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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시작되는 군림의 길 (41/104)

10.시작되는 군림의 길

패주의 진성왕부.

꿈틀.

보고를 받고 있던 진성왕의 눈꼬리가 역 팔자를 그렸다.

“경위지휘사사의 부지휘사까지 바뀌었다?”

“그러합니다, 왕야.”

“새파란 애송이에게 황궁과 도성 그리고 황릉의 수위를 맡긴다고? 이거야 어디 원…….”

정말이지 믿을 수가 없는 파격적인 인사였다.

듣지도 보지도 못한 애송이를, 조정에 출사한 지 이제 불과 백 일도 안 되는 애송이를 느닷없이 그런 중요 요직에 앉히다니!

‘말도 안 돼.’

부지휘사이긴 하지만 실질적인 무력의 행사는 그의 선에서 이루어지는 법, 이제 갓 이립을 넘긴 애송이가 맡을 만한 중책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어…….’

불과 서너 달 사이 이렇게 되었다.

현명하기만 하던 황제가 와병을 핑계로 칩거를 시작했고 모든 정무는 사례감과 삼공들이 알아서 하고 있으며 황명은 은밀히 칙서의 형태로 내려오고 있었다.

‘냄새가 너무 심하단 말이야.’

부지휘사 위로 정 3품의 지휘사가 있긴 하지만 이 기세로 보아 그 역시 오래 버티지 못하고 한직으로 밀려나거나 삭탈관직 당할 것이다.

‘그 다음은 빤하지.’

더 볼 것도 없는 일이다.

조정에 출사한 지 이제 불과 백 일 정도밖에 아니 되는 새파란 애송이의 손에 경위지휘사사의 지휘사 자리를 턱 안기리라.

“분한 일입니다, 왕야.”

보고자인 왕부장사사의 좌장사 이벽이 다시금 우려 섞인 목소리를 이었다.

“두어 달 전에는 훈공의 명분이 강한 양가장의 양평을 몰아내고 금의위의 북 진무사 자리에도 그만한 애송이를 앉히기까지 했사옵니다. 이대로 계속 두고만 보다가는 황상의 눈마저 완전히 가리게 될 것이옵니다.”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 누군가의 원대한 계략에 의해 착실히 진행되고 있는 일이라면 그 끝은 하나로 귀결되기 때문이었다.

‘……역천의 모략?!’

흠칫!

진성왕의 등줄기를 타고 한 줄기 싸늘한 기운이 흘렀다.

생각하기도 싫었는지 진성왕은 고개를 흔들었다.

경위지휘사사와 금의위가 작정을 하면 황성의 수비는 무방비 그 자체가 되어 버리거나 수위해야만 할 황궁과 도성을 되레 침공할 수도 있게 되기 때문이었다.

“두 애송이의 뒷조사는 어떻게 되었느냐?”

“마침 보고서가 올라왔습니다, 왕야.”

이벽이 품에서 두툼한 종이를 빼들었다. 공손히 올렸다.

진성왕은 조용히 이벽이 올린 보고서를 받아 읽었다.

아드득.

잠시 후 진성왕의 입에서 섬뜩한 파열음이 새어 나왔다.

“정녕 무부 나부랭이란 말인가?”

“참담한 일이옵니다, 왕야. 조사 결과 그렇게 나왔습니다. 놈들이 내세웠던 가문은 실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뿐입니다.”

“허어!”

“또한 교위 왕한상과 영반 풍양호 두 사람과 휘하의 위사들을 한꺼번에 거꾸러뜨린 것으로 보아 무림인이라고밖에는 볼 수 없었사옵니다.”

이벽이 고개를 조아렸다.

분하기 짝이 없다는 듯 격앙된 목소리를 이었다.

“그런 참담한 소식을 도무지 황상께 아뢸 수가 없다고 합니다. 황후마마는 물론이옵고 황태자님까지 황상의 용안을 뵌 지 오래라 합니다.”

“어떻게 이런!”

“더욱 더 참담한 사실은, 황상께 이러한 일을 아뢰려는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축출을 당하거나 죽임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왕야.”

“……!”

진성왕이 눈을 질끈 감았다.

좌장사 이벽이 지금 무엇을 원하고 있는 것인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더 늦기 전에 나보고 나서라는 것이겠지.’

잘 안다. 하지만 그만큼 어려운 일이었다.

자신이 움직이게 되면 자칫 골육상쟁으로 이어질 수도 있는 일이었고 역모로 몰리기에도 그만큼 쉬운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무부가 끼었다면 내 힘만으로도 무리일지 몰라.’

그게 더욱 문제다.

당당히 조정에 출사해 불과 서너 달 사이 중요 요직을 꿰찰 정도의 뒷배와 힘을 지닌 자들이기에 자신마저 속절없이 밀려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번 일에 찬성하고 나선 것은 누구누구냐?”

“삼공과 삼고 내각과 육부, 도찰원과 한림원 등 조정 전체에서 고루 찬동했사옵니다. 물론 제가 입에 담은 사람들 전원은 아니겠지만, 고루 찬동을 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왕야.”

“……!”

진성왕의 입이 쩍 벌어졌다.

생각보다도 훨씬 더 사태가 심각했기 때문이었다.

‘내 힘만으로는 무리다. 이대로 섣불리 나섰다가는 되레 내가 당해.’

판단이 바로 섰다. 특단의 대책이 없이는 자신조차 밀릴 수밖에 없는 형국이다. 조정 전체를 상대로는 아무리 명망이 깊은 자신이라도 무리였다.

‘그렇게 되면 남는 것은 정녕 골육상쟁밖에 없겠지.’

이 자리에서 속절없이 밀려난다는 것은 곧 역모의 누명을 쓰고 죽는다는 것을 뜻하는 법!

‘그럴 수야 없지.’

그런 상황이 발생하게 되면 살기 위해서라도 정녕 역천의 길을 걸어야 한다. 하지만 자신의 나이 벌써 지천명을 훌쩍 넘겼다.

‘역천의 길? 귀찮아! 숨 막힌단 말이지.’

그 따위는 아예 관심 밖이었다.

때때로 산천유람도 할 수 있으며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든 적절히 충족할 수 있는 현재의 삶에 만족한다.

반짝.

그때 진성왕의 눈에 장궤 하나가 들어왔다.

포양호 인근의 현령과 몇몇 성의 도지휘사들이 사사로이 병력을 이동시킨 일에 대한 상세한 보고서였는데, 그 안에 적혀 있던 많은 수의 이름 중 단연 돋보이는 이름은 용무린이었다.

용무린!

신주오가로 불리는 무림세가의 한 곳인 비룡문의 소문주이자 무림맹의 총순찰로서 마교가 획책하는 사이한 대법에 희생당할 동남동녀를 구해준 사내.

관과 무림은 별개라는 해묵은 관행을 과감히 깨버린 후 모든 책임을 자신에게 돌렸으나, 실제로 무고한 아이들을 백수십여 명이나 구하게 되어 이제는 강호의 모두가 대협이라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는 보고서였다.

‘이이제이(以夷制夷).’

진성왕의 뇌리에 좋은 생각이 하나 스쳐 지나갔다.

“왕명이다. 지금 당장 용무린이라고 하는 강호의 무부를 불러들여라.”

“충!”

이벽이 고개를 깊이 숙여 보인 후 사라졌다.

***

사흘이 훌쩍 지났다.

그 시간 동안 제갈문군은 용대명과 함께 중도연합에 대한 심도 있는 대화를 나눴고 합의점을 찾았다. 무림맹에 속하되 끌려 다니지 않으며 하나된 목소리로 대의를 벗어나는 일에 함께 맞서겠다는 결론이었다.

혈고로 인한 마교의 수작은 막아냈지만 그동안 독주를 했던 화산파나 종남 그리고 청성 등의 문파는 아직 변화가 미미했고 그로 인해 무림맹의 존재 의의가 희미해졌기 때문이었다.

그 사이 용무린은 흑야방의 노백인과 독사를 다그쳤다.

녀석들의 무공 수준을 점검했으며 호북성 전체로 세력을 확장할 계획을 준비했다.

“서평의 귀도방, 남소의 귀혈방, 원양의 마륜방?”

“예, 두목.”

“쓰읍!”

“공자님!”

“그 세 곳이 가장 악랄하다고?”

용무린의 질문에 노백인과 독사가 동시에 고개를 끄덕이며 다투어 입을 열었다.

“그렇습니다, 공자님.”

“인신매매 전문인 놈들이라 부녀자 납치도 서슴지 않는 진짜 개자식들입니다요.”

“그래?”

잘 걸렸다는 듯 용무린의 입가에 서늘한 미소가 걸렸다.

그런 놈들이라면 대놓고 박살낸다고 해도 슬퍼할 사람들은 없을 테니까…….

“그 세 곳만 박살을 내 놓으면 나머지 자잘한 곳들은 저희들 선에서도 정리가 가능합니다.”

“그렇습니다. 특별한 위치의 사마외도의 문파들도 아니고, 우리 별동대의 하나 된 힘이라면 나머지 자질구레한 놈들은 그냥…….”

“별동대?”

용무린의 눈이 동그래졌다.

노백인과 독사가 쑥스러운 듯 뒷덜미를 긁적이며 말을 이었다.

“죄송합니다, 공자님. 소속감을 위해 저희들끼리 정한 말인데…….”

“공자님께서 미래의 비룡문 주인이시니, 정식으로 예하에는 들지 못하지만 그래도 우리들 정도면 별동대쯤은 되지 않을까 해서…….”

노백인과 독사가 말꼬리를 흐렸다. 용무린의 눈치를 살살 보았다.

씨익.

용무린의 입가에 시원한 미소가 걸렸다. 그러나 말은 나무라는 것처럼 튀어 나왔다.

“별동대가 뭐냐? 별동대가.”

“죄송합니다, 공자님.”

“주제넘은 짓을 했습니다, 공자님. 죽여주십시오.”

노백인과 독사가 풀이 죽은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용무린은 천천히 고개를 흔들었다.

“죄송하긴? 겁먹을 것 없다.”

“예-에?”

두 사람의 눈이 동그래졌다.

여전한 미소를 머금은 채 용무린의 말이 이어졌다.

“내 말은 너희는 별동대가 아니라 다른 이름으로 불려야 한다는 거야.”

“……!”

“……!”

쐐기를 박듯 용무린의 입에서 놀라운 말들이 쏟아졌다.

“내가 너희들에게 할 일이 없어서 유성검문의 무공까지 가르친 줄 아냐? 과거와는 완전히 달라진 너희들의 행동이 앞으로도 변함이 없다면 나는 너희들을 내 식솔로 받아들일 것이다.”

“공자님!”

“크흑, 공자님!”

노백인과 독사의 가슴이 벅차올랐다.

대충 쓰고 버리는 패가 아닌 식솔로 생각하고 있다는 말에 난생 처음으로 벅찬 감동을 느꼈던 것이다.

“명심해. 너흰 이미 과거의 흑도 왈패들이 아니야. 너흰 나와 함께 무림의 밤을 지배할 선봉이란 말이야. 무슨 말인지 알아듣겠어?”

쿵! 쿵!

노백인과 독사가 이마를 바닥에 처박았다.

큰 소리로 외쳤다.

“주군께 이 목숨을 바치겠습니다.”

“주군을 따르겠습니다.”

두 사람의 충성 맹세를 내려 보며 용무린은 마지막 당부를 잊지 않았다.

“너희들 입으로 그랬지? 이제야 사람이 사는 것 같다고? 너희 밑에 애들도 다들 좋아하고 관리 받는 업소들도 다 너희를 좋아한다고 말이야. 잊지 마라. 과거처럼 양아치 짓을 하는 놈은 가차 없이 벨 거다.”

“절대로!”

쿵!

“그런 일은 없을 것입니다!”

쿵!

그럴 바엔 차라리 죽겠다는 듯 노백인과 독사가 바닥에 머리를 찧었다.

“거, 바닥에 머리 찍는 버릇 좀 이제 고치라니까?! 그것도 양아치들이나 하는 거라고!”

“알겠습니다, 주군.”

“예, 주군.”

쿵. 쿵.

다시 한 번 머리를 찍는 두 사람을 보며 용무린은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내일 밤 술시에 떠난다. 그때까지 준비해 놔라.”

“넵!”

노백인과 독사가 한 목소리로 답했다.

***

다음 날 아침 해가 밝았다.

“그러면 다음에 뵙도록 하겠습니다, 사돈.”

“다음에는 경사스러운 일로 제가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사돈.”

용대명과 제갈문군이 석별의 정을 나누었다.

“내 딸을 너무 오래 기다리도록 하지는 말아주게, 사위.”

“알겠습니다, 아버님.”

용무린도 깍듯이 예를 갖추어 답했다.

“아버님 말씀은 신경 쓰지 마시어요.”

“령매.”

“가가께서는 큰일을 하실 분, 아버지 말씀은 귀담아 두지 마세요.”

제갈영령이 제갈문군을 향해 눈을 흘겼다.

“허, 참…….”

제갈문군이 머쓱한 듯 웃었다.

“제 걱정은 하지 마세요. 세상을 훨훨 날아다니세요. 저는 언제까지나 가가를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령매. 고마워.”

믿음 가득한 제갈영령의 눈을 바라보며 용무린은 가슴이 벅차올랐다. 마음만 같아서는 그녀를 한 번 꼬옥 안아주고 싶었지만 보는 눈이 하도 많아 그럴 수가 없었다.

제갈문군과 제갈영령은 그렇게 융중산을 향해 떠났다.

열흘도 넘는 먼 길, 밤에 따로 할 일이 있었던 용무린을 대신해 비룡문의 초절정 고수인 교진운과 유백이 함께 따라 나섰다.

시간이 흘러 술시가 되었다.

아버지 용대명에게만 은밀히 보고를 한 용무린은 노백인과 독사를 대동한 채 정벌을 떠났다.

***

나흘 후 서평의 귀도방.

호북성 외곽에서는 꽤 이름이 있는 흑도방파인 귀도방에 사신이 찾아들었다.

“이놈들이 그렇게 악질이라고?”

“응. 인신매매에, 마음에 드는 여인이 있으면 그날로 납치를 한 후 윤간을 하고 기녀로 팔아버리는 놈들이야. 부모가 쫓아오면 여인 앞에서 부모까지 벤다더군.”

용무린의 설명에 벽소추의 눈이 번들거리기 시작했다.

“개자식들! 좋아, 오늘 몸 한 번 제대로 풀어보도록 하자. 어떤 놈을 맡길 거냐?”

“방주인 흑귀가 절정 중급이니 그 놈을 맡을래? 아니면 그 아래 부방주와 몇 놈들이 절정 턱걸이 정도이니 그놈들을 한꺼번에 맡을래?”

“절정 턱걸이래도 떼거지는 아직 부담스러워. 그냥 흑귀란 놈을 맡을게.”

“좋아! 가자!”

콰앙.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용무린은 귀도방의 현관문을 때려 부쉈다. 고함을 크게 질렀다.

“흑귀란 놈 튀어 나와-아!”

“오오오, 이럴 땐 이렇게 하는 구나?!”

벽소추가 초롱초롱한 눈으로 용무린이 하는 모습을 빠짐없이 눈에 담았다. 사소한 것 하나라도 놓치지 않고 배우겠다는 집념마저 엿보였다.

“어떤 미친 새끼야?”

“이것들이 뒈지려고 환장을 했…….”

타닷. 휘릭.

소란에 뛰어 나온 몇 놈이 이를 드러내자마자 노백인과 독사가 달려들었다. 녀석들의 다리와 팔 하나씩을 대뜸 베어 버렸다.

스각. 서걱.

“이런 싸가지 없는 새끼가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어디 주둥이 다시 놀려봐! 이번엔 모가지를 따준다!”

용무린에게 욕설을 한 놈들을 향해 눈을 희번덕였다.

두 사람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벽소추가 용무린의 귀에 나지막하게 질문을 던졌다.

“친구야.”

“응?”

“저 쾌검수들은 대체 어디서 튀어나온 사람들이냐?”

용무린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간단히 대답했다.

“내가 키웠어. 지난 1년 동안.”

“……?!”

벽소추의 눈이 동그래졌다.

두 사람의 무위는 아무리 낮춰 잡아도 절정의 턱걸이는 되었기 때문이었다.

피식.

용무린이 풀썩 웃으며 보충설명을 해주었다.

“원래 저 둘은 이류에서 일류 사이에 오랜 시간동안 정체되어 있던 사람들이야. 지금은 멸문되었지만 이백 년 전의 명문이었던 유성검문의 검보와 노력, 약간의 가르침과 일 년의 시간이면 충분하지.”

“아하!”

그제야 이해가 간다는 듯 벽소추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사별삼일이면 괄목상대해야 하는 법, 끌어주는 이 없어 오랫동안 한 자리에 머물러 있던 이들에게 적절한 무공과 가르침을 내리고 피나는 노력이 함께 한다면 일 년이란 시간에 저 정도의 변화는 충분한 법이었으니까.

“그런데 이백 년 전 명문이었던 유성검문의 검보를 어떻게 저 사람들이 배울 수 있었는데?”

“……!”

용무린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 이 녀석은 대체……?’

벽소추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일 년 동안 저들을 키웠다는 용무린의 단순한 말 안에는 가르침과 더불어 유성검문의 검보를 저들에게 구해다 준 사실까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타고난 천재이니 무공의 진전이 빨라 나를 가르쳐 줄 수 있는 수준까지 단시간에 올랐다는 것까지는 나도 이해를 하겠어. 그런데 유성검문의 검보는 대체 뭐냐고?’

아니 그런 것들보다 더욱 이해하지 못할 사실은, 어떻게 그런 귀중한 검보를 아무렇지도 않게 구해서 저런 하류 인생들에게 거침없이 베풀 수가 있는가? 하는 것이다.

‘보통 그런 것들은 가문의 직계들이나 아니면 훈공이 높은 방계의 인물들에게만 은밀히 전수해 주는 것이 정상 아닌가?’

벽소추는 자신의 친구인 용무린을 정말 알다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웬 놈들이냐?”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행패더냐?”

“죽고 싶어 환장한 놈들이다. 일단 팔다리 하나씩을 베어놓고 심문하자. 쳐라!”

뒤를 이어 튀어 나온 놈들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용무린이 마지막으로 외쳤던 놈을 손가락으로 콕 찍으며 말했다.

“쟤가 흑귀란 놈 같다.”

“그래?”

“응. 튀어 나온 놈들 중에 그나마 젤 낫다.”

“좋았어!”

휘리릭.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신형을 뽑아 올린 벽소추가 흑귀를 향해 뚝 떨어져 내렸다. 도를 그었다.

촤아악!

“허억!”

카앙. 카카캉. 타탕.

흑귀가 검을 뽑아들어 겨우 겨우 버텨냈다. 물론 형편없이 뒤로 밀렸다.

‘길어봐야 십여 초나 버티겠군.’

용무린은 벽소추에게서 시선을 거두었다.

벽소추의 무위는 같은 절정에서도 상급, 그것도 용무린에게 날이면 날마다 눈이 밤탱이가 되도록 맞아가며 다진 경지다. 흑귀 따위가 감히 맞설 수 없는 것이다.

‘노백인도 적당한 상대를 만났고 독사도 마찬가지네.’

두 사람 다 적당한 상대를 만나 어우러졌다.

“우와아! 쳐라.”

“인신매매나 하는 놈들이다. 짓밟아 버렷!”

“조져!”

그 사이 용무린의 선봉대가 거침없이 달려들었다. 반항하는 놈들을 향해 유성검문의 검법 맛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카앙. 카카캉. 스각. 쉬각.

“크악!”

“커헉!”

서 있는 귀도방 소속 무인들 숫자가 빠른 속도로 줄어들었다.

***

“뭐야? 귀도방의 흑귀가 깨졌다고?”

서평현의 현령 조양이 목소리가 살짝 갈라졌다.

하룻밤 사이 멸문한 귀도방은 그에게 그만큼 놀라운 사건이었던 것이다.

“그러합니다. 간밤에 그렇게 되었다고 합니다.”

“허어.”

믿기 힘들다는 듯 길게 탄성을 발하는 현령 조양에게 보좌관인 현승 만백이 재차 목소리를 높였다.

“뭐, 별 거 있겠습니까? 어차피 하류 인생들, 그간 흑귀가 벌여왔던 업소들을 고스란히 흡수해 사업을 하기 위해서는 누가 되었든 오래지 않아 찾아와 고개를 조아릴 것입니다.”

피식.

“하긴!”

현령 조양이 풀썩 웃었다. 현승의 말이 옳았으니까.

“누가 차지하든 상납금만 차질 없이 낸다면야 아무래도 상관이 없지.”

“오히려 더 좋은 기회입니다.”

현승의 목소리가 살짝 더 높아졌다.

“좋은 기회? 어째서?”

“아무리 무부들이라고는 하나 엄연히 범법을 저지르는 놈들 아닙니까? 이 기회에 주인이 바뀐 것을 눈감아 줄 테니 한 몫 단단히 내라고 하시면…….”

“오오! 그렇지!”

현승이 말꼬리를 늘이며 눈썹을 씰룩이자 현령은 대뜸 그 의미를 알아차렸다. 반색을 하며 좋아했다.

“맞아! 놈들은 흑귀의 사업장을 차지하려면 내게 그만한 성의를 보여야만 해. 그렇지 않으면 내가 인정을 하지 않을 테니까 말이야.”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가 날이면 날마다 찾아가서 귀찮게 굴면 제대로 영업을 할 수 없을 것이고 결국엔 이곳을 떠나야만 할 것입니다.”

“좋아, 그러면 말이지…….”

“예, 예. 알겠습니다.”

서평현의 현령과 현승이 머리를 맞대었다.

떡 줄 사람은 생각지도 않는데 작당모의를 신나게 늘어놓았다.

***

용무린은 서평현에 사흘 동안 머물러 있었다.

귀도방을 박살내는 일이야 한 시진으로도 충분했지만 흑귀가 관리하던 홍루와 청루 그리고 도박장과 고리대금업체의 인수에 그만큼 시간이 걸렸기 때문이었다.

“이제야 살 것 같네.”

“천년만년 살 줄 알았던 흑귀가 하룻밤 사이에 죽어나갈 줄이야…….”

“만세! 이제야 숨 좀 쉬고 살겠구나.”

“퉤에. 잘 죽었다, 흑귀 놈!”

흑귀가 이끄는 귀도방에 어찌나 시달렸었는지 사람들은 쌍수를 들어 노백인과 독사를 환영했다.

“정말이십니까? 정말 지금까지 내던 보호비의 삼분의 일만 내면 된단 말입니까?”

“수하들 중 누군가가 행패를 부리면 그날로 해결을 해줄 터이니 투고를 해달라고요?”

“보호비를 받는 날이 아니면 찾아오지도 않겠다는 말씀이시죠?”

“알겠습니다. 기꺼이 내지요. 암요. 내고말고요.”

무한에서 효과를 거둔 방법을 서평현에서도 그대로 적용했다. 스무 곳이 넘는 청루와 홍루, 객잔과 도박장, 그리고 시전상회의 주인들이 뛸 듯이 기뻐했다.

“이만하면 떠도 되겠지?”

“그렇습니다, 주군. 유중이 저 녀석이라면 충분히 이곳 살림을 꾸려갈 수 있을 것입니다.”

유중은 노백인의 심복으로 유성검법이 제법인 사내다.

“유중!”

“예, 주군.”

“잘 해라. 무슨 뜻인지 알지?”

“물론입니다, 주군. 지난 일 년 동안 완벽히 뒤바뀐 삶이 얼마나 가치가 있는 것인지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습니다. 맡겨 주십시오, 주군.”

유중의 고개가 깊숙하게 숙여졌다.

용무린의 목소리가 차분하게 이어졌다.

“사람들의 원초적인 본능을 풀어주는 일들을 하는 곳이 본래 흑도라는 곳이야. 애초에 죽일 놈들이 죽을 짓만 하는 곳은 아니라는 것이지.”

그것이 용무린의 판단이었다.

숭산 북면 오도암에서의 작은 깨달음으로 그런 생각은 더욱 깊어졌다.

“거칠고 제멋대로 사는 것은 좋아. 그런 거야 어둠에 속한 흑도의 본성이니까. 하지만 흑도 역시 세상의 한 축, 결국 사람들이란 말이지. 한 줌도 안 되는 돈, 쾌락 따위에 혹해 타인의 눈물을 뺄 생각만 하지 마.”

쿵!

“물론입니다, 주군. 어둠에 속한 일을 하고 있지만 어떤 것이 진정한 즐거움인지, 어떻게 살아야 행복한 것인지 일 년 동안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이곳 역시 그렇게 만들어 보이겠습니다, 주군.”

“그래 믿겠다. 믿을 만하다고 판단되는 놈들에게만 유성검보를 전해라.”

“예, 주군.”

“마시자.”

“감사합니다.”

노백인과 독사가 뜨거운 시선으로 술잔을 들어 올렸다.

‘대체 저 친구의 목적은 뭘까? 당당한 신주오가의 일원인 비룡문의 소주인이 어째서 저런 흑도 무리들을 키우는 것이며 점점 그 세력을 확대하려는 것일까?’

벽소추는 무척이나 혼란스러웠다.

자신의 친구인 용무린은 어째서 자신을 이곳까지 끌고 왔으며 이런 모습들을 보여주려는 걸까?

‘흑도가 다 같은 흑도가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고 싶은 걸까? 아니면 다른 깊은 뜻이 있을까?’

아직은 알 수 없었다.

벽소추는 가만히 용무린과 용무린을 주군으로 받들어 모시는 사내들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러면서 놀라운 것은 이들에게 그다지 거부감이 들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사마외도나 흑도라고 하면 경기부터 일으키는 일반적인 정파무림인과는 너무나도 다른 감정과 느낌이었다.

‘혼란스럽다, 정말…….’

벽소추가 내심 고개를 흔드는 순간이었다.

쾅! 쾅! 쾅!

“게 안에 누구 있느냐?”

겨우 보수해 놓은 정문을 다시 부수기라도 할 듯 누군가가 두들겼다. 큰 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현청에서 포두들이 납시었다. 책임자는 어서 나와서 고개를 조아리거라!”

“……?!”

용무린의 눈이 동그래지는가 싶더니 이내 반달이 되었다.

“그동안 뒷돈 받아 처먹은 놈들이 왔나보다.”

“아하!”

“그렇군요.”

노백인과 독사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가서 잡아와.”

“이봐, 친구! 그들은 관인들이야!”

“넵!”

“알겠습니다, 주군.”

용무린의 명령에 벽소추는 소스라치게 놀랐고 그게 뭐 어떠냐는 듯 노백인과 독사는 대뜸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밖으로 향했다.

“네 놈이 여기 책임자냐…….”

“닥쳐!”

퍼억. 퍽퍽퍽. 빠박.

오래지 않아 매타작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헉!”

“크아악!”

“어떻게 감히 관인들을 이렇게……. 커헉!”

포두들이 목소리를 높여 보았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죄 박살이 났다. 바닥을 나뒹굴었다. 질질 끌려 안으로 들어와야만 했다.

“보자…….”

그 사이 흑귀의 비밀장부를 찾아 손에 든 용무린이 손가락에 침을 발라가며 장부를 넘겼다. 원하는 것을 찾아 큰 소리로 읽어 내려갔다.

“매달 초파일에 은하전장을 통해 은 백 냥씩 상납이 이뤄졌군그래. 수취인은 만백? 만백이란 놈이네?”

움찔.

만백이라는 이름이 튀어 나오자 포두라는 놈들이 눈에 띄게 몸을 떨었다.

“아는 이름인 눈치네?”

“아, 아니다 이놈들아…….”

“이 새끼가 정말!”

퍼억.

포두가 입을 함부로 놀리자 노백인이 대뜸 달려들었다. 사정없이 밟아버렸다. 만족스럽다는 듯 용무린이 풀썩 웃으며 명령을 내렸다.

“저 새끼 끌고 나가서 만백이라는 놈이 어떤 놈인지 알아내. 그리고 보아하니 저놈도 꽤 받아먹은 게 있는 것 같거든? 어떻게, 얼마나 받아 챙겼는지도 알아내.”

“충! 이리와 이 자식아!”

“아악. 사, 살려…….”

퍼억.

“컥!”

포두가 개처럼 질질 끌려 나가는 살풍경한 모습.

“……!”

“……!”

그제야 자칫하면 오늘 이 자리에서 죽겠구나! 라는 것을 느낀 나머지 포두들은 설설 기었다. 자진해서 귀도방과의 밀월관계에 대한 폭로에 나섰다.

“마, 만백은 서평현의 현승입니다.”

“그놈이 모든 것을 주제하고 있습니다.”

“위로 상납하는 것도, 이놈들의 뒤를 봐주는 것도 다 그 인간 손에서 이뤄집니다.”

“이놈들에게 당한 양민들이 상소를 올려도 현승 만백이 중간에서 모두 차단해 버렸습니다.”

어떻게 보면 탐관인 현령보다 현승 만백이라는 놈이 더 나빠 보였다.

“오호, 그렇단 말이지?”

용무린의 눈가에 회심의 빛이 돌았다.

일반적인 정파인이라면 상종하기도 싫으며 그런 인간을 다룰 방법도 없겠지만 자신은 달랐다. 구린 일을 하는 놈들을 다룰 방법은 많고 많았다.

“다 털어냈습니다.”

오래지 않아 노백인이 환한 얼굴로 들어왔다.

“그래? 그럼 가자.”

“예, 주군.”

용무린은 대뜸 자리에서 일어섰다. 떡이 되어 버린 포두들을 죄 끌고 현청으로 향했다.

당연히 현청에서는 난리가 났다.

두둑이 뜯어 오라고 보낸 포두들이 박살이 나서 질질 끌려오고 있으니 바닥에 떨어진 체면도 체면이거니와 도대체 무슨 뒷배가 있기에 저렇게 막 나가는 것인지 알 수가 없어서였다.

“저놈들을 포위하라!”

“감히 관인들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죄인 다루듯 끌고 오다니!”

“무엇들 하느냐? 병사들은 어서 저 악적들을 제압하라!”

“우와아!”

병사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창과 검을 들이밀었다.

하지만 소리만 요란할 뿐 아무도 나서지를 못했다. 노백인과 독사 그리고 유중의 눈빛도 감당하지 못해 시선을 피했다.

“쓰읍!”

“지랄들 한다.”

“덤벼! 박살을 내주지.”

노백인과 독사 그리고 이곳을 맡을 유중도 당당하기만 했다. 지켜보던 벽소추가 어안이 벙벙해질 정도였다.

“됐고, 일단 우리 둘만 이야기합시다.”

“우, 우리 둘이서만? 어, 어째서?”

용무린의 제안에 현령 조양이 얼떨떨한 얼굴로 물어왔다.

“은하전장. 매월 초파일.”

움찔!

“드, 들어가지!”

용무린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란 현령 조양이 먼저 백기를 들었다. 잽싸게 자리를 비켰다. 용무린을 깊숙한 내실로 안내했다.

‘헐! 그야말로 믿을 수 없는 파격의 연속이로구나.’

벽소추는 계속해서 입을 쩍 벌릴 수밖에 없었다.

용무린이 무엇을 가지고 이곳 현령을 압박하는 것인지 단숨에 알아차렸던 것이다.

‘당당한 정파의 일원이 흑도의 잡배들이나 할 법한 협박을 하다니!’

그러면서도 기이한 것은 왠지 모르게 속이 시원하다는 점이었다. 기존의 정파인들과는 아주 다른 형태의 새로운 정파인을 만난 느낌이라고나 할까?

‘우리 벽력도가였다면 어떻게 처리를 했을까?’

십중팔구는 답답하기 짝이 없는 일처리가 되었을 것이다.

용무린을 제외한 모든 정파들에게도 해당되는 말이겠지만, 저러한 경우에 여타 정파라면 적당히 돈으로 해결을 하든지 아니면 시간과 공을 많이 들여 설득을 할 것이다.

‘현령이 쩔쩔 매다니! 정파다운 처신은 아니지만 어찌 되었든 속이야 시원하구나.’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벽소추는 오늘 미래의 벽력도가를 이끌어 갈 때 잣대로 삼을 새로운 법칙 하나를 배우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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