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깨어나는 불사신기
“저, 저런 발칙한!”
“주둥이를 저렇게 방자하게 놀리다니!”
안하무인인 용무린의 태도에 상관세가의 고수들 전체가 분노했다. 금방이라도 튀어나갈 듯 들썩였다.
그때 1장로 부일기가 벌떡 일어섰다.
“좋소, 비룡문의 소가주 용무린 공자. 어차피 오늘은 그대와 상관세가와의 해원의 비무를 벌이는 날이오. 무턱대고 싸우자고 하셨으니 상대는 아무래도 좋소이까?”
피식.
“왜요? 내가 상관웅을 고르면 그 녀석을 내보내시게?”
흠칫.
상관웅이 몸을 떨었다.
처참하게 두들겨 맞다가 정신을 잃어버렸던 그 순간이 생각이 났던 모양이었다. 순간적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았던 부일기는 물론이고 상관엽과 상관혁련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것도 아니면서 뭘 묻지요? 쓸데없는 소리 말고 상관세가에서 생각하고 있던 사람을 내보내시죠.”
아득.
“이런 시건방진 놈, 오냐 좋다.”
그야말로 거침없는 용무린의 태도에 부일기가 이를 갈며 거친 말을 내뱉었다.
“쓸데없는 말은 필요가 없겠지. 네놈 말대로 생각하고 있던 고수를 내보내겠다.”
부일기의 시선이 중앙의 제갈세가에게로 향했다.
“해원의 당사자가 본 상관세가에서 생각하는 고수를 내보내라 선언했소. 하여, 본가에서는 해원 비무의 당사자로 상관혁련 단주를 내세우는 바요.”
“크하하하, 기다리던 바외다.”
휘리릭. 타닷.
호명이 끝나는 순간 상관혁련이 몸을 날렸다. 대 연무장 중앙에 뚝 떨어져 내렸다.
“우왓! 상관혁련 단주라고?”
“맙소사. 초절정 고수가 해원 비무에 나서다니!”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하잖아?”
다들 상상 밖이었던 모양이었다.
제갈세가의 고수들이 뭉쳐있는 곳에서 대뜸 볼멘소리들이 흘러나왔다.
“지금 장난해?”
“이게 지금 무슨 짓입니까?”
당연히 화운장로와 일각대사가 들고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부일기의 말은 지금 용무린을 해원 비무를 빌미로 아예 죽이겠다는 뜻이었기 때문이었다.
“무공 입문 겨우 6개월을 넘길까 말까 한 아해를 상대로 어른이, 그것도 초절정급의 고수가 해원 비무의 당사자로 나선다는 것이 지금 말이 된다고 생각해?”
“너무들 하십니다. 이건 정말 심하지 않소이까?”
화운장로와 일각대사가 계속해서 목소리를 높일 때였다.
“애초에 저 애송이가 원했던 것이다. 틀리는가?”
잠자코 있던 상관엽이 고함을 버럭 질렀다.
말이야 맞는 말이다.
부일기가 아무래도 좋겠느냐는 말에 쓸데없는 소리 말고 생각해둔 상대를 내보내라고 했던 사람은 다름 아닌 용무린이었으니까.
“제갈가주! 그래도 이건…….”
“자엽도장님! 어떻게 중재를 좀…….”
화운장로는 해원 비무의 주제자인 제갈문군을, 일각대사는 증인으로 온 무당의 자엽도장을 애타는 시선으로 불렀다. 도움을 요청했다.
하지만 놀랍게도 제갈문군과 자엽도장의 반응은 두 사람의 생각과는 완전히 달랐다. 천만 뜻밖의 선언을 하고야 말았다.
“제갈세가주의 이름으로 상관세가에서 내세운 상관혁련 단주가 해원 비무의 당사자로 문제가 없음을 선언하외다.”
“무당의 자엽도장이오. 해원 비무의 증인 이름으로 선언하건대, 상관혁련 단주가 당사자로서 아무런 결격 사유가 없음을 인정하외다.”
“……!”
“……!”
화운장로와 일각대사의 입이 쩍 벌어졌다.
피식.
용무린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걸렸다. 마치 잘 짜인 경극을 보는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상관세가 고수들이 앉아 있던 천막과 제갈세가 측의 천막을 한 번 쭉 쓸어 보던 용무린의 눈이 제갈문군의 눈과 마주쳤다.
‘증명해 보여라, 이 말이지요?’
‘그래. 네 말을 지금 증명해 봐.’
소리 없는 대화가 오갔다.
더는 말이 필요가 없는 상황인 거다.
스릉. 꾸욱.
풍뢰가 대뜸 뽑혀 나왔다. 소검 비연이 가볍게 쥐어졌다.
상대가 초절정 고수인 상관혁련이라면 잔재주는 필요 없다는 뜻, 최선을 다하기 위해서였다.
“무린아! 안 된다. 거부해야 해!”
“부당한 일이오, 용 시주. 이건, 이건 해서는 안 되는 비무외다.”
화운장로와 일각대사가 고함을 크게 질렀다.
물론 용무린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용무린의 모든 신경은 지금 이 순간 눈앞의 사내 상관혁련에게만 집중이 되어 있었다.
씨이익.
섬뜩한 미소를 지어 보인 상관혁련의 입이 불쑥 열렸다.
“시건방진 애송아. 오늘에야말로 감히 상관세가의 소가주에게 행패를 부린 대가를 받게 해…….”
“주둥이로 싸우나? 간다아-앗!”
스파아앙.
상관혁련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용무린의 공격이 먼저 시작되었다. 놀랍도록 빠른 속도로 공간을 좁힌 후 풍뢰를 짧게 흔들었다.
버언쩌어억.
새하얗게 피어나는 초승달의 궤적.
진천수라도의 첫 번째 초식인 수라잔월이 전력을 다해 펼쳐진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패애애액. 튀이잉. 피리리리리릿.
소검비연 역시 벼락처럼 떨어져 내렸다. 천잠사가 예의 그 현란한 변화를 일으켰다. 비연오식 중 유일하게 펼칠 수 있는 초식인 비연난무였다.
“……?!”
상관혁련의 눈이 부릅떠졌다.
여기에서 눈을 한 번만 더 깜박이며 구경하고 있으면 그대로 몸이 조각조각 나뉠 수 있을 만큼의 예기에 전신의 솜털이 깡그리 곤두서는 것을 느껴야만 했다.
‘급하다.’
하지만 초절정의 무위는 절대로 투전판에서 딴 것이 아니었다.
화아아악. 후우웅.
황급히 휘몰아낸 내공을 두 주먹에 담아 힘차게 뿌렸다.
한 번이 아니었다. 무려 다섯 차례나 연거푸 뿌리고 또 뿌렸다.
퍼엉. 카아앙. 카앙. 카카카카캉.
쇠북 두들기는 듯한 소리와 함께 수라잔월의 초식이 허망하게 깨졌다. 상관혁련을 휘감으려던 비연난무의 초식이 산산조각이 나 사라졌다. 그 반발력에 용무린과 상관혁련 두 사람 모두 서너 걸음씩 뒤로 물러났다.
‘이런 망신이 있나?’
상관혁련의 눈두덩이 거칠게 요동쳤다.
아무리 선수를 빼앗겼다지만 애송이의 공격을 완벽하게 받아치지 못해 옷이 찢어지는 것으로도 모자라 피부를 얇게 베였기 때문이었다.
쿨럭.
‘겨우 그거야?’
타닷. 후우욱.
작은 핏덩어리를 뱉어낸 용무린은 다시금 땅을 박찼다.
‘초절정의 경지가 겨우 그런 거냐고!’
“이야아-하!”
풍뢰를 쭉 내밀었다.
쫘아악. 버번쩍.
섬뜩하리만큼 하얀 빛이 그물처럼 상관혁련을 휘감기 위해 뿜어졌다. 진천수라도의 두 번째 초식 수라광망이었다.
“이놈!”
상관혁련이 지체 없이 일 권을 쭉 밀어냈다.
후우우웅. 타아아-아!
묵직하기 짝이 없는 권력이 벼락처럼 빛의 그물을 파고들었다. 오늘 날 상관혁련을 초절정의 권사로 자리매김 해준 천붕칠권의 일초 천붕거압이었다.
와자작. 터어엉.
빛의 그물을 단숨에 으깬 천붕거압의 권력이 풍뢰를 거칠게 때렸다. 곧이라도 부러질 듯 풍뢰가 뒤로 둥그렇게 휘었다. 거칠게 뒤틀렸다.
“크하하. 내 네놈의 대갈통을 기필코 으깨어 주…… 어엇?”
호기롭게 웃던 상관혁련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피이이잉.
암전인 듯 은밀히, 하지만 소스라치게 빠른 속도로 무엇인가가 심장을 파고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저, 저것?’
망할 놈의 소검.
첫 수의 교환에 자신의 옷을 베고 피부에 상처를 내었던 바로 그 소검이 언제 발출되었는지 심장을 향해 공간을 접듯 날아들고 있었다.
씨익.
용무린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받아봐. 비연오식의 두 번째 초식이다.’
전생을 자각한 이래 지금껏 공개된 장소에서 단 한 차례도 펼쳐내지 않았던 초식인 비연일섬, 본래는 강기가 일 장 가까이 맺혀야 옳지만 지금은 겹겹이 쌓아 올린 검사가 전부였다.
“죽어-엇!”
뒤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용무린은 남아 있는 모든 불사신기를 닥닥 긁어 비연일섬의 초식에 보탰다.
버언쩍.
겹겹이 쌓인 검사가 섬뜩한 빛을 뿌렸다.
“우와악!”
상관혁련은 내공을 끌어 모을 사이도 없이 주먹을 찔러 냈다. 피했어도 따라와 옷과 피부를 베었으니 파훼만이 답인 것을 일찌감치 알아차렸던 것이다.
따아아아앙.
상관혁련의 주먹이 심장을 향해 파고드는 소검비연을 강하게 후려쳤다. 강렬한 소음과 함께 소검비연이 하늘 높이 튕겨졌다.
바로 그 다음 순간,
튀잉. 촤라라락.
소검비연 끝에 매어져 있던 천잠사가 순간적으로 상관혁련의 주먹과 팔을 휘감고 지나갔다.
선수를 빼앗긴 탓이다.
내공을 끌어 올릴 시간이 짧아 그 변화마저 완벽하게 깨뜨리지는 못한 것이다.
쿨럭.
수라광망에 이어 비연일섬의 초식마저 깨진 용무린의 입에서 덩어리 피가 쏟아졌다.
“크크큭. 맛이 어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무린은 나직하게 웃었다.
이번에는 자신만큼이나 상관혁련의 상태도 좋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 빌어먹을 놈의 약한 내공 같으니…….’
마음만 같았다면 벌써 다시 파고들었을 거다.
하지만 두 번씩이나 깨어진 초식 때문에 기혈이 뒤엉켰다. 이걸 풀어내야만 공격이든 방어든 할 수 있다.
툭. 투둑. 툭.
상관혁련의 주먹을 타고 굵은 핏방울이 쉴 새 없이 떨어져 내렸다.
‘이, 이럴 수가…….’
상관혁련은 믿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이제 겨우 일류의 내공밖에 없는 애송이가 자신의 팔을 이 지경으로 만들 수 있단 말인가?
근맥이 다 상했다.
거미줄처럼 이리저리 쩍쩍 갈라진 피부 사이 하얀 뼈가 언뜻언뜻 보일 정도다.
‘죽인다.’
망신도 이런 망신이 없다.
“기필코 죽여 버린다-아아!”
상관혁련이 마보를 취했다.
그 상태 그대로 자신의 모든 내공을 한꺼번에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다음 격돌에는 용무린 따위가 감히 피할 엄두도 버틸 수도 없는 공격을 퍼부어 단숨에 핏덩어리로 만들기 위해서였다.
피식.
용무린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걸렸다.
‘멍청한 새끼.’
무위는 초절정이 맞는지 모르겠지만 실전 경험이라고는 그다지 많지 않은 놈이라고밖에는 할 수 없었다. 그저 연공실 안에서만 만들어진 경지라고나 할까?
‘시간을 주면 나야 고맙지 새끼야.’
용무린의 눈이 착 감겼다.
이미 소검비연은 회수해 다시 팔에 감아 두었다.
그 대신 자신의 모든 의지와 기세와 힘을 풍뢰에 오롯이 실어 나갔다. 하나로 만들어 갔다.
신검합일.
‘나는 풍뢰고 풍뢰는 곧 나다.’
지금의 자신으로서 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한 수.
위력이 강한 만큼 약간이 시간이 필요해 함부로 사용할 수 없었던 수였지만 상관혁련이 기회를 주었다.
사실, 말도 안 되는 내공의 격차를 우위로 내세워 평상적인 내공만 펑펑 쏟아내며 공격해 들어왔어도 용무린은 곧바로 수세에 몰렸을 게다.
하지만 화가 났다고, 체면이 상했다고 최고의 초식을 쓰기 위해 멀뚱하게 서서 진기를 끌어 모으는 헛짓을 하다니! 이곳이 다수가 맞붙는 전장이었다면 저놈은 바로 이 순간 모가지가 날아갔을 것이다.
휘이이-잉.
용무린의 전신에서 바람과도 같은 기운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얼마 남지 않았던 불사신기의 힘이 바람을 따라 함께 매섭게 휘돌았다.
‘넌 뒈졌어!’
용무린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맺혔다.
***
“저, 저것……!”
“맙소사.”
상관엽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턱이라도 빠진 듯 1장로 부일기의 입이 쩍 벌어졌다. 용무린의 전신에서 이는 심상치 않은 기류의 움직임이 지금 무엇을 도모하고 있는 것인지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이런 멍청한 놈. 저렇게 시간을 허비하다니.’
상관엽의 눈두덩이 가늘게 떨렸다.
초조했다. 그럴 리는 없지만 혹여 저 시건방진 애송이 하나 잡는다고 큰 상처라도 입게 될까 봐 애가 달았다. 상관세가의 대표적인 고수이자 천붕단의 단주인 상관혁련은 이런 곳에서 저런 애송이를 상대로 깊은 상처 따위를 입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놈에게 시간을 더 주지 말고 어서 들어가란 말이다, 이 멍청아. 어서-어.’
그놈의 체면만 생각하지 않았다면 아니, 무당파의 자엽도장이 증인으로 나서지만 않았다 하더라도 벌써 고함을 버럭 질렀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 수도 없는 노릇. 그야말로 속이 터져 버릴 것만 같았다.
“느낌이 좋지 않습니다, 단주. 어서 빨리. 어서 빨리-이.”
부일기 역시도 발을 동동 굴렀다.
그렇게 금쪽같은 시간이 자꾸만 흘렀다.
***
“대, 대단하구려. 저 나이에 벌써 신검합일의 수를 저토록 자연스럽게 이끌어 내다니! 희수(喜壽:77세)를 넘어 산수(傘壽:80세)를 바라보는 내 나이 평생 처음 보는 기재외다.”
무당의 자엽도장의 입에서 찬사가 쏟아졌다.
“……!”
제갈문군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마치 무엇인가에 홀리기라도 한 듯 용무린의 모습만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제, 제발…….’
제갈문군은 간절한 마음으로 용무린의 안위를 빌었다.
충분할 만큼 보았으니 이젠 그만 멈추어도 그 뜻을 다 받아들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알았어. 됐으니까 그냥 무사하기만 해라, 제발.’
자엽도장은 자신의 뒤에 서 있던 두 제자를 향해서 충고를 아끼지 않았다.
“저 소협을 보아라. 저 모습이 바로 세상에서 말하는 고수들이 가져야 할 덕목이다.”
청평, 청송 두 제자가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용무린에게 집중했다. 주먹을 꽉 움켜쥐고 있는 모습으로 보아 호승심도 느끼는 듯했다.
“내공은 비록 일류 어림에 불과하나 저 소협은 이미 고수라 불릴 만하다.”
“어째서 그렇습니까?”
“내공의 심한 격차는 잔재주로는 결코 극복할 수 없는 지난한 것이질 않습니까?”
“쯧쯧쯧. 아직 경험이 적어 그런 소리가 나오는 게지……. 잘 듣거라. 진정한 고수란 전투에 임했을 때 순간적으로 자신의 최고의 수를 쓸 만큼의 내공을 끌어내 펼칠 수 있어야만 한다.”
“상대에게 시간을 주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로군요.”
“더불어 주변에 다른 적이 있을 때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말씀인 듯합니다.”
역시 서른 즈음의 나이에 태극검수에 오른 기재들.
청평과 청송은 대뜸 사부의 말을 알아들었다.
“맞다. 이 자리가 비록 해원의 성격을 띤 자리인지라 타인들에게 찬사를 받을 만큼 큰 수를 써서 단숨에 이기고 싶은 마음을 모르는 바는 아니나, 저래서야 반격의 빌미를 만들어 주는 것에 불과하다.”
“어떤 뜻인지 알 것 같습니다, 사부님.”
“가르침에 감사합니다, 사부님.”
청평과 청송 두 태극검수가 자엽도장을 향해 포권을 취해 보였다.
“어떤 결과가 나오든 너희들은 순간적으로 만들어진 기회를 붙잡고 신검합일의 수를 꺼내든 저 소협의 집중력과 상관혁련 단주의 실기를 자양분 삼거라.”
“예, 사부님.”
“알겠습니다, 사부님.”
청평과 청송이 고개를 숙여 보이는 순간,
“차아아아아-!”
거창한 외침과 함께 상관혁련의 두 주먹이 벼락처럼 앞으로 뻗어졌다.
반짝.
거의 동시에 감겨만 있던 용무린의 눈이 떠졌다.
후우욱.
바람처럼 가볍게 신형을 앞으로 던져낸 용무린이 가볍게 풍뢰를 앞으로 뻗었다.
쫘아아악.
풍뢰의 끝을 시작으로 보이지 않는 무엇인가가 쭉 갈라지기 시작했다. 강기를 대신해서 겨우 검사만 몇 가닥 맺혀 있을 뿐이었지만 이미 용무린의 정기신과 하나가 된 풍뢰의 질주는 거칠 것이 없어 보였다.
그런데…….
덜컥.
잘 나가다가 중간에 턱 걸렸다.
상관혁련이 작정하고 뿜어낸 초식 천붕파멸아의 초식에 막혀버린 것이다. 역시 정면대결에 있어서 말도 안 될 수준의 내공 격차는 선뜻 뛰어넘기 어려운 법이다.
하지만 놀랍게도 상관혁련이 뿜어낸 힘 역시 전진을 멈추었다. 아무리 신검합일을 이뤘다지만 겨우 검사 몇 가닥 뭉쳐져 있을 뿐인 용무린의 공격에 막히다니!
‘이, 이런!’
상관혁련의 눈두덩이 요란하게 꿈틀거렸다.
믿을 수 없었다.
저 하잘것없는 애송이가 펼쳐낸 신검합일의 수에 자신의 권강이 막혀 전진을 멈추다니 정말 믿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팽팽한 줄다리기가 이어졌다.
부르르.
전진을 못해 진동하고 있는 권강의 떨림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이대로 조금만 더 시간을 끈다면 내공의 대결이 되어 버리는 거다.
‘힘겨루기 해?’
저런 애송이를 상대로?
그렇게까지 할 수 없는 노릇이다. 그런 생각이 떠올랐다는 것만으로도 수치스러울 정도다.
‘기필코 죽인다.’
굳이 힘의 상징인 권강으로 밀고 들어가지 않는다고 해도 방법은 또 있는 것이다.
“죽어라-아!”
목이 터져라 외치는 고함소리에 맞추어 상관혁련은 잔뜩 응축시켜 두었던 권강의 응집력을 그대로 풀어 버렸다.
쿠와아아앙.
거창한 폭음이 일었다. 주먹 형태를 이룬 강기 덩어리가 폭발하듯 터져나가며 풍뢰를 시작으로 용무린까지 집어 삼키기 시작했다. 용무린의 피부가 쩍쩍 갈라졌다.
쿨럭. 쿨러-억.
덩어리 피를 연신 토해 내면서도 용무린의 눈빛은 죽지 않았다. 자신의 의지와 고스란히 하나로 이어진 풍뢰를 끝까지 휘돌렸다.
촤아아악. 쫘아악.
삼환투월, 맹호희산에서 대붕전시로 이어지는 단순한 삼재검법의 초식들이었지만 놀랍게도 권강이 폭발하며 쏟아낸 권력을 잘도 갈랐다.
휘이이이-이!
한줄기 바람이 격렬했던 일초의 공방이 끝난 연무장을 휩쓸었다.
“우와아!”
“용 시주! 최곱니다, 용 시주.”
화운장로와 일각대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고함을 질렀다. 아직까지도 용무린이 굳건하게 우뚝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흔들.
물론 충돌의 여파에 완벽하게 몸을 가누지는 못했다.
어디가 어떻게 터졌는지 옷자락 아래로 굵은 피가 쉴 새 없이 흘러내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무린은 찬사를 받기에 충분했다. 초절정 무위의 권사가 작정하고 공을 들여 펼쳐낸 초식을 이제 겨우 일류 어림의 내공을 가지고 당당히 버텨냈기 때문이었다.
모두가 그 사실을 보며 놀라워했다.
“우와아! 대단한데?”
“용무린 공자의 무위가 정말 일류어림이 맞아?”
“지랄! 네 눈에는 저게 일류로 보이냐? 최소한 절정의 상급이야 인마.”
“맞아.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초절정 고수의 권강을 받아내고도 저렇듯 두 발로 서 있을 수가 있겠냐?”
“내 생각인데, 상관혁련 천붕단주가 조금 과대평가가 된 경향이 없지 않아 있는 듯해.”
“나도 그런 생각을 했는데…….”
“참, 사람 생각 다 거기서 거기구나. 나도 그런 생각을 줄곧 하고 있었거든.”
놀랍기 짝이 없는 결과에 제갈세가의 고수들이 소리 높여 떠들어댔다. 당연히 상관세가의 천막에도 들릴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아득.
‘이런 멍청한…….’
상관엽이 거칠게 이를 갈았다.
‘저 녀석마저 상관세가의 이름에 먹칠을 하다니!’
압도적인 힘으로 첫 수에 목숨을 빼앗으라 했더니 되레 선수를 빼앗겼다. 그 뒤에는 팔에 깊은 상처를 입는 못난 꼴을 보이더니 이젠 회심의 한 수를 펼쳐내고도 상대를 거꾸러뜨리지 못했다.
망신도 이런 망신이 없는 거다.
터질 듯한 울화를 참지 못한 상관엽은 결국 고함을 버럭 지르고 말았다.
“대체 뭘 하고 있는 게냐? 짓쳐들어라. 기왕 이렇게 된 것, 차근차근 박살을 내란 말이다.”
“……!”
이번에도 용무린의 목숨을 거두는데 실패를 한 상관혁련이 멀뚱하게 서 있었다. 심각한 내 외상을 입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기가 막히고 어이가 없어서였다.
‘대, 대체 저놈 뭐지?’
신검합일이라니!
그 놀라운 경지를 무공에 입문한 지 이제 겨우 6개월여에 불과한 애송이가 대체 어떻게!
‘신검합일이 저렇게 쉽게 빨리 되는 거였던가?’
아니었다. 신검합일의 수를 실전에서 잘 사용하지 않는 이유는 검과의 혼연일체를 이뤄내기가 그만큼 어렵고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었다.
‘전투 중에 신검합일의 수를 펼치는 것은 바보들이나 하는 짓인 줄 알았는데…….’
도대체가 전투 중 가부좌를 틀고 명상을 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래서 그 강력함에도 불구하고 실전에서는 신검합일의 수를 잘 사용하지 않는다. 시도하는 그 짧은 순간에도 목숨을 잃기 다반사였기 때문이다.
‘어떻게 그 짧은 시간에 신검합일을 이뤄낼 수 있지?’
용무린은 놀랍게도 그걸 해냈다.
자신이 작정하고 내공을 끌어 모으는 그 짧은 사이에 신검합일을 이뤄냈다. 상관혁련은 지금 그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흠칫.
정신을 뒤흔드는 상관엽의 고함에 상념에 빠져들었던 상관혁련의 정신이 돌아왔다.
아득.
상관혁련의 이가 거친 소리를 쏟아냈다.
‘맞아. 지금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아직 해원의 비무는 끝이 나지 않았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
아직 내공에는 충분한 여유가 있다. 왼쪽 팔에 꽤 깊은 상처를 입기는 했지만, 용무린의 머리를 터뜨릴 때까지 충분히 버틸 만했다.
“타앗!”
후욱. 파아아-.
바람처럼 달려든 상관혁련의 주먹이 짧게 뻗어졌다.
용무린이 선공을 취했을 때 순간적으로 내공을 휘몰아내던 바로 그 방식이었다.
“큽!”
카앙. 카앙. 터터터-엉.
용무린이 정신없이 뒤로 밀려났다.
내공도 바닥인데다 기혈까지 온통 들끓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놈! 어육으로 만들어 주마. 차아아-!”
파앙. 퍼퍼퍽. 휘리릭. 터엉.
참으로 치사하기 짝이 없는 움직임이었다.
초절정 급의 넘치는 내공을 바탕으로 이제 겨우 일류의 내공밖에 없는 용무린을 상대로 치고 빠지는 전략을 구사하다니!
‘크크큿. 그래, 그래. 네가 이제야 정신을 차렸구나.’
정신없이 뒤로 밀리면서도 용무린은 비릿하게 웃었다.
‘더 부러뜨려라, 더! 불사신기는 본래 고통을 먹고 자라나는 법이다.’
신교 조사동에 있던 불사신기의 원본이 떠올랐다.
불사신기는 모든 내공심법의 출발점인 입문결 자체부터가 다른 내공심법들과는 많이 달랐다. 비정상적일 만큼 수련자의 고통과 인내를 요구했다.
“차앗!”
퍼어억. 파파팡. 쿠울럭.
상관혁련의 주먹이 움직일 때마다 용무린의 몸 곳곳이 움푹움푹 꺼져 들어갔다. 입술을 뚫고 덩어리 피가 솟구치듯 튀었다.
‘네가 다시 한 번 시간을 주는 구나. 조금만 더, 조금만 더어어-어…….’
정신이 아득해 질 정도의 고통이 엄습했지만 용무린은 끝까지 불사신기를 붙들었다. 모든 것의 초점을 불사신기의 글귀에 맡겼다.
“이놈! 맛이 어떠냐?”
투우웅. 퍼퍽. 와드득.
신나게 휘두르는 상관혁련의 주먹에 용무린의 근육이 마구 찢어졌다. 뼈가 부러졌다. 가슴이 움푹 주저앉았다.
씨이익.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무린은 웃었다.
‘오냐, 웃어라. 마지막에 누가 웃는지 어디 보자.’
오싹!
막 주먹을 질러 내려던 상관혁련이 그 미소를 보고 흠칫 몸을 떨었다. 오돌토돌 솟아 오른 소름이 전신에 쫙 퍼진 것이다.
‘이, 이런 미친!’
용무린의 미소에 소름이 돋았다는 사실이 창피했다.
“우와악!”
창피함은 곧 폭력으로 환원이 되었다.
“죽어! 죽어엇!”
용무린의 온몸에 무차별적인 주먹을 쏟아냈다.
퍼억. 퍼퍼퍽. 빠아악.
어떤 초식 따위가 아니었다.
내공을 머금은 단순한 주먹질, 하지만 전력을 다했던 용무린의 초식을 깨부쉈던 내공이 고스란히 담겨 있기에 용무린의 육체는 천천히 걸레처럼 변해갔다.
쿨럭. 쿠울럭.
‘그, 그래도 나는 멈추지 않아. 부, 불사신기란 결코 죽지 않는 의지에서 비롯되는 법이니까…….’
용무린의 뇌리에 불사신기의 법문 몇 줄이 스쳐 지났다.
-육체는 마음의 지배를 받는다. 내공의 운행, 즉 자유로운 내공의 수발이 마음의 조종에 따라 자유로이 움직이는 것이 그 좋은 증거다.
그러니 불사를 마음에 품으면 어떻게 되겠는가?
불사의 의지를 품어라.
믿어라.
불사의 길에 들어서게 될 것이다.
아직 이루지는 못했다.
하지만 글귀의 뜻만큼은 충분히 알고도 남았다.
‘불사의 의지! 나는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다.’
퍼어억. 빠아악. 쿠울럭.
‘전신의 뼈가 모두 으스러져도, 내부 장기마저 깡그리 조각이 났다고 해도 절대로 포기하지 않을 거다.’
“이 괴물 같은 놈아. 죽어어-엇!”
그토록 짓밟히면서도 끝까지 변함없는 용무린의 눈빛에 질린 듯 상관혁련이 비명 같은 고함을 토해냈다. 발작적으로 주먹을 쳐냈다.
콰지직. 퍼퍼퍽.
갈비뼈가 송두리째 부스러지고 척추와 골반마저 뒤틀린 용무린의 몸이 뒤로 훌훌 날렸다. 툭 떨어져 내렸다.
“허억. 허억. 주, 죽었나?”
충격이 컸는지 용무린은 더는 움직이지 못했다.
“……?!”
한 가닥 기대를 걸었던 제갈문군의 안색이 한껏 어두워졌다. 이런 일이 생길 것이란 걸 먼저 알고 있으면서도 막지 않았던 자엽의 얼굴에도 자책의 빛이 돌 정도로 용무린의 상태는 처참했다.
“무, 무린아. 무린아-아.”
“용 시주!”
후욱. 후욱.
화운장로와 일각대사가 용무린을 향해 움직였다.
“멈추어라!”
휘슷. 터억.
참견하는 것을 결코 좌시할 수 없다는 듯 상관엽이 중간을 가로막고 섰다. 고함을 버럭 질렀다.
“아직 해원의 비무가 끝이 나질 않았다. 증인으로 온 자엽도장의 입에서 선언이 떨어지지 않았는데 대관절 너희 두 사람이 무슨 이유로 나선단 말이냐?”
울컥.
도저히 참을 수 없다는 듯 화운장로가 목청을 돋웠다.
“뭐라? 비무가 끝이 나질 않아? 당신 눈엔 저기 저렇게 죽은 듯 나뒹구는 저 아이가 보이질 않는 거야? 더 뭘 어쩌겠다는 건데? 앙?”
“너무하십니다, 상관 시주. 어지간만 하면 그냥 넘어가려 했으나 소승 역시 참견을 해야만 하겠습니다. 이것은 비무를 빙자한 살인이란 말입니다.”
두 사람이 목소리를 높이자 상관세가 측 고수들도 더는 참지 않았다. 다투어 목소리를 높였다. 화운과 일각을 질타했다.
“뭐하는 거야?”
“개방과 소림이면 다야?”
“니미럴, 그럴 거면 애초에 상관웅 소가주가 그 지경이 될 때에는 말리지 않고 뭐했는데?”
“당신들이 편파적이었던 것은 생각 못해?”
상관웅이 맞을 때 말리지 않았다는 말이 결정적이었다.
화운장로와 일각은 순간적으로 받아칠 수가 없었고 상관세가 쪽 고수들은 기세등등해졌다.
“단주님! 뭐하십니까? 아직 증인이 해원 비무의 끝을 선언하지 않았습니다.”
“맞습니다, 단주님. 어서 끝을 내십시오.”
“저 시건방진 애송이의 머리통을 터뜨려 버려 주십시오, 단주님.”
너도나도 독한 말을 가감 없이 쏟아냈다.
‘난감하구나.’
자엽도장이 곤혹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흔들었다.
처음부터 이 불합리한 해원의 비무를 말렸어야 했지만 그렇게 하지 못했다. 어젯밤에 상관엽으로부터 받았던 의성 신우량의 활생단 때문이었다.
‘대체 어떻게 한다?’
활생단을 끝까지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두말할 필요도 없이 상관세가의 편을 들어야 한다.
하지만 그러자니 양심에 걸린다.
이 나이를 먹도록 살아온 긴 세월 동안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놀라운 천재가, 무공 입문 겨우 6개월 만에 저런 실력을 쌓은 천재가 어이없이 스러지는 것을 그냥 묵인해야만 하는 거다.
‘허허허. 자엽아, 자엽아. 그간의 수양이 다 물거품이었던 모양이로구나. 어째서 활생단을 받았단 말이더냐?’
제자들의 미래를 위해 택한 길이었지만 이렇게 참담한 꼴을 보게 될 줄은 미처 몰랐다. 할 수만 있다면 시간을 돌리고 싶을 정도였다.
제갈문군도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다.
터질 듯 주먹을 꼭 쥔 채 일말의 움직임도 없는 용무린만 계속해서 주시했다.
‘일어나. 어서.’
용무린에게 향했던 한 가닥 기대를 끝까지 거두지 않았다. 그 당당하던 모습을 오롯이 믿었다. 이대로 끝이 아닐 것이라 기원했다.
‘보여준다고 했었잖아. 상관세가의 이름 따위 허망한 것이라며! 보여줘. 어서 벌떡 일어나서 내게 보여 달라고!’
그 간절함에 호응이라도 하듯 변화가 일었다.
휘이이이-!
한 줄기 바람이 몰려오는가 싶더니 용무린의 주위에 맺혔다. 아니, 용무린을 중심으로 휘 돌았다. 점점 더 그 세력을 키워나갔다.
“뭐, 뭐지?”
“이게 대체 무슨……?!”
“서, 설마 용 시주가 아직도……?”
상관엽과 화운장로와 일각대사가 화들짝 놀랐다. 잽싸게 몸을 돌렸다. 용무린을 바라보았다.
바로 그 순간,
우두둑. 투둑. 투드득.
죽은 듯 움직임이 없던 용무린의 전신에서 기괴한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어, 어떻게?”
상관엽의 입에서 불신의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도저히 꺾일 수 없는 방향으로 꺾여버렸던 용무린의 골반이 자신의 눈앞에서 저절로 맞춰졌기 때문이었다.
휘이이이-! 쏴아아아아아-!
용무린을 중심으로 휘돌던 바람을 따라 미증유의 힘이 일렁이고 있음이 피부로 느껴졌다. 코앞에서 일어나는 일이었기에 더욱 소름이 끼쳤다.
와득. 우드득. 투둑.
그 순간에도 기괴한 소리는 계속해서 흘러나왔다.
그 때마다 용무린의 몸이 이리저리 꿈틀거렸다.
기사(奇事)였다.
철렁.
상관엽의 심장이 한 번 크게 내려앉았다가 돌아왔다.
‘죽여야 해! 지금 당장!’
그렇지 않으면 큰일이 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상관엽은 즉시 고함을 질렀다.
“뭐하느냐? 죽여라! 당장 죽이란 말이다!”
“닥쳐라, 이 영감탱이야. 내가 절대로 좌시하지 않겠다.”
“말을 삼가시오! 시주의 말대로 이것은 어디까지나 비무라는 걸 잊으신 게요?”
화운과 일각이 목청을 돋웠다.
두 사람이 절대로 두고 보지 않겠다는 듯 내공마저 잔뜩 끌어 모으기 시작할 때였다.
꿈틀.
용무린이 한차례 크게 몸을 떨어내는가 싶더니 이내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실로 놀라운 장면이었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용무린이 누구의 도움도 없이 스스로의 힘으로 우뚝 서는 모습이란!
아무도 입을 열어 말을 하지 못했다.
무엇인가에 홀린 듯 그저 입을 쩍 벌리고 지켜보기만 할 뿐이었다.
“……!”
우뚝 선 용무린은 한 점 온기도 느껴지지 않는 차가운 시선으로 주변을 슥 훑어보았다. 이어 상관혁련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씨익.
용무린의 입가에 흰 선이 쭉 그어졌다.
한 마디 툭 내뱉었다.
“덤벼!”
“무, 무린아!”
“괜찮으시오, 용 시주?”
화운장로와 일각대사가 걱정이 가득한 목소리로 불렀다.
용무린은 돌아보지도 않은 채 툭 던지듯 답을 했다.
“괜찮아요. 일단 나가 계세요. 끝내고 바로 갈게요.”
“끝내다니! 이놈 방자하구나!”
상관엽이 목소리를 높였다.
그런 상관엽을 힐끗 바라본 용무린이 풀썩 웃으며 입을 열었다.
“영감님도 덤비시려고요?”
“뭐야? 네 이노오오오옴!”
“거참. 덤비려면 덤비고 아니면 그냥 앉아요, 쫌! 지금 비무 중인 거 안 보여요?”
말이야 바른 말이다.
고소하다는 듯 화운장로가 상관엽을 비웃었다.
“노망이 난 게요? 바로 얼마 전에 본인 입으로 해원 비무가 아직 끝이 나지 않았다고 우기질 않았소?!”
아득.
이를 갈아붙인 상관엽이 상관혁련에게 시선을 던졌다.
“들었지? 이참에 확실하게 끝을 내라. 더는 망신을 살 여력도 없다.”
“……예, 숙부님.”
얼굴빛이 한층 더 어두워진 상관혁련이 고개를 숙였다.
용무린을 쏘아보며 내공을 끌어 올렸다.
“애송아! 끝을 내자.”
피식.
싱겁게 웃어 보인 용무린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흘러 나왔다.
“고마워!”
“……?!”
“덕분에 벽 하나를 뚫을 수 있었어. 답례로 좋은 걸 보여 주도록 할게.”
풍뢰를 허리로 되돌린 용무린의 손에 소검비연이 들렸다.
여덟 치에 달하는 소검비연의 검 끝이 상관혁련에게로 향했다.
“아까는 잘도 튕겨냈지? 다시 한 번 막아봐. 이번에도 막으면 인정해 주지.”
“이놈! 본 단주가 네놈 따위의 인정을 받아서 무얼…….”
“시끄러운 새끼! 닥치고 받기나 해, 간다-앗!”
피윳.
간단한 손목의 움직임을 따라 소검비연이 날아올랐다.
“흥! 단숨에 깨뜨려 주마. 이야아아-하!”
상관혁련이 순간적으로 휘돌려 낸 내공을 주먹에 모을 때였다.
버언쩍.
반투명한 빛 무리가 소검비연을 어리는가 싶더니 이내 상관혁련의 가슴 어림까지 새하얀 선이 쭉 그어지는 환영이 일어났다.
푸슉.
“……어?”
비틀.
막 주먹을 뻗어내려던 상관혁련의 몸이 살짝 흔들렸다.
그와 동시에 가슴에 구멍이 뻥 뚫려 버렸다. 분수와도 같은 피가 뿜어졌다. 소검비연의 움직임이 예상보다, 감각보다 훨씬 더 빨랐던 것이다.
쿨럭. 쿠울럭.
상관혁련의 입술을 뚫고 희끄무레한 덩어리와 검붉은 핏덩이가 쉴 새 없이 쏟아졌다.
“……이, 이게 어떻게 된……. 쿠울럭. 이, 일이지?”
듣지도 보지도 못한 수준의 빠름!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
상관엽은 물론이고 화운장로와 일각대사 그리고 제갈문군과 자엽도장까지도 순간적으로 벌어진 이 상황을 선뜻 받아들일 수 없었던 거다.
“아직도 내가 생각한 진짜 위력에는 많이 모자란데, 하여간 이것이 바로 진짜 비연일섬이야.”
“쿨럭. 비, 비연일…… 쿠울럭. 섬?”
털썩.
용무린의 말을 되뇌던 상관혁련의 무릎이 힘없이 꺾였다.
“머, 멋지…… 흐으으.”
스르르. 쿵.
끝까지 말을 잊지도 못한 채 옆으로 쓰러졌다. 상관혁련의 눈이 그대로 감겼다.
휘릭. 타닷.
“혀, 혁련아!”
“단주-우.”
상관엽과 1장로 부일기가 쏜살같이 달려 나왔다. 이미 숨을 거둔 상관혁련을 끌어안았다. 당장 손을 쓰기라도 할 듯 무시무시한 눈빛을 담아 용무린을 노려보았다.
물론 용무린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휙 돌아서서 화운과 일각이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가죠.”
“응?”
“용 시주.”
“피곤해요. 조금 많이요.”
“으, 으응. 그, 그러겠지. 당연히.”
“어서 들어가십시다, 용 시주. 빈승이 호법을 서겠소. 어서 빨리 내상을 다스리시오.”
“감사해요.”
흔들.
뒤돌던 용무린이 곧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휘청거렸다.
정신력으로 버티고는 있지만, 사실 이렇게 서 있는 것 자체가 기적 같은 일이었다. 그만큼 많은 뼈와 관절과 근육이 상했고 내상도 심했다.
“무린아!”
곁에 있던 화운장로가 즉시 부축했다. 눈을 부라리며 길을 텄다.
“비켜 이놈들아.”
“용 시주. 조금만 더 기운을 내시오.”
화운장로와 일각대사가 용무린을 얼싸안고 움직였다.
“……!”
“……!”
멀어지는 세 사람을 누구도 제지하지 못했다.
초절정 고수인 상관혁련의 죽음이 아직도 믿기지가 않는 듯 계속해서 비탄에 잠긴 상관세가 사람들의 모습을 지켜볼 뿐이었다.
“……이, 이것으로 상관세가와 비룡문의 소가주 용무린 공자와의 해원의 비무가 끝이 났음을 선포하외다.”
그때까지 침묵하던 자엽도장의 외침에 모두가 정신을 차렸다. 삼삼오오 모여 이 놀라운 비무 결과를 두고 열띤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
상관엽은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으로 용무린의 뒷모습을 끝까지 노려보았다.
‘돌려주어야 하겠구나.’
자엽도장은 품에서 작은 목함을 꺼냈다.
상관엽에게 다가가 슬쩍 내밀었다.
“돌려드리겠소.”
“……넣어 두시오. 이미 내 손을 떠난 물건이오.”
“그, 그래도…….”
자엽도장이 재차 목함을 들이밀었다. 상관엽의 태도는 그래도 변함이 없었다.
“도장이 잘못한 것은 하나도 없소. 그러니 그 물건은 도장의 것이오. 우리는 이만 일어나겠소.”
상관엽이 몸을 일으켰다.
그 뒤를 상관혁련의 주검을 품에 안은 부일기가 따라 일어섰다.
“자엽도장께서 돌려주려던 것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이것은 꼭 받아 가셔야 할 듯합니다만…….”
불쑥 다가온 제갈문군이 작은 목함 하나를 내밀었다.
상관엽의 눈두덩이 요란하게 흔들렸다.
하지만 제갈문군의 태도에는 변함이 없었다. 흔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자신의 의지를 밝혔다.
“아무리 생각해도 상관웅과 같은 음적에게 내 딸을 내어줄 수는 없을 것 같아서 말이외다.”
말과 동시에 목함을 상관엽의 코앞으로 들이밀었다.
아득.
상관엽이 이를 갈며 천천히 목함을 받았다.
“후회하게 될 게요.”
“후회? 아비로서 이미 많이 했소이다. 하지만 앞으로는 절대로 그런 어리석은 후회 따위는 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제갈문군의 얼굴이 환해졌다.
딸에게 희생을 강요하던 때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완벽하게 분위기가 바뀌었다.
“가자!”
목함을 받아 품에 챙긴 상관엽이 신경질적으로 홱 몸을 돌려 세울 때였다.
“잠깐!”
갑자기 제갈문군이 상관엽을 불러 세웠다.
상관엽이 여전한 시선으로 돌아보았다. 제갈문군이 능글거리는 태도로 할 말을 쏟아냈다.
“돌려줄 것은 다 돌려주었으니 이제 계산을 다시 해야 하지 않겠소?”
“무슨……?!”
상관웅을 잡아먹을 듯 노려보고 있는 제갈문군의 시선을 보며 상관엽은 아차 하는 표정이 되었다.
후우웅.
제갈문군의 전신에서 굳센 기운이 솟구쳤다.
“이미 불행한 일이 있었으니 내 굳이 저 아이를 죽이지는 않겠소이다.”
“가주! 자, 잠시만…….”
후우욱.
상관엽이 급히 입을 열어 제지하려 들었지만 제갈문군의 행동을 막을 수는 없었다. 제갈문군은 대뜸 상관웅을 향해 신법을 전개했다.
“……?!”
이게 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일인가? 하고 눈을 데굴데굴 굴리던 상관웅을 대호처럼 덮쳤다.
“이놈!”
“우웃!”
상관웅이 본능적으로 방어초식을 펼쳤다. 상관혁련에게 배운 천붕칠권을 뻗었다.
하지만,
휘슷. 퍼억.
경험과 내공이라는 두 측면 모두 상대가 되지 않는 상관웅이 제갈문군의 기습에 가까운 출수를 막아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퍼퍼퍼퍼퍼퍽.
제갈문군의 주먹이 상관웅의 몸에 작살처럼 꽂혔다.
와득. 와자작. 뚜두둑.
상관웅의 뼈가 마른 나뭇가지처럼 잘도 부러졌다.
“크아악. 커헉.”
상관웅이 죽는다고 비명을 내질렀지만 그 누구도 나서서 말리지 못했다. 상관엽도 1장로 부일기도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제갈영령이 도착하기도 전에 자신들이 먼저 나서서 상관웅의 죄를 알렸기 때문이었다.
“감히 그 따위 짓을 잘도 했구나!”
터어엉. 주르륵. 털썩.
가슴뼈가 몽땅 주저앉은 상관웅이 바닥에 툭 떨어지더니 낙엽처럼 뒤로 밀렸다. 정신을 잃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제갈문군은 싸늘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로 내뱉었다.
“후의는 여기까지다. 다음에 걸리면 반드시 죽는다, 상관웅.”
속이 다 후련하다는 표정이 된 제갈문군이 내원을 향해 몸을 돌렸다.
‘영령아. 이것으로 상처받은 네 마음이 조금이라도 풀렸으면 좋겠구나.’
제갈문군의 발걸음이 조금씩 더 빨라졌다.
어서 빨리 딸의 얼굴이 보고 싶었던 것이었다.
부들부들.
그 모든 것을 지켜보던 상관엽과 1장로 부일기의 몸이 사시나무처럼 마구 떨렸다. 어찌나 분노가 치솟는지 심장이 터지지 않는 것이 이상할 정도였다.
‘기필코 돌려주겠다. 기필코.’
비룡문에 이어 제갈세가까지 주춧돌 하나 개새끼 한 마리 남기지 않고 싹 쓸어버릴 것을 스스로에게 맹세했다.
“가자!”
저주에 가까운 시선으로 멀어져가는 용무린과 제갈문군을 노려보던 상관엽이 홱 돌아섰다.
‘기다려라. 오래 걸리지 않는다. 우리는 돌아온다. 반드시 돌아올 것이다, 반드시.’
비슷한 눈빛을 하고 있던 부일기도 걸음을 옮겼다.
“크흑.”
“흐흐흑.”
나직한 흐느낌과 함께 상관세가는 제갈세가를 벗어났다.
천천히 하북성을 향해 움직여갔다.
***
“끄으응.”
거처로 되돌아오자마자 용무린은 가부좌를 틀었다.
부러졌던 뼈와 찢겼던 근육과 끊어졌던 신경들이 아우성을 쳤지만 기를 쓰고 자세를 잡았다.
“정말 괜찮겠느냐?”
“용 시주. 의원을 부르지 않아도 되겠소이까?”
옅은 미소와 함께 용무린은 고개를 흔들었다.
“됐어요. 두 분께서 호법 서 주시는 것으로 충분해요.”
“뼈가 그렇게 많이 부러졌는데?”
“겉으로 봐도 부러진 곳들이 표시가 날 정도외다, 용 시주. 근맥은 물론이고 혈맥도 많이 상했을 터인데…….”
“제가 알아서 할게요. 대신 제가 눈을 뜰 때까지 호법을 좀 부탁해요.”
“허어, 알겠다.”
“그게 뭐가 힘들겠소. 그저 빈승은 용 시주의 안위가 걱정이 될 뿐이외다.”
“신경 써 주셔서 고마워요. 그러면 저는 이만…….”
용무린은 그대로 눈을 감았다.
두 사람을 믿고 천천히 불사신기를 끌어 올렸다.
‘운이 좋았다.’
그런 순간에 절정의 벽을 돌파하게 되리라곤 단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했었다.
‘역시 불사신기. 입문결 첫 단계인 호심결에서부터 끊임없이 고통을 참을 것을 요구하더니 절정의 벽을 뚫는 것에조차 꺾이지 않는 의지가 열쇠가 될 줄이야.’
땅바닥에 고꾸라져 있을 때의 생각은 단순했다.
다른 사람들 같았다면 아마 포기했을 것이다. 잘해 봐야 동귀어진 정도를 생각했겠지.
하지만 용무린은 달랐다.
그 순간에도 어떻게 하든 불사신기의 힘을 긁어모아 한 방 보기 좋게 먹여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랬더니 돌연 벽이 허물어졌다.
‘그전까지만 해도 한계에 다다른 듯 더는 늘어나지 않던 그릇이 갑자기 확 늘어날 줄이야.’
백회혈과 용천혈이 동시에 열렸다.
하늘과 땅의 기운이 한꺼번에 몰려들었다. 단전에서 하나로 뭉쳐들더니 이내 폭발하듯 전신으로 뻗어나갔다. 그 서슬에 뒤틀어졌던 골반 뼈가 다시 제자리를 찾을 정도로 강력한 흐름이었다.
‘그때 얻은 것을 완전하게 내 것으로 만들어야만 해.’
용무린은 호흡을 고르며 다시 한 번 불사신기의 요결에 모든 것을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휘이우우웅.
다시 한 번 용무린을 중심으로 불사신기의 바람이 휘몰아쳐들기 시작했다.
***
다음날 정오가 다 될 무렵에야 용무린은 눈을 떴다.
표정은 밝았지만 아쉬움이 살짝 엿보였다.
‘젠장. 탈태환골쯤은 이룰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초절정의 문턱에서 다시 막혔다.
절정의 벽을 단숨에 돌파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었던 불굴의 의지만으로는 무리였다. 초절정의 벽을 돌파를 할 정도의 깨달음 혹은 계기가 또 한 번 있어야만 할 것이다.
피식.
“그래도 이게 어디야?”
일류 어림에 머물러 있던 내공이 단숨에 절정의 상급으로 뛰어 올랐다. 완벽한 수준은 아니어도 진천수라도를 팔 할 정도는 펼칠 수 있게 되었다.
“남들이 보기에는 불과 6개월 조금 넘는 시간 만에 이뤄낸 기적 같은 일인 거잖아. 안 그래?”
무슨 일이 벌어지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에게는 천기자가 벌어주겠다고 약속했던 1년이라는 시간이 있다. 그 정도 시간이면 지금과는 또 확 달라져 있으리라.
“나가자. 두 분이 노심초사하고 있겠다.”
거처의 앞과 뒤에서 눈을 부라리며 사위를 살피는 화운장로와 일각대사의 기척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 배려에 감사함을 느끼며 용무린은 밖으로 나섰다.
“장로님! 대사님! 배고파요. 우리 식사나 하러 가요.”
“무린아!”
“용 시주!”
두 사람이 득달같이 뛰어왔다.
“괜찮은 것이냐?”
“몸은 좀 어떠시오, 용 시주?”
“괜찮아요. 뼈가 완전히 다 붙으려면 아직 한참 더 기다려야 할 듯하지만, 움직이는 데는 아무 문제없어요.”
“이런 괴물 같은 녀석!”
“내상은 어떻소, 용 시주?”
“괜찮아요, 대사님. 다 나은 듯해요.”
“허허허, 선재, 선재라…….”
“무린아.”
“예?”
“뼈가 다 아물게 되면 말이다……. 알지? 응?”
공연히 말꼬리를 늘이며 눈썹을 위 아래로 들썩거리는 화운장로를 향해 용무린은 풀썩 웃어 보였다.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좋죠. 다 나으면 한 번 붙어요.”
“좋았어. 약속하는 거다.”
“예. 그러니까 지금은 밥이나 먹으러 가요. 배가 등가죽에 붙겠어요.”
“그래, 가자. 나도 네 녀석 깨어나기 기다리느라 지금까지 한 끼도 못 먹었더니 배가 고파 죽겠다.”
“허허허. 빈승도 한 번…….”
일각대사마저 슬그머니 끼어들었다.
“좋죠. 대사님과도 한 번 실전 비무를 나눠보고 싶었거든요. 다 나으면 꼭 한 번 붙어요.”
그렇게 세 사람은 큰 소리로 웃으며 식당으로 향했다.
***
용무린이 일어났다는 소식은 즉시 제갈세가 전체로 퍼졌다. 이른 아침부터 직계 일원 모두를 불러 모아 회의를 진행하던 제갈문군의 귀에까지 들렸다.
“뭐라? 용무린 소협이 일어났다고?”
“예, 가주님. 지금 화운장로와 일각대사 두 분과 함께 식사를 하고 있다고 합니다.”
“휴우.”
제갈문군 옆에서 안도의 한숨이 길게 흘러나왔다.
말은 하지 못했지만 내내 가슴이 타들어가는 줄만 알았던 제갈영령의 불안감이 풀어지는 소리였다.
피식.
‘녀석. 그렇게 좋은 게냐?’
제갈문군은 풀썩 웃고 말았다.
더불어 다시 한 번 스스로에게 다짐을 했다.
‘오냐, 내 딸아. 그만한 녀석이라면 네 배필로 부족함이 없겠다. 아니, 솔직히 차고 넘친다. 이 아비가 무릎을 꿇는 한이 있더라도 그 녀석을 네 짝으로 만들어 주마.’
불과 하루 반나절 만에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다.
“용무린 소협에게 전해라. 식사를 마친 후 내가 차 한 잔 대접하고 싶다고 말이야.”
“예, 가주님.”
제갈문군의 시선이 제갈영령에게로 향했다.
“오랜만에 네가 끓이는 차가 한 잔 마시고 싶구나.”
“……아, 아버지?!”
“왜? 싫으냐?”
“아, 아니요?!”
은근슬쩍 놀리는 듯한 제갈문군의 질문에 제갈영령이 화들짝 놀라 목소리를 높였다. 머리를 세게 흔들었다. 그리곤 스스로의 행동을 자각했는지 얼굴을 사르르 붉혔다.
“와하하. 우리 령아가 드디어 시집을 갈 때가 되었나 봅니다, 가주님.”
“그러게 말입니다. 하하하.”
지켜보던 모두가 기분 좋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