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혈전
비룡문에 다소 썰렁한 기운이 돌았다.
소림과 개방의 고수들이 비룡문의 고수들과 함께 어울려 날이면 날마다 실전비무를 하며 왁자지껄하게 지냈었는데 한 날 한 시에 두 문파의 고수들이 쑥 빠져 나갔기 때문이었다.
“하압!”
“차아아!”
쉬각. 휘리릭. 패액.
해가 저물어도 계속되는 비룡무단의 수련 열기는 변함이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딘지 모르게 허전한 기색은 감출 수 없었다. 전과 같이 왁자지껄한 분위기를 모두 그리워하는 눈치였다.
“거 참…….”
정의개 삼십 명을 이끌고 비룡문을 찾았던 정의단의 조장 방건이 자꾸만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찌 그러시오 방 시주?”
“무슨 일이라도 있으시오?”
삼십육방 출신의 무승 일명과 일송이 넌지시 물어왔다.
방건이 풀썩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나야 천성이 거지라 웃전의 말을 잘 듣지 않으니 그런다고 치고, 대체 두 분은 어째서 남으셨습니까? 사부님들의 지엄한 명이 두렵지 않으신 겁니까?”
일명과 일송이 방건과 비슷하게 웃으며 답했다.
“저는 사부님의 말씀을 거역한 적이 없습니다.”
“마찬가집니다. 저도 지금 사부님의 말씀을 아주 잘 수행하고 있는 중입니다만…….”
방건의 눈이 동그래졌다.
“복귀 명령을 거부하고 지금 비룡문에 계시잖소? 그게 거역한 것이 아니란 말입니까?”
일명과 일송이 짐짓 정색을 해 보였다.
“사부님의 말씀은 이제 그만하면 되었으니 어서 돌아와 정진하라는 것이었습니다. 한데 산문 안에 있을 때보다 비룡문에서 얻은 것이 더 많으니 빈승이 어찌 산문 안으로 들어가겠습니까?”
“저도 일명 사형과 마찬가집니다. 서로 빤히 아는 처지의 사형제들과 틀에 박힌 비무만 치르다가 비룡문에서 신세계를 만났지 뭡니까? 하하하.”
“비룡문 시주들의 투지가 어찌나 강한지.”
“그뿐이 아닙니다, 사형. 어떤 시주께서 길잡이를 해주셨는지 초식의 운용이 아주 독창적입니다. 틀에 박힌 대로 움직이지를 않아요!”
“하하하. 사제도 그렇게 느꼈는가? 나도 그 덕에 초식을 대하는 눈이 많이 달라졌다네.”
“저 역시 그렇습니다, 사형. 어째서 일각사형께서 저희들에게 이곳 시주들과의 실전 비무를 강권하다시피 했는지 요즘에서야 깊이 느끼고 있었습니다.”
피식.
방건이 풀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 말이 옳다고 동감을 표했다.
“하긴, 나도 그러하더이다. 교진운 유백 두 대협에게 몇 차례 얻어맞다보니 나도 모르는 사이 타구봉 움직이는 속도가 빨라집디다. 어떻게 하면 덜 맞을까 궁리도 더 하게 되고 말입니다. 하하하.”
“빈승이 하고 싶었던 말이 바로 그 말입니다.”
“하하하.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세 사람의 담화에 한 사람이 더 끼었다.
“저만큼 큰 이득을 본 사람이 또 있을까요?”
벽소추였다. 과거 진중하던 모습은 완전히 사라지고 이제는 행동거지마저 용무린처럼 조금은 껄렁해진 벽력도가의 소가주가 불쑥 나섰다.
“오! 어서 오시게 벽 형제.”
“벽 시주. 어서 오시오.”
“허허허. 오늘은 조금 늦으셨소이다.”
세 사람이 다투어 벽소추를 반겼다.
벽소추의 말마따나 하루에도 몇 차례씩 자신들과 함께 신전 비무를 치르다 보니 친 사형제들에게서나 느낄 법한 정겨움을 느낀 것이다.
“저는 제가 대단한 천재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하하하.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지 대략 감이 잡힙니다.”
“거, 벽 소형제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구려.”
일명과 방건이 비슷하게 웃으며 동감을 표했다.
쑥스러운 듯 벽소추가 머리를 긁적였다.
“용무린 그 친구에게 허구한 날 박살이 나면서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실전의 심득을 배워나가다 보니 어느 순간 다른 세상으로 내가 훌쩍 들어가 있더라니까요?”
“오! 나름의 심득을 얻으신 게요?”
“나름의 심득이랄 것까지는 없습니다만, 이것 하나만큼은 확실히 알겠더군요. 집안의 어른들께서 그토록 말씀하시던 무리들이 무엇을 뜻하는 것이었는지, 또한 그것을 언제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비룡문에 있으며 확실히 알 수 있었습니다.”
“하하하, 선재, 선재라…….”
“축하하오, 벽 시주. 머지않아 벽력도가의 새로운 기둥이 되실 게요.”
“쳇, 이러다가 쫓아가기 버겁게 되는 건 아닌가 몰라. 이봐, 벽 형제. 너무 달려가진 말라고.”
“방 선배도 참 별 말씀을 다 하십니다.”
벽소추가 풀썩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그런데 백리천월 그 친구는 아직도 계속해서 내공수련에만 빠져 있는가?”
“내공 수련을 마치면 숙소 뒤에 나와 홀로 수련을 하는 것도 같습니다만, 잘은 모르겠습니다.”
“함께 하면 좋을 텐데 말이야.”
“그러게 말입니다.”
벽소추와 방건이 안타까워하고 있을 무렵 백리천월은 필사적으로 가문의 독문 검법인 육양귀일검의 초식을 가다듬고 있었다.
패애애액. 쉬각. 쉬리리릭.
뜨겁게까지 느껴지는 내력이 걸린 검 끝이 여섯 방위를 기점으로 매섭게 휘돌고 돌아와 방어를 하다가 다시 하나로 뭉쳐져 사위를 휩쓸었다.
피이이이윳.
둥그렇게 피어난 둥근 원이 화끈한 열기를 가득 담은 채 한 줄기 선으로 변해 번개처럼 한 점을 꿰뚫었다.
회륜단금에 이은 일양추혼의 초식.
확실히 백리소옥이 펼친 그것과는 완전히 달랐다.
절대검신 독고황에게 사사한 검법다운 위력이 여실하게 돋보이는 뛰어난 초식운용이었다.
‘아직 멀었어!’
아직도 아버지 백리장천이 보여 주었던 위력에는 많이 미치지 못한다. 백리천월은 최소한 백리장천이 자신에게 보여 주었던 수준까지는 오르고 싶었다.
‘질 수 없어.’
잠도 줄여가며 백리천월을 수련 삼매경에 빠뜨린 것은 다름 아닌 용무린이었다.
‘그 천재성! 반드시 뛰어넘고야 말겠다.’
세가에서 운적풍을 짓밟을 당시 얼마나 놀랐던가?
요여립과 혈견사흉의 목을 썽둥썽둥 베어 버렸을 때는 또 어떻고?
‘벽소추에게까지 가르침을 내릴 수 있는 천재성! 하지만 백리세가의 위에까지 설 수는 없을 것이다. 나는 너의 가르침 따위 필요가 없단 말이다.’
세가의 절기만 충실히 익힌다면 용무린 정도의 천재성 따위로는 절대로 뛰어넘을 수 없는 경지에 오를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무조건 그래야 해. 무조건.’
이건 자존심의 문제다.
절대검신 조사께 직접 검법을 하사 받은 백리세가의 이름을 이제 겨우 무공에 입문한 지 일 년도 안 되는 용무린 따위가 뛰어 넘어서는 절대로 안 되는 거다.
“하아아압!”
패액. 쉬리릭. 쉬가가각.
다시 한 번 회륜단금의 초식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언제고 보여줄 기회가 올 거야. 백리세가의 힘을 모두에게 알릴 수 있는 기회가!’
그 기회가 불현듯 찾아왔다.
피리리. 필릴리리리.
어디선가 울려 퍼지기 시작한 사이한 피리 소리가 비룡문 전역으로 번져가기 시작했다.
***
“으응?”
이제 막 내공수련을 시작하려던 용대명의 눈이 가느다래졌다. 비룡문의 누구도 이런 음색을 내는 악기를 불지 않거니와 피리 소리 자체가 섬뜩한 기운과 운율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심상치 않아.”
용대명의 뇌리에 몇 가지 정보가 스쳐 지나갔다.
방건을 통해 용무린의 호북성에서의 활약상을 들었을 때 함께 들었던 정보들이었다.
‘마교에서 나온 것이 분명한 노인 두 사람 중 하나가 분명 저러한 피리를 사용했다고 했었지. 그 노인이 자신의 입으로 혈적이라고 했다던가?’
자신의 아들 용무린에게 치명상을 입고 도주를 했던 두 노인은 결국 화운장로와 일각대사의 손에 잡혀 유명을 달리했다고 들었다.
“어쩐다?”
본능은 어서 빨리 조치를 취하라고 노래를 부른다.
반면 이성은 조금 더 기다려 보라고 한다. 공연히 호들갑을 떨다가 겁이 많은 인상을 줄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만사불여튼튼이지!”
느낌이 좋지 않았다. 문주로서 할 수 있는 조치를 취해야만 했다. 용대명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등 뒤에 늘어뜨려져 있는 몇 개의 줄을 순차적으로 일정한 법칙에 따라 잡아당겼다.
드르륵. 쿵. 철컥.
비룡문 전역에 펼쳐 둔 기관지학의 정화가 가동되는 순간이었다.
땡땡땡땡땡!
요란한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와 동시에,
드르륵. 쿵. 드르륵. 쿠웅.
내원의 중요 전각들 아래에서 두꺼운 철판이 솟구쳤다. 창문과 정문을 틀어막았다. 지붕 안에 장치도 작동을 했다. 얇지만 단단한 철판이 지붕과 외부를 차단했다.
이제 중요 전각들은 안에서만 열 수 있도록 외부에서의 침입이 완벽히 차단되었을 것이다.
피식.
“쳐들어 온 놈들이 아무도 없으면 훈련이었다고 하면 되는 거지 뭐…….”
비상을 알리는 종이 이미 울렸다.
아마 모두 정신없이 움직이고들 있을 것이다.
“다들 열심히 자신들의 위치로 달려들 갔겠지?”
총관 손위를 비롯한 총관부의 문사들은 외원의 가장 높은 집무전 꼭대기 층으로 달려갔을 게다. 비룡문을 한 눈에 내려다 볼 가능 높은 곳으로…….
“그럼, 나도 한번 나가 볼까?”
적의 침습이 아니라면 훈련을 핑계로 적당히 훈시를 할 생각이었다.
***
필릴리. 필릴리리리-.
꿈틀.
기괴하게 울려 퍼지는 피리 소리를 듣자마자 방건의 눈두덩이 거칠게 요동쳤다. 개방 정의단 조장답게 즉시 호북성도 인근에서 참살한 음양자의 두 제자에 대한 정보가 떠올랐던 것이다.
“어찌 그러시오 방 시주?”
“기분 나쁜 음률이긴 합니다만 그렇게 인상을 쓸 것까지야 없는 듯…….”
방건이 일명과 일송의 말을 중간에 툭 잘랐다.
“호북성도 인근에서 벌어졌던 전투에 음양자의 제자들이 출현했었습니다.”
“아! 그럼 저 피리 소리도 혹시……?”
벽소추의 말에 방건의 고개가 크게 끄덕여졌다.
“혹시 모르니 조심하는 편이 좋아, 벽 소 형제.”
“그럼 어디 우리가 확인을 해 볼까요?”
호기심이 동한 벽소추가 일명과 일송을 향해 입을 여는 순간이었다.
땡땡땡땡땡!
비룡문 내원에서부터 요란한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비상이다. 모든 인원 전투 위치!”
“모두 튀어 나와라! 비상이다, 비상!”
눈 깜박할 사이 비룡문의 무사들이 비상상황에 대비하기 시작했다. 비룡무단 전원이 튀어 나와 각기 맡은 방위의 경계를 섰고 일반 무사들 역시 정해진 위치를 지키고 섰다.
“호오! 말로만 듣던 비룡문의 기관 진법 지학을 이용한 대비 태세인가?”
“빈승은 과문해서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만.”
“무사들이 모두 특정한 위치에 서는 것이 뭔가 이유가 있어 보입니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만, 하여튼 들은 바대로라면 상당한 위력을 발휘할 수 있는…….”
반짝.
열심히 떠들던 방건의 눈이 번들거리기 시작했다.
후욱. 후욱. 휘릭.
검은 일색의 야행복을 입은 일단의 무리가 비룡문의 담장을 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제 직접 보시면 되겠소이다. 하아아아!”
잽싸게 말을 마친 방건이 내공을 끌어 올렸다.
일명과 일송은 그보다 한 발 앞서 야행복을 입은 침입자들을 향해 짓쳐들었다.
“웬 놈들이냐!”
“감힛!”
교진운과 유백 역시 달려 나왔다.
적을 발견하기가 무섭게 앞을 가로막아 섰다. 유룡비검법과 선운비뢰장을 펼쳤다.
쉬가아악. 후웅.
서걱. 퍼어엉.
선두에서 달려들던 야행인 두 사람의 팔이 뚝 떨어졌다. 가슴이 움푹 꺼졌다. 하지만 두 야행인은 멈춰 서지 않았다. 번들거리는 눈을 한 채 그대로 검을 그었다.
후우욱. 촤아아-아!
두 놈의 검에서 검은 색의 기운이 쭉 뻗어 나왔다.
무한의 외곽과 하북성도 인근에서 용무린이 맞닥뜨렸던 바로 그 마공이었다.
“이런!”
“차앗!”
하지만 달리 초절정 고수가 아니었다.
용무린 덕에 익힌 새로운 무공으로 올라선지 얼마 안 되는 경지였지만 두 사람은 가볍게 두 사람의 공격을 받아낸 후 목을 날렸다. 머리를 터뜨렸다.
“마공을 익힌 놈들이다!”
“방심하지 마라! 완전히 무력화시키기 전까지는 절대로 마음을 놓으면 안 돼!”
놈들의 정체를 깨달은 두 사람이 고함을 버럭 질렀다.
하지만 너무 늦었다.
촤아악. 스각.
“커헉!”
“크아악!”
일반 무사들이 속절없이 쓰러지기 시작했다.
필리릴. 필리리리리리-!
기괴한 피리 소리가 더더욱 높아졌다.
교진운과 유백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피리 부는 놈을 먼저 잡아야 할 것 같네.”
“내 생각도 같네. 저 피리 부는 놈이 있는 곳에 놈들의 수뇌부 역시 있을 터, 놈들을 먼저 치세.”
“좋아!”
“가세.”
후욱. 타닷.
교진운과 유백 두 사람은 피리 소리를 좇아 신형을 날렸다.
***
외원 집무전 최상층.
총관 손위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정신을 똑바로 차려라. 이건 실전이란 말이다!”
키릭. 키릭. 콱.
손위는 대 연무장 인근을 내려다보며 정신없이 무엇인가를 잡아당기고 눌러댔다. 기관지학을 이용해 무사들을 돕는 것이었다.
불쑥. 피피핏.
그 때마다 바닥 혹은 석등 그리고 담장 그리고 지붕과 처마 등지에서 쇠뇌들이 튀어 나와 발사되었다. 적들의 등과 옆을 노리고 파고들었다.
퍼억. 퍽퍽퍽.
기계의 힘으로 쏘아진 쇠뇌는 적들의 등과 옆구리를 가차 없이 파고들었다.
움찔! 멈칫!
그때마다 적들의 움직임이 둔해졌고 그 사이를 노려 무사들의 공격이 퍼부어졌다.
“이놈! 걸렸다!”
키릭. 쿡.
“손방 좌측 우상단의 개자식 한 마리 잡았습니다.”
키릭. 키릭. 쿡. 쿡. 쿡.
“간방 우하단의 적 한 마리 추가입니다.”
“방심하지 마라! 정확한 기회를 잘 노려 쏘아라. 너희들 손에 무사들과 우리 식구들의 목숨이 달렸단 말이다. 한 방에 한 놈씩을 반드시 거꾸러뜨려라! 알겠나?”
“예, 총관님!”
“염려하지 마십시오. 차앗.”
손위와 함께 여덟의 문사들이 정신없이 기관장치들을 움직여갔다. 그 때마다 튀어나온 쇠뇌와 수리검들이 적들의 등과 옆구리를 정확히 노렸다.
퍼억. 움찔. 퍼억. 흠칫.
“차앗!”
“죽어랏!”
패액. 쉬가각.
“커헉.”
“큽!”
털썩. 터얼썩.
기관장치의 힘을 빌려 겨우겨우 적들을 베어 넘겼다.
***
“이놈!”
카카캉. 쉬각.
“크윽!”
털썩.
죽을힘을 다해 무공을 수련해 왔던 용대명과 그의 아우들인 용대승과 용대연 역시 여러 적들을 맞아 용감히 잘 싸워나갔다.
“차앗!”
피윳. 서걱.
“큽! 이노-옴!”
허벅지에 긴 칼자국이 생겨났지만 용대명은 절대로 당황하지 않았다. 상청무상검법의 초식을 적절히 펼쳐 위기를 극복해 냈다.
카앙. 카카카-캉.
스각.
크든 작든 적들에게 공격을 적중시키면 활로가 열렸다.
움찔. 멈칫.
미약하기는 하지만 불사신기의 힘이 놈들의 마공을 내부에서부터 툭툭 끊어내기 때문이었다.
“차앗!”
촤악. 서걱.
무량천심의 초식이 불사신기의 침습에 주춤한 적의 목을 시원하게 날려 버렸다. 비로소 한숨 돌리게 된 용대명의 시선이 주변으로 향했다.
“……!”
주위를 둘러보던 용대명의 얼굴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일명과 일송 개방의 방건과 벽소추 그리고 백리천월이 있는 곳을 제외하면 형편없이 뒤로 밀리고 있었다.
아니, 그 중 가장 무공이 강한 일명과 일송마저 크게 당황하는 중이었다.
터어엉.
일명의 권력에 휘말린 마령전사의 가슴이 구멍이 뻥 뚫렸다. 안심하고 일명이 그 옆의 적을 향해 주먹을 쏘아낼 때 가슴에 구멍이 뚫렸던 마령전사가 기를 쓰고 검을 휘둘러 왔다.
스각. 스가각.
“어헉!”
타탕. 퍼어어억.
화들짝 놀라 재차 권을 휘둘러 머리를 날려 버렸지만 이미 가슴을 길게 베었다.
일명이 크게 고함을 질렀다.
“마공이다. 쉽사리 죽지 않는다. 머리를 노려라 사제.”
“방금 겪었습니다, 사형. 무조건 완전 무력화를 시켜야만 합니다.”
두 사람마저 그 정도인데 다른 사람들은 어떻겠는가?
‘길보다 흉이 더 크겠구나.’
용대명의 얼굴빛이 한층 더 어두워졌다.
추뢰검사 교진운과 소요일영 유백이 비룡문의 담을 넘어 오는 것을 보자 검은 일색의 옷에 머리에는 도관 비슷한 것을 쓰고 있던 노인 두 명의 입꼬리가 삐죽 하늘로 말려 올라갔다.
“클클클. 재미있는 놈들이 오는구나.”
“비슷비슷한 놈들이오, 사형.”
“검을 든 놈이 조금이라도 더 손맛이 좋겠지? 나는 오른쪽 놈이다.”
“그럼 나는 왼쪽 놈과 재미를 보겠소, 사형.”
뒤에 시립하고 있던 매부리코 사내 손사욱이 공손한 목소리로 물었다.
“마령전사들의 제어는 어찌 하올지…….”
양 손에 흑골조라 불리는 기병을 착용하고 있던 노인이 손사욱의 말을 툭 잘랐다.
“혈적을 받아 왔다 했지? 지금부터는 네놈이 맡아라.”
“감사합니다.”
손사욱이 감격했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깊이 숙였다.
흑골조의 노인이 빙그레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내가 알려준 운율만 기억하고 있으면 능히 제어할 수 있을 게다.”
“그동안 우린 재미 좀 보아야겠다. 하아아.”
후욱. 촤악. 촤촤촤아악.
품에서 사슬로 이어진 낫 두 개를 꺼내든 사제가 훌쩍 신형을 뽑아 올렸다. 검은 색의 마기를 줄기줄기 뿌리며 유백과 교진운을 향해 마구 그었다.
“하여간 사제는 저 나이 먹어서도 욕심이 너무 많아 탈이란 말이야. 끌끌끌.”
휘슷.
흑골조의 노인이 혀를 끌끌 차며 뒤늦게 몸을 솟구쳐 올렸다.
“받아라, 노괴! 차아아-!”
“꺼져라아-앗!”
두 노인들의 전신에 후광처럼 어리는 마공의 힘을 한 눈에 알아본 교진운과 유백이 최선을 다해 아낌없이 무공을 펼쳐내었다.
버언쩍.
교진운의 손을 떠난 검이 마치 한 마리 용이라도 되는 듯 꿈틀거리며 순간적으로 거리를 좁혔다. 유룡비검법의 일초 강룡현신이었다.
후웅. 후웅. 휘우우웅.
한 줄기 구름과도 같은 기운이 해일처럼 앞으로 밀려갔다. 선운비뢰장의 일초 운무대천하였다.
콰작. 퍼퍼펑.
사슬낫으로 펼친 섬뜩한 초식이 단숨에 깨졌다.
“크읍!”
답답한 신음소리와 함께 사슬낫을 휘둘렀던 노괴의 몸이 뒤로 쭉 밀렸다.
쌔액. 휘우웅.
그러고도 모자라 교진운의 검과 구름을 닮은 강기 덩어리는 멈추지 않았다. 계속해서 사슬낫을 던졌던 노괴의 목숨을 노렸다.
휘슷.
“그러게 놀 때는 함께 놀아야 하는 게야 사제!”
뒤늦게 몸을 솟구쳐 올렸던 흑골조의 노괴가 합세했다.
퍼퍼펑.
흑골조가 전면을 긁어내자 교진운과 유백이 뿜어냈던 초식의 여력이 단숨에 깨어졌다.
“크크큭. 이거, 사제가 우스운 꼴을 보였소 사형.”
“이제 제대로 해 볼까? 흐아아!”
흑골조의 노괴가 두 손을 들어 전면을 마구 휘감았다.
촤아악. 촤촤촥.
날카롭게 벼려진 흑골조의 손톱을 따라 검은 색의 섬뜩한 기운이 교진운의 검을 그대로 후려쳤다.
“한번 놀아 봅시다, 사형. 차아아!”
스아악. 사아악. 쉬가가가.
두 자루의 낫이 구름처럼 다가오는 선운비뢰장의 강기덩어리를 그대로 잘라냈다.
타아아앙. 카캉. 터터터터-어엉!
흑골조에 휘감긴 교진운의 검이 힘없이 뒤로 튕겼다. 천하를 송두리째 덮을 듯하던 운무가 사슬낫이 일으킨 바람에 날려 어디론가 사라졌다.
“……!”
“……!”
교진운과 유백의 얼굴이 핼쑥해졌다.
씨익. 헤죽.
두 노괴가 그 모습을 보며 즐거워했다.
“크크크, 좋구나. 아주 짜릿해!”
“크하하하. 이 정돈 해주어야지.”
오랜만에 중원으로 나들이 나온 보람이 있다는 듯 음양자의 네 번째와 다섯 번째 제자인 두 노괴가 즐거움을 감추지 않았다.
“어디 계속 맛을 볼까? 차아아!”
“나도 간다아-앗!”
두 노괴의 손이 매섭게 움직였다.
그때마다 흑골조와 사슬낫에서 무서운 기운이 뻗어 나왔다. 교진운과 유백 두 사람을 거의 동시에 집어 삼키려 들었다.
“어림없다-앗!”
“이야아-하!”
교진운이 전력을 다해 유룡비검법을 펼쳤다. 유백 역시 사력을 다해 선운비뢰장의 절초를 뿜어냈다.
쐐애애액. 파가가각. 후웅. 후웅.
타탕. 타타탕. 퍼퍼퍼퍼펑.
흑골조와 두 자루의 낫이 너무나도 쉽게 유룡비검법과 선운비뢰장의 초식을 받아내기 시작했다. 아니, 점점 더 압박했다. 조금씩 전진했다. 교진운과 유백의 얼굴이 갈수록 어두워졌다.
“크크큭. 그러면 이제 내 차례인가?”
비릿하게 웃어 보인 손사욱이 불회곡에서 받아 온 혈적을 입에 물었다. 이곳으로 오는 내내 전수받았던 한 가지 심법을 끌어 올린 후 혈적으로 밀어내었다.
필릴리. 필릴리리리-!
혈적에서 사이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반짝. 후욱. 후욱.
멍하니 서 있던 흑의인들의 눈이 희번덕이기 시작했다. 그대로 몸을 솟구쳐 올리더니 비룡문의 담을 넘어 공격해 들었다.
***
용대명의 안색은 펴질 줄 몰랐다.
다들 열심히 싸워주고는 있었지만 적들의 숫자가 너무나 많았기 때문이었다. 언뜻 살펴도 수백 명에 달하는 적들은 비룡문의 고수 하나에 못해도 둘 혹은 셋, 넷씩 달라붙어 있었다.
철컥. 퓨퓨퓻. 철컥. 씨잇. 씨시싯.
퍼억. 퍼퍼퍽.
“큭.”
“커헉!”
기관의 힘으로 발사되는 쇠뇌와 수리검 덕에 겨우 버티고 있지 그렇지 않았다면 비룡무단 소속을 제외한 일반 무사들은 벌써 다 고꾸라졌을 정도였다.
패애액. 스각.
“어헉!”
“우진아 조심, 커헉.”
마공도 마공이려거니와 무공 수준 또한 낮지 않았다.
용무린이 전해 준 유성회류검법을 익히지 않았다면 거의 서너 초식에 쓰러졌을 정도로 높았다. 아무리 못해도 일류 수준은 다들 되었다.
“크아악!”
“끄악!”
지금 이 순간에도 일반 무사들은 계속해서 쓰러지고 있는 중이었다. 비룡무단 소속의 우진과 임준 역시 크게 부상을 입어 비틀댔다.
“야 이 개자식들아-아!”
차앙. 차차창. 쉬각. 스가각.
비룡무단의 단장 종우진이 미친 듯이 난입해 유성회류검법의 후반부 초식을 펼쳤다. 겨우 두 사람을 살렸다.
쿵쿵쿵.
‘뭔가 수를 내야만 해.’
용대명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교진운과 유백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굳이 보지 않아도 두 사람 덕에 이나마 버티고 있다는 것을 잘 안다.
‘기관장치의 쇠뇌도 오래지 않아 떨어질 터!’
쇠뇌와 수리검이 떨어지는 순간 일반 무사들은 물론이고 비룡무단까지 형편없이 뒤로 밀린다고 봐야 한다. 아니, 일반 무사들은 얼마 버티지 못하고 거의 죽는다고 보는 편이 더 정확할 것이다.
‘차라리 그 전에 방진을 구성하는 편이 더 낫겠지.’
판단을 마친 용대명은 고함을 크게 질렀다.
“비룡문의 무사들은 대 연무장을 중심으로 방진을 구성도록 한다. 비룡무단이 앞에 서고 일반 무사들이 그 뒤를 받쳐라!”
철컥. 철컥. 씨잇. 씨시시싯. 퓨웃. 퓨퓨퓻.
용대명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있기라도 하다는 듯 각 기관 장치들에서 엄청난 양의 쇠뇌와 수리검들이 쏘아졌다. 활로를 열었다.
“충!”
“충!”
그 틈에 무사들이 겨우 몸을 빼냈다.
대 연무장을 향해 움직였다. 먼저 도착한 비룡무단의 고수들 사이로 쏙 숨어 들어갔다. 적은 수로 최대한의 효율을 낼 수 있는 방진이 금세 만들어졌다.
휘릭. 타닷. 처처척.
“이놈들아! 제대로 한번 해 보자.”
원형진의 선두에 선 개방의 방건이 고함을 버럭 질렀다.
“내가 남쪽을 맡겠소이다. 일송 스님께선 북쪽을 맡아 주시오. 벽소추 형제가 동쪽을 백리천월 형제가 서쪽을 맡아 지켜줘.”
“그렇다면 나는 지켜보다 약해진 곳을 돕겠소.”
“내가 하려던 말이 그 말이외다, 일명 스님. 어쨌거나 우리 중 가장 강력한 한 방을 지닌 분이 일명 스님이니 수고 좀 해주시구려.”
“허허허, 좋소.”
쾅!
일명은 바닥에 깔린 청석에 금이 쫙 갈 정도로 강력한 진각을 밟으며 자세를 낮추었다.
“누구든 오너라! 부처님을 뵙게 해주마! 차아앗!”
일명이 두 주먹을 허리춤에 붙였다. 그대로 내공을 일주천시켜 끌어 모았다. 소림의 자랑인 백보신권이 언제든 튀어나갈 준비를 마쳤다.
“휴우, 사형께서 살계를 열기로 결심하셨으니 사제인 내가 어찌 모른 체 하리오.”
쉬리릭. 처억.
일송이 검을 중단에 세우더니 중완혈 앞으로 사려 모았다. 유백과도 팽팽한 대결을 벌였던 천수여래검법의 기수식이었다.
일명과 일송 두 사람 모두 승복이 피에 젖었다.
이미 살계를 활짝 열었음에도 누구 하나 이제야 살계를 열 것처럼 말하는 두 사람을 탓하지 않았다. 그 두 사람이 아니었다면 이미 오래전에 모두 쓰러졌을 수도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스슷. 타닷.
“허허허. 든든하구려. 비룡문은 여러분들의 기개를 절대로 잊지 않겠소이다.”
“놈들을 물리치고 우리 술이나 한 잔 거나하게 하십시다. 내가 사겠소이다. 하하하.”
“내가 사려고 했는데 어째 형님이 먼저 나서십니까?”
용대명과 용대승, 용대연 삼형제가 화통하게 웃으며 방건의 옆에 내려섰다.
필릴리. 필릴리리리-!
그때를 기다렸다는 듯 피리 소리가 살짝 바뀌었다.
한 눈에 봐도 비룡문 무사들의 숫자를 훌쩍 뛰어 넘는 숫자의 흑의인들이 또다시 비룡문의 담을 넘었다.
그렇지 않아도 몇 배나 전력이 차이가 나는데 거기에 더해 적들의 숫자가 더 늘어나다니!
“……!”
“……!”
간담이 서늘해졌는지 그동안 기개를 잃지 않고 있던 일명과 일송 그리고 방건과 벽소추 등의 입이 굳게 다물렸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휘슷.
누군가가 마지막으로 담장 위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크하하하하.”
살기 가득한 목소리로 크게 웃어젖혔다. 매부리코 사내 손사욱이었다.
씨이익.
한참을 웃던 손사욱이 거칠게 외쳤다.
“네놈들은 오늘 모두 죽는다.”
“네놈은 오늘 죽지 않는다.”
용대명이 대뜸 받아쳤다.
“……너희 비룡문의 종자들은 개새끼 한 마리 남기지 않고 깡그리…….”
“네놈을 죽이는 대신 기필코 사로잡아 네놈의 배후를 알아내 주마. 볼기 좀 때리면 알아서 술술 불겠지.”
손사욱의 말을 연거푸 툭 잘라버린 용대명의 시선이 곁에 있던 개방의 방건에게로 향했다.
“아니 그렇소?”
“……?!”
잔뜩 굳어 있던 방건의 표정이 점점 더 밝아졌다.
어려운 상황이 눈앞에 닥쳐왔어도 결코 주눅 들지 않고 결사의 의지를 세우는 용대명을 보며 약해지려는 마음을 한순간에 날려 보낸 것이다.
피식.
“복날 개 패듯 패버리면 불고도 남지요.”
마찬가지로 용대명을 보며 무엇인가를 깨달은 일명과 일송 역시 굳었던 얼굴을 완전히 풀었다.
“하하하. 악적에게도 최소한의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것이 불가의 가르침이지만 이번만큼은 눈감아 주겠소. 마음껏 볼기를 치시오 방 시주.”
“이를 말씀입니까, 사형. 저도 입을 굳게 다물겠습니다.”
벽소추는 이제 완전히 용무린과 비슷하게 행동을 했다.
“덤벼 이 새끼야. 대가릴 예쁘게 잘라줄 테다.”
아득.
“……시건방진 놈들. 오냐, 좋다. 깡그리 죽여 주마.”
이를 갈아붙인 손사욱이 혈적을 입에 가져갔다.
필릴리. 필릴리리리-!
파앗. 휘릭.
괴이한 피리 소리와 함께 마령전사들의 공격이 다시 시작되었다.
카앙. 카카카캉. 패애액.
스각. 피윳.
“큽!”
“흐읍!”
곧 여기저기에서 비명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숫자도 숫자거니와 마령전사들이 뿜어내고 있는 기운이 마공인지라 상대하기 거북했다. 살짝만 스쳐도 숨이 턱턱 막히는 느낌이었다.
주춤. 주춤.
비룡무단의 고수들이 조금씩 뒤로 밀렸다.
용대명을 비롯한 직계의 고수들과는 달리 호심결을 배우지 못한 탓이 가장 컸다.
카카캉. 스각. 카라락. 패애액.
불사신기의 힘에 내공이 툭툭 끊겨 움찔거리는 놈의 목 하나를 날려 버린 용대명이 고함을 크게 질렀다.
“비룡무단의 뒤를 받치고 있는 무사들은 기회를 잘 노려라. 너희들에게 이 싸움의 결과가 달려 있다.”
“충!”
“이야아아-!”
비룡무단의 뒤에 숨어 기회만 노리고 있던 일반 무사들이 힘을 냈다. 조금의 틈만 보여도 두려움 없이 앞으로 튀어 나갔다. 검을 휘둘렀다.
스각. 패애액.
검을 휘두르던 마령전사의 팔이 하늘 높이 떠올랐다. 하지만 마령전사는 그대로 돌진했다. 하나 남은 주먹을 꽉 쥐고 거칠게 휘둘렀다.
“이놈!”
쉬각.
그 사이 선두에 있던 비룡무단의 고수가 목을 베었다.
털썩.
그렇게 하나 둘 착실히 눈앞의 적들을 쓰러뜨려갔다.
지켜보던 손사욱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이대로는 피해가 너무 크겠다.’
눈덩이처럼 늘어나는 피해에 손사욱은 마음을 달리 먹었다. 혈적의 운율을 바꾸었다.
피리리리릭.
급격하게 바뀐 피리 소리에 마령전사들이 즉시 반응했다.
타닷. 휘익. 후욱.
십여 명이 동시에 훌쩍 떠올랐다. 비룡문이 만들어낸 원진의 안쪽을 향해 짓쳐들었다.
패액. 패패팩.
‘총관! 지금이야!’
사력을 다해 상청무상검법을 펼치던 용대명이 소리 없이 크게 외칠 때였다.
덜컥. 덜컥. 덜컥.
씨잇. 씨잇. 씨시시싯.
원진 중앙에 자리하고 있던 네 개의 작은 목탑에서 쇠뇌와 수리검이 비처럼 뿌려졌다.
퍼억. 퍼억. 퍼퍼퍽.
“이놈들아!”
“어딜 들어와!”
“죽어랏!”
뒤에 대기하고 있던 무사들이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몸 곳곳에 쇠뇌와 수리검이 박혀 둔해진 마령전사들의 팔과 다리를 베었다.
털썩. 털썩. 터얼썩.
목이 베이지 않았어도 십여 명의 마령전사들 중 움직일 수 있는 존재는 없었다.
‘이런 빌어먹을!’
피리리릭. 피리리리릭.
손사욱의 입에 물린 피리 소리가 더욱 신경질적으로 바뀌었다.
타닷. 후욱. 휘릭.
한참 뒤쪽에서 기회만 엿보던 마령전사 서른 남짓이 한꺼번에 날아올랐다. 원진 안으로 떨어져 내렸다.
씨잇. 씨잇. 씨시시시싯.
다시 한 번 목탑에서 쇠뇌와 수리검들이 쏟아졌다.
퍼억. 퍼억. 퍼퍼퍽.
십여 명 이상의 마령전사들이 끈 떨어진 인형처럼 바닥으로 떨어졌지만 반 수 이상이 멀쩡했다. 손사욱의 계획이 성공한 것이다.
***
쿵쿵쿵쿵쿵.
공간을 접듯 신법을 전개하고 있는 용무린의 심장이 미친 듯 뛰었다.
‘무사해야 할 텐데…….’
간절히 바라고 또 바랐다.
하지만 효감현 어귀에서 상관엽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지 않았던가? 어쩌면 지금쯤 비룡문은 상관세가의 공격을 받고 있을 것이다.
‘상관엽 그 늙은이만 움직였을 턱이 없잖아?’
상관웅에 이어 상관혁련의 일에 분노한 상관엽만 홀로 움직였으면 좋았겠지만 절대로 그럴 리는 없었다. 아니, 하북성도 외곽에서 보았던 마공을 익혔던 놈들까지 투입하지 않았으면 되레 다행인 거다.
‘아버지.’
타닷. 스파아아앙.
한 번 땅을 박찰 때마다 오 장 어림씩 용무린의 몸은 쭉쭉 공간을 접었다. 무한의 외곽에 세워진 성벽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조금만, 조금만 더 기다려 주세요.’
타닷. 훌쩍. 스파아아아앙.
“어엇?”
“뭐, 뭐야?”
“방금 뭐였어?”
한 줄기 바람처럼 무한의 성곽을 타넘은 용무린은 수비병들이 어리둥절하고 있을 찰나 비룡문을 향해 바람처럼 쏘아졌다.
원진이 끝내 뚫리고 말았다.
“이놈들!”
“어딜!”
“차아아!”
쉬각. 패애액.
카앙. 카앙. 카라락. 푹.
“커헉.”
“큽!”
화들짝 놀란 무사들이 일제히 달려들었지만 팔다리가 뚝뚝 떨어져 나갔어도 끝까지 발악을 하는 마령전사들의 위력에 빠른 속도로 피를 뿌리며 쓰러져 갔다.
위기의 순간,
“어림도 없다-아!”
원진 외부에 있던 백리천월이 홀로 원진 중앙에 뚝 떨어져 내렸다. 백의 곳곳이 찢기고 피가 베여 나오고 있었지만 용감하게 검무를 추기 시작했다.
그렇다. 그것은 하나의 멋들어진 검무였다.
“회륜단금.”
쉬이이이잇. 스가각.
둥그렇게 그려낸 검 끝에 걸린 마령전사 셋의 팔과 다리가 투두둑 끊겼다.
“일양추혼!”
피잇. 푹. 푹. 푹.
번개 같은 찌르기의 연환에 마령전사 셋의 심장과 이마가 뻥뻥 뚫렸다. 허물어지려던 원진이 금세 제자리를 찾았다. 단단해졌다.
“힘을 내자.”
“백리천월 공자를 도와야 한다.”
수세에 몰렸던 비룡문의 고수들이 이를 악물고 앞으로 나섰다. 백리천월을 도왔다. 검무는 어느새 육양귀일검법의 연환을 마치고 천양진명검법으로 바뀌었다.
쉬각. 스가각. 패애액.
혼신의 힘을 다해 펼치는 백리천월의 초식에 마령전사들이 한꺼번에 쓸려 나갔다. 팔과 다리가 툭툭 끊겼다. 바닥을 뒹굴었다.
“이야아-아!”
“크아압!”
비룡문의 무사들이 힘을 냈다. 자신들 역시 마령전사라도 되는 듯 평소 같았으면 도저히 움직이기도 힘들 상처를 입었으면서도 기를 쓰고 달려들었다. 검을 휘둘렀다. 난도질을 했다.
스각. 카각. 피이잇.
털썩. 털썩.
“이, 이겨냈다.”
“지, 지켰다.”
가까스로 원진 안에 침입한 마령전사들을 모두 쓰러뜨렸을 때 다시 한 번 저주스러운 피리 소리가 들렸다.
피리릿. 피리리릿. 필릴리리릿.
휘익. 휘릭. 후욱. 후우욱.
이번에는 조금 전보다도 훨씬 더 많은 수의 마령전사들이 원진을 타 넘었다.
철컥. 철컥. 철컥.
소리만 요란하게 흐를 뿐 목탑에서 더는 쇠뇌도 소검도 뿜어지지 않았다. 비축해둔 물자가 바닥이 난 것이다.
타닷. 후욱.
전면에서도 마령전사들이 몸을 사리지 않고 짓쳐들었다. 비룡무단 고수들의 검에 가슴 어림이 꿰뚫렸음에도 불구하고 마지막까지 검을 휘둘렀다.
스걱.
“큽!”
카가각.
“허억!”
비룡무단의 무사들이 하나 둘씩 쓰러졌다. 마지막 보루였던 원진이 급격히 뒤흔들렸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우지끈 부러졌다. 완전히 깨졌다.
“크하하. 죽여라, 죽여!”
필릴리. 필릴리리리.
미친 듯 웃어 보인 손사욱이 발작적으로 혈적을 불었다.
후우욱.
마령전사들의 마지막 하나까지 한꺼번에 달려들었다.
“크아악!”
드디어 직계들의 피해도 발생했다.
용무린의 사촌동생이던 용사흔의 심장에 마령전사의 검이 틀어박힌 것이다.
“이노-옴!”
츠칵. 털썩.
곁에 있던 용대승이 대뜸 달려들어 목을 베었지만 이미 늦었다. 막내아들의 목숨을 구할 수는 없었다.
“커헉!”
“아들아!”
용대연의 큰 아들이자 용무린의 사촌동생이던 용현승의 목에서 더운 피가 콸콸 쏟아졌다.
“우와악!”
스각. 스각. 패애액.
용대연이 난도질을 하듯 검초를 휘둘러 마령전사의 목을 날려버렸지만 역시 이미 숨이 끊긴 아들의 목숨을 되살릴 수는 없었다.
“커헉!”
“크아아악!”
그렇게 비룡문의 직계와 방계 그리고 모든 고수들의 숫자는 빠르게 줄었다. 소림의 일명과 일송 그리고 개방의 방건과 벽소추 마지막으로 백리천월이 몸을 사리지 않고 싸웠지만 역부족이었다.
수적 열세와 사지가 잘려도 완전히 죽지 않고 마지막 순간까지 발악을 하는 마령전사의 능력은 도저히 극복하기 힘들었다.
‘이대로 끝인가?’
끝까지 용기를 잃지 않던 용대명마저 암담한 생각을 머릿속에 담았다.
***
드디어 비룡문이 저 멀리 눈에 들어왔다.
“……!”
용무린의 눈이 부릅떠졌다.
카앙. 카카캉. 스파파팡. 스각.
“크하하핫. 죽어라앗!”
“크흐흐. 요놈!”
스산한 웃음소리와 함께 교진운과 유백을 정신없이 몰아붙이는 두 노괴의 모습이 보였던 것이다.
‘그 때 그 늙은이들과 비슷하다.’
심상치 않은 마기를 뭉텅뭉텅 쏟아내던 두 노괴.
하나는 혈적을 손에 쥐고 있었고 다른 하나는 작은 쇠종을 주 무기로 삼았었다.
‘저 늙은이들이 더 강하다.’
그때 그 노괴들은 술법가로서의 성향이 더 강했다면 지금 교진운과 유백이 상대하는 두 늙은이들은 무인으로서의 기백이 훨씬 더 강했다.
카아앙. 촤촥.
“크흡!”
검은 쇠로 만들어진 손톱 비슷한 것을 손바닥 전체에 끼고 있는 노괴의 손에 유룡비검법의 초식이 허무하게 깨지며 교진운의 가슴을 훑었다.
따아앙. 스아아아-악.
“헉!”
낫 두 자루를 손에 쥔 노괴의 연환공격에 선운비뢰장의 초식이 단숨에 둘로 갈렸다. 그 서슬에 유백의 복부에 긴 자상이 생겼다.
‘위험하다.’
얼마나 오래 싸웠는지는 모르겠지만 끝이 멀지 않았다.
이대로 두어 초식이 더 지나면 교진운과 유백의 목이 노괴들의 손에 뚝 떨어질 것이라는 것이 불을 보듯 환하게 보였다.
‘아직도 너무 멀어.’
소검비연도 닿지 않을 거리!
돕기 위해서는 다른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쓰으으으읍. 쓰으으으으으읍!”
용무린은 끝도 없이 숨을 들이켜기 시작했다.
들이켠 숨에 불사신기의 힘이 가득이 어렸다. 그러다 어느 한계점에 다다르자 그동안 들이켰던 숨을 한꺼번에 토해 내었다.
“크아아아아-앙!”
하늘과 땅이 동시에 뒤흔들릴 만큼 거대한 사자후가 터졌다.
***
흠칫!
‘이, 이 소리는?’
신나게 혈적을 불던 손사욱의 몸이 그대로 굳어졌다.
사자후에 가득 실린 불사신기의 힘에 내공의 운용이 툭 끊긴 탓도 있었지만 사자후 자체에 대한 두려움이 더 컸던 것이다.
‘부, 분명히 한 번 들어 봤었는데?’
손사욱의 뇌리에 용무린의 무시무시한 모습이 스쳐 지났다. 음양자의 두 제자와 함께 양육장을 방문했었을 때 용무린이 저 말도 안 되는 수준의 사자후를 뿜어냈었다.
‘그놈이 왔나?’
쿵.
그 생각만으로도 갑자기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느낌이다.
‘흥! 와, 왔으면 어때? 밖에는 음양자께서 아끼는 두 제자 분들이 계시…….’
거기까지 생각하던 손사욱의 뇌리에 내장을 쓸어 담으며 가까스로 담을 넘어 도주하던 음양자의 두 제자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양육장에서 용무린에게 호되게 당한 음양자의 두 제자들은 결국 개방의 화운과 소림의 일각의 손에 의해 유명을 달리해야만 했다.
‘서, 설마…….’
불안하기만 한 손사욱의 시선이 담장 밖으로 향했다.
지금쯤 교진운과 유백 두 사람의 목을 손에 대롱대롱 들고 복귀해야만 할 두 사람의 늦은 복귀가 심장을 쿡쿡 찌르는 느낌이었다.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야만 해.’
손사욱은 다시금 혈적을 입에 물었다.
삐이익. 삐이익. 삐이이이익.
절대로 돌이킬 수 없는 명령을 내렸다. 마지막 하나까지 이곳에 남아 적들을 죽이라는 명령이었다.
후욱.
명령을 마친 손사욱은 슬그머니 그 자리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
움찔. 움찔.
불사신기가 가득히 깃든 사자후에 두 노괴의 몸이 순간적으로 굳었다. 멈칫했다. 교진운과 유백이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이야아아-압!”
“하아아-아!”
장소성과 함께 교진운과 유백이 그동안 아껴두었던 절초 하나를 풀어내었다.
버언쩍.
교진운의 손에서 유룡비검법의 비장절초인 섬전일룡의 초식이 펼쳐졌다. 교진운의 손을 떠난 검이 진기의 조종을 받으며 일직선으로 공간을 압축했다.
빠아아앙.
어찌나 빠른지 검 끝에 압축된 공기가 폭음을 토해냈다.
꿈틀.
“끼이야아아-합!”
흑골조를 끼고 있던 노괴가 전신을 푸들푸들 떨며 진기를 끌어 모았다. 사자후에 담긴 불사신기의 침습에 흩어지는 내공을 겨우겨우 긁어모아 휘둘렀다.
하지만 너무 늦었다.
카락. 퍼억.
손아귀에 잡힐 듯하던 교진운의 검은 흑골조를 스쳐 지난 후 심장 어림에 구멍을 뻥 뚫어 버렸다.
휘우우웅. 화아악.
유백의 손에서도 아껴둔 선운비뢰장의 절초가 튀어나왔다. 선운비뢰장의 초식 중 가장 빠르며 파괴력 또한 높은 천단일뢰의 초식.
버언쩍!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구름 사이 시퍼런 강기 덩어리 하나가 벼락처럼 튀어나왔다.
“크아아아아-압!”
두 자루의 낫을 든 노괴 역시 불사신기의 침습으로 인해 한 발 늦게 방어초식을 펼쳤다. 두 자루의 낫을 들어 자신을 향해 짓쳐드는 뇌전을 베려들었다.
물론 어림도 없었다.
씨이웅. 퍼어억.
천단일뢰의 초식은 정확히 노괴의 단전을 뚫고 지나갔다.
두 노괴의 입이 쩍 벌어졌다.
“어, 어떻게 이런 일이…….”
“믿을 수 없어.”
잠시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던 두 노괴의 눈에 악독한 빛이 스쳐 지났다.
“함, 함께 쿨울럭 가자!”
“쿨럭. 쿠울럭. 이, 이놈!”
화아악. 화아아악.
어떻게 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흑골조의 노괴 전신에서 폭풍과도 같은 마기가 솟구쳤다. 단전이 파괴된 사슬낫을 든 노괴의 몸에서도 비슷한 마기가 일었다. 마치 불사신기에 밀려난 마공의 힘이 한꺼번에 뭉쳐지는 듯했다.
“옴. 아라사라도르 옴. 마라 타하앗!”
“옴. 아라타라마라 옴. 마라니 하앗!”
콰르르. 콰르르르.
연원을 알 수 없는 주문과 함께 일어난 폭풍과도 같은 마기가 교진운과 유백을 향해 밀려갔다.
“……!”
“……!”
두 사람의 눈에 체념의 빛이 어렸다.
마지막으로 펼쳐낸 한 수에 모든 것을 걸었기 때문에 도저히 두 노괴가 펼친 동귀어진의 초식을 피할 여력이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곱게 서서 죽어 줄 수는 없지.’
‘죽을 때 죽더라도 끝까지!’
저 만큼 앞에서 토끼 눈을 한 채 달려오는 자신들의 의조카 용무린 앞에서 그런 멍청한 모습으로 죽을 수는 없는 노릇인 거다.
콰악. 스윽.
교진운은 검도 없이 주먹을 불끈 움켜쥐었다.
유백은 내공도 모이지 않은 두 손바닥을 들어 받아칠 준비를 했다.
바로 그 순간,
“그만 곱게 뒈졋!”
아직 십여 장도 훨씬 더 떨어진 거리에 있던 용무린의 왼손이 앞으로 쭉 뻗어졌다.
버언쩍. 씨이이잇.
반투명한 기운에 휩싸인 소검비연이 십여 장도 훨씬 넘는 거리를 순간적으로 단축했다. 농부가 수확을 하듯 두 노괴의 목을 툭툭 끊어냈다.
스각. 쉬각.
“……!”
“……!”
스르르. 투욱. 스르르. 툭.
아직 눈이 채 감기지도 않는 두 노괴의 목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순간 용무린의 신형은 비룡문의 담장을 그대로 타 넘었다.
휘리릭.
“방금 뭐였지?”
“난들 알겠어?”
“어검술 같은 것은 분명 아니었는데 말이야.”
“하여간 소검이 공중에서 자유자재로 방향을 틀었지?”
“응. 그런데 그게 말이 되나?”
“휘이유. 어째 그간의 노력이 허무하게 느껴지네.”
“후우. 그러게 말이야. 우린 죽도록 고생해서 이 수준까지 올라왔는데 녀석은 불과 반년 조금 넘는 시간 만에…….”
교진운과 유백 두 사람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우리 두 사람, 아직 녀석과 비무 한 번 해 보지 않았었지? 다음에 실전 비무나 한번 해 보자고 할까?”
“흠. 나는 무서워서 싫어. 그냥 자네와만 할래.”
“솔직히 나도 많이 켕겨. 나도 그냥 자네와 일명 그리고 일송하고만 놀 거야.”
“가자. 나머지 놈들 때려잡으러.”
“그래.”
휙. 휘릭.
아직 남아 있는 적들을 떠올린 교진운과 유백이 비룡문 안으로 다시 들어갔을 때였다.
움찔. 흠칫.
두 사람의 몸이 그대로 굳어졌다.
“……세, 세상에.”
“저, 저건 너무…….”
비룡문 안에 한 편의 도살극이 펼쳐지고 있었다.
피이이잉. 씨잇. 씨시시시싯.
반경 십여 장이 넘는 공간에 그야말로 피보라가 휘몰아치는 중이었다.
버언쩍. 번쩍. 쉬가가각.
풍뢰가 사위를 휘감을 때마다 마령전사들의 팔과 다리가 툭툭 끊겼다.
피이이잉. 투우웅. 쉬리리릭.
왼 팔을 한 번 크게 휘저으면 반경 십여 장 안에 들어와 있던 모든 것이 그대로 두 동강이 났다.
마령전사들이 기를 쓰고 검을 휘둘렀어도 소용이 없었다.
카캉.
운 좋게 소검비연을 튕겨 냈어도 뒤따라 들어온 천잠사에 휘말렸다. 그대로 목이든 팔이든 내어 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네놈들 따위가 감힛!”
바닥을 나뒹구는 사촌 동생들과 비룡무단의 고수들을 확인한 후 그 정도가 더 심해졌다.
“죽인다. 다 죽여 버린다-아!”
근거리로 접근하는 마령전사는 풍뢰로 토막을 쳐 버렸다.
원진을 향해 짓쳐드는 놈들은 원거리에서 소검비연은 던져 낚시를 하듯 턱턱 목을 끊어냈다.
“……!”
“……!”
이지를 상실했으면서도 강대한 적의 존재를 감지한 듯 마령전사들의 태반이 용무린을 향해 몰려들었다.
물론 용무린의 화만 돋웠다.
훅 줄어든 빈 공간 사이 피에 젖어 비틀대는 용대명의 모습이 보였던 것이다.
화륵.
용무린의 눈에 시퍼런 불꽃이 일었다.
아버지까지 피에 젖어 있는 모습을 보자 뚜껑이 완전히 열려 버렸다. 그나마 유지하고 있던 한 가닥 이성이 송두리째 날아가 버린 거다.
용무린은 한껏 숨을 들이켰다.
“쓰으으읍! 쓰으으으으읍!”
살기 가득한 눈을 희번덕이며 그동안 들이켰던 숨을 한꺼번에 토해냈다.
“다 죽여 버린다-아!”
우르릉.
불사신기가 가득히 깃든 외침에 마령전사들의 몸이 다시 한 번 흠칫 굳었다.
피이이잉. 투웅. 씨시시시시-싯.
그때를 노려 소검비연이 크게 원을 그렸다. 손가락으로 비파를 뜯듯 천잠사를 뜯었다. 소검비연을 뒤따르는 천잠사가 파도가 되었다. 위아래에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는 죽음의 덫이 펼쳐졌다.
스각. 스가각. 피쉬이-잇!
한꺼번에 스무 명 가까운 마령전사들의 몸이 토막이 났다. 피분수를 뿌리며 바닥에 너부러졌다.
그 참혹함이란!
“……!”
“……!”
어찌나 놀랐는지 일명도 일송도 움직임을 멈추고 멍하니 바라만 볼 뿐이었다. 방건과 벽소추 그리고 백리천월 역시 마찬가지였다.
“죽엇! 죽어-엇!”
패애액. 쉬가각. 피쉬-잇.
마지막 하나까지 깡그리 쓸어버리지 않고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다는 듯 용무린은 그 후로도 한참 동안이나 죽음의 춤을 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