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훼방을 놓다 (37/104)

6.훼방을 놓다

산사의 아침이 밝았다.

짹짹짹. 뾰르르-.

이름 모를 산새들의 지저귐에 용무린의 눈이 떠졌다.

“이런!”

자신이 아무런 대책도 없이 정신을 잃고 있었다는 사실에 소스라치게 놀란 용무린이 튕기듯 일어났다.

“내가 그렇게 정신을 잃었던 모양이로구나.”

간밤에 겪었던 일이 고스란히 떠올랐다.

자신의 전생이 신마 진무량이 아니라 절대검신 독고황일지도 모른다는 가설과 그로 인해 해결되는 의문과 증폭되는 의문들까지 모두 다 생각이 났다.

“후우, 그 생각만 하면 머리가 터지려고 하는구나.”

어제처럼 정신을 잃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다시금 머리가 아파왔다. 솔직히 살짝 짜증도 났지만 용무린은 그 사실을 피하지 않았다. 아예 고통에 몸을 맡겼다. 익숙해지기 위해 노력했다.

“그래야 진실을 향해 접근할 수 있을 거란 말이지.”

본능적인 판단이었지만 그것이 사실일 것이다.

고통이 두려워 피하기만 하다보면 봉인하듯 감춰졌던 것들은 결코 수면 위로 솟아오르지 못한다.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해.”

앞으로는 명상을 할 때마다 검무를 되짚는 것과 함께 전생의 기억을 떠올리는 것에도 할애할 생각이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그냥 반드시 그래야만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머리가 터져 버리든지 아니면 모두 기억이 나든지 둘 중 하나겠지.”

천기자의 말대로 껍질이 그만큼 단단하기 때문에 그렇게 머리가 깨질 듯 아팠던 것인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이미 시작한 싸움이었다.

“싸움이라면 나는 절대로 지지 않아.”

당연히 포기 또한 없다.

정신을 잃을 정도로 고통스러웠던 것이 껍질에 금이 가거나 깨어지는 과정이라면 이겨낼 것이다. 그 싸움에서 반드시 승리하고야 만다.

“아우, 배고파라. 싸움은 싸움인데, 일단 뭘 좀 먹자.”

용무린은 한 쪽에 놓인 항아리로 시선을 돌렸다.

뚜껑을 여니 과연 그 안에는 오래 보관할 수 있도록 볕에 잘 말린 생쌀이 들어 있었다.

“이거라도 먹지 뭐.”

당연한 말이지만 거부감 따위는 들지 않았다.

용무린은 말린 쌀 한 줌을 입에 털어 넣은 후 천천히 오물거렸다.

‘구수하니 좋네.’

볕에 말린 생쌀조차 입에 잘 맞는 이유는 전생의 경험 때문일까? 아니면 자신의 생존력이 그만큼 뛰어나기 때문일까?

“솔잎도 한 번 도전해볼까?”

생쌀을 꿀꺽 삼킨 용무린은 금강송에서 솔잎을 한 줌 땄다. 입에 전부 털어 넣었다.

‘이 진한 향기와 떫고 쌉싸래한 맛 또한 낯설지 않단 말이지.’

볕에 말린 후 곱게 갈아 만든 선식이 아니라면 이렇듯 생으로 씹는 솔잎은 그 향과 맛이 너무 강해 익숙하지 않다면 삼키기가 힘들다.

하지만 용무린은 그 또한 입에 맞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꽤 오랜 시간동안 먹어왔던 것만 같다.

‘언젠가는 다 떠오를 거야. 모조리 다!’

그런 생각을 하며 용무린은 절벽 가까이 다가갔다.

용무린을 환영하듯 자욱한 운무가 슬그머니 사라져갔다.

“응?”

용무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암반수가 샘솟는 곳 아래로 무엇인가 보였던 것이다.

“선승? 백척간두에서 수행 중이신 건가?”

졸졸 흘러내리는 암반수 옆으로 툭 튀어나온 자리.

북쪽 하늘을 향해 그린 듯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승려의 모습이 보였다.

“언제부터 저곳에 계셨던 것이……?”

용무린의 눈이 점점 더 커다래졌다.

수행중인 승려의 모습이 그만큼 충격적으로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자연과 완전한 일체를 이루었어.’

뾰르르. 짹짹짹.

산새들이 날아와 선승의 머리에 앉는다. 청솔모 한 마리가 선승의 무릎 위를 스쳐 지났다.

‘아예 사람으로 인식을 하지 않고 있어.’

정말이지 놀라운 일이었다.

저만큼이나 자연과 하나가 될 수가 있다니!

‘누구지? 어제 뵈었던 법정 스님도 저 정도는 아니었는데 말이야?’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소림의 장문방장인 법정스님의 눈빛과 미소가 비록 천하에 짝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순수하다지만 대자연과 저만큼의 일체감을 이룰 수는 없을 것이다.

‘완전한 내맡김. 모든 것을 던져버리지 않고서야 어찌 저런 일체감을 이룰 수 있겠는가?’

어쩐지 살아 있는 사람 같지가 않았다.

대자연과의 완전한 일체감 이외 그 어떠한 기운도 일렁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어쩌지?’

한 번 내려가 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걱정부터 앞섰다. 자칫 노선승의 몰아지경을 깨뜨리는 우를 범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최대한 소리를 죽여서 가 보자.’

먼저 호흡을 골랐다.

불사신기 구결을 떠올린 후 수련을 하듯 호흡을 가늘고 길게 만든 후 조심스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한 호흡에 한 걸음씩 혹여 선승의 몰아지경이 깨어질세라 조심 또 조심했다.

‘이런!’

선승의 앞에 당도한 용무린의 얼굴에 당혹감이 어렸다.

‘이미 세상을 떠나신 분이로구나.’

앞에 당도하니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아무리 대자연과 일체를 이루고 있다 하더라도 결코 숨길 수 없는 것이 호흡이다. 일각에 한 번을 하든, 한 시진에 한 번을 하든, 이 땅에 발을 붙이고 살아 있기 위해서라면 반드시 호흡을 해야만 한다.

‘놀랍다. 좌탈을 하셨다니!’

호흡이 물처럼 고요하고 깊고 길다 하여도 자신의 능력이라면 최소한 살아 있는 것인지 아니면 호흡 자체가 끊겼는지 정도는 알 수 있었는데 눈앞에 가부좌를 틀고 있는 노승의 호흡은 확실히 끊겼다.

“선을 수행하다 그대로 세상을 떠나셨구나.”

그러니 더더욱 놀라울 뿐이었다.

살아생전의 경지가 대체 어떠했기에 좌탈로도 모자라 빈 육신조차 대자연과 하나가 되어 있는 것일까?

좌탈 시기가 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빈 육신은 대자연과 하나가 된 것으로도 모자라 육탈도 멈추었다. 마치 지금도 살아 있는 듯 생생했다.

“이분께서 바로 혜월 대사…….”

어젯밤 홀연히 떠올랐던 승도속 삼인 중 하나였다.

기억 속에 남아 있던 부처와도 같은 자비로운 미소가 지금도 입가에 남아 있었다.

“품속에 저것은……?”

혜월 대사라고 짐작만 되는 유해의 품 안에 하얀 종이 하나가 삐죽 튀어나와 있었다.

‘내가 읽어도 될까?’

잠시 고민이 들었지만 용무린은 결국 읽는 것을 택했다.

오도송이었을까? 서신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빛과 어둠을 어이해 구분하는가?

어둠은 빛의 부재일 뿐, 빛이 일면 어둠은 물러가고 빛이 없는 곳에 의당 어둠이 있을 뿐이다.

음과 양이 애초 무극인 일원에서 나왔으니 빛과 어둠의 구분조차 사실 허상에 불과한 것. 불과 마, 신과 마 역시 그러하리.

얼마나 깊은 깨달음인지 솔직히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하지만 하나만은 가슴 깊이 와 닿았다.

음과 양이 애초에 무극인 일원에서 나왔으니 구분하는 것조차 허상이라는 구절이었다.

“불과 마, 신과 마 역시 그러하리…….”

새삼 머리가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그래, 내가 절대검신 독고황이든 아니면 신마 진무량이든 그것이 뭐가 중요하겠어?”

중요한 것은 바로 현재의 나!

“내가 바로 비룡문의 용무린이라는 것이야.”

운적풍이란 애송이의 손에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난 후 자연스럽게 이 힘을 되찾았다.

일반적인 경우에 견주어 생각해보면 그야말로 기적과도 같은 진전인 셈이다. 불과 1년도 되지 않은 시간에 초절정 경지의 무위라니!

“나는 나만의 길을 간다.”

나만의 방식으로 무림이란 곳을 정복할 생각이었다.

물론 신마 진무량의 의식이 강했을 때와 같이 몽땅 때려 부순 후 정복해나가는 방법과는 많이 다른 형태의 정복이 될 것이다.

“법정 스님께 감사 인사라도 따로 올려야하겠는걸?”

하룻밤 내어 주었을 뿐인 오도암에서 정말 마음을 깨끗이 닦아낸 기분이었다.

“가자.”

용무린은 천천히 왔던 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

방장실을 다시 찾은 용무린은 법정에게 혜월 대사의 좌탈 소식을 알렸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만 살짝 끄덕여 보이던 법정이 시좌를 소리쳐 불렀다.

“게 아무도 없느냐?”

“찾아계십니까, 방장스님. 명일입니다.”

“오도암 아래 확인해 봐야 할 짐짝이 하나 있다.”

“예에? 오도암 아래 짐짝이요?”

시좌인 명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더불어 용무린의 눈도 동그래졌다. 전대의 장문방장, 즉 본인의 사부님인 혜월의 빈 육신을 두고 짐짝이라 표현을 하다니, 일반적인 생각으로는 선뜻 받아들이기 힘들 정도였다.

“빈 육신이다. 짐짝이 아니면 대관절 무엇이기에 그리 놀라는 게냐?”

“……!”

“시다림(尸陀林) 승에게 이르거라.”

시다림 승이란 불가에서 장례를 집전하는 승려를 말한다.

“이르기만 하면 되옵니까?”

잠시 침묵하던 법정이 다시 말을 이었다.

“……좌탈이었다고 전하면 시다림 승이 알아서 할 게다. 궤를 만들고 항아리에 봉안해 1000일 간 대웅전 본존불 뒤에 두겠지.”

“아!”

그제야 무슨 뜻인지 알겠다는 듯 시좌 명일이 탄성을 발했다.

“알겠습니다, 사부님. 다녀오겠습니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시좌 명일은 어디론가 향해 뛰었다.

‘항아리에 봉안해 1000일 간이나 대웅전 본존불 뒤에 둔다고?’

‘대체 무슨 소리야?’

용무린과 화운장로의 궁금증을 풀어주겠다는 듯 법정이 입을 열었다.

“1000일 후에도 지금과 같다면 등신불로 모시는 게야.”

“역시!”

“아하! 등신불!”

용무린과 화운장로는 동시에 탄성을 쏟았다.

‘그래. 빈 육신임에도 대자연과 몰아일체를 이루고 있던 혜월 대사라면 틀림없이 등신불이 되고도 남을 거야.’

용무린의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그 뒤로 일이 착착 진행되었다.

명일에게 이야기를 전해들은 시다림 승이 오도암을 다녀왔고 그곳에서 혜월 대사의 빈 육신을 발견했다. 조심스레 모시고 왔다.

이미 오래 전에 좌탈을 한 것으로 판명이 났으며 법정이 말했었던 것처럼 나무로 궤를 만든 후 항아리에 혜월의 빈 육신을 모셨다.

그 후 조촐한 봉안식이 거행되었고 본존불인 석가모니불상의 뒤에 놓였다.

그 모든 과정을 용무린이 함께 지켰다.

본래부터 그럴 생각은 아니었지만 환영 속에 스쳐 지났던 승도속 삼인의 미소가 자꾸만 떠올라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었다.

그러느라 지난 시간이 다시 하루.

하직 인사 후 떠나려는 용무린을 향해 법정이 묘한 말을 건넸다.

“빛과 어둠의 구분이란 사실 허상에 불과한 것. 굳이 불과 마, 신과 마를 따로 나눌 필요가 없느니……. 오도암에서의 하루를 기억하여라. 그저 네 마음이 이르는 대로 움직이면 될 게다.”

용무린의 마음이 오도암을 오르기 전에 비해 달라졌음을 모두 꿰뚫어 보는 듯한 말이었다. 용무린은 그저 빙그레 웃을 수밖에 없었다.

“예, 스님.”

용무린은 홀가분한 얼굴로 걸음을 내디뎠다.

저만큼 멀어져가는 용무린을 바라보던 법정의 시선이 아련해졌다.

“반가웠소이다, 사백. 등선을 포기하고 다시 오신 걸음, 빛이 돌아왔으니 어둠은 물러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역천자라 할지라도 결코 빛을 잡아먹을 수는 없을 테니까요.”

법정의 얼굴이 그 어느 때보다도 밝아졌다.

머지않아 마교의 발호가 있을 것임을 익히 짐작하고 있었지만 하나도 걱정이 되지 않는 얼굴이었다.

“부처님의 가호로 부디 단단한 껍질에 금이 갔기를…….”

법정이 정중한 태도로 반장의 예를 취해 보였다.

그런 줄도 모른 채 일주문을 나선 용무린을 향해 화운장로가 밝은 목소리로 물어왔다.

“이제 어디로 갈 거냐?”

“정주요.”

“정주? 거긴 왜?”

“풍뢰가 많이 상해서요.”

“아하! 공손위! 그 늙은이의 손에서 풍뢰와 소검비연이 탄생한 것이로구나.”

화운장로가 아는 체했다. 뜻밖이었다.

“그분을 아세요?”

“암!”

화운장로가 살짝 거드름을 피웠다.

“무린아. 할아비 목이 컬컬하구나.”

“이따가 객잔에 들러서 실컷 사드릴게요. 어서 말씀이나 해줘요.”

“약속했다.”

“예.”

화운장로가 신이 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공손위는 황실 8국 산하 병장국(兵仗局)의 책임자였어. 어찌나 솜씨가 좋은지 천수신장이라고도 불렸었지.”

“아하! 어쩐지…….”

용무린의 고개가 크게 끄덕여졌다.

뚝딱 뚝딱 만들어내는 농기구가 어지간한 대장간의 청강검 같은 수준이었던 것을 보면 천수신장이라는 별호가 그렇게 잘 어울릴 수가 없었다.

“한데, 병장국은 화약국의 관리 감독을 받아야만 했거든? 화약국은 동창소속 환관이 우두머리로 있어. 어때? 딱 그림이 나오지?”

화운장로의 말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종합하면 이러했다.

선수신장 공손위는 성격상 뇌물과도 거리가 멀고 아부 혹은 아첨 따위와도 거리가 멀다. 그러니 환관과 관계가 좋을 리가 없는 거다.

거기에 더해 아무리 좋은 무기를 만들어내고 열심히 일해도 얻은 것은 딸랑 별호 하나뿐, 모든 공은 우두머리 환관 앞으로 돌려지니 뛰쳐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 환관, 용케 공손 노인을 살려줬네요?”

“목에 가시 같긴 했지만 한 편으로는 고맙기도 했겠지. 왜냐하면 공손위로 인해 자신 역시 많은 이득을 보았을 테니까.”

“하긴…….”

“무림에 나온 이래 많은 문파와 단체에서 손을 뻗었어. 그런데 모두 거부하고 정주에 안착을 했지. 공손위가 참 현명했던 게야.”

“그렇긴 해요. 무림이란 곳의 생리상 어느 한 곳에 안주하고 병장국 수준의 무기를 계속해서 만들어냈다면 십중팔구 경쟁상대에 있는 적들이 노렸을 테니까요.”

“바로 그거지.”

“자유로운 삶을 살며 하고픈 일이나 하겠다, 이것이로군요. 멋지네요.”

“무림인들에게 무기를 만들어주지 않는 것으로 유명한데, 네가 운이 좋았구나.”

“예. 운이 좋았네요.”

빙그레 웃어 보이는 용무린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산발한 머리로 열심히 쇠를 두들기던 공손위가 새삼 고맙고 보고 싶었다.

***

닷새 후 정주 외곽.

‘응? 어째서 망치질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게지?’

풍뢰를 만들었던 대장간 근처에 도착한 용무린은 의아했다. 공손위 노인의 성격상 망치질 소리가 끊겼다는 것은 무슨 일이 생겼다는 것을 뜻했기 때문이었다.

‘그때 보기엔 무병장수할 것으로 보였는데, 그새 병을 얻은 건가?’

용무린은 우려 섞인 눈빛을 지워내지 못한 채 대장간 안으로 들어섰다.

“계십니까?”

용무린이 고함을 크게 질러 보았지만 대답이 없었다.

용무린은 재빨리 주변을 훑어보았다.

뭔가 너무 이상했다. 주렁주렁 걸려 있던 농기구와 각종 병장기들 있던 자리가 휑했다. 오래 전부터 일을 하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뭐야? 없는 거야?”

“그런 것 같은데요?”

“왜지?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가?”

“화로에 불이 꺼져 있습니다, 장로님.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은데요?”

“좋아. 잠깐만 기다려. 내가 가서 무슨 일인지 후딱 알아보고 올게.”

“예.”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화운장로는 밖을 향해 사라졌다.

‘대체 무슨 일일까?’

용무린은 걱정이 되었다. 더불어 눈빛이 점점 더 날카로워졌다.

‘어떤 놈들이든 공손 노인을 괴롭혔다거나 납치했다면 각오를 해야만 할 거다.’

풍뢰와 소검비연을 자신에게 안겨준 공손위를 위해서라면 상대가 누구든 기꺼이 피를 볼 생각이었다.

***

두 식경쯤 지났을 때 화운장로가 돌아왔다.

개방의 정주 분타주 구진기와 함께였다.

구진기가 어째서 천수신장 공손위의 대장간에 불이 꺼져 있는지 그리고 아무도 없는 것인지 알려주었다.

“예에? 손자가 실종되었다고요?”

“예, 총순찰.”

구진기는 용무린을 깍듯이 무림맹의 총순찰로 대했다.

손사래를 칠 상황이 아니라 용무린은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화운장로가 말을 보탰다.

“올해 지학이 되는 손자가 근처 학당에 간다고 아침에 나선 후 감쪽같이 사라졌다는구나. 학당에서는 학업을 파하고 집으로 갔다고 하는데 어떻게 된 영문인지 집으로 오는 과정에 사라졌다고 한다.”

“……!”

용무린의 눈이 가느다래졌다.

화운장로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래서 대장간에 불이 꺼진 게다. 가족 모두가 아이를 찾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는 것이지. 지금 이 순간에도 공손위 그 사람과 아들내외는 정주 일대를 샅샅이 돌며 아이를 찾고 있을 거야. 쯧쯧쯧…….”

미친 듯 손자와 자식을 찾아 헤매는 심정이야 오죽할까?

그 심정이 짐작이 되는 모양인지 화운장로가 혀를 길게 찼다.

용무린이 싸늘한 목소리로 물었다.

“범인은요? 혹시 짐작이라도 가시는 곳이 있나요?”

“휴우. 다른 사람도 아닌 공손위에 관련된 일이라 개방에서도 미리 조사를 한 듯하다만, 미안하구나. 알아낸 것이 전무하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학당을 나와 집으로 오는 길이었어. 대장간이 비록 외곽에 가깝지만 그 사이 가난한 양민들은 집중이 되어 살고 있단 말이지. 그런데도 알아낸 것이 없다고?’

믿을 수 없는 일이다.

양민들이 많이 집중된 외곽에서 대낮에 15세씩이나 되는 소년을 어디론가 납치를 한다면 반드시 누군가의 눈에 걸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목격자의 입을 막았나?’

용무린은 구진기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그러면 그 학당에서 집으로 오는 사이 주민들 중 실종당한 사람이나 의문의 죽음을 당한 사람은요? 그런 사람들도 없나요?”

“없습니다. 그래서 관에서도 가출을 한 것 아니냐? 하고 있는 중인 듯합니다.”

그건 더 이상했다.

‘무림인이다. 무림인이 개입을 한 거야.’

구진기의 대답을 듣자 확신이 섰다.

그렇듯 소리 소문도 없이 납치하기 위해서는 무인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장로님.”

“응?”

“이 근처의 흑도 방파들 중 여아를 납치해 유곽이나 기방에 팔아먹는 놈들이 있나요?”

혹시나 해서 물어 본 말이었지만 화운장로는 즉시 고개를 흔들었다.

“없어. 그렇지 않아도 개방에서 근처를 샅샅이 뒤진 모양이야. 다른 사람도 아니라 천수신장에 관한 일이라 신경을 썼던 것이겠지.”

구진기가 보충 설명을 했다.

“저 역시 같은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래서 주변의 흑도 방파를 샅샅이 뒤지고 다녔는데 아직 의심이 가는 곳을 찾지 못했습니다.”

개방의 정주 분타주가 그렇다면 그런 것이다. 개방의 분타주 씩이나 되는 사내가 허튼 소리를 할 필요는 없을 테니까.

그래도 아쉬운 마음에 용무린은 말을 늘였다.

“여아들을 납치해 유곽이나 기방에 팔아먹는 놈들이라면 사내아이도 혹시…….”

화운장로가 대뜸 그 말을 잘랐다.

“정주 인근 흑도 방파 중엔 그런 놈들은 없다. 예전에는 꽤 있었는데 그런 놈들은 이미 옛날에 정의개들이 다 쓸어버려서 말이야.”

저렇게까지 말하는 것을 보면 확실한 거다.

‘흑도 놈들도 아니고…….’

그러면 어떤 놈들이 대체 왜 납치를 한 것이지?

‘정말 가출을 한 것인가?’

단순 가출이라고 보기엔 석연치 않았다.

가출을 할 정도의 성품이었다면 가족들 역시 이미 알고 있었을 테고 그렇다면 가출을 했다는 정도로 가족들이 저렇듯 모든 것을 포기한 채 찾아 헤매지는 않을 테니까.

‘무인의 개입이 맞아. 틀림없어.’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였다.

홀연히 호남성과 강서성에서 벌어졌던 의문의 실종사건들과 이 사건 역시 연관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장로님!”

“응?”

“의천단과 풍운단이 호남성에서 이와 비슷한 일을 조사하고 있었다고 했었지요?”

“그래. 아?!”

무심코 고개를 끄덕이던 화운장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탄성을 발했다. 용무린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지 알아차린 것이었다.

“설마, 호남성에서 벌어졌던 동남동녀들 실종 사건의 연장이라고 보시는 것입니까, 총순찰?”

구진기 역시 알아들었는지 눈을 크게 떴다.

용무린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예.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을 하는 것인지 용무린은 천천히 설명을 이었다.

학당과 집 사이의 거리가 상당하며 그 사이 가난한 양민들 숫자 역시 많다는 점을 상기시켰다.

“한데도 그 흔한 목격자 하나가 없다면 그것은 곧 무림인의 개입이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신법을 펼쳐 빠른 속도로 사라졌어야만 가능한 일이니까요.”

“하긴, 일반 흑도 왈패들에게 그 정도 신법을 기대하긴 힘들겠지요.”

“그래서 호남성에서 벌어졌던 동남동녀의 실종 사건의 해결 역시 무림맹의 무력단체 두 곳이 급파되었음에도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한 것이라고 봅니다.”

“허어, 대체 어느 곳이 그 정도의 능력이 있……?”

“개방의 눈과 무림맹의 힘까지 비웃을 만큼의 능력이 있는 곳이라면……?”

화운장로와 구진기의 눈이 서로 마주쳤다. 동그랗게 커진 눈을 용무린을 향해 돌렸다.

“예, 맞습니다.”

용무린의 고개가 천천히 끄덕여졌다.

“마교! 놈들의 짓일 겁니다.”

“허어!”

“이런……!”

화운장로와 구진기의 입에서 분노 섞인 탄성이 새어 나왔다.

“호남성에서 벌어졌던 일의 연장선상이라면 확실히 마교는 동남동녀를 모으고 있다고 봐야 합니다. 필시 사악한 어떤 대법을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게 대체 뭘까요, 총순찰?”

용무린은 즉답을 하지 못했다.

‘사이한 대법이 하도 많아서 그중에 뭘 하려는 것인지는 나도 잘…….’

마교라는 단체 하나가 가지고 있는 사이한 대법이나 술법의 숫자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데 거기에 더해 혈교와 배교까지 더해졌다.

전생의 내가 참으로 신마 진무량이고 모든 기억을 깡그리 지니고 있는 상태라 해도 어떤 대법이라고 콕 짚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중요 마공 몇 개와 몇몇 마공들 그리고 몇 가지 단편적인 기억밖에는 나도 기억이 없다고.’

그래도 일단 전생의 기억을 뒤적이는 편이 훨씬 빠를 것이란 판단이 들었다. 용무린은 대답을 삼간 채 그 기억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저는 이 일을 총단과 무림맹에 알리고 오겠습니다. 마교의 수작이 호남성에 이어 이곳 정주에서도 발견된 것일지도 모르니 어떻게든 대비책을 세워야 합니다.”

“그래라.”

타닷.

화운장로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과 동시에 구진기는 분타를 향해 신법을 전개했다.

“……!”

용무린은 계속해서 전생의 기억들을 더듬었다.

조각 난 기억들 중 쓸 만한 것을 추려내기 위해 무서운 집중력을 발휘했다.

‘허허허. 네 눈이 떠지면 어쩐지 해결의 실마리가 나올지도 모르겠구나.’

생각에 잠긴 용무린을 보며 화운장로는 흐뭇한 얼굴로 웃었다. 근거는 없었지만 용무린의 눈이 떠지는 순간 뭔가 좋은 수가 생길 것만 같았다.

그러는 사이 해가 갸우뚱 기울었다.

사람들의 안타까운 마음 따윈 아랑 곳 없다는 듯 황홀한 노을이 일었고 이내 무심히 어둠이 깃들었다.

“다, 당신들 누구야?”

힘없는 걸음으로 대장간을 들어오던 산발의 노인이 카랑카랑한 목소리를 쏟았다. 이 대장간의 주인인 천수신장 공손위였다.

반짝.

용무린의 눈이 기다렸다는 듯 떠졌다.

“접니다, 노인장.”

“자, 자네는?”

공손위의 눈이 동그래졌다. 반가움의 빛이 살짝 일었다.

하지만 이내 빛을 잃었다. 형언할 수 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미안하네. 경황이 없어. 지금은 병장기 따위 만들 여력이 없네.”

“아들아! 돌아온 것이……?!”

“수광아!”

뒤따라 들어온 아들 내외는 대뜸 실종된 아들의 이름을 입에 올렸다. 하나 아들 대신 다른 사람들이 있는 것을 확인한 후 얼굴이 잔뜩 어두워졌다.

‘반드시 찾는다.’

용무린의 주먹에 힘이 고여 들었다.

얼마나 울었는지 눈이 퉁퉁 부은 여인의 얼굴에 웃음을 되찾아 주고 싶었다.

“알고 있습니다. 손자가 실종이 되었다고요?”

“자네가 어찌 그 사실을? 혹시 우리 수광이를 아는가? 소식을 들었는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인지 공손위은 득달같이 질문을 퍼부었다. 용무린은 미안한 표정으로 천천히 고개를 흔들 수밖에 없었다.

“아직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최선을 다해 찾아보겠노라 약속할 수는 있습니다.”

용무린은 화운장로를 소개했다.

“이분께서는 개방의 화운장로님이십니다. 그리고 저는 무림맹의 총순찰 용무린이라고 합니다, 어르신.”

“……!”

그런 대단한 사람들일 줄은 몰랐다는 듯 공손위와 아들 내외의 눈이 점점 더 커다래졌다.

“짐작이 가는 곳이 몇 곳 있습니다. 더 늦기 전에 그곳엘 다녀와 볼까 합니다.”

“오오, 고맙네. 아니 고맙습니다, 총순찰.”

“감사합니다. 정말 너무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우리 아들을 찾아주시기만 한다면 죽어서도 풀을 엮어 보답하겠습니다.”

공손위와 아들 내외가 몇 번이고 허리를 굽혔다.

용무린은 재빨리 손사래를 쳤다.

“인사는 아이를 찾은 후 하셔도 늦지 않습니다. 하니 지금부터는 여러분들의 건강에나 신경을 쓰셨으면 합니다. 이래서야 어디, 아이를 찾기도 전에 쓰러질까 걱정이 됩니다, 어르신.”

“상관없네!”

공손위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하나밖에 없는 내 손주 녀석을 찾을 수만 있다면 이 늙은 목숨 따윈 지금 당장에라도 내던져 버릴 것이야.”

저러는데 더 뭐라고 할 것인가?

“다녀오겠습니다.”

용무린은 고개를 숙여 보인 후 대장간을 나설 수밖에 없었다.

“짐작이 가는 곳이라니? 그게 대체 어딘데?”

대장간을 나서자마자 화운장로가 다그쳐 물었다.

용무린의 입에서 한 마디가 툭 뱉어졌다.

“혈루곡!”

“……!”

화운장로의 입이 쩍 벌어졌다.

***

이레 후.

용무린과 화운장로는 하남성과 안휘성의 경계에 자리한 천중산 북면기슭에 도착했다. 두 사람의 뒤에 무림맹의 무력단체 중 하나인 의천단 전원이 시립해 있었다.

사안의 중대성 때문에 상관세가로 향하던 의천단원과 운룡장에서 조사를 하던 풍운단을 전부 되돌린 것이다.

“지금부터는 조심해야 합니다. 혈루곡은 살수 집단, 언제나 2인 1조를 이뤄 서로를 지켜줘야만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은 공격, 한 사람은 무조건 방어입니다. 아시겠습니까?”

“예, 총순찰.”

“진입하는 순간, 감시조에 의해 혈루곡으로 소식이 들어갔을 겁니다. 언제 어느 때 습격이 쏟아질지 모르니 지금부터는 전투개시라고 봐야합니다.”

“염려 마십시오, 총순찰. 다섯 무력단체 중 우리 의천단과 풍운단의 실전경험이 가장 높으니 말입니다.”

의천단주인 당유현이 자신감을 내비쳤다.

“하긴, 의천 풍운 두 무력단체가 그동안 어지간히 밖으로 싸돌아다니긴 했었지. 그놈의 세력 싸움에 밀린 탓에 말이야.”

화운장로가 고개를 끄덕이며 당유현의 자신감을 인정해 주었다.

피식.

“모두 지난 일입니다. 무림맹 내의 세력 싸움 역시 마교 놈들의 수작이었고 말입니다.”

당유현이 풀썩 웃어 보였다.

고맙고 믿음직하다는 듯 화운장로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화운장로의 시선이 용무린을 향해 움직였다.

“이 안에 정말 혈루곡의 근거지가 있는 것이냐?”

“예.”

“혈루곡이 마교와 연관이 있는 것은 확실하고?”

“물론이죠.”

“허어.”

당최 이해할 수 없다는 듯 화운장로가 혀를 내둘렀다.

“대체 너는 혈루곡의 위치와 그들이 마교와 관계가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았는데?”

‘어떻게 알았냐고요? 전생의 기억을 더듬어보니 나온 것을 어쩌라고요?’

기억대로라면 이 혈루곡은 신마 진무량이 중원무림정복을 위해 사용할 목적으로 만든 곳이었다.

‘정주 인근에서 아이들을 빼돌리려면 이놈들이 나섰을 가능성이 가장 커.’

하지만 화운장로에게 그걸 설명할 수도 납득을 시킬 수도 없었다. 대답할 길이 없는 용무린은 역공에 나섰다.

“지금 그게 중요해요?”

“……?!”

“여긴 마교 놈들의 중원 연결고리 중 하나에 불과해요. 이놈들이 정말 수작을 부렸다고 해도 아이가 이곳에 없을 가능성이 크다고요.”

“하긴, 그게 가장 큰 문제긴 하지.”

“풍운단은요? 포위망 구축을 끝냈을까요?”

“글쎄다?”

고개를 갸우뚱해 보인 화운의 눈이 태양의 위치를 가늠할 때였다. 해동청 한 마리가 북면 기슭 저편에 날아오르더니 크게 원을 그리기 시작했다.

“끝났습니다, 총순찰. 포위망 구축 완료입니다.”

해동청의 움직임을 지켜보던 의천단주 당유현이 입을 열었다.

“가죠!”

용무린이 성큼 앞으로 나섰다.

화운과 당유현이 그 뒤를 따라 움직였다.

***

천중산 북면 기슭의 한 골짜기.

주변에 비해 유달리 황토가 많은 대다 안개 또한 짙어 멀리서 보면 골짜기 전체가 피눈물을 흘리는 듯해 붙여진 이름 혈루곡.

그 안에는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무서운 세력이 둥지를 틀었는데 그 이름이 바로 혈루곡, 지금껏 단 한 번의 실패도 없었다는 살수단체였다.

쾅!

“뭐라고? 정체불명의 세력이 지금 이곳을 향해 진입하고 있다고?”

혈루곡주 추도일이 튕기듯 일어났다. 탁자를 내치쳤다. 노성을 터뜨렸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곡주님. 외부로 통하는 길목까지 모두 차단당했습니다. 어찌나 많은지 숫자를 헤아리기도 힘들 정도입니다.”

“이런 빌어먹을! 대체 어떤 놈들이 온 거야?”

“무림맹일 것으로 생각됩니다. 놈들의 선두에 개방의 화운장로가 함께하고 있음이 확인되었습니다.”

“……!”

혈루곡주 추도일의 얼굴이 삽시간에 굳었다.

‘꼬리가 너무 길었구나.’

자시에 태어난 동남동녀 모으기가 너무 힘들다보니 마교는 범위를 넓혔다. 그러다보니 아직 정체를 드러내서는 안 되는 이곳에서까지 납치에 나선 것이다.

‘별 수 없다. 이곳을 버린다.’

정파 무림의 심장과 가까운 이곳에 터를 잡은 지 벌써 80여 년, 머지않아 다가올 정파 무림과의 전쟁에 회심의 한 수가 될 세력이 바로 이곳이었지만 꼬리가 밟혔다. 아깝지만 버려야 한다.

‘그나마 이틀 전에 물건을 보내서 다행이군.’

삼 개월 동안 모은 자시 생 동남동녀의 수가 스무 명, 그 정도면 할 만큼 했다고 볼 수 있다.

“철수한다. 혈루사들에게 결사항전을 명한 후 혈루오사에게 은밀히 퇴각을 명해라. 그리고 무흔 너는 지금 즉시 꼬리를 밟힐 만한 서류를 소각한 후 혈루오사의 뒤를 따라 빠져나가라. 합비의 거점에서 만나기로 하자.”

“충!”

보고를 하던 무흔이 고개를 숙여 보일 때였다.

파아앙!

문이 박살이 났다.

“가긴 어딜 가 이 새끼야?”

얼음장 같은 목소리의 사내가 혈루곡주 앞에 나타났다.

“넌 뒈졌어. 알아?”

용무린이었다.

역시 살수 집단.

후욱.

용무린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무흔이 거리를 좁혔다. 소리도 없이 뽑아 든 협봉검을 쭉 찔러왔다.

“꺼져라, 애송아!”

하지만 뒤이어 들이닥친 화운장로의 일장이 옆구리를 강타했다.

퍼엉. 와드득. 우당탕.

갈비뼈가 부러졌다. 폐를 파고들었다. 무흔은 소리 한 번 내지르지 못한 채 휴지조각처럼 구석에 처박혔다. 고개를 떨궜다. 실로 무거운 전광연화장법이었다.

“웬 놈들이냐?”

“분이라고 해야지 이 싸가지 없는 마졸아!”

화운장로의 거침없는 ‘마졸’ 운운에 혈루곡주 추도일의 눈이 가느다래졌다.

‘역시, 알고 온 거였어.’

보고를 들었던 것처럼 눈앞의 거지는 개방의 장로 화운일 터, 혈루곡주의 시선은 슬그머니 용무린에게로 향했다.

피식.

“왜? 내 쪽을 뚫어보려고?”

그런 혈루곡주를 용무린이 비웃었다.

화운장로가 비웃음에 동참했다.

“클클클. 아예 무덤을 파는 구나.”

‘이 새파란 애송이가 더 위라고? 대체 누군데?’

그 순간 혈루곡주의 뇌리에 요즘 폭발하듯 치솟는 이름 하나가 홀연히 떠올랐다.

‘사, 삼절일학 용무린? 상관엽에 이어 운위영마저 거꾸러뜨린 그 용무린?’

가슴이 서늘해진 혈루곡주가 어금니를 콱 깨물었다. 태연을 가장한 채 다시 질문을 던졌다.

“다시 한 번 묻지. 웬 놈들이냐? 이곳에 난입한 이유가 뭐냐?”

“그렇게 상황 파악이 안 돼?”

카앙. 카카캉. 퍼퍼펑. 우지끈.

서걱. 스각.

“이놈!”

“죽어라앗!”

용무린의 이죽거림이 신호라도 되는 듯 밖에서 요란한 소리들이 흘러 들어왔다. 각종 병장기 부딪히는 소리와 장법이 오고가는 소리 그리고 도검에 살과 뼈가 갈리는 소리와 함께 무엇인가가 부서지는 소리가 연이었다.

‘사냥당하고 있다. 혈루곡의 살수들이 속수무책으로 쓰러지고 있어.’

혈루곡주 추도일의 눈꼬리가 가늘게 떨렸다.

살수들인지라 비명소리를 쏟아내지는 않고 있지만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당하는 것은 바로 자신이 길렀던 살수들이라는 것을.

용무린의 입이 다시 열렸다.

“질문은 내가 한다.”

“……!”

혈루곡주 추도일은 은밀히 내공을 모으며 용무린의 눈을 쏘아보았다.

“정주 외곽에서 잡아온 16세 소년 공손수광은 지금 어디에 있지?”

“그놈이 누군데?”

혈루곡주는 일단 발뺌부터 했다.

바로 그 순간 용무린의 왼손이 살짝 움직였다.

버언쩍. 스각.

혈루곡주의 눈앞에 불이 번득였다. 시선으로 쫓기 힘든 무엇인가가 스쳐 지나갔다.

‘어?’

혈루곡주의 눈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 왼쪽 팔로 향했다. 그곳에서 화끈한 느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헉!”

혈루곡주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털썩.

팔꿈치 아래가 갑자기 뚝 떨어져 내렸던 것이다.

그 아래서 분수와도 같은 핏줄기가 길게 뿜어졌다.

타다닥.

혈루곡주는 정신없이 몇몇 혈도를 눌러 지혈을 했다. 그때까지 가만히 지켜만 보던 용무린의 입이 다시 열렸다.

“시간 없어 이 자식아. 허튼 소리 한 번 할 때마다 사지가 떨어져 나갈 줄 알아. 알아들어?”

“……!”

“다시 묻지. 정주 외곽에서 납치한 16세 소년 공손수광은 지금 어디 있나?”

“이이이, 이야아압!”

대답대신 혈루곡주는 비명과도 같은 고함을 질렀다.

버언쩍.

번개처럼 허리에서 튀어나온 협봉검이 소리도 없이 용무린의 심장을 파고들었다.

씨이익.

서늘한 미소를 머금은 채 용무린이 풍뢰의 손잡이를 잡아갔다. 잡는 순간 뽑아 반원을 그려냈다. 잔인한 반달, 수라잔월의 초식이 협봉검을 단숨에 잘라낸 후 놈의 팔꿈치 어림마저 쭉 갈라 버렸다.

“……!”

혈루곡주의 눈이 부릅떠졌다.

하나 남아 있던 팔마저 팔꿈치 어림부터 뚝 떨어져 내렸던 것이다.

“어어어…….”

어찌나 황당했는지 숨 몇 번 쉴 사이 두 팔을 잃은 혈루곡주는 말도 제대로 잇지 못했다. 주춤 뒤로 물러나며 기이한 소리만 흘렸다.

용무린의 입에서 싸늘하기 짝이 없는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장로님. 지금부터는 못 본 것으로 하세요.”

“응?”

“시간 없단 말이에요.”

“……!”

무슨 뜻인지 알아차린 화운장로가 입을 다물었다.

성큼 앞으로 다가온 용무린이 하얀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댔다.

“약속하지. 일각 안에 비명소리를, 이각 안에는 죽여 달라는 소리를, 마지막 삼각 안에는 내가 묻는 말에 대한 대답을 토해내게 될 거다.”

푸욱.

용무린의 손이 혈루곡주의 뱃속을 파고들었다. 척추를 통째 움켜쥐었다.

“……!”

혈루곡주의 눈이 부릅떠졌다. 용무린의 손이 조금씩 움직일 때마다 푸들푸들 몸을 떨었다. 그리고 정확히 반각 후 찢어져라 입을 벌렸다. 비명을 쏟아냈다.

“끄, 끄아아악!”

어찌나 처절한 비명이었는지 화운장로마저 눈살을 찌푸렸다. 외면을 해야만 했다.

물론 용무린은 그래도 용서하지 않았다. 통각신경 전체를 한손에 휘감고 조금씩, 조금씩 짓이겨나갔다.

***

화르륵. 화륵.

혈루곡 안에 세워진 모든 전각이 화마에 휩싸였다.

살행에 나선 살수를 제외한 모든 혈루사들을 참살한 의천단원들이 뒤처리 삼아 불을 질러 버린 것이다. 물론 조사에 필요한 것들은 다 챙긴 후였다.

“시간이 없습니다, 의천단주님.”

“이틀 전에 출발했다고 했지요? 알겠습니다.”

의천단주 당유현은 해동청에 이 소식을 적어 재빨리 날려 보냈다.

“운룡표국의 표행에 숨겼다고 했었지? 백주 항아리에 숨겨 이동시킨다고? 고얀 놈들 같으니…….”

화운장로가 분노를 감추지 않았다.

혈루곡주가 토설한 것을 고스란히 들었던 것이다.

자시 생 동남동녀 스무 명의 이동.

어떤 사이한 대법을 준비하기에 그러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아이들을 구하고 대법을 막아야만 했다.

“가죠!”

스파앙.

용무린이 먼저 신법을 전개했다.

파앙. 타닷. 타다다닷.

그 뒤를 따라 화운장로와 당유현 그리고 의천단원과 풍운단원들까지 움직였다.

***

닷새 후.

강서성 포양호 끝자락에 위치한 도창현.

도창현의 가장 큰 포구에 쾌속선 다섯 척이 연이어 도착했다. 일단의 무인들이 우르를 쏟아져 내렸다. 용무린과 의천 풍운단이었다.

“장로님!”

개방의 고수로 보이는 중년인이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남창 분타주 장석중입니다.”

“그래, 반갑다. 인사는 나중에 하기로 하고……. 놈들은 지금 어디 있느냐?”

남창 분타주 장석중이 바짝 긴장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동남쪽으로 향했습니다. 정의개를 붙여 두었으니 지금 즉시 따라 붙으면 됩니다.”

똑 소리 나는 대답에도 화운장로의 얼굴은 펴질 줄 몰랐다. 나직한 목소리로 으르렁댔다.

“내 그렇게 신신당부를 했거늘, 운룡표국에서 감시의 눈을 떼?”

“그, 그게……. 달포도 넘는 시간동안 따라 다녔는데도 특별한 것이 없어서 그만…….”

그랬다. 화운이 처음에 명령했었던 것처럼 운룡표국의 모든 상행을 끝까지 추적했었다면 스무 명씩이나 되는 동남동녀의 이동은 진즉 개방이나 하오문의 이목에 걸렸을 것이다. 화운은 그 점이 아쉬웠던 거다.

“시끄럽다! 두고 보자 이놈.”

화운이 장석중의 변명을 툭 잘라버렸다. 고함을 버럭 질렀다. 보다 못한 용무린이 나섰다.

“지금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습니다. 놈들과 거리 차이는 얼마나 됩니까?”

살았다는 듯 장석중이 용무린에게 돌아섰다.

“반나절 전에 도창현을 지나쳤으니 그리 멀리 가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위장이든 뭐든 어쨌거나 짐이 잔뜩 있으니 말입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가죠!”

스파앙.

용무린은 대뜸 동남쪽을 향해 신법을 전개했다.

“같이 가 이놈아!”

휘슷.

“의천단은 내 뒤를 따르라.”

“충!”

“풍운단은 절대로 뒤처지지 말라!”

“충!”

후욱. 휘스슷. 타다다닷.

의천단과 풍운단이 경쟁적으로 용무린과 화운장로의 뒤를 따라 신법을 펼쳤다.

삐이익.

개방에서 사용하는 호각소리가 포양호변을 따라 길게 이어졌다. 용무린과 화운장로 그리고 의천 풍운 두 무력단체는 호각 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따라 움직였다. 그렇게 운룡표국과의 거리가 삽시간에 좁혀졌다.

***

도창현을 지나 동남쪽으로 내려오다 보면 옥화산이 나온다. 조세선이 통과하는 운하가 지근거리에 있다 보니 근처에 도지휘사사와 천호소, 백호소들이 적절히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서 녹림도 없는 안전한 곳이었다.

그런데…….

삐이이익.

어디선가 호각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응?”

대표두 운위상의 눈두덩이 거칠게 움직였다. 동시에 악몽과도 같았던 몇 달 전의 표행이 떠올랐다. 녹림으로 위장한 적의 손에 손 한 번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얻어맞았던 비참한 기억이었다.

‘설마……. 또 녹림으로 위장한 놈들이 쳐들어오는 것은 아니겠지?’

겁이 덜컥 났다.

“옥화산은 녹림이 없는 것이 확실하지?”

“그렇습니다, 형님.”

곁에 있던 사촌 동생 운위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삐이익-!

다시 한 번 호각 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에는 아득히 먼 곳이 아니라 조금 더 가깝게 들렸다.

“……!”

그곳을 향해 시선을 돌렸던 운위상의 눈이 부릅떠졌다.

흙먼지를 뽀얗게 일으키며 달려오는 일단의 무리가 보였던 것이다.

‘고, 고수!’

선두에는 한 걸음에 3, 4장씩 거리를 좁히는 놀라운 신법의 소유자가 두 명 아니 네 명씩이나 있었다.

철렁.

운위상의 심장이 그대로 내려앉았다.

‘큰일 났다.’

더 생각할 것도 없었다. 운위상은 잽싸게 명령을 내렸다.

“위붕!”

“예, 형님.”

“지금 즉시 백주 항아리가 실린 마차를 가지고 떠나라.”

아득.

“그래봐야 잡힙니다, 형님. 차라리 함께 응전을…….”

“멍청한 소리!”

운위상이 운위붕의 말을 잘랐다. 거칠게 외쳤다.

“그 안에 뭐가 들었는지 몰라서 그래?”

“……!”

“시간 없다. 떠나라! 운하가 있는 곳을 향해 달려!”

“아! 운하를 향해서…….”

그제야 무슨 뜻인지 알아들었다는 듯 운위붕의 얼굴이 환해졌다.

“알겠습니다, 형님. 부디 보중하십시오. 가자! 1호 마차와 호위 표사들은 나를 따르라.”

운위봉이 말 머리를 돌렸다.

히히힝. 콰두두두.

“이럇!”

“하아!”

콰두두. 콰두두두.

짚단으로 단단히 보호한 백주 항아리들을 실은 마차가 미친 듯이 달리기 시작했다.

“운룡표국의 표사들은 들어라. 녹림의 무리가 쫓아온다. 결사항전 할 것이다. 모두 무기를 들어라!”

“또 당할 줄 알았느냐?”

“싸우자!”

“하아!”

스릉. 스릉. 스르릉.

표사들 모두가 결연한 얼굴로 무기를 뽑아 들었다.

그런데…….

“으응? 녹림이 아닌데?”

“거지들도 섞여 있고, 저 깃발은 또 뭐야?”

“무림맹이다. 무림맹의 표식이야.”

운룡장의 직계식솔이 아닌 일반 표사들은 혼란에 빠졌다.

무서운 속도로 쫓아오는 사람들이 녹림이 아니라 무림맹의 표식을 하고 있으니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하지?’

운위상은 깊은 갈등에 빠졌다.

상대가 무림맹이라는 사실에 내막을 모르는 표사들은 이미 전의를 잃었다. 이대로 있다가는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한 채 끝나는 거다.

‘위붕이가 운하까지 잘 도착할 수 있을까?’

만에 하나, 도주에 성공하지 못한다면?

백주로 위장한 항아리의 내용물을 저들에게 들킨다면?

‘어차피 끝이다. 나중에 녹림으로 오인했다고 우기기 위해서라도 일단은 싸워야만 해!’

운위상은 슬그머니 뒤로 돌았다.

품속에서 기이하게 생긴 피리를 꺼내 입에 물었다.

필릴리. 필릴리리리. 삐익.

“……!”

“……!”

혼란스러워하던 표사들의 눈빛이 확 달라졌다.

눈에 핏발이 돋았다. 살기를 줄기줄기 흩뿌렸다.

어느새 피리를 집어넣은 운위상이 고함을 크게 질렀다.

“녹림을 처단하라!”

“으아아!”

“크아아!”

타닷. 후우욱.

이지를 상실한 표사들 전원이 용무린과 무림맹의 무력단체를 향해 뛰쳐나갔다.

‘크흐흐. 서로 죽이고 또 죽여라. 잘잘못을 가려내기가 힘이 들 것이다.’

운위상은 속으로 웃었다.

하지만 몰라도 한참은 모르는 이야기였다.

“장로님! 피리 소리 들으셨죠?”

“그래!”

“저 먼저 갑니다. 도망친 마차를 잡아야 해요.”

“알았다. 가라!”

스파아아앙.

놀라운 속도로 거리를 좁혔던 용무린은 전투에 참여하지도 않았다. 하늘로 훌쩍 떠올랐다. 불사신기를 휘돌린 후 소검비연을 가볍게 퉁겼을 뿐이다.

따앙. 따앙. 따라라라-앙.

움찔! 움찔! 파르르.

“우왁!”

“크아악!”

벼락이라도 맞은 듯 몸을 떨던 표사들이 이내 바닥을 나뒹굴었다.

“총순찰께서 손을 쓰셨다.”

“무기를 빼앗고 포박해라.”

척하면 착이었다. 무림맹에서 이미 이런 경험을 해보았던 의천단과 풍운단은 나뒹구는 표사들을 너무나도 쉽게 무력화시켰다.

“이놈! 혈적은 어디에 숨겼느냐?”

“시건방진 마졸 놈들!”

“총순찰이 손을 썼는데도 멀쩡한 놈들은 혈고를 부리는 놈들이다. 그놈들을 족쳐! 하앗!”

화운장로가 운위상에게 달려들었다.

“네놈들이 주적이로구나! 하아아!”

“덤벼라, 마졸! 차아앗!”

의천단주와 풍운단주는 똥 씹은 표정을 짓고 있던 운룡장의 직계에게 짓쳐들었다.

‘빌어먹을!’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전광연화장을 보며 운위상은 왜 자신이 표행에만 나서면 이렇게 뭣 같은 일이 벌어지는 것인지 한탄해야만 했다.

콰두두두.

“이랴! 이럇!”

운위붕은 미친 듯이 말을 몰았다.

“끼럇!”

“달려-엇!”

직계들로 구성된 호위표사들 역시 사력을 다해 1호 마차를 운하를 향해 몰았다.

“조금만 더 가면 된다. 조금만 더 가면 강가에 마중 나와 있는 사람들이 있을 거야. 끼랴!”

“알겠습니다. 형님도 힘을 내십시오. 하아!”

콰두두두. 콰두두두.

말이 입에 거품을 물기 시작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매섭게 채찍질을 했다.

물론 그래도 헛수고였다.

“어딜 가 이 자식들아-앗!”

타다닷. 후-욱!

놀랍게도 말의 속도를 따라잡은 용무린이 훌쩍 날아올랐다. 왼손을 쭉 뻗었다.

패애애액. 투웅. 씨시시시싯.

소검비연이 낚시에 나섰다. 벼락같은 빠르기로 쏘아진 후 전면을 둥그렇게 휘감았다.

서걱. 스각.

가장 뒤쪽에서 달리던 운룡장의 직계 두 사람의 목이 거의 동시에 떠올랐다. 뒤이어 몸뚱이가 미끄러지듯 말에서 떨어졌다.

“령제야! 수인아!”

“이런 죽일 놈! 차아아!”

그보다 4, 5장여 앞을 달리던 두 사람이 심상치 않은 소리에 뒤를 돌아보다가 눈이 뒤집혔다. 앞뒤 가리지 않고 장법을 펼쳤다.

“그거 내가 할 소리야 이 자식들아-아!”

휘릭. 타닷.

용무린이 가볍기 짝이 없는 동작으로 말등을 차고 몸을 솟구쳤다. 용무린의 발밑으로 묵직한 장력 몇 줄기가 스쳐 지났다.

“어디서 선량한 표사 흉내를 내고 지랄이야?!”

용무린의 왼손이 다시 한 번 앞으로 튕겨졌다. 소검비연이 빗살처럼 앞으로 뻗어갔다. 왼쪽에 말을 달리던 놈의 심장에 구멍을 뻥 뚫었다.

튀잉. 씨시시싯.

파도가 되어 옆으로 밀려간 천잠사가 그 옆을 달리던 놈의 목을 휘감았다. 너무나도 쉽게 끊어냈다.

‘제발, 제바-알!’

마지막 희망을 품고 운위붕이 호각을 입에 물었다.

삐리리릭!

개방이 사용하는 것과는 확연히 다른 호각소리가 멀리멀리 퍼져 나갔다.

‘됐다. 이제 나머지는 운에 맡긴다.’

이젠 싸울 것이다.

운위붕이 말고삐를 잡아챘다.

히히히히힝!

말이 길게 울부짖으며 급정거를 했다. 운위붕을 따라 나머지 직계식솔들 역시 말을 세웠다.

“그래주면 나야 고맙지-이!”

패애액. 쉬각.

득달같이 달려온 용무린이 풍뢰를 짧게 휘둘렀다.

“컥!”

한 발 늦게 말을 멈춰 세웠던 운룡장의 직계 하나가 허물어지듯 말에서 떨어졌다.

“령소야! 으아아-압!”

운위붕이 사력을 다해 운무대천강을 밀어냈다.

“너도 그거냐?”

무림맹에서 운위영에게 봤던 쓴맛이 떠올랐다.

이미 죽였음에도 괜히 열불이 났다. 운위영을 쓰러뜨렸을 때는 정신을 잃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반짝.

풍뢰에 서늘한 빛이 맺혔다. 최적화 된 도강이었다.

광채가 너무 약한 나머지 어지간한 놈들은 코앞에서 봐도 도강을 펼쳤는지조차 모를 것이다.

촤촥!

풍뢰가 운무대천강을 열십자로 베었다.

운무대천강이 쩍 갈라졌다. 그 사이로 바람이 빠져나가듯 운무대천강의 기운이 쭉 빨려 사라졌다.

“츱! 그때 이래줬어야 했는데…….”

용무린은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스르르. 쿠웅.

말과 함께 통째 베어진 운위붕이 네 조각으로 나뉘어 바닥에 떨어져 내렸다. 비장한 태도로 공격에 나선 것치곤 허무한 최후였다.

“위붕 형님!”

“으아아!”

그때까지 남아 있던 운룡장의 직계 네 명이 울부짖었다. 일제히 달려들었다.

“거 찝찝하게……. 왜 자꾸 선량한 피해자 흉내를 내고 그러지?”

모르는 사람들 눈에는 동남동녀 납치범들이 아니라 녹림의 악적에게 표물을 탈취당하는 선량한 표사들로 보일 것만 같았다.

‘그럴 리가 없는데?’

아까 죽은 놈은 저 뒤에서 혈적까지 불었다.

혈적을 분 놈들이 선량한 놈들일 까닭이 없다. 놈들은 틀림없이 마교와 관련이 있는 놈들이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확실히 하자…….’

용무린은 네 사람이 쏟아낸 장력을 허깨비처럼 피하며 백주 항아리를 발로 걷어찼다.

와장창.

“……!”

용무린의 눈이 반달이 되었다.

놀랍게도 깨어진 백주 항아리 사이 정신을 잃고 늘어진 소년과 소녀의 모습이 보인 거다.

“아 놔, 깜박 속을 뻔했네.”

“이놈!”

“하아아!”

네 운룡장 직계가 기를 쓰고 장력을 밀어냈다.

우웅. 후웅. 콰우우.

산화장법을 비롯한 운룡장의 비전장법들이 용무린의 몸을 짓이기려 들었다.

“자식들…….”

촤촥.

용무린이 풍뢰를 짧게 휘돌렸다. 짓쳐들던 장법들이 깡그리 베어졌다. 그저 강한 정도의 바람이 되어 용무린 옆으로 흘러 버렸다.

“증거가 이렇게 있는데 어디서 피해자 흉내를 내고 지랄들이야?”

생각하면 할수록 더 열 받는다.

“에라, 이 자식들아!”

스가가각.

풍뢰가 둥그렇게 원을 그렸다.

그 범위에 걸려든 운룡장 직계 네 명의 팔이 거의 동시에 떠올랐다. 그런 후 훌쩍 떠오른 용무린의 발이 바람개비처럼 돌았다.

뻐버버벅.

연환각의 간단한 한 수에 놈들의 턱이 차례차례 걸렸다. 부서져 나갔다.

“컥!”

“흐으…….”

털썩. 털썩. 터얼썩.

팔 하나씩 잃고 턱까지 부서진 네 녀석이 사이좋게 바닥에 누웠다. 정신을 잃었다.

“무린아!”

그러는 사이 자신의 상대를 박살내 놓은 화운장로가 바람처럼 달려왔다. 그 뒤를 이어 의천단주와 풍운단주 역시 도착했다.

“정말이구나. 정말 아이들이 있었어.”

“이런 죽일 놈들!”

“어서 구합시다. 어서요.”

퍼엉. 퍼퍼펑.

세 사람은 깨진 항아리 사이 정신을 잃은 소년과 소녀를 확인하곤 정신없이 항아리를 부쉈다.

항아리마다 정신을 잃은 동남동녀가 들어 있었다. 화운장로와 당유현 그리고 남궁헌은 조심스럽게 아이들을 바닥에 뉘였다. 모두 스무 명이었다.

“응?”

용무린의 시선이 운하 쪽으로 확 돌아갔다.

‘이 기운은?’

무엇인가를 느낀 용무린은 그 즉시 신법을 전개했다. 운하를 향해 거리를 좁혔다.

꿈틀.

용무린의 눈두덩이 거칠게 요동쳤다. 가장자리에서 운하의 중심부로 이동하는 배 하나를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틀림없어. 신교에서 나온 놈들이야.’

뱃전에 십여 명에 이르는 노인과 장년인들이 서 있었다.

평범한 차림으로 보였지만 하나 같이 짙은 마기를 뿜어내는 놈들이었다.

‘칠까?’

대뜸 그 생각부터 들었다.

숫자와 흉험한 마기 따위 안중에도 없었다. 그저 저놈들이 항아리에 담겨 있던 아이들을 받아 불회곡으로 향할 예정이었다는 것만이 중요했다.

‘열다섯 장쯤 될까? 나무 몇 개만 끊어 던지면 충분히 돌파할 수 있는 거리이기는 한데…….’

일이 잘못된 것을 확인한 즉시 도주하는 모양인데, 용무린은 놈들을 그대로 고이 보내줄 생각 자체가 없었다.

‘동남동녀를 대체 몇 명이나 모을 생각인지 또 그 아이들을 모아 무슨 짓거리를 할 작정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야심찬 계획에 찬물을 끼얹어 주지.’

더불어 놈들의 목도 따준다.

휘이이이-.

용무린이 불사신기를 끌어 올림에 따라 시원한 바람이 밀려들었다. 주변을 맴돌다 쭉 빨려들었다.

“무린아!”

무슨 일인가 싶어 뒤따라온 화운장로가 소리쳐 불렀다. 용무린을 만류했다.

“참아라. 이미 늦었다.”

“늦지 않았어요, 장로님.”

무언인가를 가늠하던 화운장로가 고개를 흔들었다.

“……그래도 너무 위험해. 지금은 그냥 보내줘라.”

“잡을 수 있다니까요?”

“그 혈기 좀 제발 죽여 인석아. 언제고 만날 놈들이니까 그때 해결을 봐. 왜 혼자서만 모든 것을 다 해결하려고 그러는데?”

“……!”

“열다섯 장이나 떨어졌어. 지금은 더 벌어졌고. 아예 강 한가운데로 나가고 있다 인석아.”

“크크큭. 괜찮아요. 놈들 처리한 후 배를 빼앗으면 돼요.”

“허튼소리! 네가 가는데 내가 어찌 여기 남아 있겠느냐? 의천단주는? 풍운단주는? 그 사람들이라고 여기 남아서 구경만 할 성 싶으냐?”

“맞습니다, 장로님.”

“저도 함께 갈 것입니다, 총순찰.”

당유현과 남궁헌이 이를 갈며 눈을 빛냈다.

용무린이 출발하는 즉시 헤엄을 쳐서라도 전투에 합류할 의지를 숨기지 않았다.

“만에 하나 물속에 수공에 능한 놈들이 몇 놈만 숨어 있어도 곤란한 상황에 빠질 수 있단 말이야. 너는 몰라도 우리 중 많은 수가 죽어. 그걸 모르겠어?”

‘그 생각은 못했네.’

수공에 능한 놈들이 물속에 숨어 있을 것이란 생각은 하지 못했다. 물론 그런다고 해봐야 자신에게 그다지 큰 위협은 되지 못하겠지만 다른 사람은 다를 것이다.

피식.

‘좋아. 지금은 봐주지.’

슥.

용무린은 운룡장 직계가 떨어뜨린 작은 소검 하나를 집어 들었다. 불사신기를 뭉텅 밀어 넣었다.

반짝.

소검에 최적화 된 검강이 걸렸다.

“후우우우.”

길게 호흡을 고른 용무린이 소검을 힘껏 던졌다.

쌔애애액.

“……!”

“……!”

화운과 당유현 그리고 남궁헌의 입이 쩍 벌어졌다.

오십여 장의 거리를 눈 깜박할 사이 단축한 소검이 중년인 하나의 목을 가볍게 날려 버렸기 때문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기습에 부산을 떨고 장력을 뿜어냈으며 검을 들어 방어를 했었지만 소용없었다. 용무린이 날려 보낸 소검은 신룡이라도 되는 듯 이리저리 방향을 바꾸더니 너무나도 손쉽게 그 일을 해냈다.

“마, 맙소사.”

“말도 안 돼…….”

“허공에서 방향을 자유자재로 바꾸다니!”

그러한 검법이란 것은 오직 하나 밖에는 없다.

어검술!

소검을 끝까지 노려보며 검결지를 쥔 손가락을 이리저리 움직였으니 틀림없이 목어검이리라.

“무, 무린아. 바, 방금 그것은…….”

“다 봤으면서 뭘 물어요? 가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용무린은 휙 돌아섰다.

조심스럽게 아이들을 깨우기 시작했다.

“어, 엄마!”

“아부지!”

깊은 잠에서 깨어난 아이들은 눈을 뜨자마자 부모를 찾았다. 겁먹은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휴. 다행이네.”

용무린이 이마에 흐른 땀을 닦아냈다.

아이들은 대부분 수혈을 눌러 재운 것이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헐헐헐, 아무 걱정하지 말거라. 이 할아비는 개방의 화운이라고 하고 저기 저 아저씨는 무림맹의 의천단주와 풍운단주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너희들을 구하고 잠에서 깨어나게 해준 사람은 무림맹의 총순찰이란다.”

“저, 정말요?”

“감사합니다. 총순찰님.”

나이가 조금 있는 축에 속한 사내 녀석들은 제법 의젓하게 인사까지 할 줄 알았다.

“됐다. 너희들이 안전한 모습을 보니 오히려 내가 더 고맙다. 그건 그렇고, 너희들 중에 누가 공손수광이냐?”

“제, 제가 공손수광인데요?”

의젓하게 인사를 건넸던 녀석이 손을 들었다.

용무린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역시 할아버지를 닮아 의젓하구나.”

“저희 할아버지를 아시나요?”

할아버지 이야기가 나오자 공손수광의 얼굴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용무린은 고개를 크게 끄덕여주었다.

“그으럼. 예전에 내가 네 할아버지에게 큰 은혜를 입었거든. 그래서 이렇게 너를 찾아 나선 거란다.”

“와아!”

“가자, 수광아. 할아버지와 부모님이 기다린다.”

“예, 총순찰님.”

공손수광이 대뜸 따라 나섰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나머지 아이들이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나지막한 목소리로 엄마 아빠를 찾았다. 화운장로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나섰다.

“허허허, 아무 걱정 말거라. 이 할아비가 책임지고 너희들을 부모님들에게 데려다 줄 것이다.”

“정말요?”

“감사합니다, 거지 할아버지.”

저 멀리서 모든 일을 마친 의천 풍운 두 무력단체의 무사들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

이레 후.

정주 외곽 공손노인의 대장간.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기 시작할 무렵 용무린은 공손수광을 앞세워 도착할 수 있었다. 공손수광은 자신의 집이 먼발치에서 보이자마자 뛰기 시작했다. 동네가 떠내려가라 고함을 질렀다.

“할아버지! 아빠! 엄마-아!”

꿈에서도 그리던 목소리가 들린 것일까?

“수, 수광아!”

“아들아!”

“내 아들!”

공손위와 아들 내외가 맨발로 뛰어 나왔다. 공손수광을 눈물로 반겼다. 그 모습이 어찌나 보기가 좋은 것인지 용무린의 입가에 진한 미소가 떠올랐다.

웃음소리와 눈물이 뒤범벅이 된 해후가 끝이 났다.

공손수광은 아버지 어머니 손에 이끌려 안으로 들어갔다. 오래지 않아 맛있는 냄새가 솔솔 풍겨 나오기 시작했다.

“이 은혜를 대체 어찌 갚아야 할는지…….”

“은혜랄 게 뭐가 있겠습니까? 제게 풍뢰와 소검비연을 건네주신 분인데요. 저야말로 그 빚을 조금이라도 갚은 것 같습니다.”

어림없는 소리 하지 말라는 듯 고개를 흔들어 보이던 공손위가 손을 내밀었다. 용무린이 어째서 자신을 찾아온 것인지 이미 알고 있는 듯했다.

“감사합니다, 어르신.”

깍듯이 인사를 건넨 후 용무린은 풍뢰와 소검비연을 공손위의 손에 건넸다.

공손위가 눈을 빛내며 입을 열었다.

“빛이 많이 상했군.”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공손위가 풍뢰를 퉁겼다.

따앙.

맑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공손위의 눈살은 살짝 찌푸려졌다.

“이 녀석이 괴로워하는군. 그만큼 적들이 강했다는 뜻도 되겠지?”

용무린의 고개가 천천히 끄덕여졌다.

솔직히 공손위의 말이 맞았다. 지금껏 자신과 싸워왔던 상대들은 거의 모두가 자신보다 월등히 뛰어났던 고수들이었다.

불사신기와 풍뢰 그리고 소검비연까지 삼박자가 맞지 않았다면 자신은 지금 이 자리에 서 있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닷새만 말미를 주게. 혼신의 힘을 불어넣어 빛을 되살려 주겠네.”

“감사합니다, 어르신.”

용무린이 미소로 화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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