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마귀환 4권
서경 신무협 소설
1.반드시 해야만 할 일
용무린은 알 듯 말 듯 의미심장한 말을 쏟아냈다.
“공짜를 좋아하긴 하지만 먹고 얹힐 거라면 아예 안 먹는 게 더 낫지요.”
“응?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건가?”
총관 사마중극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무슨 말이긴요? 말 그대로지요.”
“크흠.”
사마중극의 눈매가 가느다래졌다.
“야, 이 녀석아. 호의에 반응이 왜 그래?”
“내공이 그만큼이나 되시는 분께서 기혈 보충이 따로 필요하셔서 그래요?”
“이 녀석이 정말! 내가 그깟 좋은 차가 탐이 나 그러는 걸로 보이냐?”
화운장로가 고함을 버럭 질렀다.
물론 용무린의 태도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러면 장로님도 마시지 마세요. 그 차 마시면 저와의 관계는 그것으로 끝이라는 것만 염두에 두시고요.”
“……?!”
그제야 뭔가 이상한 것을 느꼈는지 화운장로도 더는 나서지 않았다.
‘저 빌어먹을 자식이 쥐꼬리만 한 명성 좀 있다고 사람을 우습게 보는군.’
속이 부글부글 끓었지만 사마중극은 역시 무림맹의 총관답게 행동했다. 호탕하게 웃으며 자신의 찻잔을 들었다. 입에 가져갔다.
“하하하. 호의로 준비한 귀한 차가 이런 대접을 받을 줄이야…….”
사마중극의 시선이 화운장로에게 향했다.
“귀한 차니 나라도 마시겠소이다.”
마치 의심을 풀어주겠다는 듯 호기롭게 차를 들이켰다.
용무린의 입꼬리가 슬쩍 위로 말려 올라갔다.
“차도 다 마셨겠다, 뭐 더 할 말 있나요?”
“……?”
뭐 저런 놈이 다 있느냐는 듯 사마중극의 입이 쩍 벌어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용무린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버렸다.
“할 말 없으면 그만 가보겠습니다. 맹주님이 기다린다고 하셔서 말이죠. 장로님! 뭐 해요? 어서 일어나요.”
“응? 으응.”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겠다는 듯 화운장로가 부스스 따라 일어났다.
“네가 정녕 하늘 높은 줄을 모르는구나!”
자존심이 상할 대로 상한 사마중극이 으르렁댔다.
그 눈을 마주 쏘아보며 용무린이 빈정댔다.
“왜? 지금 보여 주시게?”
용무린의 말이 대뜸 짧아졌다.
“……!”
“……!”
침묵과 함께 두 사람의 눈싸움이 계속되었다.
반짝 반짝.
용무린의 눈에서 점점 더 강렬한 빛이 쏟아졌다. 여차하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검을 뽑아 목을 날려 버릴 수 있으리란 기백이 그 안에 담겨 있었다.
“크흠.”
결국 사마중극이 먼저 꼬리를 내렸다. 나직한 침음과 함께 용무린의 시선을 피했다.
피식.
풀썩 웃어 보인 용무린은 그대로 밖으로 나섰다.
“후우.”
길게 한숨을 한 번 내쉰 화운장로가 그 뒤를 따랐다. 못 말리겠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득.
총관 사마중극의 입에서 섬뜩한 파열음이 흘러 나왔다.
“시건방진 애송이 놈! 비룡문이 멸문을 하게 된다면 그 원인에 네 하룻강아지 같은 태도가 한 몫 단단히 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사마중극의 입에서 가당치도 않은 말이 튀어나왔는지도 모르는 채 용무린은 맹주부를 향해 가고 있었다.
“야 이 녀석아! 대체 왜 그런 거냐?”
“뭐가요?”
“뭐긴 뭐야 인석아! 총관 만나는 자리에서 대체 왜 그렇게 행동했냐고?”
잠시 침묵했던 용무린의 입이 무겁게 열렸다.
“……그 차.”
“차?”
“예. 그 차, 뭔가 이상했어요.”
“염병, 향만 좋더구만……. 왜? 독이라도 탔을까 봐?”
어이가 없다는 듯 다그치는 화운장로를 보며 용무린은 그냥 슬쩍 웃고 말았다. 더는 그런 실수를 하지 못하게 교육시키겠다는 듯 화운장로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네 말과 행동이 실례를 넘어 아주 무서운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야지, 인석아. 여긴 무림맹이고 차를 대접했던 사람은 바로 무림맹의 총관이야.”
“그런데요?”
“그런 사람이 대접하기 위해 내민 차가 뭔가 이상하다는 말이 뭘 뜻하는지 정말 몰라서 하는 말인 게야?”
화운장로가 목소리를 조금 더 높였다.
“무서운 결과고 뭐고 제가 다 알아서 감당할 테니 그렇게 아쉬우면 장로님이나 다시 돌아가서 마시세요. 두 번 다시 저 볼 생각하지 마시고요.”
용무린도 지지 않고 목청을 돋웠다. 계속해서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향 맡아 봤으니 아시겠지만, 그 차 영약에 가까운 좋은 약재가 들어간 차에요.”
“내 말이!”
“그런 귀한 차를 우리에게 준다고요? 아무런 이유도 없이? 우리에게 신세진 것도 없는 양반이? 뭔가 조금 이상하지 않아요?”
“……?!”
그제야 화운장로가 입을 다물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또 뭔가 조금 이상했건 것이다.
그러는 사이 맹주부가 코앞으로 다가왔다. 호위무사들의 확인과 안내를 통해 두 사람은 무림맹주 비천검제 풍연호의 집무전으로 향했다.
집무전 5층.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한 사람의 노인이 보였다.
간단한 백의 무복에 영웅건을 둘러 쓴 노인, 바로 현 무림맹주인 비천검제 풍연호였다.
‘호오, 저 사람이 바로 무림맹주?’
용무린의 눈이 살짝 커졌다.
진정한 의미의 초절정 고수인 상관엽을 보았을 때조차 뻣뻣했던 고개가 천천히 끄덕여졌다.
‘과연!’
첫 인상은 소탈한 편이었다.
하지만 눈빛이 완전히 달랐다. 신광 따위 전혀 보이지 않도록 갈무리 되어 있었지만 눈동자 깊은 곳에는 광활하고 허허로운 빛이 담겨 있었다.
‘강하다!’
현재 자신의 내공으로는 감히 넘어 설 엄두도 나지 않을 만큼!
하지만,
꾸욱.
용무린의 주먹에는 천천히 힘이 고여 들었다.
‘한 번 붙어 볼까?’
어처구니없지만 보자마자 호승심이 발동한 것이다.
붙어 보고 싶었다.
신마 진무량의 경험을 고스란히 되살려 현 무림의 절대자 중 하나인 무림맹주와 자웅을 겨뤄보고 싶은 거다.
“맹주!”
화운장로가 활짝 웃으며 포권을 취해 보였다.
“허허허. 화운장로 오셨구려.”
풍연호 역시 반갑게 웃으며 화운장로를 맞았다. 벌떡 일어나 포권을 취했다. 화운장로가 용무린을 소개했다.
“약속대로 비룡문의 소주 용무린 공자를 데려왔소이다. 무린아. 인사드…… 으응? 무린아!”
용무린을 향해 시선을 돌렸던 화운장로가 눈을 부릅떴다.
화들짝 놀라 용무린을 다그쳤다.
“야, 인석아! 주먹에 힘 빨리 안 풀어? 앙?”
피식.
풀썩 웃어 보인 비천검제 풍연호가 서늘한 눈으로 용무린을 바라보았다. 불쑥 뜬금없는 말을 쏟아냈다.
“먹었냐?”
“그게 대체 무슨 말입니까?”
무슨 뜻인지 당최 모르겠다는 듯 화운장로가 고개를 갸웃했지만 용무린은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대뜸 고개를 흔들었다.
“아뇨? 공짜를 좋아하긴 하지만 먹다가 체할까 봐 못 먹겠더라고요.”
풍연호가 빙그레 웃으며 말을 이었다.
“천재라더니, 과연 말하기가 편하구나.”
“제가 잔머리가 조금 잘 돌아가긴 해요.”
“……?”
두 사람의 대화를 멀뚱한 눈으로 바라보는 화운장로를 향해 풍연호가 자리를 권했다.
“자, 앉읍시다.”
“좋죠.”
풍연호에 이어 용무린이 앉았고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한 화운장로가 따라 착석했다.
질질 끌 필요 따위 없다는 듯 풍연호는 단도직입적으로 하고픈 말을 꺼내들었다.
“총관부를 거쳐 왔으니 무림맹의 현재 분위기는 얼추 짐작이 가겠지?”
“예.”
“그냥 고여만 있어도 썩는 것이 물인데 외부에서 더러운 것들까지 흘러들었다.”
“잘 알고 계시면서 왜 두고만 보셨는데요?”
“완전히 곪았을 때 짜야 편하거든.”
“얌체 같은 말이네요.”
“뭐, 나도 한 잔머리 하거든…….”
풍연호가 어깨를 슬쩍 들썩여 보였다. 용무린의 입가에 가벼운 미소가 걸렸다. 비슷하게 웃어 보인 풍연호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워낙 깊이 숨은 놈들이라 그런지 대충은 알겠는데 깡그리 찾아내기는 힘들더라고.”
“그래서 지켜만 보셨어요? 지금까지 내내?”
마공을 익힌 놈들과 싸웠다는 거듭된 보고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조치가 없었던 것을 책망하는 것과 동시에 비룡문에서 소림과 개방의 고수들을 철수하게 동조했던 것을 아울러 짚고 넘어가는 것이었다.
“어떤 놈들이 움직이는지도 보고 네 녀석 실력도 확인해 볼 겸, 겸사겸사 그랬지.”
“하! 화딱지 나려고 하네.”
용무린의 눈매가 가느다래졌다.
당장에라도 한 방 먹이고 싶다는 듯 주먹을 불끈 쥐었다.
“총관부에 들렀던 것도 그래서 막지 않은 건가요?”
“당연하지.”
“나 참, 기가 막혀서. 거기서 당했으면 어쩌려고요? 거기서 주는 걸 대책 없이 막 먹었으면 대체 어쩌려고 그랬는데요? 예?”
용무린이 고함을 버럭 질렀다.
“무린아! 그게 대체 무슨 말이냐? 정말 아까 총관이 내민 차에 무엇인가 들어 있었다는 말인 게냐?”
화들짝 놀란 화운장로가 물어왔지만 용무린의 시선은 오직 풍연호에게만 향해 있었다. 풍연호가 얄밉게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 정도야 당연히 알아서 헤쳐 나올 줄 알았지!”
“뭐예요?”
“그리고 조금은 그걸 먹여 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어. 어쩌면 너는 혈고의 위험에서도 멀쩡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거든.”
“……!”
“혀, 혈고! 맹주! 지금 혈고라고 했습니까?”
용무린은 하도 어이가 없어서 입을 쩍 벌렸고 화운장로는 혼비백산 놀라 목청을 높였다.
“자, 어디 그러면 확인을 한번 해 볼까?”
풍연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넓은 공간으로 나섰다. 용무린을 향해 손을 슬쩍 내밀었다.
“일 초! 딱 일 초만 내게 펼쳐 봐라.”
스파앙. 버언쩍.
풍연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용무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신법을 전개해 거리를 좁혔다. 풍뢰를 뽑아 수라잔월의 초식을 펼쳤다.
쉬이익. 따아아앙.
쿵쿵쿵.
전력을 다해 펼친 것은 분명 아니었지만 수라잔월의 초식은 너무나 간단하게 막혔다. 비교조차 할 수 없는 막대한 내공의 여력에 뒤로 세 걸음이나 물러나야 했다.
‘으응? 이, 이 느낌은?’
용무린이 그 자리에 굳었다. 입을 쩍 벌렸다.
풍연호의 손에 뿜어진 내공이 너무나 익숙하게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서, 설마…….’
놀랍게도 불사신기와 너무나도 흡사했다.
마치 비룡문에서 아버지 용대명과 두 분의 친 숙부님과 손을 섞어 본 느낌이라고나 할까? 물론 그분들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을 만큼 막강한 내공이었지만 적어도 그 느낌만큼은 놀랍도록 닮아 있었다.
씨익.
풍연호가 활짝 웃었다. 용무린의 마음을 짐작이라도 하고 있다는 듯 고개를 슬쩍 끄덕여 보였다.
‘지, 진짜로?’
아직은 대답해 줄 때가 아니라는 듯 풍연호는 다시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그러더니 불쑥 한마디를 뱉었다.
“확인 끝!”
“……!”
“다행히 맞았네.”
“…….”
너무나 놀란 용무린은 여전히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풍연호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어떤 분께서 널 찾으라고 내게 부탁했다. 무림의 미래가 네게 달렸다고 말이야.”
“대체 누가?”
“일단 일 이야기부터 좀 할까?”
풍연호의 입에서는 계속해서 놀라운 이야기가 쏟아져 나왔다.
“언제부터인가 무림맹의 인사들 사이에 의성 신우량의 활생단이 퍼지기 시작했네. 그런데…….”
참으로 놀랍고도 무서운 이야기였다.
괴기한 피리 소리가 울려 퍼질 때마다 한 사람씩 전과는 판이하게 다른 판단과 결정을 내리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처음에는 워낙 많은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곳이 바로 무림맹이다보니 그럴 수도 있겠지, 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점점 그 도가 심해졌다.
억울하게 짓밟힌 문파들의 하소연은 헛소리로 치부가 되었고 주요 방파의 잇속만 챙기는 쪽으로 모든 결정들이 내려지게 되었다.
비룡문에 있던 소림과 개방의 고수들이 새로운 무림 세력의 등장을 묵과할 수 없다는 중론에 떠나야만 했던 것이 좋은 예다.
“그럴 수 있는 경우는 몇 가지 없다고 생각했고 나는 은밀히 조사를 했다네. 그 결과 혈고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었네.”
풍연호가 용무린을 향해 환하게 웃어 보였다.
“자네의 도움이 컸네. 막연하게 추측만 해 왔던 혈고의 존재를 무한의 외곽에서 자네가 처치했던 마공을 익힌 무리들의 몸속에서 처음으로 확인할 수 있었거든.”
“그, 그러면 정면 무림맹에 마교의 손길이……?”
화운장로가 말을 채 잇지 못했다. 풍연호의 고개가 크게 끄덕여졌다.
“그렇소이다, 화운장로. 대표적으로 확인된 인사는 바로 총관 사마중극. 나는 이 기회에 무림을 좀먹는 고름을 깡그리 짜버릴 생각이외다.”
“크흠. 정녕 그렇다면 해야 하겠지요.”
무겁게 고개를 끄덕이던 화운장로가 마지막으로 확인을 했다.
“혈고에 감염된 것만 아니었다면 그래도 무림에 큰 힘이 되어 줄 사람들인데…….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은 전혀 없는 것입니까, 맹주?”
“음양자처럼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는 마교의 고수가 나서서 손을 쓰지 않는 한, 의성 신우량이 나선다고 해도 장담할 수는 없을 것이외다.”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고름은 살이 되지 못한다.
마교의 발호가 슬슬 시작되는 이때 혈고에 감염된 사람들의 정리는 반드시 필요한 일인 것이다.
“하지만…….”
풍연호의 시선이 용무린에게로 향했다.
의미심장한 말을 툭 내뱉었다.
“너라면 혹시 또 모르지. 무슨 신묘한 방법이라도 있을는지 말이야.”
“……?!”
화운장로의 시선도 용무린에게 꽂혔다.
알 수 없는 기대감이 화운장로의 눈 속에 피어났다.
“맹주 직속의 총순찰 직위를 주겠다. 나를 도와줄 수 있겠느냐?”
반짝.
용무린이 눈을 빛내며 되물었다.
“도와주면 내 질문 한 가지에 거짓 없이 대답해 줄 자신이 있나요?”
완전히 같지는 않지만 도대체 어떻게 해서 불사신기와 비슷한 내공을 가지고 있는지 물을 작정이었다.
천기자가 말했던 껍질을 깰 단서.
아니면 성산의 기문진이 무너지고 절대검신의 유진이 사라진 일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직관적으로 들었던 것이다.
씨익.
“물론!”
풍연호가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좋아요. 하죠.”
반짝.
용무린의 눈에서 서릿발 같은 광채가 쏟아져 나왔다.
풍연호가 품속에서 기묘하게 빛나는 금속 패를 꺼냈다. 용무린을 향해 던졌다.
“맹주령이다.”
“맹주!”
화운장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풍연호의 말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운철로 만들어져 내공을 주입하면 오색 광채를 뿜어내지. 너를 따르는 특무순찰조원들의 통솔과 무림맹 구성원들의 생사여탈권이 네게 귀속될 것이다.”
“너무 과합니다, 맹주! 어찌…….”
화운장로가 고함을 버럭 질렀다.
“후회하지나 말아요.”
버언쩍.
용무린의 손에 들린 맹주령이 오색 광채를 눈부시게 뿜어내었다. 확인을 마친 용무린은 옅은 미소 한 번 지어 보인 후 맹주령을 품속에 집어넣었다.
“후회는 무슨? 이번 일에 한해서 주는 거야.”
“누릴 수 있을 때 마음껏 누려 보라 이건가요? 좋아요. 마음껏 누려 보도록 하죠.”
지금 당장 시작하겠다는 듯 용무린은 밖을 향해 몸을 돌렸다.
“특무순찰조원들은 어디로 가면 만날 수 있나요?”
“무영!”
휘슷.
풍연호의 부름에 누군가가 소리 없이 나타났다.
하얀 천 조각으로 얼굴 전체를 가린 사내로 유일하게 드러난 눈에서 정광이 번득이고 있었다.
“총 순찰을 안내해 주도록.”
“충.”
살짝 고개를 끄덕여 보인 무영이 성큼 앞으로 나섰다.
“장로님. 다음에 봬요.”
“정녕 자신이 있는 것이냐?”
피식.
용무린은 풀썩 웃으며 답했다.
“곪을 만큼 곪았다고 하잖아요.”
“……?!”
“짜기만 하면 되는 거예요.”
“하하하. 과연…….”
화운장로는 여전히 눈만 껌벅였고 비천검제 풍연호는 호탕하게 웃었다. 그러더니 마지막까지 부담을 주었다.
“혈고에 걸린 이들, 그들의 목숨이 네게 달렸다. 구워 먹든 삶아 먹든 네가 알아서 해라.”
멈칫!
막 밖으로 나서려던 용무린의 발걸음이 살짝 굳었다.
“……일단 한 번 보고요.”
잠시 침묵하던 용무린이 알 듯 말 듯 묘한 말을 남기고 밖으로 나섰다.
“자, 우리는 이제 한 잔 드십시다, 화운장로.”
“이게 당최 무슨 도깨비놀음인지 원…….”
화운장로는 혀를 내두르며 풍연호의 뒤를 따랐다.
***
무영은 용무린을 무림맹에서도 깊숙한 곳으로 이끌었다.
꽤 커다란 가산을 병풍처럼 두른 곳으로 무림맹에 속한 다섯 개의 무력단체들의 수련 공간과도 상당히 동떨어진 외진 곳이었다.
“여긴 어디지?”
“맹주님께서 개인적으로 수련을 하실 때 찾는 곳입니다.”
“그래?”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입구와 병풍처럼 둘러 서 있는 가산 몇 곳에만 인원을 배치하면 외부와는 완벽하게 차단을 한 상태에서 비밀 세력을 도모할 수 있는 곳이었기 때문이었다.
“특무순찰조는 기존 순찰당과도 별개인 모양이군.”
“맞습니다, 총 순찰. 특무순찰조는 맹주 직속으로 어느 곳에 속하지도 명령을 받지도 않습니다. 오직 맹주령에 의해서만 살고 죽으며 직위 고하를 가리지 않고 모든 것을 감찰할 수 있습니다.”
“총관을 비롯해서 무림맹 수뇌부들이 치외법권이다, 너무 막강한 권한이다 뭐다 해서 말이 많았을 텐데?”
“지금까지는 이 안에서 수련만 하느라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당연히 부딪힐 일도 없었지요.”
“정말 수련만 했어?”
용무린이 눈을 가늘게 떴다.
“순찰 업무도 수련의 일종일 뿐입니다.”
무영이 옅은 미소를 머금고 대답했다.
“크크큭. 좋아. 맹주님이 자신감을 내비칠 만하군그래.”
작은 연무장 한가운데 용무린이 섰다.
찌릿. 찌릿.
칼날 같은 기세들이 사방에서 쏘아지는 게 온몸으로 느껴졌다.
용무린의 입가에 흰 선이 쭉 그어졌다.
“좋군.”
용무린은 대뜸 품속에서 맹주령을 꺼내들었다.
버언쩍.
내공이 주입된 맹주령에서 오색 빛이 뿜어졌다. 용무린은 자신을 향해 무형의 기세를 쏘아내고 있는 특무순찰조원들을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오늘부로 총순찰의 자리에 임명된 용무린이다.”
찌릿. 찌리릿.
파고드는 기세가 점점 더 강해졌다.
“귀찮은 것은 딱 질색이니 간단히 설명하겠다.”
휘이이.
용무린을 중심으로 서늘한 바람이 휘돌기 시작했다.
“지금부터 맹주령 따먹기를 할 생각이다. 관심 있는 놈 튀어 나와라!”
어둠을 뚫고 날카로운 눈빛이 하나 둘 나타났다.
“크크큭. 좋아, 좋아. 다 덤벼!”
스르릉. 꾸욱.
용무린의 손에 풍뢰와 소검비연이 잡혔다. 섬뜩한 빛을 뿜어내었다.
***
총관 사마중극의 집무실.
놀랍게도 총관 사마중극이 바닥에 납작 엎드린 채 고개를 조아리고 있었다.
“그 애송이와 거지는 실패했습니다. 마치 차 속에 무엇이 있는지 알고 있기라도 하다는 듯 마시지 않았습니다.”
상좌에 앉아 있던 복면인이 침묵을 깼다.
“……신경 쓰지 마라. 급한 마음에 너무 대놓고 혈고를 투입하려 한 내 실책이다.”
“감사합니다.”
“회천대계를 위한 숫자의 확보는?”
“송구합니다. 아직도 많이 부족합니다.”
“상관세가에 쏠리는 관심을 차단하기에도 부족한가?”
“그 정도 여론 조성은 충분히 가능합니다.”
“그렇다면 일단 상관세가에 쏠리는 관심을 차단해라.”
“충.”
“더불어 운룡장에 곤란한 일이 생겼다고 하니 무림맹과 연계된 상단을 움직여 돕도록 해라. 아직은 운룡장과 운룡표국이 무너져서는 안 된다.”
“충. 차질 없도록 하겠습니다.”
복면인의 명령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회천대계가 머지않았다. 지금부터는 맹주의 무능을 물고 늘어져라. 어느 날 갑자기 맹주가 바뀐다고 해도 모두가 고개를 끄덕일 수 있도록 분위기를 조성해야 한다.”
“알겠습니다.”
“다섯 호법 중 그를 부각시키도록.”
“그라고 하시면……?”
사마중극이 말꼬리를 늘였다. 복면인의 고개가 크게 끄덕여졌다.
“그렇다. 그가 바로 무림맹의 새로운 주인이 될 것이다.”
“충심으로 모시겠습니다.”
그가 누구인지 이미 알고 있는 듯 사마중극의 고개가 거침없이 끄덕여졌다.
“가겠다. 너는 잠시 꿈을 꾸었다고 생각해라.”
휘슷.
바람 소리가 한 번 스친 후 복면인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어?”
잠시 후 고개를 들어 올린 사마중극이 황당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어이가 없다는 듯 뒷목을 주무르며 스스로 자책했다.
“집무 중에 깜박 졸다니! 나도 참…….”
이것이 혈고의 무서운 점이었다.
조종당하는 줄 알지도 못하면서 주인의 명령을 충실하게 이행하도록 만드는 것! 혈고와 함께 한 마교대법의 무서움은 이미 무림맹 수뇌부까지 파고들었다.
딸랑!
사마중극이 창문 끝에 달린 줄 하나를 잡아 당겼다.
오래지 않아 총관부의 무사가 들어와 부복했다.
“찾으셨습니까?”
“지금 즉시 부맹주님께 내가 드릴 말씀이 있다고 아뢰거라.”
“알겠습니다.”
대답이 끝나기가 무섭게 사내는 부맹주 천리검향 옥풍의 거처를 향해 움직였다.
“보자, 누구누구를 만나야 하지?”
사마중극은 주입된 명령을 자신만의 판단인 듯 바삐 움직이기 시작했다.
***
“끄응.”
“제엔장. 괴물이네, 괴물.”
“어구구…….”
바닥을 나뒹구는 다섯 명의 무인들.
맹주령 따먹기에 참여했던 특무순찰조원들로서 이미 용무린에게 심할 정도로 짓밟힌 후였다.
“크크크큭.”
나직한 웃음소리와 함께 용무린의 얼음장 같은 시선이 어둠속으로 향했다. 거칠게 으르렁댔다.
“더 없나?”
너부러져 있던 다섯 무인이 부스스 일어났다. 뒤를 향해 한마디씩 내뱉었다.
“없을 거외다.”
“끄응. 대가리 다섯이 다 깨졌는데 더 있겠소?”
“아오, 척추가 끊어지는 줄 알았네. 봤지? 승부가 났다. 기 싸움 그만하고 다들 얌전히 나와라.”
“하하하. 점창의 현허입니다, 총 순찰.”
“저는 사천당가의 당건입니다.”
죽일 듯 달려들 때는 언제고 현허와 당건이 넉살 좋게 자기소개를 했다. 그런 두 사람을 향해 슬쩍 눈을 흘긴 나머지 세 사람도 자신들을 밝혔다.
“남궁세가의 유룡입니다, 총 순찰.”
“하북팽가의 팽도옥이오.”
“황보세가의 황보패라 하오.”
피식.
용무린의 입가에 보기 좋은 미소가 걸렸다.
‘재미있군.’
신마 진무량 시절에는 중원 진출을 위해 필히 멸문시켜야만 할 주요 가문의 후손들이었는데 지금은 잠시지만 자신의 수하가 되었다는 사실이 조금 웃겼다.
“양가장의 양호승이오.”
“백학문의 유환입니다.”
“오도문의…….”
어둠속에 숨어 있던 특무순찰조원들이 모두 모습을 드러냈다. 자신들을 소개했다.
“……!”
용무린의 입가에 떠올랐던 미소는 조금씩 씁쓸해져만 갔다. 하나 같이 세력이 완전히 기울어진 가문의 후손들이었기 때문이었다.
‘저들의 가문이 제갈세가처럼 저물어가게 된 것 역시 내 책임이 큰 것인가?’
마음 한 쪽이 무거워졌다.
신마 진무량 시절 저들의 가문을 무참히 짓밟던 기억이 홀연히 떠올라서였다.
‘참 많이도 죽였는데 말이야…….’
그때 쓰러졌던 가문의 어른들 덕에 많은 절기들을 유실했고 결과적으로 신주오가에 밀리게 됐다.
거기에 더해 저 가문들의 힘이 줄어든 공백을 단목세가와 서문세가, 진주언가와 같은 가문들이 나눠가지게 되었으니 책임이 전혀 없다고는 하지 못하리라.
‘거참 신기한 일이란 말이야. 그 많은 마공은 몇 가지 중요한 것들을 제외하면 태반을 기억하지 못하면서 쟤들 가문의 무공 몇 가지가 오롯이 떠오르는 이유는 또 뭐람?’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지금 용무린의 머릿속에는 남궁, 황보, 팽가의 비전 절기 몇 가지가 스쳐지나가고 있었다.
‘에라, 모르겠다. 적당한 때에 전해주자.’
신마답지 않게 차오르는 마음의 부담감을 그것으로 완전히 떨쳐낼 것이다.
“자, 일단은 지금까지 조사한 내용을 좀 들어보도록 하지. 어디 조용한 곳 없나?”
“저 안쪽으로 드시지요. 함께 모여 식사를 하던 곳이 있습니다.”
무영의 안내를 따라 용무린은 안으로 들었다.
***
묵묵히 이야기를 듣고만 있던 부맹주 천리검향 옥풍의 고개가 천천히 끄덕여졌다.
“……그러니까 비룡문에 상주하는 소림과 개방의 주력을 다시 뒤로 물리게 한 후 화산과 종남의 고수들로 대체를 하자? 그래서 비룡문의 기업을 화산과 종남에 조금씩 종속시키도록 한다?”
“그렇습니다, 부맹주님.”
총관 사마중극의 입에서 달콤한 이야기가 계속해서 흘러나왔다.
“부맹주님이 나서 주신다면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마공이라니요? 마교의 발호는 이미 칠십 년 전에 끝났습니다. 한데 유달리 비룡문에서만 마공을 익힌 무리들과 충돌이 잦다고 합니다. 그게 말이 됩니까?”
“하긴, 마교가 발호를 한다고 가정을 하면 그것도 조금 우스운 일이지. 이제야 겨우 무가로의 발돋움을 하려는 비룡문 따위 그들에게 위협이 될 수 없으니까 말이야.”
“제 말이 바로 그 말입니다, 부맹주님. 마교가 그만큼 공을 들이는 숙적 정도가 되려면 최소한 화산파 정도는 되어야 벌벌 떨며 그렇게 호들갑을 떨지 않겠습니까?”
“하하하. 그 말이 참으로 옳네, 총관. 아무렴, 우리 화산파 정도는 되어야지만 마교에서도 숙적이라며 호들갑을 떠는 게지, 비룡문 따위에 마교가 대체 무얼 먹을 게 있다고 기웃거리겠는가?”
자신의 사문인 화산파를 높여주자 부맹주 천리검향 옥풍이 통쾌하게 웃으며 즐거워했다. 그때를 놓칠세라 사마중극이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절대검신 독고황 대협의 제자랍시고 그간 마음 놓고 가세를 확장한 비룡문의 모든 것을 이 기회에 화산파에 흡수시켜 지금도 콧대만 높은 백리세가와 벽력도가에 경종을 울리는 것입니다.”
“하하하. 나쁜 생각은 아니지. 전통의 명문인 우리 화산파를 제치고 신주오가네 뭐네 하며 그간 너무 눈꼴이 시렸어. 상관세가와 운룡장과는 달리 고개가 너무 뻣뻣하단 말이야. 버릇을 고쳐줄 때도 되었지.”
천리검향 옥풍이 짐짓 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사마중극이 입안의 혀처럼 굴었다.
“종남과 청성도 우리 부맹주님처럼 바른 생각을 하고 있으면 말하기가 참 좋을 텐데 말입니다…….”
“그건 아무 염려하지 말게.”
옥풍이 자신만만하게 큰소리를 쳤다.
“종남은 화산과 함께 섬서라고 하는 외딴곳에 틀어박혀 있지 않던가? 먹고 살기가 참 힘든 곳이란 말이지.”
지리적인 위치를 제외하면 새빨간 거짓이다.
섬서성이 외딴 곳에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화산파와 종남파는 무림맹의 수뇌부에 자신들의 장로를 파견해둠으로써 온갖 이권을 챙기고 있는 중이었다.
오죽했으면 상인들조차 더러워서 장사를 못 해먹겠다고 대놓고 성토할 정도이겠는가?
물론 그래 봤자 소용없는 일이다.
무림맹은 언제나 화산과 종남의 편을 들었고 두 문파에 적대하는 상단이나 세력은 엄청난 수준의 제재를 받든지 아니면 무림맹 소속 무력단체와 전투를 벌여야 했다.
그렇게 지내온 세월이 벌써 칠십여 년이다.
특히 심해진 것은 불과 삼 년 정도였지만, 섬서성에서 화산과 종남 두 문파는 거의 왕이나 다름이 없었다. 무얼 해도 좋았고 거의 모든 것을 속가제자들이 집어 삼킨 후다.
“종남 역시 비룡문을 흡수하며 얻어낸 기업들을 조금씩 나누어 주면 좋다고 할 게야.”
“청성은 어떻겠습니까?”
“청성 역시 사천성 같은 외진 곳에 있는 문파 아니겠나? 그 성질 더러운 당가 등쌀에 배고픈 것은 마찬가지일 테니 이 기회에 하남에 교두보를 마련해 두면 어떻겠느냐고 넌지시 미끼를 던지면 될 걸세.”
“알겠습니다, 부맹주님. 제가 내일 무림맹 호법 중 한 분이신 청성의 서보도장을 만나 뵙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게. 종남은 내가 알아서 하겠네.”
“감사합니다, 부맹주님. 저 사마중극 언제나 부맹주님의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은혜는 무슨! 다 같은 백도 무림의 형제들 아닌가? 서로 돕고 사는 게야 서로 돕고…….”
“참으로 좋으신 말씀입니다. 그래서 말인데…….”
“……?”
사마중극의 목소리가 더 은밀해졌다. 천리검향 옥풍의 눈이 가느다래졌다.
“하는 일도 능력도 없으면서 자리만 높은 이가 하나 있는데 말입니다.”
옥풍의 가느다래진 눈이 이내 둥그렇게 변해 갔다.
이미 두어 번 이야기를 들었던 터라 굳이 누구라고 콕 찍어 말하지 않아도 다 아는 이야기였기 때문이었다.
“그 무능력한 인간을 이제 그만 자리에서 끌어내려야 하지 않겠습니…….”
그렇게 더러운 이야기가 무르익어가는 찰나였다.
따앙. 따라랑.
어디선가 맑은 쇳소리가 울려 퍼졌다.
“커헉!”
“크읍!”
천리검향 옥풍과 총관 사마중극이 동시에 비명을 토했다. 머리를 감싸 쥐며 괴로워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