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재회 (21/104)

2.재회

제갈세가.

제갈무후 이래 수백 년의 영화를 누려온 명문.

하지만 오늘 날 제갈세가의 입지는 과거와는 사뭇 거리가 멀었다. 비룡문이 그러하듯 무림세가와 일반세가의 사이에 어정쩡하게 걸쳐 있었기 때문이었다.

수백 년이란 세월 속에 실전되어 버린 무공들 때문에 무력으로도 여타 세가를 압도할 만큼 빼어나지도 않았으며 그렇다고 관가로의 출사가 용의하지도 않았던 터라 그야말로 이도저도 아니었다.

“령아는 아직도 요지부동인가?”

“예, 형님. 결사코 상관웅 소가주와의 혼인을 반대하고 있다고 합니다.”

“허어.”

제갈세가주 제갈문군의 입에서 깊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아우인 제갈문기의 말이 바로 이어졌다.

“중도연합을 추구해야 한다는 말까지 잊지 않고 또 한 소리 했습니다.”

“이거야 원…….”

제갈문군의 입가에 쓴 웃음이 떠올랐다.

중도연합.

말이야 옳은 말이다. 제갈세가는 신주오가의 등장으로 인해 그 세력과 입지가 줄어든 남궁세가나 황보세가 등과 같은 전통의 명문들과 힘을 합쳐야만 그나마 입지를 다지고 발언권을 세울 수가 있다.

‘하지만 이미 무림맹의 눈치를 보기 시작한 그 가문들을 어찌 하나로 다 엮을 수가 있단 말이더냐?’

눈치를 보기 시작한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무림맹에 크든 적든 다 한 발씩 이미 깊이 걸쳤다. 그러지 않고서는 외톨이가 될 뿐이니까.

‘하나로 엮을 방법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지만…….’

솔직히 그렇게 모여 봐야 그리 큰 반향은 없을 것이란 비관론이 상대적으로 우세했다. 남궁세가나 황보세가 역시 빠르게 치고 올라오는 신주오가와 무림맹의 압도적인 힘 앞에 그 위상이 예전만 못하기 때문이었다.

‘고만고만한 단체 모두 엮어 봐야 고만고만한 단체가 될 뿐이야. 그것이 바로 무림이란 세계에 적용되는 힘의 논리가 아닌가?’

그래서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이 신주오가에서도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뤄낸 상관세가와의 혼약이었다.

‘상관세가와 힘을 합한다면 다시금 본가가 나래를 펼 수도 있음인데…….’

상관세가가 자리한 호북성은 황제가 둥지를 튼 북경과 지척이다. 그만큼 관가에 줄도 많을 것이다.

제갈문군이 노린 것이 바로 그것이다.

어차피 상관세가는 무림세가, 관과는 적절히 거리를 두고 있지만 제갈세가는 태생부터가 관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질 않던가?

‘령아야. 가문의 번영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구나. 너는 상관웅과 혼인을 해야만 한다.’

혈연으로 엮인 줄을 잡고 다시금 관에 진출을 할 생각이었다. 애초에 제갈세가의 태생이 관과 관계가 깊으니 무림세가의 이점을 세워 관으로 진출한 후 다시 한 번 제갈무후의 영광을 만들어낼 생각인 것이다.

‘응?’

제갈문군의 눈에 작은 족자 하나가 들어왔다.

조사님인 무후가 남긴 글귀였다.

-제갈세가의 자손이라면 마땅히 등룡각에 올라 천하를 굽어보라. 길이 보이리라.

‘조사님. 지금은 등룡각에 오른다 하여도 길이 보일 때가 아닙니다. 선택을 해야만 할 시간이라고요.’

세월의 흐름에 따라 많은 무공비전을 잃어 지금의 제갈세가는 무가로서의 입지가 그야말로 바닥인 상태다.

그래서 선택한 차선책이 바로 입신의 길이었다.

물론 차근차근 과거시험을 보아 자금성에 입성할 길을 찾을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너무나 멀고 오랜 시간이 걸리는 길이었다. 게다가 무가로 생활하며 모든 끈이 끊겼다. 과거시험을 통해 자금성에 입성을 해도 거기서 거기인 것이다.

‘조사님. 후손은 본 제갈세가가 단숨에 날아오르는 길을 택하고 싶습니다.’

그 길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상관세가와 혈연을 맺으면 모든 일이 다 풀린다.

부족한 무력은 상관세가에서 담당하면 되는 일이고, 그들이 손 써준 줄을 잡아 단숨에 자금성의 고위직을 파고들 수도 있었다.

‘내 아들들이라면 능히 장수들이 되고도 남지. 암.’

상관세가의 줄을 잡아 천거가 되면 된다.

듣기로 상관세가의 돈을 받아먹은 자금성의 고위직은 삼공과 동창의 제독까지 망라한다고 하니까.

“상관웅 소가주와 비룡문 애송이와의 은원 해결에 대한 준비는 어떻게 되었나?”

“무당파에 배첩을 보냈고 이미 회신을 받았습니다. 현 무당 칠협 중 하나인 자엽도장께서 직접 와주신다는 전언이었습니다.”

“오오오, 자엽도장께서?”

제갈세가주 제갈문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자엽도장이라고 하면 무당의 장로 중 하나이며 칠협에 속하는 초절정의 고수였다. 그가 움직이면 무당의 태극 검수들 중 직계제자인 청평, 청송까지 함께 움직이게 되니 그야말로 무당의 권위를 대변하게 된다.

“그렇습니다, 가주님. 오랜만에 제갈세가의 이름이 세간에 널리 오르내리게 될 것입니다.”

“그래, 손님들을 모시는 데 부족함이 없도록 아우가 각별히 주의를 기울여주게.”

“알겠습니다. 염려하지 마십시오.”

제갈문기의 말이 든든했던지 제갈문군은 오랜만에 넉넉한 미소를 입가에 지어 보였다.

“상관세가는 지금 어디까지 왔다고 하는가?”

“마지막으로 전서구가 도착했을 때가 융중산 아랫마을이었다고 했으니 지금쯤이면 거의 도착했을 것입니다.”

“흐음. 시간이 별로 없군.”

“그렇습니다, 가주님.”

“지금 즉시 령아를 데려오도록. 내 직접 설득을 해 보도록 하겠네.”

“예, 형님.”

제갈문기가 대답과 동시에 일어날 때였다.

“형님, 큰일 났습니다.”

제갈문군의 둘째 동생인 제갈문성이 부리나케 달려왔다. 작은 서신 한 장을 불쑥 내밀었다.

“이, 이것 좀 보십시오.”

“……!”

제갈문군의 눈이 부릅떠졌다.

서신에는 유려한 글씨체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아버지. 이렇게밖에 할 수 없는 저를 용서해 주시길 바랍니다. 소녀 허심지약을 이미 건넨 정인이 있습니다. 그분을 두고 절대로 상관웅 공자와 혼인을 할 수는 없습니다. 저는 이 길로 정인을 찾아 떠날 것입니다.

가출이라니!

그것도 어디서 굴러먹는지도 무얼 하는지도 모르는 사내놈을 찾아서?

“이, 이 녀석이 정말!”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형님. 어서 사람을 시켜 령아의 뒤를 쫓아야 합니다.”

“가주령을 내리겠다.”

“충.”

가주령이라는 외침에 제갈문기가 크게 복명하며 고개를 숙였다.

“가용 가능한 모든 사람을 풀어라. 지금 즉시 령아의 뒤를 쫓아라. 오늘 해가 지기 전까지 반드시 령아를 세가로 끌고 와!”

“충!”

절도 있게 대답한 제갈문기가 비장한 표정으로 밖으로 나설 때였다. 불행은 혼자 오지 않는다는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외원에서부터 급보가 도착했다.

“가주님! 상관세가의 손님들께서 방금 도착하셨습니다.”

“이, 이런!”

“허어.”

제갈문군과 제갈문기의 안색이 한층 더 어두워졌다.

하지만 이렇게 넋을 놓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제갈문군은 재빨리 수습에 나섰다.

“문기.”

“예, 가주님.”

“너는 지금 즉시 가주령으로 은밀히 사람들을 모아라. 령아를 최대한 빨리 찾아내야만 한다. 나는 지금 외원으로 손님들을 맞으러 나가겠다.”

“알겠습니다, 가주님.”

“너만 믿는다.”

***

제갈세가의 정문을 통과한 상관세가의 일원들은 잠시 기다리는 중이었다. 즉시 외원으로 들어간 후 짐을 풀고 가주를 만나도 될 일이었지만, 혼사문제까지 걸려 있기에 확실히 예를 갖추고 들어가기 위함이었다.

“휘유, 전통의 명문이라더니 확실히 곳곳에 역사의 숨결이 배어 있는 듯합니다. 고풍스러운 전각하며 안쪽에 보이는 가산과 화원의 배치가 정말 너무 멋집니다.”

“훗, 그래 봐야 소용없다. 이미 한 풀 꺾인 날개야.”

1장로 부일기의 말에 두 눈썹이 새하얀 부리부리한 인상의 노인이 나직한 목소리로 비웃었다.

“숙부님 말씀이 맞습니다, 부 장로. 세인들에게야 아직도 제갈세가가 무림의 거대 세가로 추앙받지 실상 우리 무림세가들 중에서는 이미 있으나 마나한 곳 아니겠습니까?”

“허허허, 역시 상관세가 제일의 패기를 지녔다는 고수다우신 말씀입니다. 맞습니다. 과거에나 제갈세가지 지금은 우리에게 연줄을 대어 자금성 입성을 꿈꾸는 그저 그런 곳에 불과하지요.”

1장로 부일기가 상관혁련을 추켜세웠다.

물론 상관혁련은 그래도 무방할 정도의 고수였다. 현 가주인 상관초웅의 셋째 아우이자 세가의 비전 권법인 천붕칠권을 무려 팔 성까지 익힌 무서운 사내였으며 세가의 무력 단체 중 하나인 천붕단의 단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해도 오늘 우리가 이곳에 온 목적을 잊으면 아니 된다. 우리는 웅이의 혼사를 매듭짓고 제갈세가의 정계 진출을 적극적으로 도와야만 한다.”

“예, 어르신.”

“여부가 있겠습니까, 숙부님.”

상관엽이 뒤를 슬쩍 돌아보았다.

흠칫 놀란 상관웅이 단호한 목소리로 다짐을 했다.

“최선을 다해 제갈영령을 제 사람으로 만들겠습니다, 할아버지.”

“그래야 할 게다. 이번 일조차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다면 너는 더 이상 상관세가의 소가주가 아니게 될 테니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마라. 알겠느냐?”

“네, 넵!”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라는 말의 저의가 궁금했지만 상관엽의 목소리가 너무나도 싸늘해 상관웅은 더 이상 묻지 못했다.

곁에 있던 상관혁련이 자상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훗. 너무 염려 마라. 우리들이 다 알아서 해줄 터인즉, 너는 그저 할아버님의 말씀에 잘 따르기만 하면 된다.”

같은 말의 반복이나 다름없다.

상관웅은 상관엽이나 상관혁련 숙부가 무엇을 원하고 있는 것인지 그제야 서서히 감이 잡히기 시작했다.

‘푸흐흐. 그러면 나야 좋지.’

무공이라면 몰라도 힘으로 여인을 취하는 것이라면 그야말로 자신의 전문 분야라고 할 수 있다.

“알겠습니다, 숙부님.”

“쉿. 모두 조용. 안에서 사람이 나온다.”

“……!”

“……!”

새하얀 눈썹의 노인이 한마디 하자 모두 50여 명에 달하는 상관세가 일원들 모두가 일제히 침묵에 빠졌다.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

1장로 부일기나 가주의 셋째 아우인 상관혁련도 마찬가지였다. 노인에게는 그만한 권위가 있었다. 그가 바로 전대의 대장로 현재 태상장로인 상관엽이었기 때문이었다.

“하하하, 어서 오십시오. 제갈세가의 방문을 환영하는 바입니다.”

환한 얼굴로 달려 나온 제갈문군이 포권을 취했다.

“반갑습니다, 가주님. 그간 별래무량 하셨는지요? 얼굴을 뵌 지 몇 년 되는 듯합니다.”

상관세가에서 제갈문군과 안면이 있던 1장로 부일기가 먼저 나섰다.

“제가 오늘 귀한 분들을 모시고 왔습니다, 가주님. 먼저 이분께서…….”

상관엽을 시작으로 차례차례 인사를 나누었다.

생각했었던 것보다 훨씬 더 거물급의 면면에 제갈문군의 눈은 점점 더 커져야만 했다.

그렇게 상관세가의 제갈세가 입성은 마무리가 되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여장을 푼 후 정식으로 다과를 나누는 자리가 마련되었는데 그 자리에서 상관엽이 며느리 감과도 인사를 직접 나누고 싶다고 요청했던 것이다.

별 수 없어진 제갈문군은 상관세가가 도착하기 직전에 벌어진 제갈영령의 가출을 외유로 슬쩍 돌려서 말할 수밖에 없었다.

자존심이 팍 상해야 정상이었지만 어쩐 일인지 상관엽을 비롯한 상관세가 사람들은 크게 문제 삼지 않았다. 다만, 제갈영령의 복귀를 돕는다는 명분으로 제갈세가의 고수들과 함께 제갈영령을 찾아 나섰을 뿐이었다.

그렇게 해가 저물어 가기 시작했다.

***

유수나루.

강물을 온통 황금빛으로 물들이는 석양을 맞으며 제갈영령은 배에 올라 출발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가씨,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또 그 소리!”

시비 청아의 우려 가득한 질문에 제갈영령은 아미를 쫑긋 치켜세웠다.

“괜찮다고 몇 번을 말해야 아니.”

“그래도요. 아가씨 말씀대로라면 아직 그분께서는 아가씨의 마음을 정확히 알고 있지 못하잖아요.”

“청아야, 청아야. 그분의 별호가 무엇인줄 아니?”

“삼절일학이요.”

“그렇다면 삼절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도 알고?”

“왜 모르겠어요? 시, 서, 화 세 방면에서 모두 일절로 불릴 만큼 뛰어나기 때문이잖아요.”

“쯧쯧쯧. 잘 알면서 그런 질문을 하니?”

“……?!”

볼을 살짝 붉힌 제갈영령의 말이 이어졌다.

“내가 방을 나섰을 때 그분의 눈빛이 한순간에 바뀌는 것을 똑똑히 보았단다. 분명 내가 떨어뜨린 손수건에 수놓인 허심(許心)이란 글을 보신 게야.”

그날이 다시 떠오르는 듯 제갈영령의 얼굴에는 행복한 미소가 담뿍 담겼다.

“천하의 삼절일학이 허심이라는 글귀의 뜻을 몰랐을까? 굳이 입을 열어 말은 하지 않았지만 보는 순간 아셨던 게야, 내 마음을…….”

그 글귀를 보았으면서도 자신을 잡지도, 달려 나와 손수건을 돌려주지도 않았다. 그래서 제갈영령은 용무린 역시 자신과 같은 마음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아유, 몰라요. 하여간 그분께서 아가씨의 마음을 몰라준다면 저는 참지 않을 거예요. 아가씨의 마음을 아프게 한 죄로 혼쭐을 내주고 말겠어요.”

“그러면 못써 청아. 그분은 내게 아주 소중한 분이시란 말이야.”

“손목 한 번 잡아 보지 못하셨으면서요?”

‘하다못해 입맞춤이라도 했으면 또 몰라.’ 라고 쫑알대는 청아를 향해 제갈영령은 씽긋 웃어 보였다. 코를 살짝 잡아 비틀었다.

“그분께서 너 같은 음란마귀인 줄 아니 요것아!”

“악! 제가 왜 음란마귀인데요?”

제갈영령이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천기단의 양천 무사.”

움찔!

청아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동그랗게 뜬 눈으로 제갈영령을 바라보았다. 장난기가 가득 담긴 제갈영령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가산 뒤 으쓱한 곳에서 양천 무사의 품에 쏙 안겨 있다가 네가 먼저 입술을 덮치는 걸 내가 다 봤어, 요 앙큼한 녀석아!”

“아, 아가씨! 제, 제발요-오.”

누가 들을 세라 혼비백산 청아가 제갈영령의 입을 막으려 들었다.

“정말 깜짝 놀랐지 뭐니? ‘보고 싶었어요.’라며 코맹맹이 소리 내더니 갑자기 네가 먼저 입술을 쭉 내밀 줄은 내가 상상도 해 보지 못…….”

“아악. 아가씨-이. 제가 잘못했어요. 제발 그만 좀 해요. 네?!”

청아가 얼굴을 잔득 붉힌 채 싹싹 빌었다.

제갈영령이 어깨를 살짝 으쓱이며 다시 말을 이었다.

“하여간 용 공자님께서는 너처럼 음란마귀가 아니야. 알겠니? 우리 두 사람은 정신적으로 서로 단단히 연결이 되어 있다고.”

“네네, 아가씨 말씀이 옳습니다, 옳아요.”

“아아, 용 공자님 보고 싶다-아.”

무한의 비룡문을 그리는 것인지 아니면 용무린의 얼굴을 떠올리고 있는 것인지 동쪽 하늘 저편으로 던져진 제갈영령의 시선이 아련해졌다.

***

쏴아아. 처얼썩. 쏴아아. 처얼썩.

뱃전에 우뚝 선 용무린은 유수나루가 다가올수록 묘해지는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언제고 찾아와 제 초상화를 그려주신다던 약속 꼭 지켜 주어야 해요. 알았죠? 그 말씀을 믿고 아버지께 상관세가와의 혼약을 없었던 일로 해 달라고 간청할 거예요. 기다릴 게요.

얼굴을 발갛게 물들이며 속삭이던 제갈영령의 목소리가 자꾸만 떠올랐다.

스윽.

용무린의 손이 왼쪽 팔목을 더듬었다.

분신처럼 감겨 있는 천잠사와 소검비연이 느껴졌다.

‘분명히 허심이라고 쓰여 있었는데 말이야.’

헛물을 많이 켜긴 하지만 용무린은 절대로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었다. 허심이라고 쓰인 손수건의 뜻을 모를 리가 없는 거다.

‘정말로 내게 마음이 있는 것일까?’

지금까지 시험해 봤던 여인들의 반응을 생각하면 이번에도 역시 성공할 확률은 낮다.

‘젠장. 한두 번 실패하는 것도 아닌데 뭐 어때? 그냥 눈 딱 감고 말해 보자. 산책이나 나가 보자고 말이야.’

두근.

갑자기 심장이 크게 뛰었다.

산책이란 단어를 떠올리니 휘영청 떠오른 달과 함께 으쓱한 공간에서 속삭이던 연인들의 속삭임과 입맞춤 소리가 떠올랐던 것이다.

‘오빠, 거긴 너무 빨라. 라고 했을 때 분명히 오빠 못 믿어? 라고 되묻는 것으로 대응했겠다?’

용무린의 뇌리에서는 달밤에 나간 산책에서 벌어질 일들에 대한 가상훈련이 실전 비무와 같은 수준에서 벌어지기 시작했다.

대체 무얼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씨이익.

용무린의 입꼬리가 하늘을 향해 길게 말려 올라갔다.

그렇다. 용무린은 제갈영령의 예상과는 달리 음란마귀 그 자체인 사내였던 것이다.

‘푸헤헤헤. 불어라, 바람아. 나를 어서 빨리 유수나루로 데려다 다오.’

천기자로 비롯된 고민은 1도 남아 있지 않았다.

유수나루에서 제갈세가는 불과 한 시진 남짓.

용무린의 뇌리에는 도착하기가 무섭게 신법을 전개해 제갈세가까지 단숨에 주파할 생각만 가득했다.

휘이잉. 펄럭.

용무린의 마음을 들어주겠다는 듯 바람이 세차게 불어 왔다. 돛이 활짝 펼쳐졌다. 팽팽하게 힘을 받았다.

촤아악. 촤악. 처얼썩.

용무린이 타고 있던 배의 속도가 한층 더 높아졌다.

청아가 초조한 모습으로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아이 참. 어째서 아직도 배가 출발하지 않는 것이죠? 마음이 급해 죽겠는데…….”

정체와 행선지를 숨기느라 제갈세가의 천금인 것을 드러내지 않았다. 만약 그것을 밝혔더라면 배는 벌써 출발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반짝.

제갈영령의 눈이 맑은 빛을 뿜었다.

“본가에서 손을 쓴 것 같구나.”

“예? 본가에서요?”

“그래.”

그렇지 않다면 출발할 시간이 훨씬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선장이나 선원들이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이유를 설명할 수가 없는 거다.

‘조방을 통해 압력을 넣었겠지? 일단 제갈세가에서 한 번 살펴볼 때까지는 어떤 배도 띄우지 못하도록 말이야.’

제갈영령이 정확히 짚었다.

확실히 그랬다. 제갈세가에서 돈과 사람들을 몽땅 풀었다.

아무리 세력이 줄었다지만 융중산 인근은 아직 전통의 명문인 제갈세가의 영향력이 오롯이 살아 있는 곳, 운하를 직접 관리하는 조방이라 해도 들어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청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외쳤다.

“그러면 오래지 않아 본가의 무사들이나 어른들께서 이곳에 확인 차 오실 수도 있다는 뜻이잖아요.”

“당연히 그러겠지.”

“그런데도 태평하세요? 이러고 있으면 안 되잖아요.”

“괜찮다, 청아야. 그냥 앉으렴.”

“예? 왜요?”

“오늘은 여기까지만 생각하고 나선 걸음이란다. 이 이상은 가문에 너무 큰 누를 끼치게 하는 거야.”

“……!”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청아의 고개가 갸웃하고 기울었다.

그 표정을 보며 제갈영령은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정인의 집으로 아예 들어가는 가출과 원치 않는 혼사의 거부를 위한 의지의 표명과는 그 결과가 아예 다르단다, 청아야.’

자신이 원한 것은 딱 여기까지였다.

가출을 불사할 만큼 상관웅과의 혼사를 원하지 않는다는 의지의 표명. 이미 한 번 행동으로 확실한 경고를 해 보였으니 계속해서 강제로 혼사를 추진하면 그 뒷일 역시 감당하라는 뜻이었다.

‘아버지. 부디 이 마음을 알아주시어요. 상관세가의 손을 놓으시고 제발 연륜이나 입지가 비슷한 전통의 명문들과 중도연합을 구축하세요. 그래야만 제갈세가의 앞날이 밝아지게 되어요.’

제갈영령은 부디 이 간절한 마음이 가주인 제갈문군에게 가 닿기를 원했다.

“아, 아가씨! 아가씨 말씀이 옳았어요. 저기 좀 보세요. 진짜 세가의 무사들이 오고 있어요.”

“……!”

제갈영령의 눈이 동그래졌다.

청아가 가리킨 방향에서 제갈세가의 무사 십여 명이 몰려오고 있었다.

그런데…….

‘저 작자가 왜 여기에……?’

제갈영령의 안색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여어, 제갈 소저. 여기에 계셨었구려.”

한껏 너그러운 표정을 지어 보이며 상관웅이 선두로 걸어 나왔던 것이다.

‘아뿔싸. 내일쯤이나 도착할 것으로 계산을 하였건만 벌써 도착을 한 모양이구나.’

예상치 못한 복병의 등장에 제갈영령은 최대한 냉랭한 목소리로 쏘아 붙였다.

“당신이 여길 왜 왔지요?”

“왜라니요? 정혼자가 정혼녀를 찾아오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니오?”

“그 정혼, 내 의지가 아닙니다. 그 혼사를 거부하고 나오는 길입니다. 당연히 상관웅 공자께서는 제 정혼자가 아니게 되지요. 두 번 다시 정혼녀라는 말 입에 담지 마세요.”

피식.

상관웅이 코웃음을 쳤다. 하지만 그의 입가에는 억눌러진 분노와 함께 야비함이 엿보였다.

“재미있는 말씀을 다 하시는구려.”

“……!”

“우리 같은 사람들이 어디 자유의지로 혼인을 하고 산답니까? 아시다시피 우리 같은 사람들의 혼사란 가문의 이익과 어른들의 이해타산에 따라 이루어지는 법 아닙니까?”

무모하리만큼 솔직한 말이었다.

그렇기에 제갈영령의 얼굴은 더할 수 없을 만큼 싸늘해져만 갔다.

“잘 아시는군요. 가문의 이익과 어른들의 이해타산. 저는 제 인생을 가문의 이익이나 이해타산에 따라 희생할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보다 못한 제갈세가의 무사들이 나섰다.

“아가씨! 가주님의 심려가 크십니다.”

“보셨다시피 상관세가의 손님들께서 모두 도착하신 마당입니다.”

“상관세가의 최고 어른 중 한 분이신 상관엽 대협께서도 오셨습니다. 어서 돌아가시지요. 자꾸 이러시면 가주님께서 무척 곤란하게 됩니다.”

마지막 말을 건넨 사내는 시비 청아와 연인 관계인 천기단 소속 무사 양천이었다.

마음을 독하게 먹은 청아가 성큼 나섰다. 크게 고함을 쳤다.

“감히 누가 아가씨께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것이죠?”

“……!”

“모든 것은 아가씨께서 결정을 하시는 거예요. 더는 참지 않겠으니 자꾸 겁박하지 마세요.”

“……!”

일정 부분 옳은 말인데다 연인이 화를 내자 양천도 더는 나서지 못했다.

피식.

풀썩 웃어 보인 상관웅이 다시 나섰다.

“가문에 희생은 전혀 할 생각이 없으면서 가문의 이름이 주는 지위는 누리고 싶으신 모양이구려.”

“……!”

제갈영령은 차마 받아치지 못했다. 사실이었으니까.

상관웅이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비겁하지 않소? 누릴 것은 누리되 의무와 희생은 하지 않겠다는 생각이…….”

청아가 먼저 발끈했다.

“감히! 어쩌면 그런 말을 함부로 입에 담을 수 있죠? 우리 아가씨가 의무는 다하지 않는다니…….”

“닥쳐라, 계집. 나는 지금 네 상전인 제갈영령 소저와 대화를 나누고 있다. 너 따위 계집이 끼어들 자리가 아닌 것을 모른단 말이냐?”

“이익.”

청아가 이를 드러냈지만 감히 대거리는 하지 못했다.

분하지만 상관웅의 말이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뒤로 물러나거라, 청아.”

“아가씨. 하지만…….”

“어서!”

“예.”

청아가 뒤로 물러섰다. 그때까지 잠자코 지켜만 보던 제갈영령이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가문에 대한 의무란 꼭 희생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라고 봐요. 지위만 누리고 싶어 한다고요? 저는 지위를 누려본 적이 없어요.”

천기단 소속 무사들의 눈동자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제 뒤에 있는 청아는 제 자매나 다름이 없고 공자의 뒤에 선 무사님들과는 언제나 친오라버니 대하듯 서로 존중하고 지냈어요. 그렇지 않은가요?”

“아가씨!”

“아가씨!”

쿵. 쿵. 쿵.

양천과 함께 온 천기단 소속 무사들이 일제히 한쪽 무릎을 꿇었다. 고개를 조아렸다. 제갈영령의 말이 사실이었기 때문이었다.

“돌아들 가세요.”

“아가씨! 가주령이 떨어졌습니다.”

“염려 마세요. 복귀할 것입니다. 애초에 오늘의 일은 여기까지만 할 작정이었어요. 하지만 가주령이 발동했다고 하더라도 여러분들께 끌려가듯 함께 복귀해서는 곤란해요. 제가 알아서 혼자 돌아갈 것이에요.”

“아! 그래야 모양새가…….”

제갈세가의 무사답게 양천은 사리에 밝았다.

확실히 제갈영령의 말이 옳았다.

세가의 무사들과 상관웅까지 함께 찾아 나설 정도면 소문이 흉하게 나돌 것이다. 그런데 무사들 손에 이끌려 복귀를 하면 그 꼴이 뭐가 되겠는가?

‘아가씨의 말씀이 옳아. 외유를 마친 여식이 시비와 함께 무탈하게 잘 복귀했다는 그림을 만들어내는 게 훨씬 더 좋겠다.’

양천이 벌떡 일어났다.

“그러면 먼저 돌아가 있겠습니다. 부디 조심해서 세가로 복귀하시길 바랍니다, 아가씨.”

“염려해 줘서 고마워요.”

“무슨 말씀을!”

그 말을 끝으로 양천과 천기단 소속 무사들이 몸을 돌렸다. 부탁하겠다는 듯 상관웅과 살짝 시선을 맞추었다. 고개를 미미하게 끄덕여 보였다.

피식. 끄덕.

염려 말라는 듯 상관웅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러면 저희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이해해 주셔서 고마워요, 모두들.”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양천과 천기단 소속 무사들이 뒤돌아섰다. 제갈세가를 향해 먼저 움직여 갔다.

“……!”

가만히 그들을 바라보던 제갈영령의 시선이 상관웅에게로 향했다.

“공자님께서는 아직도 하실 말씀이 남아 있으신가요?”

“……한 가지만 물어 봅시다.”

“……?”

“저 배를 타고 대체 어디로 갈 작정이셨소?”

“제 말을 또 허투루 들으셨군요. 애초에 오늘의 일은 여기까지만 할 생각이었습니다.”

확실하게 선을 그었지만 상관웅은 듣지 못한 듯 자신이 하고픈 말만 계속 했다.

“호북성의 수로는 사통팔달, 그야말로 어디로든 갈 수 있지만 역시 가장 먼저 생각나는 곳은 동정호 북쪽에 자리한 무한이 아니겠소?”

흠칫.

제갈영령의 몸이 살짝 떨렸다.

‘이런 빌어먹을 계집. 내 짐작이 맞았구나.’

찰나에 불과한 떨림이었지만 상관웅의 눈은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용무린 그 개자식과 뜨거운 시선을 주고받았던 것을 내가 모를 줄 알았더냐?’

자신과의 혼사를 한사코 반대하는 이유를 그제야 알 것 같았다.

“이만 가 보아야겠어요.”

제갈영령이 자리에서 발딱 일어섰다.

때마침 나루를 향해 들어오는 조방의 상선을 흘낏 본 후 몸을 돌렸다. 이런 모습을 굳이 많은 사람들에게 보일 필요가 없는 것이다.

“두 번 다시 뵙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저를 본다 하여도 아는 체도 정혼녀라는 말도 입에 담지 않아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럼…….”

“흥.”

눈을 낮게 내려 깐 제갈영령이 몸을 홱 돌렸다. 콧소리와 함께 청아가 그 뒤를 따랐다.

“……!”

어이가 없는 표정으로 두 여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상관웅이 갑자기 이를 갈았다.

아드득.

“더러운 년들……. 감히 정혼자를 제쳐두고 다른 사내에게 마음을 빼앗기다니!”

그것도 하필이면 자신을 짓밟았던 용무린에게!

“그러고도 모자라 감히 정혼자인 내게 아는 체도 하지 말라고 당당히 요구를 해?”

어찌나 화가 나는지 머리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느낌이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마라.

최선을 다해 제갈영령을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겠다는 말에 상관엽은 분명히 그렇게 말을 했다.

어디 그뿐인가?

상관혁련 숙부는 할아버지의 말에 부연설명을 통해 화답해 주기까지 했었다.

씨익.

“좋아, 그렇다면?”

입가에 비릿한 미소를 띠워 올린 상관웅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저만큼 멀어져가는 제갈영령의 뒤를 따라 천천히 은밀하게 접근했다.

***

쏴아아. 철썩. 쏴아아아. 처얼썩.

“푸흐흐흐……. 드디어 유수나루다.”

무슨 상상을 그리도 맛깔나게 하는 것인지 계속해서 음흉한 웃음을 터뜨리던 용무린의 눈에 무엇인가가 걸렸다.

“으으응?”

널찍한 것이 힘 좀 써 보이는 등판인데 깨나 익숙한 덩치였다. 아는 놈이 분명하다.

“저 덩치 어디서 많이 본 덩치 같은데……. 계집 뒤나 졸졸 따라다니는 것 하며 상관웅 그 자식과 딱 닮았…… 어라? 저 여인은?”

용무린의 눈이 점점 더 커다래졌다.

부리나케 일어나 사냥개마냥 움직이기 시작한 상관웅의 등판 넘어 눈이 번쩍 뜨일 만큼 어여쁜 여인의 모습이 언뜻 스쳤던 것이다.

“제갈영령이라고 했던가?”

순간적으로 스쳐 지난 것에 불과하지만 확실하다.

천잠사 손수건을 자신 앞에서 보란 듯이 땅에 떨어뜨렸던 바로 그 여인이었다.

“왜 그녀가 이곳에…….”

허심이라 수놓인 손수건을 떨어뜨린 후 기다린다고 했던 말이 불쑥 떠올랐다. 설마하니 여기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인가?

“에이, 설마?”

자신이 대체 언제 올 줄 알고 하염없이 예서 기다린다는 말인가? 그건 말이 안 되는 거다.

“근데 상관웅 저 새끼는 또 왜 여기에 있는 건데?”

“무슨 일이냐, 무린아?”

“유수나루에 무슨 일이 생겼소이까?”

화운장로와 일각대사마저 관심을 둘 때였다.

“허엇! 저, 저 새끼가 감힛!”

용무린의 입에서 노성이 터져 나왔다.

상관웅으로 짐작되는 덩치가 제갈영령으로 짐작되는 여인의 뒤를 따라 움직이는가 싶더니 이내 시비를 일 권에 날려 버린 후 보쌈하듯 제갈영령을 짊어지고 신법을 전개해 버린 것이다.

휘슷.

그 모습을 목격하는 순간 용무린은 신형을 뽑아 올렸다.

아직 유수나루까지는 십여 장 이상 거리가 남아 있었지만 용무린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넌 뒈졌어!”

반짝. 피이이잉.

왼쪽 소매에서 소검비연이 길게 뻗어져 나왔다.

십수 장을 훌쩍 넘겨 쭉쭉 늘어나더니 유수나루 초입에 우뚝 선 버드나무의 가지에 착 감겼다.

튀이이잉.

착 감긴 천잠사가 팽팽히 당겨졌다.

후우욱.

그 탄력에 고스란히 몸을 맡긴 용무린의 신형이 빨려들 듯 버드나무까지 이끌렸다.

“죽여 버린다아-아!”

스파아-앙.

버드나무를 차고 날아오른 용무린의 신형이 상관웅이 사라진 곳을 향해 공간을 접듯 쏘아졌다.

“허헐, 아직 날도 채 어두워지지 않았건만…….”

“어서 뒤를 따르시지요. 자칫 일이 더 커질까 두렵습니다, 선배.”

일각대사가 채근을 했지만 화운장로는 즉시 움직이지 않았다. 혀를 끌끌 차기만 했다.

“쯧쯧쯧. 그냥 비룡문에서 했었던 것처럼 기녀들이나 찾을 것이지 여염집 규수는 왜 보쌈을 하누?”

화운장로마저 상관웅을 알아본 것이었다.

“확실한 것은 일단 따라잡은 후에야 알 것입니다. 일단 용무린 공자가 상관웅의 목을 베는 것을 말려야 합니다. 지금 제갈세가에는 상관세가의 전력이 집중되어 있는 상황이란 말입니다.”

“쯧, 별수 없이 나서야 하나?”

그렇지 않아도 은원의 해결이니 가문의 체면이니 하는 일로 바짝 독이 올라 있을 상관세가인데 용무린이 대뜸 상관웅의 목이라도 베어 봐라 어떤 일이 벌어지겠는가?

후욱. 쉬이익.

화운장로가 뱃전을 박찼다. 취팔선보를 펼쳤다.

일각대사가 그 뒤를 따랐다. 금강부동신법을 펼쳐 바짝 따라 붙었다.

타다다닷! 쌔애앵.

“푸하하하하. 이제야 네 년이 이 몸에게 어떤 죄를 범했는지 알 것 같은가?”

제갈영령을 어깨에 둘러멘 채 정신없이 달리며 상관웅은 계속해서 통쾌하게 웃었다. 끊임없이 제갈영령의 어리석음을 비웃었다.

“잠시만 기다려라 이년, 곧 이 낭군님께서 네년에게 극락세계가 무엇인지 직접 가르침을 내려 주겠느니라.”

추잡하고 더럽고 참담하기 짝이 없는 말.

그런 말을 들으면서도 제갈영령은 아무런 반박도 하지 못했다. 심지어 반항도 못했다. 생각지도 못했던 기습에 완벽히 제압을 당해 버린 것이다.

‘제, 제발…….’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목 안에서 맴도는 소리 없는 비명뿐. 청아는 이미 상관웅의 암수에 피를 토하고 쓰러진 후이고 사위는 점점 더 어두워지고 있었으며 자신을 짊어진 상관웅은 수풀이 우거진 강변을 향해 들어가고 있었다.

답은 빤히 나와 있다.

저 짐승 같은 사내놈은 자신의 청백지신을 강제로 마음껏 범할 것이다. 울어도 소용없고 애원해도 절대 들어주지 않을 테지만 그럴 기회조차 사실 없었다.

제갈영령의 심장이 까맣게 타들어갔다.

‘이, 이렇게 어이없이 짓밟힐 수는 없어. 안 돼. 안 돼-애.’

끊임없이 속으로 부르짖었지만 솔직히 방법이 없었다.

어느 정도 무공을 익히기는 했지만 제압당한 혈도를 스스로 풀어낼 정도는 결코 되지 못한다.

분했다. 하늘이 무너지는 듯했다.

또르륵.

제갈영령의 볼을 타고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할 때였다.

“……?!”

제갈영령의 눈이 동그래졌다.

휘영청 떠오르기 시작한 초저녁달을 등에 지고 훌쩍 날아오른 사내가 대붕처럼 거리를 좁혀드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던 것이다.

제법 거리가 떨어져 있었지만, 사위가 급격히 어두워지기까지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굴의 윤곽만으로도 충분히 누구인지 알아 볼 수 있었다.

‘서, 설마?’

그분인가? 정말 그분이 와 주신 건가?

쿵쿵쿵쿵쿵.

제갈영령의 심장이 거칠게 두방망이질 치기 시작했다.

꿈에서도 그리던 얼굴이었기 때문이었다.

‘요, 용가가(哥哥).’

용무린을 향한 호칭은 어느새 연인 사이에나 입에 담을 수 있는 가가(哥哥)가 되었다. 그 호칭을 기꺼이 받아들이겠다는 듯 용무린의 입에서 거친 포효가 터져 나왔다.

“상! 관! 우-웅!”

움찔!

상관웅의 고개가 살짝 뒤로 돌았다.

“떠헙.”

짓쳐드는 용무린의 얼굴을 확인한 후 심장이 튀어나올 만큼 놀라야만 했다. 용무린의 눈에서 비무를 빙자한 구타를 당했을 때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진한 살기가 뿜어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 어떻게 하지?’

싸우거나 제갈영령을 놓고 도망치거나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한다.

‘빌어먹을……. 하필이면 이런 순간에…….’

마음이야 당연히 맞서 싸우는 것을 원한다.

단숨에 용무린을 짓밟아 버리고 싶다.

온몸의 뼈를 바숴버린 후 사지를 떼어내 버리고 싶다.

그런데 도저히 엄두가 나질 않는다. 욕망이야 맞서 싸우라고 외치고 있지만 발은 지금 이 순간에도 걸음아 날 살려라 뛰고 있었다.

‘씨발, 씨바-알!’

욕설이 절로 튀어 나왔다.

억울했다. 정말이지 너무 억울해서 미칠 것 같다.

은원의 해결을 위해 불렀으니 언제고 오긴 올 놈이었지만, 그것이 왜 하필이면 지금 이 순간이 되어야 한다는 말인가?

‘한 시진만, 아니 반 시진만 늦게 도착했으면 좀 좋아?’

그 시간이면 쌀이 익어 밥이 되고도 남을 시간이다.

상관엽과 상관혁련이 모두 그것을 바라고 있었으니 아무 탈도 없었을 것이다. 혼사 문제는 그대로 마무리가 되었을 것이고 제갈세가는 혈연으로 묶인 줄을 잡고 자금성으로의 진출을 꾀했을 것이다.

피이이잉!

이미 비룡문에서 한 번 들어 보았던 섬뜩한 소리가 등 뒤로 파고드는 것이 느껴졌다.

‘허억!’

이대로는 죽는다.

등줄기를 타고 오돌토돌 소름이 쫙 솟았다.

저 망할 자식에게는 도저히 대적할 수 없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놈은 괴물이었다.

내공이 한참 아래이면서도 윗줄의 내공을 지닌 고수들을 잘도 잡아먹는 괴물, 상관웅은 절대로 용무린과 대적하고 싶지 않았다.

‘어쩔 수 없다.’

피해야만 한다.

그래야만 핑계도 댈 수 있고 복수도 할 수 있는 거다.

휘익.

별 수 없어진 상관웅은 제갈영령을 대뜸 강물을 향해 던져 버렸다.

“이 개자식이 정말!”

튀잉. 쉬리리릭.

금방이라도 등을 후벼 파듯 밀려들던 무엇인가가 급격히 방향을 바꾸는 것이 느껴졌다.

‘됐어!’

상관웅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다행히 자신의 판단이 맞았다. 제갈영령을 내던지자마자 용무린의 관심은 모두 제갈영령에게로 쏠렸다.

첨벙!

“잠시만 참아-앗.”

피잉. 휘리릭. 첨버-엉.

물보라 이는 소리가 크게 두 번이나 연이어 들렸다.

‘이때다.’

타닷. 파아-앙.

상관웅은 눈썹을 휘날리며 부리나케 그 자리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꿈틀.

화운장로의 눈썹이 하늘로 휙 치솟았다.

“저런 시러배 잡놈을 보았나?”

“이 소저의 숨통을 틔워 주는 것이 더 급합니다, 선배. 호법을 부탁합니다.”

“끄응. 알았네.”

상관웅에게 일 권을 얻어맞고 정신을 잃은 청아가 화운장로의 발을 붙잡았다.

일각대사는 청아를 조심스레 일으켜 앉혔다.

피해자가 사내였다면 그대로 추궁과혈을 했을 테지만 여인의 몸인지라 방법을 달리 택해야만 했던 것이다.

“후우-우!”

청아의 명문혈에 손을 가져다 댄 일각대사는 심후한 내공을 천천히 밀어 넣기 시작했다. 검게 죽어가던 청아의 안색이 빠르게 되돌아왔다.

***

보글보글.

제갈영령의 입과 코에서 하얀 기포가 계속해서 새어 나왔다. 제압당한 혈도에 내공까지 이용할 수 없었던 제갈영령의 정신은 금세 아득해졌다.

하지만…….

‘꿈만 같아…….’

제갈영령은 더는 두렵지 않았다.

자신을 향해 대붕처럼 날아드는 용무린의 얼굴을 확인했던 바로 그 순간 두려움과 걱정이 거짓말처럼 한 순간에 사라졌다.

강물을 향해 내팽개쳐졌지만, 용무린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자신을 구하기 위해 와줄 것임을 제갈영령은 이미 알고 있었다.

‘용가가…….’

물속이라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누군가 물속에 뛰어들 때 일어나는 진동이 고스란히 피부로 느껴졌다.

물의 흐름을 따라 빙글 몸이 뒤집힐 때 자신을 향해 거침없이 물살을 가르며 다가오는 용무린의 얼굴이 어둠속에서도 똑똑히 보였다.

‘오랜만이에요 용가가.’

마혈만 제압당하지 않았어도 방긋 웃어 보일 수 있었을 텐데, 용무린을 향해 미소도 지어 보이지 못하는 게 너무 아쉬웠다.

그 순간,

콰악.

강인하며 부드러운 팔이 허리를 휘감는 것이 느껴졌다.

용무린의 손이다.

그가 다가와 드디어 나를 붙잡아 준 것이다.

“……?!”

제갈영령의 눈동자가 격렬히 떨렸다.

생각지도 못했었던 일이 벌어졌기 때문이었다.

용무린의 얼굴이 한순간에 훅 코앞으로 밀고 들어왔다. 이어서 용무린의 입술이 제갈영령의 입술에 빈틈없이 포개어졌다.

후우욱.

용무린의 입술을 통해 생명의 숨결이 가슴 깊은 곳까지 하나 가득히 밀려들었다. 끊길 듯 말 듯하던 숨이 단숨에 안정되었다.

씽긋.

살짝 웃어 보인 용무린은 한 손으로 제갈영령을 안은 채 남은 한 손으로 헤엄을 치기 시작했다.

두웅실.

제갈영령은 하늘로 두둥실 떠오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제압당한 탓에 움직일 수 없는 시선은 계속해서 용무린의 옆모습에 고정되어 있었다.

“……!”

정지해 버린 듯한 시간.

이 세상에 용무린과 나 둘이서만 오롯이 존재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푸우우-!

드디어 강물 밖으로 나왔다.

용무린은 한 손에 제갈영령을 안고 있으면서도 잘도 헤엄을 쳤다. 오래지 않아 강기슭에 도달할 수 있었다.

“마혈을 제압당했군. 흥, 이 따위 쯤이야…….”

제갈영령은 등 쪽 명문혈 어림에 용무린의 따뜻한 손길이 와 닿는 것을 느꼈다. 뒤이어 뜨겁게까지 느껴지는 미증유의 힘이 밀려드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밀려든 뜨거운 힘이 사해 백지로 치달았다.

투두둑.

상관웅이 막아 놓았던 기혈이 어이없을 만큼 한순간에 모두 열려 버렸다. 깡그리 터져 나갔다.

“다 됐다.”

“……?!”

점혈이 모두 풀린 것을 알면서도 제갈영령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움직이지도 못했다. 무엇인가에 홀린 듯 계속해서 용무린의 눈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의 품에 안겨 있는 이 순간이 부끄럽기도 하고 달콤하기도 하고 종잡을 수가 없었다.

“어때? 이제 괜찮지?”

쿵쿵쿵쿵쿵.

심장이 터지기라도 하려는 듯 무섭게 날뛰었다.

목이 타는 듯 입이 바짝 마르게 느껴졌다.

용무린의 붉고 도톰한 입술이 너무나 귀엽고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물속에서 숨결을 나눠주기 위해 자신의 입술을 부드럽게 덮어 오던 용무린의 입술과 그 느낌이 머릿속에서 떠나지를 않았다.

‘아! 청아가 이래서 양천 무사의 입술을 먼저 덮친 것이로구나.’

작은 깨달음과 함께 제갈영령의 얼굴은 화끈 달아올랐다.

‘나, 나도 먼저 덮칠까?’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어차피 첫 입맞춤은 물속에서 이미 나누었다. 한 번 더 한다고 해도 괜찮을 듯싶었다. 제갈영령이 그렇듯 다소 앙큼한 고민에 휩싸일 때 용무린은 다른 걱정에 덜컥 빠져들었다.

“뭐야? 왜 아직도 못 움직여? 설마하니 아직도 점혈이 다 풀리지가 않은 건가?”

틀림없이 다 풀었다고 생각했는데 제갈영령이 움직이지를 않자 무척 우려가 되었다.

자존심도 팍 상했다.

상관웅 따위가 짚어 놓은 점혈 정도를 단숨에 풀어내지 못하다니!

“어라? 이젠 얼굴까지 더 붉어지네?”

용무린은 대뜸 제갈영령의 손목을 잡았다.

맥문을 쥔 후 조심스럽게 불사신기의 힘을 흘려 넣었다. 기경팔맥으로 흘려보내 탐색을 했다.

‘아, 용가가께서 지금 오해를 하고 있구나.’

제갈영령은 그제야 용무린의 말과 행동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었다.

하지만 쉽사리 움직이지는 못했다.

용무린의 표정이 너무 진지해서이기도 했지만, 앙큼하게도 그의 손길이 너무 따뜻하고 기분 좋게 느껴졌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상하네? 막힌 곳은 하나도 없는데?”

전생의 그 엄청난 경험을 토대로 말하건대 정말로 막힌 곳은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문제는 제갈영령이 아직도 움직이지도 입도 열지 못하고 있으며 얼굴까지 점점 더 붉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내가 뭔가를 놓치고 있는 건가?”

용무린은 결정을 내려야만 했다.

지금 당장 제갈영령을 안고 뛰어난 의원을 찾든지 아니면 급한 대로 추궁과혈이라도 해서 안전을 도모한 후 움직일 것인지 선택할 기로에 놓인 것이다.

“움직일 수는 없어도 지금 내가 하는 말을 알아들을 수는 있는 것 다 알아.”

결국 용무린은 안전부터 도모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마혈을 분명히 다 풀었다고 생각했는데 뭐가 잘못되었는지 소저의 얼굴이 점점 더 빨개지고 있어. 심장도 위험할 만큼 빠르게 뛰어. 나는 지금 위험한 순간이라고 생각해. 빠르고 과감한 조치가 필요하다는 판단이야.”

“요, 용가가…….”

“그래, 그래. 말도 제대로 할 수 없겠지. 뭔가 단단히 뒤틀어진 모양이라서 그래.”

제갈영령이 겨우 입술을 떼었지만 용무린의 오해는 하나도 풀리지 않았다. 아니, 더듬거리는 것 때문에 되레 더 깊어졌다.

“그, 그게 아니라…….”

“억지로 입을 열 필요는 없어. 오히려 더 위험해져. 내게 맡겨.”

조금 당황스럽기는 하지만 여전히 달콤한 말이다.

그런데…….

“내가 추궁과혈을 해 줄게.”

“……?!”

제갈영령의 눈이 동그래졌다.

추궁과혈을 입에 올린 용무린의 두 손이 대뜸 몸 위로 올라오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이, 이건 너무 빠르잖아.’

용무린을 사모하는 마음이야 변함이 없지만, 이것까지는 아직 곤란했다. 정신없는 와중에 이뤄진 입맞춤도 아직까지 부끄러워 죽겠는데 추궁과혈이라니!

“용가가!”

정확한 발음과 발성.

제갈영령은 용무린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대뜸 가슴 어림부터 추궁과혈을 시작하려던 용무린의 손을 가까스로 멈출 수 있었다.

‘제엔-장. 다 풀린 게 맞네.’

제갈영령의 손을 피할 수도 있었지만, 차마 그럴 수 없어 잡혀준 용무린은 입맛이 썼다.

‘차라리 마혈을 추궁과혈로 풀 것을.’

살짝 후회가 되었지만 이젠 늦었다.

“제갈영령 소저.”

“령매라고 불러 주셔야지요.”

“……?!”

이번에는 용무린의 눈이 동그래졌다.

보통 여타 세가의 지엄한 규율과 고뿔에 힘겨워하는 여인들만 겪어 오다 느닷없이 이런 호의를 맞이하게 되니 이것을 당최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령……매?”

“맞아요, 용가가. 잘하시네요.”

“……?!”

“고마워요. 늦지 않게 와 주셔서요.”

이럴 때는 대체 뭐라고 해야 하지?

용무린은 혼란스러워졌다.

‘솔직히 뺨 한 대 정도는 맞을 각오로 호흡을 건넨 것인데 말이야…….’

창백한 얼굴색을 보자마자 호흡이 끊기기 일보직전임을 알 수 있었다. 당장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훨씬 더 위급한 상황에 빠질 것이 자명했다.

‘용가가 운운에 령매라 불러 달라니…….’

뺨을 맞는 대신 찾아온 행운에 용무린은 솔직히 많이 얼떨떨했다.

‘에라, 모르겠다.’

“우, 우리 언제 산책이라도 할까?”

궁여지책으로 건네 본 말인데 되돌아온 것은 놀랍게도 미소였다.

방긋.

제갈영령이 환하게 웃으며 답했다.

“좋아요. 우리 걸으면서 대화를 나눠요. 저는 용가가에게 궁금한 것이 아직도 참 많아요.”

“……?!”

예상 밖의 대답에 용무린의 눈은 다시 한 번 부릅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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