같은 운가장의 다섯 애송이들보다 저런 사내가 오히려 훨씬 더 위험한 법이다.

‘하지만 나완 상관이 없는 이야기지.’

씨익.

마지막은 모처럼만에 싸우는 재미가 있을 것 같다.

팡팡.

“덤벼!”

용무린은 손바닥을 감싼 무쇠 수투를 두어 번 두들긴 후 강아지 부르듯 두어 번 까딱였다. 팔목에는 한 뼘이나 됨직한 길이의 무쇠 팔찌까지 둘러져 있어서 용무린은 누가 보더라도 장법이나 권법에 자신이 있는 애송이로 보였다.

피식.

그 정도 도발에는 걸려들지 않는다는 듯 상대는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을 뿐이었다.

‘시간 끌 것 없다. 빨리 끝내고 대장간이나 가 보자.’

이제는 수련도 마지막 단계다.

불사신기로 지금껏 근육과 뼈 그리고 혈맥을 단련해 왔으니 오늘은 마지막으로 피부까지 포함해 최종적으로 모든 것을 확인한다.

타닷. 후욱.

용무린의 신형이 경쾌하게 앞으로 쏘아졌다. 종극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차아!”

패액. 피피핏.

종극이 검을 짧게 여러 번 쳐냈다.

‘과연…….’

함부로 큰 동작을 펼치려 하지 않는다. 도법과도 흡사한 간결한 움직임으로 방어와 공격을 동시에 해냈다.

카앙. 카카캉.

용무린의 수투와 팔찌에 종극의 검이 부딪치며 마구 불똥을 피워 올렸다.

‘좋아, 좋아.’

마치 사나운 들개를 마주한 기분이다. 만족스럽다.

조금 더 재미를 보고도 싶었지만 공연한 일이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옜다, 먹이다.’

후욱.

용무린은 쫙 편 손바닥을 종극의 가슴을 향해 깊게 밀어 붙였다. 어서 빨리 보호받지 않은 곳을 향해 검을 뻗으라는 유혹이었다.

움찔. 타닷.

하지만 종극은 먹잇감을 바로 물지 않았다.

백전을 치른 노장임을 증명이라도 하듯 뒤로 성큼 물러났다. 혹시 모를 암수를 조심하는 거다.

‘이런 젠장. 이래서 대전 경험이 풍부한 놈들이 더 어려운 법이라니까?’

이럴 때 답은 하나다.

한계를 고스란히 드러낸 것처럼 보여주면 된다.

“하아압!”

용무린은 좋은 기회를 잡은 것처럼 그대로 종극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손을 마구 휘둘렀다.

파앙. 파파파팡.

때로는 손 그림자가 다음에는 손 날, 그런가 싶으면 주먹이 종극의 전신 요혈을 노렸다.

퍼억. 퍼퍼퍽.

용무린의 주먹이 두어 번 종극의 가슴에 꽂힌 순간,

키릭. 슈와악.

발밑에서부터 섬뜩한 빛이 쭉 솟구쳤다.

‘이런 여우같은 놈.’

양쪽 신발 끝에 날카로운 비수가 툭 튀어 나와 있다.

과거 용무린이 운룡장의 다섯 애송이들에게 그랬었던 것처럼 너무 깊이 들어온 까닭에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는 자세가 되자 드디어 참고 참았던 한 수를 꺼낸 것이다.

푹푹푹.

신발 끝에 돋아난 비수가 눈 깜박 할 사이 용무린의 복부에 세 번이나 꽂혔다.

씨이익.

종극은 그제야 차갑게 웃었다.

“잘 가라 삼절일학. 즐거웠다.”

암수라고 욕할 필요도 없다.

싸움에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바로 승리였기 때문이었다. 바로 이것이 소위 정파 나부랭이들과 나머지를 가르는 척도가 된다.

패애액.

짧게 끊어 치기만 하던 검이 커다랗게 호선을 그렸다.

그대로 용무린의 목을 노렸다.

씨이익.

용무린은 한 차례 서늘하게 웃어 보였다.

흠칫.

‘위험하다.’

종극의 위기본능이 요란하게 경고성을 발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완전히 힘을 잃은 줄로만 알았던 용무린의 주먹이 작살처럼 파고들었기 때문이다.

뿌아아악!

종극의 광대뼈가 움푹 꺼졌다. 주먹 한 방에 완전히 함몰된 것이다.

뻐버벅. 뚜드득. 와득.

연이어 수도와 주먹 그리고 팔꿈치가 명치와 심장어림 그리고 갈비뼈를 두들겼다. 뼈 부러지는 섬뜩한 소리가 커다랗게 무투장을 울렸다.

“허으으…….”

챙그랑. 터얼썩.

종극의 손에 들린 검이 힘없이 바닥에 떨어졌다. 마치 허수아비라도 된 양 옆으로 풀썩 쓰러졌다.

“나도 즐거웠다, 종극. 덕분에 피부의 단련 정도까지 다 확인할 수 있었다.”

약간의 정적이 흐른 다음 우레와 같은 함성이 터졌다.

“우와아아. 삼절일학 만세!”

“역시 내 운빨의 사나이라니까?!”

“아우, 미쳐……. 그냥 저 새끼에게 걸어 볼걸. 무려 50대 1 배당이었는데…….”

“와하하하! 고마워 삼절일학. 오랜만에 화운루의 기녀를 끼고 술 한 상 거하게 받을 수 있게 됐어.”

시답잖은 소리를 모두 뒤로 한 채 용무린은 자신이 걸어 두었던 금액에 대한 배당금을 찾아 화운루 지하 무투장을 서서히 벗어났다.

‘약속했던 석 달이 코앞이다, 운적풍. 이제 네 놈을 찾으러 가마.’

씨이익.

용무린의 입가에 섬뜩한 흰 선이 쭉 그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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