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마귀환 2권
서경 신무협 소설
1.성산괴사
천문 입구를 감싸듯 늘어서 있던 7층 석탑 아홉 개가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그 주변에 빼곡하던 아름드리나무들이 짓이겨지고 부서지고 잘려져 나갔다. 있는 줄도 몰랐던 쇠말뚝 36개가 땅에서 뽑혀 여기저기에 뒹굴고 있었다.
이곳에 펼쳐져 있던 기문진에 대해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누군가가 완벽하게 파훼해 버린 것이다. 한 뼘 두께에 여덟 자 씩이나 되는 쇠말뚝을 굳이 완전히 뽑아낸 것을 보면 확실했다.
“이, 이럴 수가!”
“어, 어떻게?”
“맙소사…….”
“대체 누가 이따위 짓을 할 수 있지?”
파괴된 기문진 때문인지 저 멀리 구릉 사이로 70년 동안이나 보이지 않던 공간이 보였다.
50여 장의 공간에 빼곡하게 자라난 복숭아나무와 사과나무 그리고 그 중앙에는 20여장 너비쯤 되어 보이는 연못이 있었고 그 옆에 작은 초옥이 존재했다.
너무나도 아름다운 곳이었지만 그런 아름다움을 입에 올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여기서 이러고 있을 일이 아닙니다. 어서 안으로 들어가 보십시다.”
“맞습니다.”
“어서 확인해 보십시다.”
“어서 빨리…….”
타닷. 파아앗. 휘리릭.
백리장천과 벽운성을 선두로 상관종명과 운전추가 새롭게 드러난 장소를 향해 신형을 날렸다. 나머지 신주오가의 일원들이 앞다투어 달렸다.
‘대체 어떤 개자식이 선수를 친 거야?’
분노에 가득 찬 얼굴이 된 용무린 역시 열심히 모옥을 향해 땅을 박찼다. 내가 마땅히 가져야 할 것을 어떤 빌어먹을 자식이 먼저 채간 듯해 기분 더러웠다.
도착해보니 연못 옆 모옥도 성하지 않았다.
문은 이미 박살나서 떨어져 나갔다. 내부에 있던 간소한 침구류는 어지러이 방 안에 흩어져 있었다. 내실 가운데 바닥에 커다란 구멍이 뻥 뚫려 있었다.
“누군가가 이 안의 것을 빼내 간 듯합니다.”
“맞습니다. 네모반듯하게 파여 있는 것이 분명 나무로 만든 함이나 궤가 들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 함과 궤안에 무엇이 들어 있었겠습니까?”
“빤하지 않습니까?”
운전추의 마지막 말에 모두 이를 바드득 갈았다.
그랬다. 모두의 생각은 같았다.
절대검신 독고황 조사의 유진.
하지만 그 유진은 정체불명의 누군가에게 도둑맞았다.
성산의 기문진 안에는 이제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을 개연성이 훨씬 더 크다.
“헉헉, 어떻게 된 일입니까?”
무공이 없는 탓에 뒤늦게 달려온 용대명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물어왔다.
“……!”
“……!”
아무도 대답을 하는 사람이 없었다.
용대명은 그들의 표정과 뻥 뚫려 버린 내실 가운데 바닥의 구멍을 보며 모든 것을 짐작했다. 한순간에 알아차렸다.
용대명의 입에서 장탄식이 절로 터져 나왔다.
“허어, 어떻게 이런 일이…….”
아찔했는지 순간적으로 휘청 몸이 흔들렸다.
그런 용대명을 운전추가 매서운 눈으로 쏘아 보았다. 마치 범인을 바라보는 듯 적의가 가득했다.
‘저 새끼 뭐야? 왜 저런 눈빛을 쳐다보는 거야?’
용무린이 운전추의 시선을 감지했다. 분노를 가득 담아 차갑게 노려봤다.
“……!”
용무린과 눈이 마주친 운전추는 인상을 마구 일그러뜨리는가 싶더니 이내 거칠게 고개를 돌렸다.
‘저걸 그냥 콱!’
그렇지 않아도 절대검신 독고황의 유진이 몽땅 털려 성질나 죽겠는데 신경까지 거스른다. 콱 모가지를 비틀어 버렸으면 속이 다 후련할 듯싶다.
백리장천과 벽운성이 다급한 목소리로 의견을 교환했다.
“이 안에 무엇이 들어 있었는지 우린 아직 모르오.”
“맞소이다. 당연히 처음 들어와 보는 곳이니만큼 이 주변 전체에 대해 주도면밀한 검사가 필요하오.”
상관종명과 운전추가 그 의견에 동조하고 나섰다.
“옳습니다. 한번 쭉 돌아보도록 합시다.”
“혹시 남아 있는 무엇인가가 있을 지도 모르니 잘 살펴보아야 할 듯합니다.”
용대명을 제외한 네 가문의 대표들은 제각각 가문의 고수들을 이끌고 주변 탐색에 나섰다. 마지막 한 가닥 희망을 지우지 않은 것이다.
꿈틀.
눈살을 한 번 찌푸렸던 용무린은 동참하지 않았다. 용대명 곁으로 다가갔다. 너무나 기가 막혔던 모양인지 용대명은 넋두리를 했다.
“미, 믿을 수가 없어. 대체 누가? 어떻게? 70년 동안이나 열리지 않았던 기문진을, 아니 대자연진을 어찌 이렇게 만들어 버릴 수가 있느냔 말이다.”
용대명은 그 말만을 자꾸 반복했다.
하긴, 어느 정도는 이해도 된다.
비룡문은 다른 신주오가의 일원들과는 달리 특별한 무공을 사사하지 못했다. 진법과 기관에 대한 지식이 무공을 대신하는 것이다.
당연히 비룡문의 진법과 기관에 대한 자부심은 저 유명한 제갈세가를 능가할 정도, 그런데도 지난 70년 동안 파훼하지 못했던 기문진이 저렇듯 완전히 박살난 모습은 큰 충격으로 다가왔으리라.
‘저까짓 게 대체 뭐라고…….’
용무린은 크게 상심한 용대명을 다독일 수밖에 없었다.
“잊어버리세요, 아버지.”
“……!”
“잊으셨습니까? 저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해서 수행한 석 달간의 결과가 운적풍과의 은원을 승리로 정리하고 염라옥수와 혈견사흉을 잡는 결과로 나타났습니다.”
그제야 용대명의 얼굴에는 표정이 돌아왔다.
용무린이 지금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인지 단숨에 알아들었던 것이다.
“우리 비룡문은 이제 무가로 거듭 날 것입니다. 너무 심려하지 마세요, 아버지.”
“아들아.”
그럼에도 용대명의 목소리에는 진한 아쉬움이 담겨 있었다. 완전히 지워내지는 못한 것이다.
십팔반 병기술을 제외한다면 이렇다 할 무공도 없는 가문이 아니던가? 용무린과 가문의 미래를 위해 절대검신 독고황의 절기가 꼭 가지고 싶었을 거다.
용무린은 용대명의 손을 지그시 잡았다. 목소리에 힘을 주어 말했다.
“약속합니다. 앞으로 십 년, 늦어도 그 안에 우리 비룡문을 중원제일문으로 만들어 보이겠습니다. 물론 제 힘으로 말입니다.”
씨익.
“오냐, 아들아. 나는 너를 믿는다.”
용대명이 그제야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는 사이 사방으로 흩어진 신주오가 무인들이 지르는 소리들이 전해 들렸다.
“특별한 것은 없습니다.”
“평범한 복숭아나무들입니다.”
“사과나무도 보통의 사과나무와 다를 바 없습니다.”
“연못에는 연꽃과 약간의 물고기가 있을 따름입니다.”
“그냥 평범한 물고기입니다.”
“주변에 약초로 사용될 만한 특별한 식물은 보이질 않고 있습니다.”
이야기책에 종종 나오곤 하는 그 흔한 동굴도 없었다.
기문진에 갇혀 외부와 차단되어 있었을 뿐 계곡 자체는 그야말로 평범함 그 자체라는 뜻이다.
용무린 역시 적잖이 실망을 했다.
‘젠장. 절대검신 독고황 그 인간의 은거지였다는 점을 제외하면 그냥 동네 뒷산이로군.’
평범한 은거지를 대체 왜 이렇게 엄청난 수고를 들여 기문진으로 둘러쌓아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여러 사람들의 입을 통해 이미 답은 나왔다.
“없어. 아무것도…….”
“이렇게 허탈할 수가 있을까?”
“이게 정말 말이 되나? 그토록 기다려왔던 순간인데.”
“이 넓은 곳에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니.”
신주오가 대표들의 허탈함은 이내 분노가 되었다.
기문진을 파괴한 정체 모를 침입자에게 모든 분노를 쏟아냈다.
“범인을 찾아야만 해.”
“어떤 놈인지 반드시 색출해내야 하겠지.”
백리장청과 벽운성의 씹어 뱉는 목소리를 상관종명과 운전추가 받았다.
“절대검신 독고황 조사님의 유진을 다시 회수해 와야만 합니다.”
“감히 신주오가를 욕보인 책임을 물어야 할 것입니다.”
말이야 그렇게 했지만 뾰족한 수는 없었다.
범인은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았고 남아 있었어야 분명할 조사의 유진은 파헤쳐졌다. 그런 판국인데 대체 어떻게 범인을 찾아 절기를 되찾을 것이며 복수를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용무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다 틀렸어. 정체도 모를 누군가를 찾아다닐 시간이라면 완전히 새로 태어난 내 진천수라도와 비연오식이나 손에 익히고 가다듬겠다.’
도둑맞은 절대검신 독고황의 절기가 못내 아쉬운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불사신기는 완벽한 형태로 내 머릿속에 들어있다.
‘어쩌면 절대검신 독고황 그 녀석도 불사신기를 3단계까지밖에 모르고 있을 가능성이 커!’
신교 천마조사동에 불사신기가 5단계까지 있었고 비룡문에 절대검신 독고황이 숨겨둔 불사신기는 겨우 3단계였으니 어쩌면 그럴 가능성도 있다.
‘돌아가자. 가서 아직 얼굴도 못 본 어머니도 뵙고 여동생도 만나 보자. 그런 다음에는 내 수련이나 하는 거야.’
운적풍이란 놈에게 당했다는 소식에 혼비백산 쓰러지셨다는 어머니가 뵙고 싶다. 용대명을 아버지로 인정을 해서 그런지 얼굴도 뵙지 못한 분이었지만, 생각만으로도 벌써 가슴 한 구석이 따뜻해져 왔다.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백리장천과 벽운성 그리고 상관종명과 운전추가 용대명 앞으로 다가왔다. 앞을 다투어 입을 열었다.
“용 문주님. 혹여 짐작이 가시는 것이라도 있습니까?”
“대체 천하에 누가 있어서 성산의 기문진을 저렇게 만들 수 있겠습니까?”
백리장천과 벽운성의 질문과 태도는 정말 궁금한 것을 묻는 듯했지만 상관종명과 운전추는 사뭇 달랐다. 목소리와 분위기가 마치 취조를 하는 듯했다.
“성산의 대자연진이 이렇게 허무하게 파훼될 성질의 것이었소이까?”
“이런 식으로 파훼될 수도 있는 것을 비룡문주께서는 정녕 모르고 계셨습니까?”
용대명의 안색이 싹 변했다.
‘이런 싸가지 없는 새끼들이 감히 누구에게 덤터기를 씌우려고 지랄이야?’
더불어 용무린의 눈에도 불길이 번졌다.
하지만 용대명이 한 발 빨랐다. 싸늘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향해 쏘아 붙였다.
“말씀을 삼가시오. 나 역시 황당하기 짝이 없어 정신이 없는 판이거늘 지금 두 분께서는 비룡문과 나를 이 일과 관련이 있다고 보는 것이오?”
백리장천과 벽운성 역시 용대명 편에 섰다.
“이 사람! 말을 삼가게!”
“내 일전에 분명히 못을 박아 두었을 텐데? 일의 사안이 중하다! 공연한 중상모략은 삼가라, 두 사람!”
상관종명은 바로 꼬리를 내렸다.
“누가 뭐라고 했습니까? 다만 오늘의 일이 너무나 해괴하여 물어보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
“……!”
그 점은 마찬가지 생각이었는지 백리장천과 벽운성의 시선은 다시 용대명에게로 쏠렸다. 운전추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지만 용대명은 대답을 시작했다.
“역대 비룡문주들께서도 각고의 노력을 해 보았지만 지금껏 파훼할 엄두를 내지 못하던 대자연진입니다. 10년 전에야 비로소 한 가닥 희망을 보았고 오늘 그간의 노력을 확인해 볼 생각이었지요.”
있다고 말로만 들어왔던 성산의 대자연진은 10년 전에야 비로소 그 진체를 살짝 드러내었다. 하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라는 듯 완전한 실체는 드러내지 않았다.
그렇게 절치부심한 세월이 다시 10년.
수많은 밤을 새워 마련한 해결책은 써보지도 못하고 이 지경이 되었다.
“실로 엄청난 무공의 소유자일 것입니다. 불과 1장 어림 높이의 작은 석탑이라지만 아홉 개나 되는 것을 불과 하룻밤 만에 이렇게 만들었습니다.”
가만히 듣고만 있던 백리세가의 장손 백리천월이 고개를 끄덕였다. 소리 높여 신빙성을 더했다.
“맞습니다. 성산지약을 앞두고 저와 세가의 무인들이 어제 답사를 했었습니다. 그때가 술시 초, 그때까지만 해도 성산에는 아무런 변괴도 없었습니다.”
“허어.”
“흐음.”
백리장천과 벽운성의 입에서 무거운 신음이 흘러나왔다.
용대명이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터지고 짓이겨지고 베인 나무들만 해도 그렇습니다. 대자연진의 힘을 받아 일반 나무들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단단함을 지녔을 터인데 단숨에 터지고 짓이겨지고 베여 버렸습니다.”
듣고 있던 모두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흔적을 살펴보면 장정 서넛이 두 팔을 벌려야 겨우 맞닿을 듯 두꺼운 나무들이 놀랍게도 일수에 터지고 짓이겨지고 베어버린 듯 깔끔했다.
“더 놀라운 것은 바로 저 쇠말뚝입니다.”
모두의 시선이 아무렇게나 바닥을 나뒹구는 쇠말뚝에게로 향했다. 쇠말뚝들은 흉수의 무지막지함을 온몸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한 뼘의 두께에 무려 여덟 자나 되는 녀석들입니다. 표면에 묻어 있는 흙과 돌가루를 보면 거의 머리까지 박혀 있었다고 봐야 합니다. 한데 흉수는 박아 넣기도 어려운 저것들을 완전히 뽑아내 버렸습니다.”
쇠말뚝으로 시선을 돌렸던 모두의 전신이 가늘게 떨렸다.
36개의 쇠말뚝들 중 4개는 흙 대신 돌가루가 묻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놀랍군. 흙이 아니야.’
‘돌, 아니 암반에 박혀 있던 것들이다.’
‘세상에……. 흙도 아닌 암반에 박혀 있던 것을 뽑아내 버렸어.’
‘맙소사. 대체 내공이 얼마나 강하기에…….’
백리장청과 벽운성 그리고 상관종명과 운전추의 얼굴이 하얗게 변했다. 암반에 박힌 쇠말뚝을 뽑기 위해서는 도대체 얼마나 내공이 강해야 하는지 상상조차 힘들 정도였기 때문이었다.
용대명이 결론을 내렸다.
“대자연진을 단숨에 깨뜨릴 정도로 진법에 관해 해박한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암반에 박혀 있던 쇠말뚝을 뽑아낼 수 있을 정도로 막대한 내공을 지닌 자, 그자가 바로 절대검신 조사의 유진을 훔쳐 달아난 흉수입니다.”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
진법에 관해 해박한 지식을 지닌 자야 찾으려 들면 몇몇 용의선상에 올릴 수도 있겠지만 그 정도로 막대한 내공을 지닌 사람은 도저히 상상조차 가지 않았던 것이다.
‘무림맹주쯤 되면 가능할까?’
‘소림의 장문방장이라면?’
‘현 무림의 이름 높은 백대고수라면 몇이나 모여야 가능한 일일까?’
모두가 비슷한 고민에 빠진 가운데 오직 한 사람 운전추만이 묘한 시선으로 용대명을 바라보았다.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들었다.
‘용대명. 비룡문의 문주. 조사님으로부터 무공 대신 진법과 기관지학을 사사한 가문의 문주로서 과연 이 일에서 자유로운가?’
물론 비룡문의 사내들이 음양쇠맥증을 앓고 있음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진법이라면 이 세상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사람이 아닌가?
‘진법은 용대명 문주가 지시하고 파훼는 다른 자들이 맡아준다면 가능하지 않을까?’
-성산에 가거든 용대명과 그 자식인 용무린의 행동을 잘 살펴라. ……너무나 수상쩍다. 절대 그들을 눈에서 놓치지 마라.
어젯밤 자신을 찾아왔던 둘째 형 운위영의 말이 자꾸만 머릿속을 간지럽혔다.
고민에 빠진 운전추의 모습이 다시금 용무린의 눈에 들어왔다.
‘저 개자식이 왜 자꾸 저러지? 콱 저 재수 없는 눈깔을 파 버릴까 보다.’
용무린의 눈이 갈수록 번들거리기 시작했다.
‘어디 걸리기만 해라. 나는 아버지와는 다르다는 걸 뼈저리게 느끼도록 만들어 주마.’
신주오가의 일원이고 지랄이고 다 필요 없다.
나는 그렇다고 치고 아버지께 무례하거나 싸가지 없이 굴면 국물도 없는 거다.
‘그건 그렇고, 정말 궁금하긴 하다. 어떤 얍삽한 새끼가 훔쳐갔을까?’
아무렇게나 나뒹구는 쇠말뚝을 보며 용무린의 머리는 바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범인이 누구일까 고민하던 용무린의 뇌리에는 자연스럽게 전생의 자신이 떠올랐다.
‘전생의 나였다면 가능했을까?’
무력이란 부분에서 첫손을 꼽자니 신마라고까지 불렸던 자신의 전생이 생각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흐음 보자, 석탑 아홉 개에 아름드리나무 수십 그루. 거기에 더해 한 뼘 두께에 여덟 자 크기의 쇠말뚝 36개를 하룻밤 사이에 완전히 뽑아낸다?’
한참을 생각한 끝에 용무린의 고개는 천천히 끄덕여졌다.
‘더럽게 힘들긴 하겠지만 가능하긴 할 것 같구나.’
9성의 규천마력을 몽땅 이끌어낸 후 대천자마공의 힘과 천마진경의 힘까지 닥닥 긁어모아 한꺼번에 집중하면 가능할 것 같았다.
제 아무리 진법의 힘을 받았다지만 석탑과 나무야 솔직히 별 것 아니다. 문제는 바로 쇠말뚝, 36개나 되는 – 그 중 4개는 무려 바위에 박혀 있었다. - 놈의 것들을 뽑아내기 위해서는 최소 그 정도는 되어야만 한다.
‘하지만 전생과는 달리 지금 나의 내공은 이제 겨우 일류에서 노는 처지……. 그렇다면 어떤 인간인지는 몰라도 전생의 나와 비슷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거잖아?’
대체 누가 그런 강대한 능력을 지니고 있을까?
자연스럽게 한 사람의 이름이 떠올랐다.
절대검신 독고황.
‘흥, 내가 가능한데 그 재수 없는 자식이 저딴 걸 못 할 리 없겠지?’
당연히 가능하겠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옛날 이야기다.
신마대전이라 불렸던 그 전투가 끝난 후 절대검신 독고황도 불과 3년을 더 살았을 뿐이다.
‘그 기생오라비 같은 늙은이가 무덤에서 뛰쳐나오지 않는 한 어림도 없는 이야기이고……. 아, 미치겠다. 대체 어떤 자식이지?’
누군지는 몰라도 전생의 나였던 신마와 그보다 코딱지만큼 더 강하다고 볼 수 있는 절대검신 독고황과 엇비슷한 능력을 지닌 누군가가 이 세상에 버젓이 살아 숨 쉬고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참 이상도 하지?
‘훗. 어떤 새낀지 좀 하는구나.’
막강한 무위를 지닌, 내가 점찍은 먹이를 훔쳐간 미지의 때려죽일 놈이 있다는 생각이 들자마자 갑자기 불같은 호승심이 치솟았다.
‘감히 이 신마님의 먹이를 네가 날름 훔쳐 먹고 날랐다 이거지?’
좋다, 이거야.
‘어디 한번 해 보자.’
그 정도 능력을 지닌 녀석이라면 언제고 만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규천마력은 깨끗이 잃었어도 절대검신 독고황의 불사신기가 내게 있다. 거기에 더해 나는 절대검신 독고황의 절기를 이미 몸으로 한 번 겪어 보았지.’
전생에는 심장에 칼 맞는 바람에 파훼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궁금해만 하다 죽었지만, 이제는 그때와는 상황이 완전히 다르다.
‘절대검신 독고황 그 자식이 썼던 초식이 어떤지, 어떻게 내 심장에 칼을 박아 넣었는지 아직도 어제 일처럼 눈에 선하다 이거야.’
운 좋게도 내 나이는 이제 겨우 21.
절대검신 독고황의 절기를 훔쳐 간 놈이 죽어라고 익혀 전생 시절 독고황 녀석과 똑같은 경지에 다다른다고 해도 파훼법 찾을 시간은 충분하다.
‘전생에는 속절없이 칼 맞고 죽었지만, 이번에는 반드시 되갚아 준다.’
전의를 불태우는 용무린이 놓치고 있는 것이 한 가지가 있었다.
전생의 자신이었던 신마와 절대검신 독고황과 엇비슷한 능력을 지니고 있을 것이 빤한 흉수가 어째서 굳이 대자연진을 깨고 이곳에 들어와 독고황의 절기를 훔쳐갔느냐 하는 점이다.
그 정도 능력을 지닌 자라면 자신의 절기에 대한 자부심이 하늘을 찌를 터인데, 어째서일까? 어째서 굳이 절대검신 독고황의 절기를 필요로 했던 것일까?
그때까지 생각을 정리한 벽운성이 입을 열었다.
“일단 돌아들 가는 것이 좋겠군. 의견을 모아 이 일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정하도록 하자고.”
백리장청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렇게 하는 것이 좋겠네. 우리 백리세가가 이번 성산지약의 주최자이니 다시 우리 가문으로 가서 의견을 나누도록 하는 것이 좋겠어.”
“허, 어떻게 이런 일이……. 알겠습니다. 가서 의논을 하도록 하지요.”
상관종명은 대뜸 동조했지만 운전추는 달랐다.
“운룡장은 이대로 복귀를 하겠습니다.”
“응? 아우! 어째서?”
뜻밖이었는지 상관종명조차 눈을 동그랗게 떴다.
운전추는 슬그머니 어제 운위영이 다녀간 일을 알렸다.
“실은 어젯밤에 본가에서 사람이 다녀갔습니다. 성산지약의 일이 끝나면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그대로 가문으로 복귀를 하라는 가주님의 명이 있었습니다.”
“허어.”
“그래도 일이 이 지경인데…….”
“가주님의 명이 지엄해서 어쩔 수 없을 듯합니다. 저희 운룡장은 일단 돌아가서 가주님께 이 일을 아뢴 후 합류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후우, 어쩔 수 없지.”
“알겠네. 그렇게 하시게.”
운전추는 그대로 돌아섰다.
성산으로 출발하기 전에 이미 모든 준비를 마쳤는지 안휘성으로 방향을 잡았다. 의식만 회복했지 아직은 운신이 어려운 운적풍에게도 역시 같은 조치를 취해 놓았으리라.
“그러면 다음에 또 뵙도록 하겠습니다.”
“살펴 가시게.”
운전추를 시작으로 운룡장의 고수들은 한동안 정들었던 다른 신주오가의 일원들과 인사를 나눈 후 본가를 향한 길을 떠났다.
잠시 그들이 떠나가는 모습을 지켜보던 용대명 역시 작별 인사를 건넸다.
“저희 역시 이대로 돌아가도록 하겠습니다.”
“아니, 용 문주!”
“용 문주까지 어째서?”
용대명이 씁쓸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아시다시피 본문은 무력보다는 기관과 진법에 특화된 가문이 아니겠습니까? 흉수를 찾는 일에는 그리 도움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
“……!”
백리장천과 벽운성의 고개가 천천히 끄덕여졌다.
용대명의 말이 바로 이어졌다.
“하지만 본문 역시 신주오가의 일원, 조사의 유진을 찾아와야 하는 중대차한 일에 빠질 수만은 없는 일!”
용대명의 시선이 용무린에게로 향했다.
“가문의 멍에를 홀가분하게 벗어던진 무린이가 함께할 것입니다. 풍아에게 당해 사경을 헤맨다는 말에 내자의 상심이 크니 함께 돌아가 안심을 시키고 있겠습니다. 하니, 결정이 되는 대로 기별을 주십시오.”
“오! 그러면 되겠습니다.”
“상심이 크셨을 터인데, 당연히 그리하는 것이 도리이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결정이 되면 따로 연통을 넣어 드리도록 하지요.”
용무린의 의사와는 전혀 상관도 없이 일이 결정되었다.
‘잘하셨어요, 아버지.’
하지만 용무린은 가만히 웃어 보였다.
솔직히 잘 판단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내세울 무인이라고 해 봐야 겨우 용무린 한 사람에 불과한데 추격대 꾸미는 회의 참여에 무슨 의미가 있으며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공연히 끌려 들어가는 모양새밖에는 되지 않는다.
‘앞으로는 달라지겠지만 지금은 조용히 저들의 뜻을 맞추어 주는 편이 좋아.’
그래야만 일이 미제로 남아도 책임을 벗는다.
게다가 추격대를 꾸며도 당장은 답이 나오지 않는 상황이다. 그 무지막지한 무력의 소유자가 하수들 눈에 뜨일 만한 흔적을 줄줄 흘리며 가지는 않았을 것 아닌가?
‘그 시간에 차라리 내실을 다지는 거야.’
가문의 사내 전체에 드리워진 천형 음양쇠맥증, 나 홀로 벗어나면 무엇을 하겠나? 혼자서만 벗어나 보았자 사기그릇처럼 불안할 뿐이다. 혼자만의 힘으로는 쉬지도 못한 채 동분서주하다가 판나 죽는다.
‘싹 다 뜯어 고쳐야만 해.’
호심결.
정확히는 불사신기의 입문결에 불과한 것을 다르게 알고 있는 것에 불과하지만, 그것을 완전한 형태의 것으로 바꾼 후 수위를 조금 낮추어 베풀 생각이다.
‘가장 먼저 아버지를 시작으로 싹 다 배우도록 만들어 버릴 거야.’
숙부들과 조카들 그리고 사촌들까지 모두 다 익히도록 만들 생각이었다. 그래야만 홀가분하게 활보를 해도 안심이 되리라.
“그러면 다음에 뵙도록 하겠습니다.”
“살펴 가시길…….”
“아쉽군요. 이제 언제나 뵙게 될지 짐작조차도 가질 않습니다, 그려.”
백리장청과 벽운성의 아쉬움 가득한 인사에 용대명은 밝게 웃어 보였다.
“우리 무린이가 함께 하는 한, 비룡문은 언제나 여러분과 함께입니다.”
“허허허. 맞습니다.”
“우리 신주오가는 언제나 함께할 것입니다.”
“그럼…….”
두 사람의 배웅을 받으며 용대명은 뒤돌아섰다.
용무린이 그 뒤를 따랐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으응?’
무엇인가를 발견한 용무린의 눈꼬리가 살짝 위를 향해 치솟았다.
‘상태가 왜 저래?’
대자연진의 주요 축이었던 거대한 아름드리나무.
‘분명히 어제 하룻밤 사이에 박살이 난 것이라고 하지 않았나?’
한데 절단면과 터져나간 면이 벌써부터 거뭇하다.
‘저 정도라면 분명히 이레 이상은 지났어야 보일 수 있는 색일 텐데?’
정말 너무 이상했다.
두근두근.
더불어 심장이 주체할 수 없을 만큼 크게 뛰기 시작했다.
나무의 색이 왜 그런 것인지 어쩐지 알 수 있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설마…….’
절단면에 손을 직접 가져다 댄 후 가늠을 해 볼 수만 있다면 더 확실해지겠지만 용무린은 결국 내처 걸음을 내딛고 말았다. 상관종명의 시선이 계속해서 따라 붙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아! 비룡문도 떠나는구나.’
열심히 성산 내부를 돌아다니며 혹시나 단서라도 될 만한 것이 있을까? 눈을 빛내던 백리소옥의 발걸음이 그대로 멈춰졌다. 그녀의 눈에는 용무린의 뒷모습이 하나 가득 들어와 있었다.
백리소옥의 눈이 아련해졌다.
‘잘 가요, 고맙고 미운 사람…….’
왜 이렇게 심장이 아려오는지 모르겠다. 그저 안타깝기만 했다.
백리소옥은 시선을 하늘로 돌렸다.
‘나도 떠나야 할 것 같구나.’
아버지인 백리장천의 결심에 따라 살짝 달라지겠지만 신주오가의 단합을 생각하면 달리 생각이 바뀔 여지는 많지 않아 보였다.
‘아미산. 내가 가야할 곳.’
비구승이 될 생각은 아니다. 속가의 제자로 들어가 수련을 할 생각이었다.
‘어쩌면 그것도 나쁜 생각은 아닐지도…….’
일말의 아쉬움도 없이 떠나가는 용무린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백리소옥의 마음속에 비구승에 대한 일말의 긍정이 스쳐 지났다.
***
비룡문과 운룡장을 제외한 세 가문은 다시 백리세가에 모였다. 대회의실에 수뇌부들이 모여 앉아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해 의견을 모았다.
흉수를 밝혀 조사의 유진을 되찾아야만 한다는 생각은 같았으나 솔직히 그 방법에 있어서는 딱히 이렇다 할 방법이 없었다.
추적 전문가가 세가에 상주해 있는 것도 아니었으며 정보나 인력도 모두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별 수 없이 이 사실을 외부에 알린 후 도움을 받기로 했고 그 대상은 개방으로 결정이 되었다. 불과 며칠 전 염라옥수와 혈견사흉의 일로 함께 손을 잡았던 전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연락을 받은 화운장로가 총타로 돌아가다가 말고 급히 발을 돌렸다. 백리장천과 벽운성 그리고 상관종명과 함께 성산이라 부르는 천문으로 향했다.
화운장로의 눈이 부릅떠졌다.
“마, 마공의 흔적!”
짓이겨지고 베인 나무의 단면을 보자마자 화운장로가 내뱉은 첫마디였다. 화운 장로 역시 용무린과 같은 것을 보았던 것이다.
“크흠. 역시 그런가?”
“아니길 바랐거늘…….”
백리장천과 벽운성의 고개가 크게 끄덕여졌다.
화운장로가 도착하기까지 나름대로 조사할 때 같은 것을 보았다. 여러 의견이 분분했지만 역시 그런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대체 어떤 악랄한 마공이기에 이런 짓을 벌일 수 있다는 말입니까?”
“지금이야 우리 신주오가의 무인들이 조사하고 다니느라 많이 훼손되었지만 처음에 확인했을 때는 분명히 한 사람의 흔적이었습니다.”
“제 아무리 마공이라지만 한 사람의 힘이 이토록 거대할 수 있다니…….”
화운장로의 눈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흥분한 듯 날카로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 흔적만 가지고 어찌 어떤 마공인가까지 가늠할 수 있겠소이까?”
중요한 것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과거 신마대전을 벌였던 마교의 교주 이상 가는 마종이 새로이 등장을 했다는 것이 중요하외다.”
“……!”
“……!”
모두의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신주오가를 제외하면 있는 줄도 잘 몰랐을 성산의 대자연진, 그 대자연진을 겨우 하룻밤 사이에 완전히 파괴해 버릴 수 있을 만큼의 힘을 지닌 마공의 소유자.
그 무서운 마공의 소유자가 절대검신 독고황의 절기를 훔쳐 달아났다. 그 말은 곧 독고황의 유진만 없다면 그 누구도 자신을 막지 못한다는 뜻과 다를 바 없다고 보아야 할지도 모른다.
“보통 일이 아니외다.”
화운장로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방에 이 일을 보고한 후 나는 이 길로 천기자 선배를 찾아가겠소.”
“천기자!”
“아! 그분이 있었지?”
백리장천과 벽운성이 반색을 했다.
상관종명도 놀란 목소리로 되물었다.
“바람과 구름 같은 그분의 행방을 개방에서는 알고 있다는 말씀입니까?”
화운장로의 고개가 무겁게 끄덕여졌다.
“그렇소. 문전박대할 것이 빤하지만, 그래도 이대로 있을 수는 없소이다.”
돌아서는 화운장로를 향해 백리장천과 벽운성이 급이 입을 열었다.
“본가의 사람이 함께 해도 되겠소이까?”
“벽력도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소가주인 벽소추를 파견하고 싶소이다.”
“상관세가도 참여하겠습니다. 일이 일인 만큼 신주오가의 일원이 함께 해야 옳다고 생각합니다.”
틀린 말은 아니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화운장로의 고개가 크게 끄덕여졌다.
“당사자인 신주오가가 빠지는 것은 아니 되겠지요. 알겠소이다. 최소한의 인원과 함께 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백리세가에서는 소가주인 백리천월이, 벽력도가에서는 벽소추가 그리고 상관세가에서는 상관웅이 합류하기로 결정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