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오리무중 (13/104)

4.오리무중

소생환과 추궁과혈로 급한 불을 끈 화운장로와 일각대사 일행은 용무린을 조심스레 안아들고 그 즉시 비룡문으로 이동했다.

인시 초.

비룡문이 대낮처럼 환하게 밝아졌다. 생각지도 못했던 방문객과 피투성이가 되어 있는 용무린으로 인해 주변이 소란스러워졌다. 외원에서 내원으로 빠르게 소란이 번졌다.

“뭐지?”

벌써부터 일어나 호심결을 수련하기 위해 준비하던 용대명의 귀가 쫑긋 섰다. 비룡무단의 단원들도 아직은 수련에 나서기 전인 이른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것인가?”

공연한 우려가 덜컥 들었다. 그리고 그 우려는 이내 사실이 되었다. 다급한 발자국 소리와 함께 문밖에서 굵직한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문주님. 조영이옵니다. 기침하셨습니까?”

비룡무단의 일원이었다. 하지만 어쩐지 목소리에 급한 기색이 가득했다. 용대명은 바로 문을 열었다. 성큼 밖으로 나섰다.

“무슨 일이냐?”

조영의 입에서 급보가 쏟아졌다.

“공자님께서 크게 다치셨습니다.”

“무어라? 무린이가 크게 다쳤다고?”

“예, 문주님. 개방의 화운장로님과 소림의 일각대사님께서 공자님을 모시고 오셨습니다.”

“아니, 어쩌다가? 대체 무슨 일이더냐? 흉수는?”

“속하는 아직 거기까지는 알지 못합니다.”

“무린이는 지금 어디에 있느냐?”

“일단 방에 모셨습니다.”

“의원은?”

“함께 번을 서던 덕천이가 벌써 모시러 갔습니다. 아마 조금만 더 있으면 기별을 받은 황 의원님께서 도착하실 것입니다.”

“그래, 알았다.”

용대명은 즉시 용무린의 방을 향해 움직였다.

“무린아……?!”

용대명은 들어서자마자 곧 입을 다물어야만 했다.

“……!”

화운장로가 지그시 눈을 감은 채 용무린의 맥문을 붙잡고 기를 흘려 넣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잠시 후,

“후우. 놀랍군, 놀라워.”

“역시 그렇습니까?”

화운장로의 말에 일각대사가 무엇인가 아는 듯 질문을 던졌다. 화운장로의 고개가 천천히 끄덕여졌다.

“아까는 너무 다급한 나머지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이제는 확실히 알겠네. 소생환과 추궁과혈이 없었어도 죽지는 않았을 게야. 대체 어떤 내공심법을 익히고 있는지는 몰라도 심각한 수준의 내상을 스스로 알아서 치료를 하고 있어.”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전신세맥을 비롯한 끊겼던 심맥들이 저절로 치료가 되고 이어지다니요!”

이게 대체 무슨 소린가?

용대명은 조심스레 질문을 던졌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그리고 무린이는 정녕 괜찮은 것입니까?”

소림의 일각대사가 잔잔한 미소와 함께 말을 이었다.

“이야기가 조금 깁니다. 그리고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용 시주는 괜찮을 것입니다. 신공이라고 표현해야 할 힘이 스스로를 치료하고 있으니 머지않아 눈을 뜰 것입니다.”

“킁. 하여간 대단한 녀석이오, 용 문주. 내 살다, 살다 이런 괴물 같은 녀석은 처음이라오.”

“허허허. 천재라는 좋은 표현도 있습니다, 선배.”

“에잉, 괴물이 맞아! 제 아무리 천재라도 백몇십 일 만에 이런 무지막지한 성취를 이루기는 불가능하단 말이야!”

“허허허, 선배님도 참…….”

용대명은 내심 긴 한숨을 내쉬었다. 두 사람 말을 듣고 있자니 적이 안심이 되었다.

‘휴-우. 많이 다치기는 했지만 무린이의 목숨이 위태롭거나 하지는 않은가 보구나.’

그런 판단이 서니 도대체 어째서 자신의 아들이 저 지경이 되었는지가 또 궁금해졌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입니까?”

“허허허. 성산의 일로 백리세가에서 개방에 연락을 취했던 일은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일각대사의 자상한 설명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백리세가를 나선 두 사람은 이내 서로의 갈 길로 헤어졌었다. 일각은 소림으로 화운장로는 개방으로. 무림공적 중 하나인 염라옥수 요여립의 징치와 더불어 혈견사흉까지 제거한 후 돌아서는 가벼운 발걸음이었다.

하지만 백리장천의 급한 연락을 받고 도착했던 화운장로가 다시 제자들을 움직였고 그 연락을 받은 일각대사마저도 다시금 발길을 돌렸다.

화운장로가 백리장천과 벽운성 그리고 상관종명을 비롯한 신주오가의 일원들과 함께 성산에 오른 일, 그리고 그곳에서 가공할 만한 마공의 흔적을 찾아냈다는 말에 용대명은 화들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흉수가 펼친 것이 마, 마공이란 말입니까?”

“예, 용 문주님. 성산의 기문진을 파훼한 범인은 틀림없는 마공의 소유자입니다. 그 연락을 받은 저 역시 제자들만 본산으로 돌려보낸 후 발길을 돌려 다시 되돌아 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잠자코 듣고 있던 화운장로가 말을 보탰다.

“그것도 그저 그런 마공이 아니라 고금의 무림사를 통틀어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갈 정도로 강력한 마공의 소유자라 보아야 할 거외다.”

“허어.”

용대명의 입에서 탄식에 가까운 소리가 흘러나왔다.

일각대사의 말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런 마공의 소유자가 흔적 따위 남겼을 리도 없었거니와 실제로도 그러했습니다. 여기 곁에 계신 개방의 화운선배는 보통 사안이 아님을 직감했고 흉수의 뒤를 쫓을 방도로 은거한 지 오래된 천기자 선배를 떠올렸습니다.”

“천기자!”

용대명의 눈이 동그래졌다.

천기자.

남존 무당의 전대장로로서 천기를 읽을 수 있을 정도로 높은 도력 때문에 현진도장이라는 도호보다 천기자라는 별호로 더 많이 알려진 기인이었다.

‘그래, 맞아. 그분이라면 틀림없이 뭔가를 짚어내실 수 있을 거야.’

무당파의 전대 장로로서 무당산 72산봉 중 한 곳에서 도를 닦아야 어울리겠지만 천기자는 실로 바람과 구름 같아 정처 없이 세상을 떠도는 것으로 더 유명했다.

“일정한 거처가 없었던 천기자 선배께서 은거에 들어가신 깊은 뜻이야 내 어찌 알겠소만, 어쩌다 보니 우리 거지들에게 은거지가 알려지게 되었고 개방이 그간 비밀을 유지해왔지만 어쩔 수 없었소이다. 찾아가는 수밖에.”

화운장로의 입에서는 더욱 놀라운 말이 흘러나왔다.

“과연 천기자 선배……. 우리가 방문할 것을 이미 알고 계셨던지 마중까지 나오셨더구려.”

“예에? 마중을요?”

용대명의 목소리가 사뭇 높아졌다.

화운장로의 고개가 천천히 끄덕여졌다.

“잘 믿기지는 않지만 그렇다니 그런 줄 알 밖에요.”

“…….”

“그 선배께서 그러십디다. 무한 외곽 동쪽 어둠을 밝히고 있는 외딴 장원에 쓸 만한 물건이 있으니 망가지기 전에 지금 당장 가서 데려오라고요. 그래서 몇 날 며칠 잠도 줄여가며 급히 달려갔는데…….”

“그곳에 우리 무린이가 쓰러져 있었다는 말입니까?”

“아니, 처음부터 쓰러져 있었던 것은 아니외다.”

기가 차다는 듯 용무린을 바라보던 화운장로는 뜬금없이 풀썩 웃었다.

“나 참, 겁이 없는 것인지 아니면 무모한 것인지…….”

“……?”

“말도 안 되는 숫자의 적을 상대로 혼자 싸우고 있더이다. 그것도 범상치 않은 마공을 펑펑 쏟아내는 무리를 상대로 말이오.”

“허-어!”

용대명의 입이 다시 한 번 떡 하고 벌어졌다.

“우리 이야기는 여기에서 끝이외다. 이제 남은 것은 저 아이가 정신을 차린 후 직접 들어 보아야 할 것이오.”

모두의 시선이 용무린에게로 향했다.

“……!”

아직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용무린.

계속해서 고요히 감겨져 있는 두 눈과는 달리 머릿속은 격렬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아 씨, 저 영감탱이는 왜 말을 저런 식으로 하는 거야? 아버지 걱정하시게 말이야.’

막 정신이 돌아왔던 용무린은 화운장로의 마지막 말을 다 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 용대명의 장탄식을 듣는 순간 공연히 죄송해져 눈을 뜰 수가 없었다.

‘저 영감탱이와 화상만 아니었어도 그냥 부드럽게 넘어갈 수 있었는데……. 다 틀렸네, 젠장.’

그 장원에 도사리고 있던 녀석들의 숫자가 의외였기는 하지만 결국에는 불사신공 덕에 죽지는 않았을 거다. 며칠이 걸리든 몸을 회복한 후 유람이라도 다녀온 것처럼 슥 복귀하면 끝나는 문제였다.

‘에이, 아버지께 설명할 일은 다음에 고민하기로 하자. 최대한 빨리 불사신기 수련을 해야 하는 것이 먼저야.’

일단 정신을 차렸으니 더 늦기 전에 소생환의 힘을 불사신기와 하나로 묶어야 한다.

‘코딱지만큼 작은 양이어도 지금 내 처지를 생각하면 감지덕지지. 암.’

그거 닥닥 긁어모아 불사신기와 하나로 묶어도 절정 수준의 내공은 아직 되지 못한다. 하지만 어제처럼 다수를 상대로 싸울 때 조금이라도 더 여유가 생기니 미룰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왜 조용해졌지?’

자신이 정신을 차리면 나머지 이야기를 들어 보아야 한다는 말을 끝으로 방 안에는 무거운 침묵만이 맴돌았다.

‘아, 또 뭔데-에?’

덩달아 용무린까지 궁금해졌다.

하지만 그거 궁금하다고 눈을 떴다가 들켜 공연히 질문 세례 받을 생각은 전혀 없었다. 이대로 버티고 있다가 다들 밖으로 나가면 소생환의 기운과 불사신기를 하나로 묶는 것이 계획이었다.

‘살짝 한 번 볼까?’

뭔지는 몰라도 무거운 침묵이 가득한 것으로 보아 내게는 신경을 쓸 틈도 없이 고민에 빠져 있을 터, 실눈으로 조금 엿본다고 해도 눈치 채지는 못할 것이다.

빼꼬-옴.

용무린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며 슬그머니 벌어졌다.

그런데 웬걸?

움찔!

‘뭐, 뭐야? 왜 다들 나를 쳐다보고 있는 건데?’

용대명, 화운장로, 일각대사 등등 방 안에 있던 모두의 시선이 자신을 향해 있었다. 화들짝 놀란 용무린의 눈이 질끈 감겼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용무린의 정신이 돌아온 것을 모두가 알아차렸다.

“괜찮은 것이냐?”

용대명의 목소리에는 아버지로서의 깊은 애정과 염려가 담겨 있었다.

“요즘 들어 내가 자주 놀라게 되는 구나.”

“……!”

“하지만 되었다. 너처럼 사려 깊은 사내가 그런 일을 벌였을 때는 필시 그만한 이유가 있었을 터, 이렇게 살아 돌아와 준 것만으로도 하늘에 감사한다.”

“아, 아버지…….”

질끈 감았던 용무린의 눈이 다시금 떠졌다.

질책이나 질문 공세가 아닌 믿음과 애정 그리고 염려가 가득한 목소리에 반응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클클클.”

“허허허.”

자는 척하는 모습이 재미있었다는 듯 화운장로와 일각대사가 나직하게 웃었다.

‘저놈의 인간들을 콱 그냥!’

고마운 건 고마운 거고 짜증나는 건 짜증나는 거다.

용무린이 살짝 눈을 흘겼지만 소용이 없었다. 화운장로와 일각대사는 눈 한 번 깜박이지 않았다. 느물거리며 말을 이었다.

“싸울 때는 야차와도 같이 날뛰더니 제 아버지 앞에서는 저토록 순한 양이라니……. 대체 어떤 모습이 네 진짜 모습인 게냐?”

“허허허. 두 가지 다인 것이지요, 선배. 적에게는 가차 없는 모습을 보이지만 아버지의 말씀에는 언제나 순응을 하는 사내, 되레 좋아 보입니다. 사내란 응당 그래야지요.”

두 사람의 목소리에서 돌연 웃음기가 싹 가셨다. 묵직하게 질문을 던져왔다.

“어디 한번 들어나 보자. 그 장원은 대체 어떻게 알고 찾아간 것이냐?”

“마공을 사용하는 무리들이었습니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정말 홀로 찾아간 것입니까? 두 분 의숙의 도움과 비룡무단의 지원도 요청하지도 않은 채?”

대답하기 전에 용무린은 슬쩍 아버지의 표정을 살폈다.

‘꼭 이렇게 까지 해야 하나?’

신마답지 않은 행동에 스스로도 답답했다.

하지만 전생에서도 겪어 보지 못한 일, 전생과 현생을 통틀어 처음으로 가져 보게 된 아버지가 아니던가? 저 조건 없는 사랑과 애정을 무시해버릴 수만은 없었다.

“……!”

살짝 놀라기는 했지만 용무린의 행동에는 필시 이유가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듯 용대명은 담담한 표정으로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용무린은 안심하고 말을 이었다.

“흑야방이라고…….”

용무린은 최대한 주관적인 시선에서 어젯밤에 벌어졌던 일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어제 용대명과 교진운, 유백과 총관의 대화를 우연히 들은 후 야반삼경에 흑야방으로 찾아가 점잖게 타일렀다는 것이 주된 이야기였다.

“방주였던 엽초웅이란 녀석은 고집불통이었는데 부방주인 노백인은 의외로 싹싹한 녀석이더군요. 말도 제법 잘 알아듣고……. 충동질 하는 녀석들이 있어서 그렇지 본래는 순한 녀석들이었던 것 같아요.”

정말 철저하게 주관적인 이야기였다.

아무리 충동질을 당했다지만, 그렇게 순하고 싹싹한 녀석들이기만 했다면 과연 비룡문에 시비를 걸 생각이나 할 수 있었을까?

‘킁, 색주가를 주름잡는 흑도의 잡졸들이? 어림도 없지.’

화운장로는 코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에 반해 일각대사는 넉넉한 미소를, 용대명은 대견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두 사람 역시 화운장로와 생각은 비슷했다.

‘허허허, 용 시주가 두 번만 타일렀다가는 피바람이 적지 않게 일어나겠구나.’

‘그래, 그 정도만으로도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는 다 알 수 있겠구나.’

자신의 이야기가 잘 먹혀 들어간다고 생각한 모양인지 용무린은 신나게 말을 이었다.

“하여간 적잖이 뉘우친 녀석의 입을 통해 충동질을 하고 지원을 약속한 녀석들의 위치를 알아낼 수 있었는데요, 저는 그저 어떤 녀석들인지 일단 알아나 보자 하는 심정으로 그곳엘 찾아가서…….”

“냅다 조져 버린 것이지?”

“그렇죠! 냅다 조져 버린……. 아, 아니 아버지 그것이 아니라.”

용무린은 화운장로를 한 번 매섭게 째려봤다. 용대명을 향해 재빨리 말을 돌렸지만 이미 한 번 뱉은 말은 주워 담지 못했다.

“그 튼튼한 정문이 아예 박살이 나 있던데…….”

“다 덤벼, 하듯 시작부터 때려 부수고 들어간 것이 틀림없어 보였습니다만…….”

화운장로는 그렇다고 치고 일각대사마저 도움이 안 되었다. 다행인 것은 무모한 짓을 했다고 용대명이 책망을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괜찮다. 어서 이야기나 해 보거라.”

“……그러니까.”

용무린의 말이 다시 이어졌다.

은밀히 내부를 살피다가 발각이 된 후 전투가 벌어졌고 놈들이 몽땅 쏟아져 나왔다.

나는 순식간에 포위를 당했다.

도주로는 차단이 되었고 최선을 다해 싸웠을 뿐이다.

화운장로와 일각대사와 친구들이 당도해 다행이었다, 라고 이야기를 마쳤지만 용대명은 다시 한 번 준엄한 얼굴로 짚고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네 용맹은 아비도 잘 알겠다. 하나, 진퇴를 모르는 용맹은 그저 만용에 불과한 것. 우리 비룡문의 미래나 다름이 없는 네가 어찌 그것을 자꾸만 잊는 것인지 이 아비는 잘 모르겠구나.”

“……!”

용무린은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잘못했습니다, 라고 해야 하나?’

문득 그런 생각이 스쳐 지났다. 그러나 내심 고개를 흔들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건 아니었던 거다.

정확한 말을 하지 않았던 것은 자신을 지극히 생각하는 아버지 용대명과 어머니 조연옥 때문일 뿐 절대로 잘못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쪽수 좀 많다고 창피하게 천하의 신마가 도망갈 수는 없는 거잖아.’

진퇴를 모르거나 만용 때문은 절대로 아니다.

신마는 적을 앞에 두고 절대로 등을 보이는 존재가 아니다. 비록 전생 시절의 힘은 모두 사라졌지만 그렇다고 해도 그런 성품까지 사라지지는 않았다.

‘적이라는 판단이 들어가면 그 자리에서 끝을 본다.’

앞뒤를 재고 힘의 유, 불리를 따지는 일 따위 없다.

돌진이다. 박살을 내는 거다.

‘그렇게 당당하게 살지 못할 바에야 차라리 다시 태어나지 않는 편이 더 좋았겠지.’

생각은 그랬지만 신기하게도 용무린의 고개는 천천히 끄덕여졌다.

“명심하겠습니다, 아버지.”

생각지도 못했던 말까지 불쑥 튀어 나왔다.

‘어라? 왜 생각과는 다른 말이 나오는 것이지?’

스스로도 놀랐지만 효과는 더 끝내줬다.

“고맙다, 아들아. 이 아비는 너를 믿는다. 흑야방이 가문에 위해를 가한다는 말을 듣자마자 달려가 해결을 해 버린 네게 무슨 책망을 하겠느냐?”

“……!”

“다만, 너를 지극히 사랑하는 아비로서 당부하는 말이건대……. 부디 용기와 만용을 구분할 것이며 언제나 행동에 앞서 협에 어긋나지 않는지 한 번쯤 생각해 보고 움직여 줬으면 하는구나. 알겠느냐?”

그 정도야 뭐.

“예, 아버지.”

씽긋.

“그래, 몸은 좀 어떠하냐?”

“지금 당장 운기행공에 좀 들어야할 것 같습니다. 그것을 빼면 다 좋습니다.”

“알겠다.”

그 말을 끝으로 용대명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하긴, 소생환의 기운을 어서 제 것으로 만들어 놓아야 하겠지.”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선배?”

“이따가 보자구나 아이야.”

“잠시 후에 뵙도록 하지요 용 시주.”

화운장로와 일각대사 역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급하다. 일단 불사신기의 힘과 소생환의 기운을 하나로 묶어 놓자.’

아직도 일류 언저리에서 헤매는 판국에 십 년의 내공이 어디냐? 최대한 빨리 내 것으로 만들고 볼 일이다. 용무린은 그렇게 불사신기의 수련에 들어갔다.

***

용무린이 불사신기의 수련에 빠져 있는 동안 화운장로와 일각대사는 진교운 유백 두 사람과 함께 다시 문제의 그 장원을 찾았다. 매서운 시선으로 주변을 살피던 화운장로의 입에서 탄식이 쏟아졌다.

“허어, 역시 재빠른 놈들이로군.”

“깨끗합니다, 선배. 마치 처절한 혈투 따위 전혀 없었다는 듯 평화롭게 보이기까지 합니다.”

장원에는 놀랍게도 아무것도 남아 있는 것이 없었다.

분명히 기십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피를 흘렸고 죽어 나갔음에도 불구하고 검붉은 흙을 제외한다면 그 무엇도 남아 있지 않았다.

“조금 더 빨리 왔었다면 달랐을까?”

“그럴 리가요? 이 정도로 재빨리 흔적을 지우고 사라졌다는 것은 적들에게 그만한 조직력이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흔적이나 단서 따위 남겨줄 이유가 없지요.”

“죽은 놈들의 시신에 남아 있을 마공의 흔적을 보고 싶었는데…….”

“보나마나 성산의 기문진을 파훼했던 것과는 다른 종류의 마공일 것입니다.”

“그렇겠지. 여기에 있던 놈들 수준은 그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이 낮았으니까.”

듣고 있던 교진운과 유백이 질문을 던졌다.

“그렇다면 본문을 노렸던 놈들은 걱정할 정도가 아니라는 뜻입니까?”

“수준이 낮다고 한다면 어느 정도인지 말씀 좀 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화운장로가 단호한 목소리로 답했다.

“흑도의 잡졸이 아닌 마공을 익힌 종자들이네. 도주한 놈들의 정체가 무엇인지 또 그 뒤에 얼마만큼의 전력이 남아 있는지 알지 못하는 한 언제나 살얼음판을 걷는다고 생각해야만 할 것이네.”

“마공이긴 했지만 소승이 보았을 때 그 수준은 아직 낮은 편에 속했습니다. 그 정도일 뿐이라면 비룡문의 힘만으로도 충분히 방비가 가능할 정도지요.”

그때 화운장로가 툭 치고 들어왔다.

“그 수준 낮은 놈들이 선발대인지 단순한 정찰대인지 아니면 본진인지 어떻게 알아? 모든 것이 확실해지기 전까지는 그놈들 수준이 낮은 편이라는 말로 안심을 해서는 아니 될 게야!”

“확실히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장로님.”

진교운과 유백이 잔뜩 굳어진 얼굴로 대답했다.

정말 심상치 않은 일이었다.

흑야방을 충동질한 배후에 마공으로 무장한 정체 모를 세력이 있다니. 어쩐지 저 멀리에서 폭풍이 불어오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

날이 밝기가 무섭게 용대명은 무한의 승선포정사사와 도지휘사사를 두루 다녀왔다. 일반적인 흑도가 아닌 마공을 익힌 정체불명의 세력의 등장 때문이었다.

황권의 유지 차원에서 마공의 등장은 언제나 군관 모두를 긴장하게 만들었고 무림의 일에 관이나 군이 개입할 여지가 있었기에 미리 알려 대처를 해야만 했다.

“알겠소이다. 이렇게 몸소 찾아와 알려주어 감사하오이다. 비록 무림중의 일이긴 하나 마공을 사용하는 폭도들의 등장은 언제나 조심스러운 법, 하나 비룡문에서 먼저 나서서 해결할 것을 믿고 지켜보겠소이다.”

승선포정사사의 종삼품 좌참정 백양천은 용대명의 방문과 상세한 설명을 듣고는 모든 것을 비룡문의 손에 맡겨 두기로 결정했다.

“기필코 정체를 밝힌 후 징치하도록 하겠습니다. 해량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대인.”

포권을 취한 후 용대명은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일단 한 고비는 넘었다.’

제 아무리 무림의 일이라고는 하나 마공을 사용하는 적을 상대로 얼마나 치열한 혈전을 벌여야 할지 모르는 일, 적절히 관을 달래놓아야 편하다.

반면 도지휘사사의 반응은 조금 달랐다.

“크하하. 이런 시건방진 종자들이 있나? 감히 대명천지에 마공을 펼친다? 말씀만 하시오 비룡문주. 내 화끈하게 도와드리리다.”

정삼품 도지휘첨사 사마정은 자신의 휘하에 있는 군사 5600여 명을 즉시 움직이기라도 할 듯 굴었다.

‘어떻게든 위로 올라가고 싶다는 게지?’

마공을 사용하는 무리들을 징치했다는 전공은 이런 평화 시기에 더 없이 좋은 명예, 하지만 이런 식으로 무림의 일에 군이 꼬여서는 아니 된다.

‘내가 찾아온 까닭은 앞으로 벌어질 일에 대한 명분 쌓기지 도움을 얻기 위함이 아니야.’

앞으로 비룡문을 노린 적들과의 싸움이 얼마나 치열하게 이어질지 모른다. 그때 흐를 피의 양 또한 많을 터, 그때마다 관이나 군에 상황 설명을 하고 양해를 구하느니 이렇게 한 번에 상황을 알려주는 것이 현명한 일이다.

“고마우신 말씀 명심하고 있겠습니다. 하나 비룡문 역시 신주오가의 일원, 감히 본문을 노린 적들이 마공을 사용하고는 있지만 능히 감당할 수 있습니다.”

“호오. 요사이 떨쳐 일어난 삼절일학의 무위가 범상치 않다고 하더니 과연…….”

사마정은 흥미롭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역시 곧 죽어도 군인가?’

개방이나 하오문만큼이나 정보가 빠르다.

용무린이 무위를 떨친 것은 염라옥수 요여립과 혈견사흉을 처단하면서다. 한데 그 사실이 벌써 예까지 흘러들었다는 말은 그만큼 정보력이 확실하다는 뜻이 된다.

‘무림을 인정하면서도 언제나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는 말이겠지? 혹여나 한데 뭉쳐 반란군으로 돌아서지나 않을까 봐서?’

정확한 판단이다.

하지만 누가 뭐라고 하더라도 무림과 관 혹은 군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선이 쭉 그어져 있다. 서로의 영역을 내어주지 않을 것이다.

“미력한 자식을 그리 높이 평가해 주시다니 감사합니다만, 이번 일은 저희 비룡문 단독으로 처리할 생각이 아닙니다. 이미 소림과 개방이 함께하고 있으니 그리 염려하지 않으셔도 될 듯합니다.”

과장이 섞이기는 했지만 거짓은 아니다.

어쨌거나 소림의 사대금강의 하나인 일각과 개방의 연화주선 화운장로가 비룡문에 도착해 있지 않은가? 더불어 신주오가의 후예들 또한 함께하고 있었다.

“오오, 소림과 개방의 지원이라니!”

뜻밖이라는 듯 호들갑을 떠는 사마정의 눈가에는 아쉬움의 빛이 스쳐 지났다. 비룡문 단독으로 맞서겠다고 하면 마공이라는 것을 빌미로 한 다리 걸칠 수도 있겠지만 소림과 개방까지 함께라면 그럴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알겠소이다. 내 비룡문의 건승을 기원하지요.”

결국 사마정 역시 깔끔하게 손을 털었다.

“감사합니다, 대인.”

포권을 취한 용대명의 고개가 깊숙하게 숙여졌다.

‘자, 지금부터는 이 무한 일대를 마음껏 헤집고 다녀도 무방하다. 감히 본문을 노리다니……. 덤벼라 이놈들아. 어디 한번 해 보자꾸나.’

비룡문이 유리한 고지를 선점했다.

어둠에 숨어 움직여야만 하는 적과 대명천지를 마음껏 활보해도 무방한 비룡문, 진짜 싸움이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는 아직 누구도 모르지만 분명한 것은 비룡문이 한 발 앞서나간 것만큼은 사실이라는 거다.

최소한 무림을 활보하는 와중에 관이나 군이 비룡문의 발목을 잡을 일은 이제 없을 테니까.

***

정오.

어느새 태양이 머리 위로 우뚝 솟았다.

씨익.

내내 불사신기에 빠져 있던 용무린이 만족스러운 미소와 함께 눈을 떴다.

“좋았어.”

소생환의 힘을 완벽하게 불사신기와 하나로 엮었다.

뭐, 그래봐야 절정 수준의 내공에는 아직 미치지 못하고 있지만 내공의 운용에 있어서 한층 여유로워진 것만큼은 사실이다.

“전생에 비한다면 한숨이 나올 만큼 작지만, 뭐 어쩌겠어? 바늘 허리매어 쓸 수도 없는 일이고 시간이 해결해 주길 바라는 수밖에…….”

이야기꾼들이 무척이나 좋아하는 동굴의 기연, 천년설삼이나 만년금구의 내단 같은 것이라도 어디서 하나 주워 먹지 않는 한 세월이 약인 셈이다.

“아니지. 규천마력의 단계를 뛰어 넘을 때마다 그랬던 것처럼 불사신기 역시 깨달음을 얻을 때마다 단전이 큰 폭으로 넓어지고 내공 또한 깊어질지도 모르지.”

규천마력 아니 하다못해 대천자마공이나 천마신공만 선택했어도 벌써 초절정 정도의 내공은 모아놓고도 남았다. 누가 뭐라고 해도, 아무리 연공 기간이 짧아도 깨달음만큼은 모두 내 것이었으니까.

“얼마나 걸릴까? 일 년? 아니면 이 년?”

그걸 대체 누가 알 수 있을까?

저 천마조사조차 밟아보지 못했던 미지의 길이니 아무도 알 수 없을 것이다.

“후훗. 어쨌든 절대검신 독고황 그 빌어먹을 자식의 힘으로 이 무림을 정복해 주고야 말겠어.”

그것이야말로 완벽한 복수!

그 달콤한 날은 언제고 올 것이다. 밤이고 낮이고 노력을 해 빠른 시간 안에 달성하고야 말리라.

“그건 그거고…… 어떤 자식들인지는 몰라도 감히 내 가문을 노렸다, 이거지?”

가만히 둘 수 없는 일이다.

용무린은 즉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밖으로 나섰다.

“그 자식을 다시 한 번 탈탈 털어봐야겠군그래.”

흑야방을 맡겨둔 노백인을 찾아갈 생각이다.

흑도의 잡졸 주제에 제법 생각이 깊던 그 녀석이라면 미지의 적에 대한 약간의 단서를 아마도 틀림없이 얻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흘흘흘, 그래 내공은 다 갈무리 했느냐?”

“일어나시었소, 용 시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연화주선 화운장로와 일각대사가 나타났다.

‘아, 귀찮은 인간들 같으니라고.’

용무린은 대뜸 인상을 찌푸렸다.

새삼 어제 산통을 깼던 일들까지 생각이 난 것이다.

“덕분에…….”

용무린은 아낌없이 소생환을 내어준 일각대사를 향해 정중하게 포권을 취했다.

“이 녀석이 정말! 이 늙은이는 안 보이는 게냐?”

“허허허, 선배. 질투하시는 것입니까?”

“질투는 무슨! 이 늙은 삭신이 또 한 번 내공의 손실을 감수하면서까지 추궁과혈을 해 주었는데 녀석이 입을 싹 씻잖아!”

용무린은 아차 싶었다.

‘아! 그렇지. 추궁과혈 덕에 소생환의 기운이 허무하게 흘러나가지 않고 고스란히 기혈에 남아 있을 수 있었지?’

은과 원은 언제나 확실히 한다.

“감사합니다, 장로님. 언제고 꼭 갚도록 하겠습니다.”

“이 자식이 지금 누굴 애로 아나? 엎드려 절 받기는 나도 싫어 이놈아! 흥!”

확실히 삐졌다.

콧소리와 함께 팔짱을 낀 화운장로가 짐짓 옆으로 돌아섰다. 머리가 새하얀 중늙은이가 토라진 모습이 귀엽게까지 보였다. 풀썩 웃어 보인 일각대사가 말을 이었다.

“혹시 어제 우리가 나누었던 대화를 들었는가?”

“어떤……?”

“천기자께서 하셨던 말씀 말이네.”

“아!”

기억이 났다. 쓸 만한 물건이 있으니 망가지기 전에 지금 당장 가서 데리고 오라고 했던가?

‘얻다 대고 감히 물건 취급이야?’

망할 영감탱이라는 생각이 불쑥 치솟았다.

“우리와 함께 가세. 천기자 선배께서 기다리고 계시네.”

살아 있는 무림의 전설 천기자. 그가 대체 나를 왜 찾는 것일까?

‘궁금하긴 하군…….’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용무린은 즉시 대답했다.

“싫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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