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나랑 경극 한 편 하자 (30/104)

11.나랑 경극 한 편 하자

반짝.

화운장로의 입을 통해 용무린이란 사내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는 방건이 눈을 빛내며 물었다.

“거 꽤 재미난 일을 벌일 것 같소이다, 소 형제.”

“무슨 말씀을! 그거 오햅니다. 나는 그냥 이자라도 먼저 계산해 줄 생각이라니까요?!”

그게 바로 그 말인 거다.

피식.

“용모파기 들이미는 것보다 용 소협을 따라가는 것이 훨씬 더 재미있을 것처럼 느껴진단 말이지. 나도 합비로 갈 생각이었는데, 그냥 용 소협의 뒤나 따라가 볼까?”

“따라오지 마요. 공연히 다른 놈들 눈에 띄기라도 하면 곤란해진단 말이에요.”

용무린은 딱 잘라 거절했다.

“거 참, 자꾸 저러니 더 따라가고 싶어지네.”

방건이 입맛을 자꾸 다셨다.

“그럼 저 먼저 일어납니다.”

“아들아. 너를 믿는다만, 아비는 걱정이 앞서는구나.”

“믿으세요, 아버지. 아무 걱정하지 마시고요.”

“이자라도 먼저 계산하겠다라……. 정녕 혼자서도 충분하겠느냐?”

용무린은 단호한 태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아버지. 저 혼자로 충분해요.”

“무슨 뜻인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잘 알겠다. 아비가 뭐 도와줄 것이라도 있느냐? 말해 보거라. 할 수 있는 것이라면 내가 돕겠다.”

“아뇨! 진짜 저 혼자가 더 안전해요, 아버지.”

“휴우, 알겠다. 부디 조심하거라.”

씨이익.

“예, 아버지.”

한 번 환하게 웃어 보인 후 용무린은 밖으로 나섰다.

빠른 걸음으로 홍적로를 향해 움직였다.

***

용무린은 대뜸 홍연루를 찾았다.

하오문의 무한 분타인 곳, 소가흔을 통해 몇 가지 알아볼 일이 있었다.

“어서 옵…… 떠헙!”

기도를 보던 거친 인상의 사내가 용무린의 얼굴을 확인한 후 기함을 토했다. 용무린이 올 때마다 계속해서 코가 뭉개졌었던 바로 그 사내였다.

‘아 씨, 저 인간 얼굴 볼까 무서워서 밤 근무로 바꿨는데……. 왜 오늘은 밤에 나타나고 난리야!’

반사적으로 인상이 쭈그러지려 마구 요동을 쳤다. 하지만 사내는 사력을 다해서 웃어 보였다. 최대한 공손히 용무린을 맞이했다.

“어, 어서 오십시오, 용 공자님.”

“늦었어! 왜 사람을 보자마자 인상을 쓰고 난리야 이 자식아!”

퍽!

“아악!”

대뜸 뻗어낸 주먹에 사내의 코가 다시 한 번 박살났다.

죽는다고 비명을 질러댔다.

“아야야. 내 코, 내 코오오-!”

“시끄러!”

“큽!”

사내가 화들짝 놀라서 입을 닫았다.

“위에 있지?”

“넵. 자, 잠시만…….”

쿵쾅 쿵쾅

사내는 코맹맹이 소리를 하며 부리나케 5층을 향해 뛰었다.

‘씨바, 여긴 저주받았어. 저주받았다고!’

아예 무한을 뜰까?

사내는 다른 곳으로 발령을 내달라고 요청하고 싶은 강력한 충동을 느껴야만 했다.

피식.

용무린은 풀썩 웃어 보인 후 느긋하게 위로 올랐다.

우당탕.

또 무슨 짓을 하는 것인지 소가흔의 방에서 요란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용무린의 입가에 쓴웃음이 걸렸다.

‘에혀, 그런다고 뭐가 달라져?’

호박에 줄을 긋는다고 수박이 되는 건 아니다.

전처럼 헝겊 따위 몽땅 집어넣지 않는 한, 몇 달 지났다고 있는 듯 없는 듯 겸손하던 가슴이 느닷없이 교만해질 수는 더더욱 없는 거다.

“루주. 나 들어간다.”

“흥! 여인의 방을 잘도 쳐들어오는군요. 들어오세요.”

“오!”

성큼 안으로 들어서던 용무린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 짧은 사이 무슨 짓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소가흔의 모습이 과거와는 달리 뭔가 굉장히 많이 아름답게 느껴졌던 것이다.

“정말 많이 예뻐졌는데?”

진심이었다.

청초해 보이는 연한 화장에 생동감 넘치는 붉은 입술, 그리고 무엇보다 분위기가 확 바뀌었다. 전보다 뭔가 훨씬 더 요염하고 자극적이었다.

“그 사이 미염공이라도 익혔어?”

“흥, 그 따위를 내가 왜 익혀요?”

“그런데 왜 이렇게 갑자기 아름답고 요염해 보이지?”

“흥, 원래부터 예뻤거든요?!”

콧방귀를 연신 뀌면서도 기분은 좋은지 소가흔이 슬그머니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자신감이 넘치는지 허리를 반듯하게 세웠다.

움찔!

“……!”

용무린의 눈이 부릅떠졌다.

그제야 뭐가 바뀌었는지, 어째서 갑자기 요염해 보이고 자극적으로 느껴졌던 것인지 알아차렸다.

나삼(羅衫)!

소가흔이 용감하게도 은은하게 속이 비치는 나삼을 입고 있었던 것이다. 백옥처럼 뽀얀 살결과 그린 듯 아름다운 어깨와 허리의 곡선 그리고 결정적인 그곳까지 모두 다 은은히 내비쳤다.

홱. 뚜둑.

화들짝 놀란 용무린이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어찌나 강하게 고개를 돌렸는지 목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젠장. 자꾸 그곳으로만 시선이 가니 당최…….’

그 상태에서 용건을 밝혔다.

“정보 좀 사자.”

“흐흥, 정보를 사겠다는 분이 예의도 없이 이게 무슨 짓일까요? 사람을 앞에 앉혀 놓고 눈을 봐야지 고개를 돌리고 뭐하는 짓이에요?”

“커흠흠. 이야, 저 산수화 정말 멋지네?”

용무린이 공연히 딴청을 했다.

“산수화? 무슨 산수화……. 아! 계곡 아래 남녀가 정사를 벌이고 있는 춘화도요?”

움찔!

‘젠장. 하필이면…….’

핑계를 댔던 그림이 산수화가 아니라 춘화도라니!

용무린은 잽싸게 시선을 돌려 사람 키만 한 도자기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홍루와 청루를 다스리는 하오문의 분타주 방이라서 그런지 도자기에 그려진 그림마저도 끈적한 춘화도였다.

‘젠장. 어째 눈에 보이는 게 전부 다 이러냐?’

공연히 숨이 거칠어졌다.

‘참 이상하네. 전생 시절에 분명 나도 꽤 질펀하게 놀았던 것 같은데 어째 이렇게 부끄럽지?’

기억과는 달리 이러는 이유를 당최 모르겠다.

할 수 없이 소가흔의 미간에 시선을 고장한 채 용무린은 재빨리 용건을 다시 밝혔다.

“하여간 정보 좀 사자.”

“말씀해 보세요.”

“며칠 전 무한에 운룡장이 운영하는 운룡표국이 표물을 운송해서 들어왔을 거야. 알지?”

“그거야 뭐 비밀도 아니니까요. 당연히 알죠.”

“돌아갈 때 빈손으로 돌아가진 않겠지? 명색이 표국인데 말이야. 안 그래? 흡!”

용무린이 화들짝 놀라 다시 옆으로 얼굴을 돌렸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자연스레 소가흔의 중요 부위로 눈이 뚝 떨어져 내렸기 때문이었다.

‘호홋, 귀여워라.’

의도한 일이었지만 저렇게 당황하는 것을 보니 그동안 당했던 일들이 한꺼번에 싹 풀리는 기분이었다.

‘속을 박박 긁어댈 때는 정말 죽이고 싶을 정도로 얄미웠었는데…….’

사람 마음 참 희한한 거다.

언제나 얄미웠던 사내, 어떻게 하면 한 방 제대로 먹여줄 수 있을까하고 고민하게 만들었던 사내가 의도했던 대로 당황해하는 모습을 보니 일전에 무참히 당했던 기억은 어디론가 훌쩍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잘생긴 얼굴에 순진하기까지……. 어쩜, 저 얼굴 붉히는 것 좀 봐. 콱 깨물어주고 싶어.’

점점 치밀어 오르는 요망한 생각이 소가흔의 얼굴이 그대로 묻어났다.

“호홍, 당연한 일 아닐까요? 그 많은 표사와 쟁자수와 짐꾼들 유지하려면 편도로만 표물을 받아서야 이익 자체를 낼 수 없을 테니까요.”

“걔들, 웃, 함께 무한으로 왔던 쟁자수와 짐꾼들 다 도망간 것도 우웃, 알고 있지?”

시선을 돌릴 때마다 소가흔의 가슴으로 향하는 시선을 느끼며 흠칫 흠칫 놀라는 용무린이었다.

‘젠장. 차라리 적들이랑 싸우고 말지 이게 무슨 짓이람?’

제갈영령과 언약만 하지 않았어도 오히려 반겼을 거다.

하지만 마음껏 천하를 질타하고 오라던, 돌아와 쉴 곳이 되어 주겠다던 그녀를 생각하니 이런 상황 자체가 거북한 용무린이었다.

“호호홍, 그거야 뭐 당연히…….”

기분 좋게 웃으며 소가흔이 말꼬리를 살짝 늘였다.

비룡문을 습격했던 의문의 마공을 익힌 무리와 표물을 훔쳐 도망갔다던 운룡표국의 쟁자수와 짐꾼들 숫자가 비슷하다는 것까지 이미 알고 있었던 거다.

“운룡표국의 선택지가 좁을 거야. 알다시피 예정된 표물을 가지고 가자니 쟁자수와 짐꾼들 숫자가 부족하니 다시 뽑아야 할 테고, 그러기 위해서는 시간이 많이 촉박할 테니 그냥 홀가분하게 갈 수도 있단 말이지.”

“뭐, 결국 둘 중 하날 택하겠죠.”

“그걸 알아봐줘.”

“그 정도야 비룡문도들이 지켜보기만 해도 될 텐데요?”

“내가 원하는 것은 놈들이 표물을 받았을 때야. 표물의 내용물이 무엇인지 하는 것과 표물의 전체적인 액수 그리고 누가 어디에서 어디로 보내는 것인지 그들이 운룡장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알고 싶어.”

“예에? 그, 그걸 왜?”

씨이익.

“그거야 네가 알 것 없지. 어때? 알아봐 줄 수 있겠지?”

“…….”

“원하는 정보료를 말해.”

“오늘은 퉁 안 쳐요?”

“날마다 퉁 치면 넌 뭘 먹고 살고? 나 그렇게 치사한 사람 아니다. 말해 어서.”

잠시 침묵하던 소가흔이 얼굴을 훅 붉혔다. 뜻밖의 말을 입에 담았다.

“……다음에 말할 게요.”

“다음에?”

“예, 다음에요.”

고개를 한 번 갸웃한 용무린이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정보료는 다음에 계산하는 것으로 하지. 알아내는 기간은 얼마나 걸려?”

“운룡장의 움직임에 따라 다르겠지요.”

“하긴.”

“염려마세요. 움직임이 결정되면 즉시 알 수 있으니까요.”

“그래 알았어. 커흠흠. 믿고 기다릴게.”

벌떡 일어나던 용무린은 눈을 질끈 감았다. 헛기침을 하며 거칠게 머리를 한 번 흔들었다. 또 한 번 자신도 모르는 사이 소가흔의 가슴 어림으로 시선이 흘러갔기 때문이었다.

‘미치겠네, 정말. 전생 시절 여자 경험이 꽤 많았다고 자부하는데 어째서 자꾸 시선이 신세계를 보는 듯 제 멋대로 움직이는지 모르겠네?’

그것이 사내의 본성이라 하더라도 자신의 의지조차 거스르고 자꾸만 이럴 것인 줄은 정말 생각도 못했다.

“호호홍, 곧 뵈어요.”

소가흔이 승리자의 미소를 지으며 외쳤다.

‘조금만 더 하면 완전히 넘어오겠는데?’

소가흔이 김칫국을 사발 째 들이켜기 시작했다.

***

홍연루를 나선 용무린은 그대로 흑야방을 찾았다.

멈칫.

용무린은 흑야방의 대문을 향해 거침없이 뻗어나가던 주먹을 사력을 다해 멈춰 세웠다.

‘젠장, 하마터면 또 때려 부술 뻔했네.’

하여간 버릇이란 무서운 거다.

흑야방과 독사의 본거지 그리고 무한 인근의 흑도 녀석들 정리할 때 하도 정문을 박살내고 돌아다녀 버릇해서 그런지 이젠 문만 봐도 절로 때려 부수고 싶어진다.

쾅쾅쾅.

용무린은 점잖게 문을 두들겼다.

잠시 후 문이 열리고 인상만 험악했지 눈치 참 더럽게 없어 보이는 놈 하나가 고개를 내밀었다. 싸가지 없는 말을 툭툭 잘도 뱉었다.

“넌 뭐야 이 새끼야? 감히 여기가 어딘 줄 알고 함부로 문을 두들기고 난리야! 뒈질래?”

당연히 신출내기다. 그렇지 않고서야 벌어질 수 없는 일이다. 죽으려고 환장을 하지 않고서야 감히 용무린에게 저따위 말을 지껄이는 흑도 놈들은 없다. 적어도 무한 인근의 흑도 패거리들에게 있어서 용무린은 밤의 제왕이었다.

피식.

‘몇 달 못 봤다 이거지?’

철퍽. 철퍽. 빠바박.

용무린의 주먹이 번개처럼 몇 번 움직였다.

비명 한 번 지르지 못하고 녀석이 오징어처럼 흐물거렸다. 옆으로 풀썩 쓰러졌다.

“잘 됐네. 수련 진척 확인도 할 겸, 겸사겸사 교육 한번 시키지 뭐.”

콰아앙.

흑야방의 커다란 대문이 그대로 박살이 났다.

한 주먹에 대문을 때려 부수고 안으로 들어선 용무린이 고함을 버럭 질렀다.

“노백인 튀어 나와!”

우르릉.

용무린의 목소리가 우렛소리처럼 길게 메아리쳤다.

“흐흐흐.”

허겁지겁 맨발로 튀어나오는 노백인을 보며 용무린은 싱글벙글 웃었다. 주먹을 꾸욱 말아 쥐었다.

***

오래지 않아 용무린은 흑야방의 가장 깊은 곳에 자리를 잡고 앉을 수 있었다.

그 앞에 눈탱이가 밤탱이가 된 채 침울한 표정을 짓고 있는 노백인과 독사 그리고 용무린에게 복속이 된 흑도문파의 대가리들이 쭉 부복했다.

“그동안 잘들 지냈냐?”

“예, 두목.”

“쓰읍!”

“고, 공자님!”

인상을 한 번 쓰자 독사가 금세 말을 바꾸었다.

풀썩 한 번 웃어 보인 용무린의 말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요새 한가하지?”

그럴 수밖에 없다.

인근의 흑도 패들을 완전히 평정하고 칼같이 규율을 세워둔 덕에 서로 다툴 일 자체가 없어졌으니까.

“모두 다 두목님 덕분…….”

“쓰읍!”

“아니 공자님 덕분입니다.”

“맞습니다. 너무 평화롭고 행복해서 저희들이 정말 이래도 되는 것인지 싶을 정도입니다.”

“안정된 환경 때문인지 일가를 이룬 놈들도 많습니다.”

“홍적로뿐만 아니라 보호비를 반 이상 확 낮추고 볼 때마다 웃고 다니고 어려운 일이 있으면 도와주니 주민들까지 이젠 저희를 보고 웃어주기 시작했습니다.”

씨이익.

용무린이 활짝 웃어 주었다.

‘봐봐! 관리가 되잖아, 관리가…….’

흐뭇했다. 흑도라고 굳이 선입견이 가득한 시선을 보낼 필요가 없는 날이 언제고 올 거다. 더불어 이대로 쭉 가면 앞으로 녀석들은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 줄 것이다.

“내가 전수한 무공들은? 잘 익히고 있어?”

“물론입니다. 죽을힘을 다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공자님! 제 평생 이런 날이 올 줄은 정말……. 앞으로도 목숨 바쳐 공자님을 모실 겁니다.”

“무슨 일이든 시켜만 주십시오, 공자님.”

용무린의 고개가 살짝 끄덕여졌다.

“열심히 해라. 앞으로도 내가 가끔 와서 봐주고 할 테니까 어디 가서 얻어맞고 다니기 싫으면 죽어라고 노력해. 알았지?”

신기하게도 이미 오래 전에 멸문해 사라져버린 유성검문의 절기들이 떠올라 이 녀석들에게 전수했었다. 물론 적절히 하향평준화시켜서 전수했지만 그래도 열심히만 한다면 능히 절정의 수준까지는 오를 수 있는 꽤 좋은 내공심법과 검법들이었다.

“충!”

“존명!”

쿵. 쿵. 쿵.

노백인과 독사를 비롯한 사내들이 바닥에 머리를 세게 찍었다. 나름 충성심을 표현하는 것이었는데 어쩐지 이젠 조금 보기가 그랬다.

“살살해라, 살살. 너희들 이제 뒷골목 양아치들이 아니라니까?!”

“넵!”

“알겠습니다.”

쿵. 쿵. 쿵.

피식.

풀썩 웃어 보인 용무린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말이 튀어 나왔다.

“야! 너희들, 나랑 경극 한 편 찍자.”

“……?!”

“……?!”

무슨 뜻인지 알아듣지 못한 듯 녀석들이 눈이 왕방울만 해졌다. 용무린의 말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주제는 녹림 활극. 어때?”

그제야 말귀를 알아먹은 듯 녀석들의 얼굴에 묘한 미소가 걸렸다.

***

한참을 고민하던 방건은 결국 합비로 가지 않았다. 그 대신 운룡장으로 함께 가려던 벽소추와 함께 열심히 무언가를 쑥덕거렸다.

“거, 정말이지요?”

“그렇다니까? 내가 보기에 용 소협 뒤를 쫓는 것이 합비까지 쫓아가 운룡장 애들 면상에 용모파기 들이미는 것보다는 훨씬 더 재미있을 거야.”

“크크큭. 대체 뭔 짓을 하려고 그러는 걸까요, 그 친구?”

“푸흐흐. 대충 짐작은 가는데, 하여간 너는 어떻게 할래? 너도 같이 갈래?”

“재미있을 거라는데 당연히 가야죠.”

벽소추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답했다.

과거의 진중함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모습, 어쩌면 용무린의 평소 모습에 더 가까운 벽소추를 보며 방건이 환하게 웃어 보였다.

“하여간 내가 이래서 아우를 좋아한다니까?”

“아, 됐고요. 언제 출발할 건데요?”

“조금만 기다려. 운룡표국 애들이 움직이면 용 소협도 바로 움직일 거야. 그때 우리도 움직이자.”

“예, 형님.”

몇 달 함께 지냈다고 정말 쿵짝이 잘 맞는 두 사람이었다.

***

운룡표국의 방침이 정해진 모양이었다.

이번 상행의 표두 운위상이 관도를 돌며 큰 소리로 외치고 다녔다.

“운룡표국의 표두 운위상이오. 쟁자수와 짐꾼과 마부들을 모집하려 하오. 원하는 사람 어디 없소?”

운룡표국이란 말에 사람들이 곧 관심을 보였다.

먹고 살기 힘든 시절 아닌가?

이내 우르르 몰려나와 운위상 앞에 진을 치고 말을 들었다. 운위상이 목소리를 높였다.

“신체만 건강하면 누구든 상관없소. 삯은 넉넉히 줄 터이니 합비까지 쟁자수와 짐꾼으로 동행하실 분들은 오시오. 운룡표국에 남아 계속해서 일할 수도 있소이다.”

“오오, 운룡표국에 남도록 해줄 수도 있다고?”

“그건 조금 끌리는데?”

“맞아. 저 깃발 좀 봐. 운룡표국이라면 그래도 신주오가의 하나인 운룡장이 운영하는 표국이잖아. 그런 곳에 남을 수도 있다면 정말 괜찮은 조건인거지.”

“이번 기회에 터전을 옮겨 봐?”

사내들이 웅성거리가 시작했다. 하나 둘씩 나섰다.

운룡표국이 원하던 숫자의 쟁자수와 짐꾼들은 불과 이틀 만에 다 채워졌다.

***

사흘 후 효감현 어귀.

“여어, 용 소협!”

“어서 와 친구야!”

이레 전 상관엽의 목을 베었던 바로 그 자리에 진을 치고 기다리고 있던 방건과 벽소추가 활짝 웃는 얼굴로 용무린을 반겼다.

“뭐야? 두 사람이 왜 여기 있는 건데?”

“뭐긴 뭐겠어? 혼자만 재미 보러 가게 놔둘 수 없어서 그러는 게지.”

“뭐라고?”

용무린의 입이 쩍 벌어졌다.

“용 소협. 거 너무 까칠하게 굴지 맙시다. 재미있는 일이 있으면 함께 해야지 혼자서만 재미를 보면 되겠소?”

“맞아. 이번엔 함께 하자.”

“방 조장님. 내가 지금 뭘 하려는 것인지 알고나 하는 소립니까? 야, 벽소추. 너 대체 어쩌려고 그러는 건데? 지금 네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고는 있는 거냐?”

“당연하지. 그럼 그걸 모를까?”

벽소추의 시선이 방건에게로 향했다.

아무래도 방건에게 무슨 이야기를 들은 모양이었다.

절대로 떼어 놓고 갈 생각하지 말라는 듯 방건이 결연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흑야방의 노백인과 독사가 인근 여덟 개 흑도방파의 애들 몽땅 움직인 걸 다 확인했소이다, 용 소협. 원금이 상관세가라면 이자는 어디겠소? 당연히 운룡장이 아니오?”

하여간 여시코빼기다.

‘젠장. 누가 개방 아니랄까봐 눈치 하난 정말 더럽게 빠르구나.’

이자 이야기도 하지 말 것을 공연히 했다고 용무린이 후회하는 사이 방건이 자신만만하게 말을 이었다.

“우리 긴 말 하지 맙시다. 운룡표국이 비단과 도자기를 잔뜩 싣고 새벽에 떠난 걸 다 안단 말입니다.”

“나도 껴주라, 친구야.”

벽소추까지 한 다리 걸쳤다.

피식.

용무린은 결국 웃을 수밖에 없었다.

“다음엔 절대로 입방정 떨지 말아야지.”

“우하하. 너무 그러지 마시오, 용 소협. 나 방건 이래봬도 개방에서는 꽤 고급 인력이란 말이오.”

“나도 마찬가지요, 성님.”

“오, 그래. 벽 아우 역시 고급 인력이지 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용무린은 다짐을 해두었다.

“하여간 본신 무공 쓰다 걸리기만 해 봐요.”

“염려 마시오, 용 소협. 내 소싯적에 배워둔 재간이 그래도 꽤 있다오.”

“염려 마 친구야. 그동안 실전 비무를 하도 많이 했더니 이젠 따로 초식을 펼치지 않았어도 도 끝이 마음먹은 대로 움직이더라.”

그동안 스스로를 옭아매던 굴레를 벗어났다는 뜻!

‘작정하고 벽력도가의 절기를 펼치면 상대가 누가 되었든 가문의 이름에 먹칠은 하지 않겠구나.’

어른들께서 보시면 자랑스러워할 게 틀림없다.

어지간한 절정의 고수라 해도 능히 상대할 수 있을 거다.

“알았다. 그동안 수고했다. 다음에 시간 봐서 나랑 한 번 붙어보자.”

“너, 지금 내가 너 따라붙었다고 일부러 붙어보자고 그러는 거지? 쥐어 패려고?”

“아니?! 그냥 네가 많이 발전한 듯해서 그러는 건데?”

“그럼 좋아. 시간 봐서 함 붙자. 대신 조금만 살살 하자. 알지?”

“살살은 개뿔. 그래서 어디 수련이 되겠냐? 안 돼. 제대로 할 거야.”

“야아, 무린아. 살살. 응? 살사-알.”

벽소추가 엄살을 다 떨었다.

붙기만 하면 언제나 박살이 나다보니 용무린과 붙는다는 생각만 해도 절로 몸이 굳나보다.

“오! 용 소협. 좋은 말씀이오. 나와도 한 번 붙어봅시다, 어떻소?”

“좋지요. 하지만 내 친구가 먼저입니다.”

“알았으니까 살살 좀 하자고.”

“싫어. 계속해서 살살 하잔 소리 할 거면 그냥 돌아가. 필요 없어.”

“아이 씨, 모르겠다. 그래, 죽여라 죽여.”

“크크큭.”

“젠장. 이럴 줄 알았으면 백리천월 그 인간도 함께 오자고 할 것을…….”

“걔는 아직도 자기 방에만 틀어박혀 있어?”

“아니? 뭣 때문인지는 모르겠는데, 얼굴이 하얗게 질려가지고선 집으로 돌아간다고 하던데? 뭐, 듣기로는 폐관수련에 들 작정이라고 하는 것 같기도 하고. 에혀, 내가 지금 누굴 걱정하는 거람? 무린아. 살살 좀 하자. 알았지?”

“시끄럿. 싫으면 그냥 돌아가.”

“염병. 독한 놈 같으니…….”

“용 소협. 내게는 마음껏 거칠게 해주시오. 나는 거친 게 매우 좋소.”

“푸흐흐. 후회나 하지 마요.”

세 사람은 그렇게 쉴 세 없이 떠들어대며 동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동쪽 지평선 끝자락에 운룡표국의 표행 행렬이 보이기 시작했다.

***

부들부들.

상관초웅의 전신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도무지 눈앞의 현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어, 어떻게…….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상관혁련까지는 그래도 이해할 수 있었다.

세가가 자랑하는 초절정의 무인이긴 하지만 오랫동안 생사결 다운 생사결도 벌이지 않았었고 그 경지 역시 연공실에서 만들어진 것이었으니까.

그런데 상관엽의 죽음이라니!

‘용무린 따위 애송이의 손에 허무하게 가실 분이 절대로 아닌데 도대체 어떻게?!’

상관엽은 그야말로 백전의 고수.

그 막강한 내공과 경험에서 비롯된 임기응변 능력을 생각하면 저 소림의 장생전 고수라 하여도 능히 이겨낼 수 있다고 자부하던 가문의 자랑이 아니었던가?

“저를 죽여주십시오, 가주시여.”

상관엽이 오라 했던 시간에 맞추어 왔을 때는 이미 모든 것이 끝나 있었음에도 부일기는 계속 죄를 청했다.

“미리 주변에 도착해 자리를 지키고 있었어야 했습니다. 제가 한 일이라곤 겨우 태상장로님의 유해를 수습한 후 주변의 흔적을 지운 것뿐입니다. 크흐흑.”

1장로 부일기가 오체투지를 한 후 울부짖었다.

쿵. 쿵. 쿵.

계속해서 머리를 바닥에 찍었다.

“……!”

상관초웅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마령전사들의 숫자가 무려 350여 명이나 되었어. 백리세가나 벽력도가라 할지라도 하룻밤 사이에 쓸어버릴 수 있는 전력이었단 말이야.’

마령전사들의 능력을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다.

영단으로 속여 복용시킨 마령단과 마교 대법에 의해 이지를 상실한 그들은 팔다리가 잘려 나가도 가슴에 구멍이 뻥 뚫린다 해도 멈추지 않는다.

‘아무것도 모른 체 그런 놈들의 공격을 받는다면 속절없이 무너질 수밖에 없단 말이지. 죽인 줄 알고 돌아섰는데 갑자기 공격을 해오면 어떻게 당하겠어?’

그런데 쓸어버리긴커녕 되레 몰살을 당했다.

거기에 더해 무림맹에 들렀다가 합류한 음양자의 두 제자가 이번에도 역시 유명을 달리했다. 도대체가 어떻게 해야 그런 결과가 나올 수 있는지 상상도 가지 않았고 믿어지지도 않았다.

“소, 손 대주는? 손 대주는 지금 어디 있느냐?”

“비상연락망을 통해 겨우 소식을 전해 왔습니다. 혹여 개방에 꼬리를 밟힐까 두려워 다른 곳으로 먼저 향했다고 합니다.”

“그의 부상 정도는?”

“그, 그것은 저도 잘…….”

꿈틀.

상관초웅의 눈두덩이 거칠게 움직였다.

‘이놈! 싸우지도 아니하고 도주한 게로구나.’

단숨에 상황을 짐작해 냈다.

왜냐하면 무한의 외곽에서 처음 용무린 그 애송이와 맞닥뜨렸을 때와 양육장에서 마주쳤을 때는 구구절절 자신이 입은 피해 상황까지 늘어놓았기 때문이었다.

‘겁을 집어먹은 게야.’

자신의 숙부 상관엽은 끝까지 싸우다 장렬히 죽었는데 감히 싸워보지도 아니하고 도주를 하다니!

‘다른 곳으로 먼저 간다고? 흥, 네놈이 갈 곳이야 빤하지. 바로 불회곡이렸다?’

상황이 이 지경까지 되었는데 저 혼자 살겠다고?

어림 반 푼 어치도 없는 일이다.

상관초웅은 즉시 지필묵을 챙겨 무엇인가를 썼다. 그런 후 흑수리를 찾아 발목에 매달고 그대로 날렸다.

“가라! 가서 알려라.”

그제야 속이 조금 시원해졌다.

놈이 진정 불회곡을 찾는다면, 감히 혼자 살겠다고 도주를 한 것에 대한 합당한 대가를 받게 될 것이다.

‘그나저나 일이 난감하게 되었군.’

상관초웅의 머리가 무섭게 회전했다.

상관엽이 죽었다는 것은 곧 마지막 힘까지 펼쳤는데도 그렇게 됐다고 봐야 한다.

‘그 애송이 실력이 예상보다 뛰어나다고 그냥 고이 죽어줄 분은 아니니까.’

그렇다면 용무린 그 애송이는 축융마공에 대한 것을 틀림없이 보고를 할 것이다. 정체는 모르겠지만 후광처럼 일렁이는 검은 내력의 불꽃에 대한 말 정도는 할 것이다.

‘이미 마공을 익힌 미지의 세력이 비룡문을 노린다고 보고를 했어. 무한의 외곽에서도 싸웠고 양육장 인근에서는 음양자의 제자들도 잡았고 말이야.’

그 모든 보고들과 함께 상관엽에 대한 보고까지 흘러들어간다면 무림맹에서 가만히 있지는 않을 것이다.

‘별 수 없다. 이제는 내가 직접 나서는 수밖에.’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소림과 개방이 무림맹을 움직여 상관세가로 직접 마공의 유무를 확인하러 올지도 모르는 일이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내게까지 확인하려 들면 그야말로 큰일이지.’

감히 상관세가의 가주인 자신에게까지 그렇게 무리한 요구를 할 확률은 적지만 그렇다고 넋 놓고 기다릴 수만은 없는 일이다.

“상관웅 그 아이와 폐관수련에 들겠소이다. 지금 즉시 가문의 비처로 갈 것이오.”

“예에? 이런 시기에 말씀입니까?”

1장로 부일기가 화들짝 놀라 물었지만 상관초웅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세가의 모든 일을 당분간 부 장로에게 위임하겠소이다. 직계를 비롯한 모든 이들에게 알아듣게 말해두고 갈 터이니 부 장로는 그저 지키기만 하시오.”

“…….”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던 상관초웅이 다시 몇 마디를 덧붙였다.

“혹여 무림맹의 위세를 빌어 소림이나 개방이 세가로 진격해 온다 해도 걱정할 것은 없을 것이외다. 내가 알아서 조치를 취해 놓을 것이오.”

“알겠습니다, 가주님.”

상관초웅은 그대로 몸을 돌렸다.

이제야 겨우 조금씩 운신이 가능해진 상관웅의 방으로 움직여 갔다.

벌컥.

문을 열고 들어서니 핼쑥한 얼굴로 고개를 처박고 있는 상관웅의 모습이 보였다.

꿈틀.

‘이런 머저리 같은 놈!’

정말이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떻게 하든 털고 일어나 밤낮으로 수련을 해 자신을 짓밟은 놈들에게 받은 만큼 되돌려 줄 생각은 하지도 않고 저렇듯 고개를 처박고 있는 모습이라니!

“아, 아버지.”

상관초웅은 대답하지 않았다. 더더욱 싸늘한 시선으로 노려 볼 뿐이었다. 덕분에 그렇지 않아도 잔뜩 풀이 죽어 있던 상관웅의 자신감은 다시 한 번 바닥까지 떨어졌다.

상관초웅의 입에서 얼음장 같은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참이더냐?”

“…….”

“너를 그렇게 만든 놈들에게 열 배 백배로 되돌려 줄 생각이 있기는 한 것이더냐?”

“그, 그거야 당연히…….”

말해 무엇 하겠나?

돌려주고 싶다. 상관초웅의 말처럼 열 배 백배 아니 그 이상으로 돌려주고 싶어 미치겠다. 비룡문, 용무린, 제갈세가, 아니 이 세상 전체를 깡그리 활활 불태워 버리고 싶어 돌아버릴 지경이다.

“허면, 너는 대체 무얼 하고 있는 것이냐? 당장 일어나거라. 어서!”

“일어나서 무얼 합니까? 제게는 용무린 그 개자식과 같은 재능이 없단 말입니다!”

숨죽인 채 고개를 숙이고 있던 상관웅이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고함을 버럭 질렀다. 어디서 난 용기인지 눈빛만으로도 자신을 주눅 들게 만들던 아버지 상관초웅의 눈을 똑바로 노려보기까지 했다.

“큿. 좋아, 바로 그 눈빛이야.”

“…….”

“다시 한 번 묻겠다. 너를 그렇게 만든 놈들에게 열 배 백배로 되돌려 줄 생각이 있느냐?”

“물론입니다. 할 수만 있다면 백 배 아니 천배로 되돌려 주고 싶습니다. 용무린 그 개자식과 비룡문 그리고 제갈세가를 짓밟을 수만 있다면 마구니에게 영혼이라도 팔 자신이 있단 말입니다.”

상관웅이 울부짖듯 고함을 질렀다.

씨익.

상관초웅의 입꼬리가 길게 위를 향해 말려 올라갔다. 한마디 툭 던졌다.

“가자!”

“……?!”

“복수의 길을 열어 주겠다. 감히 그 누구도 범접하지 못하는 대지로 너를 데리고 가 이 세상에 파멸을 내리는 선봉장이 되게 할 것이다.”

스윽.

상관초웅의 손이 슬쩍 내밀어졌다.

“나와 함께 가겠느냐?”

상관웅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걸렸다.

‘끝까지 아버지라는 말씀은 하지 않으시는구나.’

철이 들고 난 이후, 장남인 상관옥린에게만 따뜻한 아버지였을 뿐 차남인 자신에게는 언제나 타인처럼 차갑게만 대했다.

‘그래도 좋아. 나와 함께 가자고 하시잖아.’

정말 얼마 만에 느껴보는 아버지의 애정인지!

“물론입니다, 아버지.”

그곳이 지옥이라 해도 갈 것이다.

‘가서 인정받겠다. 나도 당신의 당당한 아들이라는 것을.’

그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인지 상관초웅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말이 흘러 나왔다.

“가자, 아들아.”

울컥.

심장 저 깊은 곳에서부터 치솟아 오르는 그 무엇인가에 상관웅은 아픔도 잊은 채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예, 아버지.”

두 사람은 그렇게 상관세가를 벗어났다.

알 수 없는 어딘가를 향해 머나 먼 길을 떠났다.

***

호북성과 안휘성의 경계에 자리한 태령산 어귀.

“모두들 힘을 내라! 이 산만 넘으면 화북평원이다.”

“고생이 다 끝나간다. 저 산 허리만 돌아 내려가면 그때부터는 평지다.”

“예, 표사 나리.”

“이랴, 어서 가자.”

쟁자수와 짐꾼들의 표정이 확연히 밝아졌다.

화북평원부터는 그야말로 편한 길의 연속, 녹림이 둥지를 틀 만큼 큰 산도 없으며 성도까지 쭉 관도만 타고 이동하면 되기 때문이었다.

“산을 내려가면 나오는 첫 마을에서 묵을 것이다.”

“그간 고생했으니 오늘 밤은 특별히 음주를 허락하겠다. 마음껏 마시도록!”

“우오오!”

“와아아! 감사합니다, 표두님!”

모두가 좋아 환호성을 지를 때였다.

“멈추어라!”

지극히 창의력 없는 외침과 함께 수백여 명에 달하는 거친 인상의 사내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순식간에 행렬을 둘러 싸 버렸다.

“녹림?”

“그럴 리 없습니다. 이곳 태령산은 녹림이 없는 곳이질 않습니까?”

“없긴 뭐가 없어? 그럼 쟤들은 뭔데?”

운위상이 인상을 잔뜩 긁었다.

튀어 나온 사내들은 누가 봐도 녹림의 무리였던 거다.

하나 같이 험상궂은 얼굴들, 수염은 덥수룩했으며 얼굴에 칼자국 두어 개쯤은 기본이요 손에는 철퇴며 도끼 대감도와 같은 전형적인 산적들의 무기들이 들려 있었다.

“크하하하!”

“없는 것 빼놓고 다 내놓아라!”

“어떤 놈이 대가리냐? 냉큼 나서서 나 탁탑천왕 앞에 머리를 조아리지 못하겠느냐?”

저 창의력 따윈 전혀 없는 산적스러운 대사라니!

게다가 별호는 또 어떻고?

‘탁탑천왕? 나 원 참 기가 막혀서.’

피식.

표사 운위상의 입꼬리가 슬쩍 위를 향해 말려 올라갔다.

“거, 탁탑천왕께선 어째서 얼굴이 그렇소?”

“오다가 넘어지셨소? 눈탱이는 밤탱이에 여기저기 터지고 부어 있는 것이 꽤 볼만하오!”

“하하하.”

“크크큭.”

곁을 지키던 표사들이 모두 웃음을 터뜨렸다.

사실 그럴 법도 했다.

무엇 때문인지는 몰라도 탁탑천왕의 얼굴이 정말 가관이었던 거다.

누구에게 얼마나 심하게 구타를 당한 것인지 눈 하나는 밤탱이가 되어 있었고 터진 입술조차 아직 채 아물지 않았으며 반대쪽 얼굴도 빵빵하게 부풀어 있었다.

꾸깃.

탁탑천왕의 인상이 잔뜩 구겨졌다. 뒤늦은 후회를 했다.

‘제길. 내가 왜 용 소협에게 그렇게 들이댔을까?’

그랬다. 탁탑천왕이라 밝힌 텁석부리 수염의 사내는 바로 개방의 방건이었다. 말총을 아교로 붙여 가짜 수염을 만든 대다 어젯밤 비무를 빙자한 구타에 눈과 얼굴 곳곳이 멍들고 띵띵 부어 이상하게 보일 뿐이다.

“니들이 비무가 뭔지 않아?!”

곁에 있던 비슷한 처지의 벽소추가 대신 성질을 버럭 냈다. 동병상련인 것이다. 벽소추 역시 간밤의 비무로 방건 못지않게 심각한 얼굴이었다. 벽력도가의 가주가 앞에 있어도 자신의 아들을 못 알아볼 지경이었다.

“콱 다 불을 싸질러 버리기 전에 대가리 튀어 나와! 알았어, 몰랐어?”

꿈틀.

운위상의 눈매가 싸늘해졌다.

곁에 있던 표사가 나직하게 의견을 냈다.

“칠까요?”

잠자코 가늠하던 운위상의 고개가 슬쩍 가로 저어졌다.

“아니다. 그냥 몇 푼 집어주고 가자.”

“어째서……?”

“숫자가 많다. 우리가 비록 무공에서는 우위를 차지하겠지만 쟁자수와 마부와 짐꾼들은 그냥 무한의 양민에 불과하지 않더냐?”

예정과 달리 돌아오지 않는 쟁자수와 짐꾼과 마부가 이때만큼 아쉬울 수가 없다. 그들만 있었다면 아무 걱정할 필요 없이 저 산적들을 싹 다 죽여 버린 후 길을 떠났을 거다.

“하긴, 그도 그렇습니다.”

“이겨도 우리가 손해다. 앞으로를 위해서도 이번 표행은 무탈하게 마쳐야 하지 않느냐?”

“알겠습니다, 표두님.”

대화를 마친 운위상이 앞으로 성큼 나섰다.

품속에서 작은 주머니 하나를 꺼내 들었다. 목소리를 높였다.

“여기 은자가 있소. 많지는 않지만 녹림의 영웅들께서 한동안 술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게요.”

휙. 절그럭.

운위상이 주머니를 던졌다. 탁탑천왕 아니 방건의 발 앞에 뚝 떨어졌다.

‘어라? 이게 아닌데?’

방건은 살짝 당황했다.

시비를 걸면 무턱대고 덤벼들 줄 알았다. 그때 대뜸 달려들어 운룡장 놈들만 골라 패줄 생각이었는데 은자를 먼저 주니 뭐라고 할 말이 없었던 것이다.

경험 부족인 셈이다.

“돈 낸 놈만 자기 물건 가지고 가!”

숲 속에서 누군가가 어슬렁거리며 나타났다.

그때까지 지켜만 보고 있던 용무린의 등장이었다.

역시 아교로 붙인 말총 수염에 어디서 구했는지 안대 하나를 떡 하니 차고 있는 용무린의 모습은 녹림보다는 해적에 더 가까워 보였다.

“그게 무슨 말씀이오?”

“무슨 말은? 돈 낸 놈만 자기 물건 챙겨서 가라고 인마. 그 말이 그렇게 어려워?”

“……?!”

운위상의 눈매가 싸늘해졌다.

그의 반응 따윈 아무래도 좋다는 듯 용무린은 계속해서 하고픈 말을 쏟아냈다.

“한 놈 당 은자가……. 보자, 이게 대체 얼마냐?”

용무린은 운위상이 던졌던 주머니를 들고 살짝 던졌다 받으며 가늠을 했다.

“그래, 은자 삼십 냥 정도 되는구나. 하여간 삼십 냥이다. 그거 내고 자기 짐 챙겨서 가. 됐지?”

명백한 시비다.

‘돈 따위가 목적이 아닌 게로구나.’

반짝.

운위상의 눈에 섬뜩한 빛이 튀었다.

“지금 운룡장에 시비를 걸고 있는 것이더냐?”

피식.

“시비는 개뿔, 우린 그냥 영업 중이야 인마-앗.”

휘슷.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용무린이 달려들었다.

“권주를 마다하고 벌주를 택하다니! 이노-옴!”

본인 역시 식상한 대사를 남발하고 있음을 모르는 채 운위상이 말 등을 박차고 훌쩍 몸을 띄웠다. 내공을 한 차례 휘돌려 두 손에 운집했다. 운룡장의 자랑 중 하나인 산화장법을 펼치려는 그 순간,

스파앙. 뻐어억.

순간적으로 공간을 훅 좁힌 용무린의 주먹이 단전 어림에 작살처럼 꽂혔다.

“커헉!”

“야 이 새끼야!”

퍼억. 퍼버버벅.

“크악. 우욱. 컥!”

“벌주고 나발이고 빨리 돈 내놔. 돈.”

빠악. 뻐어억. 퍼버버벅.

아직 땅에 떨어지기도 전인데 몇 대나 맞는 것인가?

“우와. 저 자식 공중부양술 익혔나 보다. 점점 더 공중으로 떠오른다.”

“형님도 참 무식하게 공중부양술이 뭐요? 능공허도라고 해야지.”

방건과 벽소추가 신기한 장면을 보며 한마디씩 떠들 때였다. 멍하니 지켜만 보고 있던 운룡표국의 표사들이 거의 동시에 공격을 개시했다.

“표두님!”

“이런 악독한 놈!”

“죽어라-앗!”

후웅. 후웅. 파아앗. 쉬가가각.

하나 같이 용무린의 등을 노렸다.

운룡장 출신 표사들은 장법을 펼쳤고 표국 사업을 위해 새로 모집한 고수들은 제각기 검과 도를 꺼내 휘둘렀다.

“꺼져랏!”

터어엉.

운위상의 턱이 홱 돌아갔다. 저만큼 훌훌 날아가 툭 떨어졌다.

“다 덤벼 이 새끼들아!”

휘리릭.

운위상을 걷어찬 탄력으로 몸을 휘돌린 용무린이 먹잇감들을 향해 뚝 떨어져 내렸다.

“아까 내 눈 보고 비웃은 새끼 나와!”

“저기 저 새낍니다, 형님.”

후욱.

벽소추가 훌쩍 먼저 놈을 향해 움직였다.

“야 인마. 그건 내꺼야!”

“네 꺼 내 꺼가 어디 있습니까? 차아아.”

패애액.

벽소추의 손에 들린 철퇴가 도법의 경로를 따라 춤을 추듯 사위를 휘감기 시작했다.

퍼억. 퍼버버버벅.

“우왁!”

“크아아악!”

운룡표국 표사들의 입에서 곡소리가 길게 흘러나왔다.

“이야호-오!”

“에라 모르겠다. 우리도 끼자!”

“비무라고 생각하자. 안전하게 한 놈 당 열 놈씩만 달라붙자고!”

“좋았어. 우리 체질엔 역시 다구리가 맞는다니까?”

“끼야아-호!”

노백인과 독사 그리고 무한인근의 흑도를 주름잡는 대가리들이 앞을 다투어 표사들을 덮쳤다. 그 뒤를 따라 산적으로 분장한 흑도의 왈패들이 파도처럼 들이닥쳤다.

“이, 이놈들이!”

“막아라!”

“차아앗!”

표사들이 뒤늦게 대응을 했지만 역시 중과부적이었다.

표두를 비롯해 조장급 표사들이 용무린과 방건 그리고 벽소추의 손에 박살이 나버린 탓이었다. 아무도 그들을 막을 수 없었다.

퍼버버벅. 빠악. 뻐어억.

매타작 소리가 반 시진정도 이어졌다.

“끄응.”

“허으으.”

“크흑.”

표두 운위상을 포함한 운룡표국의 표사 35명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바닥을 굴렀다. 모두 죽지는 않았지만 다 낫는다고 해도 두 번 다시 무공을 익힐 수는 없을 것이다.

***

운룡장이 발칵 뒤집혔다.

직계식솔인 운위상까지 포함되어 있는 표사들이 깡그리 반병신이 되어 돌아온 것은 물론이요 막대한 양의 표물까지 몽땅 털렸기 때문이었다.

“대체 어디냐? 어떤 놈들이 감히!”

“아직 그걸 모르겠습니다, 장주님. 지금 파악 중입니다.”

“정신을 차린 놈들은 알 것 아니더냐?”

“그게 녹림이라는 것만 알지 어느 산채인 줄은 아직 파악이 되지 않았습니다.”

“뭐야?”

“태령산 어귀에서 당했다고 하는데, 그 산에는 녹림의 산채가 아예 없습니다.”

“……!”

운룡장주의 입이 쩍 벌어졌다.

태령산 어귀에 녹림의 세력이 없음을 자신 역시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체를 모르기에 표물을 찾을 방법이 없습니다, 장주님.”

“빌어먹을!”

윤룡장주의 입에서 불쑥 욕이 튀어 나왔다.

그만큼 자제력을 잃었다는 뜻이었다.

“대책을 마련해야만 합니다. 이대로는 손해가 너무 막심합니다. 아시다시피 이번 표물은 만금상단의 물건들, 그 중 황궁과 고관들에게 납품할 귀금속들이 들어 있습니다. 나머지 비단들이야 본가의 비축분들을 탈탈 털어내면 메꾸는 것이 가능하다지만 귀금속들은 답이 없습니다.”

“모두 얼마치였지?”

“황금으로 따져 열 관입니다, 장주님.”

철렁!

운룡장주의 심장이 밑으로 뚝 떨어졌다 겨우 되돌아왔다.

황금 열 관.

주먹만 한 크기의 금자 10개를 녹여 금괴로 만들고 그 금괴 10개를 모은 것이 바로 황금 1관이니 10관이라면 얼마만큼 큰 금액인지 상상이 가리라.

“황금 열 관! 그, 그렇다면 배상액은?”

“…….”

총관이 입을 다물었다.

배상액은 통상 손해액의 두 배 정도니 굳이 입을 열어 말할 필요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차, 찾아라. 어떤 놈들인지 반드시 찾아라!”

“예, 장주님.”

운룡장주는 바쁜 걸음으로 되돌아 나가는 총관의 뒤에 대고 다시 크게 외쳤다.

“직계와 방계를 가리지 말고 깡그리 움직이라고 해! 무조건 찾아, 무조건!”

“알겠습니다, 장주님.”

아드득.

운룡장주가 거칠게 이를 갈았다.

“어떤 놈들인지 반드시 잡아 죽인다, 반드시.”

도둑맞은 만금상단의 귀금속 표물 역시 기필코 찾아낼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운룡장은 이대로 배상금의 무게에 짓눌려 날개가 완전히 꺾여버릴 테니까…….

‘정상적인 표국인 것처럼 보이기 위해 일부러 무리를 해서 만금상단의 물건을 선택했거늘.’

무한으로 향했던 표행은 어차피 상관세가를 돕기 위한 가짜였으므로 아무래도 좋았지만 돌아올 때는 아니었다.

미래를 위해서는 표국업을 어느 정도 궤도에 올려야 했기에 복귀할 때만이라도 든든한 상단의 표물을 잡아야만 했던 것인데 완전히 독이 되었다.

***

그 시간 강소성 포양호 인근의 안의현.

방건을 길잡이로 세워 산길을 돌고 돌아 들고 온 표물들이 현청 앞 공터에 모두 쌓였다. 포양호의 범람으로 인해 삶의 터전을 잃은 십여 만 호의 양민들을 위한 익명의 기증이었는데 그 양이 실로 놀라웠다.

“이, 이게 대체…….”

한걸음에 달려 나온 현령의 입이 쩍 벌어졌다.

그로서도 처음 보는 막대한 양의 물자와 귀금속들은 두렵기까지 할 정도로 많았던 것이다.

“여, 여기 서신이 남겨져 있습니다.”

“서신? 어서 가져 오너라, 어서.”

현령이 서신을 펼쳐 읽었다.

그 안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수해를 입은 양민들을 위해 써 주시기 바랍니다.

부디, 현령께서 탐관이 아니길 기원합니다.

이 안의 기증품들은 쌀 한 톨까지 그 정확한 양을 내가 알고 있습니다. 양민들에게 돌아가는 내역이 얼마인지 끝까지 지켜볼 생각입니다.

오싹!

현령의 전신에 소름이 쫙 돋았다.

하룻밤 사이 몰래 들어와 현청 앞에 이 정도의 물건을 흔쾌히 기증하고 사라질 정도의 세력이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본다고 생각하니 오금이 다 저렸다.

‘걱정할 것 없다. 나만 잘하면 되는 거야.’

어차피 수해극복을 잘 하면 북경으로의 영전은 따 놓은 당상이 아니겠는가? 양민들에게 칭송도 받고 영전도 할 수 있으니 꿩도 먹고 알도 먹는 격이다.

“현승(보좌관)은 도대체 무얼 하고 있는 게냐? 어서 빨리 기증품들을 분류하고 양민들에게 즉시 나눠줄 것과 팔아서 양곡으로 바꿀 것을 분류해라.”

“예, 알겠습니다.”

현청에 활기가 돌았다.

그 활기가 비탄에 잠겨 있던 안의현 인근의 양민들에게 번져가기 시작했다.

***

모든 일을 깔끔하게 마치고 돌아오는 길.

“참 대단하시오. 그 많은 물건을 어떻게 처리하나 싶었는데……. 이 방모, 아주 감탄했소이다.”

방건이 혀를 내둘렀다.

피식.

용무린은 가볍게 한 번 웃고 말았다.

곁에 있던 벽소추가 대신해서 목소리를 높였다.

“크크큭. 현령이랑 현승 눈 튀어나온 것 봤습니까, 형님?”

“당연하지. 그런데 나는 눈 튀어나온 모습보다 침을 꼴깍 꼴깍 삼키더니 서신을 읽고 돌변하는 게 더 웃겼다.”

피식.

“하긴, 그거 안 써두고 왔으면 놈이 착복할 수도 있었겠지요?”

“당연하지. 혼자 꿀꺽한 후 귀금속들은 뇌물로 바쳐졌을걸? 양민들에겐 쌀 댓 바가지나 돌아갔겠지 뭐.”

그럴 가능성이 정말 컸다.

하지만 서신으로 경고를 남겼으니 그렇게는 할 수 없을 것이다.

‘후환이 두렵다면 잘해야 할 거야. 아니라면 야밤에 곡소리 좀 날 테니까 말이야.’

수해를 입은 양민들 숫자와 소문만 조금 취합하면 대략적인 것을 알 수 있다. 그 정도면 충분하다. 어느 정도 착복하는 것이야 눈감아 줄 수 있는 일이지만 정도가 넘었다면 직접 움직일 생각이었다.

“그나저나 용 소협. 이젠 무얼 할 생각이시오?”

씨이익.

활짝 웃어 보인 용무린의 입에서 개구쟁이와 같은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이자를 갚았으면 이제 원금을 갚을 차례 아닌가요?”

피식.

뭔가 알 것 같다는 듯 방건과 벽소추가 비슷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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