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제갈세가에서 (22/104)

3.제갈세가에서

‘이, 이게 꿈이야 생시야?’

뺨도 맞지 않았는데 산책 예약까지 성공을 하다니!

“청아가 괜찮은지 모르겠네요.”

“청아?”

“제 자매 같은 아이예요. 그 망할 놈의 인간이 저를 납치할 때 먼저 손을 썼어요.”

“아하! 그 아이라면…….”

용무린은 염려할 것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자신의 뒤쪽에 누가 있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위기에 처한 여인을 그냥 두고 볼 양반들이 아니지.’

지금까지 코빼기도 뵈지 않는 것을 보면 빤하다.

이미 필요한 조치에 들어갔으리라.

“염려하지 않아도 될 것 같은데?”

“예?”

“그보다는…….”

말꼬리를 끌며 용무린은 자신의 겉옷을 벗었다. 제갈영령에게 꼼꼼히 둘러 씌웠다.

“네 옷매무새에 더 신경을 써야 할 것 같아.”

“……!”

제갈영령의 볼이 한순간에 훅 붉어졌다.

‘다른 사람들이 봐서는 절대로 안 된단 말이지.’ 라는 나지막한 중얼거림으로 인해 어째서 용무린이 겉옷으로 자신의 몸을 둘둘 휘감는지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속이 다 비쳐 보이나? 아니면 물에 딱 달라붙어 몸매가 심하게 드러난 모양이로구나.’

생각할 것도 없다. 두 가지 다일 것이다.

‘난 몰라.’

창피했다. 하지만 한 편으로는 달콤하기도 했다.

다른 사람들이 봐서는 절대로 안 된다는 말은 곧 나만 봐야 한다고도 해석될 수 있었고 그 말은 곧 새롭게 이어진 두 사람의 관계를 분명히 드러내주는 뜻으로도 읽히기 때문이었다.

“이제 다 됐다.”

“고마워요, 용가가.”

“고맙긴?! 어서 청아에게 가 보자.”

“네. 앗?!”

몸을 돌리던 제갈영령이 미끄러운 바닥 때문에 휘청하고 흔들렸다.

“조심.”

곁에 있던 용무린이 잽싸게 제갈영령의 어깨를 감쌌다.

얼결에 용무린의 품에 폭 안긴 모양새가 되었지만 더는 부끄럽지 않았다. 왠지 당연하게 느껴졌다. 용무린도 그렇게 느끼는 모양인지 당당하게 손을 내밀었다.

“잡아줄게.”

“……!”

그런 용무린의 눈을 잠시 들여다보았던 제갈영령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용무린의 손을 살포시 잡았다. 그리고 강변을 완전히 벗어난 후에도 놓지 않았다.

‘거참, 손을 잡는 게 원래 이런 기분이었나?’

아무렇지도 않을 것이라 생각했었지만 전혀 아니었다.

여인의 손을 잡는 일 따위 분명히 수도 없이 겪어 보았던 일이라고 생각했었지만 심장의 반응은 전혀 달랐다.

쿵쿵쿵쿵쿵.

격렬한 수련이라도 한 듯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너, 너무 오랜만이라 그런 걸 게야. 틀림없어.’

물론 그런 이유도 있긴 하겠지만 본질적으로 제갈영령은 다른 여인들과 다르게 느껴졌다. 하지만 아직은 그 이유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용무린과 제갈영령은 오래지 않아 화운장로와 일각대사 그리고 청아를 만날 수 있었다. 두 사람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듯 청아는 검게 죽은 피 한 덩이를 뱉어내며 정신을 차렸다.

***

“뭐, 뭐라고?”

“이런 바보 같은…….”

상관엽과 상관혁련의 눈이 무섭게 부릅떠졌다.

헐레벌떡 달려온 상관웅의 입에서 튀어나온 이실직고 때문이었다.

“허어, 가주가 계속해서 너를 탐탁지 않다고 하는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구나.”

“제 말이 바로 그 말입니다, 숙부님.”

“……!”

상관엽과 상관혁련은 계속해서 상관웅을 나무랐고 상관웅은 큰 죄라도 진 듯 고개를 푹 숙인 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다 차려진 밥상, 떠먹는 것도 제대로 하지 못하다니!”

“신법만 조금 더 빨리 전개했어도 되었을 것을…….”

“죄, 죄송합니다.”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해 죄송하다는 것인지 아니면 여인을 함부로 취하려 하다가 실패한 것이 부끄럽다는 것인지 불분명했지만 누구도 그 사실을 짚고 넘어가지는 않았다.

“일은 이미 실패로 끝났습니다. 어차피 제갈영령 소저가 도착하게 되면 이 일은 알려지게 될 것입니다. 그 대책을 논의해야만 합니다.”

1장로 부일기가 목청을 돋웠다.

물론 상관엽과 상관혁련의 대답은 간결하고도 확실했다.

“빨리 날이나 잡자고 하면 돼.”

“맞습니다, 숙부님. 구질구질하게 사죄하고 말고 할 것도 없습니다. 어차피 정혼을 약속한 사이 아니겠습니까? 이참에 혼례를 올리자고 하면 됩니다.”

부일기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감을 표했다.

“하긴, 그게 가장 확실한 대처 방법이긴 합니다.”

맞는 말이었다.

어차피 두 사람은 가주끼리 정혼을 약속한 사이, 책임을 통감하며 그 책임을 질 터이니 빨리 혼례를 올리자는데 더 뭐라고 할 것인가?

“굳이 기다릴 필요도 없다. 내가 지금 당장 제갈문군을 만나겠다. 연락을 넣어라.”

“숙부님 혹시 그 물건을……?”

상관혁련이 말꼬리를 늘였다.

상관엽의 고개가 묵직하게 끄덕여졌다.

“그래. 지금 주나 혼례를 올린 후에 주나 어차피 그 인간이 먹도록 만들기만 하면 되는 일 아닌가?”

“그렇긴 합니다, 숙부님.”

“맞습니다. 차라리 이 기회에 이실직고 하는 모양새를 취하며 뇌물처럼 내미는 것도 좋은 방법이긴 합니다.”

꿈틀.

뇌물이라는 단어에 상관엽의 눈두덩이 거칠게 요동쳤다.

하지만 가문의 일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상관엽은 끝내 입을 꾹 다물었다.

***

상관엽이 청한 독대는 바로 이루어졌다.

그렇지 않아도 제갈영령의 가출로 인해 껄끄러운 마음을 가지고 있던 제갈문군은 상관엽의 독대를 거절할 명분도 마음도 없었던 것이다.

물론…….

“뭐, 뭐라고요?”

상관엽을 만나 이야기를 듣고 난 후 뜨악하기는 했다.

상관웅이 자신의 딸을 강제로 범하려 했다는 사실도 그렇거니와 거침없이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는 태도 역시 놀라왔고 그 대응마저도 상식 밖이었던 것이다.

“어떻게 감히 우리 영령이를……?”

분노를 얼굴 한 가득 드러냈다. 다만 강력하게 터뜨리지를 못했다. 상관엽이 다소 뻔뻔하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당당한 태도로 말을 이었기 때문이었다.

“미안하게 됐소이다. 상관세가를 대변해 다시 한 번 사죄를 드리겠소. 하지만 어차피 귀 가문의 여식과 우리 소가주와는 정혼을 약속한 사이가 아니오? 이참에 혼례를 올려 버리면 아무 문제가 될 게 없다고 생각하오.”

“그, 그래도 이것은…….”

말이야 맞는 말이지만 기분은 전혀 별개의 문제!

더는 참을 수 없다는 듯 제갈문군이 목소리를 다시 높일 찰나 상관엽이 불쑥 입을 열었다. 제갈문군의 말을 중간에서 툭 잘라 버렸다.

“본디 혼례의 예물로 드릴 생각이었으나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사죄의 의미로 미리 드려야겠다고 생각했소이다.”

상관엽이 품에서 작은 목함 하나를 꺼내 들었다. 슬며시 앞으로 밀었다.

“본가에서 비밀리에 구입한 영단이외다.”

“……!”

느닷없이 튀어나온 영단이란 말에 제갈문군의 눈이 동그래졌다.

‘뭘까? 내상에 좋은 약일까? 설마, 내공 증진을 위한 영단? 그래, 기왕이면 내공 증진을 위한 영단이었으면 정말 좋겠다.’

온갖 약삭빠른 생각들이 부끄러움도 없이 스쳐 지났으나 제갈문군은 느끼지도 못했다. 그때 상관엽의 입에서 결정적인 말이 흘러나왔다.

“의성 신우량의 활생단 입니다. 혼례에 앞서 제갈세가주께 예물로 준비했던 녀석이오.”

“화, 활생단!”

제갈문군의 입이 떡 벌어졌다.

민초들에게는 숨만 붙어 있으면 그 어떤 병마에서도 목숨을 구해줄 성약이며 무인들에게는 고질적인 내상의 치유와 함께 단숨에 1갑자의 내공을 안겨주는 무가지보가 바로 활생단이었다.

제갈세가주가 충분히 놀랄 만한 귀물의 등장인 셈이다.

그런 점을 확인이라도 해 주겠다는 듯 상관엽의 목소리에 한층 더 힘이 실렸다.

“잘 아시겠지만, 돈으로는 사기가 힘든 귀물이외다.”

“……!”

제갈문군의 고개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천천히 끄덕여졌다. 진정 활생단이라면, 소림의 대환단이나 무당의 자소단 그리고 개방의 구지신단과 비슷한 반열에 오른 무상의 영단이었기 때문이었다.

“십수 년 전, 당시 본가의 가주이시자 내 형님이셨던 상관명 대협께서 위기에 처한 의성을 돕는 인연이 없었다면 우리 가문도 이 영단을 살 수는 없었을 것이오.”

“오오오, 그렇다면 정녕 이것이…….”

“맞소. 십수 년 전 의성 신우량에게 직접 구입한 활생단이 분명하오이다.”

반짝 반짝.

제갈문군의 눈이 숨길 수 없는 탐욕으로 물들어 갔다.

씨익.

슬쩍 입꼬리를 말아 올린 상관엽의 말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 영단을 발판으로 삼아 가주께서 초절정의 경지에 올라 찬란했던 제갈세가의 영광을 되찾았으면 하외다. 자금성으로의 진출 역시 본가에서 전력을 다해 도울 것을 약속하겠소이다.”

그야말로 장밋빛 미래의 약속이다.

제갈문군의 고개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천천히 그리고 크게 끄덕여졌다.

***

시간이 흘러 술시 말이 되었다.

달이 휘영청 떠오를 무렵이 되어서야 제갈영령은 가문으로 복귀할 수 있었다.

“뭐, 뭐? 령아가 돌아왔다고?”

활생단 생각에 온 마음을 빼앗기고 있던 제갈문군은 총관의 보고에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예, 가주님. 지금 즉시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다더니 먼저 옷을 갈아입어야겠다며 방으로 향했습니다. 곧 이곳으로 올 것입니다.”

즉시 드리고 싶은 말!

‘역시 그 문제를 입에 담겠지?’

듣지 않았어도 이미 들은 것과 같았다.

상관엽이 찾아와 먼저 이실직고를 했기 때문이다.

“아가씨와 함께 비룡문의 소가주 용무린 공자도 세가에 도착을 했습니다. 개방의 화운장로와 소림의 일각대사와 함께였습니다.”

“령아와 함께 왔다고? 용무린이?”

“예, 가주님.”

“……!”

제갈문군의 눈매가 가느다래졌다.

‘뭔가 느낌이 좋지 않은데?’

제갈문군은 자신의 여식인 령아를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혼사 문제로 말이 많을 이런 시기에 외간남자와 함께 나란히 동행을 해서 세가로 돌아왔다고?’

쉬이 믿어지지 않았다.

자신이 아는 제갈영령이라면 제 아무리 화운장로와 일각이 동행을 하고 있다 하여도 먼저 오든지 아니면 조금 더 늦게 오는 것을 택했을 것이다.

‘용무린의 방문시기가 예상보다 훨씬 빠른 것도 마음에 걸린단 말이지.’

오긴 올 것이지만 예상보다는 너무 빠른 방문이었다.

불과 이레 전쯤에 비로소 비룡문에 배첩이 도착했다고 했으니 지금쯤이면 잘 해봐야 대책을 마련했거나 출발 준비나 겨우 하고 있어야 맞다.

‘예상보다 빠른 방문. 령아의 가출과 같은 날 함께 복귀?’

부정적인 그림이 바로 그려졌다.

‘혹시 용무린 그 아이 때문에 우리 령아가……?’

정혼자와의 사이가 좋아지라는 뜻에서 보냈던 백리세가에서 정작 눈은 용무린과 맞은 것인가? 라는 의심이 덜컥 들 수밖에 없었다.

총관의 말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늦었지만 용무린 공자께서 인사를 드리겠다고 합니다.”

그게 정상이긴 하다.

특별한 일이 아닌 이상 화운장로와 일각대사는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될 인물들이었지만 용무린은 자신들과 비슷한 처지인 비룡문의 소가주에 불과하니까.

‘하지만, 지금 내가 굳이 그 녀석을 만날 필요가 없지.’

제갈문군은 단호한 태도로 고개를 흔들었다.

“됐다고 전해라.”

어차피 상관세가에서 적이나 다름없는 상대로 규정했다.

정혼을 약속한 가문인 이쪽에서는 의당 거리를 두어야 옳은 일인 것이다.

“개방의 화운장로와 소림의 일각대사가 함께였습니다. 두 분께서도 이참에 가주님을 뵙고 싶다고 하셔서…….”

“개방의 화운장로와 소림의 일각대사가?”

“예, 가주님.”

“……!”

제갈문군의 눈이 가느다래졌다.

‘뭔가 있구나.’

조금만 생각하자 대뜸 한 가지 가능성이 떠올랐다.

‘가만 있자, 령아와 용가 애송이가 세가에 함께 도착했다고 했었지?’

상상하기도 싫은 가정이지만 상관웅이 멍청한 일을 벌이는 모습을 용무린이 보았을 수도 있는 것이다.

‘아니, 그 아이가 구해준 것이로구나.’

조금만 더 생각을 하니 상황이 바로 인식이 되었다.

상관엽이 숨기고 있었던 모든 일이 하나로 다 엮여 고스란히 드러나 보였다.

상관웅이 강제로 범하려 했던 것이 미수에 그친 이유에는 바로 용무린이 있었다. 용무린의 도움이 있었기에 제갈영령이 지금 옷을 갈아입을 정도의 침착함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용무린이 나서지 않았다면, 아니 용무린과 화운장로 그리고 일각대사의 도움이 없었다면 어쩌면 자신의 여식은 오늘 흉한 일을 당했을 것이다.

‘그랬다고 하더라도 변하는 것은 없었겠지만…….’

기분은 하늘과 땅 차이였을 것이다.

‘고맙긴 하지만, 별 수 없다. 내겐 제갈세가의 미래가 더욱 중요하단 말이야.’

의성 신우량의 활생단.

돈 따위로는 결코 살 수 없는 그 귀물이 흔들리는 제갈문군의 마음을 다시 한 번 붙잡았다.

“지금은 내가 중요한 용무가 있으니 그 두 분께는 내가 내일 따로 연락을 드리겠다고 전해라.”

“알겠습니다, 가주님.”

똑 소리 나는 대답과 함께 총관이 물러났다.

잠시 후 기다렸다는 듯 제갈영령이 문을 두들겼다.

“아버지. 저예요.”

“들어오너라.”

제갈영령이 들어와 제갈문군 앞에 앉았다.

아무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제갈영령은 제갈영령대로 여인의 입장인지라 그런 이야기를 함부로 입에 담기가 어려웠고 제갈문군은 제갈문군대로 여식의 가출로 인해 손상된 체면과 치솟는 분노로 인해 말을 삼갔다.

두 사람 사이에 무거운 공기가 맴돌았다.

일다경이나 지났을까?

결국 마음을 굳힌 제갈영령이 먼저 입을 열었다.

“상관웅 공자는 역시나 생각대로의 사람이었…….”

“되었다.”

제갈문군은 제갈영령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툭 잘라버렸다. 놀란 나머지 동그랗게 눈을 뜬 제갈영령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 녀석이 마음이 조금 급한 나머지 인간적인 실수가 있었다고 하더구나.”

“아버지! 그게 지금 무슨 말씀이신…….”

“됐다고 하질 않았느냐? 이 아비의 말을 먼저 듣거라!”

“……!”

“내 방금 말해 두었듯 상관웅은 정혼을 약속한 사내다. 이제 날만 잡으면 언제고 네 신랑이 될 사내란 말이다. 그런 사내가 마음이 조급해 성급하게 행동을 했기로서니 그게 무슨 대수란 말이더냐?”

“……!”

어찌나 어이가 없던지!

쩍 벌어진 제갈영령의 입은 쉬이 다물어지지가 않았다.

‘아버지가, 내 아버지가 어떻게 내게 이러실 수가 있지?’

실망이 큰 만큼 분노 역시 크게 치솟았다.

“그보다 네 행동이 더욱 문제다. 감히, 가출이라니! 외출 금지령을 내리겠다. 너는 지금 즉시 네 방으로 건너가 따로 말이 있을 때까지 근신하거라.”

“아버지.”

“혼례일이 잡히면 알려 주겠다.”

“……결국 저를 팔아넘기기로 마음을 굳히셨군요.”

너무나 처연한 제갈영령의 목소리에 제갈문군은 차마 받아칠 수가 없었다.

“후회하실 거예요, 아버지.”

“절대로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제갈문군이 이를 악물고 목소리를 높였지만, 솔직히 그 말을 하는 순간에도 이미 후회하고 있다는 사실을 제갈문군은 스스로 느낄 수 있었다.

‘어쩔 수 없어. 이것만이 우리 제갈세가의 미래를 담보하는 일이야.’

알면서도 그렇게 자신을 세뇌하고 또 세뇌할 뿐이었다.

그렇게 세뇌하며 보낸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가주님!”

“……?!”

“가주님!”

“……커흠흠, 총관인가?”

계속해서 자신을 부르는 총관의 목소리에 제갈문군은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비룡문의 용무린 소가주께서 인사를 드리겠다고 다시 청하셨습니다.”

꿈틀.

제갈문군의 눈두덩이 거칠게 움직였다. 고함을 버럭 질렀다.

“내가 분명히 되었다고 전하라 한 것 같은데?”

“저, 분명히 그렇게 전하였는데…….”

총관이 쩔쩔매는 듯 말을 끌 때였다.

“베푸는 분이야 상관없겠지만 받는 사람이야 어디 그렇습니까? 적어도 재워주고 밥 먹여주는 분께 인사는 드려야 할 것 같아서 왔습니다.”

“거럼!”

“아미타불!”

당돌한 목소리와 함께 늙수그레한 목소리와 불호성이 연이었다.

“……!”

제갈문군의 눈이 동그래졌다.

제갈문군이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문이 활짝 열렸다.

그야말로 훤칠하게 생긴 젊은 사내와 익히 안면이 있는 화운장로 그리고 일각대사가 차례차례 안으로 들어섰다.

“오랜만이오, 가주.”

“그간 별래무량 하시었습니까, 가주님?”

이미 안면이 있었던 화운장로와 일각은 간단한 인사로 서로의 친분을 드러냈다.

‘빌어먹을. 왜 저 두 사람까지 함께 와서 난리람?’

별 수 없었다. 이렇게 된 이상 이야기를 들어보는 수밖에.

제갈문군이 정중한 태도로 포권을 취했다.

“그간 적조하였습니다. 두 분께서 강녕하신 모습을 뵈니 이 제갈문군 한결 마음이 놓입니다. 그런데…….”

제갈문군의 시선이 자연스레 용무린에게로 향했다.

용무린이 형형한 눈을 빛내며 제갈문군에게 예를 취해 보였다.

“비룡문의 용무린입니다.”

“……!”

제갈문군은 내심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얼굴로 보나 기세로 보나 용무린은 상관웅에 비해 너무나 잘난 사내였다. 특히 많은 글을 읽음으로써 자연적으로 몸에 배게 되는 지적인 분위기는 발군이었다.

‘젠장, 나 같아도 덩치만 곰 같은 성폭행 미수범보다는 저 녀석에게 끌렸겠다.’

잇속을 차리기 위해 상관세가와 혈연을 맺으려 하고는 있으나 본디 제갈세가는 학문을 사랑하는 곳이다.

선비의 기질이 다분한 제갈문군의 눈에 솔직히 상관웅은 차질 않았다. 무공만 아는 곰 같은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소리 없이 구르는 눈은 기회주의자로 보였으며 그동안 확인된 그의 행실 또한 매우 음탕했으니 뭐 더 말할 필요가 없었다.

‘그 자식, 참 잘났네 그려.’

첫눈에 마음에 들었다.

거기에 더해 삼절일학이라고 하는 별호 또한 마음에 든다. 시서화 세 가지 방면에 있어서 모두 일절이라 불린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너무나 잘 알았다.

‘젠장. 비룡문에 상관세가만큼만 북경에 댈 줄이 있었다면……. 아니, 아니야.’

잠시 용무린을 사위로 맞이하는 것에 대한 생각을 해 보았던 제갈문군은 내심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실제 비룡문에 그만한 줄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젠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기 때문이었다.

‘의성 신우량의 활생단.’

그동안 지지부진하던 자신의 내공 수위를 단숨에 초절정의 경지로 끌어 올려줄 희대의 성단! 그것이 자신의 손에 있는데 더 무엇을 바랄 것인가?

‘내가 초절정의 경지에 들게 된다면, 절전된 가문의 비전으로 인해 바닥에 떨어진 본가의 명성이 단숨에 하늘 높이 치솟게 될 거야. 그렇게만 될 수 있다면 굳이 자금성으로 뚫고 들어가지 않아도 된단 말이지.’

무가로서의 입지가 굳건해지게 된다는 말이다.

초절정 경지의 무인이 있는 곳과 없는 곳의 차이는 하늘과 땅만큼 큰 법이니까.

“용무린? 비룡문의 소가주라고? 좋아, 반갑네. 하지만 중립을 지켜야만 하는 내 입장이나 정혼을 약속한 가문과의 친분 관계 때문에라도 반가워만은 하지 못하겠군. 그 점 양해 해주게. 그래, 인사는 이쯤으로 되었으니 어서 빨리 가서 쉬게.”

완곡한 축객령.

입가에 보기 좋은 미소를 떠올리고 있던 용무린의 입에서 천만 뜻밖의 소리가 튀어 나왔다.

“상관세가에서 깨나 값진 걸 내밀었나 보네요?”

흠칫.

제갈문군이 살짝 몸을 떨었다. 눈을 부릅떴다.

“야, 이 녀석아. 말본새가 그게 뭐냐?”

“용 시주.”

“아, 상황이 그렇잖아요. 이 시간이면 어떤 일이 있었는지 최소한 언질이라도 받았을 거 아녜요?”

“거야, 그렇지.”

“그래도 그런 언행은 곤란합니다, 용 시주. 앞에 계신 분은 제갈세가의 가주님이시니까요. 알겠습니까?”

말로는 나무라는 듯했지만 화운장로와 일각대사의 시선은 줄곧 제갈문군에게만 향했다. 어떤 반응이 나올 것인지 사뭇 궁금하다는 듯 보였다.

아득.

“화운 장로님과 일각 대사님의 낯을 보아 이번 한 번은 참도록 하지. 방금 자네가 한 말은 나뿐만이 아니라 제갈세가 전체를 모독했다는 것을 잊지 말게. 알. 겠. 나?”

“모독? 이 정도 질문이 모독이면 가주님의 천금을 감히 강제로 능욕하려 한 새끼에게는 어떤 참담한 죄명을 붙여야 하는 것이죠?”

“……!”

“제갈소저께서 눈물을 뚝뚝 흘리며 나가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떤 일을 당할 뻔했는지 소저께 정말 듣지 못하신 겁니까?”

제갈문군은 계속해서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가문의 이익을 위해 딸에게 희생을 강요했던 뻔뻔함을 차마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내세울 수는 없었던 것이다.

“상관웅 그 개자식이 무슨 생각으로 납치를 시도했었던 것인지 굳이 말할 것도 없습니다. 하지만 그거 아십니까? 제갈영령 소저는 오늘 죽을 뻔했습니다.”

물론 제갈문군이 다시 한 번 뻔뻔함을 밀어 붙였다고 한들 용무린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도 그러하다는 듯 용무린은 제갈문군의 경고 따윈 무시해 버린 채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끝까지 쏟아냈다.

“그 새끼가 마혈까지 제압한 따님을 그대로 강물에 던져 버렸습니다. 이제야 아시겠습니까? 그 새끼가 따님에게 어떤 짓을 했는지?”

“……!”

제갈문군의 눈에 핏발이 곤두섰다.

그런 일이 있었는지까지는 미처 알지 못했던 것이다.

‘령아…….’

제갈문군은 가슴이 미어지는 듯했다.

처연한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던 딸이 생각나 너무 괴로웠다.

‘미안하다. 정말 너무나 미안하구나, 딸아.’

강제로 범하려 한 것으로도 모자라 마혈을 제압한 채 강물에 던져 버렸다니! 정말 마음만 같아서는 상관웅이란 놈을 씹어 먹고 싶을 정도였다.

활활 타는 듯한 시선으로 제갈문군을 노려보던 용무린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좋습니다. 령매의 목숨을 제가 구했다는 걸 내세울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으니 이만 일어나지요.”

화운과 일각도 용무린을 따라 몸을 일으켰다.

묵직한 목소리로 지나가듯 입을 열었다.

“상관웅 그 쥐새끼가 한 짓을 내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소이다. 그에 대해 증인이라도 서 주려 이리 찾아온 걸음인데…….”

“그만한 고뇌 뒤에 내려진 결정이 침묵이라고 믿습니다만, 그 일에 대해 증인이 필요로 하신다면 언제든 제 이름을 걸고 나서드릴 생각입니다, 가주님.”

제갈문군의 얼굴이 훅 붉어졌다.

실오라기 하나 남기지 않고 발가벗겨진 느낌이었다.

창피했다.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다.

몸을 완전히 돌렸던 용무린이 불쑥 입을 열었다.

“오래지 않아 상관세가에서 노래를 불렀던 은원 해결의 날이 올 테지요. 그날, 똑똑히 보여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상관세가라는 이름의 허망함을…….”

그 말을 끝으로 용무린은 밖으로 나섰다.

화운과 일각이 묵묵히 그 뒤를 따랐다.

“……!”

홀로 남겨진 제갈문군은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그러다 문득 가슴 깊은 곳에 숨겨 두었던 작은 목함에 생각이 미쳤다. 홀린 듯 목함을 꺼내 열었다. 청아한 향과 함께 금박에 싸인 활생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상관세가라는 이름의 허망함이라…….”

꿈에서도 그리던 초절정 경지에 다다를 길이 손아귀 안에 있었지만 제갈문군은 목에 가시라도 걸린 것만 같았다. 지금과 같은 기분으로서는 도저히 영약을 복용할 엄두가 나질 않았다.

***

“에잇, 기분도 그런데 술이나 한 잔 먹어야겠다. 무린아, 어떠냐?”

“좋지요……?!”

흔쾌하게 대답하던 용무린의 목소리가 묘하게 길어지는가 싶더니 금세 다른 말로 바뀌었다.

“그런데 오늘은 두 분이서 함께 하세요.”

시선 끝에 누군가의 모습이 걸렸기 때문이었다.

제갈세가의 내원 끝부분에 자리한 화원.

가득한 모란 속에 외로이 홀로 선 채 눈물을 훔치는 제갈영령의 모습이 용무린의 발걸음을 잡은 것이다.

“이게 말이야 방구야? 야, 인석아. 거지와 소림의 땡중 둘이서 마시는 술이 무슨 재미가 있겠냐? 그래도 젊은 네가 있어야…….”

“허허허, 선배. 그래도 제가 말동무로는 제법 괜찮지 않습니까? 저와 함께 가시지요.”

“어어? 일각 자네, 왜 자꾸 안하던 짓을 하……?”

용무린의 시선을 좇았던 일각대사는 대뜸 화운장로의 팔을 잡아끌었다. 화운장로가 그제야 눈치를 챘다. 풀썩 웃으며 따라 나섰다.

“훗, 좋을 때구나.”

“그렇습니다, 선배. 정말 좋을 때지요.”

“무린이 녀석이라면 저 아이가 입은 마음의 상처를 잘 어루만져 줄 수 있을 거야.”

“그러니까 어서 가시지요. 오늘은 제가 끝까지 선배님의 말벗이 되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말벗은 무슨! 됐어. 죽엽청이나 한 병 달래서 그냥 내 방에서 마실 거야.”

“하하하. 혼자서는 술 맛이 나질 않는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아, 됐어. 땡중하고 무슨 술 맛을 논해? 냅둬. 나 혼자 마실 거라니까?”

“하하하. 함께 가시지요, 선배.”

화운장로가 바삐 걸음을 옮겼고 일각이 그 뒤를 바짝 뒤쫓았다. 두 사람을 보며 빙긋 웃어 보인 용무린은 조용히 제갈영령이 있는 곳으로 움직였다.

아찔하도록 진한 모란의 향기.

은은한 달빛 아래 홀로 눈물짓고 있는 제갈영령.

잠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용무린은 분위기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밝은 목소리로 불렀다.

“령매.”

“아!”

화들짝 놀라 용무린을 바라보았던 제갈영령은 다시 잽싸게 몸을 돌렸다.

“용가가!”

바삐 눈물을 훔친 후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용무린을 향해 다시 활짝 웃어 보였다.

아직까지 채 지워내지 못해 촉촉이 젖은 눈과 처연하게까지 보이는 미소에 용무린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느낌을 받아야만 했다.

‘젠장. 아무리 가문의 이익이 중요하다지만 어떻게 자신의 딸에게 희생을 강요할 수 있어?’

제갈영령의 낯을 보아 더 쏘아 붙이지 않고 꾹 눌러 참고 나온 걸음이지만 새삼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두 번 다시는 제갈영령의 눈에서 눈물이 나지 않도록 만들고 싶다는 욕망이 폭발하듯 솟구쳤다.

“가자. 산책하러.”

“예? 지금요?”

“응, 지금. 싫어?”

“싫은 건 아니지만…….”

제갈영령이 말꼬리를 늘였다.

혹여 세가 내에서 함께 돌아다니다 구설수에 올라 다시 한 번 제갈문군을 힘들게 하지나 않을지 걱정을 하는 모양이었다.

피식.

“가주님께 분명히 말해 드렸지. 머지않아 있을 은원 해결의 날에 상관세가라는 이름의 덧없음을 똑똑히 보여주겠다고 말이야.”

“……?!”

“령매는 강에서 나오자마자 나를 대뜸 용가가라 불렀지. 일시적인 충동에 한 말이었나? 령매라 불러달라는 말까지 모두?”

아니! 그것은 절대로 아니었다.

‘저는 언제나 용가가를 그리워했어요. 하루라도 빨리 용가가께서 나를 찾아와주기만을 바랐지요.’

제갈영령의 고개가 천천히 하지만 확실히 가로저어졌다.

씨익.

“그렇다면 아무 걱정하지 말고 내 손을 잡아. 어차피 언젠가는 알려지게 될 일, 차라리 지금 모두가 알게 하는 편이 더 나아.”

“……!”

제갈영령은 용무린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따뜻하지만 강렬한 눈빛에서 용무린의 의지를 분명하게 느낀 제갈영령은 용무린이 내민 손을 잡았다. 믿음을 가득 담아 대답했다.

“용가가만 믿겠어요.”

“그래, 바로 그거야. 나만 믿으면 된다니까?”

두 사람은 서로 손을 꼭 잡은 채 화원을 거닐고 다니기 시작했다.

“어마? 아가씨께서 어찌 외간사내와 손을……?”

“어쩜 좋아? 가주님께서 아시는 날엔 정말 크게 치도곤을 당하실 텐데.”

때마침 내원을 지나치던 시녀들 눈에 두 사람의 모습이 걸렸다. 물론 제갈세가의 직계들 눈에도 더러 띄었다. 이제 막 시작한 두 연인의 다정한 모습은 빠른 속도로 주변으로 퍼져갔다.

“무공 연마하시기 힘들지 않으셨어요?”

“힘이야 들긴 했지. 알고 있겠지만, 이놈의 육체가 원체 허약해 놔서 말이야.”

“아! 음양쇠맥증.”

“너무 걱정 마. 그거 다 나았어.”

“정말 다행이에요.”

“처음엔 정말 환장하겠더라고. 음양쇠맥증은 다 사라졌는데 육체는 너무 허약하고……. 어쩌겠어? 죽어라 단련하는 수밖에…….”

“대체 어떻게 단련하신 거예요? 무공을 연마하신지 이제 불과 6개월 정도로 알고 있는데……. 궁금해요, 용가가께서 이렇게 빨리 성취를 얻게 되신 단련법이요.”

“흠, 거 비밀인데…….”

“치잇. 제게도요?”

제갈영령이 짐짓 토라진 표정을 지어 보였다.

용무린이 천부당만부당하다는 듯 눈을 부릅떴다. 거칠게 머리를 흔들었다.

“물론 아니지.”

“그럼 말해 봐요.”

“처음엔 말이야 그냥 평범하게 시작했어. 간단한 달리기부터 시작해서 작은 돌 들어올리기 같은…….”

제갈영령의 손을 꼭 잡고 걸으며 용무린은 자신이 수련하던 일들을 하나씩 입에 담았다.

“아하! 그랬군요. 정말요? 흑곰과요? 호랑이도요?”

적절한 추임새와 함께 제갈영령은 평범하기 짝이 없는 용무린의 말에 흠뻑 빠져들었다. 그야말로 전설의 수련법이라도 듣는 듯 집중했다.

“그 다음에 찾아간 곳이 무투장이었지. 실전감각을 끌어올리기 위해서였는데 말이야…….”

용무린은 환생을 한 부분과 불사신기에 대한 것을 제외한 자신의 모든 것을 제갈영령에게 다 털어 놓았다.

‘그 사실도 지금 알려줄까?’

그런 생각이 불쑥 치밀어 올랐지만 겨우 참았다.

아직은 그 사실까지 알려주기엔 그 위험성이 너무 큰 비밀이기 때문이었다.

***

어느새 날이 밝았다.

밤사이 퍼지기 시작한 소문은 날이 밝기가 무섭게 세가 전체에 번졌다. 내원의 직계는 물론이고 외원의 모든 식솔들까지 다 알게 되었다.

“어머나 세상에, 영령 아가씨와 용무린 공자님께서?”

“그렇다니까? 내원의 소란이가 똑똑히 봤대.”

“앵화는 입맞춤하는 장면까지 봤다는데?”

“꺄아악. 입맞춤까지? 그래서? 두 사람의 진도가 대체 어디까지 나갔대?”

“아니, 그것보다 상관웅 공자님은? 우리 아가씨께서 용무린 공자님과 그렇고 그런 사이가 되었다면 상관웅 공자님은 이제 어떻게 되는 거야?”

“어떻게 되긴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신세지 뭐.”

“오호호호. 상관웅 공자님도 속 깨나 끓이겠구나.”

제갈세가 전체가 두 연인들의 대담한 애정 행각에 대해 뒷담화를 벌였다. 시녀들은 주로 용무린에게 표를 던졌고 수컷인 하인들은 정혼을 약속한 상대였던 상관웅에게 애도의 표를 던졌다.

식전 댓바람이었지만 그 소식에 소스라치게 놀란 제갈문기가 헐레벌떡 제갈문군을 찾아올 수밖에 없었다.

“형님!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이미 세가 전체에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단 말입니다.”

“……!”

제갈문군의 눈두덩이 파르르 떨렸다.

하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분노를 표현하거나 소문을 잠재우기 위한 조치를 입에 담지 않았다. 애가 단 제갈문기가 다시 한 번 목소리를 높였다.

“이러다 상관세가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면 큰일입니다, 형님. 어서 빨리 사태의 진위를 파악하신 후 용무린 그 시건방진 놈이 정녕 령아 그 아이에게 무례하게 행동한 것이 맞는다면 징치를 해야 합니다.”

“징치?”

“예, 형님.”

제갈문군이 풀썩 웃으며 말을 이었다.

“령아의 정절과 목숨을 구해준 것에 대한 계산도 아직 끝내지 않았다.”

“예에? 그, 그게 대체 무슨 말씀이신지…….”

제갈문기가 휘둥그레진 눈으로 해명을 요구했지만 제갈문군의 고개는 힘없이 좌우로 흔들렸다.

“됐다. 나가 봐라.”

“형님! 아무리 그래도…….”

“왜? 상관세가에서 령아와 용무린의 일을 알게 될 것이 두렵다 이거냐?”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어떻게 정혼을 약속한 사내가 멀쩡히 있는데 여염집 아낙도 아닌 제갈세가의 천금이 외간 사내와 그렇게…….”

“외간 사내? 용무린 그 아이가 어째서 외간 사내야? 네 말대로라면 우리 영령이가 바람을 피웠다는 말인데, 영령이 그 아이가 지금 혼인을 한 상태야? 유부녀냐고?”

“……?!”

신경질적으로 되묻는 제갈문군의 말에 제갈문기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제갈문기를 향해 제갈문군은 손을 휘저었다.

“됐다, 나가 봐라.”

“……예, 형님.”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제갈문기는 밖으로 나서야만 했다.

반짝.

제갈문군의 눈에서 밝은 빛이 뿜어졌다.

“상관세가라는 이름의 허망함을 보여주겠다고 했었지? 좋아, 지켜보아 주마.”

내게 증명을 해 보아라.

“네 말대로 상관세가라는 이름이 그토록 허망한 것이었다면, 겨우 6개월 남짓의 수련으로 그 이름을 넘을 정도의 것이었다면…….”

딸칵.

제갈문군은 품속에서 활생단이 든 작은 목함을 꺼내 열었다. 영약 특유의 청아한 향이 훅 콧속으로 파고들었지만 신기하게도 처음 받았을 때와 같은 욕망은 더는 일어나지 않았다.

“이 따위 것도 부질없다는 뜻이겠지.”

부질없는 것을 목숨처럼 붙잡고 있을 바보는 아니다.

그 사실을 정녕 용무린이 증명해 보인다면 미련 없이 돌려줘 버릴 것이다.

“중도연합이라…….”

제갈문군의 뇌리에 제갈영령이 계속해서 주장하던 중도연합에 대한 말들이 스쳐지나가기 시작했다.

***

쾅!

“이런 발칙한!”

상관혁련이 탁자를 부수며 일어섰다.

밤사이 파다하게 퍼진 제갈영령에 관한 추문을 그 역시 듣게 된 것이다.

“감히 본 세가의 어른들께서 도착해 있는 것을 빤히 알면서도 제갈영령과 당돌하게 만나다니! 내 이 연놈들을 당장에…….”

“그만 앉아라.”

“숙부님!”

“……!”

상관혁련이 참을 수 없다는 듯 목소리를 높였지만 얼음장 같은 상관엽의 시선에 다시 자리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훗. 어차피 구색에 불과한 계집, 갈보면 어떻고 요조숙녀면 어떻단 말이더냐?”

싸늘한 목소리만큼이나 매서운 시선이 상관웅에게 꽂혔다. 툭 내뱉듯 말을 이었다.

“신경 쓸 것 없다. 계집은 차고 넘친다. 혼인만 끝나면 네 마음에 드는 계집 하나 더 잡아 첩으로 들여라. 내 말 알겠느냐?”

아득.

“예, 할아버지.”

상관웅이 이를 갈며 억눌린 목소리로 대답했다.

“무당의 자엽도장은 언제쯤이나 도착한다고 하더냐?”

“출발을 알리는 전서가 어제 도착했습니다. 대동하는 두 제자 역시 태극검수들이니 늦어도 이틀 안에 당도할 듯싶습니다.”

“이틀이라…….”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상관엽이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상관웅에게 질문을 던졌다.

“……용무린, 그 시건방진 애송이의 정확한 무위는 어찌 되느냐?”

“저, 그, 그게…….”

비무 시작과 동시에 정신없이 두들겨 맞기만 한 상관웅이 그걸 알 리 없다. 상관웅이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자 1장로 부일기가 바로 나섰다.

“어르신께서는 폐관중이어서 잘 알지 못하시겠군요. 억울한 일을 당하신 공자님보다는 당시 뭇 고수들과 담론을 벌였던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폐관에서 나서자마자 상관엽은 이곳으로 향했다.

상관세가가 이번에 있을 해원에 얼마나 공을 들이고 있는지 잘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알려져 있기로는 이제 갓 일류의 경지에 올랐다고 알려져 있긴 합니다만 그보다는 훨씬 높은 듯합니다.”

“흐음, 염라옥수 요여립과 혈견사흉을 염두에 두고 하시는 말씀 같구려.”

“바로 그렇습니다.”

곁에 있던 상관혁련의 말에 부일기가 크게 동감을 표했다.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염라옥수 요여립은 아시다시피 뭇 여인들을 간살해 온 무림의 공적, 하나 그 무위가 절정에 오른 지 오래라 추살에 어려움을 겪어 왔습니다.”

“혈견사흉 역시 꽤 하는 놈들이지요. 하남 일대에선 흉명이 자자했다고 들었습니다. 상대를 가리지 않고 합공을 하는 놈들이었다지요?”

“그렇습니다. 무공 수위는 모두 절정 어림에 불과했지만 그 합공 때문에 홀로 상대하기 곤란한 놈들이라고 알려져 있었습니다. 한데 용무린 그 아이가 요여립과 혈견사흉을 제거하는 데 있어서 혁혁한 공을 세웠다고 합니다.”

“혁혁한 공?”

상관엽의 눈썹이 위로 홱 치솟았다.

겨우 일류로 알려진 아이가 혁혁한 공을 세웠다고까지 알려졌다니 얼마나 큰 활약을 했기에 그런 말이 나오는 것인지 궁금해진 거다.

“예, 어르신. 얼마 전 성산지약의 일로 백리세가에 모여 있을 당시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저와 상관종명 총관은 똑똑히 들었습니다.”

부일기는 우려를 살짝 담아 자신이 아는 바를 모두 토해냈다.

가출을 했던 백리세가의 여식을 용무린이 찾는 과정에서 요여립과 혈견사흉과 맞섰고 그 과정에서 최소 두 명 이상의 절정급 고수가 용무린의 손에 명을 달리 했다는 놀라운 사실을 밝혔다.

“……그래서 중론은, 기이할 정도로 내공의 수위는 낮은 편이지만 무공 전체를 놓고 본다면 능히 절정의 상급에 다다를 것이라 내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크크큭. 음양쇠맥증에서 벗어난 지 이제 불과 육 개월 여에 불과하거늘 벌써 절정의 상급에 다다를 만큼 성장을 했다니!”

상관혁련의 비릿하게 웃었다.

그런 놈이라니 싹을 자르듯 짓밟고 싶어 몸이 근질근질 하는 듯 보였다.

“그날이 기대가 되는구나. 아주 기대가 돼.”

놀랍게도 상관혁련이 해원을 위한 상관세가 측 무인으로 나설 생각인 모양이었다. 더 놀라운 것은 상관엽이 그것을 인정한다는 것이었다.

“갖고 놀 생각하지 마라. 단숨에 끝을 내거라.”

“단숨에요?”

상관혁련이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다른 것은 다 따르겠지만, 그것만큼은 따르기 싫다는 완곡한 표현이었다. 상관혁련은 이번 기회에 용무린을 파리 목숨처럼 놀리다가 짓밟아 비룡문의 위신까지 땅바닥에 떨어뜨릴 생각만 하는 중이었다.

상관엽이 묵직하게 말을 보탰다.

“이 기회에 상관세가가 어떤 곳인지 확실하게 보여줘야만 한다. 그래야 제갈문군이 우리를 믿고 따를 것이다. 또한 일류의 내공밖에 지니지 못한 아이가 절정급 무인의 목을 몇씩이나 베었다는 점에 주목해야만 한다.”

“요여립과 혈견사흉 따위 저 역시도 상대할 수 있습니다, 숙부님.”

“누가 아니라더냐? 나는 지금 네가 털끝 하나도 다치지 않고 완벽한 승리를 거둬야 할 때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알겠습니다, 숙부님.”

그제야 수긍이 가는 듯 상관혁련이 고개를 끄덕였다.

“명심해라. 털끝 하나도 다치지 않는 완벽한 승리, 누구도 두말할 수 없는 일초의 승부로 놈의 명줄을 끊어 버려야만 한다. 알겠느냐?”

“예, 숙부님.”

***

“용가가!”

“령매!”

소문이야 퍼지든지 말든지 용무린과 제갈영령은 아침식사를 마치자마자 화원에서 다시 만났다.

“편히 잘 쉬셨나요?”

“나야 잘 쉬었지. 령매는?”

대뜸 손을 마주 잡은 두 연인은 간단한 인사로 시작해 온갖 신변잡기로 이야기꽃을 피우며 화원과 가산 연못 주변을 거닐었다.

‘와아, 정말 잘 어울리는 한 쌍의 원앙이로구나.’

‘어쩜, 공자님과 아가씨 두 분이 저렇게 잘 어울릴 수가 있을까?’

‘저, 저런 무도한 놈을 그냥!’

‘감히 상관세가의 체면을 깎아내리다니! 네 놈은 절대로 곱게 제갈세가를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자신들을 향한 엇갈리는 시선들을 아는지 모르는지 두 연인은 그저 달콤하기만 했다. 신변잡기에 이어 시서화에 이르기까지 대화가 넘어갔지만 놀랍게도 용무린은 대화에 그리 곤란을 느끼지 않았다.

‘어라? 내가 어떻게 그런 글귀까지 다 알고 있지?’

다만 자신도 알 수 없는 사이 불쑥불쑥 튀어 나오는 마르지 않는 지식에 스스로 깜짝깜짝 놀랄 뿐이었다.

‘뭐, 잠들어 있던 용무린의 기억이 조금씩 돌아오고 있는 것일지도…….’

용무린은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하고 넘겼다.

어차피 머리 굴려봐야 전생의 신마 진무량의 학문은 삼절일학이라고까지 불렸던 용무린의 그것을 뛰어넘지 못하는 것이 분명하니까.

***

어느새 이틀이 훌쩍 지나갔다.

상관세가에서 목 놓아 기다리던 무당의 자엽도장이 두 제자와 함께 드디어 제갈세가에 도착을 했다.

“어서 오십시오, 장로님.”

“오랜 만이외다, 제갈가주.”

“이게 대체 얼마만인지, 그간 별래무량 하셨습니까?”

“이 늙은이야 하루하루 늙어가는 것 외에 별다를 게 뭐가 있겠소이까? 허허허.”

“무슨 그런 말씀을! 자, 어서 앉으시지요.”

“그럽시다.”

자엽도장이 자리에 앉자 뒤에 서 있던 헌앙한 두 청년이 동시에 포권을 취했다.

“제갈세가주님께 인사 올립니다. 무림말학 무당의 청평이라 합니다.”

“인사 올립니다, 무림말학 청송입니다.”

“허허허. 아직 미욱하지만 내 제자들이외다.”

“이렇게 반가울 데가? 무당의 미래를 책임질 태극검수들이었군그래. 반갑네. 제갈문군이네.”

제갈문군 역시 마주 포권을 취해 보였다.

스스로 무림말학이라 겸양을 하였지만 그들은 불과 서른 즈음의 나이에 태극검수에 오른 절정의 고수들이었기 때문이었다.

“산 속에만 처박혀 있으려는 녀석들에게 콧바람이라도 쐬어주고 싶어 내가 강제로 대동했다오.”

“하하하. 정말 잘하셨습니다, 장로님. 덕분에 이렇게 무당의 미래와 돈독해질 수 있었으니 이 신세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무슨 말씀이오. 우리 무당과 제갈세가와의 우의를 생각한다면 이 정도의 왕래는 당연한 일이 아니겠소이까? 제자들이 아직 미욱하오. 앞으로 무림을 횡행할 때 혹여 실수라도 한다면 가주께서 잘 이끌어 주시길 바라오.”

“물론입니다, 장로님. 제갈세가의 도움이 필요한 일이라면 언제든 말씀만 하십시오.”

오랜 우방과의 만남이어서인지 분위기는 너무 좋았다.

한 쪽은 이끌어 달라고 겸양을 했고 다른 한 쪽은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돕겠다고 나섰다.

그 후에야 일상적인 담화가 오갔다.

세가의 다른 인물들과의 만남을 핑계로 청평과 청송이 밖으로 나서자 제갈문군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장로님께서 도착하셨으니 이제 상관세가와 비룡문과의 해원을 위한 비무가 곧 시작되겠군요.”

“그래야겠지요. 준비가 되었는지를 확인만 한다면 언제든 시작해도 무방하겠소이다.”

“부……탁, 한 가지 드려도 되겠습니까?”

“……?!”

자엽도장의 눈이 동그래졌다.

제갈문군이 다소 나직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여식의 혼사 문제까지 함께 매듭짓기 위해 이번 해원의 장소를 본가에서 제공했습니다.”

“흐음. 내 이미 그럴 것이라고 짐작했소이다. 그런데요?”

“해원은 해원으로만 끝이 났으면 합니다, 장로님.”

“그 말씀은……?”

“예, 장로님. 저는 인명 손실까지는 가지 않는 선에서 비무가 마무리 되었으면 합니다.”

혹여 인명 손실이 날 수도 있는 상황이 도래하게 되면 나서달라는 완곡한 표현이었다.

자엽도장으로서도 난감한 부탁이었다.

제 아무리 초절정의 무위를 지닌 자신이었지만, 찰나 간에 펼쳐지는 살수를 보다 먼 곳에서 지켜보고 있다가 막기 위해 난입하기란 지난한 일이며 자신의 몸이 크게 상할 위험부담까지 떠안아야 하기 때문이었다.

“흐음. 어떤 연유에선지 물어도 되겠소이까?”

“……상관세가에서 어떤 고수를 내세울지 아직 확정된 말이 흘러나오지는 않고 있습니다만, 본가에 도착한 고수들의 면면을 보면 이미 그 의도를 알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대체 누가 와 있기에 그런 말씀을…….”

“전대 대장로이자 현 태상장로인 상관엽 어른과 상관세가의 대표적인 초절정 고수인 상관혁련이 와 있습니다.”

“……!”

자엽도장의 입이 쩍 벌어졌다.

‘상관혁련이라는 이름으로도 모자라 상관엽 태상장로가 이곳에 와 있다니!’

“다, 다른 이들은…….”

“수행원으로 온 직계들 몇몇이 있긴 하지만 상관웅과 오십보백보로 보입니다. 그런 이들을 내세워 해원을 하려 들지는 않겠지요.”

“허어.”

자엽도장의 입에서 나직한 탄식이 터졌다.

아무리 가문의 명예가 걸린 해원의 비무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이것은 너무 심했기 때문이었다.

‘비룡문의 소가주를 아예 죽이려고 작정을 한 게야.’

그렇게 밖에는 생각할 수 없는 일, 무당 칠협의 하나로서 절대로 간과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알겠소이다, 가주. 내 미력한 힘이나마 한 번 애써 보겠소이다.”

“감사합니다, 장로님.”

제갈문군의 얼굴에 비로소 작은 미소가 피어났다.

***

제갈세가의 외원에 마련된 영빈관.

두 곳으로 나뉜 이곳의 하나를 상관세가에서 사용했고 나머지 하나를 무당의 자엽도장과 제자들이 차지했다.

‘흠, 나 역시 단단히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하겠구나.’

자타가 공인하는 초절정 고수인 상관혁련의 공격에서 용무린을 구하기 위해서는 아무리 칠협의 하나인 자신이라 하여도 긴장을 할 수밖에 없었다.

‘내일 당장 벌일 수도 있는 일.’

그때를 대비해 육체와 내공을 한 번 날카롭게 벼려놓을 필요가 있었다.

“후우우.”

내공수련을 위해 자엽도장이 천천히 숨을 고를 때였다.

“자엽도장 안에 있소?”

밖에서부터 찾는 소리가 들렸다.

“뉘십니까?”

“명호를 밝혀 주십시오.”

두 제자가 대뜸 먼저 나아가 손님을 맞았다.

“상관세가의 상관엽이 왔다고 전하게.”

“……!”

자엽도장의 귀가 번쩍 뜨였다.

제자들이 들어와 물을 필요도 없다는 듯 바로 일어나 밖으로 나섰다.

“예까지 어인 일이십니까, 선배?!”

피식.

얼굴을 보자마자 자신을 낮추는 자엽도장을 향해 상관엽이 풀썩 웃어 보였다.

“나이가 먹으니 흉금을 터놓을 상대가 자꾸만 줄어들지 않겠소? 그런 차에 자엽도장이 당도했다는 말을 들으니 참을 수가 있어야지.”

“이런, 후배가 먼저 찾아뵈었어야 하는 것을……. 해원 비무의 증인 자격으로 온 몸이라 일부러 조심하려고 그랬습니다, 선배.”

“허허허. 아네. 당연히 그래야겠지.”

“안으로 드시지요.”

“고맙네.”

자엽도장이 살짝 비켜섰다. 상관엽이 당당한 태도로 안으로 들었다.

“내 오늘 긴히 할 이야기가 있어 찾았네.”

“제게 말입니까?”

“……!”

대답대신 상관엽은 공손하게 시립하고 있는 청평과 청송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자리를 피해 달라는 무언의 요구인 게다.

“모두 나가 있거라.”

“예, 사부님.”

“알겠습니다. 말씀 나누시지요.”

그렇게 청평과 청송 두 사람이 나갔다.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멋쩍은 듯 다시 한 번 피식 웃어 보인 상관엽이 품속에서 작은 목궤를 꺼냈다. 자엽도장 앞으로 슥 밀었다.

“이, 이게 뭡니까?”

상관엽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한 목소리로 툭 대답했다.

“의성 신우량의 활생단이네.”

“……?!”

자엽도장의 눈이 부릅떠졌다.

***

어슴푸레 동쪽 하늘에 번지던 푸름은 이내 찬란한 황금빛으로 바뀌었다.

“후우우우.”

길게 내쉬는 숨과 함께 밤새 감겨만 있던 용무린의 눈이 번쩍 떠졌다.

“좋군.”

아직은 절정의 문턱에 막혀 있는 내공이었지만 바늘허리 매어 쓸 수는 없는 일, 용무린은 조급하게 생각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불사신기를 동공의 형태로 계속 운용하고 있고 수면은 거의 불사신기 수련으로 대체하고 있으니 언제고 절정의 벽을 넘을 날이 있겠지.”

음양쇠맥증을 벗어나 본격적으로 수련을 시작한 지 이제 불과 육 개월여 만에 이만큼 해냈다.

‘자신 있다 이거야.’

큰 깨달음이나 대환단과 같은 영약의 도움이 없이는 절정의 벽을 깨기 지난할 것이 분명하지만 그리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누가 뭐라고 해도 나는 전생에 이미 신마라고 불렸던 절대적인 무인이란 말이지.’

그 경험을 오롯이 살린다면 제 아무리 역대 그 어떤 교주들도 익히지 못했던 불사신기라 해도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이다.

“자, 다음 차례는 진천수라도와 비연오식인가?”

내공이 부족해 완벽한 모습으로 펼치지 못하고 있을 뿐 이미 두 무공은 완벽하게 내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벽마다 밖에 나가 수련을 하는 이유는, 그렇게 하는 것이 몸을 유연하게 만들며 숨 쉬는 것만큼 자유롭게 초식을 펼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첩경이기 때문이다.

쉬각. 패애액. 피이이잉.

풍뢰가 경쾌한 소리와 함께 사위를 휘감았다.

소검비연과 천잠사가 폭풍처럼 주변을 할퀴었다.

쐐애액. 피이이잉. 촤아악.

빠르지도 늦지도 않는 초식의 전개.

완벽한 하나의 춤사위가 한동안 계속되었다.

“클클클, 볼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네 녀석은 정말 괴물이야.”

“허허허. 맞습니다, 선배. 누가 저런 초식을 이제 무공에 입문한 지 갓 육 개월밖에 안 되는 사람이 만들어낸 것이라고 하겠습니까?”

수련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는 듯 화운장로와 일각대사가 나타났다. 무공 수련 장면을 들킨 셈이었지만 용무린은 반갑게 두 사람을 맞았다.

“오늘도 그냥 넘길 수 없죠. 한 번 또 붙어 볼까요?”

“그랬으면 좋겠다만, 오늘은 참아야겠다.”

자신과의 비무라면 자다가도 뛰어 나오는 사람의 반응답지 않았다.

‘오늘이 그 날인가?’

대충 짐작이 되었다.

그 짐작을 확인이라도 해 주듯 화운장로의 입에서 기다리던 소식이 흘러 나왔다.

“제갈세가주로부터 연락이 왔다. 오늘 해질녘 대연무장에서 해원을 위한 비무가 있을 것이라는 구나.”

씨익.

용무린의 입가에 환한 미소가 걸렸다.

“좋죠. 상대는 누구라고 하던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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