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질풍처럼 (7/104)

7.질풍처럼

성산의 행사를 앞둔 백리세가는 조용한 가운데 활기가 넘쳤다. 10년 전에는 기문진이 그저 반응만 보이고 말았었지만 올해에는 어쩌면 완전히 열릴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모두를 들뜨게 했다.

“이번에는 정말 열리겠지요?”

“그럴 가능성이 크다는 말씀을 어른들께서 하시긴 하시더구나.”

“이야, 그 안에는 정말 절대검신 조사님의 진신절기가 잠들어 있을까요?”

“아마도…….”

운적산은 말꼬리를 흐렸다. 대낮부터 술에 취해 있는 운적풍의 눈치를 봤다.

아직 어린 운룡장의 방계 애송이는 분위기 파악도 제대로 되지 않는 모양인지 자신의 바람을 적나라하게 늘어놓기 시작했다.

“올해는 성산의 진이 열려서 조사님의 진신절기를 얻었으면 좋겠어요. 그렇게만 된다면 우리도 조금쯤은 고수가 될 수 있을…….”

“이런 머저리 같은 놈!”

잠자코 술을 들이켜던 운적풍이 방계 애송이의 말을 툭 잘랐다. 거친 말을 가감 없이 내뱉었다.

“조사님의 진신절기를 찾으면? 그 분의 절기를 각 가문이 나눈다 해도 너 같은 놈에게까지 돌아갈 성 싶으냐?”

“소, 소장주님. 저는 그저…….”

“닥치고 지금 배우고 있는 산화장법이나 버벅거리지 않고 잘 펼칠 생각을 해. 알았어? 백면서생에게조차 개 박살이 난 주제에 무슨…….”

“예, 예 알겠습니다, 소장주님.”

“……!”

운적풍은 다시금 술병을 입에 물었고 아우인 운적산을 비롯한 방계의 식솔들은 슬금슬금 어디론가 사라졌다.

‘우라질!’

운적풍의 심사가 완전히 뒤틀어진 것은 바로 어제였다.

-예에? 파혼이요?

-그렇다는구나.

-대체 왜요? 제 어디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감히 파혼을 입에 담는다는 말씀인가요?

-나도 잘 모르겠다. 그저 백리소옥이 차라리 죽으면 죽었지 혼사를 치를 수 없다며 가출을 해 버렸다는데…….

태중혼약으로 맺어진 인연.

꿈만 같을 첫날밤을 기대해 왔는데 갑자기 파혼이라니!

‘개 같은 년. 내가 제 년의 시비를 조금 건드렸던 것이 기분 나빴다 이거지?’

아직도 이해할 수가 없다.

시비 따위, 조금 건드렸다 한들 뭐가 어쨌단 말인가?

-선대로부터 내려온 태중혼약이니 함부로 할 수 없다고 백리세가의 가주께 말씀드려 놓았다. 본가에도 연통을 띄웠고 백리세가에서도 따로 사람을 풀었다고 하니 너도 조신하게 기다려 보거라.

조신하게 기다려 보거라.

숙부 운전추의 마지막 말이 심장을 쿡 찌르는 느낌이다.

시비를 건드렸던 일과 용무린의 몸을 상하게 했었던 일을 싸잡아 하는 은근한 책망에 다름 아니다.

‘제길. 사람들 눈이 무섭다는 말로 기방 출입도 잘 하지 못하게 하면서 시비도 건드리지 못하게 하면 나보고 어쩌라는 거야?’

짜증나 돌아버리겠다.

이럴 때는 그저 살풀이라도 하듯 누군가를 흠씬 두들겨 패면 조금이라도 풀릴 텐데…….

“아! 맞다. 오늘이 석 달째 되는 날이었지?”

운적풍이 환해진 얼굴로 벌떡 일어섰다.

그랬다. 오늘이 바로 용무린이 자신만만하게 입에 담았었던 그 날이었다.

파삭.

“와하하. 잘 되었다.”

미친 듯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난 운적풍은 술병을 바닥에 던져 깨 버렸다.

“어서 와라 용무린. 내 친히 그 허약한 몸뚱이를 어루만져 주마.”

타닷. 후욱.

운적풍의 신형이 백리세가의 외원을 향해 쏘아졌다.

***

상관세가가 기거하고 있는 건물의 내실.

상관종명과 상관세가의 1장로, 운전추와 운룡장의 3장로가 얼굴을 맞대고 은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성산지약이 이제 열흘밖에 남지 않았네.”

“벌써 그렇게 되었습니다, 형님.”

상관종명과 운전추는 여전히 서로 잘 맞았다.

각 가문의 장로들까지 함께하는 자리에서조차 형님 운운하며 말을 주고받았다.

“올해는 어떨까요? 성산의 기문진이 10년 전과 같이 반응만 보일까요? 아니면 활짝 열릴까요?”

상관세가의 1장로 부일기의 말을 운룡장의 3장로 류장경이 받았다.

“떠도는 소문도 그렇고, 어쩐지 올해에는 좋은 일이 있을 것 같습니다. 하하하.”

떠도는 소문.

막연한 기대에 불과하지만 올해는 확실히 뭔가 느낌이 달랐다. 모두가 올해만큼은 성산지약의 봉인이 풀려 절대검신 독고황의 진신절기가 신주오가에 골고루 베풀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상관종명의 목소리가 한층 은밀해졌다.

“다들 잘 알겠지만 유념해야 할 게 있네.”

“예? 무얼 말입니까?”

“비룡장.”

“비룡장이요?”

“아우, 소리를 낮추시게.”

운전추의 목소리가 살짝 높아지자 상관종명이 주의를 주었다. 다시 말을 이었다.

“다들 알다시피 10년 전의 일을 제외하면 성산의 기문진은 계속해서 미동조차 하지 않았네.”

“그랬었지요.”

“하지만 용대명 가주가 한 가지를 바꾼 후 성산의 기문진은 반응을 보였지. 그것이 무엇인지는 기억하는가?”

기억 못할 리 없다.

“호심결의 내공. 우리 다섯 가문의 정예가 모두 호심결의 내공을 일으켜 방위를 밟았었…… 어헉!”

말을 마치던 도중 운전추가 무엇인가 깨달았는지 화들짝 놀랐다.

“그래…….”

그 생각이 옳다는 듯 상관종명이 고개를 깊이 끄덕였다.

“설마, 비룡문에서 호심결을 원했던 이유가 바로?”

“아하!”

“허어, 선비로만 알았던 용대명 가주가 실은 여우였던 것이로군요.”

부일기와 류장경이 탄성을 질렀다. 운전추와 생각을 같이 했다.

상관종명의 목소리가 더더욱 은밀해졌다.

“성산지약이 어떻게 끝이 날지는 아직 모르겠으나 모두가 유념해야 할 것은 백리세가나 벽력도가가 아니라 바로 비룡문이네.”

“그렇습니다, 형님. 용대명 가주에게서 절대로 눈을 떼서는 아니 되겠습니다.”

“맞습니다. 우리 모두가 함께 힘을 합쳐 용대명 가주의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해야 합니다.”

“한 순간이라도 놓치게 되면 이거 뒤통수 한번 제대로 맞을 것 같습니다.”

운전추와 부일기 그리고 류장경이 반짝반짝 눈을 빛냈다.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상관종명의 고개는 살짝 가로저어졌다.

“주시해야 할 사람은 용대명 가주가 아니야.”

“예에? 그러면 대체 누굴?”

상관종명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했던 이름 하나가 튀어 나왔다.

“용무린!”

“……!”

“우리 모두 용무린 그 아이를 눈여겨보아야 할 것이야.”

“하긴, 무슨 말씀이신지 잘 알겠습니다.”

운전추의 고개가 크게 끄덕여졌다.

상관종명의 말을 듣고 보니 새삼 석 달 전의 일이 생각났던 것이다. 비록 방계, 그 중에서도 하찮은 녀석들 다섯에 불과했지만 용무린은 혼수상태에서 일어난 허약한 몸으로 그들 다섯 모두를 짓밟았다.

“요즘 정주 시내에 묘한 소문이 돌고 있다더니 그러면 그것 역시 사실일 가능성이 있겠군요.”

“소문이라니요?”

부일기의 말에 류장경이 귀를 쫑긋 세웠다.

입에 담기 조금 저어되는 말이었는지 부일기는 풀썩 웃으며 말을 이었다.

“후훗. 보름 전부터 하오문의 정주 분타가 관리하는 무투장에 삼절일학이라는 별호의 애송이 하나가 나타났는데, 아슬아슬하긴 하지만 마지막에 가서는 언제나 승리를 거두었다고 합니다.”

“허허허. 이, 삼류 떨거지들이나 돈에 팔려 드잡이질 하는 하찮은 무투장에 비룡문의 소공자 용무린이 나타났다는 말씀인가요?”

류장경이 껄껄 웃었다.

잠자코 듣고 있던 운전추 역시 풀썩 웃고 말았다.

그들에게 하오문이 관리하는 무투장 경기 따위는 하등 흥밋거리가 되지 못했던 것이다.

오직 한 사람, 은연 중 운전추에게조차 형님 대우를 받아내었던 상관종명만이 속으로 다른 생각을 했다.

‘호심결. 그 안에 우리가 모르는 다른 무엇인가가 있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야.’

상관종명은 웃지 않았다.

조금 더 세상을 살았다는 경륜 때문이 아니라 제 아무리 내공 수위가 낮아도 실전을 많이 치르고 살아남은 무사는 언제나 저마다의 한 수를 감추고 있다는 것을 몸으로 숱하게 느껴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바로 강호지. 언제 어느 때고 방심하면 안 돼.’

서슬 파란 눈으로 떠난 용무린.

전신의 뼈가 아직 채 붙지 아니한 상태에서도 운룡장의 다섯 방계 아이들을 거꾸러뜨릴 정도의 근성이라면 무투장에서도 역시 훌륭하게 적응했을 것이다.

‘불과 석 달의 시간에 불과하지만 비장의 한 수쯤이야 충분히 배울 수 있는 시간이지. 자신이 입에 담았던 것처럼 은원을 정리하기 위해서든 아니면 성산의 지약에 참여하기 위해서든 곧 올 거야.’

오면 확실히 알게 될 것이다.

‘너와 네 아비가 감추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어디 한 번 펼쳐 보이려무나.’

상관종명은 어쩌면 운적풍이 애를 먹게 될 것이라는 생각을 살짝 해 보았다.

그때였다.

누군가 달려오는가 싶더니 뜻밖의 소식을 전했다.

“비룡문의 용무린 공자가 도착했다고 합니다. 한데, 운적풍 공자께서 어떻게 알고 나오셨는지 지금 당장 은원을 해결하자며 비무를 신청하셨습니다.”

“뭐얏? 우리 풍아가 또?”

“이런! 그토록 조신하게 좀 있어달라고 했는데…….”

운전추와 류장경의 얼굴이 확 구겨졌다.

지체 없이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는 지금 바로 가 보아야겠습니다, 형님.”

“그래. 함께 가 보세나.”

상관종명도 따라 일어섰다.

***

백리세가의 정문 앞.

이제나저제나 하는 마음으로 용무린을 마중 나와 있던 용대명과 진교운, 유백의 표정은 그다지 좋지 못했다. 살짝 굳어 있었다.

어떻게 안 것인지 운룡장의 소장주 운적풍이 득달같이 달려 나와 그들 앞에 버티고 섰기 때문이었다.

“무엄하구나, 감히 뉘 앞을 가로 막아선 것이냐?”

“이놈, 뒤로 물러나지 못할까?”

진교운과 유백이 싸늘한 목소리로 질책을 했지만 운적풍은 콧방귀도 뀌지 않았다. 두 사람을 상대할 수는 없지만 그뿐, 비룡문과 운룡장의 무력은 비교조차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운적풍. 무례하구나.”

약속을 잊지 않았다는 듯 미리 마중을 나왔던 벽소추의 손이 도를 잡아갈 정도였다.

“흥!”

운적풍은 그런 벽소추를 향해 한 차례 콧방귀를 뀌고 말았을 뿐이다.

꿈틀.

“감히!”

분노한 벽소추가 내공을 끌어올리기 시작할 때였다.

척.

정중하게 포권을 취하며 고개를 살짝 숙여 보인 운적풍은 주변을 돌아보며 한껏 느물거렸다. 자신의 행위에 대한 정당성을 밝혔다.

“스스로의 입으로 강호인의 은과 원은 확실하게 끝맺는 것이 좋다 하였습니다.”

운적풍의 눈이 비열하게 보일 만큼 둥그렇게 휘었다.

누가 봐도 실례였다.

제 아무리 은과 원을 앞세운다고 하더라도 같은 신주오가의 일원인 비룡문의 문주와 두 의제 앞에서 취할 행동은 아니었던 것이다.

“감히!”

“이놈!”

더는 참을 수 없었던 진교운과 유백이 성큼 나서려 했으나 용대명이 손을 살짝 들어 올렸다. 두 사람의 행동을 막았다.

피식.

‘어쩔 수 없을걸? 해원을 위한 비무를 벌이자고 먼저 지껄인 건 내가 아닌 그놈이란 말이야.’

기세등등해진 운적풍이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비룡문의 가주님 앞을 가로막은 것은 죄송하오나 소생은 개인 자격으로 이렇게 나선 것이 아닙니다. 해원이라는 이유로 도전장을 내민 용무린과 운룡장의 명예를 오롯이 짊어진 대표자로서의 저 운적풍이 나선 것입니다.”

교만하기 짝이 없는 말이다.

꿈틀.

진교운과 유백의 눈에 독기가 돌았다. 당장에라도 저 시건방진 아해의 버르장머릴 고쳐주고 싶었다.

잠자코 있던 용대명의 입이 불쑥 열렸다.

“운룡장의 명예를 오롯이 짊어졌다……. 거참, 운룡장의 명예 한 번 짓밟기 쉽구나. 누구나 너만 눕히면 된다는 뜻 아니겠느냐?”

운적풍의 눈꼬리가 위를 향해 휙 치솟았다.

바로 그때였다.

성큼성큼.

저 멀리에서 익숙한 얼굴 하나가 가까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용무린이다. 석 달이라는 시간을 기약하며 떠났던 그가 드디어 돌아온 것이다.

“크크큭! 꼴같잖은 놈 같으니……. 어디서 도 한 자루 구해 허리에 찼다고 으스대는 꼴이라니!”

용무린의 허리춤에 매어져 있는 한 자루의 도가 눈에 들어왔다. 그 모습이 어찌나 꼴사납게 보이는지 배알이 마구 뒤틀렸다.

“석 달 동안 수련한 것이 겨우 도법이란 말이지?”

어처구니가 없다.

정말 겨우 그 정도의 수련으로 운룡장의 소장주인 자신을 짓밟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는 말인가?

“무공이란 결코 일조일석에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거늘, 참으로 우습기 짝이 없구나.”

운적풍의 눈가에 진한 살기가 돌았다.

양손에 공력을 잔뜩 끌어 올리며 외쳤다.

“덤벼라, 용무린. 내 너에게 진짜 무예가 무엇인지 보여주도록 하마.”

그때였다.

용대명과 두 의숙 그리고 벽소추를 향해 옅은 미소를 머금고 다가서던 용무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당최 모르겠다는 듯 불쑥 입을 열었다.

“뭐지? 이 띨띨한 새끼는?”

완벽한 무시!

“……!”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러나 이내 용대명을 시작으로 진교운과 유백, 벽소추와 그 장면을 지켜보던 백리세가의 식솔들이 거의 동시에 웃기 시작했다.

“허허허.”

“쿡.”

“크크큭.”

“푸하하하.”

운적풍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게 달아올랐다.

“이, 이런 육시랄 놈. 네가 감히…….”

짝!

“아! 너로구나? 적풍인가 뭔가 했던 운룡장의 그 애송이!”

그제야 생각이 났다는 듯 손뼉을 쳤다. 용무린의 얼굴에 반가운 기색이 스쳐 지났다.

“미안하다, 애송아. 그땐 내가 비몽사몽간에 네 얼굴을 살짝 한 번 스쳐봐서 말이야. 하하하. 나도 참……. 짓밟아 줄 애송이 얼굴을 다 잊다니 원…….”

생각할수록 웃긴 듯 용무린은 배를 쥐고 웃었다.

하긴 그럴 법도 했다.

환생이란 사실을 깨달았던 충격과 심각한 부상에 시달렸던 당시의 용무린에게는, 운적풍과는 달리 직접 버르장머릴 고쳐 주었던 방계의 다섯 애송이 얼굴이 더 기억에 남아 있었으니까.

슥.

용무린은 운적풍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강아지 부르듯 까딱였다.

“알았으니까, 덤벼. 약속대로 짓밟아 줄게.”

“이놈!”

스파앙.

운적풍은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달려들었다.

파아. 쉬이이익-!

익히 한 번 겪어 보았던 산화장법이 펼쳐졌다. 용무린을 향해 쏟아졌다.

‘호오! 방계의 다섯 애송이들과는 확실히 다른데?’

그때는 노리던 곳이 확실히 느껴졌었지만 운적풍이 펼친 장법은 확연히 달랐다. 어떤 곳을 노리는 것인지 전혀 분간이 가질 않았다.

‘이렇게 보니 꽤 좋은 초식이네.’

실효성은 조금 떨어지지만 지극히 정파의 초식다운 고지식한 면이 눈에 쏙 들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교하고 묵직하며 빨랐다.

하지만 그뿐이다.

탓. 타닷. 휘릭.

용무린은 엇박자의 보법을 밟아 산화장법 속을 유유히 헤엄쳤다. 가볍게 젖혔다.

“우와악!”

자존심이 팍 상한 운적풍이 장법에 내공을 더 실었다.

후웅. 파파파파팡.

운적풍의 손 그림자가 스치는 곳마다 가죽 북 터지는 소리가 흘러 나왔다.

피식.

‘애송이. 곧이곧대로 초식만 펼칠 줄 알면 고수가 다 됐다고 생각하는 거지?’

강한 내공과 완벽한 초식.

물론 그 자체로 무섭기는 하지만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초식의 위력이란 지극히 상대적인 것이다. 그 사실을 모른다는 것이 바로 운적풍의 비극이었다.

‘어림없지. 바로 이렇게…….’

용무린은 산화장법 속으로 칼날처럼 세운 수도를 찔러 넣었다. 하나하나 버히기 시작했다.

파악. 튀-잉. 파팍.

둔탁한 소리와 함께 용무린의 수도는 산화장법을 때로는 맞받았고 때로는 흘려냈다.

투웅. 휘릭. 투투투-웅.

동백산의 흑웅과 덩치 큰 냥이 그리고 무투장을 두루 거치며 단련이 된 용무린의 수도는 부러지지도 터지지도 않은 채 일류의 내공이 걸린 운적풍의 장법을 적절히 비틀었다. 수월하게 흘려냈다.

그리고…….

스슥. 뻐어어억.

마침내 안으로 쑥 파고든 용무린의 수도가 운적풍의 명치에 푹 꽂혔다.

“커헉!”

운적풍의 입에서 단발마가 새어나왔다. 흠칫 몸이 굳었다. 잘게 몸을 떨었다.

씨익.

“이제 시작이야 이 새끼야!”

용무린의 수도와 장, 주먹과 팔꿈치 그리고 슬격과 각법이 운적풍의 몸을 마구 두들기기 시작했다.

쉬팡. 스파파팡.

“커헉. 큽. 어헉. 쿠웨엑.”

참으로 다채로운 비명이 쏟아졌다.

퍽퍽. 빠아악.

“우왁. 커흐…….”

운적풍의 몸이 폭풍을 만난 갈대라도 되는 양 이리저리 마구 흔들렸다. 그때마다 운적풍의 입에서 시뻘건 피가 툭툭 튀었다.

“내가 그랬지?”

뻐버벅.

“쿠에엑.”

“폭력이란 무엇인지 보여주겠다고?”

빠박. 뻐어억. 우두둑. 와드득.

“크아악!”

운적풍의 입이 쩍 벌어졌다. 죽는다고 비명을 질렀다. 피를 토했다. 하지만 용무린은 용서 없었다. 가차 없이 녀석의 몸을 두들겼다.

뻐버버버벅. 파파팡.

어느 한 순간 운적풍의 몸이 둥실 떠오르기 시작했다.

신기에 가까운 용무린의 타격 때문이다.

아래에서부터 위를 향해 짓쑤시듯 뿜어진 공격을 받을 때마다 운적풍의 몸은 점점 더 위로 떠올랐다. 운적풍의 발이 허공에 떠서 버둥거리고 있었다.

“우와아!”

“저렇게도 할 수 있는 거구나.”

“아으으. 끔찍해.”

“정말 지독하구나…….”

백리세가의 식솔들 중 몇몇은 운적풍이 용무린을 짓밟던 장면도 보았었다. 하지만 모두가 혀를 내둘렀다. 그때와 지금은 비교조차 할 수 없었으니까.

“이, 이 악독한 놈!”

“멈추어라!”

운전추와 상관종명이 도착했을 때가 바로 그즈음이었다.

타닷.

“이야아-하!”

스파아-앙.

운전추는 다짜고짜 용무린의 등을 향해 일장을 뻗어냈다.

빠르고 간결하며 강한 기운이 쭉 밀려들었다.

어지럽기까지 하던 운적풍의 산화장법과는 완전히 다른 수준의 장법이었다. 용무린이 누누이 말했었던 것처럼 오히려 이런 간결하고도 묵직한 공격을 자유자재로 펼칠 수 있는 사람이 훨씬 더 고수인 것이다.

“멈출 사람은 바로 너다!”

타닷. 촤아악.

암습 따위는 절대로 허용할 수 없다는 듯 추뢰검사 교진운이 앞을 가로 막았다. 부드럽게 뽑힌 검이 번개처럼 흘러 전면을 그었다.

파아앙.

운전추가 뿜어냈던 장력이 허무하게 사라졌다.

카앙. 따다다당. 퍼펑. 휘슷.

교진운의 검과 운전추의 손이 허공에서 한 차례 격렬하게 얽혀 들었다. 다들 절정의 무인답게 그 짧은 시간 동안 서로의 요혈을 노렸다.

물론 승부는 나지 않았다.

타닷. 스슷.

절대로 호락호락 뚫고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운전추는 결국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당신도 해볼 텐가?”

어느새 운룡장의 3장로 앞을 가로막아선 소요일영 유백이 두 손 가득히 공력을 운집시켜 놓고 있었다.

꿈틀.

분한 모양인지 3장로 류장경의 눈두덩이 사납게 요동쳤다.

터얼썩.

드디어 운적풍의 몸뚱어리가 바닥에 떨어졌다.

한 번 발동이 걸린 용무린은 그래도 멈추지 않았다. 하늘로 훌쩍 몸을 솟구친 다음 무게까지 오롯이 실어 떨어졌다. 운적풍의 얼굴을 향해 발을 뻗었다.

“마지막이다-아.”

흠칫!

흡족한 표정이던 용대명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어두워졌다. 다급한 목소리로 크게 외쳤다.

“아들아!”

감탄만 하고 있던 벽소추 역시 늦지 않게 나섰다.

“멈춰야 하네, 친구!”

그대로 얼굴을 짓밟으면 보나마나 함몰이 된다. 목뼈 역시 더는 버티지 못하고 부러질 것이다.

죽음이 코앞이다.

움찔!

“……!”

그제야 정신을 차린 용무린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완전히 끝내지 못한 것이 무척이나 못마땅하게 보였다. 하지만 다행이었다. 운적풍의 얼굴을 그대로 짓밟지는 않았다.

터억.

그 대신 운적풍의 얼굴에 발을 살짝 올려놓는 것으로 바꾸었다. 운적풍은 물론이고 운룡장의 고수들에게는 아예 죽이는 것보다 훨씬 더 한 치욕이었다.

“이, 이 악독한 놈!”

“아, 미안!”

깜박했다는 듯 용무린은 운전추를 향해 미안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내가 콱 밟아주겠다고 원체 장담을 해 놔서…….”

물론 미안한 표정과는 달리 발을 즉시 내리지는 않았다. 입으로는 계속해서 이죽거렸다. 운룡장 고수들의 속을 박박 긁었다.

“네가 감히! 놈! 풍아의 얼굴에서 발을 떼라! 당장!”

“이런 천둥벌거숭이 같은 놈이 정말?”

운전추와 3장로 류장경이 분노에 치를 떨었다.

“이미 정신을 잃은 것을 알면서도 계속해서 공격을 했습니다.”

“맞습니다. 실로 악독한 자입니다.”

“운룡장을 우습게 본 것이 분명합니다.”

삼십 명 가까운 운룡장의 고수들이 일제히 노성을 터뜨렸다. 용무린을 잡아먹을 듯 노려보았다.

하지만 용무린은 살짝 웃는 것만으로 그들의 살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 넘겼다. 모두를 한 번 쭉 훑어보았다. 가슴을 활짝 펴고 당당히 말을 이었다.

“하나만 묻지.”

“……?”

“내가 백면서생이었을 때, 전신의 뼈가 거의 모두 부러졌을 만큼 심하게 당할 당시에도 지금처럼 똑같이 분노했나? 말렸나?”

그럴 리가 있나?

다들 나직한 비웃음과 함께 분수도 모르고 나섰던 용무린과 그저 할 줄 아는 것이라고는 머리 쓰는 것밖에 없었던 비룡문 전체를 싸잡아 무시했다.

“아닌가 본데?”

“……!”

“그런데 왜 지금은 이렇게 난리지? 먼저 덤빈 것도 이 애송이, 나는 석 달 전에 받았던 은원을 그저 풀어낸 것뿐인데 말이야.”

용무린은 할 말을 다 마치고 나서야 운적풍의 얼굴에서 발을 떼었다. 나설 사람이 있으면 어디 한 번 나서 보라는 듯 운룡장 고수들을 스윽 훑어보았다. 마지막으로 운전추를 향해 입을 열었다.

“나와 저 애송이 사이에 있었던 은원은 이제 모두 해결이 되었다고 봅니다만…….”

히죽.

나설 사람이 있으면 당당하게 앞으로 나와서 은원을 다시 맺던지 아니면 시시비비를 가려보자는 투였다.

아드득. 빠드득.

운룡장의 일원들이 이를 갈았다.

운적풍의 얼굴에 발을 올려놓았던 사실이 너무나 치욕적이어서 참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운전추는 절제하는 것을 택했다.

“오냐, 좋다. 너와 풍아의 은원은 이것으로 모두 끝이 났다. 하지만 조심해라. 새로운 은원이 생긴다면 우리 역시 똑같이 갚아줄 것이다.”

“그러시든지…….”

꿈틀. 휙.

용무린의 비아냥에 잠시 반응을 보였지만 운전추는 끝까지 잘 참았다.

“지금은 참게. 곧 기회가 올 것이네.”

나직하게 귀를 파고드는 상관종명의 충고를 받아들였다.

“가자.”

그대로 뒤돌아섰다.

“숙부님! 어, 어찌 이대로?”

“복수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참을 수 없습니다.”

운룡장의 일원들이 목소리를 높였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저 묵묵히 숙소를 향해 움직였다. 녀석들도 결국 조용히 그 뒤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

거처로 돌아온 용무린은 모처럼만에 아버지 용대명과 두 의숙과 즐거운 시간을 가졌다. 동백산에서의 수련과 무투장에서의 일도 적당히 첨삭해서 말씀드렸다.

“허허허. 그랬구나. 참으로 수고 많았다. 애썼어.”

용대명은 그저 기특한 듯 용무린의 등만 토닥였다.

가식 한 점 없는 그 애정에 용무린의 심장이 덩달아 뜨거워졌다.

“아들아.”

“예, 아버지.”

“앞으로는 조금 더 손에 사정을 두는 것이 어떻겠느냐?”

운적풍을 짓밟았던 것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용무린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손에 사정을 두었습니다. 마지막 순간에 얼굴을 짓밟았다면 녀석은 분명히 죽었을 겁니다.”

“……!”

뜻밖의 대답이었는지 용대명의 눈이 살짝 커졌다.

잠자코 지켜보고 있던 교진운과 유백이 넌지시 나섰다.

“그건 잘했지만 이미 쓰러진 상대의 얼굴에 발을 올려놓은 것은 너무 심했느니라.”

“잘잘못을 떠나 그 아이 역시 한 사람의 무인, 무인에게 있어서 치욕이란 차라리 죽는 것보다 못할 때가 왕왕 있는 법이다.”

용대명이 두 의제의 말에 덧붙였다.

“의숙들의 말을 귀담아 들어야 할 게다. 과공은 비례라, 좋은 말임에도 과하면 독이 되는 법이지 않더냐? 하물며 같은 신주오가에 속한 사람과의 비무였다. 해원의 성격을 띠긴 했지만 너무 과한 것만은 사실이었느니라.”

“……!”

용무린은 토를 달지 않았다. 잠자코 용대명의 말을 곱씹었다.

“운적풍과 같은 아이를 간단히 이길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이었다면 따끔한 교훈을 내려주는 선에서 끝냈어야 한다고 아비는 생각한다. 알겠느냐?”

용무린은 여기에서 또 한 번 소위 ‘정파’ 무인들의 성향에 대해 깊이 알게 되었다.

‘마도인 같았으면 그저 죽이지 않고 살려 준 것만으로도 감사했어야 하는데 말이야.’

살아야 복수도 할 수 있는 법이다.

신마 시절이었다면 아예 복수의 싹을 자르기 위해서라도 운적풍의 목숨을 거뒀을 것이다. 그대로 얼굴을 박살냈거나 목뼈를 부러뜨렸으리라.

운전추와 운룡장 무인들이 일시에 덤볐으면?

‘당연히 깡그리 죽여 버렸지.’

물론 지금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아무리 절대의 경지를 밟았던 깨달음과 경험이 고스란히 내 것이라지만 내공 수위는 여전히 이류의 그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양보를 했었던 것인데…….’

그것조차 문제가 되는 상황이 선뜻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러나 생각과는 달리 용무린의 고개는 천천히 끄덕여졌다. 자신을 끔찍이 생각하는 용대명과 두 의숙의 진심을 알기에 내린 결정이었다.

“알겠습니다.”

“허허허. 알아들었다니 다행이구나.”

“녀석, 성정이 너무 급격히 바뀐 듯해 걱정했느니라.”

“혹여 네가 익히기 시작한 내공이 마공이라도 되는 줄 알고 이 의숙이 노심초사했다. 하하하.”

용대명과 두 의숙의 얼굴이 그제야 밝아졌다. 용무린도 덩달아 마음이 푸근해졌다.

‘저렇게 좋아하시다니! 살짝 숙이기 잘했네!’

용무린은 앞으로 운적풍과 같은 상황을 만들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제는 짧고 간결하게 패자. 운적풍 녀석처럼 마지막 순간까지 끌고 가서 고민하지 말고 대충 팔다리 하나씩만 후딱 빼앗고 용서해 주지 뭐.’

이야, 이거 너무 너그러운 것 아냐? 거의 보살이네, 보살.

순간적으로 그런 생각이 스쳤다.

‘에이, 좋게 생각하자. 좋은 게 좋은 거지 뭐.’

인심 쓸 때는 확실히 과감하게.

그것이 바로 용무린의 영업 방침 중 하나다.

“하하하. 어떠냐? 모처럼 아비의 술 한 잔 받겠느냐?”

“좋지요.”

오래지 않아 술상이 앞에 놓였다.

“하하하. 한 잔 받아라.”

용대명의 잔에 먼저 백주를 채운 진교운은 통쾌하게 웃으며 용무린에게 술을 따라 주었다.

“감사합니다, 숙부님.”

용무린은 그 술을 단숨에 꿀꺽 들이켰다. 그 모습을 진교운과 유백이 흐뭇하게 지켜보았다.

“하하하. 조카가 이제 무인이 다 되었습니다, 형님.”

“보기만 해도 흐뭇합니다. 하하하.”

“그러한가? 허허허.”

권커니 잣거니.

오늘의 충고로 인해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인지 짐작조차 못하는 술자리는 그렇게 깊어만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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