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금이 가는 껍질
“알고 있는지 모르겠네만 오늘 날 나를 만든 것은 모두 소림과 무당 그리고 개방의 힘이네.”
맞는 말이다.
단순히 무림에서 명성이 조금 있는 정도에 불과했던 풍연호가 어느 날 비천검제라는 무명으로 두드러지게 된 데에는 소림과 무당 그리고 개방이 모든 일에 앞서 풍연호를 전면에 내세웠기 때문이었다.
“단순히 나를 전면에 내세워 명성을 키워준 것뿐만이 아니네. 무림이란 곳은 명성만으로 무언가를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
“그러면?”
“소림의 전대 장문방장이셨던 혜월 대사님께서 나를 속가로 받아주셨을 뿐만이 아니라 천기자님께서도 나를 어여삐 여겨 속가로 받아주셨지.”
“맙소사. 혜월 대사님과 천기자 선배님께서 맹주를 직접 속가제자로…….”
그런 비사가 있었는지는 화운장로도 몰랐다는 듯 입을 쩍 벌렸다. 그런 화운장로를 향해 풍연호가 시선을 돌렸다. 씽긋 웃어 보였다.
“소림과 무당의 무공이 아니라 사적으로 얻으신 무공들을 사사하셨지요. 거기에 더해 지금은 공석인 당시 개방의 태상장로님께서 실전비무로 저를 담금질해 주셨소이다.”
“이제야 이해가 가오이다, 맹주. 어째서 소림과 무당 그리고 우리 개방이 그렇게 맹주를 믿었는지 말이외다.”
“그런데요?”
화운장로의 이해와는 달리 용무린의 목소리는 여전히 날카로웠다.
“불사신기는요? 그건 대체 어디에서 어떻게 얻었죠?”
“혜월 대사님께 사사했네.”
“……?!”
용무린의 눈이 동그래졌다.
설마하니 소림의 혜월대사에게 불사신기를 사사했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불사신기는 자네도 알다시피 절대검신 독고황 그분의 진신절기 중 근본이 되는 것, 그 유래나 기원이 어디에 있는 줄은 들은 바 없으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절대검신 독고황 그분께서 소림의 혜월 대사님과 무당의 천기자님과 돈독한 관계에 있었다는 걸세.”
‘천기자는 그렇다고 치고 소림의 혜월 대사님과도 관련이 있었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네.’
천하공부출소림!
‘설마하니 불사신기마저 소림에서 나왔다고 말하고 싶은 거야? 그래?’
그것만큼은 아닐 것이다.
소림에서 유래가 된 무공의 원본을 신교의 조사동에 규천마력과 나란히 놔둘 까닭이 없으니까.
‘그럼 뭐지? 대체 어떻게 해서 소림의 땡중이 불사신기를 알고 있으며 또 제멋대로 풍연호 맹주에게 가르쳤다는 것이지?’
정말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침묵에 빠진 용무린에게 풍연호가 말을 덧붙였다.
“천기자님께서 순천자를 찾으라 하셨네. 불사신기의 진정한 계승자를, 불가와 도가에 얽매이지 않으면서도 만마를 제압할 수 있는 불사신기를 오롯이 이은 사람을 찾으라고 말일세. 그래서 총순찰을 찾게 된 걸세.”
이번에는 또 천기자다.
‘코빼기도 못 본 양반인데 날 어떻게 그리 잘 안담?’
새삼 궁금증이 도질 수밖에 없었다.
풍연호의 말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천기자님의 말씀대로 무림맹이 변질되고 난 후부터 나는 무림을 주도면밀하게 살폈네. 무림맹을 변질시킬 수 있는 힘은 마교 이외는 없었고 마교의 수작으로부터 건재하며 두각을 나타내는 자가 바로 불사신기의 진정한 계승자라는 천기자님의 말씀 때문이었네.”
하마터면 코웃음이 터질 뻔했다.
‘웃기는군. 내 전생이 바로 70년 전 신마대전의 원흉인 신마 진무량이었는데 무슨 놈의 불사신기의 진정한 계승자 운운이야?’
비웃음이 터지려는 것을 겨우 억누르고 있을 때 풍연호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했던 말이 다시 한 번 터졌다.
“이제야 그분들의 깊은 심모원려를 깨달을 수 있었네. 그분들께서 내게 불사신기를 전수한 까닭은 불사신기의 단절을 염려하셨음이야.”
확대해석하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불사신기는 신주오가에게만 베풀어진 절대검신 독고황의 진신절기 중 가장 중요한 근본이었다.
한데 상관세가와 운룡장은 벌써 마교에 잠식당했다.
전체가 그러하지는 않을지라도 수뇌부가 그러했으니 이미 오염이 되었다고 봐야 한다.
게다가 비룡문마저 풍전등화의 위기에 빠졌었으니 어쩌면 천기를 내다볼 수 있었던 천기자로서는 모든 경우의 수를 염두에 두어야만 했으니 혜월대사와 상의를 해 그런 결정을 내렸을 수도 있겠다.
“천기자께서 그러셨네. 스스로를 잘못 알고 있을 것이라고, 누구든 그러하겠지만 때가 많이 묻었다고 하셨네. 그만큼 껍질이 단단하니 기다려야 한다고 하셨지.”
쾅.
뒤통수를 망치로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다.
더불어 두터운 안개 속에 가려 환영처럼 흐릿하던 검무의 모습이 조금은 또렷해진 느낌이 들었다.
‘뭐지?’
물론 아직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분명한 것은 이전보다 확실히 또렷해졌다.
‘이게 대체 무슨 조화속이야?!’
-너 자신을 찾아라. 네가 원하지 않는다 해도 반드시 그리 될 게다.
천기자가 남긴 쪽지의 글귀가 홀연히 떠올랐다.
‘소림으로 가 봐야 하나?’
왠지 그런 느낌이 들었다.
천기자는 어디론가 숨어 코빼기도 보기 어려우니 소림을 찾으면 뭔가 속이 시원해질 듯싶었다.
“혜월 대사님이라고 했나요?”
“그래.”
“입적하셨을까요? 아니면 아직도 건재하실까요?”
“너무나 불충해서 그 사실을 나는 모르고 있네. 때때로 찾아뵙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으나 혹시라도 역천자의 눈에 걸려 일을 그르칠까 두려워 찾아뵙지 못했다네.”
풍연호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마음 속 깊이 사부님으로 모셨던 분의 안위조차 알지 못한 것에 대한 자책일 것이다.
‘역천자라…….’
자꾸 마교와 얽히는 것이 역천자라 부르는 인물이 마교에 숨어 있을 것만 같았다.
‘에이, 모르겠다. 일단 소림을 한 번 찾아가보자.’
궁금해서 도저히 못 참겠다.
입적을 했을지 아직 살아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한 번 찾아가봐야 할 것 같았다.
‘그것도 지금 당장 말이지.’
결심이 서자마자 용무린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소림으로 가겠어요.”
“잘 생각했네.”
“함께 가자 무린아.”
풍연호가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화운장로가 대뜸 따라 나섰다.
***
“……!”
막상 밖으로 나선 용무린은 잠시 멈춰선 채 침묵했다.
“어째서 그러느냐?”
화운장로의 질문에 용무린은 고민이 가득한 얼굴로 혼란스러워했다.
“재채기가 나올락 말락 할 때 기분 아시죠?”
“당연하지. 거, 안 나오면 무지 아쉽거든.”
“제 기분이 지금 그래요. 소림으로 가긴 가야겠는데 다른 일을 끝내지 못해서 무지 아쉽거든요.”
“뭐가 그렇게 아쉬운데?”
“운룡장. 상관세가.”
“……!”
화운장로의 안색이 살짝 변했다.
용무린의 목소리에서 피 냄새가 묻어나는 듯했기 때문이었다.
“이자는 대충 갚은 것 같은데 아직 원금을 갚지 못했단 말이죠.”
원금을 갚겠다는 말은 쫓아가서 아예 박살을 내 버리겠다는 뜻! 화운장로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달래듯 말을 이었다.
“이미 의천단과 풍운단이 움직였다.”
“예? 무림맹의 무력단체들이요?”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용무린의 입에서 상관엽이 마공을 익혔었다는 증언이 나왔었고 운룡장의 운위영은 그날 대 연무장에 있던 모두가 마공을 펼치는 모습을 목격했다.
“당연하지. 상관엽과 운위영 외에 또 누가 마공을 익혔는지, 혹은 그들 두 가문 전체가 마교에 종속당했는지 파헤칠 때가 된 거야!”
“쉽지 않을 텐데요?”
다소 의심스럽다는 가늘게 눈을 뜨는 용무린을 향해 화운장로는 큰 소리를 탕탕 쳤다.
“충분할 걸? 상관세가는 의천단주 당유현이 300에 달하는 의천단 전원을 이끌고 갔고 운룡장은 풍운단주 남궁헌이 역시 풍운단 300명을 몽땅 이끌고 갔으니까 말이야.”
실로 막강한 전력이었다.
개개인이 일류 상급에서 절정에 다다른 무인들로 구성된 의천단과 풍운단 전체가 움직였다니!
‘상관세가와 운룡장이 정말 통째 마교에 종속된 놈들이라고 한다면 그 정도로는 힘들어.’
비룡문의 담을 넘었던 놈들, 팔다리가 뚝뚝 떨어져 나가도 아무렇지도 않게 달려들어 검을 휘두르는 놈들이 개입한다면 되레 몰살당할 가능성이 높았다.
피식.
용무린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있다는 듯 화운장로가 가볍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염려하지 마라. 비룡문의 담을 넘었던 놈들에 대한 말을 듣고 이미 추가 병력을 준비해 놓았다. 근처에서 대기 중일 게다.”
“아!”
용무린의 얼굴이 그제야 밝아졌다.
“상관세가는 소림 천불전 소속 무승 50명과 황보세가의 권사 30명이 인근에서 대기 중이고 운룡장은 남궁세가의 제왕검대 70명과 무당파의 양의검수 50명이 근처에서 대기 중이니 말이다.”
“그 정도라면…….”
충분하다는 듯 용무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때? 그래도 원금을 갚아야겠냐?”
“……!”
용무린은 즉답을 피했다.
상황이야 잘 알겠는데, 자신이 직접 찾아가 다 때려 부수는 것과 무림맹의 입에 의해 제재를 받는 것을 지켜보는 것은 꽤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반드시 네 손으로 다 때려 부숴야지만 원금을 갚을 수 있는 것은 아니야. 나서는 것은 무림맹과 무림맹에 소속된 문파들이지만 그들을 움직인 존재는 결국 너라는 것을 생각해야지.”
듣고 보니 그렇기도 하다.
‘꼭 내 손으로 다 때려 부수지 않고 진심 어린 추앙과 지지 그리고 믿음을 얻어내는 것 역시 정복이나 다름없다는 것과 비슷한 셈인가?’
아직 완전히 납득이 되지는 않지만 무게추가 그쪽을 향해 상당히 기울어가고 있다는 것을 용무린은 부인할 수 없었다.
‘에이, 모르겠다. 일단 지켜보자.’
지켜보다가 영 시원찮으면 그때 자신이 나서면 된다.
‘일단은 소림으로…….’
“가죠!”
결심을 굳힌 용무린이 성큼 발을 내딛었다.
“그래.”
활짝 웃어 보인 화운장로가 그 뒤를 따랐다.
***
열흘 후 숭산.
‘여긴 확실히 뭔가 느낌이 좀 다르네.’
소실봉을 오르던 용무린은 주변 경치를 둘러보며 연신 고개를 주억거렸다.
마교가 자리 잡은 십만대산은 그야말로 첩첩산중인지라 들어선 사람으로 하여금 숨이 막힐 정도의 압박감을 준다면 숭산은 정확히 반대였다.
들이켜는 숨마다 웅혼한 기가 차오르는 듯했으며 정신이 절로 맑아졌다. 그래서 지금 이 순간에도 향화객들이 이렇듯 많이 오르는 것이리라.
“어떠냐? 소실봉에 오른 소감이. 가슴이 탁 트이지?”
“괜찮네요.”
저 무림맹을 봤을 때조차 시큰둥한 표정을 지어 보였던 용무린으로서는 대단한 칭찬인 셈. 만족스러운 반응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여 보인 화운장로가 주의를 주었다.
“방장스님 보거든 예의 좀 갖춰라.”
“제가 언제 버릇없이 굴었나요?”
“그럼 아니냐? 너는 인석아, 무림맹주 처음 봤을 때도 한 번 붙어보자는 듯 주먹부터 말아 쥐었었어! 알아?”
“……!”
용무린은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사실이었으니까.
“다 왔다.”
화운장로가 한 곳을 가리켰다.
소림의 초입인 일주문이 저만큼 앞에 보였다.
건립된 세월만큼이나 고풍스러운 일주문을 향화객들이 자유로이 들어가고 나오고 있었다. 소림의 산문이나 마찬가지인 곳인데 지키는 승려가 아무도 없다니 조금 의외였다. 비룡문을 제외하면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자유롭게 사람들이 드나드네요?”
“당연하지. 소림은 무림문파이기 전에 선종의 본산이기도 하지 않느냐? 향화객들의 방문을 막거나 의심의 시선을 보낼 이유가 없다.”
“하긴…….”
그렇게 고개를 끄덕이며 진입한 소림.
이미 수차례 방문했던 경험이 있던 화운장로는 용무린을 향화객들이 주로 찾는 대웅전이 아닌 한적한 곳으로 이끌고 갔다.
“저곳까지는 학승들이 주로 기거하는 외원이랄 수 있고 바로 이곳 내원부터가 진정한 소림이라고 할 수 있지.”
낮은 담장과 조그만 산문 하나 딸랑 있는 곳이었지만 과연 구분이 있었던지 형형한 눈빛의 승려 한 사람이 외인의 출입을 차단하고 있었다.
“여어, 원각. 잘 지냈는가?”
아는 얼굴이었는지 화운장로가 반색을 했다.
“화운장로님! 그간 별래 무량하셨습니까?”
원각이 반장의 예를 취하며 웃었다.
화운장로가 용무린을 가리키며 너스레를 떨었다.
“이 녀석 덕에 요즘 심심치 않게 지내고 있다네.”
“……?”
원각이 천천히 용무린을 살폈다.
‘좋은 눈빛이네.’
사대금강의 일인이었던 일각만큼이나 맑은 눈빛이었다.
태양혈이 불룩하게 치솟아 있는 것으로 보아 상당한 깊이의 내공을 지녔으리라.
“이 시주는……?”
“비룡문의 용무린이라고 합니다.”
용무린은 정중히 포권을 취해 보였다.
배분이 어떻게 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일각에게 입었던 구명지은과 목숨을 걸고 비룡문을 지켜낸 일명, 일송을 봐서라도 소림의 승에게 함부로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아! 시주께서 그 이름 높은 삼절일학 용무린 대협?!”
원각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반장의 예를 취하며 자신을 밝혔다.
“나한당의 원각이라 합니다, 아미타불.”
‘엥? 나한당 소속이라고?’
나한당의 무승이 어째서 문지기나 하고 있는 것일까?
용무린의 궁금증이 얼굴에 고스란히 나타나 있었던지 화운장로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대신 답했다.
“허허허. 본래 소림이 그러해. 높고 낮은 일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지. 누구든 그냥 머리 좀 식히고 싶으면 여기 나와 잠시 세상 구경을 하는 게야. 있다 보면 온갖 인간 군상들이 향을 피우러 왔다가 가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거든.”
“허허허. 이제 보니 장로님께서 더 승려 같으십니다. 이 기회에 머리를 깎으심이 어떠할지…….”
원각의 목소리가 은근해졌다.
화운장로가 웃으며 원각을 책망했다.
“예끼, 이 사람아. 거지보고 머리를 깎으라고 하면 죽으라는 선고인 줄 알면서 그러는 겐가? 됐고, 어서 방장께 아뢰어 주시게.”
“알겠습니다. 그럼 일단 안으로 드시지요.”
원각이 대뜸 안내를 하고 나섰다.
“문은 안 지키시나요?”
용무린의 질문에 원각이 풀썩 웃으며 답했다.
“막아 무엇 하겠습니까? 올 사람 오고 갈 사람 가는 게지요. 본래부터 막은 적이 없습니다.”
뭔가 선문답을 하는 것 같았다.
‘확실히 다르네, 소림이란 곳은.’
전생과 현생을 통틀어 꽤 많은 곳을 다녀본 자신이지만 소림은 그 어느 곳과도 달랐다.
강대한 무력을 공공연히 드러내 보이지 않았지만 그 넉넉한 마음과 선종본산의 향기는 어째서 이곳이 그토록 추앙을 받는지 어렴풋이나마 알 수 있게 해주었다.
‘과연 전생 시절 내 평생의 숙적 소림이로구나.’
지나치는 무승들마다 기상이 드높았다.
모든 구성원이 마기를 풀풀 날리는 불회곡과 정반대라고 보면 정확했다. 과연 절대검신 독고황을 만나기 전까지 신마 진무량이 숙적으로 꼽을 만하다고 생각했다.
“이곳이 지객당입니다, 용 시주. 잠시만 여기서 쉬고 계십시오. 제가 얼른 방장스님께 아뢰고 오겠습니다.”
원각 대사가 또 직접 움직였다.
풀썩 웃어 보이며 화운장로가 대신 대답했다.
“본래가 이런 곳이라니까, 소림은.”
그 말을 들으며 용무린은 기대감이 높아졌다.
‘대체 어떤 분일까? 소림의 방장스님이란 분은?’
그분께 물으면 혜월이라는 전대 방장님을 바로 만나 뵐 수 있을까? 그리고 혜월이라는 분은 코빼기도 뵈지 않는 천기자를 대신해서 내 궁금증을 모두 풀어줄 수 있을까?
‘정말 궁금하구나.’
용무린은 원각대사가 사라진 쪽을 향해 시선을 고정했다.
한식경이나 흘렀을까?
원각대사가 돌아와 소식을 전해주었다.
“장문인께서 지금 두 분을 만나시겠답니다.”
원각은 해검 따위를 요구하지도 않았다.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휘적휘적 앞서 걸었다.
“예불 시간에 겹칠 것 같아 아예 마음 느긋이 먹고 있었는데 잘됐네. 무린아, 가자.”
“예.”
용무린도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조용히 원각과 화운장로의 뒤를 따랐다.
딸랑. 딸랑.
산사의 고즈넉함에 풍경소리가 어우러지는 가운데 용무린은 처음으로 느껴보는 감정을 마주했다.
‘편안하구나.’
전생이 신마 진무량인데 이건 솔직히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자신과는 상극이어야만 할 선종본산 그것도 장문방장을 만나러 가는 길인데 왜 이렇게 편안한 마음이 든단 말인가?
“다 왔습니다, 용 시주. 바로 저 곳입니다.”
원각이 커다란 은행나무 아래 자리 잡은 조그만 전각으로 용무린을 이끌었다.
‘과연!’
용무린의 고개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천천히 끄덕여졌다.
사방 한 장이나 겨우 됨직한 작은 곳.
얼마나 오래전에 지어진 곳인지 기와에 푸른 이끼가 잔뜩 돋아 있었으나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팔대호원을 비롯한 그 어떤 곳보다 더 높아 보였다.
“원각이옵니다. 손님들을 모셔왔습니다.”
“왔으면 들일 일이지 인석아, 무에 높은 사람이라고 그리 유세를 떠는 게냐?”
당연한 일인데도 타박부터 쏟아졌다.
피식.
한두 번 겪어 본 일이 아닌 듯 원각은 가볍게 웃고 말았다. 안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자, 드시지요.”
“고마워 원각. 들어가자 무린아.”
“예. 수고하셨습니다, 원각스님.”
“무슨 말씀을!”
원각에게 가볍게 인사를 건넨 용무린은 화운장로를 따라 방으로 들었다.
할 일을 모두 마쳤다는 듯 원각은 다시금 내 외원을 구분하는 문 앞으로 향했다. 오늘은 그것으로 수련을 대신할 생각인 모양이었다.
“헐헐헐, 코빼기 보기도 힘든 사람이 어인 일인가?”
소림사의 실질적인 지배자이자 현 무림 최고수의 하나로 추앙받는 법정이 활짝 웃으며 두 사람을 맞았다.
“그동안 강녕하셨습니까, 방장스님!”
화운장로마저도 법정에게 공손히 예를 갖추었다.
용무린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저분이 법정, 소림의 장문방장이자 이 시대 무림의 최고수 중 하나라고?!’
섣불리 판단을 내릴 수가 없었다.
무림맹주였던 풍연호를 처음 보았을 때조차 호승심이 끌어 올랐던 자신이었는데 지금은 그런 느낌조차 들지 않았다. 누구를 보든 싸워볼 생각부터 했던 성격을 보자면 정말 신기한 일에 속했다.
‘저 눈빛 때문이야.’
법정의 눈빛은 너무나도 순수했다.
마치 어린아이의 그것마냥 한없이 맑고 깨끗하기만 했다.
‘그러니 호승심이나 투쟁심 따위가 스며들 틈이 없지.’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지 않겠는가?
풍연호를 비롯한 지금까지 자신이 만났던 무인들 모두 마주하는 순간 일말의 호승심을 속에 품었을 것이다.
‘그래서 나 역시 누구를 보든지 자연스럽게 호승심이 일었던 것이겠지.’
하지만 법정에게서는 그런 느낌이 아예 들지 않는다. 과연 선종본산 소림의 장문방장이랄 수밖에 없다.
“……!”
용무린의 시선이 방장실 내부로 돌아갔다.
눈이 동그래졌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래도 명색이 소림사의 장문방장인데 어떻게 이렇게 생활할 수가 있지?’
솔직히 충격이었다.
방장실 내부는 불경을 읽을 때 사용하는 조그만 책상 하나가 가구의 전부였다. 아무리 승려라지만 오늘처럼 손님들이 찾는 날도 종종 있을 터인데 체면 따윈 정말 생각지도 않는 것일까?
-본래 이런 곳이라니까, 소림은?
화운장로의 목소리가 다시 한 번 들려오는 듯했다.
‘저 녹색 지팡이는 뭐지? 설마, 정말 그건가? 저 유명한 소림사의 녹옥불장?’
워낙에 단출한 방이다보니 용무린의 시선은 정갈하게 개어 놓은 한 벌의 가사와 그 옆에 아무렇게나 뒹구는 녹색 지팡이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그 시선을 느꼈는지 법정이 풀썩 웃으며 물었다.
“주랴?”
“예-에?”
화들짝 놀라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가지고 싶으면 가지려무나.”
맙소사. 소림의 무상 신물인 녹옥불장을 당과 하나 건네듯 주려고 하다니!
한데, 그 뒤에 튀어나온 말은 더욱 가관이었다.
“한 번 써보렴. 등 긁는 데는 정말 최고다. 여기 저기 저릴 때 두들기기에도 맞춤이고…….”
“…….”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녹옥불장을 줄 테니 가지고 가서 등을 긁던지 아니면 저리는 곳이나 두들기라니!
용무린은 잽싸게 고개를 흔들었다.
“사양하겠습니다. 그걸 가지고 등을 긁거나 저린 곳 두들겼다가는 언젠가 저도 이 한 장 남짓한 방에 갇혀 있어야만 할 것 같아서 말입니다.”
“헐헐헐, 눈치 빠른 녀석 같으니……. 눈빛이 제법 쓸 만하겠다 싶어서 뇌물 좀 주고 꾀이려고 했었는데 아깝게 됐구나.”
용무린의 느낌이 맞았다.
법정은 정말 녹옥불장을 내 줄 생각이었던 모양이었다.
물론 그 대신 머리를 깎게 할 심산이었으리라.
“클클클, 천하에 녹옥불장을 가지고 농을 건네는 분은 방장스님뿐일 것입니다.”
화운장로가 재미있다는 듯 웃으며 입을 열었다.
“농 아닌데?”
법정스님이 정색을 했다.
화운장로의 웃음소리가 뚝 그쳤다. 법정의 목소리가 진지하게 이어졌다.
“저 등 긁개, 나도 전대 방장님께 그렇게 받은 거야.”
“……!”
“……!”
용무린과 화운장로는 더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법정이 해맑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자, 이제 그만 이 늙은 땡중을 찾아 온 이유를 들어볼까?”
화운장로가 다소 무거운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근자에 무림맹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고 계시리라 믿고 있습니다.”
법정은 가만히 고개만 끄덕였다.
화운장로의 시선이 용무린에게로 돌아갔다.
“다행히 이 녀석의 도움으로 무림맹을 좀먹어 들어오던 마교의 수작을 분쇄할 수 있었습니다.”
“……아이야, 정말 저거 안 가져 갈 거냐?”
고개를 살짝 끄덕여 보이던 법정은 다시 한 번 용무린에게 녹옥불장을 가져갈 것을 권했다. 단번에 거절당한 것이 못내 아쉬웠던 모양이었다.
“싫다니까요. 사양할게요.”
물론 용무린은 단칼에 거절을 했다.
“일이 모두 마무리 된 후 풍연호 맹주를 통해 뜻밖의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미 입적하신 줄로만 알았던 혜월 스님과 천기자 어른, 그리고 저희 개방의 전대 태상장로님께서 풍연호 맹주를 키웠다는 사실을요.”
피식.
“키우긴 뭘 키워? 다 클 만하니까 사제 스스로 알아서 잘 자라 준 거야.”
법정이 싱겁게 웃었다.
스스럼없이 풍연호를 당신의 사제로 인정했다.
뒤이어 한 번쯤 생각해 볼 말이 법정의 입에서 이어졌다.
“이끌어 주는 사람이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될 놈은 안 돼. 반면에 특별히 가르친 게 없는데도 쭉쭉 잘 크는 놈들이 있어. 다, 그만한 인연과 자질을 타고난 게지. 비인부전이란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야.”
법정의 시선이 용무린에게로 향해졌다.
마치 ‘네 녀석이 바로 후자에 속한 녀석이지?’ 라고 하는 것만 같았다.
용무린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정중한 태도로 포권을 취했다.
“처음 뵙습니다. 비룡문의 용무린입니다, 방장스님.”
“넌 줄 알았다. 그래, 반갑구나.”
법정이 해맑게 웃으며 용무린을 반겼다.
‘내가 공연히 귀찮게 구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불쑥 들 정도로 맑은 미소였다.
용무린은 그 생각을 잽싸게 떨쳐 낸 후 말을 이었다.
“하여간 풍연호 맹주에게 들을 수 있었습니다. 불사신기를 혜월 전대 방장님께 사사했다고 말입니다. 혹, 그분을 만나 뵐 수 있겠습니까?”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인데 굳이 만날 필요가 있겠어?”
“예-에?”
용무린의 눈이 동그래졌다.
무슨 뜻인지 몰라 다시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빙그레 웃어 보인 법정의 입에서 원각에게나 할 법한 핀잔이 쏟아졌다.
“똥인지 된장인지 꼭 찍어 먹어봐야 알겠느냐? 이 말이다, 녀석아.”
“…….”
“무릇 모든 생명은 저마다 타고난 이유가 있느니, 바위 위에 피어난 한 송이 들꽃도 다를 바가 없느니라. 그래도 모르겠느냐?”
“예. 모릅니다, 스님. 그래서 찾아 온 것입니다. 대체 어떻게 해서 절대검신 독고황 조사님의 유진이자 저희 신주오가만의 것이어야 할 불사신기를 전대 방장이신 혜월 스님께서 알고 계신 것인지 알고 싶습니다.”
“쯧쯧쯧. 절벽이나 동굴의 기연 따위의 전설 같은 인연이 아니라면 내어주지 않고서는 얻을 수 없는 것이 바로 무공구결이라는 것을 어찌 생각하지 못할꼬?”
“……!”
용무린의 눈이 동그래졌다.
‘내가 왜 그 생각을 못했지?’
맞는 말이었다.
스스로 알려주기 전에는 어떤 고수의 독문무공의 구결을 빼앗기란 불가능한 일인 것이다. 매화자들이 너무나도 사랑해 마지않는 절벽과 동굴의 기연을 제외하면 말이다.
“풍 사제는 이태 후면 회갑이 되는 나이다. 사제가 불사신기를 사사한 것은 그의 나이 마흔 남짓 시절, 성산의 기문진이 파훼된 것은 이제 겨우 십여 개월 전 일이 아니더냐? 의심할 것도 이상할 것도 없느니라.”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드는 말이었다.
‘맞아. 내어 주지 않고서는 얻을 수 없는 것이 바로 타인의 무공 구결이야.’
그렇다면 답은 한 가지밖에 없다.
“지금 방장스님의 말씀대로라면 절대검신 독고황 조사께서 혜월 전대 방장님께 당신의 절기를 내어 주셨다는 뜻인데, 맞습니까?”
그렇다고 해도 궁금증은 또 남는다.
어째서 신교 조사동에 남아 있던 원본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그러니까 신주오가의 일원이 알고 있던 것과 비슷한 수준의 하향 평준화된 불사신기를 알려준 것일까?
“똥인지 된장인지 꼭 찍어 먹어봐야 아는 한심한 녀석 이로고……. 저런 녀석에게 등 긁개를 내어줄 생각을 했다니 나도 참.”
법정의 목소리가 살짝 높아졌다.
“이놈아, 너 같으면 아무리 영약이래도 먹으면 죽을 것을 빤히 아는데 그대로 주겠느냐? 비인부전이라는 말도 내가 이미 했다. 필요한 사람에게 필요한 만큼 주었을 뿐인 게야, 인석아.”
‘필요한 사람에게 필요한 만큼이라…….’
불사신기를 그만큼이라고 알고 있기에 마교의 수작에 넘어가지 않고 버티어 냈으며 혈고에 물든 수뇌부들의 공격에도 버텨낼 수 있긴 했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어 보인 법정이 축객령을 내렸다.
“그렇게 의심과 생각이 많아서야 무엇 하겠느냐? 오늘 하루 말미를 주겠다. 산사에서 마음이나 정갈하게 닦고 가거라.”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법정은 밖을 향해 고함을 질렀다.
“게 누구 있느냐?”
“찾아 계십니까, 스님. 명일입니다.”
근처에 있던 시좌 명일이 목소리를 높였다.
“이 쓸데없이 궁금증만 많은 아해가 마음이나 닦을 수 있도록 북면 기슭 오도암의 암자를 내어 주거라.”
“방장스님!”
잠자코 듣고 있던 화운장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북면 기슭 오도암의 암자가 어떤 곳인지 잘 알고 있는 듯했다.
‘가! 그냥 가! 아무 소리 하지 말고 냉큼 따라 가!’
화운장로가 용무린을 향해 요란하게 눈짓을 해 보였다.
그 눈짓에 담긴 의미를 얼추 짐작해 낸 용무린이 고개를 깊이 숙여 보였다.
“감사합니다, 스님.”
인사를 마친 용무린은 빙그레 웃는 낯으로 기다리고 있던 명일의 뒤를 따라 소실봉 북면에 자리한 오도암 암자를 향해 움직였다.
***
반 시진 후.
명일은 다 허물어져가는 초라한 전각 앞에 이르자 걸음을 멈추었다.
“이곳입니다.”
“여기요?”
“예. 이곳이 바로 오도암 암자랍니다.”
“이곳이 오도암이라……. 어떤 곳인가요? 오도암은?”
명일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답했다.
“이곳 오도암부터 장생전입니다. 역대 소림의 어른들께서 입적하시기 전까지 머무는 곳이지요.”
“……!”
용무린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째서 법정이 자신을 이곳으로 보내 마음을 닦으라 했는지 알 수 있었던 것이다. 더불어 화운장로의 그 요란하던 눈짓까지도 알 수 있었다.
‘과연 기를 쓰고 나를 보내려 한 곳 답구나.’
산을 등지고 절벽을 코앞에 둔 초라한 암자는 바위를 뚫고 자라나느라 이리저리 비틀린 금강송 한 그루가 품에 안듯 에워싸고 있어서 아늑했다. 더불어 가슴이 탁 트이는 느낌까지 들었다.
‘정말이지 수행하기에는 안성맞춤인 곳이로구나.’
바쁘지만 않다면 몇 날 며칠이고 눌러 앉고 싶을 정도였다. 천기자의 쪽지를 찾았던 청봉산 중턱의 낙성곡에 온 듯 익숙한 느낌마저 들었다.
‘정말 묘하구나.’
어쩐지 꼭 와봤던 곳만 같지 않은가?
‘저 안에 항아리 하나가 있을 거야. 생쌀이 담긴…….’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였다.
“항아리 안에 쌀 몇 줌이 있을 겁니다. 시장하시면 그 쌀과 금강송의 솔잎을 몇 줌 따 드시면 됩니다. 식수는 요 아래에 솟는 암반수를 드십시오. 그럼…….”
수양 잘 하고 내려오라는 듯 명일은 짧은 인사와 함께 다시 왔던 길을 돌아 내려갔다.
“……!”
화들짝 놀란 용무린은 눈을 부릅뜬 채 그대로 굳었다.
홀연히 떠오른 생각이 또다시 맞아들다니!
‘낙성곡에서도 그랬는데 또……?’
정말이지 궁금해 미칠 지경이다.
어째서 생판 처음 와 보는 곳들인데 기억이 나는 걸까?
“휴, 일단 생각이나 좀 정리하자.”
법정의 말마따나 마음을 정갈하게 만들기 위해 이만한 곳도 없어 보이니 이 기회에 어지러운 생각이나 정리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용무린은 암자에 들어가 방문을 활짝 열었다.
기암절벽 끝자락에 세워진 터라 코앞은 탁 트인 허공이었다. 그 허공에 피어나는 운무를 보며 용무린은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화두와 같은 말이 불쑥 떠올랐다.
-너는 스스로를 잘못 알고 있다.
-껍질이 꽤 단단하다. 때도 많이 묻었다.
-너 자신을 찾아라. 네가 원하지 않는다 해도 반드시 그리 될 게다.
-때가 되면 스스로 알게 될 테지만……. 명심해라. 그리고 잊지 마라. 모든 것은 있을 자리에 그대로 다 있다. 이제 가거라. 나머지는 모두 네게 달렸다.
천기자의 쪽지에서 접한 말들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 말들의 정확한 의미는 알지 못한다.
-똥인지 된장인지 꼭 찍어 먹어봐야 아느냐?
법정 스님의 말도 예사롭지 않게 들렸다.
“천기자가 남긴 쪽지도 그렇고, 두 분 다 내게 무엇인가를 알려주시려는 것 같은데……. 대체 내게 알려주려는 것이 뭘까? 왜 직접적으로 말을 하지 않고 이렇게 두루뭉술한 말로 내게 혼란을 주는 것일까?”
그 망할 놈의 천기누설을 할 수 없기 때문일까?
아니면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때가 되면 모든 것이 스스로 다 드러나기 때문인 것일까?
“머리가 다 아프군.”
하도 집중해서 이것저것을 생각하다보니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 왔다.
“이게 대체 무슨 짓이람? 마음을 정갈하게 닦기 좋은 곳에서 되레 골머리만 싸매다니?!”
그럴 바에야 수련이나 하는 편이 더 낫다.
“좋아. 초절정 수위의 내공을 얻었으면서도 아직 제대로 점검 한 번 해보지 못했었지? 이참에 모든 것을 꼼꼼하게 짚어 보자.”
용무린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오래지 않아 불사신기의 구결에 깊이 빠져 들었다.
살랑. 살랑. 휘이이. 휘이이이이-.
불사신기에 깊이 빠져듦에 따라 불어오던 미풍이 점점 더 강해져만 갔다. 용무린의 주변을 휘어 감는가 싶더니 이내 훅 빨려 들어갔다. 탁기를 한 움큼 잡아챈 후 천천히 빠져나왔다.
그러는 사이 태양이 서쪽 기슭으로 갸우뚱 기울었다.
황홀하리만큼 짙은 노을이 하늘과 땅을 동시에 물들일 때 용무린의 눈이 떠졌다.
씨익.
“좋은데?”
말로는 형언할 수 없는 이 충만감.
상대가 누구든 거꾸러뜨릴 수 있다는 자신감이 가득 차올랐다. 영약 따위로 내공만 높아진 상태가 아니라 전생부터 비롯된 모든 깨달음과 경험이 내공과 오롯이 하나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화운장로님께서는 내가 죽었다가 살아났다고 했었는데……. 정말 그럴까?”
구결에도 불사를 추구하고 있었지만 쉬이 믿어지지 않았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것은 마교나 혈교 또는 배교에서의 기이한 대법뿐이었으니까.
“그런 건 사실 진정한 의미에서 되살아났다고 할 수 없어. 이지를 상실한 실혼인이나 강시 따위를 살아 있다고 하지는 못하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다시 깨어난 듯했다. 생명이란 강인한 법이어서 목을 베어도 어느 정도는 의식이 있다고 하질 않던가?
“숨이 끊긴 지 반각에서 일각 사이? 그 사이에 재차 공격을 받지 않는다면 다시 깨어날 수 있다는 것으로 해석하면 될까?”
불사신기의 경지가 더 높아지면, 어쩌면 죽은 후 사흘 만에 깨어났다는 어떤 괴이한 사후경험담의 주인공처럼 다시 깨어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경지가 더 깊어지면 알겠지. 불사신기에 대해서는 아직도 모르는 것이 더 많으니까.”
잡념을 떨치기 위해서는 수련이 최고다.
스릉.
풍뢰가 뽑혀 나왔다.
노을빛을 받아 황홀한 빛을 뿜어냈다. 하지만 꽤 많은 격전을 치르면서 상당히 상했다. 운위영을 상대할 때 특히 그러했는데 지금 보니 군데군데 이가 빠졌고 정기가 쇠한 느낌마저 들었다.
“주인이랍시고 고생만 시키고 보살피지는 못했구나. 미안하다. 내 이곳을 내려가면 가장 먼저 정주의 그 대장간 노인을 찾아 치료해주마.”
더 늦기 전에 풍뢰를 손질해 놓아야만 운위영 같은 수준의 고수를 만났을 때 낭패를 보지 않게 된다.
“자, 일단 도강부터 한 번 확인해 볼까? 흡!”
용무린은 순간적으로 휘돌린 불사신기를 풍뢰에 밀어 넣었다. 눈부신 광채와 함께 반투명한 유형의 기운이 풍뢰에 덧씌워졌다.
“조금 더, 조금만 더…….”
버언쩌저적.
풍뢰에 덧씌워진 반투명한 유형의 기운이 점점 더 강렬해졌다. 그리고 길어졌다. 그 길이가 무려 1장이나 되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용무린의 입가에 실소가 머금어졌다.
“보기에는 좋은데, 역시 이건 멍청한 놈들이나 하는 짓이란 말이야…….”
용무린은 풍뢰에 주입되는 불사신기의 양을 천천히 줄여나갔다. 1장이나 되던 길이의 도강이 점점 줄어들더니 이내 풍뢰와 딱 맞아 떨어졌다.
반짝.
풍뢰가 은은한 빛만 머금을 뿐 방금 전과 같은 유형의 기운을 외부로 뿜어내지 않았다. 하지만 여전히 위력적인 도강인 것은 그대로였다.
“불사신기를 외부로 뿜어내지 않고 안으로 휘돌린다.”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도강 혹은 검강의 사용법과는 사뭇 다른 내공의 운용이다. 하지만 수많은 격전을 치르며 터득한 이 방법이 훨씬 더 강력하고 내공의 손실도 적으며 유용했다.
“1장도 넘게 뿜어내면 뭐해? 그만큼 내공의 소모가 많아서 오래 싸울 수가 없는걸…….”
보기에만 멋지지 검이나 도를 벗어나는 빛 덩어리는 낭비 그 자체인 것이다.
“겨우 도강을 유지할 정도의 내공이지만 풍뢰 안에서 끝도 없이 휘돌고 있으니 그 절삭력이나 강함은 무기의 길이만큼이나 뻗어 나온 도강 혹은 검강에 맞먹게 되지.”
마치 사량발천근의 무리를 도강이나 검강에도 적용한 것과 같은 이치다.
“이렇게 내공을 운용하게 되면 무턱대고 유형의 도강 혹은 검강을 뿜어내는 적을 상대로 적게는 다섯 배 많게는 열 배 이상까지도 더 긴 시간 동안 도강이나 검강을 사용할 수 있게 되지.”
외부로 뿜어내지 않고 끊임없이 풍뢰의 내부에서 휘돌고 있으니 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그 모든 것은 신검합일의 수를 자연스럽게 사용할 수 있기에 가능했다. 풍뢰를 나와 한 몸이라 인식하지 못한다면 절대로 불가능한 내공의 운용인 것이다.
“적이 지니고 있는 무기의 길이도 훨씬 뛰어넘는 검강이나 도강으로 공격을 해온다고 하면 약간의 내공만 더 투입한 후 회전력만 더 높이면 되지.”
일류의 내공으로 절정의 무인을 상대했을 때와 절정의 내공으로 초절정의 무인을 상대했을 때 사용했던 방법과 대동소이하다.
적은 일회성으로 공격을 해왔지만 낙숫물이 바위를 뚫어내듯 약한 힘으로 끊임없이 공격하는 효과를 풍뢰 안을 휘도는 불사신기 회전력이 내게 되는 거다.
“아마 나를 상대하는 놈들은 내가 끝도 없는 무한의 내공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할 거야. 푸흐흐.”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았다.
“뿜어내는 검강이나 도강의 길이만큼 벌어진 간격은 어떻게 하느냐고?”
그거야 간단한 일이다.
“……하압!”
잠시 정신을 집중한 용무린이 풍뢰를 앞으로 던져냈다.
쌔애애액.
풍뢰가 벼락처럼 앞으로 쏘아졌다. 그러던 어느 한 순간 경로를 바꾸더니 사선으로 경로를 바꾸었다. 둥그렇게 반원을 그렸다. 놀랍게도 진천수라도의 일초 수라잔월과 똑같은 궤적이었다.
“바로 이거지! 어검술!”
패액. 쉬리리릭. 버언쩍.
지금껏 내공의 부족으로 인해 제대로 펼쳐내지 못했던 진천수라도의 모든 초식들이 완벽한 형태로 허공에서 재현이 되었다.
그것도 무려 어검술로 펼쳐지는 진천수라도법이었다.
아마 누군가가 이 모습을 지켜보았다면 넋이 나가 버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쌔애액. 스르르.
매서운 파공음을 흘리며 공간을 가르던 풍뢰가 용무린 앞으로 오더니 속도를 줄였다. 솜털처럼 가볍게 용무린의 손아귀에 잡혔다.
“심령으로 연결이 되어 마음먹은 대로 움직일 수 있는 진정한 어검술은 아직 못되지만 그래도 이게 어디야? 목어검도 어검술이라고!”
목어검(目御劍).
시선이 미치는 범위 내에서 자유롭게 부릴 수 있다는 어검술의 단계를 말하는 것으로 전생의 용무린 신마 진무량은 이미 심령으로 부리는 진정한 어검술 즉 심어검의 경지도 돌파했었다.
“이런 푸념을 또 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하여간 심어검의 경지는 불사신기가 화경을 넘어선 경지인 신화경에 이르면 쓰도록 하자.”
물론 지금도 가능은 하다.
하지만 그것은 일회성에 불과한 어리석은 짓인 것이다.
왜냐하면 심어검의 경지란 도와 검에 시전자의 시선을 벗어나서도 초식을 펼치고 다닐 정도의 내공을 구겨 넣어야만 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뭐, 어쨌든 지금은 이정도로 만족하자고.”
모르는 사람들이 들었다면 입에 거품을 물고 분노했을 일이다. 무공에 입문한 지 이제 겨우 십여 개월, 한데 내공은 벌써 초절정이요 도와 검의 경지는 목어검의 수준이라니!
스파앙. 쌔애액. 쌔애애액.
풍뢰를 몇 번 더 날려 본 용무린은 흡족한 미소와 함께 풍뢰를 거두었다.
“하아, 다시 답답해지네.”
무공의 점검이 끝나자 다시금 자신을 괴롭혔던 난제들이 떠올라서였다.
“대체 그 뜻이 뭘까?”
-너는 스스로를 잘못 알고 있다.
-껍질이 꽤 단단하다. 때도 많이 묻었다.
-너 자신을 찾아라. 네가 원하지 않는다 해도 반드시 그리 될 게다.
-때가 되면 스스로 알게 될 테지만……. 명심해라. 그리고 잊지 마라. 모든 것은 있을 자리에 그대로 다 있다. 이제 가거라. 나머지는 모두 네게 달렸다.
천기자가 남긴 쪽지 전체가 의문점이었다.
용무린은 하나씩 천천히 그것들을 되짚기 시작했다.
“분명히 ‘너는 스스로를 잘못 알고 있다.’ 라고 했지? 그게 대체 무슨 뜻일까? 내가 비룡문의 작은 주인인 용무린이 아니라는 뜻은 아닐 텐데, 그렇다면 대체 뭘……?”
거기까지 생각하던 용무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간 한 가지 가정 때문이었다.
“서, 설마…….”
지금껏 단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했던 가정이었지만 그 가정을 천기자의 쪽지에 대입하거나 혜월대사가 남긴 말에 대입하면 몇 가지 의문점이 단숨에 풀린다.
“내가, 내 전생이……. 신마 진무량이 아니라는 것인가?”
운적풍이란 애송이에게 죽기 직전까지 당한 후 정신을 차렸을 때에야 비로소 전생을 자각할 수 있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자신의 의식은 쭉 신마 진무량이었다.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여동생과 친지들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생겨났어도 그 사실 자체를 인정을 했을망정 내 전생이 신마 진무량이라는 의식은 그대로였다.
“내가 스스로를 잘못 알고 있을 가능성은 오직 그것 하나뿐이야. 틀림없어.”
부모님이나 여동생을 비롯한 새로 얻게 된 가족들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었다. 비룡문의 장자이자 소주인이 바로 자신인 것도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의심스러운 것은 오직 하나. 죽을 고비를 넘긴 후 눈을 떴을 때부터 나 자신을 신마 진무량으로 인식했던 것, 그것만이 스스로를 잘못 알고 있다는 말에 부합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전생의 내가 대체 누구였는데? 신마 진무량이 아니라면 대체……?”
용무린의 눈이 점점 더 커졌다.
낙성곡으로 오르는 길과 그 풍경이 홀연히 떠올랐던 것으로 보나 이곳 오도암에서도 같은 것을 느끼고 머릿속에 떠올랐던 것이 현실로 드러나는 것으로 보나 신마 진무량을 제외한다면 가능성이 있는 존재는 한 사람 뿐이었다.
“절대검신 독고황!”
살아 있다면 현재 세수 150여 세가 넘는 것으로 알려진 천기자와 비슷한 연배일 것이며 풍연호에게 불사신기를 사사했던 혜월 대사와도 비슷한 연배일 터!
“절대검신 독고황이라면 낙성곡에 이어 이곳도 자유로이 찾아와 서로 교분을 나누었을 가능성이 커!”
그렇다면 자신이 낙성곡을 오를 때 생전 처음 와보는 곳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르는 길을 기억해내고 낙성곡 위의 풍경을 알고 있었던 것이 설명이 된다.
또한 이곳 오도암을 보자마자 아련하고 그리운 마음과 함께 이 안에 쌀 항아리가 있다는 것을 떠올릴 수 있었던 사실 역시 설명할 수 있다.
“좋아, 일단은 그렇다고 치자. 내 전생이 신마 진무량이 아니라 절대검신 독고황이라고 치자고. 그러면 내 기억 속에 떠도는 규천마력을 비롯한 신교 조사동 안의 절기와 몇몇 중요 마공들의 구결은 어떻게 설명할 건데?”
심지어 조사동 안에서 읽어두었던 불사신기는 무려 5단공에 이른다. 아버지 용대명이 가문의 비처에서 찾아낸 절대검신 독고황의 유진인 호심결조차 3단공밖에 되질 않는데 말이다.
“정말 미치겠네…….”
도무지 해결이 되는 게 없다.
머리가 터질 듯 혼란스럽기만 했다.
“내가 신마 진무량이 아니라 그토록 넘고 싶어 했던 숙적 절대검신 독고황이라니! 그게 말이 되냐고!”
고개가 저절로 가로저어졌다.
그렇게 가정하면 낙성곡과 오도암을 찾으며 경험한 기이한 기억력이야 해결이 되지만 신마 진무량으로 살며 경험했던 것들과 무공들은 도무지 설명할 길이 없기 때문이었다.
“아우, 머리야!”
정말이지 머리가 터질 것만 같았다.
“그러면 이미 절전되어 버린 전진의 무공이나 유성검문의 무공은 어떻게 내 기억 속에 들어 있는 것이지?!”
생각하면 할수록 미칠 노릇이다.
해결될 기미는 보이지 않고 오히려 더 깊어만지는 고민에 머리가 지끈지끈할 때였다.
“……!”
용무린의 눈이 다시 한 번 동그래졌다.
홀연히 어떤 춤 하나가 떠올랐던 것이다.
“검무, 운위영과 운룡장 녀석들을 한꺼번에 쓸어버렸다던 바로 그 검무다.”
놓칠 수 없다는 듯 용무린은 재빨리 정신을 집중했다.
나풀나풀 하늘과 땅을 누비며 아름다운 선을 그려내는 춤사위는 잡힐 듯 잡힐 듯 잡히지 않았다. 안개가 제법 많이 사라졌지만 아직도 그 진체를 깨달을 수 없었다. 너무 흐릿했다.
용무린의 애가 바짝 달았다.
잡으려고 하면 할수록 안개처럼 흐려지고 멀어지는 검무가 야속하기만 했다.
“크으으.”
더불어 용무린의 입에서는 고통에 가득 찬 신음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두뇌가 폭주를 했기 때문이었다. 봉인되듯 감춰졌던 기억이 올라오는 것은 그만큼 고통스러웠다.
그러던 어느 한순간이었다.
“응?”
용무린의 눈가에 돌연 어떤 영상 하나가 스쳐 지났다.
승도속의 세 노인.
승려는 부처인양 자비로운 미소를 짓고 있었고 도인은 탈속한 듯 부드럽게 웃고 있었으며 마지막 영웅건을 쓴 세속의 노인은 천신처럼 보였다.
“크으. 혜월, 천기자 그리고 절대검신 독고황…….”
머리가 깨져버릴 것만 같은 고통에 정신이 혼미했지만 용무린은 본능적으로 자신의 눈을 스쳐 지나간 세 노인의 정체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어째서 이런 기억이 드는 것일까? 어째서?”
정말 자신이 세운 가정이 사실인 것일까?
정녕 전생의 내가 신마 진무량이 아니라 절대검신 독고황이란 말인가?
“크흐…….”
용무린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신음소리가 더욱 커졌다.
이미 초절정의 내공을 한 몸에 지닌 무인이 고민 좀 심하게 했다고 이정도로 머리가 아플 수는 없는 일이었지만 고통은 점점 더 심해졌다. 이대로 머리가 터져버린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크으. 영웅건, 하얀 수염과 치렁치렁한 머리, 무림의 마지막 수호자를 자처한 절대검신 독고황…….”
환영인가?
승도속 삼인이 자신을 향해 미소 짓는 듯했다.
그 중에 특히 가운데 자리하고 있던 영웅건을 쓴 천신과도 같은 노인과 눈이 마주친 기분마저 들었다. 그 노인의 미소가 가슴속 깊이 스며들었다.
“저, 절대검신 독고황……. 지, 진정…… 내가 다, 당신인 것인가? 흐으…….”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폭주한 두뇌가 고통을 견디다 못해 정신을 놓았다. 용무린의 의식이 뚝 끊어졌다.
쩌저적.
용무린의 두뇌 깊숙한 어느 영역에 실금이 쩍 갔다.
봉인되듯 감춰져 있던 기억 중 하나가 실금 사이로 스미어 나왔다.
나풀나풀. 너울너울.
용무린은 꿈을 꾸기 시작했다.
절대검신 독고황이 추었을 것이 빤한 절대적인 검무의 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