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도약의 발판
호북성으로 진입하자마자 수로를 택해 이동한 비룡문 일가는 이레 만에 가문의 근거지인 성도 무한에 도착할 수 있었다.
두근두근.
‘이것 참…….’
비룡문이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용무린의 심장은 마구 두방망이질 쳤다.
‘어머니라니! 여동생이라니!’
죽기 전까지 그 흔한 가족도 없었고 제자도 두지 않았었다. 한데 지금은 아버지로도 모자라 어머니와 여동생이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허허허. 어떠냐? 오랜만에 돌아오니 기분이 조금은 남다르지 않으냐?”
“예, 아버지. 조금, 그렇습니다.”
용무린은 멋쩍은 듯 웃었다.
확실히 용대명의 말대로 기분이 남달랐다.
‘이 기분의 정체는 대체 뭐야?’
말로는 형언할 수 없는 설렘과 정체모를 그리움 그리고 기대감이 용무린을 휘감았다.
‘어머니는 대체 어떤 분이실까?’
내가 운적풍이란 애송이에게 당해 사경을 헤맨다는 소식에 어머니께서는 쓰러져 몸져누웠다고 한다. 한 순간에 그만큼 큰 충격을 받으실 정도로 어머니의 사랑이 컸다는 뜻이었다.
‘지금쯤이면 자리에서 일어나셨겠지?’
그랬으면 참 좋겠다.
아직은 얼굴도 뵙지 못했지만 어머니께서 나로 인한 마음고생 따위 더는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용설화. 내 여동생.’
평소 우의가 좋았다고 하는데 그녀와의 만남 또한 솔직히 무척이나 기대가 되었다.
‘어떻게 대해야 하나? 묵직하게? 아니면 가볍게?’
어디 여동생이 있어 봤어야 알지.
도통 그녀를 어떻게 대해야 할는지 가늠할 수가 없다.
‘후우, 모르겠다. 일단 부딪혀 보자.’
혹시라도 달라진 내 행동에 이상함을 느낄 수도 있겠지만 그럴 때는 운적풍의 일 이후 성격이 완전히 바뀌었다는 쪽으로 몰고 갈 생각이다.
‘부분기억상실과 같은 것으로 몰고 가면 뭐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용대명이 어깨를 툭툭 토닥였다.
“이제 다 와 가는구나.”
“아, 예.”
성도의 번화가를 휘도니 저 멀리 제법 큰 건물들이 집단으로 모여 있는 곳이 보였다.
‘저곳인가?’
맞았다. 용대명과 두 의숙은 그곳으로 용무린을 이끌었다.
놀라운 장면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문이 활짝 열려 있네?’
여느 세도가의 집이라면 상상도 하기 힘든 일이다.
백리세가를 보아도 외인은 함부로 출입할 수 없도록 대문은 언제나 굳게 닫혀 있었으니까.
‘험한 세상 그래야 맞는 것 같은데…….’
비룡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듯 보였다.
활짝 열린 대문 사이로 허드렛일을 하는 사람들이 활기차게 돌아다니는 모습이 적나라하게 보였다.
“헛! 오셨습니까, 문주님!”
들어서자마자 마당을 쓸고 있던 머리 하얀 노인 하나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 달려와 용대명을 반겼다.
“허허헛. 잘 지내시었소, 왕 노인.”
놀랍게도 용무린은 허름한 차림의 문지기 노인에게까지 반 존대를 했다.
“어서 들어오십시오, 문주님.”
“문주님 오셨어요?”
“노사님들도 함께 도착하셨네요.”
“어서 오세요.”
순식간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환한 미소로 용대명과 교진운 그리고 유백을 반겼다. 백리세가만 같아도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와아, 공자님도 오셨네요?”
“공자님! 몸은 어떠세요?”
“다 나으셨어요?”
용무린을 향해서도 순식간에 식솔들이 몰려들었다.
‘뭐, 뭐야?’
솔직히 당황스러웠다.
허드렛일을 하는 사람들이 격의 없이 몰려드는 것만으로도 놀라운 일인데 이들 모두에게 이런 진심 어린 환대를 받을 수 있다니!
“정말 다행이에요, 공자님.”
“세상에, 법이 없어도 살 수 있는 우리 공자님에게 어떤 불한당 같은 놈이 해코지를 다 했대요 그래?”
“이렇게 건강하게 돌아오셔서 얼마나 다행인지…….”
몇몇 아낙들은 용무린을 보며 눈시울까지 글썽였다.
‘거 참…….’
기분 정말 묘했다.
‘삼절일학 용무린. 넌 정말 이렇게 살아왔던 거냐?’
이런 환대는 그만큼 진심으로 이 사람들을 대하지 않았다면 얻을 수 없는 것이다.
“문주님 오셨습니까?”
“노사님!”
“공자님도 오셨군요.”
세가의 유일한 무력단체인 비룡무단 무인들까지 몰려오기 시작했다. 환한 얼굴로 웃으며 용무린의 무사귀환을 반겨주었다.
씨익.
용무린의 입가에 절로 미소가 걸렸다.
지금껏 단 한 번도 받아보지 못했던 진심 어린 환대에 가슴이 절로 따뜻해졌다. 저절로 삼절일학이라면 했을 법한 말이 튀어나왔다.
“덕분에 잘 다녀왔습니다.”
“잘 돌아오셨어요, 공자님.”
“건강하게 돌아오셔서 정말 너무 다행이에요.”
아낙들의 목소리에서 진심이 느껴졌다.
용무린의 마음속에 작은 결심이 싹텄다.
‘지금부터는 내가 지킬 것이다. 이 따뜻하고 순박한 사람들 모두를.’
지금 이 순간부터 신마 진무량은 완전히 잊는다.
어찌 된 영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부터는 완벽하게 삼절일학 용무린으로서 살아갈 것이다.
그때였다.
탁탁탁탁탁.
발자국 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뛰어나오는 것이 용무린의 눈에 들어왔다.
‘저 중년 미부는?’
온화하고 아름다운 인상의 중년 여인 한 사람이 맨발로 용무린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두근.
용무린의 심장이 한차례 크게 뛰었다.
‘호, 혹시?’
그 짐작을 확인이라도 해주듯 용대명이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허허허, 사람하곤……. 무탈하다고,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내 이미 기별까지 넣어두었거늘 저리 맨 발로 달려 나오다니!”
어머니다. 어머니가 맞다.
타타탁. 와락.
“무린아!”
바람처럼 달려온 비룡문의 안주인 조연옥은 그대로 용무린을 덥석 끌어안아 버렸다.
“어, 어머니?”
용무린의 손이 살짝 마주 들렸다.
하지만 일말의 낯섦 때문에 선뜻 안아드리지는 못했다. 어정쩡하게 들어 올린 용무린의 손은 갈 곳을 찾지 못해 어색하게 허공만 헤집었다.
그런데…….
“잘 돌아왔다, 잘 돌아왔어 내 아들.”
자꾸만 그 말을 되풀이하며 등을 쓰다듬는 조연옥의 뜨거운 애정에 그만 용무린의 가슴 속 깊은 곳에서는 뜨거운 무엇인가가 울컥 하고 치밀어 오르고 말았다.
“다, 다녀왔습니다, 어머니.”
그 말과 동시에 용무린의 손은 조연옥을 꽉 끌어안아 버렸다. 스스로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그렇게 되었다. 신마 시절을 생각한다면 정말 놀라운 발전인 셈이다.
“그래, 그래. 애썼다. 고생이 많았구나. 아버지께 전서구로 연락을 받았다. 그 짧은 사이 은원을 정리했다고? 장하구나. 장하다, 내 아들.”
하마터면 잃을 수도 있었던 아들이 무탈하게 아니 가문의 멍에까지 완전히 벗어 던지고 돌아온 것이 그렇게도 기쁜지 조연옥은 계속해서 용무린의 등을 쓰다듬었다.
‘거 참 쑥스럽군그래.’
하지만 희한하게도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되레 기분이 너무나 좋았다. 그것이 바로 어머니만이 가지는 끝없는 사랑의 힘이리라.
“들어가자꾸나. 어서.”
“예, 어머니.”
용무린은 조연옥과 나란히 내원을 향해 이동했다.
“허 참, 나는 완전히 찬밥이로구나.”
“질투하시는 듯합니다, 형님. 허허허.”
“그럴 만한 상황입니다. 이해하셔야지요. 하하하.”
투덜대는 용대명을 보며 교진운과 유백이 웃었다.
“우리도 들어가세나.”
“예, 형님.”
“가시지요.”
용대명과 함께 교진운과 유백 역시 내원으로 향했다.
***
조연옥과 함께 내원으로 들어간 용무린에게 바로 위기가 찾아들었다. 내원에 상주하는 시비나 하인들 중 어느 누구도 알아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젠장. 모두 처음 보는데 내가 어떻게 아냐고?’
심지어는 자신의 방을 찾아갈 수조차 없었으니 실로 난감한 일이었다.
‘별 수 없다.’
용무린은 미리 생각해 두었던 핑계로 그 위기를 넘겼다.
부분기억상실.
운적풍의 손에 사경을 헤매고 난 후 많은 것이 기억이 나질 않는다는 핑계에 조연옥의 얼굴색은 다시 한 번 한껏 어두워졌었지만 다행히 점점 좋아지고 있다는 말에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오라버니. 정말 다른 것은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는 거예요?”
“응. 전혀.”
놀란 토끼 눈을 한 용설화의 질문에 용무린은 쓴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여야만 했다.
“휴우, 그래도 다행이네. 우리 식구들과 의숙님들까지는 기억을 하니 말이야.”
“그래. 다행이지.”
내심 길게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자니 용설화가 동그랗게 뜬 눈으로 얼굴을 쓱 내밀었다.
“그런데 오라버니?”
“응?”
“정말 그 망할 인간과의 은원을 석 달 만에 모두 정리해 버린 거예요?”
“운적풍이란 애송이? 암. 완전히 정리했지. 이자까지 톡톡히 쳐서.”
지금도 그 생각만 하면 속이 다 후련했다.
“우와, 대체 어떻게 그럴 수 있었지?”
정말 놀랐다는 듯 용설화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을 이었다.
“아무리 음양쇠맥증에서 벗어났다고 해도 그렇지, 운적풍이라고 하면 나름 그 또래에서는 절정을 바라보는 일류 상급의 고수잖아! 그런데 어떻게 겨우 석 달 만에 박살을 낼 수 있는 것이지?”
“그 정도 애송이야 뭐…….”
나름 항변을 해 보려 했지만 어림도 없었다. 용설화의 눈이 대뜸 가느다래졌다.
“안 되겠다. 한번 확인해 봐야지.”
용설화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생각지도 못했던 말을 쏟아냈다.
“오라버니 나랑 비무 한번 해 보실래요?”
“응? 비무?”
용무린은 화들짝 놀란 눈으로 용설화를 살폈다.
자신만만하게 허리에 손을 척 올려놓는 용설화의 전신에서 강인한 기운이 훅 풍겨졌다.
‘호오, 꽤 하는데?’
백리소옥과 엇비슷한 기세다.
‘정말 제법이야. 대체 누구에게 사사한 것이지?’
용무린의 궁금증을 해결이라도 해주겠다는 듯 용설화의 입이 열렸다.
“아참, 그것도 기억이 나지 않으려나?”
“뭐가?”
“음양쇠맥증 때문에 오라버니가 무공을 익힐 수 없어서 두 분 의숙의 절기를 내가 이었잖아.”
그랬었구나. 어쩐지…….
용설화가 자신만만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때요? 우리 한번 겨뤄 봐요.”
“이 녀석이! 말만 한 처자가 어딜 자꾸 무공을 과신하고 난리야?”
잠자코 듣고 있던 조연옥이 대뜸 용설화를 나무랐다.
“히잉, 우리 엄마 또 그러신다.”
“시끄러워 인석아! 힘든 여정을 이제야 마치고 돌아온 오라버니에게 그게 어디 할 소리야? 지금도 가뜩이나 종 공자 가문에서 네가 조신하지 못하게 무공이나 익히고 있다는 것을 알고 난감해하는 터인데…….”
종 공자? 그게 대체 누구지?
눈만 멀뚱멀뚱 뜨고 있으려니 조연옥이 부연설명을 해 주었다.
“저 천둥벌거숭이 같은 녀석에게 매파가 왔지 뭐니?”
“매파요?”
용무린이 눈을 휘둥그레 뜬 사이 용설화가 고함을 빼액 내질렀다.
“나는 아직 시집 안 간다니까요? 제발 부탁이니 증표로 온 그놈의 비둘기 좀 다시 돌려보내 버려요.”
“시끄러워 인석아! 이것도 다 인연인 게야! 그렇게 가기 싫었으면 아예 처음부터 구해주질 말던지! 공연히 구해줘서 반하게 만들고 난리야?”
“아, 그럼 그따위 불한당들에게 곤란을 겪고 있는 것을 보고도 가만히 있었어야만 해요? 우리 오라버니 생각나서 나섰을 뿐이라고요-오!”
용설란도 지지 않고 마주 고함을 질렀다.
하지만 아주 싫지는 않은 모양인지 얼굴이 발그레 붉어져 있었다. 옅은 미소마저 머금었다.
‘후후훗. 말은 저렇게 해도 마음에는 드는 모양인데?’
정말 다행이었다.
백리소옥만 해도 운적풍 같은 놈과의 혼사 때문에 가출까지 하지 않았던가? 자고로 혼인이란 서로가 좋아서 해야 백년해로할 가능성이 높은 법이다.
“하여간 무린이 혼처만 잡히면 바로 날을 잡을 터이니 그리 알아!”
움찔!
“제, 제 혼처요?”
화들짝 놀라 되물었지만 조연옥은 들은 체도 하지 않고선 계속해서 용설화를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이제 겨우 스물 하나의 나이에 대과에 급제해 인근 현의 현승(縣丞:현령의보좌관)이 된 사내가 너 같은 선머슴을 좋아하는 것 자체를 감사해야 해 인석아!”
“아유, 내가 못살앗!”
쾅!
용설화가 문을 거칠게 닫고는 그대로 밖으로 나갔다.
‘음, 이거 뭔가 심상치 않은데?’
위기를 감지한 용무린도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용설화의 뒤를 따라 달아나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한 발 늦었다.
잽싸게 밖으로 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조연옥의 입이 먼저 열렸다.
“아들! 너도 이제 일가를 이뤄야지?”
“예?”
“뭘 그리 놀라? 장부 나이 스물 하나면 일가를 이룰 나이잖아! 하물며 너는 비룡문의 소문주, 음양쇠맥증의 병증도 고쳤으니 하루라도 빨리 이 엄마에게 손주를 안겨줘야…….”
파바박.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용무린은 뛰기 시작했다.
“얘, 어딜 가니? 빨리 돌아오지 못해?”
조연옥의 목소리가 높아졌지만 용무린은 멈추지 않았다.
“죄송해요 어머니. 저는 아직 생각이 없어요.”
아직 할 일도 많은데 혼인은 무슨 놈의 혼인?
‘혼인이란 건 서로 사랑하는 사람이 있을 때나 하는 것이란 말이지.’
산책만 하자고 말을 건네도 하나같이 싫다고 하는 판국에 무슨 놈의 혼인? 상대가 누구인지는 몰라도 아마 내가 산책이라도 하자고 하면 어김없이 됐다고 할 것이다.
‘게다가 혼인은 약점일 뿐이라고.’
아직은 그 치명적인 약점을 극복할 만큼의 실력을 갖추지 못했다.
최소한 전생의 신마 시절만큼은 되어야 내 사람을 완벽하게 지켜낼 수 있지 않을까?
“용무린! 빨리 돌아오지 못해?”
조연옥의 목소리가 갈수록 높아졌다.
쌔애액.
달리는 용무린의 속도가 점점 더 빨라졌다.
‘아예 신법까지 펼칠까?’
염화옥수나 혈견사흉과 싸울 때조차 사용하지 않았었던 천마탄신을 쓸 것인지 말 것인지 용무린은 심각한 고민을 해야만 했다.
***
흑야방.
호북성의 성도 무한의 밤거리를 지배하는 흑도 방파로써 일대에서는 꽤 알아주는 세력이었다. 다른 중소 방파들도 여럿 있었지만 그 모든 방파들을 힘으로 눌러 가장 큰 구역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갔던 일은?”
흑야방주 칠보단혼 엽초웅의 질문에 부 방주 노백인의 입이 바로 열렸다.
“비룡문이 직접 경영하고 있는 객잔 다섯 곳과 시전 상회 열다섯 곳 모두를 돌며 시비를 걸고 왔습니다. 아마 지금쯤 똥줄이 탈겁니다.”
“크흐흐. 좋아, 좋아. 잘했어.”
“저, 그런데……. 듣자니 이틀 전에 비룡문주와 함께 나섰던 교진운과 유백이 복귀했다고 합니다. 앞으로는 조금은 조심해서 일을 해야…….”
엽초웅의 입가에 비웃음이 살짝 걸렸다. 노백인의 말을 툭 잘랐다.
“그깟 놈들 이제는 와 봤자 아닌가? 그곳에서 오신 분들이 알아서 하실 게야.”
“……알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이긴 했지만 노백인의 얼굴은 펴지질 않았다.
계속해서 불안해하는 부 방주를 보며 엽초웅이 호언장담을 했다.
“염려할 것 없다. 다 잘 될 거야.”
“……!”
“이 기회에 무한의 낮과 밤을 우리 흑야방이 완전히 먹는 거라고.”
“예, 형님. 기왕 하는 모험, 성공하면 대박인 거죠.”
“그래, 대박이지.”
생각만 해도 좋은지 샐쭉 웃어 보인 엽초웅의 말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하여간 고삐를 바짝 조여. 내일부터는 비룡문에서 직접 운영하는 곳들은 물론이고 보호비를 내고 보호를 받는 상점과 객잔과 시전상회까지 깡그리 돌아.”
“무조건 시비를 걸고 깽판을 치면 되는 것이죠?”
“그래. 그래서 신입 애들 댓 놈 죽어나자빠지기만 하면 되는 거야. 그때야 말로 전면전을 펼치는 것이지. 명분이 확실한 무림의 일이니 승선포정사사나 도지휘사사에서도 나설 수 없을걸?”
무림의 일이란 그런 법이다.
나라의 근간을 뒤흔들어 버릴 만한 일이 아니라면 관은 결코 무림의 일에 참견을 하지 않는다. 무림의 일은 무림의 사람들끼리 스스로 알아서 해결하도록 내버려둔다.
“후우.”
노백인이 다시 한 번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엽초웅이 눈살을 찌푸리며 나무랐다.
“거 참, 재수 없게……. 큰일 앞두고 너 자꾸 초 칠래? 뭐가 그렇게 불안한데?”
“아무리 무력이 보잘 것 없다지만 비룡문은 그래도 신주오가의 일원이잖습니까? 비록 그곳에서 도움을 주긴 한다지만 자칫 다른 신주오가에서 도움이라도 준다면 우리 흑야방은 한 순간에 날아간다고요!”
기다렸다는 듯 불안한 마음을 쏟아내는 노백인을 향해 엽초웅은 비릿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다른 신주오가의 도움? 무슨 수로? 개새끼 한 마리 남기지 않을 터인데 어떻게 도움을 요청해?”
“그, 그래도…….”
“하룻밤이면 끝나 인마. 비룡문의 주력이 우리 쪽으로 오면 네가 애들과 함께 빈집털이를 하면 끝이야. 명분만 확실히 쌓으면 되는 일이라고!”
“후우. 모르겠습니다, 형님. 저는 하여간 이번 일이 불안하기만 합니다.”
“새끼, 나이 먹더니 간덩이가 쪼그라들었구나.”
“…….”
“하여간 그렇게 알고 차질 없이 준비해. 알았지?”
“예, 형님.”
고개를 끄덕여 보인 노백인이 뒤돌아섰다.
그때 깜박 잊고 있었다는 듯 엽초웅의 말이 이어졌다.
“아참, 효감현의 일은? 그때 놓친 애송이는 아직도 못 죽였지?”
“예, 형님. 열흘 전에 실패한 후 효감현의 현승 종일명 그 자식이 병사들과 함께 출퇴근을 하는 바람에…….”
“끌끌끌, 그때 죽여 버렸어야 했는데.”
“그때 방해했던 계집을 찾고 있습니다. 이참에 한꺼번에 복수해야지요.”
“계집도 계집인데, 종일명 그자식의 모가지 좀 빨리 따. 어떻게 된 게 지현(知縣:현의 수령)보다 더 독해. 그 자식 등쌀에 효감 현에서는 청루랑 도박장 운영을 당최 할 수가 없잖아.”
“다시 한 번 은자를 먹여 볼까요?”
“됐어. 먹이려고 은자 들고 갔던 애까지 잡아넣었던 성격이 어디로 가겠냐? 그냥 깔끔하게 죽이고 말자.”
“예, 형님. 틈을 보아 처리하겠습니다.”
“그래, 그때 그 새끼 죽이지 못하게 우리 애들 박살낸 계집도 꼭 찾아내고.”
“예, 형님.”
씩씩한 대답과 함께 노백인이 뒤돌아서자 엽초웅의 얼굴에는 그제야 미소가 돌았다.
“무한의 낮과 밤을 완전히 우리가 먹는다 이거지?”
그곳에서 도와주는 한 이미 이뤄진 것이나 마찬가지다.
신주오가의 일원이라고는 하지만 비룡문이 가진 힘은 솔직히 보잘 것 없었으니까.
“교진운과 유백이 조금 껄끄러웠는데 그분들이 알아서 처리해 준다고 하니, 뭐 나머지 떨거지들이야 우리 흑야방의 힘만으로도 충분히 가능하지.”
바야흐로 흑야방의 웅비가 눈앞이었다.
“크흐흐흐. 좋구나, 좋아.”
엽초웅의 웃음소리가 높아만 갔다.
***
사흘이란 시간이 훌쩍 지났다.
“휴우, 다 끝났다.”
용무린은 하루 종일 붙잡고 있던 붓을 그제야 내려놓았다. 용무린 앞에는 직접 만들어낸 책 네 권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거 참 희한하단 말이야.”
용무린의 고개가 자꾸만 갸웃하고 기울어졌다.
“애초에는 마공 중에 하나를 찾아 진천수라도와 비연오식을 바꿔 놓은 것처럼 완전히 바꿔놓으려 했었는데…….”
그것은 불가능했다.
부분기억상실이라는 핑계가 거짓만은 아닌 게 되었다.
가장 중요하달 수 있는 규천마력과 대천자마공 그리고 천마진결의 구결은 오롯이 생각이 나지만 여타 다른 마공들은 하나도 생각이 나질 않았다.
“대체 무슨 조화속이지? 내가 정말 부분기억상실에라도 걸린 것인가?”
그런데 더 웃기는 것은 무리를 해서라도 쥐어짜니 돌연 옛 전진의 무공 몇 개가 떠올랐다는 점이다.
“유룡비검법과 선운비뢰장이라.”
본래 떠올리려던 마공 대신 떠올린 무공치고는 꽤 대단한 수확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옛 전진파의 보물이니 지금은 내가 주인이지 뭐.”
전진이 스러지고 세월이 지나 그 자리를 채웠던 곤륜마저 지금은 성세가 한 풀 확연히 꺾인 상태, 그러니 두 무공을 다른 사람에게 건넨다고 해도 시비를 걸 사람은 없다.
“유룡비검법은 어검에 이르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배워 두어야 할 검법이니 교진운 의숙에게 건네면 안성맞춤이겠고, 선운비뢰장 역시 비슷한 맥락의 무공이니 유백 의숙에게 건네면 되겠군.”
용무린은 그 아래에 놓인 책 두 권을 집어 들었다.
표지에는 강인한 힘이 돋보이는 필체로 상청무상검법과 유성회류검법이라고 적혀 있었다.
“상청무상검법은 전진의 장문에게만 전해지는 것이니 우리 가문의 직계에게 호심결과 더불어 익히도록 하고 유성회류검법은 상권과 하권으로 나눠 비룡무단에게 익히도록 만들면 되겠구나.”
상권은 일반 무사들에게만 전하고 조장 급부터는 상하권을 모두 전하면 될 것이다. 문제는 이런 보물들을 어디에서 구할 수 있었느냐고 물으면 대답이 곤란한 것인데…….
“뭐, 그것은 아버지께 이미 말했듯 내가 찾은 서재의 비밀 장소에서 지금 내가 익히고 있는 무공과 더불어 있었던 것이라고 하면 되려나?”
그 수밖에는 없지 싶다.
용무린은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용대명의 집무실로 향했다.
***
“저런 발칙한 놈들이!”
“감히 잡졸들이 대놓고 행패를 벌이다니!”
용대명이 지그시 눈을 감은 채 생각에 잠겨 있는 가운데 교진운과 유백이 노성을 터뜨리고 있었다. 그간 벌어졌던 일을 총관으로부터 전해 들었기 때문이었다.
“열흘 정도쯤 되었을 겁니다. 그때부터 흑야방의 잡졸들이 대놓고 우리 비룡문이 운영하는 객잔과 상회들을 돌아다니며 시비를 걸어 왔습니다.”
“허어.”
“기가 막히는군.”
“그간은 문주님과 두 분 노사님들이 계시지 아니하였기에 적당히 몰아내는 수준에서 참아 넘겼지만, 요 며칠 사이 부쩍 그 정도가 심해져서 고민 중이었습니다.”
잠자코 이야기를 듣고 있던 용대명의 입이 열렸다.
“뜨내기들은 분명 아닐 터, 어디 소속인지는 아는가?”
“새로운 얼굴들이 많이 보였지만 그 중 몇몇은 분명히 흑야방의 야차조원들이었습니다.”
흑야방이라는 소리를 듣자마자 교진운과 유백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지금 당장 흑야방에 다녀오겠습니다.”
“박살을 내고 오지요.”
“비룡무단의 인원 30명이면 족합니다.”
“맞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객잔과 시전상회를 순찰할 인원들이 부족한데 더 뺄 필요도 없습니다.”
분노한 교진운과 유백은 당장에라도 흉흉한 눈을 빛내며 흑야방으로 달려갈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용대명은 무겁게 고개를 흔들었다.
“급하게 움직일 일이 아닌 듯하네.”
“문주님. 겨우 흑도의 잡졸들일 뿐입니다.”
“쓸 만한 고수라고 해 봐야 흑야방주 엽초웅과 부방주 노백인. 그리고 야차조장과 몇몇을 빼면 있으나 마나한 녀석들에 불과하단 말입니다.”
물처럼 고요한 용대명과는 달리 교진운과 유백은 자존심에 상처를 많이 받은 듯했다.
하긴, 아무리 무력이 아닌 진법과 기관지학으로 일어선 비룡문이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당당히 신주오가의 일원에 오른 가문이다. 그런 비룡문에 껄렁한 흑도의 잡졸들이 이를 드러낸다는 것이 어디 말이나 되겠는가?
“내가 겨우 흑야방 따위가 두려워 급하게 움직일 일이 아닌 듯하다 했겠는가?”
“……!”
“……!”
“아우들 말마따나 흑야방은 흑도의 잡졸들이 맞네. 하지만 그런 녀석들이 감히 본문에 이를 들이밀고 수작을 부릴 때는 그만한 뒷배가 있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라네.”
“아!”
“그, 그런…….”
“필시 믿고 있는 무엇인가가 있을 게야. 그걸 우리가 먼저 알아내야만 하네.”
“알겠습니다, 형님. 제가 직접 움직이겠습니다.”
“듣고 보니 긴장을 풀면 안 되겠군요. 오늘 밤부터 경비를 조금 더 강화해야 하겠습니다.”
“두 아우가 나서준다니 우형이 든든하네. 고맙네.”
용대명의 넉넉한 미소에 교진운과 유백은 당치도 않다는 듯 손사래를 쳤다.
“무슨 그런 말씀을 자꾸 하십니까?”
“자꾸 그런 말씀을 하시면 되레 서운합니다.”
“알겠네, 알겠어. 허허허.”
“저도 객잔과 시전상회에 연락해서 차후부터 오는 무리들을 주도면밀하게 살피도록 하겠습니다.”
“애써 주게나, 총관.”
“염려 마십시오.”
총관 손위는 고개를 깊이 숙여 보인 후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을 열었다.
“어엇? 오셨습니까, 공자님?”
밖으로 나가려던 총관 손위는 문 앞에 서 있던 용무린을 발견하고 급히 고개를 숙였다.
“수고하세요, 총관님.”
“예, 공자님.”
총관 손위는 그 길로 밖으로 향했다. 용대명에게 말했었던 것처럼 객잔과 시전상회를 한 바퀴 직접 돌며 단단히 주의를 줄 모양이었다.
“네가 이곳까지 오다니, 어쩐 일이냐?”
용대명이 활짝 웃으며 용무린을 반겼다. 기억 속의 용무린은 언제나 서재에만 머물며 책과 시서화에 파묻혀 있던 것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씨익.
용무린의 입가에 보기 좋은 미소가 걸렸다.
척척척척.
들고 왔던 책 네 권을 차례차례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
집무실을 나와 방으로 돌아가는 사이 용무린은 계속해서 혼자 웃었다.
“푸흐흐. 세 분 모두 그렇게 놀랄 줄이야?”
유룡비검법과 선운비뢰장을 받아든 교진운과 유백은 조금이라도 빨리 새로운 비급을 훑어보고 싶은 듯 안절부절못했다.
“흑야방의 일은 내일부터 알아보도록 하고 오늘은 일단 들어가 보게.”
“감사합니다, 형님.”
“알겠습니다.”
두 사람은 보다 못한 용대명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고, 고맙다, 무린아. 내 이 은혜는 죽을 때까지 절대로 잊지 않겠다.”
“고맙구나. 그렇지 않아도 요즘 벽에 부딪힌 느낌이었는데……. 나 역시 죽을 때까지 잊지 않으마.”
후다닥. 휘리릭.
두 사람은 바람처럼 집무실에서 사라져 갔다.
용무린은 마지막 두 권을 용대명에게 내밀었다.
상청무상검법과 유성회류검법을 받아든 용대명 역시 크게 기뻐했다.
용대명은 호심결의 숨겨진 효능과 적절한 연공법에 대한 설명을 듣고 그 즉시 두 아우와 조카들을 비롯한 직계식솔들을 집무실로 소환했다.
“네가 말한 방법대로 수련을 한다면 빠르면 일 년, 늦어도 삼 년이면 다들 어느 정도는 음양쇠맥증의 멍에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이 말이지?”
“예, 아버지.”
똑 소리 나는 대답에 용대명의 눈에는 무문으로 거듭난 비룡문의 웅비가 눈에 보이는 듯했다.
‘뿌듯하구나.’
뛸 듯 좋아하는 용대명의 얼굴을 보며 용무린은 되레 흡족해졌다. 작지만 이제야 뭔가 제대로 된 것을 하나 해 드린 듯해 기분 좋았다.
“그건 그렇고…….”
반짝.
용무린의 눈에 섬뜩한 빛이 돌았다.
“흑야방이라고 했지?”
본의 아니게 집무실 앞에서 다 들었다.
“시시껄렁한 놈들이 감히 내 집안을 노렸다고?”
배교나 혈교라고 해도 인정하지 않을 판국에 겨우 무한의 밤거리나 배회하는 잔챙이들이 공공연히 시비를 걸고 기회를 노린다?
“흥, 세상 더는 살기 싫어졌다는 거지.”
아버지에 이어 어머니와 여동생까지 가슴속에 들어온 마당인데 그 꼴을 내가 두고 볼 것 같은가?
“건드리지 말아야 할 곳을 건드린 대가가 무엇인지 똑똑히 알려주마.”
***
야반삼경.
사위가 모두 어둠에 잠겨 있어야 할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더 밝아지는 곳이 존재한다.
무한의 이름 높은 색주가 홍적로.
청루와 홍루 그리고 도박장까지 한데 어우러진 화려한 불야성을 이루는 곳.
그 초입에 용무린이 모습을 드러냈다.
“보자, 어느 곳을 족쳐야 흑야방과 연결된 놈들이 튀어 나올까?”
어림 세어도 무려 수십 곳이 넘는다.
한 조직이 다 관리한다고 보기에는 볼 수 없다.
“흑야방이 가장 큰 곳이라고 했었지?”
그렇다면 대충 절반쯤 먹었다고 보면 맞을 것이다.
나머지 절반을 가지고 고만고만한 조직들이 서너 개씩 관리하며 흑야방에 상납금을 바칠 터.
“에라 모르겠다. 그냥 아무 곳이나 들어가서 족치자.”
그러다 보면 나오겠지.
성큼.
용무린은 눈앞에 보이는 청루 요화원으로 들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