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불사혼몽지검(不死倱夢之劍)
탄주의 효과는 바로 나타났다.
“흡!”
“허억!”
묘한 운율의 검명이 연무장을 뒤덮자마자 천리검향 옥풍을 비롯한 수뇌부들이 헛숨을 집어 삼켰다. 몸을 부르르 떨며 괴로워했다.
하지만 역시 제대로 된 불사신기가 아니라는 것이 약점이었다. 용무린의 탄주와는 달리 천리검향 옥풍과 총관을 비롯한 수뇌부를 즉시 제압하지 못했다.
“맹주가 요사한 술수를 편다.”
“쳐라! 어서!”
“무엇들 하느냐? 공격해라, 어서!”
핏발이 곤두선 눈으로 공격을 명령했다.
바로 그 순간 비천검제 풍연호의 입이 열렸다.
“혈고에 당했을 뿐 당신들이 본래부터 그렇듯 악한 것이 아님을 잘 알고 있소이다. 싸워 주시오.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깨달아 주오, 제발!”
움찔! 흠칫!
풍연호의 외침에 옥풍과 사마중극을 비롯한 대다수의 수뇌부가 몸을 떨었다. 정문일침처럼 혈고가 뿜어내는 마기를 뚫고 들어가 양심을 찔렀던 것이다.
“혈고? 방금 맹주께서 혈고라 했나?”
“혈고라니! 그건 저주받을 마교에서나 쓰는 거잖아?”
“대체 왜 이 자리에서 혈고라는 말을……?”
혈고에 당하지는 않았지만 웃전의 강압에 혹은 세뇌를 당하듯 풍연호의 무능만을 들어왔던 대부분의 고수들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리고…….
따앙. 따라라랑. 따다-앙.
풍연호의 탄주가 계속됨에 따라 점점 더 기이한 반응을 보이기 시작하는 자신의 상관과 수뇌부들의 모습을 보며 혼란스러워했다.
“크흐…….”
“이 빌어먹을 놈! 그 요사한 술수를 당장 멈추어라.”
“크아아압!”
핏발이 곤두선 눈으로 노려보는 총관, 사력을 다해 독기를 내뿜는 혈고로 인해 무시무시한 살기를 뿜어내는 종남의 곡양도장, 더는 참을 수 없다는 듯 검을 뽑아 고함을 지르는 옥풍까지…….
‘대체 누굴 쳐야 하는 거지?
‘무림맹을 좀먹고 있는 존재가 대체 누구인 거야?’
맹주의 무능만을 들어온 순수 참여자들은 이 혼란에 정확한 판단을 내릴 수가 없었다.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 한 발 두 발씩 뒤로 물러났다.
따앙. 따라랑. 따다당. 따-앙.
“크흡. 이이, 이놈들아!”
“대체 뭣들 하는 것이냐?”
“쳐라! 치란 말이다-아!”
옥풍과 총관을 비롯한 혈고에 종속된 수뇌부 6할이 피를 토하듯 외쳤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자신들이 이끌고 왔던 무인들은 뒤로 물러날 뿐이었다.
‘무능이고 나발이고 지금 현재 때려잡아야만 할 사람들은 바로 저 인간들이야.’
‘자랑스러운 내 사문 화산파의 장로님께서 어째서 저런 모습을 보인단 말인가? 풍연호 맹주의 탄주는 나와 사제들에게는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고 있거늘…….’
‘핏발이 곤두선 눈, 끝을 모르고 치솟는 살기와 적의. 저 모습이 과연 도가의 명문 종남의 장로라 할 수 있는 모습인 것인가?’
하나같이 그런 생각들을 했다.
씨익.
기분 좋게 웃으며 풍연호는 계속해서 탄주를 했다.
따앙. 따라라랑. 따당. 따-앙.
결국 더는 견딜 수 없었는지 옥풍이 공격을 개시했다.
“이 요사한 노-옴!”
스파앙.
천리검향 옥풍이 신형을 뽑아 올렸다. 저 유명한 화산파의 절기 매화검법의 일초 매화토염이 펼쳐졌다.
버언쩍.
벼락같은 기운 한 줄기가 짙은 매화향을 흘리며 풍연호를 향해 밀려갔다.
‘별 수 없구나.’
아쉽지만 풍연호는 탄주를 멈추었다.
옥풍을 향해 마주 뛰어 내려가며 검을 그었다.
카앙. 카카카카-앙.
풍연호와 옥풍이 격렬하게 얽혀들기 시작했다.
“뭣들 하는 게요! 이 기회를 놓치면 무림맹의 정기를 다시 세울 수 없게 된단 말입니다.”
“맞소이다. 모두 갑시다!”
“이 마당에 무얼 더 기다리겠소? 하아앗!”
종남의 곡양 도장과 청성의 서보 도장 그리고 단목세가와 서문세가의 중진들이 일제히 검을 뽑아 들었다. 풍연호를 향해 달려들었다.
“맹주니-임!”
“멈추어라! 그분께서는 지금 너희들을 살리려고 하시는 거란 말이다.”
저 멀리에서부터 무영과 맹주의 호위대원들이 바람처럼 달려왔다.
***
따앙. 따라라랑. 따다-앙.
“……?!”
용무린의 소검탄주에 운위영의 눈이 살짝 커졌다.
하지만 그뿐, 생각과는 달리 운위영은 소검탄주에 영향을 전혀 받지 않았다.
“개수작 부리지 마라 이놈! 차앗!”
운위영은 소검탄주로 인해 공격의 연결고리가 끊긴 틈을 놓치지 않았다. 바람처럼 파고들어 용무린의 면전에 운무대천강을 쏟아냈다.
콰아앙. 퍼퍼퍼펑.
“크으윽!”
답답한 신음성과 함께 용무린의 입에서 덩어리 피가 쏟아졌다. 뒤로 주르륵 밀렸다.
“하앗!”
한 번 승기를 잡은 운위영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후욱.
다시 거리를 좁힌 후 운무대천강의 힘을 용무린의 전신요혈을 향해 골고루 뿜었다.
콰앙. 퍼엉. 퍼퍼퍽.
와득. 와드득.
비명도 지르지 못하는 사이 용무린의 몸은 걸레가 되어갔다. 목뼈가 툭 부러졌다. 갈비뼈가 왕창 내려앉았다. 척추도 힘없이 부서졌다.
‘크흐. 실수였군. 이놈은 혈고에 당하지도 마공을 익히지도 않은 놈이야. 아니, 마공은 아직 모르겠다. 반박귀진의 경지에 올라 있다면 지금의 나로서는 알 수 없으니까.’
하여간 그 사실을 진즉 알았다면 소검탄주에 시간을 빼앗기는 실수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불사의 의지…….’
용무린은 가물거리는 의식을 하나로 모아 불사신기의 구결을 불러 일으켰다.
‘이, 이대로 끝나지 않아…….’
텅 빈 단전에 힘을 주었다. 상관혁련의 무식한 공격에 죽을 뻔했을 때도 굴하지 않고 한계를 돌파했던 바로 그 구결에 모든 것을 걸었다.
‘육체는 마음의 지배를 받는다. 불사를 마음에 품으면 어떻게 되겠는가? 불사의 의지를 품어라. 믿어라. 불사의 길에 들어서게 될……. 흐으으…….’
끊임없이 되뇌던 불사신기의 구결 암송이 툭 끊겼다.
동시에 의식마저 끊어졌다.
“이노-옴. 응?”
막 용무린의 머리를 터뜨려 버리려던 운위영의 눈이 살짝 커졌다. 용무린에게서 더 이상의 호흡이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다.
“큭. 크크크큭.”
운위영의 입에서 비릿한 웃음이 터졌다.
통쾌했다.
선의의 경쟁자라고 할 수 있는 상관엽조차 이루지 못한 과업을 자신이 이뤘다는 성취감에 뭐라고 할 수 없을 만큼 기뻤다.
“그래도 확인은 해봐야겠지?”
무공 입문 1년도 되지 않는 놈이 워낙 놀라운 일을 많이 벌이고 다녔으니 끝까지 방심할 수는 없었다.
운위영은 용무린 곁으로 다가갔다.
용무린의 목을 한 손으로 덥석 잡아들어 올린 후 손가락을 목의 경동맥과 심장에 차례차례 가져다 대어 보았다.
“크흐흣. 크흐흐흐흣.”
운위영은 더욱 큰 웃음을 터뜨렸다.
맥박이 전혀 잡히지 않았다. 심장도 더는 뛰지 않는다.
죽었다. 완벽하게 죽은 것이다.
“가만, 이 녀석의 대가리를 풍연호의 앞에서 터뜨려 주겠다고 했었지?”
자신은 약속을 철저히 지킨다.
자신을 따르는 옥풍과 총관을 비롯한 수뇌부 6할이 보는 앞에서 녀석들에게 보여줄 것이다. 자신이 어떤 힘과 능력을 지닌 사람인지…….
“……!”
운위영이 주변을 슥 훑어보았다.
용호단과 특무순찰조원들 간의 전투는 이미 끝나 있었다.
‘이런 모자란 것들 같으니…….’
운위영의 눈이 가느다래졌다.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거다.
‘겨우 50명 남짓 잡는데 그 배나 쓰러졌어?’
어이가 없는 일이다.
특무순찰조니 뭐니 이름만 거창하지 이제는 유명무실한 점창과 과거 오대세가 나부랭이들의 후예들로 뭉쳐진 집단이 아니던가?
그런 놈들 50명 때려잡는데 그 배나 되는 인원이 바닥을 나뒹굴다니!
“초, 총순차-알!”
“정신을 차, 차리십시……. 흐으으.”
“이, 이렇게…… 무, 무너져서는…….”
현허와 당건 남궁유룡이 피눈물을 흘리며 용무린을 불렀다. 애석하지만 용무린은 미동도 하지 못했다. 이미 숨이 끊겼기 때문이었다.
“놈들을 모두 끌고 대연무장으로 가자!”
“충!”
용호단 무인들이 재빨리 움직였다.
특무순찰조원들의 마혈을 제압한 후 대연무장을 향해 움직였다. 바닥에 질질 끌고 갔다.
바로 그때였다.
스파아앙. 타닷.
“무, 무린아-아!”
한 발 늦게 화운장로가 도착했다.
그 뒤를 따라 천안각주 팽추영과 천안각의 무사들이 밀려들었지만 모두 그 자리에 굳었다. 운위영의 손에 용무린의 목이 잡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거기에 더해 특무순찰조까지 모두 제압된 모습이라니!
“크크큭. 늦었네, 거지?”
운위영이 화운장로를 향해 느물댔다.
“이 악독한 놈! 어서 그 손을 놓지 못하겠느냐?”
“이놈?”
운위영이 용무린의 몸을 살짝 앞으로 내밀며 말했다.
“이미 뒈졌는데?”
철렁!
화운장로의 심장이 그대로 내려앉았다.
“무, 무린아!”
화운장로의 눈이 부릅떠졌다. 믿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위험하긴 하지만 용무린이라면 능히 살아남아 무림맹의 정기를 세운 후 저 마교에 맞서 무림을 지켜낼 수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이렇게 허무하게 죽다니!
“초, 총순찰!”
천안각주 팽추영 역시 믿으려 들지 않았다.
조카인 팽도옥의 말을 빌자면 팽가의 도법을 단 하나도 배우지 못한 용무린이 오호단문도의 연결고리가 되는 철혈도법을 속속들이 익혀냈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런 천재가 이렇게 허무하게 스러지다니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던 거다.
하지만 현실은 현실.
“크크크크큭.”
용무린의 목을 한 손에 틀어쥔 채 비릿하게 웃고 있는 운위영의 모습을 보니 믿지 않을 수가 없었다. 운위영의 손에 목이 잡힌 용무린은 전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얼굴색까지 이미 파랗게 변했다. 숨이 완전히 끊어진 것이다.
“기왕 이렇게 된 것, 모두 함께 가지?”
마지막을 최대한 멋지게 장식해 자신의 위상을 드러내겠다는 듯 운위영은 용무린을 한 손에 든 채 대연무장으로 향했다.
“……!”
“……!”
화운장로와 팽추영과 천안각의 무인들 역시 그 뒤를 말없이 따랐다.
***
카앙. 카카카캉. 쉬가각.
“크아압!”
“차앗!”
천리검향 옥풍과 종남의 곡양 도장 그리고 청성의 서보 도장이 비천검제 풍연호를 매섭게 몰아붙였다.
“크흡! 헉!”
풍연호는 정신없이 뒤로 밀리기만 했다.
카앙. 카라라락. 피쉿.
하지만 방어 위주로만 무공을 펼치다 보니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전신 곳곳이 갈라지고 뜯어졌다. 굵은 핏물을 쉴 새 없이 쏟았다.
“이놈들! 어서 무릎을 꿇지 못하겠느냐?”
“죽고 싶지 않으면 항복해라!”
“모르겠느냐? 대세는 이미 기울었다!”
서문세가와 단목세가 그리고 혈고에 종속된 수뇌부에 속한 무인들의 공세에 무영과 호위대 소속 무인들이 속절없이 당하고 있었다.
“어, 어림없다-앗!”
“차라리 죽여라-!”
무영과 호위대가 끝없이 투지를 불살랐지만 솔직히 그들도 이미 알고 있었다. 대세는 저들의 말처럼 이미 기울어 버렸다는 것을.
“멈추어라!”
우르릉.
돌연 사자후가 터졌다.
모두 죽을 때까지 계속될 듯하던 전투가 순간적으로 멈춰졌다.
“초, 총순찰…….”
스르르. 챙그랑.
운위영의 손에 목이 잡힌 용무린의 모습을 확인한 풍연호의 손아귀에 힘이 풀렸다. 그의 손에서 검이 미끄러져 내렸다.
촤촥. 푸욱.
그 틈을 노리지 않고 휘둘러진 옥풍의 검이 풍연호의 무릎을 베었다. 풍연호의 무릎이 꺾였다. 연무장에 풀썩 무릎을 꿇었다.
후욱. 철퍼덕.
그런 풍연호 앞에 용무린의 주검이 거칠게 팽개쳐졌다.
운위영의 선물인 셈!
“보아라!”
기고만장한 운위영이 사자후의 수법으로 크게 외쳤다.
“무능하기만 한 풍연호와 요사한 수법으로 무림맹의 정기를 훼손하려 한 용무린의 종말이다.”
“초, 총순찰.”
“무린아!”
풍연호와 화운장로가 부르짖었다. 눈물을 글썽였다.
미안했다. 자신들의 욕심에 감당하지 못할 너무 무거운 짐을 지운 것만 같았다. 무림의 미래를 망친 것만 같아 마음이 너무 괴로웠다.
그런데…….
휘이이-!
어디선가 불어온 한 줄기 바람이 숨이 끊긴 용무린의 몸 주변을 휘감기 시작했다.
“……?!”
“……?!”
풍연호와 화운장로의 눈이 부릅떠졌다.
휘이이-. 휘이이이이-.
그 사이에도 용무린을 향해 몰려드는 바람은 점점 더 거세지기만 했다.
“오늘 모두가 보는 앞에서 저 두 사람을 처단해 무림맹의 정기를 바로 세…….”
기세등등하게 외치다 말고 운위영의 눈이 부릅떠졌다.
투둑. 투두둑.
섬뜩한 소리가 반복적으로 흘러나오는가 싶더니 분명히 숨이 끊겼던 용무린이 부스스 일어난 것이다.
“어헉!”
운위영이 소스라치게 놀랐다. 입을 쩍 벌렸다.
“어, 어찌……?”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을 당최 믿을 수가 없었다.
분명히 자신의 손으로 확인까지 했다.
맥이 뛰지 않았고 심장 역시 멈추었으며 숨이 완전히 끊겼었다.
“그런데, 그런데 어떻게 일어나?”
물론 정상은 아니었다.
이전까지 용무린이 보여주었던 총명하던 눈빛이 아니라 흐릿하기만 했다.
휘이잉. 휘이이잉.
이제는 거의 돌풍 수준이 된 바람이 용무린의 주변을 계속해서 휘감았다. 바람을 빨아들이는 무저갱이라도 된 듯 그 광포한 바람을 빨아들였다가 내뿜었다.
콰아아아. 콰아아아아.
그 바람을 따라 감히 누구도 거역하지 못할 거대한 기운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투드득. 투드드득.
그 서슬에 부러졌던 뼈마디가 다시 맞춰졌다.
흠칫!
운위영이 화들짝 놀라 몸을 떨었다.
‘더 이상 보고 있다가는 큰일 나겠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용무린을 한 번 더 죽여야겠다고 생각했다.
바로 그 순간,
스윽.
용무린의 손이 하늘을 향해 올라갔다.
숨이 끊어졌음에도 계속해서 쥐고 있던 풍뢰가 따라서 하늘을 향했다.
운위영이 벼락처럼 외쳤다.
“몇 번이고 죽여주마-앗!”
콰아우우웅.
운무대천강의 기운이 거창하게 일었다.
쏴아아-. 쏴아아아-.
안개 속에 감춰진 거력이 용무린을 향해 밀려갔다.
바로 그 순간,
촥!
하늘을 향해 들어 올려졌던 용무린의 손이 뚝 떨어져 내렸다. 풍뢰 끝을 따라 허공이 쭉 찢어졌다. 살짝 어긋나는 환영까지 보였다.
퍼억. 휘스슷.
용무린을 향해 밀려오던 운무대천강이 깨어진 유리조각처럼 어긋나는가 싶더니 산산이 흩어졌다.
“어?”
운위영의 눈이 동그래졌다.
“어어?”
입에서는 점점 더 기괴한 소리가 새어 나왔다.
눈을 아래로 내려 보니 팔 하나가 어깨부터 깨끗하게 잘려 나가 있었던 것이다.
화아아-악!
용무린의 전신에서 불사신기가 폭발하듯 쏟아져 나왔다.
운위영과 용호단 그리고 대연무장의 모두를 한꺼번에 휘감았다.
“어헉!”
“컥!”
“우와악!”
천리검향 옥풍과 사마중극 그리고 종남의 곡양이 작살이라도 맞은 듯 몸을 떨었다.
“크, 크아악.”
“허억!”
청성의 서보도장을 비롯한 서문세가나 다른 수뇌부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불사신기에 휘말린 사람들 중 혈고를 품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도 고통을 참지 못했다.
극독에라도 당한 듯, 아니 보이지 않는 투명한 검으로 머리를 마구 들쑤시기라도 한 듯 격렬하게 몸을 떨었다. 괴로워했다.
“제, 제발…….”
“사, 살려줘어-!”
바닥을 나뒹굴었다. 데굴데굴 굴렀다.
그러거나 말거나 용무린은 풍뢰를 부드럽게 그어 올렸다.
촤아아-악.
다시 한 번 어긋나는 공간.
“우왁!”
운위영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옆으로 신형을 날렸다.
스각.
물론 이미 늦었다. 운위영의 옆구리가 쩍 갈라졌다.
희끄무레한 내장이 삐죽 고개를 내밀었다.
“어, 어어, 어어어!”
너무나 당황한 운위영의 입에서는 계속해서 이상한 소리만 새어 나왔다.
“쳐라!”
“놈은 이미 죽을 만큼 큰 부상을 입었다.”
“힘을 내라! 신임 맹주님을 구해야만 한다.”
하룻강아지들은 언제나 주제를 모르는 법이다.
용무린의 무위가 어느 정도인지, 방금 허공이 어긋나 보였는지 아닌지조차 구분할 수 없는 용호단의 무인들이 일제히 용무린을 향해 달려들었다.
덩실!
용무린이 검무를 추기 시작했다.
촤아악. 촤아아악.
서걱. 서걱. 서거거걱.
용호단 무인들의 목이 거의 동시에 떠올랐다. 팔다리가 후두둑 떨어져 내렸다.
도살이다!
아예 상대가 되질 않았다.
덜덜덜.
떨고 있던 운위영이 발작하듯 고함을 질렀다.
“우와아악!”
뭉클. 뭉클. 콰르르르.
운위영의 전신에서 피보다 더 짙은 붉은 기류가 뿜어졌다. 눈 깜박할 사이에 하나 남은 운위영의 손에 검의 형태로 뭉쳐들었다. 너무나 놀란 나머지 자신이 있는 곳이 어디인지도 잊은 채 꽁꽁 숨겨뒀던 마공을 펼쳐버린 것이다.
“죽어-엇!”
버언쩍.
피처럼 붉은 색의 강기가 하늘과 땅을 하나로 이었다. 벼락처럼 떨어져 내렸다. 혈마궁의 궁주 혈염마존 갈천기의 독문무공인 혈마오검의 일초 사멸령이었다.
그러나…….
덩실. 파카-앙.
가볍게 휘돌린 용무린의 풍뢰에 사멸령의 초식은 너무나도 쉽게 둘로 갈렸다.
푸확.
사멸령의 초식은 물론이고 운위영의 다리마저 하나 뚝 떨어졌다. 분수와도 같은 피가 뿜어졌다.
“우와악. 우와아아악!”
운위영이 발악을 하듯 손을 마구 휘저었다.
버언쩍. 번쩍.
콰아아아-!
피보다 더 진한 붉은 색의 강기가 연거푸 밀려 나왔다. 용무린을 통째 집어 삼켰다. 혈마오검 중 탈심혼과 혈영천세의 초식!
하지만,
파슷.
춤을 추듯 가볍게 나풀거리는 풍뢰의 움직임에 너무나도 허무하게 깨졌다.
그렇다. 그것은 분명히 검무였다.
덩실. 촤아아-.
휘어져 감기우고 다시 접어 뻗는 손끝에 풍뢰가 있었고 나비처럼 나풀거렸다.
“크아악!”
스아아아-악! 쩌저저저적!
풍뢰가 하늘하늘 움직일 때마다 그 끝에 걸린 모든 것이 잘려나갔다. 공간이 통째 어긋나는 환영과 함께 혈마오검의 초식들이 무위로 돌아갔고 운위영의 신체 일부가 몸에서 툭툭 떨어졌다.
“으아악!”
“커헉!”
용호단의 무인들 중 비명이라도 지를 수 있는 자들은 그래도 행복한 축에 속했다. 풍뢰가 통째 잘라버린 공간의 어긋남 속에 들어 있던 대부분이 비명 한 번 내지르지 못한 채 서너 조각으로 나뉘어 핏속을 뒹굴었다.
촤촥!
“커헉!”
이제 운위영은 혈마오검을 펼치지 못한다.
두 팔 두 다리를 모두 잃은 데다 내장은 이미 밖으로 꺼내어졌고 단전마저 깔끔하게 도려내져 버렸으니 할 수 없는 일이다.
“아으으. 아으으으…….”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오직 하나!
대호의 이빨에 걸린 사슴이라도 되는 양 벌벌 떠는 일뿐이었다.
물론 그래봐야 소용없는 일이었다.
스아악!
용무린의 손은 가차 없이 휘둘러졌고,
서걱! 둥실!
운위영의 목이 하늘 높이 떠올랐다.
우뚝!
그제야 용무린의 움직임이 멈춰졌다.
“……!”
“……!”
그런 용무린을 보며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 비스듬히 비켜 내린 풍뢰를 든 모습이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천신과도 같아 보였다.
그 위엄! 그 박력!
저 풍연호와 화운장로조차 숨도 크게 쉴 수 없었다.
용무린이 흐릿한 눈으로 주변을 슥 훑었다.
갑자기 풍뢰를 살짝 들어 올리더니 손가락으로 가볍게 검면을 퉁겼다.
따아아아-앙!
범종이라도 때린 듯 풍뢰가 웅장한 울음소리를 토해냈다.
흠칫. 퍼덕.
이미 정신을 잃고 쓰러진 옥풍과 총관을 비롯한 혈고에 당했던 사람들의 몸이 한차례 펄떡였다. 그런 후 이내 잠잠해졌다. 그 사람들의 귀를 타고 검게 죽은피가 흘러 나왔다. 그 피 속에 정체 모를 벌레가 들어 있었다.
혈고였다.
불사신기의 힘에 죽어버린 혈고가 밀려나온 것이다.
“무, 무린아!”
화운장로가 용기를 내었다. 떨리는 목소리로 용무린을 불렀다.
“……!”
용무린이 초점 없는 시선으로 화운장로를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갑자기 끈 떨어진 인형이라도 된 듯 풀썩 쓰러졌다.
“무린아!”
화운장로가 득달같이 달려 나왔다. 용무린을 품에 끌어안았다.
“허, 허허, 허허허…….”
비천검제 풍연호가 기가 막힌다는 듯 웃기 시작했다.
***
이레가 훌쩍 지나갔다.
그 시간 내내 용무린은 의식을 잃고 있었다.
“좀 어떻소?”
풍연호의 질문에 천의당 수석 의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여전합니다. 도대체 어떤 내공을 익혔는지는 모르겠으나 내, 외상이 저절로 치유되고 있습니다. 완전히 끊어지다시피 했던 기경팔맥은 이미 거의 다 이어졌고 심각하던 외상 역시 딱지가 앉았다가 떨어질 지경입니다.”
“하면 왜 아직도 정신을 차리질 못하고 있는 겁니까?”
답답하다는 듯 화운장로가 목소리를 높였다.
천의당 수석의원이 고개를 갸웃하며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머리 쪽에 문제가 있는 듯합니다.”
“머리?”
“그렇습니다, 맹주님. 그렇지 않고서야 지금까지 정신을 차리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허어…….”
안타깝다는 듯 풍연호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일어서는 천의당 수석의원의 팔을 화운장로가 잡아챘다. 포기할 수 없다는 듯 안타까운 목소리로 물었다.
“정녕 어떻게 할 방법이 없겠소이까?”
수석의원이 미안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답했다.
“부끄럽지만, 제 실력으로는 어찌할 방도가 없습니다. 지금으로서는 총순찰이 익히고 있는 불가사의한 내공의 힘을 믿을 수밖에 없을 듯합니다.”
솔직히 의원으로써 할 말이 아니었다.
혼수상태에 빠져 있는 환자가 스스로 일어나지 않으면 방법이 없다고 하다니!
“죽은 것이나 다름이 없는 상태에서도 이런 기적적인 회복력을 보여 주었으니 오래지 않아 틀림없이 정신을 차릴 것입니다.”
“암! 그래야지요!”
화운장로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리고 믿었다. 용무린이 머지않아 스스로 털고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틀림없어. 일어날 거야.’
그런데 정말 그럴 수 있을까?
갑자기 의심스러워졌다.
다시 한 번 이레 전의 일이 떠올랐다.
의원은 아니었지만 자신이 아는 한 용무린은 틀림없이 죽었었다.
파리하게 질린 얼굴색도 그러했지만 용무린의 성격상 죽지 않았다면 운위영의 손에 목줄이 틀어 잡히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죽으면 죽었지 그런 꼴은 당하지 않는 성격이었으니까.
‘운위영 그놈이 자신의 입으로도 분명히 밝혔었어. 이미 죽었다고 말이야.’
그쯤 되는 인간이 용무린의 죽음을 잘못 판단했을 리 없는 거다. 팽추영과 함께 운위영의 말을 똑똑히 들었고 함께 절망을 했었다.
‘그런데도 다시 살아났어.’
그냥 살아난 것이 아니다.
깜짝 놀랄 수준의 마공을 펼쳤던 운위영을 그야말로 장난감 다루듯 가지고 놀았다. 용호단 백수십 명을 도살을 해버렸다.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그 검법은 대체 뭐였을까?’
감히 맞설 엄두도 내지 못할 위력의 검법!
보는 순간 알았다. 맞서면 그대로 죽을 것임을.
‘대체 어떻게 익힌 거야? 설마하니 진천수라도와 비연오식에 이어 또 스스로 창안한 거야? 그래?’
정말 모를 일이다.
“아!”
막 뒤돌아 나가려던 수석의원이 반가운 소식을 전했다.
“그들이 드디어 정신을 차렸습니다.”
천리검향 옥풍을 비롯해서 혈고에 당했던 사람들이 정신을 차렸다는 뜻이었다.
“다행이구려. 정말 다행이오.”
“흥!”
풍연호가 환한 표정을 지었다. 진심으로 반가워했다.
반면에 화운장로는 콧방귀를 뀌었다. 시큰둥했다.
애타게 기다리는 용무린은 계속해서 혼수상태인데 원흉인 사람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정신을 차렸다니 부아가 치민 것이다.
“화운장로!”
풍연호가 나직하게 화운장로를 불렀다.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화운장로가 못이기는 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소이다, 맹주. 그만하시오.”
다 이해한다는 듯 수석의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볍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분들, 하나 같이 정신적으로 많이 힘들어하고 있습니다. 혈고에 종속당한 상태에서 자신들이 저질렀던 일을 모두 기억하는 듯합니다. 맹주님께서 한 번 찾아가 보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수석의원의 말에 풍연호가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그러하겠지요. 알겠습니다.”
지금 당장 가보겠다는 듯 풍연호가 성큼 나섰다.
“제길. 거의 활불이네 활불…….”
화운장로가 나직하게 투덜거렸다. 어금니를 콱 깨문 채 풍연호의 뒤를 따랐다.
꿈틀.
내내 감겨져 있던 용무린의 눈동자가 부르르 떨리더니 조금씩 아주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치 꿈을 꾸고 있는 듯이…….
***
천의각.
눈을 뜬 천리검향 옥풍은 자기혐오에 빠졌다.
‘내가, 당당한 화산파의 장로인 내가 그런 저열한 짓들을 벌여왔다니!’
정말 미칠 것만 같다.
자랑스러운 사문 화산파의 이름에 먹칠을 한 것은 물론이고 지금껏 쌓아 올린 자신의 명예마저도 똥통에 빠뜨려 버린 셈이다.
‘그뿐이면 말도 안 해. 온갖 이권에 개입을 해 중소방파들에 압력을 행사한 것으로도 모자라 순수하던 도량 화산파마저 물욕에 물들였어!’
세상에, 살수집단인 백마사를 은밀히 운용하기까지 했다.
도대체 이 업보를 어떻게 갚아야 할까?
너무나 막막했다.
‘죽을까? 콱 내 목을 베어 버릴까?’
그렇게 해서 모두 씻어낼 수 있다는 확신만 있다면 백 번이고 천 번이고 자신의 목을 스스로 치리라.
그때였다.
끼익.
문이 슬쩍 열리고 지금은 절대로 마주치고 싶지 않은 얼굴들이 안으로 들어섰다.
“허허허. 부맹주. 몸은 좀 어떠십니까?”
휙.
풍연호의 웃는 낯을 확인한 즉시 옥풍은 잔뜩 굳은 얼굴로 뒤돌았다. 그런 옥풍의 마음을 십분 이해할 수 있다는 듯 풍연호는 따뜻한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이렇게 건강한 모습을 다시 뵙게 되니 이 풍모,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습니다.”
파르르.
옥풍의 눈자위가 가늘게 떨렸다.
이러는 자신이 싫었다.
무능력하다는 모함에 이어 뭇 사람들과 함께 찬탈을 시도하기까지 한 자신에게 저렇듯 따뜻한 말을 건넬 수 있는 아량과 자신의 처지가 비교가 되어 견디기가 힘들었다.
“차라리 내 목을 베시오, 맹주.”
냉랭한 말이 툭 튀어나갔다.
하지만 진심이었다.
지금까지 저질렀던 모든 죄과를 낱낱이 사문에 밝힌 후 화산파의 체면만이라도 보전할 수 있도록 해준다면 대연무장에서 무림맹의 모든 이들을 모아 놓은 후 목을 벤다 하더라도 웃으며 죽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풍연호의 입에서는 천만 뜻밖의 말이 흘러 나왔다.
“대관절 제가 무엇 때문에 부맹주님의 목을 벤단 말씀입니까?”
“…….”
“그저, 한바탕 악몽을 꾸었다고 생각하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욱신.
옥풍의 심장이 찌르듯 아렸다.
차라리 욕설을 하고 벌을 주고 미워했다면 조금이라도 마음이 편했을 터인데 저리 따뜻하니 더 면목이 없다.
툭.
잔뜩 붉어진 옥풍의 눈가를 타고 기어이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리고 말았다.
“적은 마교입니다. 우리 사이가 아니지요.”
“……!”
“털고 일어나십시오. 마음이 정 불편하시다면 말미를 드릴 터이니 사문에 한 번 다녀오시는 것도 좋을 듯합니다. 부맹주님이라면 잘못된 것들을 능히 제자리로 되돌려 놓을 수 있다는 걸 저는 알고 있습니다.”
서슴없이 기회를 준다.
‘졌다! 완벽하게 졌어.’
혈고에 종속당한 것도 있겠지만 솔직히 무림맹주 풍연호를 질투하기도 했었다. 구파 출신도 아니면서 무당파와 소림 그리고 개방의 절대적인 비호를 받아 무림맹주로 오른 그를 보며 자신과 비교를 했었다.
‘어째서 내가 아니고 그일까?’
마음 깊은 곳에서는 풍연호를 인정하지 않는 마음이 솔직히 존재했다. 그랬기에 혈고에 더 쉽게 더 깊이 종속되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이제는 알 수 있었다.
‘저런 성품 때문이었던 거야. 나와는 애초에 그릇 자체가 다른 인물이었어.’
인정하고 나니 마음이 조금은 후련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때 퉁명스럽기 짝이 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그 영감탱이 더럽게 구질구질하게 구네. 빨리 안 일어나 이 말코야? 조금이라도 기력이 있으면 무림을 위해 죽어라고 봉사해! 그러면 되지 왜 청승맞게 그러고 있는 건데? 앙?”
화운장로였다.
여전히 뒤돌아 있던 옥풍은 그만 슬쩍 웃고 말았다.
목소리야 여전히 쌀쌀맞았지만 그 안에 담긴 내용은 반대라는 걸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옥풍이 천천히 돌아앉았다.
과거와는 달리 맑고 깊은 눈빛으로 맹세를 했다.
“지금 이 시간부로 화산의 옥풍은 다시 태어났소. 무림의 안위와 협을 위해 이 목숨 기꺼이 내어놓을 테니 마땅히 죽을 자리에 이 몸을 던져주기 바라오. 기꺼이 웃으며 죽어드리리다.”
“무슨 말씀을!”
“지랄하네! 죽을 생각으로 살아! 열심히 일해. 죽긴 왜 죽어?”
“그럼 보중하십시오.”
풍연호가 밖으로 나섰다. 혈고에 당한 다른 수뇌부들이 있는 곳을 두루 돌아볼 생각인 것이다.
“간다, 말코야. 몸조리나 잘 해라.”
그 뒤를 따르던 화운의 목소리가 조금은 상냥해졌다.
‘죽는 건 나중으로 미뤄야겠구나.’
자신이 죽을 자리는 이곳이 아니었다.
‘그때는 기쁜 마음으로…….’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그때는 정말 기쁜 마음으로 웃으며 죽을 수 있을 것이란 확신이 들었다.
‘날이 좋구나.’
다시 태어난 옥풍을 축복이라도 하듯 하늘이 무척이나 맑았다.
***
내내 감겨져 있던 용무린의 눈이 번쩍 떠졌다.
“아우, 개운해라!”
한숨 잘 잤다는 듯 용무린은 기지개까지 켰다.
근심 가득한 얼굴로 내려다보고 있던 화운장로가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무린아!”
“아이, 깜짝이야! 장로님. 제 방엔 웬일이세요?”
“괜찮으냐?”
“괜찮지 않고요?”
“……?!”
갑자기 웬 호들갑이냐는 듯 용무린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화운장로의 입이 쩍 벌어졌다. ‘이런 괴물을 봤나?’ 하듯 고개를 흔들며 입을 열었다.
“기억이 안 나느냐?”
“기억이요?”
“열흘 내내 너는 혼수상태에 빠져 있었느니라.”
그제야 용무린의 고개가 갸웃하고 기울었다.
‘열흘 전이라…….’
가만히 눈을 감고 정신을 잃기 전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떠올렸다.
‘운위영. 더럽게 얍삽한 놈!’
압도적인 내공의 우위를 내세워 얍삽하기 짝이 없는 방법으로 자신을 몰아붙였던 운위영이 떠올랐다.
‘정말 답이 없는 놈이었는데…….’
내공이 비슷했었다면 오래지 않아서 목을 날려 버렸을 거다. 아니, 하다못해 풍뢰나 소검비연에 극독만 발라 두었어도 이겼을 것이다. 풍뢰와 소검비연이 녀석의 몸 곳곳에 생채기를 꽤 많이 냈었으니까.
‘한데 풍뢰나 소검비연에 독은커녕 물도 안 발랐지.’
지금 생각해 보니 참 멍청한 짓이었다.
‘그런데도 지금 내가 이렇게 멀쩡한 이유는?’
화운장로를 바라보던 용무린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답이 눈앞에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장로님이 그 인간을 박살냈나요?”
“누구?”
“운위영.”
“……!”
화운장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입을 살짝 벌렸다.
‘뭐야? 자꾸 왜 저러지?’
화운장로의 태도를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용무린의 고개가 갸웃하고 기울었다.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어보이고 있던 화운장로의 입이 불쑥 열렸다.
“그놈, 네가 죽였다.”
“예-에? 제가요?”
“그래. 네가.”
“…….”
믿을 수 없다는 듯 입을 쩍 벌린 용무린에게 화운장로는 자신이 보았던 것들을 가감 없이 알려주었다.
죽음과 부활.
거기에 더해 마공을 펼쳤던, 그것도 무형의 핏빛 검을 손아귀에 만들어 냈던 운위영을 장난감 다루듯 했던 의문의 검법까지…….
‘맙소사. 내가 죽었었다고?’
놀라운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부활한 것으로도 모자라 뭔가 모를 엄청난 검법을 펼쳐서 빈손에 핏빛 검을 만들어낸 운위영을 가지고 놀다가 공간을 쪼개어 죽였다?’
우선 빈손에 핏빛 검을 만들어내는 마공이라면 기억 속에 있다.
‘혈마궁주의 독문무공인 혈마오검이 그랬었지?’
초식 이름까지 다 떠올랐다.
사멸령, 탈심혼, 혈마뢰, 혈궁뢰, 천절환의 전 오식에 이어 숨겨진 후삼식이 더 존재하는데 후삼식이 훨씬 파괴력이 높았던 것으로 기억되는 무공이었다.
‘상관엽이 그러했듯 운위영 역시 알려진 다섯 초식은 죄 익히고 있었다는 뜻인데 그걸 내가 가지고 놀다가 죽였다고? 공간까지 갈라서?’
바로 그 순간이었다.
용무린의 머릿속에 하나의 춤이 스쳐 지났다.
“검무!”
두터운 안개 저편에서 환영처럼 흐르는 하나의 춤사위가 흐릿하게 보였다.
‘잡아야 해!’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것을 붙잡아야 한다는 것을.
용무린은 즉시 눈을 감고 좌정을 했다.
사력을 다해 흐릿한 그 춤을 떠올리기 위해 집중했다.
‘힘을 내라, 무린아.’
용무린이 중요한 단초를 잡았음을 직감한 화운장로는 입을 다물었다. 소리 없이 밖으로 나간 후 용무린이 방해받지 않도록 주변을 지켰다.
***
하루 반나절 동안이나 노력했지만 허사였다.
‘젠장. 실체를 잡을 수가 없다니!’
조금이라도 단서를 잡거나 그 검무가 무엇인지 깨닫게 되기를 바랐지만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검무를 가로막고 있는 안개는 너무나 두터웠다.
검무를 추었다는 것만 확실히 알 수 있었을 뿐 건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니, 건진 것이 꽤 있군.’
포기하고 일어서려는 순간 알 수 있었다.
단전의 절대적인 크기가 이전보다 훨씬 더 넓게 확장이 되어 있다는 것을.
‘드디어 초절정 경지의 그릇인가?’
운위영과의 생사결을 통해 다시 한 번 경계를 넘은 모양이었다.
‘정신을 잃고 있는 사이 벌어진 일이라 자존심이 조금 상하긴 하지만 뭐 어때? 결국 내 손으로 그 자식을 죽였다는데 말이야.’
그토록 바라 마지않던 초절정 경지의 내공이다.
이제부터야말로 그 누가 되었든 밀리지 않는다. 수틀리면 가볍게 모가지를 따줄 수 있다.
‘신교 오궁의 궁주 놈들이라고 해도 한 놈이라면 충분히 눌러줄 수 있지.’
놈들의 내공은 단순한 초절정의 경지가 아니었다.
진마, 혹은 탈마라 부르는 경지에 오른 놈들인데 그 경지부터는 내공의 깊이가 지닌바 무공의 깨달음과 바로 직결이 된다.
‘축융궁의 궁주도 그러더니 혈마궁의 궁주 놈도 제 독문무공을 타인에게 전수했단 말이지.’
그 말은 곧 놈들은 숨겨져 있던 비장의 초식들을 이미 완벽하게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는 것을 뜻한다.
‘그래도 한 놈씩이라면 괜찮아.’
살면서 신교 오궁의 주인들에게 떼로 둘러싸일 확률이 대체 얼마나 되겠는가?
‘그건 그렇고, 조금 아쉽구나.’
초절정의 그릇으로 확장을 했을 때 의식이 있었다면 신체를 재구성하는 탈태환골까지 이끌어내었을 터, 그 기회를 놓친 것이 못내 아쉬웠다.
‘언제고 또 기회가 오겠지.’
무공에 입문한 지 이제 겨우 일 년 남짓이 아닌가? 기회는 아직도 많은 것이다.
‘일단 밖으로 좀 나가 볼까?’
무림맹주 비천검제 풍연호를 만나 볼 생각이었다.
‘만나 보면 알겠지?’
불사신기와 흡사한 내공!
어떻게 그 내공을 지니고 있게 됐는지 알면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비밀이 한 꺼풀 벗겨지게 될지도 모른다. 더불어 성산의 기문진이 파훼된 비밀도…….
“가자!”
용무린은 힘찬 발걸음으로 밖으로 나섰다.
“무린아!”
그때까지도 호법을 서고 있던 화운장로가 반색을 하며 용무린을 반겼다.
“그래, 성과는 있었느냐?”
“아직요. 아직 때가 아닌가 봐요.”
용무린은 풀썩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잠시 안타까운 표정을 지어 보였던 화운장로는 이내 환하게 웃었다. 용무린의 어깨를 툭툭 두들겨 주었다.
“괜찮다. 일단 네가 펼쳤던 것이 검무의 한 형태였다는 것을 알아냈질 않느냐? 시작이 반인 거다. 오래지 않아 네 것으로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다.”
“예, 장로님.”
“배고프겠구나. 식사 먼저 하겠느냐?”
“아뇨, 일단 맹주님부터 좀 만나 보고요.”
배고픔보다 궁금증이 더 컸다.
“그러자꾸나. 그렇지 않아도 맹주께서 네가 깨어나기만을 학수고대하고 있었다. 허허허.”
화운장로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용무린을 이끌었다.
그간 무림맹에서 벌어진 일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용무린에게 들려주었다.
“……그래서 옥풍 그 말코는 지금 사문인 화산파로 가 있고 곡양이나 서보 도장 역시 종남과 청성파로 돌아가 있지. 그동안 자신들 문파에 집중되었던 온갖 이권을 조금이라도 되돌린 후 돌아올 게야.”
“그랬군요. 잘 됐네요. 정말 잘 됐어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기분이 묘했다.
두 가지 상반된 생각이 동시에 스쳐 지났기 때문이었다.
‘나중에 내가 정복하기 위해서는 그 문파들이 계속해서 나쁜 짓을 해줘야 편한데 말이야.’
그래야 다 때려 부숴도 민심은 잘했다고 할 것이다.
반면 이런 생각도 들었다.
‘한데 요즘은 꼭 그렇게 박살내서 정복해야만 다가 아니라는 생각도 든단 말이지…….’
특무순찰조 다섯 조장 사문의 어른들과 만난 후부터 느낀 것이었는데, 전폭적인 지지와 믿음 그리고 추종을 받는 것도 정복의 또 다른 모습일 것이라는 생각과 그게 나쁘지 않은 것 같다는 느낌이 자꾸 들었다.
‘다 때려 부수고 차지하면 속이야 시원할 텐데 다들 나를 공포적인 존재로만 인식하겠지?’
그런 것은 이미 상당 기간 겪어 봤다.
전생이었던 신마 진무량 시절, 십만 마도인들에게 자신은 경외이자 공포의 대상이었다. 인상만 살짝 찌푸려도 죽을까 봐 다들 떨었다.
하지만 지금 겪는 것들은 완전히 그와는 반대였다.
“총순찰님 일어나셨군요!”
“정말 다행입니다, 총순찰님.”
“정말 최고입니다!”
안면이 있는 모두가 자신을 반겼다. 정신을 차리고 일어난 것을 기뻐했고 추앙했으며 환하게 웃어 보였다. 그 기분이 정말 남달랐다.
‘비룡문에서만 느껴봤던 건데 말이지.’
척! 처처척!
자신을 본 모두가 제자리에 멈춰 섰다. 정중한 태도로 포권을 취해 보이며 뜨거운 시선을 보냈다.
‘거 참…….’
자신도 모르게 살짝 웃고 있다는 것을 느낀 용무린은 내심 고개를 흔들었다.
툭툭.
화운장로가 등을 두들겨 주며 말했다.
“활짝 웃어도 좋다. 네가 무림맹의 새 희망이니까.”
“새 희망? 제가요?”
“그래. 네 나이는 비록 어리지만 저들에게 있어 너는 등불이고 앞날에 대한 희망이다. 앞으로 마교가 전면전을 선포한다고 하더라도 네가 있기에 능히 이겨낼 수 있다고 믿는 것이란 말이다.”
그날, 죽음에서 부활했던 바로 그 순간, 빈손에 핏빛 검을 만들어 보였던 마공을 공간까지 동시에 갈라버리는 검법으로 부숴버린 용무린의 무위는 이미 살아 있는 전설이 되어 버렸던 것이다.
손가락으로 풍뢰를 때려 혈고에 종속되었던 이들을 구했던 일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 자리에 있던 대부분의 무인들은 혈고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지만, 범종과 같은 공명음을 토해내던 풍뢰 소리에 수뇌부들이 귀에서 피를 쏟으며 기절했던 것을 모두 똑똑히 보았다.
그 핏속에 죽어 있던 혈고 역시 모두가 목격했다.
그런 후 수년간 장사꾼처럼 행동하던 수뇌부들이 완전히 정반대의 성향으로 바뀌었으니 대체 용무린의 무위를 어떻게 보겠는가?
용무린은 그들에게 희망 그 자체인 것이다.
“……!”
용무린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기분이 정말 오묘했다.
“총순찰님!”
“일어나셨군요. 걱정 많이 했습니다.”
“다행입니다, 총순찰님.”
소식을 들었는지 천안각주 팽추영과 무공교두 황보승 그리고 집법당주 점창의 백엽 도장이 어디선가 나와 용무린을 반겼다.
“예, 덕분에요.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맹주님 좀 만나 뵙고 다들 찾아뵐게요.”
용무린도 마주 포권을 취해 보였다.
“하하하. 꼭 그래 주셔야만 합니다.”
“술상을 봐 놓고 기다리고 있겠소이다.”
“아이쿠. 술상을 봐 놓는다면 말코는 빠지라는 말씀이 아니오? 너무 하외다.”
“하하하. 비장의 철관음을 내어 놓겠소이다. 걱정 말고 오십시오, 백엽 도장.”
“감사하오이다. 하하하.”
용무린을 반기고 아끼는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정말 나쁘지 않단 말이지.’
무게추가 한쪽을 향해 자꾸만 기우는 것을 느끼며 용무린은 맹주전으로 들었다.
***
“하하하. 어서 오시게, 총순찰.”
집무를 보던 풍연호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활짝 웃으며 앞으로 나와 용무린을 반겼다.
“그래, 몸은 좀 어떠신가?”
말도 부담스러울 정도로 높였다.
“자꾸 왜 이러세요? 평소대로 하세요, 평소대로.”
용무린이 슬그머니 눈을 흘겼다. 퉁명스럽게 말했다.
다른 사람들이야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넘기겠는데 맹주까지 저러니 너무 낯간지러웠던 것이다.
“파하하. 무림맹을 진정한 무림맹으로 거듭나게 해 준 은인인데 이 정도 존대가 무에 대수이겠소? 아니 그렇습니까? 화운장로?”
“하하하하하. 말이야 바른 말이지요.”
척하면 착이라는 듯 화운장로가 장단을 맞추었다.
용무린의 눈이 가느다래졌다.
혹시라도 용무린이 사라질까 두려운 것인지 풍연호가 농을 거두었다. 자리를 권했다.
“자, 어서 앉지.”
쪼르륵.
따뜻한 차를 따르며 풍연호가 빙그레 웃었다.
“내 유일한 사치일세. 오 년 이상 발효시킨 운남의 보이차라네. 들지.”
“무린이 덕에 거지 입이 호강합니다, 그려.”
“하하하. 총순찰을 무림맹에 데려온 공이 적지 않으니 내 우리 화운장로께서 원하기만 한다면 언제든지 차를 내어 드리리다.”
“하하하. 틀림없이 약속하셨습니다!”
“물론입니다, 화운장로.”
풍연호의 시선이 용무린에게로 돌려졌다.
진심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덕분에 무림맹에 드리웠던 암운을 깨끗이 거둬낼 수 있었네. 일부 문파들에게만 집중이 되었던 특혜나 이권을 모두에게 혹은 공평하게 되돌리는 작업에 들어갔네. 일부 어려운 부분도 있긴 하지만 오래지 않아 전부 정상화가 될 걸세.”
다 좋은 이야기였다.
하지만 용무린이 원하던 이야기는 전혀 아니었다.
용무린은 풍연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거짓은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단호한 목소리로 질문을 던졌다.
“불사신기. 그걸 대체 어떻게 맹주께서 익히고 계시는 것이죠?”
“……!”
화운장로의 눈이 동그래졌다.
용무린과 풍연호를 열심히 번갈아 보았다.
불사신기가 신교 조사동에 규천마력과 함께 있는 무공이라는 것을 설명할 자신이 없었던 용무린은 절대검신 독고황을 물고 늘어졌다.
“제가 익히고 있는 내공의 정식 명칭은 불사신기. 비룡문과 함께 신주오가에 속한 일원들에게 절대검신 독고황 조사께서 남긴 호심결로 알고 있습니다.”
“나 역시 그렇게 알고 있네.”
풍연호가 선선히 용무린의 말을 인정했다.
화운장로의 입이 쩍 벌어졌다.
궁금한 점들이 계속해서 떠올랐지만 용무린의 말을 끊는 우를 범하지는 않았다.
용무린의 말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하지만 비룡문에 남겨진 호심결은 여타 신주오가의 그것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여타 신주오가의 호심결은 너무나 많은 것이 누락되고 뒤바뀌어 제가 익힌 것과 같은 힘을 발휘할 수 없지요.”
“……!”
“다시 한 번 묻겠습니다. 절대검신 독고황 조사님의 모든 것이나 다름없는 불사신기를, 제가 한 번 겪어 보니 완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만, 하여간 어떻게 그 수준까지 익힐 수 있었지요?”
용무린의 목소리가 점점 더 날카로워졌다.
풍연호와 처음 만났었던 때 어떤 분께서 자신을 찾아 무림의 미래를 맡겨야 한다는 말을 듣긴 했지만 그런 뜬구름 잡는 이야기엔 그다지 끌리지 않았던 것이다.
“성산의 기문진이 붕괴되고 유진이 사라진 일, 그 일에 맹주께서 연관이 있는 것입니까?”
“무린아!”
용무린의 단도직입적인 질문에 화운장로가 화들짝 놀랐다. 그러면서도 무슨 말이 나올 것인지 궁금해 미치겠다는 듯 풍연호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풍연호가 정기 가득한 눈을 빛내며 고개를 흔들었다.
“내 목을 걸고 그것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네.”
“……!”
풍연호가 목을 걸었지만 용무린은 의심의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여전히 날카로운 눈으로 풍연호를 쏘아 보았다. 풍연호의 입에서 놀라운 말들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