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되찾은 날개
전갈을 받은 용무린은 식사를 마친 후 제갈문군을 다시 찾았다.
“찾으셨습니까, 가주님?”
“허허허. 어서 오시게, 용 소협.”
하루 반나절 전과는 달리 제갈문군은 용무린을 뜨겁게 환대했다. 벌떡 일어나 마주 포권을 취해 보였고 자리를 권했으며 계속해서 껄껄껄 웃었다.
‘령매.’
다소곳이 미소 짓고 있는 제갈영령을 보며 살짝 미소를 베어 문 용무린은 이내 제갈문군을 똑바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어떤 일로 저를 찾으셨는지요?”
“허허허. 요 전날의 일을 사과도 할 겸, 떠도는 소문을 정리도 할 겸, 겸사겸사 해서 찾았네.”
그 사이 제갈영령이 날아갈 듯 다가와 차를 내밀었다.
“장백산에서 공수해 온 인삼차입니다, 가가. 기혈을 다스리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고마워 령매.”
두 사람은 제갈문군 앞에서도 스스럼없이 서로 호칭을 가가, 령매로 했다. 이미 무엇 때문에 이 자리를 마련한 것인지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흐뭇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여 보인 제갈문군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일전에는 내가 큰 실수를 했네. 가주라는 자리에 앉아 있다 보니 가문의 위상이나 발전 따위에만 모든 사고가 집중이 되더구먼. 자네 역시 훗날 비룡문의 문주가 될 사람, 언제고 나와 같은 판단의 기로에 설 수 있겠지. 그런 측면에서 이해해 주었으면 좋겠네.”
“아버지.”
“아니다, 영령아. 누가 뭐라고 해도 그것은 가문의 발전이라는 욕심에만 사로잡혀 내가 큰 실수를 한 것이 맞다. 너처럼 착하고 고운 아이를 상관웅 같은 음적에게 아무런 후회도 없이 보내려 했다니…….”
제갈문군은 눈물을 살짝 글썽이는 제갈영령의 손을 따뜻하게 감쌌다. 진심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용무린을 향해 말했다.
“고맙네, 용 소협. 자네 덕에 상관세가라는 이름의 허망함을 알게 되었네. 비로소 미몽에서 깨어나게 된 게야. 고맙네, 정말 고마워.”
진심어린 목소리와 눈빛을 어찌 알아보지 못할까?
용무린의 얼굴도 환하게 밝아졌다.
“무슨 말씀을! 령매의 가슴에 맺혔던 응어리를 풀어주셔서 되레 감사합니다, 가주님.”
용무린의 말에 십 년 묵은 체증이 쑥 내려간 표정이 된 제갈문군의 얼굴에 돌연 장난기가 돌았다.
“내 앞에서 가가, 령매 운운은 잘도 하면서 언제까지 계속해서 가주님이라는 딱딱한 말로 부를 텐가?”
“……!”
“……!”
용무린과 제갈영령 두 사람의 얼굴이 동시에 붉어졌다.
제갈문군은 짐짓 근엄한 목소리로 질문을 던졌다.
“이미 세가 전체에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네. 두 사람이 서로 손을 잡고 돌아다니는 것은 물론이고 모란꽃 사이에 숨어 입맞춤까지 했다고…….”
“아버지!”
“가, 가주님. 이곳에서는 아직 입맞춤은 하지 않…….”
제갈영령이 훅 붉어진 얼굴로 소리쳤다. 용무린은 말까지 더듬어가며 열심히 변명을 했다. 그 말꼬리를 제갈문군이 대뜸 잡아챘다.
“이곳에서는 아직? 그럼 다른 곳에서 이미 입맞춤 따위 다 해봤다 이건가? 그래?”
“저, 그, 그게…….”
이때다 싶은 제갈문군이 목소리를 높였다.
“어찌할 텐가? 자네 말대로 상관세가라는 이름을 허망함을 알게 된 즉시 상관세가와의 정혼 약조를 깼네. 들었으니 알겠지만, 상관엽 대협의 면전에 대고 직접 예물을 돌려주는 것으로 정리를 끝냈네.”
‘고마워요, 아버지.’
‘잘하셨습니다, 가주님. 상관웅 그놈, 정말 곰의 탈을 쓴 여우 아니 변태 같은 놈에 불과하니까요!’
용무린과 제갈영령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서로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런 판국에 우리 령아의 청백지신을 의심하게 만들 유언비어까지 돌게 만들다니! 대체 어떻게 책임을 질…….”
“령매와 이미 약조를 하였습니다.”
용무린은 열변을 토하는 제갈문군의 말을 중간에 툭 잘라 버렸다. 당당하게 말을 이었다.
“우리 두 사람, 백년해로를 할 것입니다.”
제갈영령이 얼굴 하나 가득 행복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런 두 사람을 지켜보던 제갈문군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후우. 잘 알겠네. 그러면 길일을 택해 비룡문에 정식으로 매파를…….”
다시 한 번 용무린이 제갈문군의 말을 잘랐다.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사실 비룡문은 마공을 익히고 있는 미지의 무리로부터 도전을 받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런 점 때문에 개방의 화운장로님과 소림의 일각대사님께서 비룡문을 도와주고 계시는 것이지요.”
“……마, 마공?!”
제갈문군의 얼굴이 살짝 어두워졌다.
느닷없이 튀어나온 마공을 익힌 미지의 무리란 말은 그만큼 심각한 사안이기 때문이었다.
‘그런 일이 있었나?’
자금성으로 진출할 생각만 하며 무림의 일에 거의 귀를 닫고 지낸 탓이다. 오랜 세월이 흐르며 자연스럽게 잃어버리게 된 무공 역시 제갈세가가 무림의 일에 귀를 닫게 하는 데 크게 일조를 했다.
“미안하지만, 잠시 기다려 달라 하였습니다.”
“물론이에요, 가가. 소녀는 가가를 믿어요. 언제까지라도 기다릴 것이에요.”
“고마워 령매.”
“가가의 능력이라면 오래지 않아 비룡문에 드리운 암운을 거둬내실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해요. 기다릴 게요. 아무 걱정하지 말고 세상을 질타하고 오세요. 제가 가가의 쉴 곳이 되어 드릴 게요.”
제갈문군의 눈이 동그래졌다.
‘령아가 이렇게 저돌적인 아이였나?’
새삼 자신의 딸이 달리 보이는 제갈문군이었다.
“커흠흠, 이제 이 아비는 눈에 안 보이는 모양이구나.”
“……모, 몰라욧!”
쑥스러움을 참지 못하겠다는 듯 얼굴이 훅 붉어진 제갈영령은 고개를 푹 숙인 후 밖을 향해 뛰었다.
“녀석도 참, 그런다고 방금 전에 잘도 내뱉던 그 대범한 말들이 사라지누?”
“……!”
“하여간 상황은 잘 알겠네. 하지만 그래도 매파는 정식으로 보내두는 것으로 하겠네. 정혼이야 그 일이 모두 해결된 후에 하면 될 터, 두 사람의 결심을 비룡문의 어른들께서는 알고 있어야 할 것 아니겠는가?”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가주님. 그러면 그렇게 알고 있겠습니다.”
“커흠흠, 시기가 아직 좋지 않으니 입 초사에 오르내리지 않도록 당분간만이라도 행동에 조심을 해주게. 입맞춤을 하더라도 좀 안 보이게 하란 말이네. 알겠는가?”
“……알겠습니다, 가주님.”
생각지도 못한 말에 살짝 당황했지만 용무린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냉큼 고개를 숙였다.
“아직 몸도 성치 않겠지……. 근동에서 제일로 치는 의원을 초빙했네. 아무리 신묘한 내공을 지녔다고 해도 탕약과 침을 함께 하는 것만은 못할 테니 딴 소리 말고 치료를 받았으면 하네. 알겠나?”
“감사합니다, 가주님. 그런데……”
“응?”
“예물이라고 하긴 그렇고…….”
용무린 답지 않게 말꼬리를 늘였다.
제갈문군의 고개가 갸웃 하고 기울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그렇게 뜸을 들이는 건가?”
“령매를 통해 들었습니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세가의 뛰어난 절기들을 많이 잃어버리셨다고요.”
피식.
제갈문군이 풀썩 웃으며 대답했다.
“뭐, 대단한 비밀이라고 그렇게 조심스레 말을 하는가? 그러하네. 역사가 길다보니 크고 작은 전투에 조상님들이 참여했던 적도 많았고 그 와중에 실전된 비급과 무공이 점점 늘어 작금의 세가가 되었네.”
비급의 유실과 후인을 내지 못한 고수들의 죽음은 무가로서의 날개를 완전히 잃은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아예 자금성으로의 진출을 하려 했던 것이다. 물론 지금은 그 생각마저 모두 버렸지만…….
“령매와 함께 등룡각에 올랐었습니다.”
“등룡각?”
“그곳에서…….”
“……?!”
용무린의 말이 이어짐에 따라 제갈문군의 눈은 튀어 나오기라도 할 듯 점점 더 커졌다.
그리고…….
휘리릭. 파앗. 타다다닷.
용무린의 말이 다 끝나기가 무섭게 신법을 전개해 융중산 정상의 등룡각을 향해 달려갔다.
씨익.
“자, 그럼 나는 치료나 받으러 가볼까?”
용무린은 환한 얼굴로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
융중산 정상의 등룡각.
부들부들.
고색창연한 비급을 한 아름 손에 쥔 제갈문군의 손이 사시나무처럼 마구 떨렸다.
“이, 있다. 정말 다 있어.”
대천성신공, 소천성신공, 헌원전단신공을 비롯한 제갈세가의 진산절기가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제갈문군의 손에 들려 있었다.
“소천성검법에서 대천성검법으로 넘어가기 위한 가교가 되는 천지호연검법의 원본까지 다 있어!”
울컥.
심장 깊은 곳에서부터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올랐다.
이 천지호연검법의 유실이야말로 뼈아팠던 것이기 때문이었다. 천지호연검법의 유실로 대천성검법은 그대로 사장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가교가 되는 검법이 없어 익힐 방법이 없었던 거다.
“잃어버린 세가의 날개를 모두 되찾았다. 이제 제갈세가는 다시 한 번 웅비할 것이다. 기관진법지학과 더불어 문무양도에 우뚝 설 수 있게 되었단 말이다.”
어찌나 기쁜지!
툭. 투둑. 툭.
제갈문군은 자신이 눈물을 흘리며 웃고 있다는 것도 느끼지 못했다.
“우와아아아아아-!”
제갈문군의 입에서 환희에 찬 함성이 터졌다.
-제갈세가의 자손이라면 마땅히 등룡각에 올라 천하를 굽어보라. 길이 보이리라.
가주전 귀퉁이에 걸려 있던 무후의 글.
어째서 무후조사께서 그런 글귀를 후대에 남겼는지 제갈문군은 비로소 알 수 있었다.
‘이런 일에 대비하셨던 게야. 그래서 이곳에 등룡각을 세우셨던 것이었어!’
그 유훈을 날이면 날마다 보면서도 무시했다.
되레 타인이었던 용무린이 등룡각의 비밀을 풀어냈다.
‘더 놀라운 사실은 용무린 그 아이가 이 비급들의 존재를 확인한 후 자신이 거두지 않았다는 것이지.’
일신에 지닌 무공이 비록 놀라운 수준이라고는 하나 이 안의 것은 유구한 역사를 지닌 제갈세가의 모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도 신외지물(身外之物) 취급을 했어. 본래 주인인 내게만 살짝 알려주었지.’
뛰어난 비급 하나의 출현만으로도 지킬 힘이 없다면 한 가문이 멸문지화를 당하는 것이 무림이라는 비정한 대지의 당연한 속성, 용무린의 처사는 그야말로 당당한 사내대장부의 그것이었다.
‘고맙다. 내 이 고마움을 절대로 잊지 않겠다.’
마공을 익힌 의문의 적?
어떤 일이 벌어지든 제갈세가는 비룡문의 곁에 함께 서 있을 것이다. 적의 힘이 얼마나 강하든 상관없다. 혈맹으로서 함께 싸우리라.
***
전서구는 불과 이틀 만에 상관세가에 비보를 전했다.
세가의 대표적인 무력이었던 상관혁련의 죽음!
상관세가가 발칵 뒤집혔다.
쾅!
“이, 이럴 수가!”
가주인 상관초웅의 눈에 핏발이 곤두섰다.
“혁련이가, 초절정 고수인 혁련이가 어떻게 그 따위 애송이의 손에…….”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천붕칠권을 구 성까지 익혀 그 누구라 하여도, 설사 소림이나 무당의 장로들과 맞붙는다 해도 제 목숨쯤은 보존할 능력을 지닌 아우였기에 더더욱 믿지 못했다.
“크흑! 형님!”
소식을 들고 온 상관종명이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거친 목소리로 복수를 주장했다.
“필시 숨겨진 흑막이 있는 게 틀림없습니다. 그 애송이가 뱃속에서부터 무공을 익히고 내공을 쌓아 왔다고 한들, 둘째 형님을 그렇게 비명에 가시게 할 수는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파헤쳐야 합니다. 복수해야한단 말입니다.”
“복수……?”
피식.
어처구니가 없어서 헛웃음이 다 나왔다.
응징 혹은 정벌이 아닌 복수라니!
‘대 상관세가의 꼴이 말이 아니구나.’
기가 막혔다.
하지만 이내 지옥의 불길과도 같은 분노가 치솟았다.
“비룡문을 세상에서 지우겠다.”
비룡문은 어차피 제 일 순위였다.
자신의 아들이 대공을 이루고 출관할 때까지 시간을 두고 천천히 상대하려 했지만 이젠 생각이 바뀌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것이다.
“다음은 제갈세가! 비록 천덕꾸러기에 불과하지만 명목상 상관세가의 소가주인 아이를 감히 짓밟아? 갈보 같은 딸년 조금 건드렸다는 이유로?”
그것도 자신의 아우인 상관혁련이 비명횡사를 한 바로 그 자리에서 짓밟았다. 상관세가의 체면을 아예 작정하고 똥통에 쑤셔 넣은 셈이다.
“서신을 줄 터이니 너는 즉시 무림맹으로 가라.”
“예, 형님.”
상관초웅은 핏발 선 눈으로 붓을 들었다.
분노를 가득 담아 맹주와 무림맹 총관에게 보내는 서신을 적어 내려갔다.
“가라! 총관에게 먼저 서찰을 보이면 알아서 처리에 나설 것이다.”
“예, 형님.”
서신을 받아 든 상관종명이 즉시 길을 떠났다.
하지만 상관초웅의 분노는 아직도 사그라지지 않았다.
“상관세가의 피붙이를 건드리면 어떤 종말을 맞게 되는지 이 기회에 똑똑히 보여주도록 하겠다.”
상관초웅은 서신 한 장을 더 썼다.
비밀스럽게 닫혀져 있는 벽장을 열었다. 그 안에 도사리고 있던 흑수리의 발목에 서신을 단 후 하늘 높이 날려 보냈다.
“가거라, 대산으로…….”
아직 마령전사들을 세상에 보일 때가 도래하지 않았지만, 대산에서는 이해해줄 것이다. 어쨌거나 자신은 그분의 아버지이니까.
“그 다음에는?”
다시 한 장의 서신을 썼다.
흑수리 한 마리를 마저 꺼냈다. 이번에는 운룡장을 향해 날려 보냈다.
그런 다음 집무실 한 쪽의 줄을 콱 잡아 당겼다.
딸랑. 딸랑. 딸랑.
“찾아계십니까, 가주님!”
흑색 무복의 사내가 대뜸 나타나 부복했다.
“비상 상황이다. 가주령으로 명령을 내리노니, 지금 즉시 세가의 모든 직계 고수들을 이곳으로 불러들여라.”
“충!”
복명 소리와 함께 사내는 밖으로 사라졌다.
반짝!
상관초웅의 눈에서 서슬파란 불똥이 튀었다.
“개새끼 한 마리 남기지 않고 깡그리 죽여 버릴 테다. 반드시!”
양육장을 통째 움직일 작정이다.
해일처럼 한꺼번에 다 쓸어버릴 것이다.
***
닷새 후 십만대산 불회곡.
끼아아아-악! 후우욱.
사냥꾼들이나 약초꾼들에게조차 한 번 들어가면 절대로 살아 돌아올 수 없는 금지의 땅으로 알려진 불회곡 깊은 곳에 흑수리 한 마리가 내려앉았다.
끝도 없이 이어진 전각의 파도 속에 제법 규모가 큰 5층 건물의 한 창문턱이 도착지였던 것이다.
“응? 이 문장은?”
상관세가주의 직인을 즉시 알아본 흑의인은 재빨리 흑수리의 발목에 매인 전서통을 떼어 안을 향해 달렸다.
“각주님. 갑호 소식이 도착했습니다.”
“갑호? 가져와! 빨리!”
“넵.”
“……이런!”
전서각의 책임자는 전서를 읽자마자 전각을 벗어나 내원을 향해 달렸다.
전서는 여러 단계를 거쳐 최종적으로 스스로를 신교라 부르는 집단의 정점에 선 자의 개인 연공실에까지 흘러 들어갔다.
진전이 없는 대법의 고통에 힘겨워만 하던 절대자가 모처럼 만에 비릿하게 웃었다.
“크크큭. 쓸데없는 짓을 자꾸만 하는군.”
“어찌 하오리까?”
바닥에 바짝 엎드린 음양자가 조심스레 물었다.
잠시 생각에 잠긴 듯 침묵하던 목소리가 다시금 들려 나왔다.
“……어차피 내가 출관만 하면 다 부질없는 짓이 될 터, 그때까지만이라도 하고 싶은 대로 하도록 지원을 해 주도록. 그리고 상관웅 그 멍청이에게는 신마단 한 알을 하사토록 한다.”
“신마단이라시면…….”
“별 거 아니다. 사냥개로 쓰려면 최소한 이빨은 날카로워야 할 것 아닌가?”
무슨 뜻인지 음양자는 대뜸 알아들었다.
“충! 명대로 거행하겠나이다, 신마시여.”
신마의 연공실 앞에서 물러나온 음양자는 전서를 가지고 왔던 수하의 손에 사람의 뼈로 만들어진 작은 피리 하나를 쥐어 주었다.
“얼마 전에 도착한 놈의 손에 이것을 쥐어 보내라.”
“이, 이것은?”
“그래. 마령전사들을 통제할 수 있는 혈적이다. 넷째와 다섯째가 이미 양육장을 돌며 대법을 완성시키고 복귀하는 중이라고 하니 그것만 보내면 될 게다.”
넷째와 다섯째 제자가 양육장을 돌며 자료를 모으고 그간의 실험 결과를 지금 이 순간에도 보내오고 있다. 완성이 된 결과만 모두 확인한다면 이제는 굳이 외부에 양육장을 만들 필요는 없었다.
“그것으로 끝이옵니까?”
“아니다. 넷째와 다섯째는 상관세가주의 뜻대로 그곳으로 보낸 후 일을 돕도록 한다. 그리고 상관웅의 몫으로 신마단 한 알을 하사하라는 말씀이 계셨다.”
“충! 알겠습니다, 사제님.”
혈적을 조심스레 품에 챙긴 사내가 밖으로 돌아 나갔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불회곡에서 내상을 회복하고 있던 상관세가의 손사욱은 기쁘기 짝이 없는 얼굴로 불회곡을 나설 수 있었다.
“드디어 놈들을 짓밟을 수 있게 되었구나!”
그분으로부터 허락이 떨어졌다.
마령전사의 통제권이랄 수 있는 혈적까지 받았다.
“용무린 네 이놈,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기다려라. 상관세가의 이름으로 네놈과 네놈의 가문을 이 세상에서 깨끗이 지워주겠다. 크크큭.”
손사욱의 입에서 확신에 찬 웃음소리가 통쾌하게 흘러 나왔다.
***
용무린의 몸은 급속도로 정상을 찾아갔다.
불사신기의 회복력은 물론 놀라울 만한 것이었지만 침과 탕약을 함께 병행하니 회복력이 배가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빨리 좋아져도 되는 건가?”
“허허허. 기쁘기도 하지만 되레 우려도 되니 참 이상한 일입니다, 선배.”
“의원 노릇만 50년입니다만, 이런 희귀한 일은 저 역시 평생 처음 겪는 일입니다. 그 큰 상처에 불과 하루 만에 딱지가 앉더니 사흘 만에 떨어졌고 새살이 돋은 모양새가 벌써 거의 다 나았습니다.”
화운장로와 일각대사에 이어 의원까지 합세했다.
혀를 내두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시끄러워요. 그럴 수도 있지 왜 다들 그렇게 이상한 시선으로 봐요? 모두 나가요. 지금부터는 운공요상이나 할 거예요.”
“녀석도 참. 알았다, 알았어.”
“허허허. 빈승이 호법을 서 주리다.”
“하여간 완전히 회복하고 나면 알지? 나랑 꼭 한 번 제대로 붙어보는 거다?!”
피식.
“당연하죠. 고뿔이라느니 배탈이 났다느니 하면서 내빼지나 마세요.”
“아주 기고만장이구나. 오냐, 좋다. 내 너에게 하늘이 높음을 기꺼이 알려주도록 하마. 네가 그 전투에서 얻은 것이 꽤 있는 모양인데……. 인석아, 교만이 얼마나 허무한 것인지를 알아야 해!”
“허허허. 좋은 일입니다. 기인이사와 고수가 구름처럼 많이 숨어 있는 곳이 바로 무림 아니겠습니까? 무림의 선배로서 교만을 경계해야 함을 알려주는 일은 반드시 필요한 일입니다, 선배.”
화운장로에 이어 일각대사마저 나섰다.
물론 두 사람의 말이 자신을 향한 따뜻한 애정에서 나온 것임을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래서 용무린도 심한 말보다는 진실만을 입에 담았다.
“저는 제 능력과 타인의 능력을 정확히 읽을 뿐이에요.”
“뭐, 뭐얏?!”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정녕 알고 하는 말이오, 용 시주?”
두 사람이 화들짝 놀란 얼굴로 돌아보았다.
씨익.
용무린은 대답 대신 기분 좋게 웃어 보인 후 눈을 감았다. 운공요상에 들었다.
“……괴물 같은 녀석.”
“선재, 선재라……. 허허허.”
“선재는 개뿔! 나가자, 일각. 보초나 서자고.”
“예, 선배. 가시지요.”
밖으로 나선 두 사람은 언제나처럼 용무린의 수련이 끝날 때까지 호법을 서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얼굴엔 어느새 훌쩍 장성한 자녀를 보는 듯한 기색이 어렸다.
***
하남성 끝자락에 자리한 나산현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바로 무림맹이었다.
무림맹은 70년 전의 신마대전 직후 마교나 세외 세력의 준동 시 신속하게 중원의 힘을 하나로 모을 필요성을 느껴 탄생한 무력 단체로 사마외도의 준동을 감시하고 억제하는 것이 가장 큰 소임인, 명실 공히 중원 제일의 거대한 무력 단체인 것이다.
하지만 신마 진무량의 사후 평화가 계속되어 왔다.
그 덕에 무림맹은 소속 문파들의 이해타산을 조율하거나 각 문파들이 자신들의 이권을 지키기 위해 무림맹의 힘을 끌어들이는 경우가 많아졌다.
“니미럴. 대가리들과 가까운 세력만 꿀을 빠는 게 무슨 놈의 무림맹이야?”
“맞아. 무림맹 내부 세력다툼에서 밀려난 가문이나 세력들은 계속해서 불이익을 받는다니까?”
“젠장. 끝까지 이럴 거면 무림맹 따위 그냥 없어지는 게 낫겠어.”
무림맹이라는 거대한 무력 단체의 존재 이유 자체에 회의감이 들 수밖에 없는 부분이다. 한 번이라도 무림맹의 힘에 의해 불합리한 손해를 경험한 사람들이라면 앞을 다투어 성토를 해댔다.
그러나 사람들의 욕심은 끝이 없고 오늘도 무림맹의 문턱은 각 문파들의 이해타산을 조율하거나 이권을 지키기 위해 무림맹의 힘을 끌어들이려는 사람들로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었다.
상관세가의 상관종명 역시 바로 그런 사람들 중 하나다.
신주오가의 일원인 상관세가의 중책답게 상관종명은 무림맹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기다리던 많은 사람들을 제치고 총관과 얼굴을 마주할 수 있었다.
“가주님의 친필 서한입니다, 총관.”
“호오. 대 상관세가주님의 친필 서한이라……. 이거 왠지 손이 무겁게 느껴집니다, 그려.”
봉서를 받아 든 무림맹 총관 사마중극이 너스레를 떨며 서신을 꺼내 읽었다.
“……흐음.”
글을 읽어 내려가던 사마중극의 눈매가 가느다래졌다.
생각했었던 것보다 사안이 심각했기 때문이었다.
“보셨으니 아시겠지만, 비룡문의 소가주인 용무린이 음양쇠맥증을 벗어나 무공에 입문한 것은 불과 6개월을 조금 넘긴 시간, 도대체 어떻게 해서 겨우 그 시간에 그 정도의 무공과 내공을 쌓을 수 있었는지를 밝혀야 합니다.”
“……!”
사마중극은 잠시 생각에 잠겼고 상관종명은 계속해서 목소리를 높였다.
“비룡문의 행동도 심히 의심이 갑니다. 글이나 읽던 학자 나부랭이들이 갑자기 무가로의 변신을 꿈꾸다니요?! 그리고 듣자하니 불과 수개월의 짧은 시간 만에 엄청난 발전을 이루고 있다고 합니다. 뭔가 있지 않고서야 어찌…….”
“……위험한 말씀을 하십니다. 방금 그 말씀, 듣기에 따라서는 비룡문이 뭔가 사이한 무공이라도 익히고 있다고 들릴 수도 있습니다.”
“흥! 그러니 그걸 밝혀 보자는 말이 아닙니까?”
피식.
총관 사마중극이 비릿하게 웃었다.
“비룡문은 상관세가와 함께 신주오가의 일원, 잘 아시다시피 신주오가는 70년 전 신마대전의 영웅이신 절대검신 독고황 대협의 제자들이 세운 가문이외다.”
“누가 아니랍니까?”
“한데, 그런 비룡문이 사이한 무공을 익히고 있는 것 같으니 조사해 보자고요? 무림맹의 이름으로요? 허허허, 세상이 비웃습니다.”
사마중극의 비웃음 소리가 점점 더 커졌다.
어처구니가 없었던 거다.
‘마공을 익힌 괴 무리들로부터의 위협을 받고 있는 곳이 바로 비룡문이야. 한데 겨우 그런 말로 명분을 세울 수 있다고 생각해?’
사마중극의 시선은 갈수록 날카로워졌다.
호북성도 인근에서 음양자의 두 제자를 격살할 수 있었던 것도 비룡문의 소가주인 용무린의 선견지명 때문이라는 보고를 잊지 않았던 거다.
상관종명이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빌어먹을 자식! 꼴에 그래도 총관으로서의 경륜이 있다 이거지?’
이럴 때를 대비해 상관세가주인 상관초웅이 몇 마디를 더 해줬었다. 상관종명은 대뜸 상관초웅이 알려줬던 말을 넌지시 꺼내들었다.
“그렇다면 이건 어떻습니까?”
“……?!”
“무림맹은 전면에 나서지 마시고 단지 무림맹을 제외한 다른 무림세력들이 이합집산 하여 새로운 세력으로 탄생하는 것을 제지만 하는 것입니다.”
반짝!
사마중극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상관종명이 하려는 말의 의미를 즉시 알아차린 것이다.
‘소림과 개방 그리고 비룡문이 계속해서 한곳에 뭉쳐 있으니 새로운 세력으로 탄생할 것을 우려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서로 떼어 놓기만 해달라는 뜻?’
새삼 상관세가주의 깊은 심계가 느껴졌다.
‘본래 원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었군.’
무림맹이 전면에 나서길 원하는 것이 아니었다.
‘비무를 빙자해 상관혁린을 죽음으로 몰고 간 용무린과 비룡문에 복수를 하고 싶은데 소림과 개방이 걸리니 그것만 좀 치워달라는 것이었어.’
그 정도는 가능하다.
방금 입에 담았던 명분 정도면 충분히 소림과 개방의 고수들을 비룡문에서 뽑아낼 수 있다. 누가 봐도 이상하게 생각할 정도로 소림과 개방이 오랜 시간동안 상주까지 하며 비룡문을 지켜주고 있었으니까.
‘별다른 표현을 잘 하지 않던 맹주님께서도 충분히 고개를 끄덕일 만한 일이야.’
표면상에 불과하지만, 언제나 절대적인 중립을 지켜야만 하는 무림맹의 가치를 지켜나가기 위해서도 그 정도 명분을 내세우면 허락을 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냉큼 고개를 끄덕일 수는 없지.’
복수심에 불타는 것은 어디까지나 상관세가다.
급한 것은 그들이니 자신은 더더욱 느긋하게 나가야 얻을 것이 많아지는 법이다.
“알겠소이다. 내 충분히 검토를 해 보겠소이다.”
그것으로 끝.
검토를 해 보겠다고 했으니 이제 상관세가는 다른 패를 꺼내들어야 한다.
“그러면 믿고 기다리겠소이다.”
“살펴 가시오. 멀리 나가지 않겠소.”
씨익.
상관종명을 배웅한 사마중극의 입가에 회심의 미소가 떠올랐다.
“이번에도 영단을 요구할까? 아니면 황금? 아니, 아니야. 땅이 좋을 것 같아.”
일이 모두 끝나고 집으로 돌아갈 때까지 사마중극의 즐거운 고민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야심한 밤.
필릴리-이. 필릴리리리-.
사마중극의 자택 주변에서 아름답지만 조금은 섬뜩한 피리 소리가 한동안 울려 퍼졌다.
***
제갈세가의 분위기가 확 바뀌었다.
몇 가지 중요한 일들을 처리한 후 제갈문군은 한 달 기한으로 폐관수련에 들었고 제갈문기를 비롯한 세가의 직계들 역시 밤낮으로 무공수련에 빠져들었다.
영원히 잃어버린 것으로만 알았던 세가의 모든 절기들을 되찾았기 때문이다.
그 덕에 바빠진 것은 제갈영령이었다.
가주의 특명에 의해 총관마저 두문불출 전력을 다해 무공수련에 빠진 덕에 제갈영령이 모든 대소사를 직접 처리해야만 했던 것이다.
제갈세가의 주력 무력 단체인 천기단과 천성단의 무사들까지 밤낮으로 무공수련에 온 힘을 다하고 있었던 터라 제갈세가의 운영이 자칫 힘들 수도 있었지만 놀랍게도 제갈세가는 잘만 굴러갔다.
그게 모두 다 제갈영령의 빼어난 두뇌 덕이다.
마치 이때만을 기다렸다는 듯 제갈영령은 놀라운 능력으로 세가의 일들을 처리해 나갔다.
피식.
“잘됐네. 어차피 사람들의 입 초사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당분간 만나지 않는 것이 더 좋았었는데……. 이참에 소문 따위도 쏙 들어가겠지.”
사람들의 입 초사에 오르내린다는 말은 곧 마공을 익히고 있던 비룡문의 적들의 귀에 들어갈 확률 또한 높다는 뜻, 제갈영령의 이름은 최대한 사람들의 입에 덜 오르내리는 것이 좋았다.
“몸도 거의 다 회복되었고, 이젠 집으로 돌아가는 일만 남은 것인가?”
천기자에게 다녀왔어도 변한 것은 없었다.
아니 그 생각만 하면 되레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1년이란 시간을 벌어주겠다느니, 스스로를 잘못 알고 있으며 껍질이 단단하다는 말 따위를 생각하기만 하면 머리가 터질 것만 같았다.
“에잇, 모르겠다. 일단은 단순한 것부터 다시 시작하자.”
사건은 왕왕 단순한 사실에서부터 풀리곤 한다.
용무린은 하북성도 인근에서 박살 내버린 흑도 녀석들을 떠올렸다.
“그 녀석들이야말로 확실히 마공을 익히고 있었던 놈들이란 말이지.”
개방의 정의개들이 먼지 털 듯 털었어도 나오는 정보는 정체 미상의 은인이라는 놈밖에는 없었다. 애초에 무한의 외곽에서 맞닥뜨렸던 매부리코 놈과 마교의 술법사 두 녀석이 나타나긴 했지만 매부리코는 결국 놓쳤다.
“일단 매부리코 놈의 본거지를 찾아야겠어.”
믿을 것은 오로지 하나뿐이었다.
“모두 합해 열다섯 곳, 관리라는 측면에서 생각하자면 이레에 한 번씩 몇 곳을 택해 돌아가며 방문을 해야만 제어가 가능하단 말이지.”
물론 그렇게 상정을 하더라도 살펴봐야 할 문파는 너무나 많다. 드러내 놓지 않았을 터이니 흑도의 잡배들처럼 자잘한 문파들까지 다 살펴봐야 하는 것이다.
“화운장로님을 믿어 보자.”
더불어 다시 한 번 하오문의 힘을 빌릴 생각이었다.
“내가 대신 그놈들 다 때려 잡아줬으니 그 정도야 나서 주지 않겠어?”
행여 하오문이 움직이려 들지 않을 때는?
“어쩔 수 없지. 령매에게는 미안하지만, 이 한 몸 희생해 내가 미남계라도 쓰는 수밖에…….”
그렇게 별 쓸데없는 다짐을 다 하고 있을 때였다.
쾅.
“무린아! 큰일 났다.”
“용 시주. 일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소!”
터지듯 문이 열리고 화운장로와 일각대사가 심각한 얼굴로 뛰어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