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기다려. 약속 지키러 갈게.
“하남을 향해 쭉 내려갔어.”
화운장로의 말은 사실 조금 뜻밖이었다.
“하남이요?”
“그래. 지금 우리 애들이 쫓고 있으니까, 오래지 않아 그놈의 목적지에 대한 가닥이 잡힐 거야.”
“……!”
가자미눈이 된 용무린의 고개가 갸웃 하고 기울었다.
‘놈이 왜 하남을 향해 도망쳤지?’
하남이 종착지일 까닭이 없다는 생각이 번득 들었다.
‘대가리가 장식이 아닌 이상 추적당할 것을 빤히 알면서도 곧장 자신의 근거지로 돌아갈 리 없지.’
그렇다면 어디로 가는 것일까?
놈의 근거지, 마공을 흑도 무리에 뿌리고 관리를 했던 배후는 과연 어디일까? 그리고 놈들은 정녕 신교 아니 마교의 선발부대인 것일까?
‘하남이나 그 주변은 확실히 아니야.’
그건 아무리 생각해도 가능성이 희박한 일이었다.
‘그렇게 먼 곳에서 하북 성도 인근의 흑도 잡배들에게 찾아와 마공을 뿌렸을 리 없어.’
솔직히 너무나 먼 거리다.
자신의 예상대로 이레를 넘기지 않고 찾아왔다는 것은 분명히 그 정도 거리 내에 놈들의 근거지 내지는 은거지가 있다는 뜻이었다.
‘환장하겠네, 정말.’
흑도 잡배들의 방파를 제외한다고 해도 이레 안의 거리에 들어오는 하북의 방파는 놀라울 정도로 많았다. 크고 작음에 관계없이 꼽자면 수십 곳을 훌쩍 넘어갈 거다.
‘이번 기회에 그걸 확실히 알아냈어야 했는데…….’
이번에는 자신이 직접 신문을 하려고 마음먹었었다.
화운과 일각 까지 모두 내보낸 후 두 노괴에게 심문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똑똑히 각인시켜 줄 작정이었다.
한데 화운과 일각이 산통을 다 깼다.
스윽.
용무린의 시선이 일각대사에게로 향했다.
찔끔.
용무린의 시선을 느낀 일각의 이마에 굵은 땀방울 하나가 또르르 흘러 내렸다.
“아미타불. 아미타불. 아미타불…….”
살계를 연 것을 회개라도 하듯 일각은 계속해서 염불만 열심히 외웠다.
‘일각 대사님까지 그럴 줄이야.’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혔다.
설마하니 죄인에게도 회개할 기회쯤은 줘야 한다는 설법을 강변하던 일각대사마저 노괴의 머리통을 터뜨려 버릴 줄은 정말 몰랐다.
‘아, 짜증나.’
별 수 없어진 용무린은 다시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매부리코의 마음을 읽어내기 위해 사력을 다했다.
물론 지금으로서는 무리였다.
‘하남으로 남하했다면 경우의 수가 너무나 많잖아!’
제 아무리 개방이라지만 결국 놓칠 게 빤했다.
변장, 변복을 하고 수로를 선택한다든지 아니면 보부상 행세를 한다든지, 하여간 빠져나갈 방법은 정말 너무 다양했고 그만큼 길도 사통팔달로 이어져 있다.
‘이젠 정말 별 수 없나?’
천기자.
용무린의 뇌리에 다시 한 번 그 이름이 스쳐지나 갔다.
“저, 무린아!”
그런 기색을 눈치 챈 것인지 아니면 ‘이때다.’ 싶었는지 화운장로가 은근슬쩍 선수를 쳤다.
“기왕 이렇게 된 것 천기자 선배를 한 번 찾아가 보는 게 어떠냐?”
“그래요. 가요.”
“……?!”
“……?!”
화운장로의 눈이 동그래졌다. 질끈 감겨 있던 일각대사의 눈까지 번쩍 떠졌다. 별 기대 없이 던진 말에 대뜸 가자고 나서니 믿어지지가 않았던 거다.
“저, 정말이지?”
“용 시주…….”
“아, 정말이라니까요! 가요, 가. 가서 한번 물어보자고요. 정말 천기에 우리가 알고 싶어 하는 것들이 다 나와 있는지 한 번 물어봐요.”
“와하하하. 그래, 그러자.”
“허허허. 잘 생각하셨소이다, 용 시주.”
일각대사마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기뻐했다.
***
부들부들.
밀전을 통해 올라온 보고서 한 장을 받아 본 상관초웅의 손이 격렬하게 떨렸다.
“이, 이게 지금…….”
정말 믿을 수가 없었다.
지난 몇 년 동안 그토록 공을 들여왔던 마령전사의 양성이 마지막 단계에서 수포로 돌아가 버리다니!
-음양자의 두 제자 모두 피살.
“어, 어떻게 이런 일이…….”
상관초웅은 말을 채 잇지 못했다.
밀지에 적힌 소식은 그만큼 놀라운 것이었다.
비록 제자라고는 하지만 그들의 나이 이미 고희를 넘긴 지 오래인 자들, 사부인 음양자가 흔쾌히 믿고 마령전사의 일을 맡겨 보낼 정도로 실력자인 거다.
“한데, 어떻게 개방의 화운 따위가……. 소림의 사대금강 중 하나라고는 하지만 겨우 일각 따위가 그 두 사람을 한 자리에서 죽일 수가 있느냔 말이야!”
-흉수는 분명히 개방의 화운장로와 소림의 일각대사가 맞으나 그 이전에 비룡문의 용무린과의 격돌이 있었던 것으로 밝혀짐. 그 전투로 입었던 부상이 너무나 치명적이었던 것 같음.
분하지만 그로 인해 개방의 화운과 소림의 일각을 당해내지 못했다고 볼 수 있음.
개방의 일결 제자들에게까지 소문이 다 퍼졌음.
그 광경을 목격한 제자들의 숫자가 통제를 하지 못하도록 많다는 뜻이고 사실이라는 뜻임.
밀지 하단에 겨우 몸을 빼낸 손사욱 대주가 남긴 밀지로 교차 확인한 사실이라고까지 적혀 있었다.
“……!”
상관초웅의 입이 다시 한 번 쩍 벌어졌다.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자신이 알기로 용무린이 가문의 족쇄이던 음양쇠맥증에서 벗어난 것은 이제 불과 반 년 어림에 불과하다.
‘아무리 하늘이 내린 천재라고 해도 그렇지, 불과 그 정도의 수련을 통해 어찌 음양자의 두 제자를 동시에 상대했으면서도 치명상을 입힐 수 있단 말이야?’
그제야 손사욱 대주가 계속해서 용무린에 대한 우려를 표명했던 일들이 떠올랐다. 그때 손사욱은 틀림없이 그랬었다. 그의 천재성이 우려가 된다고, 시간이 주어졌을 때 후환이 너무 두려우니 제거해야 한다고 말이다.
‘그때 조금 더 적극적으로 움직였어야 했나?’
후회라는 생소한 감정이 살짝 일었다.
그러자 뒤이어 다소 격렬한 그 무엇인가가 폭발하듯 솟구쳤다.
‘아니, 나는 오판을 하지 않았어. 그 따위 놈은 언제든 짓밟을 수 있는 벌레에 불과해. 내 아들이 출관만 하면 어차피 송두리째 사라질 운명인 수많은 무림인 중 하나에 불과하단 말이야.’
그보다는 아들이 출관하면 볼 면목이 없다는 게 더 걱정이었다. 마령전사의 양성과 자유로운 병력의 이동망 구축은 아들이 직접 준 기회였기 때문이었다.
‘만들어낸 이동망은 아직 건재한데 그보다 몇 배는 더 중요한 마령전사의 양성을 성공을 목전에 두고 실패해 버리다니!’
물론 완전한 실패는 아니다.
드러나지 않은 양육장의 숫자는 열다섯 곳보다 아직도 훨씬 더 많다. 그곳은 지금도 착실히 잘 관리되고 있다. 대법만 전개되면 언제든 충실한 병기가 되어줄 것이다.
‘문제는 그게 아니야.’
대법을 다시 펼치기 위해서는 다시 한 번 신교에 연락을 해서 대법을 펼칠 사람을 초청해야만 한다. 그 과정에서 이 일이 다 알려지게 된다는 것이다.
‘대법을 성공리에 끝내기 위해 지금 이 순간에도 죽을힘을 다하고 있을 내 아들의 귀에까지 소식이 들어가게 된다는 게 정말 문제란 말이지.’
아비인 자신을 믿고 그렇게 중요한 일을 맡겼는데 기대에는 부흥을 하지 못할망정 큰 손실을 입히다니! 아들이 그 사실을 알게 되면 얼마나 실망할 것인가?
‘그 실망을 조금이라도 줄여야만 해.’
실패를 딛고 새롭게 일어서기 위해서는 원인을 찾고 그것을 도려내 버려야 한다.
‘용무린, 화운, 일각……. 너희 버러지 같은 놈들이 바로 원흉이렷다?’
실패의 원흉은 너무나 분명했다.
두 번 다시 그런 일이 생기지 못하도록 이 기회에 그와 연결되어 일을 돕는 놈들까지 깡그리 정리해 버려야 할 것이다.
-양육장 열다섯 곳 모두 음양자의 두 제자와 손사욱 대주가 도착하기 최소 이레에서 열흘 사이 완전히 부서져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났음.
-그 일에도 역시 용무린이 큰 역할을 했다고 하는데, 도움을 준 것은 하오문의 몇몇 분타였다고 함. 양육장이 괴멸될 당시 하오문도의 얼굴이 노출되었고 살아남은 흑도문파 졸개들의 입을 통해 확인이 되었음.
‘이런 시건방진 하오문 떨거지들을 내 그냥!’
어차피 삭초제근을 마음먹었다.
‘우환거리를 도려낼 때는 아예 싹 다 도려내 버리는 것이 중요하지.’
반짝.
상관초웅의 눈에 실로 지독한 살기가 스쳐 지났다.
“손대주는 지금 어디에 있느냐?”
“사력을 다해 대산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지금쯤이면 이레 남짓 정도 거리가 남았을 것입니다.”
“그럼 밀전의 일은 모두 네가 하고 있느냐?”
“그렇습니다, 가주님.”
“좋아. 밀전 부 대주 장호, 명을 받아라!”
쿵.
“충, 하명하십시오 가주님.”
깊이 부복하고 있던 사내가 머리가 바닥을 소리 나게 찧었다. 큰 소리로 외쳤다.
“네게 모든 것을 일임하겠다. 내게 허락된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해서라도 용무린과 화운 그리고 일각을 세상에서 지워 버릴 생각이다. 큰 그림에 대한 방향을 알려줄 터이니 세부적인 그림과 색을 한번 칠해 보거라.”
“충. 목숨을 바쳐 완수하겠습니다.”
“좋아!”
마령전사의 일이 실패를 했으니 문책은 피할 수 없다.
하지만 그 문책이 내려오기 전에 환부 자체를 도려내 상처 입은 자존심만큼은 되돌려 놓을 생각이다.
“용무린, 화운, 일각……. 네놈들만큼은 기필코 천참만륙을 내어 주마.”
더불어 용무린의 가문인 비룡문과 하오문, 거기에 더해 시답잖은 몇몇 거지들까지 이 기회에 한꺼번에 싹 쓸어버릴 생각이었다.
상관초웅은 즉시 붓을 들었다.
일필휘지로 쓱쓱 글을 적어 나갔다. 부 대주에게 내려줄 큰 그림에 대한 지시 사항이었다.
***
여드레 후.
용무린은 자신의 가문인 비룡문이 자리한 호북성에 진입할 수 있었다. 하지만 곧장 가문으로 복귀하지는 않았다. 성의 경계를 넘기가 무섭게 서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분께서 아직도 그곳에 계실까요?”
“당연하지.”
“일전에 뵈었을 때 이곳으로 자리를 옮길 것이라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용 시주.”
“아, 그래요?”
용무린의 시선이 저 멀리 아스라이 보이는 청봉산으로 향했다.
‘정말 천기라는 걸 읽을 수 있는 사람일까?’
천기자.
무당의 전대 장로로서 현진이라고 하는 도호보다 천기자라는 별호로 무림에 그 명성이 훨씬 더 자자한 기인이었지만 용무린은 솔직히 천기라는 말 자체가 피부에 잘 와 닿지 않았다.
‘천기라는 게 진짜 있는 것이고 그 천기를 읽는다는 것이 진정 사실이라면, 내가 신마 진무량의 삶을 살다가 비룡문의 소공자로 다시 환생을 한다는 것도 미리 알고 있었어야하지 않나?’
생각하면 할수록 가당치 않은 일이라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왜냐하면 신마 진무량의 죽음과 환생을 천기로 미리 알아차리고 있었다면 자신이 전생을 자각하지도 못하고 아무런 힘도 없었을 때 찾아서 그냥 없애 버렸으면 되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다시 환생을 해서 무림정복을 꿈꾸고 있는 것도 모르고 있으면서 천기는 무슨 놈의 천기?’
그렇게 생각하니 천기자를 보러 가는 이 발걸음이 또 부질없게만 느껴졌다.
‘가야 해 아니면 말아야 해?’
용무린의 걸음이 조금 늦춰졌다.
망설이는 기색을 대번에 알아차린 화운장로가 고함을 버럭 질렀다.
“아, 뭐해 인석아! 호흡 좀 골랐으면 다시 신법을 전개할 테니 준비해. 예서 청봉산은 이제 지척이란 말이야.”
화운장로의 채근에 용무린은 몽니를 부렸다.
“아, 배고파요. 조금만 쉬었다가 가요.”
“용 시주. 사안의 중함을 생각해야 합니다. 이제 불과 한 시진만 더 신법을 전개하면 청봉산에 도착할 수 있지 않습니까? 천기자를 찾아뵌 후 식사를 하는 것이 더 좋을 듯합니다.”
일각대사마저 은근히 닦달을 했지만 용무린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어차피 근처잖아요. 요 며칠 섭생도 부족하고 잠자리도 풍찬노숙만 해서 그런지 몸도 많이 좋지 않다고요. 아시잖아요. 제가 그 두 노괴랑 맞붙어서 힘 다 빼놓은 거!”
그거야 두말하면 잔소리다.
제 아무리 화운과 일각이었지만 솔직히 불사신기의 침습만 없었다면, 아니 옆구리와 복부를 깊게 베여 창자가 삐쭉 튀어나올 정도의 부상만 입지 않았어도 그렇게 쉽게 승리를 거둘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때 다친 곳들이 아직도 다 회복되지 않았어요. 일단 요 앞에서 맛있는 것이라도 좀 먹고 가요.”
맛있는 것, 그 한마디에 화운장로의 마음이 완전히 뒤바뀌었다.
“그래, 좋다. 어차피 다 왔는데 뭐……”
“선배?!”
일각대사가 말려 보았지만 이미 침을 꿀꺽 삼키기 시작한 화운장로를 말릴 수는 없었다.
“아, 코앞인데 뭘 그래.”
“말씀하셨던 것처럼 코앞이잖습니까? 그냥 먼저 찾아뵌 후 편안히 식사를 하시는 편이 좋지 않겠습니까?”
“천기를 내다보신다면서요? 밥 먹고 오는 것도 이미 다 알고 계실 거예요.”
“……!”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그 안에 무슨 일이 생길 것이라면 미리 다 내다보시고 대책을 마련해 놓으셨을 텐데요 뭘. 안 그래요?”
“그으럼! 당연하지.”
용무린이 동의를 구하듯 화운장로를 바라보았고 화운은 성실하게 기대에 부응을 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러면 식사만 하고 바로 떠나도록 하지요.”
결국 일각대사도 손을 들었다.
“가자, 무린아 맛있는 것 먹으러……. 그런데 백주 하나 시켜도 되겠냐?”
“물론이죠. 장로님 드시고 싶으신 거 다 시키세요. 제가 다 사드릴 게요.”
“우하하하. 좋다, 좋아.”
화통한 웃음소리와 함께 화운장로는 용무린과 일각을 청봉산 아래의 조양현으로 이끌었다. 수경장이라는 이름의 커다란 객잔으로 쑥 들어갔다.
“휴우.”
긴 한숨과 함께 일각이 그 뒤를 따랐다.
먹고 뜯고 맛보고 즐기고.
“우하하하. 좋다, 좋아.”
“많이 드세요, 장로님.”
“오냐, 고맙다.”
허리띠까지 풀어 헤친 화운장로는 그야말로 걸신이든 것처럼 빠른 속도로 식탁 위의 모든 음식들을 자신의 위에 쓸어 담았다.
“더 시킬까요, 장로님?”
“그거 좋지. 우하하하.”
연신 음식을 권하는 용무린의 얼굴에는 전례가 없을 만큼 지나친 친절이 흘러 넘쳤다.
‘코앞에서 또 마음을 바꾸거나 하는 것만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치미는 조바심을 애써 달래며 일각대사가 소면을 입으로 가져갈 때였다.
툭.
허리에 매듭 하나를 대롱대롱 매단 거지 하나가 스쳐 지나며 작은 쪽지를 화운장로의 무릎에 떨구었다. 화운은 즉시 쪽지를 펴 읽었다. 글을 읽어 나가는 화운장로의 얼굴이 살짝 어두워졌다.
“뭐예요, 장로님?”
“무슨 일이라도 생겼습니까, 선배?”
화운 장로는 아무런 말없이 쪽지를 탁자 위에 올렸다.
용무린과 일각의 시선이 쪽지로 향했다.
신마귀환 2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