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마귀환 3권
서경 신무협 소설
1.잃어버린 기억 한 조각
쪽지에는 꽤 많은 내용이 담겨 있었다.
-두 노괴의 정체는 마교와 관련이 있다는 것이 무림맹에서 내린 최종결론임. 사람의 뼈로 만들어진 피리와 작은 종을 무기로 사용하는 것으로 미루어 음양자의 일곱 제자들 중 여섯째와 막내로 추정됨.
마교의 이름이 튀어나오는 거야 뭐 예상하던 바였다.
‘흥, 그깟 놈들……. 내공 수위만 어느 정도 복구하면 걱정거리도 아니야.’
용무린은 내심 콧방귀를 뀌었다.
마교의 누구라 해도, 설령 당대 천마가 눈앞에 있다 하더라도 능히 짓밟을 수 있다고 자신했다. 물론 그 빌어먹을 놈의 내공만 엇비슷하다면 말이다.
-열다섯 곳의 흑도방파에서 추살된 마공 보유자들의 몸속에서 혈고의 존재가 확인됨. 시신들이 불과 사흘 만에 한 줌 핏물로 녹아 버렸음.
“……!”
“……!”
용무린과 일각의 눈이 동시에 부릅떠졌다.
마교라는 이름이야 응당 튀어 나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니 별 것 아니었지만 혈고의 흔적은 또 다른 문제였기 때문이었다.
‘젠장. 생각해야 할 것들이 갑자기 너무 많이 늘어난 느낌이잖아.’
혈고의 출현은 곧 불신을 뜻한다.
자웅 쌍고로 나뉘어져 있는 혈고는 그 특성상 자신도 모르는 사이 마교대법에 의해 정신을 조종당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염두에 두어야 해.’
어떤 놈들이 혈고에 감염되어 있을지 모르니 항상 조심하는 것이 상책이다. 혈고에 조종을 받는다면 십년지기 친구처럼 웃으며 함께 술을 들이켜다가도 느닷없이 칼을 휘두를 수도 있는 것이다.
“이건 또 뭐야?”
용무린의 눈이 동그래졌다.
-상관웅. 제갈 세가로 이동. 제갈영령과의 혼사 문제를 매듭짓기 위함인 것으로 보임.
‘제갈영령. 그녀의 이름이 바로 제갈영령이었구나.’
용무린의 뇌리에 자신을 향해 수줍게 웃어 보이던 제갈영령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언제고 찾아와 초상화를 그려주신다던 약속을 꼭 지켜 달라던 여인, 그 약조를 믿고 아버지께 상관세가와의 혼약을 없었던 일로 해 달라고 간청할 것이라던 여인의 이름을 이제야 알아냈다.
‘좋아, 제갈영령. 접수했어. 네 부탁을 들어주도록 하지.’
쪽지의 말미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상관세가가 들고 일어났음. 비무를 빙자한 준 살인이었으니 그 은원을 해결할 것을 천명, 비룡문의 용무린 공자를 제갈세가로 초청했음.
-가문의 체면 회복 차원에서의 비무를 벌일 것으로 파악됨. 누가 비무 당사자로 나설지는 아직 모르나 용무린 공자를 곤란하게 만들 작정인 것만큼은 틀림없음. 어쩌면 제거를 노릴 수도 있음.
씨이익.
용무린의 입가에 흰 선이 쭉 그어졌다.
‘속담에 망치가 가벼우면 못이 솟는다더니 내가 딱 그 짝이로군.’
같잖기도 했고 밟아줄 생각에 묘하게 즐겁기도 했다.
‘제갈세가라…….’
용무린의 시선이 청봉산으로 향했다.
청봉산 넘어 사흘만 달리면 융중산이 나오고 그 아래에는 전통의 명문인 제갈세가가 있었다. 수로를 이용하면 하루 정도 시간을 앞당길 수도 있으리라.
‘기다려. 내가 간다.’
이미 천잠사 손수건을 받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약속은 반드시 지켜질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차피 청봉산이 코앞이다.
‘성가신 일을 먼저 처리한 후 바로 제갈세가로 간다.’
용무린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때까지 잘도 장단을 맞추던 화운장로를 마구 채근하기 시작했다.
“배도 채웠고, 이제 그만 가죠.”
“응? 갑자기?”
“여기서 갑자기가 왜 나와요?”
“아직 음식이 꽤 많이 남았다고-오.”
화운장로가 볼멘소리를 했지만 용무린에게는 전혀 통하지 않았다.
“청봉산이 지척이잖아요. 빨리 다녀오는 게 더 나아요.”
“기왕 이렇게 된 것 그냥 다 먹고 가자 무린아.”
“아, 일어나요. 어서요.”
“그게 좋겠습니다, 선배.”
일각대사마저 기다렸다는 듯 동조하고 나서자 화운장로는 별 수 없다는 듯 뭉그적거리며 엉덩이를 떼었다.
“거참. 애초에 밥부터 먹자고 꼬신 게 누군데…….”
“이봐, 여기 남은 것 좀 싸줘. 백주도 한 병 더 주고.”
“그래, 가자 가.”
남은 음식을 싸고 백주까지 추가하자 비로소 화운장로의 얼굴이 밝아졌다. 냉큼 일어섰다.
***
청봉산 중턱.
깎아지른 절벽을 앞에 두고 계속해서 신법을 전개해 달리던 화운장로가 속도를 늦추었다.
“다 와 간다. 저곳이 바로 낙성곡이다.”
“……!”
용무린의 눈이 동그래졌다.
천장단애(千丈斷崖)라고나 할까?
낙성곡은 과연 별이라도 떨어져 생겨난 곳인 듯 아득한 높이의 절벽이었다. 골짜기와 안성맞춤의 이름이 붙었다고나 할까?
‘저 정도 높이의 절벽은 정말 처음인데?’
십만에 달하는 산봉이 쭉 늘어서 있는 십만대산에서조차 찾아보기 힘든 절경, 과연 천기를 읽는다는 도인이 몸을 숨길 만한 곳이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그런데 이상도 하지?
‘뭐지? 분명히 처음인데 왜 이곳이 눈에 익지?’
틀림없다. 이곳은 정말 머리털 나고 처음 와 보는 곳이다. 한데 지형이 너무나 낯익었다. 친숙했다. 어쩐지 꼭 몇 번이고 찾아와 봤던 느낌이었다.
“곧장 올라갈 수는 없어. 저 절벽은 사람이 오를 만한 곳이 아니야.”
“그러면 어쩌지요? 천기자께서는 분명 낙성곡 정상으로 오라 하지 않으셨습니까?”
피식.
“날 대체 뭐로 보고 그래?”
“……?”
“한참 돌아서 가긴 해야 하지만 분명히 길이 있긴 해. 물론 우리 같은 무림인들에게나 갈 수 있는 길이긴 하지만 말이야.”
과연 개방의 장로.
한때 천하에 안 다녀 본 곳이 없을 정도로 주유를 많이 했다더니 이곳에도 올라와 봤을 줄은 정말 몰랐다.
“앞장서시지요, 선배.”
“이쪽이야.”
낙성곡의 정상, 천기자가 기다리고 있는 그곳을 향해 화운장로가 신법을 전개하려는 찰나였다. 용무린의 뇌리에 몇몇 풍경이 바람처럼 스쳤다.
‘기억 나. 저곳을 휘돌면 위로 향하는 작은 오솔길이 하나 나오지.’
오솔길을 따라 오르면 능선이 나오리라.
칼날처럼 뾰족한 바위로 이뤄진 능선, 산에서 나고 자란 약초꾼이라 해도 감히 밟을 엄두도 내지 못할 칼날 바위 끝을 따라 삼십 여리를 달리면 작은 공터와 함께 아주 오래전에 벼락 맞아 죽은 벽조목이 보일 것이다.
‘그 벽조목을 끼고 왼쪽으로 다시 십여 리.’
그러면 바로 낙성곡의 정상이다.
“용 시주, 이쪽이오.”
일각대사가 용무린을 재촉했다.
“……!”
무엇인가에 홀리기라도 한 얼굴로 용무린은 화운과 일각의 뒤를 따랐다.
그런데…….
‘뭐야? 정말 작은 오솔길이 있잖아!’
용무린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부르르.
전신에 알 수 없는 전율이 흘렀다.
불현듯 스쳐 지나간 기억이었는데 그것이 정말 현실로 나타나다니!
위로 향한 작은 오솔길이 정말 있었다.
더불어 칼날처럼 날카로운 바위능선의 시작도 보였다.
타닷. 타다다닷.
알 수 없는 그 무엇인가에 이끌리듯 용무린은 신법을 전개했다. 점점 더 빨라졌다.
스파아-앙.
이내 폭발하듯 앞으로 쭉 뻗어나갔다.
“엇? 뭐, 뭐야?”
“용 시주!”
앞서 달리던 화운장로를 그대로 추월해 버렸다. 그 뒤를 따르던 일각대사가 화들짝 놀라 소리쳤지만 용무린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인석아! 네 멋대로 가면 어떻게 해. 여긴 한 발만 잘못 길을 들어도 천 길 낭떠러지란 말이…… 어, 어라? 저 녀석 좀 보게? 어떻게 이 길을 알고 있지?”
“궁금증은 도착한 후 푸는 것이 좋겠습니다, 선배. 이러다가 뒤처지겠습니다.”
“그래.”
타닷. 파아앙. 스파앙.
화운은 비천무영신법을, 일각은 금강부동신법을 펼쳤다. 벌써 저만큼 멀어진 용무린의 뒤를 열심히 쫓았다.
휘이이이-!
귓전을 스치는 매서운 바람소리도 인식하지 못할 만큼 용무린은 놀라고 있는 중이었다.
‘벽조목!’
능선을 타고 삼십 여리쯤 달리자 정말 작은 공터와 함께 커다란 벽조목이 눈에 들어왔다.
‘복숭아 나무였었던가?’
이번에도 역시 맞았다.
벽조목은 확실히 복숭아 나무였었다. 벼락에 타 버린 복숭아 열매가 숯이 되어 표면에 눌러 붙어 있는 모습이 아직도 똑똑히 보였다.
흠칫.
자신이 어떻게 그런 사실까지 알고 있는지 용무린은 다시 한 번 깜짝 놀랐다. 대체 왜 그런 기억들이 떠오르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천기자…….’
그를 만나면 이 궁금증이 모두 풀릴까?
스파아-앙.
용무린의 신법이 점점 더 빨라졌다. 벽조목을 끼고 휘돌아 왼쪽으로 내달렸다.
“……!”
“……!”
화운장로와 일각대사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두 사람의 눈에 가득 차오른 것은 바로 궁금증이었다. 대체 용무린은 어떻게 낙성곡으로 오르는 길을 저렇듯 자세하게 알고 있는 것일까?
잠시 후.
우뚝.
용무린의 신형이 멈춰졌다.
낙성곡의 정상, 저 앞으로는 천장단애를 감춘 구름의 바다가 펼쳐져 있었고 중간에 작은 초옥이 자리 잡고 있었는데 용무린의 시선은 바로 그 초옥에 꽂혀 움직이지 않았다.
‘기억나!’
아스라이 먼 곳의 풍경을 바라보는 것처럼 또 하나의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너털웃음을 터뜨리는 선풍도골의 노인.
그 옆에서 함께 웃고 있는 또 하나의 노인.
친숙하다. 둘 모두 나와 분명 가까운 인연이었을 것이 틀림없을 것이란 느낌이 확 들었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얼굴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흐릿했고 목소리 역시 전혀 들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무린아!”
“용 시주.”
뒤늦게 도착한 화운장로와 일각대사가 용무린을 불렀다.
“인석아! 대체 이곳에 오는 길은 어떻게 알고 있는 것이냐? 여기가 어딘 줄 알고 있는 게냐?”
“용 시주. 혹, 이곳을 다녀간 일이 있으신 게요?”
“……!”
용무린은 그 질문에 대답을 하지 않았다.
무엇에 홀린 듯 초옥을 향해 천천히 다가갈 뿐이었다.
타닷. 벌컥.
“천기자 선배-애! 약속대로 거지가 바람을 몰고 왔습니다.”
혹여나 예를 갖추지 못할까 저어한 화운장로가 한 발 앞서 문을 열었다. 자신들과는 달리 천기자는 무림의 살아 있는 역사라 일컬어지는 노기인, 세수가 무려 150세를 훌쩍 넘어가는 전전대의 인물이었으니까.
그런데…….
“말씀하셨던 곳에 정말 이 녀석이 있…… 어라?”
“어째서 그러십니까? 혹시……. 허어!”
화운의 말꼬리가 뾰족하게 치솟았다. 내부를 확인한 일각은 장탄식을 쏟아냈다.
초옥은 텅 비어 있었다.
덩그러니 빈 방 한 가운데에는 천기자가 남긴 것으로 보이는 작은 서신만 남아 있을 뿐 사람의 흔적 따위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이런! 또 다시 서신만 남겨 놓으신 후 어디론가 떠나버리신 것 같습니다.”
“에잉, 이럴 거면 대체 왜 이 험한 곳까지 찾아오라고 한 거야?”
“……그분만 아시고 있을 사연이 있겠지요. 일단 서신을 읽어 보도록 하시지요.”
“그냥 남아 있다가 말로 해주지…….”
궁시렁 대면서도 궁금하긴 한 모양인지 화운장로는 서신을 냉큼 집어 들었다.
서신은 모두 두 장이었다.
한 장은 화운장로와 일각대사에게 남겨진 것이었고 나머지 한 장은 용무린에게 남긴 것이었다.
“이건 네가 읽어라.”
“연자에게……라고 서두에 쓰셨으니 분명히 용 시주에게 남긴 것이 맞을 것이외다.”
반짝.
‘그래, 대체 왜 날 여기까지 부른 거야?’
용무린은 호기심 가득한 시선으로 서신을 읽어 내려갔다.
-너는 스스로를 잘못 알고 있다.
‘이게 대체 뭔 소리야?’
용무린의 눈이 살짝 가느다래졌다.
하지만 서신의 내용은 단순하면서도 계속해서 알 수 없는 내용들로만 채워져 있었다.
-껍질이 꽤 단단하다. 때도 많이 묻었다.
‘젠장. 이런 뜬구름 잡는 소리 말고 내 기억 속에 대체 이곳이 어떻게 남아 있는 것인지나 좀 알려 달라고.’
이제는 확실히 안다.
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이곳엘 분명히 와 본 적이 있다. 아니, 단순히 그 정도가 아니다. 친숙하게 느껴진 것으로 보아 꽤 여러 번 다녀갔을 것이다.
‘전생을 자각한 후 그 전까지의 기억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이 몸의 어린 시절 어느 땐가 이곳엘 왔었나?’
그렇게 짐작만 해볼 뿐 어느 것도 확실한 것은 아니었다.
용무린은 계속해서 서신을 읽었다.
-너 자신을 찾아라. 네가 원하지 않는다 해도 반드시 그리 될 게다.
‘젠장 뜬구름 잡는 소리의 연속이로군.’
대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이제는 이 서신의 주인이 자신인지조차 헷갈릴 정도였다.
‘너는 스스로를 잘못 알고 있다니! 젠장. 전생인 신마 진무량의 기억을 모두 떨치고 완전한 용무린으로서 살라는 말이야 뭐야?’
아무리 생각해도 그렇게 밖에는 해석이 되질 않는다.
물론 그것조차 불분명하지만…….
-오늘의 인연은 작은 쐐기에 불과하다. 내가 벌어줄 수 있는 시간은 앞으로 고작 1년, 너는 그 안에 쐐기를 끝까지 벌려라. 껍질을 모두 깨야만 한다.
피식.
‘시간을 벌어준다고? 1년? 좋지. 그 정도면 모르긴 몰라도 비룡문의 안정과 내 내공 역시 초절정 어림까지는 끌어 올릴 수 있을 거야.’
영약이나 내공의 격체전공을 제외한다면 내공 수위를 급상승시킬 수 있는 방법은 하나뿐이다.
익히고 있는 내공 심법의 깨달음.
불가에서 말하는 대오각성에 준한 깨달음이 찾아오는 순간 하늘과 땅과 교감을 하면서 깨달음의 크기만큼 내공의 급상승을 경험하게 된다.
‘불과 반년 어림에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던 이 몸뚱이의 내공을 일류의 끝자락에 올려놓았어. 일 년이면 충분해. 최소한 초절정 어림까지는 차고 올라갈 거야.’
일류 끝자락의 내공을 가지고 절정 끝자락의 적 서넛을 상대한 자신이다. 그런 상태에서 초절정의 내공을 손에 쥐고 있다면?
‘흥! 어떤 놈도 겁나지 않는다고!’
그때야말로 정복 시작인 거다.
-때가 되면 스스로 알게 될 테지만……. 명심해라. 그리고 잊지 마라. 모든 것은 있을 자리에 그대로 다 있다. 이제 가거라. 나머지는 모두 네게 달렸다.
처음부터 끝까지 선문답을 하는 듯했다.
‘젠장, 나머지가 모두 내게 달렸다고 하면서도 정작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는 심보는 대체 뭐야? 모든 것은 있을 자리에 그대로 다 있다니? 지금 나랑 장난해? 내가 언제 수수께끼 내라고 했어?’
분통이 터지지만 서신은 그것이 끝이었다.
용무린은 짜증이 가득한 눈빛으로 화운장로와 일각대사를 바라보았다.
“옛다.”
비슷한 심정이었는지 화운장로가 자신들에게 남겨졌던 서신을 내밀었다.
“……?!”
혹시나 하는 마음에 용무린은 호기심 가득한 시선으로 서신을 빠르게 읽었다.
-나는 이미 충분히 개입을 했다.
천기란 한낱 인간 의지의 범접을 받아서는 아니 되는 법, 더는 누설할 수가 없구나.
언제고 알게 될지니, 나는 나만의 길을 갈 것이다.
바람이 어둠을 걷어낼 폭풍으로 자라나게 될 1년의 시간이 주어지게 될 것이다.
잊지 마라.
순천자의 뜻에 따르라. 그것이 곧 하늘의 뜻을 따르는 일이 되리니…….
두 사람에게 남겨진 서신은 의외로 짧았다.
‘이게 뭐야?’
물론 복장 터지는 소리로 채워진 것에는 변함없었다.
화운장로나 일각대사가 그토록 원했던 성산의 기문진을 파훼하고 절대검신 독고황의 유진을 훔쳐 달아난 적에 대한 단서도 없었고 근자에 알아내게 된 마공을 익힌 흑도의 배후에 대한 언급도 없었다.
“뭐라고 쓰여 있냐?”
개방의 장로답게 호기심이 돈 모양인지 화운장로가 용무린의 손에 들린 서신에 꽂혔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일각대사도 궁금한 모양이었다.
보여주지 못할 까닭이 없다.
“보세요.”
용무린은 천기자가 남긴 서신을 코앞에 들이밀었다.
두꺼비가 파리 집어 삼키듯 낚아 챈 화운장로와 일각이 서신을 읽어 내려갔다.
‘나와 비슷한 반응들이겠지?’
과연 그러했다.
“뭐야 이거?”
“현기가 너무 깊은 말입니다. 여러 날을 두고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듯합니다.”
결국엔 용무린과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당최 알 수 없다는 결론이었다.
화운장로가 긴 한숨과 함께 다시 입을 열었다.
“후-우. 이제 어쩌지?”
“……천기자께서 분명히 이렇게 적으셨지요. 순천자의 뜻에 따르라고 말이지요.”
“그거야…….”
대답을 하면서도 화운장로의 얼굴은 밝지 않았다. 솔직히 어떻게 하라는 것인지 감도 잡을 수 없었다. 그때 일각대사의 시선이 용무린에게로 향했다.
“어쨌거나 마공을 익힌 흑도 잡배들을 잡아낸 것은 용무린 시주가 아니겠습니까? 무한의 동쪽 외곽에서 고전하고 있었던 용 시주를 구하라고 보내셨던 일을 생각해도 그렇고 흑도 잡배를 잡아낸 것도 그렇고…….”
일각과 시선을 마주한 용무린의 눈이 동그래졌다.
‘아니, 저 양반이 지금 무슨 소릴 하려는 거야?’
얼토당토않다는 시선을 보냈지만 일각대사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아시겠지만, 이미 한 번 푸른 주머니를 열었을 때 순천자에 대한 언급이 있었습니다.”
“맞아! 그랬었지!”
화운장로의 시선도 용무린에게로 향했다.
“저 녀석이 우리들 말을 죽어도 듣지 않고 비룡문에서 끝까지 버티고 있을 때 열어 본 주머니에는 확실히 그렇게 적혀 있었어. 인즉순천이라고…….”
설마 하던 그 단어가 기어이 일각대사의 입에서 나오고야 말았다.
“저는 천기자께서 서신을 통해 말씀하신 순천자가 바로 용무린 시주라고 생각합니다.”
“순천자가 저라고요? 아니, 대사님. 대체 뭘 보고…….”
용무린이 목소리를 높여 보았지만 통하지 않았다.
잠자코 듣고 있던 화운장로까지 고개를 주억거렸다. 일각의 말에 동조했다.
“하긴 천기자 선배가 말한 순천자가 저 녀석인지에 대해서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자네 말대로 저 녀석을 통해 마공을 익힌 흑도 잡배들을 잡아낸 것은 맞지. 뭐, 그 덕에 음양자의 제자도 둘씩이나 처치할 수 있었고 말이야.”
“그래서 저는 한동안 용 시주와 함께할 생각입니다.”
“아니, 일각 스님! 왜 결론을 그렇게 내리는데요? 저 순천잔지 뭔지 하는 녀석이 아니라니까요! 저 성질 정말 더러워요. 적이라고 생각되는 놈들에겐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이란 말입니다!”
아직 비룡문이 힘을 얻기 전이다.
화운장로와 일각대사와 함께 돌아다니게 되면 틀림없이 소림과 개방의 도움을 얻을 수는 있다.
‘그렇지만, 순천자니 뭐니 하는 부담감을 내게 지우려는 것은 딱 질색이야. 순천자는 개뿔! 나는 때가 되면 이놈의 무림을 정복할 생각인데?’
호시탐탐 무림 정복을 노리고 있는 사람에게 순천자라니!
정말 웃기지도 않은 일이다.
하지만 화운장로와 일각대사는 진지했다.
“저 녀석과 함께 움직이다 보면 마공 익힌 놈들과 또 마주치게 되겠지?”
한 방 먹었으니 틀림없이 갚아주려고 할 게다.
모르긴 몰라도 수년간 공을 들였던 일인데 그걸 하룻밤 사이에 망가뜨린 상대를 천하의 마교가 그냥 곱게 넘어갈 리 없는 것이다.
일각대사와 화운장로는 그 순간을 노릴 생각이었다.
“무림의 금기 중 하나인 혈고까지 사용하는 놈들입니다. 그런 흑도의 잡배들을 몽땅 쓸어버렸으니 기어이 그 빚을 갚기 위해 나설 것이라 생각합니다.”
“맞아. 어떤 식으로든 이를 드러내겠지. 좋아, 당분간만이라도 함께 다녀 보자.”
용무린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두 사람이 덥석 달라붙었다. 앞으로도 계속 함께 다녀야만 할 것 같다.
‘젠장. 나도 모르겠다.’
“아으, 몰라요. 마음대로 해요.”
될 대로 되라는 듯 용무린은 몸을 홱 돌렸다.
천기자가 서신에 적어 두었던 1년의 시간이 아니더라도 비룡문과 용무린에게는 힘을 갖추기 전까지 충분히 기댈 언덕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인석아! 함께 가야지!”
“함께 갑시다, 용 시주.”
화운장로와 일각대사가 황급히 용무린의 뒤를 쫓았다.
***
“허억. 헉헉…….”
매부리코 사내 손사욱은 입이 바짝 타들어가는 것을 느껴야만 했다. 호남성을 벗어나며 개방의 추격은 이미 끊겼지만 가슴은 되레 타들어갔다.
“빌어먹을! 나의 내공이, 그토록 고련해 키워 놓은 힘의 태반이 스러졌어.”
사심마뢰검.
스스로를 자각한 그분에게서 사사한 이래 그 누구도 두렵지 않게 만들어 주었던 사심마뢰심법에서 비롯된 강대한 힘이 빈 쭉정이가 되었다.
“그분께 보여야만 해. 아니, 최소한 음양자님이나 오궁이원의 주인들에게는 알려야 돼.”
소림의 사대금강의 일원인 일각의 장력에서도 느껴보지 못했던 불가항력적인 힘, 자신의 모든 것을 한낱 모래성으로 만들어 버리는 용무린의 힘을 알려야만 했다.
“조금만, 조금만 더 힘을 내라 손사욱.”
대산까지 이제 겨우 사흘 남았다.
비록 내공을 모두 잃는다고 해도 그곳에만 도착하게 된다면 방법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용무린. 너는 죽는다.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을 후회하도록 가장 처참한 모습으로 죽을 것이다.”
대법을 마친 그분께서 출관을 하게 되면 반드시 그렇게 만들 것이다. 그분은 충분히 그럴 만한 능력을 갖추신 분, 십만 마도인의 신이시니까.
***
손사욱의 바람과는 사뭇 다른 일이 십만대산의 가장 깊은 곳에서 벌어지기 시작했다.
마교.
천마라고 하는 악마를 신으로 모시는 집단, 스스로를 신교라 부르는 집단의 정점에 선 자의 개인 연공실에서부터 저주 섞인 비명이 터져 나온 것이다.
“크아아아아! 천기자-아! 네놈이 또!”
우르르릉. 쿠르르르릉.
목소리에 담긴 진력이 얼마나 거대한지 연공실 전체가 무너질 듯 덜덜 떨렸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무엇이 그리도 괴로운 것인지 계속해서 분노를 터뜨렸다.
“이노-옴! 평생의 숙적마저 결국 잡아먹어 버린 나다! 도사 나부랭이에 불과한 네가 감히 본좌를 얼마나 더 막을 수 있을 것 같더냐?”
우르르르릉.
입을 열 때마다 연공실이 진저리를 쳤다.
움찔. 부르르르.
연공실 밖에 부복하고 있던 검은 일색의 사제복 차림의 마인들이 일제히 몸을 떨었다.
“오냐, 좋다. 내 기어이 이 사슬을 끊어 내고 천하를 피로 물들이겠다. 음양자는 들어라!”
“충!”
쿵.
사제복 차림의 마인 중 선두에 선 자가 머리를 바닥에 처박았다.
“지금 당장 동남동녀 일천의 생혈을 대령하라!”
“즉시 거행하겠나이다!”
“명심하거라. 모두 자시(子時)생이어야 한다.”
“심려치 마십시오. 그렇게 준비토록 하겠습니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부복한 자세 그대로 음양자의 몸이 둥실 떠올랐다. 뒤로 천천히 이동했다. 어둠 속으로 사라져갔다.
고통을 참아내듯 잔뜩 거칠어진 목소리가 다시 울렸다.
“길어봐야 1년이다, 천기자! 이미 뒤틀어진 천기, 내 기필코 천기의 사슬을 끊어내고 하늘에 올라 마의 하늘을 이루어 신으로 거듭날 것이다. 크하하하하하!”
고통에 찬 고함소리는 이내 광소로 변했다.
“신마 천세, 천천세!”
“신마 천세, 천천세!”
광신도들의 노랫소리가 마교 전체로 퍼져 나갔다.
***
멈칫!
갈림길을 앞에 두고 용무린이 멈춰 섰다.
“왜 그러느냐 무린아?”
“어디로든 가시오, 용 시주. 빈승이 기꺼이 뒤를 받쳐 주리다.”
찌릿!
천연덕스럽게 입을 여는 두 사람을 향해 용무린이 눈을 흘겼다.
씨익. 빙그레.
화운장로와 일각대사가 넉살 좋게 웃어 보였다.
‘아, 놔!’
용무린은 무엇인가 얹힌 느낌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 덕에 비룡문이 안전한 가운데 발전할 기회를 잡은 것은 잘 알고 있지만, 순천자니 어쩌니 하며 뒤를 졸래졸래 따라오니 신경을 안 쓰려야 안 쓸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안 그래도 가뜩이나 신경이 쓰이는데…….’
낙성곡을 내려와서 지금까지 용무린은 줄곧 생각에 잠겨 있었다. 서신에 담겨 있던 천기자의 말이 심상치 않게 다가왔던 것이다.
‘껍질이 단단하다니! 그게 대체 무슨 뜻이지? 내가 익히고 있는 불사신기의 내공이 깨달음을 얻기가 힘들다는 뜻인가?’
말뜻만 생각하자면 그렇게 맞추어도 되겠지만 어쩐지 그걸 두고 하는 말은 아닌 듯 생각되어졌다. 깨달음의 문제였다면 그냥 깨달음이 얻기 힘들 테니 더 노력하라는 직관적인 말이 있었으니까.
‘낙성곡만 해도 그래. 대체 내가 언제 그곳엘 다녀와 보았다는 것이지?’
일단은 다녀온 것을 염두에 두고 생각해 보았다.
신마 진무량의 전생을 깨닫기 전의 기억은 모두 사라졌으니까 가능성이 있다면 잃어버린 그 21년의 기억 속에 들어 있을 것이다.
‘그것도 사실 이상해. 천기자가 그때도 이곳에 있지는 않았을 것이잖아. 화운장로의 말대로라면 천기자는 그전에 개봉 인근에 계속 숨어 있었다고 하지 않았나?’
아무런 접점이 없는 이곳을 전혀 상관도 없는 자신이 불쑥 찾아올 리가 없는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음양쇠맥증 때문에 내공도 있는 듯 없는 듯하던 허약한 몸으로 말이다. 그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하아, 역시 오지 말았어야 해.’
박사무당 따위 애초에 믿을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오늘의 인연은 작은 쐐기에 불과하다. 내가 벌어줄 수 있는 시간은 앞으로 고작 1년, 너는 그 안에 쐐기를 끝까지 벌려라. 껍질을 모두 깨야만 한다.
그 말이 너무나 의미심장하게 들렸다.
1년이란 시간을 벌어주겠다는 것은 글자 그대로 생각하면 되지만 나머지는 대체 어떻게 받아들이고 이뤄나가야 한단 말인가?
“장로님!”
“응?”
“혹시 말이에요. 내가 어렸을 때 낙성곡엘 다녀왔다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있나요?”
“그거야 네가 더 잘 알지 않겠냐?”
화운장로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반문했다.
긴 한숨과 함께 용무린이 부연설명을 붙였다.
“운적풍 그 애송이에게 반 주검이 되었을 때 머리를 조금 다쳤었나 봐요. 눈을 떴을 때 이전의 기억은 가족에 관한 것들 이외에 거의 없어요. 씻은 듯 사라졌어요.”
“이런 쯧쯧쯧.”
“하긴, 그때 굉장히 심하게 다쳤다고 하니 그럴 수도 있겠소이다.”
“……흐음. 내가 알기로 너는 삼절일학이라고 불릴 만큼 시서화에 능한 것으로 안다. 별호가 말해주듯 세 방면 모두에서 일절이라 불렸으니 얼마나 심력을 쏟았는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잘 알겠지?”
“그거야 뭐.”
“세간의 평이나 개방의 눈에도 너는 그냥 백면서생 그 자체였었다. 항상 책에 파묻혀 있거나 아니면 시를 짓고 그림을 그렸지. 산수화를 그리기 위해 근처 강이나 호수를 찾았던 것을 제외하면 네 유년 시절은 거의 무한 인근에 국한되어 있었다.”
그럴 줄 알았다. 그러니 더욱 혼란스럽다.
‘그러면 대체 어떻게 해서 낙성곡의 기억이 불쑥 튀어나온 것이지?’
그걸 당최 알 수가 없다.
“무린아. 이제 어디로 갈 거냐?”
일각대사가 용무린 대신 대답을 했다.
“어디로 가겠습니까? 일단 본가로 돌아가야지요.”
“그런가? 하긴, 그 망할 놈의 상관세가 놈들이 은원 해결이네 뭐네 하고 있으니 배첩도 보냈을 테고……. 길을 나서도 집안 어른들께 말씀드리고 나서야겠지.”
“그렇습니다. 먼저 단단히 준비를 해야 합니다.”
그것이 순서였지만 용무린은 대뜸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요. 제갈세가로 바로 갈 거예요.”
“용 시주. 그러지 마시고 최소한 가문의 어른들과 비무에 대한 상의라도 하고난 후…….”
“인석아. 아무 대책도 없이 거길 그냥 가면 어떻게…….”
간곡한 어조로 설득했지만 용무린은 두 사람의 말을 단숨에 싹둑 잘라버렸다.
“그런다고 뭐가 바뀌나요?”
“……?!”
“……?!”
“은원과 결자해지를 들먹였으니 어차피 제가 나서야 할 일이에요. 주렁주렁 사람들을 달고 가 보았자 결국 맞닥뜨리게 되는 것은 저라고요.”
“그래도 인석아, 상관세가에서 어떤 고수가 나설지 모르지 않느냐?”
“어쩌면 바닥에 떨어진 가문의 체면을 다시 세우기 위해 직계의 어른 중 한 사람이 직접 나설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용 시주.”
씨익.
듣고 있던 용무린의 입가에 흰 선이 쭉 그어졌다.
“상관없어요. 상대가 누구든.”
나를 가로막는 것은 깡그리 짓밟아 버릴 것이다.
그것이 설령 상관세가의 가주라 해도 변하지 않는다.
“내가 이겨요.”
최소한 지지는 않을 자신이 있다.
아니, 상관세가주가 상대로 나서는 상황이 온다 하더라도 불사신기의 힘이라면 적어도 죽지는 않을 것이다.
화운장로와 일각대사가 입을 쩍 벌렸다. 용무린은 못 본 체 앞으로 쑥 걸음을 내딛었다.
“보면 아시겠죠, 뭐. 가요 빨리.”
“……!”
“……!”
멍한 얼굴로 용무린을 바라보던 두 사람은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어쩔 수 없다는 듯 용무린의 뒤를 따라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