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아생연후살타
“그래그래, 싫…… 응? 용 시주 지금 뭐라고 했……?”
“싫다고요.”
“……!”
마냥 사람 좋게 고개를 끄덕이던 일각대사의 눈이 동그래졌다. 입이 쩍 벌어졌다.
“아니 대체 왜 싫은데 이놈아?”
토라져 있던 화운장로마저 다시 몸을 돌렸다. 고함을 빽 질렀다. 툴툴거리는 용무린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아, 몰라서 물어요?”
“……?”
“마공으로 무장한 시시껄렁한 놈들이 감히 본가를 노리고 있는 판국에 내가 가긴 어딜 간다는 말입니까?”
화운장로나 일각대사 모두 할 말이 없었다.
생각해 보니 맞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어떤 자식들인지는 몰라도 깡그리 뿌리를 뽑아 버릴 겁니다. 그러기 전에는 아무데도 안 갑니다.”
“그, 그거야 맞는 말이긴 한데……. 그래도 천기자 선배께서 너를 급히 찾는 것은 네게 그만한 용무가 있기 때문인데 그걸 그렇게 칼로 싹둑 베어내듯 거절한다는 것은…….”
“급한 건 그 양반이지 저는 아닙니다.”
“뭐얏?”
폭발하려는 화운장로의 팔을 일각대사가 슬쩍 잡았다. 자신이 대신 나섰다.
“용 시주. 성산의 일을 잊으셨소? 무림사에 길이 남을 영웅 절대검신 독고황의 유진을 마공을 사용하는 미지의 적에게 탈취당했단 말이오.”
“그 유진, 저는 필요 없습니다. 저는 홀로, 제 능력으로 우뚝 설 겁니다.”
“……!”
“……!”
한결 같은 용무린의 태도에 두 사람은 넋 나간 표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무림인 이라면 누구나 영광스러워 할 천기자의 부름도 가볍게 거절하는 것은 물론이요 절대검신 독고황의 절기마저 필요치 않는다니!
“이, 이 녀석아! 혹여 마의 무리들이 절대검신의 무공을 악용한다면 끔찍한 일이 벌어진단 말이다.”
“그 참극을 막기 위해서는 어서 빨리 천기자 선배께 단서를 얻은 후 절대검신의 절기를 되찾아야 하지 않겠소? 그러기 위해서는 가야만 하오 용 시주. 천기자께서 용 공자를 찾으시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오.”
다시 한 번 두 사람이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용무린은 요지부동이었다.
“아, 일 없다니까요! 누가 뭐라고 해도 본 문의 안전이 먼저입니다. 비룡문을 노리는 시시껄렁한 놈들을 싹 쓸어버린 후에야 가도 갈 겁니다.”
그 말을 끝으로 용무린은 휙 돌아서 버렸다.
“……!”
“……!”
그런 용무린의 뒷모습을 화운장로와 일각대사가 멍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
흑야방.
밤을 낮처럼 살고 있는 조직인지라 정오임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인기척이 드물었다. 아니, 어쩌면 어젯밤 심야에 벌어졌던 일의 뒤처리 때문에 다들 늦잠을 자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 그 자식들도 참…….”
물론 용무린이 알 바는 아니다.
용무린은 엽초웅이 사용하던 내실로 향했다. 내 집인 듯 당당하게 걸음을 옮겼다.
“누, 누구…… 떠헙!”
“어헉!”
정신을 차리고 있던 흑야방의 조직원 몇몇이 침입자를 알아보았으나 이내 기함을 토해냈다. 사신이라도 본 듯 움찔 몸을 떨었다.
“어, 됐어. 가서 일들 봐.”
마치 자신이 이곳의 주인이라도 된 듯 자연스러운 용무린의 손짓에 녀석들은 그저 고개를 조아리느라 바빴다.
“예? 아, 예.”
“수, 수고하십시오.”
후다닥. 파박.
혹여 또 무슨 일이라도 벌어질까 두려운 것인지 어디론가 후두둑 튀어 사라졌다.
피식.
“그 새끼들 의리하곤…….”
간밤에 자신이 저질렀던 일은 생각지도 못한 용무린은 흑도 조무래기들의 쥐똥만 한 배포를 나무랄 뿐이었다.
쾅!
“야, 노백인!”
“어헉!”
부숴버릴 듯 문을 열고 들어가 외치는 용무린의 목소리에 새로운 흑야방주 노백인은 소스라치게 놀라 몸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저, 저 인간이 왜 또 온 거지?’
두렵다. 정말 너무나 두렵다.
또르르.
식은땀 한 줄기가 노백인의 이마를 타고 흘렀다.
“어제 네가 알려준 곳 말이다.”
“예?”
“그 왜 있잖아 인마. 유강촌 동쪽 끝 외딴 장원…….”
“아! 예, 그곳이 바로 그놈들의 근거지입니다.”
노백인은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호들갑스럽게 되물었다.
“그곳에 놈들이 어, 없었습니까?”
그렇다면 자신은 이제 죽은 거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그 개자식들이 대체 어디로 튀었담?’
그곳에 놈들이 있었다면 필시 혈투가 벌어졌을 테고 그랬다면 제 아무리 용무린이라고 해도 몸이 지금처럼 성할 수는 없었을 테니까.
“아니? 있던데?”
“휴우. 다행입니다.”
노백인은 살았다는 듯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마에 흐르는 식은땀을 닦아 내며 물었다.
“그, 그런데 이곳엔 또 어쩐 일로……?”
“으응, 별 거 아니야.”
“……?”
“어제 이곳을 벗어나자마자 네가 말해 준 곳을 찾았거든, 거 시답잖은 놈들 숫자가 꽤 많더라고.”
‘거짓말!’
노백인은 속으로 부르짖었다.
놈들의 실력을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확실한 것은 그리 만만한 실력의 소유자들은 분명히 아니라는 거다.
‘일류의 완숙 경지에 올랐던 엽방주를 그야말로 파리 목숨처럼 가지고 놀았던 놈들이란 말이야.’
하물며 숫자까지 그렇게 많은데 어찌 저렇듯 멀쩡하단 말인가? 거짓말이다. 거짓말일 수밖에 없다
“메뚜기들도 아닌데 어쩜 그렇게 잘도 튀는지 말이야.”
씨이익.
용무린의 입가에 흰 선이 쭉 그어졌다.
오싹!
노백인의 등줄기를 타고 소름이 오돌토돌 쫙 돋았다. 저 미소는 일종의 경고인 것이다.
“절정 네 마리에 일류급 서른다섯 마리가 있더라. 그 중 절정은 세 마리, 일류급은 서른세 마리를 잡았거든? 그런데 가장 큰 놈이 튀었어. 절정에서도 완숙의 경지에 있던 놈 말이야.”
“……!”
노백인의 입이 쩍 벌어졌다.
‘저, 저 말을 믿어야 해? 아니면 말아야 해?’
용무린의 말대로라면 그 빌어먹을 놈들은 깡그리 청소가 된 셈이다. 이제 흑야방으로 더는 찾아오지 않을 것이라는 뜻이다.
‘두고 보면 알게 되겠지.’
노백인의 뇌리에 용무린에게 바칠 상납금 준비를 서둘러야 하겠다는 생각이 번득 스치고 지나갔다.
“너도 알다시피 말이야, 그런 놈들은 두 번 다시 기어오르지 못하도록 반드시 잡아서 목을 따 줘야 하는 거거든.”
“여, 여부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말인데 뭐 기억나는 것 없어?”
“예, 예?”
“그 왜 특징 같은 것 있잖아 인마. 대화를 나누다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 살짝 흘러나왔던 이름이나 지명 같은 단서들 말이야. 잘 생각해 봐. 기억이 나지 않는다면 내가 도와줄 테니까 말하고…….”
씨익.
그러면서 용무린은 다시 한 번 시리게 웃었다.
‘씨바, 차라리 고문을 한다고 말해라.’
생각나지 않는다면 고문을 해서라도 떠오르게 만들어 주겠다는 엄포, 고문을 하겠다는 직설적인 말보다 솔직히 저렇게 돌려 말하는 소리가 더 무서웠다.
말은 돌려서 했었지만 새벽의 일로 미루어 보건대 언제나 자신의 말을 즉시 행동으로 옮기는 사내라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었다.
‘떠올라라, 제발.’
눈을 뜨자마자 고문을 당할 수는 없는 일, 노백인은 사력을 다해 기억을 떠올렸다. 아주 작은 것이라도 쥐어짰다. 단서를 모았다.
그렇게 일다경이나 지났을까?
우드득. 투드득.
용무린의 주먹에서 심상치 않은 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아! 그렇지!”
노백인이 호들갑스럽게 눈을 치켜떴다.
“합비!”
“합비?”
“예, 그렇습니다, 공자님. 안휘성 합비. 놈들은 틀림없이 합비의 어딘가에 근거지가 있을 겁니다. 술자리에서 합비에 연락이 어쩌고 하다가 급히 입을 다물었던 장면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호오! 합비라…….”
그만큼 들었으면 되었다. 쥐어짜 보았자 더는 나올 것도 없을 것이다.
‘일단 합비부터 확인해 보자.’
하오문을 방문할 차례다.
“내 놔.”
“예? 뭐, 뭘……?”
“뭐긴 뭐야 인마 보호비지.”
“……!”
너무나 천연덕스러운 용무린의 말에 노백인은 뜨악한 얼굴이 되었다.
“내일이 보름이지 아마?”
“그, 그렇습니다.”
“내가 친히 왕림했는데 굳이 금룡전장에 맡길 필요까진 없잖아? 내놔 보호비 삼 할.”
“아, 예. 그러셔야지요.”
‘빌어먹을 인간.’
대답을 하면서도 노백인은 도대체 어떻게 해서 정파에 저런 인간이 나올 수 있는지 당최 이해가 가질 않았다.
‘니미럴, 보호비를 뜯어먹는 정파라니!’
그것도 색주가를 주름잡는 흑도방파에게서 보호비를!
생각하면 할수록 기가 찼다.
절그럭.
노백인은 재빨리 금고에서 주머니 하나를 꺼냈다.
‘삼 할이라고 했었지?’
그렇다면 은자를 조금 덜어내야 한다.
그런데,
홱. 쩔그럭.
그따위 수작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용무린이 주머니를 가로챘다. 살짝 흔들어 보이며 수를 가늠했다.
“이 정도면 됐어. 더는 필요 없어.”
‘삼 할이라며! 몇 개 덜어내야 한단 말이다, 이 괴물아.’
튀어나오려는 절규를 노백인은 사력을 다해 참아내야만 했다.
히죽.
입꼬리를 슬쩍 말아 올린 용무린이 지나가듯 툭 말을 던졌다.
“기억해라. 보호비.”
“예?”
“보호비 말이야, 인마. 그게 무슨 뜻인지 몰라?”
“……!”
노백인의 눈이 서서히 커졌다.
‘서, 설마 정말로 우릴 지켜주겠다는 의미에서의 보호비를 말하는 거야?’
용무린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용무린의 시선은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다.
‘진짜다. 그냥 돈을 뜯어내기만 할 생각이 아니야. 진심이었어.’
판단이 서자마자 노백인의 머리는 바닥을 세게 찧었다.
쿵!
“믿겠습니다, 공자님.”
돈을 뜯기긴 했지만 속은 후련해졌다.
‘그렇지 않아도 방을 어떻게 유지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는데…….’
간밤에 작살난 것은 엽초웅뿐만이 아니었다.
흑야방의 주력인 야차조도 스물이 넘는 놈이 병신이 되어 버렸다.
‘머지않아 흑야방이 약해진 틈을 타 도전해 올 놈들이 넘쳐날 터인데……. 정말 잘 됐다. 이제는 걱정할 일이 없어진 거야.’
금룡전장에 맡길 이름은 삼절일학 용무린이었다.
비룡문과는 별개로 자신이 직접 나서겠다는 뜻, 앞으로 무한의 밤을 지배하는 사람은 용무린이 되리라.
***
그 시각 연화주선 화운과 일각대사의 고민은 깊어지고만 있었다.
“망할 놈 같으니, 그냥 우리와 함께 가면 좀 좋아?”
“천기자께서도 미리 짚어 보셨을 만큼 큰 사안인데…….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선배.”
“누가 뭐래? 그런데 녀석이 싫다고 하잖아. 딱 잘라 거절을 하는데 뭘 어쩌라고?”
그간 여러 가지를 생각해 보았던 듯 일각대사의 목소리가 바로 뒤를 이었다.
“용 시주가 원하는 것은 바로 가문의 안전, 비룡문의 안전을 담보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지.”
“그것이 문제라면 우리가 보장을 해 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선배?”
“우리가 보장을?”
“예.”
“호오…….”
화운장로의 눈이 서서히 동그래졌다.
듣고 보니 시간이 문제일 뿐 소림과 개방의 힘이라면 그리 어렵지도 않은 일이었다.
“선배께서도 아시듯 비룡문을 노리는 것은 마공을 익힌 모종의 세력, 필시 절대검신의 유진을 훔쳐 달아난 미지의 적과도 관계가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아예 관계가 없진 않을 거야.”
어떤 식으로든 연관이 있을 것이란 생각이었다.
70년 전 정마대전 이후 자취를 감추다시피 했던 마의 종자들이 다시 대놓고 활동을 시작했다. 그 이면에는 필시 모종의 대계가 숨어 있으리라.
‘그동안 숨을 죽이고 있던 마교가 다시 발호를 시작하는 것인지도 몰라.’
‘이들의 꼬리가 결국에는 십만대산으로 이어져 있을 가능성이 커.’
화운과 일각 모두 마교를 떠올렸다.
마교. 그 두려운 이름.
아니기만을 바라며 두 사람은 말을 이었다.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세력의 한 축이 비룡문의 몰락을 노렸습니다. 우리는 비룡문을 지켜야 합니다.”
“암. 절대검신에게 무림이 진 빚을 굳이 입에 담지 않더라도 비룡문은 지켜야 해.”
비룡문은 완전한 의미의 무가가 아니었다.
비록 신주오가의 일원이라고는 하지만 도움의 손길이 절실할 터, 협이라는 관점에서도 누군가는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야만 했다.
“지금 즉시 소림에 연락을 취하도록 하겠습니다. 방장께 사실을 고한 후 도움을 요청하겠습니다.”
“좋아. 나 역시 방주께 연락을 취해 보도록 하겠네. 아마, 흔쾌히 나설 게야.”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두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도움을 청하기에 앞서 용대명과 대화를 나눠야 하기 때문이었다.
***
반 시진 후.
용대명은 연화주선 화운과 일각대사의 제안을 고맙게 받아들였다.
“감사합니다, 두 분. 본 비룡문은 소림과 개방의 우의를 언제까지나 잊지 않을 것입니다.”
“킁, 사해가 동도 아니오? 아니 할 말로 우리 개방에 무슨 문제라도 생기면 비룡문에서는 입을 싹 씻을 생각이셨소? 과례이니 거두시오.”
“허허허. 맞습니다, 용 문주님. 비룡문은 신주오가의 일원, 절대검신께 무림이 진 빚을 생각해서라도 응당 나설 일인 것이지요.”
“알겠습니다. 우리 비룡문은 앞으로도 협을 지켜나가는 데 모든 힘을 아끼지 않겠습니다.”
“킁, 그러면 되는 거요, 그러면.”
“허허허. 그렇습니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화운장로와 일각대사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조금이라도 빨리 소림과 개방에 연락을 취하려는 모양이었다.
‘아들아, 정말 대단하구나. 네 심모원려에 두 사람이 바로 나서게 됐다.’
천기자의 부름을 면전에서 거절했다는 말에 화들짝 놀랐지만 용대명은 이내 용무린의 깊은 내심을 짐작해낼 수 있었다.
아생연후살타.
인생의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는 바둑의 격언 중 하나인데, 내가 확실히 살아난 다음 상대의 돌을 잡으러 가야 한다는 뜻이다.
‘아들아. 이제 우리 비룡문은 걱정할 것 없다. 그러니 너는 세상을 훨훨 날아오르려무나.’
***
“야, 여기 분타주 좀 보자!”
그 시각 용무린은 하오문의 무한 분타를 잘도 찾아내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홍연루.
여타의 색주가와는 비교를 불허할 만큼 압도적으로 크고 화려함에도 불구하고 흑야방을 비롯한 그 어느 흑도방파에서도 감히 이를 들이밀지 못하는 곳, 바꾸어 말하자면 그들 전부가 힘을 모아도 어쩔 수 없는 곳이라는 뜻이었다.
당연히 홍연루가 이곳 무한의 하오문이라고 광고를 하는 셈이었다.
끼이익.
“어떤 미친놈이 벌건 대낮부터 오입질을 하려고 찾아온 거야?”
선잠을 깨 짜증이 난다는 듯 봉두난발을 한 사내가 인상을 확 긁었다.
피식.
용무린은 풀썩 웃어 버렸다.
그리고…….
빠악. 철퍼덕.
인상을 긁었던 사내는 턱이 확 돌아간 채 바닥에 너부러져야만 했다.
벌컥. 후다닥.
“웬 놈이냐?”
“이놈! 이곳이 어딘 줄 알고 감히 행패냐?”
이곳저곳에서 인상 깨나 험악해 보이는 사내들이 툭툭 튀어 나왔다. 식상한 대사를 남발했다. 그런 사내들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용무린은 한마디 툭 던졌다.
“어떤 놈이 분타주냐?”
“이런 미친놈.”
“여기가 어딘 줄 알고 감히 개수작이야?”
대뜸 욕지거리부터 하는 꼴이라니!
하여간 아랫것들은 이래서 안 된다.
‘보는 눈이 없거든.’
성질 같아서야 죄 패대기를 친 후 이야기를 하고 싶지만, 그래도 부탁을 하러 온 처지 아니던가? 용무린은 점잖게 다시 한 번 용건을 밝혔다.
“나는 분명히 분타주 좀 보자고 했다.”
“개수작 말어.”
“퉤. 넌 오늘 뒈졌어.”
두 팔을 걷어붙인 녀석들이 다짜고짜 달려들었다.
기분 좋게 웃어 보인 용무린이 주먹을 불끈 움켜쥐었다. 그대로 마구 휘둘렀다.
빠악. 퍼억.
“크아악.”
“커헉!”
“분타주 좀 보자니까 왜 자꾸 덤비고 지랄들이야 이 새끼들아-아!”
뻐억. 빠아악. 퍽퍽퍽.
“우와악!”
“끄아악!”
파앙. 빠바박. 퍼억.
“분타주님을 노린 적이다-아. 우와-악.”
“놈을 막아라-아. 커헉.”
난리도 이런 난리가 없다.
정확히 열다섯 놈을 패대기치고 다섯 개의 층을 오른 후에야 비로소 용무린은 그럴 듯한 사람을 눈앞에 마주할 수 있었다.
소가흔.
하오문 무한 분타주이자 절정의 고수.
‘기습인가?’
수하들이 내지르는 아우성에 하오문을 노린 기습으로 판단한 소가흔은 재빨리 부채를 집어 들었다. 각오를 단단히 한 후 즉시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그런데…….
헤죽.
“여어, 이제야 급 좀 되는 얼굴 한 번 보는가 싶군그래.”
곱상하게 생긴 사내 하나가 생긴 것과는 달리 우악스럽게 수하 한 사람의 목 줄기를 틀어쥔 채 웃고 있었다.
다름 아닌 용무린이었다.
움찔!
용무린의 미소를 보는 순간, 소가흔의 머리끝이 쭈뼛 곤두섰다. 부채를 쥔 손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강하다.’
위험한 사내였다. 대체 왜 저 사내가 하오문의 분타에 와서 행패를 부리는 것일까?
“꾸냥이 여기 분타주야?”
“그렇습니다만…….”
용무린은 목 줄기를 틀어쥐고 있던 사내를 거칠게 바닥에 뿌렸다.
철퍽.
“허으…….”
꿈틀.
바닥에 패대기쳐진 수하의 몸이 축 늘어졌다.
소가흔의 아미가 위로 휙 치솟았다. 용무린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풀썩 웃으며 말을 이었다.
“훗, 날 원망하진 마. 먼저 덤빈 것은 여기 이 멍청이들이라고.”
용무린이 주변을 매섭게 쓸어 보았다.
“주둥이 있는 놈들은 어디 한번 이 사태에 대해 이야기 좀 해 보지그래?”
“이놈! 네 놈이 쳐들어와 다짜고짜 행패를…….”
후욱. 뻐어억.
“크헉!”
욕지거리를 하던 사내는 숨이 콱 막혀오는지 두 무릎을 공손하게 꿇었다. 다시 숨을 쉬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쯧쯧쯧, 말조심해야지. 요즘처럼 험한 세상에 함부로 입 놀리다가는 죽기 딱 십상이라니까? 나처럼 맘씨 좋은 사람 만나기도 쉽지 않아요.”
용무린의 시선이 다시 소가흔에게로 향했다.
“내 분명히 말하지. 나는 들어오면서 분명히 말했어. 여기 분타주 좀 보고 싶다고 말이야.”
“……!”
소가흔의 시선이 용무린을 넘어 사내들에게로 향했다.
확실히 용무린의 말이 맞긴 한 모양이었는지 소가흔과 시선을 맞추려는 사내들이 없었다. 다들 쭈뼛쭈뼛 시선을 피했다. 고개를 돌렸다.
‘이런 한심한 놈들 같으니!’
그제야 어찌된 영문인지 알 것 같았다.
‘척 보니 샌님인 줄 알았겠지.’
대뜸 분타주 어쩌고를 운운하니 같잖기도 했을 것이다.
‘당연히 말이 곱게 나가지 않았을 테고…….’
십중팔구는 주제도 모르는 녀석들이 먼저 주먹을 뻗었을 것이다. 반대로 처음부터 공격 의사를 가지고 찾아온 적이었다면 저렇듯 힘들게 주먹을 쓸 필요도 없는 일이다. 허리춤에 매어 놓은 도는 장식이 아닐 테니까.
“주먹으로 교훈을 내려준 것을 감사히 여기고 모두 사라지도록!”
“분타주님!”
“저희들은 그저…….”
소가흔이 사내들의 말을 툭 잘랐다. 엄한 목소리로 매섭게 외쳤다.
“지금 당장 움직여. 그렇지 않으면 죄를 묻겠다.”
“예, 옙!”
“알겠습니다.”
후다닥. 타닷.
사내들이 바닥에 쓰러진 동료들을 챙겨 황급히 사라져 갔다. 소가흔의 시선이 용무린에게로 돌려졌다. 살짝 옆으로 물러섰다.
“저를 따르시지요.”
씨익.
“그거 좋지.”
보기 좋은 미소와 함께 용무린은 겁도 없이 대뜸 안으로 들어섰다.
“……!”
묘한 표정의 소가흔이 다소곳이 그 뒤를 따랐다.
5층의 끝.
자신의 방에 도착한 소가흔은 말없이 차를 끓이기 시작했다. 지나가듯 입을 열었다.
“삼절일학 용무린. 가문의 굴레를 벗어났다더니 단숨에 하늘로 날아오르셨군요. 음양쇠맥증에서 벗어난 지 이제 겨우 백삼십여 일, 정말 대단하시네요.”
“……!”
용무린의 눈이 순간적으로 가느다래졌다. 소가흔이 샐쭉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정주의 무투장을 휘젓고 다니던 주먹 솜씨는 여전하신 듯하네요. 아니, 되레 손속에 사정을 두어 주셔서 감사할 따름이에요.”
과연 하오문.
무한과 정주 사이의 거리가 상당함에도 벌써 그 사실을 알고 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인가?’
소가흔의 시선이 용무린의 허리춤으로 향했다.
“그 도가 풍뢰인가요? 공손 노인의 손에서 탄생한? 소검비연은 어디에 있죠? 오른손? 아! 도를 오른손으로 사용해야 하니 소검비연은 왼손에 감겨져 있겠네요. 그렇죠?”
그것까지 알고 있다.
나에 대해 지나치리만큼 너무나 잘 안다.
‘그렇다는 것은…….’
용무린의 눈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확신에 가득 찬 목소리로 질문을 던졌다.
“너 나 막 좋아하고 그러냐?”
“……?”
“내가 너무 좋아서, 막 알고 싶고 그래서 어쩔 줄 모르는 거냐?”
아아, 나란 남잔…….
‘이 저주받을 빛나는 외모. 뭍 여인들의 가슴에 자꾸만 불을 질러 어쩌겠다는 것이냐?’
백리세가에서도 이랬다.
허드렛일을 하는 시비들마저도 나만 보면 좋아서 어쩔 줄 모르고 그랬다. 무엇이든 해 주고 싶어 사족을 못 썼다.
‘백리소옥이야 사모하는 다른 사내가 있었으니 내 매력을 피해갈 수 있었지만 제갈세가의 여식은 천잠사 손수건까지 냉큼 줄 정도였지.’
기억에는 없지만, 상관세가의 여식 또한 나만 보면 초상화를 그려 달라 난리였다고 한다. 초상화는 개뿔, 그게 다 내게 환심을 사려고 그랬던 것일 게다.
‘그놈의 유행성 고뿔과 세가의 지엄한 규율만 아니었어도 참 좋았을 텐데.’
그런데 상관세가의 여식에게는 달구경이나 산책 가자는 말을 했을까 안 했을까?
‘제갈세가의 여식에게는 안 했던 것이 확실하고…….’
심지어 그녀는 아직까지 이름도 모른다.
그런 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무렵, 멍하니 용무린을 쳐다보고 있던 소가흔이 고함을 빽 질렀다.
“아니거든요?!”
“아니야?”
“네. 전혀요.”
“그럼 정주의 소가령이 조동아릴 놀렸네.”
대답을 바로 못하는 걸 보니 맞네. 그거네.
“둘이 자매지?”
“……네.”
좋다 말았다.
‘그러면 그렇지…….’
하마터면 밤에 달구경 겸 산책이나 나가자는 말을 할 뻔했다.
‘지난 바 무공 때문에 고뿔 이야긴 하지 못했을 테고 지엄한 가문의 규율 어쩌고도 하지 못했을 텐데 과연 뭐라고 했을까?’
운을 띄우진 않았지만 참 궁금했다.
‘그건 그렇고…….’
“네가 언니냐?”
“제가 동생이거든요?”
“정말?”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용무린의 눈이 가느다래졌다.
“제가 동생이라니까요!”
소가흔이 발끈했다. 목소리가 다시 확 높아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용무린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거 참, 분명히 소가령 쪽이 훨씬 더 어려 보이는데……. 화장을 하지 않아서 그런가?”
그 말에 이어 혼잣말처럼 나직하게 ‘화장을 한다고 달라지긴 하나? 나이 차이가 이렇게 많이 나 보이는데?’ 라고 중얼거리기까지 했다.
빠직.
소가흔의 이마에 굵은 힘줄이 돋아났다.
“지금 대체 뭐하자는 거예욧!”
“아, 미안. 신경 쓰지 마. 뭔가 생각 할게 조금 있어서 말이야.”
예민하기는, 훗.
가슴도 소가령 쪽이 훨씬 더 크다는 말을 하고 싶어 용무린은 입이 근질근질했지만 꾹 눌러 참았다. 어쩐지 그 말까지 하게 되면 산통이 다 깨질 것 같았다.
“정보야 소가령에게 들어 알 수 있다지만, 내 얼굴은 대체 어떻게 알았지?”
“이곳에서만 벌써 5년이에요. 당연히 알 수밖에요. 삼절일학께서 서화를 그리시기 위해 경치 좋은 곳을 좀 찾아다니셨어요? 그때 먼발치에서 몇 번 뵈었지요.”
피식.
“첫 눈에 반했구나?”
다 안다, 다 알아.
말은 그렇게 쏘아대듯 하지만 역시 내가 좋은 거지? 하지만 들키니 부끄럽지? 그렇지?
“당신 정말!”
“됐고, 정보 좀 사자.”
***
씩씩.
용무린이 떠나간 자리, 홀로 남은 소가흔은 분을 삭이지 못하고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나쁜 자식. 눈깔은 장식이야, 뭐야?”
아무리 화장을 하지 않았다지만 어떻게 소가령 쪽이 훨씬 더 어려 보인다는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성질 같아서는 콱 그냥!”
불끈. 파르르.
소가흔이 움켜 쥔 부채가 격렬하게 떨렸다.
당장에라도 쫓아가 한철로 만들어진 이 부채로 뒤통수를 한 대 후려갈기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그때였다.
스슷.
소가흔의 뒤에 그림자 하나가 나타났다.
“아서라.”
“아! 사부님!”
하오문의 다섯 장로 중 하나인 양하린이었다. 극모란이라는 별호에서 알 수 있듯 그녀의 금사편은 깨나 무서운 가시라고 알려져 있다.
“보통 녀석이 아니었다. 이곳에 들어오자마자 내가 숨어 있는 곳을 향해 슬쩍 웃더라.”
“설마…….”
“사실이다. 분명히 내가 숨어 있음을 알고 있었어.”
서릿발처럼 꽂히던 그 시선!
그 안에 깃든 광포함을 생각하면 지금도 등골이 서늘해지는 양하린이었다.
“그, 그래도 사부님이라면 능히 감당하실 수 있잖아요.”
마치 아빠가 다 이길 수 있지? 하며 묻는 말투다.
양하린은 씁쓸한 미소로 고개를 흔들며 답했다.
“길고 짧은 것은 대어 봐야 알겠지만, 솔직히 나도 오래 버티긴 힘들었을 게다.”
“예-에?”
소가흔의 눈이 동그래졌다.
“방금 승선포정사사에 심어둔 세작으로부터 갑호 정보가 날아들었다.”
양하린이 작은 쪽지 하나를 내밀었다.
“……!”
그것을 받아 읽던 소가흔의 눈이 점점 더 커다래졌다.
그 안에는 간밤에 용무린이 유강촌 동쪽 끝 외딴 장원에서 어떤 적을 만났는지 또 얼마만큼의 적을 상대로 분투했는지가 고스란히 적혀 있었다.
“마공을 익힌 절정 어림의 적 셋에 일류급 고수 서른셋을 한 자리에서 베었다.”
더 중요한 사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리 멀쩡하다는 사실이다.
“서, 설마……. 이거 너무 부풀려진 것 아니에요?”
“물론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아무리 과장이 섞였다고 해도 변하지 않는 사실은 바로 마공을 익힌 존재들의 출현을 저 용무린이라는 사내가 홀로 부숴 버렸다는 거야.”
“그, 그렇다면…….”
“그래. 저 사내는 진짜다. 가문의 굴레인 음양쇠맥증에서 벗어난 지 불과 백삼십여 일, 천재라는 말로도 부족한 무서운 재능의 소유자다.”
꿀꺽.
소가흔이 마른침을 크게 집어 삼켰다.
“그렇다면 합비에서 알아봐 달라고 한 그 일 역시?”
“그래. 그놈들의 뒤를 쫓을 생각인 것일 게야.”
소가흔의 안색이 한순간에 어두워졌다.
그제야 자신이 어떤 의뢰를 받아들인 것인지 알아차린 것이다.
“너무 걱정마라. 우리는 정보 집단이 아니더냐? 그 정도를 알아보는 것으로는 우리 하오문을 공격해 들어오지는 않을 게다.”
“그, 그래도…….”
“오히려 잘 받아들였다. 미래가 기대가 되는 사내에게 약간의 위험과 수고를 감수함으로써 빚을 지웠으니 되레 남는 장사를 했다.”
“그렇다면 다행이에요, 정말. 하지만 정보 수집에 만전을 기해야 한다고 다시 연락을 해야겠어요.”
“그러려무나.”
재빨리 입에 담았던 조치를 취한 다음 소가흔의 시선은 곁에 있던 동경으로 향했다.
“……!”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소가흔은 입술을 질끈 깨물더니 서랍을 열었다. 연지와 진주분 그리고 흑묵을 꺼내어 화장을 하기 시작했다. 잠자코 그 모습을 지켜보던 양하린이 빙그레 웃었다.
***
비룡문으로 돌아오는 길. 용무린의 눈이 매섭게 빛나기 시작했다.
“이레면 알 수 있다고?”
하오문을 통해 사고 싶은 정보는 한 가지, 흑백 양도를 막론하고 지난 삼 년 사이 합비의 모든 문파에서 제자들이나 무사들의 숫자가 갑자기 확 늘어난 곳이었다.
“얼굴을 가리지도 않은 놈들이었으니만큼 직계나 방계의 식솔들이나 제자는 아니었을 거야.”
새로이 받아들인 놈들이겠지.
마공을 익히긴 했지만 아직은 치명적인 수준까지 올라서지 못했다. 그 말은 곧 양성하기 시작한 지 몇 년 지나지 않았다는 뜻이 된다.
“크크큭. 이레 후 놈들의 꼬리가 드러난다.”
천기자?
흥, 없어도 된다.
“천기 따위 읽지 않아도 충분히 꼬리를 잡을 수 있어.”
꼬리만 잡으면 몸통은 금방이다.
“감히 내 가문을 노렸다 이거지?”
조금씩 야금야금 피를 말려줄 테다.
“한 놈도 남기지 않고 깡그리 부숴버리겠어.”
그렇게 이를 갈며 비룡문으로 돌아오니 생각지도 못한 소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소림과 개방의 후의.
연화주선 화운과 일각대사가 이미 숭산과 개봉으로 연락을 취했다고 한다.
“네 기지가 빛을 발했다. 어떻게 결말이 나고 어떤 분들이 지원을 오게 될지는 모르겠으나, 머지않아 우리 비룡문에 소림과 개방의 고수들이 오는 것만은 분명하구나.”
한시름 던 듯 용대명의 얼굴은 확실히 밝아 보였다.
그러나…….
‘하아, 이 망할 놈의 거지 영감과 땡중을 어쩐다?’
용무린의 속은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협과 강호의 도의를 내세워 비룡문의 일에 나서겠다고는 했지만 시커먼 그 속이 빤히 들여다보였다.
‘소림과 개방의 고수들이 비룡문을 지켜줄 테니 이제 안심하고 천기자인지 뭔지 하는 박수무당에게 함께 가자는 수작이잖아?’
천기마저 읽어내기에 도호 대신 천기자로 불리건만 용무린에게는 그저 점사에 밝은 박수무당일 뿐이었다.
‘이거 문젠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