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뜻밖의 초청 (42/104)

11.뜻밖의 초청

서평현의 현령 조양과 담판을 짓는 일은 간단했다.

모든 증거를 조정에 넘겨버리기 전에 입을 다물고 상관하지 말라는 용무린의 요구에 조양이 쩔쩔매며 고개를 끄덕였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에 상응하는 당근도 제시했다.

“두고 보면 알겠지만, 우리가 서평현의 밤을 지배하면 치안이라든지 민심 같은 것이 상당히 안정될 거야. 그건 오롯이 당신 공으로 돌려도 돼.”

“예-에?”

예전과 같은 수준의 상납금을 기대했던 조양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쓰읍!”

움찔!

“……!”

하지만 용무린이 눈을 한 번 부라리자 그대로 시선을 내리 깔았다. 조용해졌다. 풀썩 웃어 보인 용무린이 타이르듯 말을 이었다.

“이봐! 그동안 얼마나 챙겼는지는 모르겠는데, 그게 영전에 도움이 좀 됐다고 생각해?”

“……!”

조양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정말 도움이 되었다면 지금까지 이런 중급 현에 계속해서 처박혀 있을 까닭이 없었으니까. 용무린은 정확히 그 점을 지적했다.

“뇌물로는 한계가 있을 거야. 왜냐하면 뇌물 받아 처먹은 놈들이 당신을 위로 올려주려고 해도 전면에 내세울 훈공이 없었을 테니까. 물론 그놈들이 입에 거품을 물 막대한 황금을 상납했다면 또 이야기가 틀려지겠지만, 그건 힘들었겠지? 너도 조금 아까웠을 테니까 말이야. 안 그래?”

조양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이번 기회를 잘 살리라고. 돈만 밝히지 말고 말이야. 안정된 민심과 양민들의 진심 어린 지지를 받아 봐. 자연스럽게 당신의 훈공이 위에 알려지게 될 거야. 그때가 되어서야 당신이 그동안 먹인 뇌물이 제 값을 하게 될걸?”

“조, 좋소이다. 그러면 민심 안정은 확실히 시켜주는 것으로 알고 나는 눈을 감겠소.”

“좋아! 그건 내가 확실하게 해주지.”

용무린이 호언장담을 했다.

조양으로서는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하실 작정인지 물어도 되겠소이까?”

씨익.

용무린의 입가에 환한 미소가 걸렸다.

“가만히 두고만 봐. 며칠 내에 서평현의 현령 조양의 이름을 백성들이 칭송하게 만들어 줄 테니까…….”

백성들의 칭송을 받게 해준다는 말에 조양의 입은 자연스레 헤벌쭉 벌어졌다.

“믿겠소이다.”

“탁월한 선택이었어!”

더 볼일 없다는 듯 용무린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밖으로 나서며 조양의 체면까지 살려 주었다. 정중히 포권을 취하며 큰 소리로 외쳤다.

“오늘의 후의 결코 잊지 않겠소이다!”

“……커흠흠. 마, 마찬가지였다. 좋은 시간이었다.”

“가자!”

용무린은 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수하들을 이끌고 씩씩하게 돌아갔다.

“뭐, 뭐야?”

“어떻게 된 거지?”

“그냥 돌아가네? 저것들 안 잡아도 되는 거야?”

“잡긴 개뿔! 현령 나리 표정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오냐?”

혼란스러움도 잠시, 포두와 병사들은 이내 일상으로 되돌아갔다.

그 뒤로 정확히 하루가 지났을 때였다.

서평현의 백성들은 놀랍게도 현령 조양의 이름을 부르짖으며 칭송하기 시작했다.

“현령 어른 만세!”

“우리 현령 어르신께서 이런 은혜를 베풀 줄이야!”

“현령님 만세, 만세, 만만세!”

백성들이 조양을 칭송하는 이유는 사실 간단했다.

귀도방의 모든 사업체를 접수한 용무린이 그 중 가장 악랄했던 고리대금업 부분을 정리하면서 조양의 이름으로 몇몇 서류를 불태워버렸기 때문이었다.

불태운 서류들은 모두 백성들의 피눈물로 만들어진 차용증들, 대부분 돈을 갚지 못할 시 집과 땅을 빼앗는다는 내용이었다.

거기에 더해 재산이 없는 백성들은 자신을 포함해 아내와 딸 그리고 아들을 노비로 팔아서라도 갚겠다는 내용이었으니 조양이 칭송받는 것은 당연했다.

더불어 고리대금업으로 벌어들였던 재물을 골고루 나눠주기까지 했으니!

‘거 참, 이것도 나쁘지 않네?’

백성들의 칭송이 피부로 느껴졌다.

용무린이 현령 조양의 이름으로 서류를 불태웠다는 소식에 백성들이 현청 앞으로 뛰어와 환호성과 기쁨의 눈물로 칭송을 했기 때문이었다.

‘꽤 기분이 좋단 말이지…….’

난생 처음으로 받아보는 백성들의 칭송은 탐관 조양을 근본부터 조금씩 변화시키기 시작했다.

‘조금만 너그럽게 해줘볼까?’

두려움과 불만이 가득하던 이전까지의 자신을 향한 시선이 어떻게 바뀔는지 궁금했던 조양은 조금씩 아주 조금씩 재물 이외의 것에서 즐거움을 찾아갔다.

***

두 번째 목표인 남소의 귀혈방을 치러 가는 길.

평소와는 달리 계속해서 침묵에 잠겨 있던 벽소추가 불쑥 질문을 던져왔다.

“어째서 나를 이 일에 끌어 들였지?”

“왜? 싫어?”

“싫다기보다는 이해할 수가 없어서 그러지.”

“뭐가 그렇게 이해할 수가 없는데?”

“당당한 신주오가의 일원인 비룡문의 소문주인 내 친구가 어째서 사마외도나 할 법한 일에 발을 담그는 것인가? 흑도 세력들을 박살내고 흡수해서 대체 뭘 어쩌려고 하는 것일까? 등등?”

피식.

용무린은 한차례 싱겁게 웃으며 말했다.

“화운장로님과 일각대사님도 그리 묻더니, 너도 그게 그렇게 궁금하냐?”

“……!”

벽소추는 대답하지 않았다. 용무린은 지나가는 말처럼 편안한 목소리로 반문했다.

“너는 사마외도나 흑도가 완벽하게 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하냐?”

“그거야 뭐…….”

벽소추가 뒷말을 흐렸다.

모두가 부처님이 아닌 바에야 사람이 사는 세상에서 그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으니까. 용무린은 정확히 그 점을 짚었다.

“부처님도 그건 불가능한 일이야. 그래서 기껏 하고 있는 일이 중생의 계도지. 뭐, 솔직히 나는 그걸 밑 빠진 독에 물붓기라고 생각해.”

“네가 부처님의 일을 대신하겠다는 거야?”

“물론 그건 아니지.”

“그러면?”

“나는 단지 관리라는 측면을 말하는 거야, 친구.”

“……?”

“너도 느끼고 있겠지만, 어차피 아무리해도 사마외도나 흑도는 사라지지 않아. 필연적으로 누군가는 나타나서 또 못된 짓들을 하지.”

“그걸 알면서 이런 쓸데없는 짓을 해?”

“그게 왜 쓸데없어? 콱 쥐고 있는 동안만이라도 관리를 하면 되지.”

“……!”

“서평현에서의 일을 너도 봤겠지만, 그렇게 관리를 하면 되는 거야. 최소한 양민들의 고통은 상당한 수준으로 경감시킬 수 있지.”

“말이야 좋은데, 그러면 정파와 사마외도의 구분이 어디에 있겠냐? 지금 네가 하려는 짓은 전통의 명문정파가 할 짓이 아니라고!”

결국 네가 하는 짓은 사마외도나 흑도의 행동이라는 것을 지적하고 싶은 것이었다. 물론 용무린에게는 전혀 먹히지 않았다.

‘화운장로님과 일각대사님은 연배나 그 경험이 깊어 몇 마디 말로도 충분히 알아들으시고 내가 하는 일을 인정해줬는데 이 녀석은 조금 더디네.’

용무린은 발언의 강도를 조금 더 높였다.

지금 자신이 하는 일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결국 나중에는 더 큰 대립을 불러올 테니까. 그리고 그때는 비룡문까지 사마외도로 몰릴 수도 있을 것이다.

“전통의 명문이 지금껏 뭘 했는데? 마교를 완전히 몰아냈나? 아니면 거대한 흑도나 사파가 출현해서 양민들을 괴롭힐 때마다 나서서 교훈을 내렸나?”

“……!”

“아니잖아! 고고하기만 해서 관과 무림은 별개라는 울타리를 쳐둔 후 그 안에서 유유자적 명성을 즐기기만 했잖아? 그런 위선이 어디 또 있겠어?”

“그래서?! 너는 지금처럼 계속해서 흑도 패거리들을 정복하고 다니겠다고? 그게 마교의 무림정복과 뭐가 다른데?”

벽소추의 목소리가 살짝 격앙되어 나왔다.

아무래도 지금껏 자신을 지탱하던 고정관념이 뒤흔들리자 혼란스러웠던 모양이었다.

“당연히 다르지. 그놈들은 깡그리 죽인 후 마신을 믿는 자신들의 종교로 세상을 물들이겠다는 거고 나는 단지 내 힘이 닿는 선에서 흑도나 사마외도가 최악의 일만큼은 하지 않도록 제어할 뿐이라고!”

“……!”

벽소추는 말을 잇지 못했다.

머릿속으로 이해는 가는데 지금껏 가지고 있던 정파인이라는 견고한 울타리가 가슴을 찌르는 느낌이었던 것이다.

-현령 어른 만세!

-우리 현령 어르신께서 이런 은혜를 베풀 줄이야!

-현령님 만세, 만세, 만만세!

그때 벽소추의 뇌리에 서평현의 백성들의 환호성이 스쳐지나갔다. 각종 차용증을 불태우고 수탈했던 재물을 골고루 나눠주자 눈물을 흘리며 기뻐하던 사람들의 밝은 미소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우리 벽력도가에서는 어떻게 하고 있었지? 지근거리에 큰 흑도 문파나 사파는 없긴 한데, 작은 곳들도 두루 살펴서 양민들에게 도움을 주고 있었던가?’

솔직히 그렇게까지는 못하고 있다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벽력도가 역시 용무린이 말한 일반 정파들과 똑같이 행동했다. 직접적인 도전이나 도발이 없는 중소흑도방파들 같은 경우 눈을 감아 주었다. 때로는 보아도 보지 못한 체하며 외면하기도 했다.

‘유유자적 명성을 즐겼다고 했던가?’

그 말이 더욱 무겁게 다가왔다.

흑도나 사파들을 마주쳤을 때 그들이 벽력도가의 이름에 꼬리를 마는 것과 작은 도움에 크게 기뻐하는 사람들의 환호를 즐겼던 것은 분명 사실이었으니까.

“……!”

벽소추의 표정은 한동안 무거웠다.

그러나 남소의 귀혈방과 원양의 마륜방을 차례로 무너뜨리고 귀도방과 마찬가지로 흡수하고 난 후 다시 들려온 사람들의 환호성을 듣고 나서야 비로소 얼굴이 밝아졌다. 어째서 용무린이 관리를 하려고 나섰는지 피부로 느낀 것이다.

그 모습을 보며 용무린은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됐어. 저 녀석이 벽력도가로 돌아가면 최소한 그 주변에서만큼은 악랄한 흑도나 사파로 인해 힘들어하는 사람들은 없게 될 거야.’

이제야말로 벽소추를 벽력도가로 돌려보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드는 용무린이었다.

이레 후.

벽력도가가 자리한 섬서성 서안으로 향한 갈림길.

용무린과 벽소추는 객잔에서 간단히 석별의 정을 나누고 있었다.

“……그동안 고마웠다, 여러모로.”

“고맙긴!”

뜬금없이 던진 벽소추의 감사 인사에 용무린은 싱겁게 웃었다. 쑥스러운 듯 마주 웃어 보인 벽소추가 농담 반 진담 반이 섞인 말을 입에 담았다.

“앞으로도 지금처럼 무림을 정복해 나갈 거냐?”

“당연하지.”

씨익.

용무린은 활짝 웃으며 그 말을 받았다.

“이놈의 무림, 힘닿는 데까지 정복 해보려고.”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벽소추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말을 이었다.

“너라면 괜찮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래?!”

“그래.”

“의외네? 이렇게 쉽게 네가 내 생각을 이해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거든.”

“이 자식이 지금 친구를 눈뜬장님으로 아네? 사람들이 그렇게 좋아하는 것을 몇 번이고 봤는데 내가 왜 그걸 모를 거라 생각하냐 인마?”

“그런가? 크크큭.”

“양민들이 좋아하는 것을 보며 깨닫는 것이 많았다.”

말을 잇는 벽소추의 입가에 비룡문에서 줄곧 보여주던 개구쟁이 같은 미소가 걸렸다.

“필요하면 말해라. 나도 도와줄게. 너라면 이놈의 무림, 정복해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찬성이야.”

“그래, 알았다. 필요하면 연락할게.”

용무린과 벽소추가 뜨겁게 악수를 나눌 때였다.

대화를 나누는 내내 힐끔거리던 중년 사내가 벌떡 일어나더니 다가왔다. 그 뒤를 따라 딱딱한 인상의 사내 다섯이 죽 늘어섰다.

중년 사내의 입이 불쑥 열렸다.

“네가 무림맹의 총순찰 용무린이냐?”

“그런데?”

오는 말이 고와야 가는 말이 곱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용무린의 말은 대뜸 짧아졌다.

꿈틀.

중년인의 눈두덩이 요동치는가 싶더니 이내 가라앉았다. 개인적인 감정에 앞선 이유가 있어 보였다.

“일어서거라. 너를 찾는 분이 계시다.”

피식.

“싫은데?”

용무린의 입가에 비웃음이 걸리고 싫다는 소리가 떨어지기가 무섭게 뒤에 늘어선 다섯 사내가 광분을 했다.

“이런 시건방진 놈이!”

“무부 따위가 감히! 이분이 뉘신 줄 알고 그렇게 방자하게 군단 말이더냐?”

“냉큼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할까!”

스릉. 스릉.

앞의 세 놈은 고함을 버럭 지르고 뒤의 두 놈은 허리에 걸린 검까지 반쯤 뽑았다. 그걸 그냥 두고 본다면 용무린이 아닐 것이다.

후욱.

사내들의 대거리가 끝나기 무섭게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순간적으로 손을 휘둘렀다. 다섯 사내를 동시에 어루만졌다.

쫘아악. 쫘좍. 빠악. 퍼어억.

싸가지 없는 소릴 지껄였던 세 놈의 뺨이 그대로 터져 나갔다. 검을 반쯤 뽑았던 두 녀석은 턱이 부서진 채 홱 돌아가 버렸다.

우당탕. 콰당.

다섯 사내가 거의 동시에 바닥을 나뒹굴었다.

탱강. 탱강.

언제 잘라 버렸는지 반쯤 뽑았던 검은 정말 반 토막이 되어 바닥을 굴렀다.

“껄렁한 것들이 지금 누구에게 협박이야!”

“이, 이놈! 우리는…… 컥!”

화들짝 놀란 중년 사내가 뭐라 더 말을 하려고 했지만 중간에 차단됐다. 용무린이 목줄을 잡아챘던 것이다.

“시끄럽고, 오늘은 그냥 꺼져.”

“나, 나는…… 끄으윽.”

중년 사내가 사력을 다해 말을 이으려 했지만 용무린의 화만 불렀다. 용무린은 중년 사내의 목줄을 잡아 챈 손에 지그시 힘을 더했다.

“어디에 속한 사람인지 대충 짐작은 가는데, 오늘은 꺼졌다가 내일 다시 와.”

용무린의 목소리가 점점 더 싸늘해졌다.

“나는 네놈들의 수하가 아니야. 명심해. 내일 다시 올 때는 예의를 갖춰. 알아들어?”

“아, 알았…… 끄으으.”

중년 사내의 눈이 뒤로 돌아가기 직전이 돼서야 용무린은 목줄을 풀어 주었다.

털썩.

힘없이 옆으로 쓰러진 사내 따윈 관심도 없다는 듯 용무린은 벽소추를 배웅했다.

“잘 가 친구.”

관인임을 짐작하면서도 그대로 짓밟아 버리는 용무린의 대범함에 벽소추는 잠시 대답이 늦었다.

“……그래. 다음에 보자. 연락만 해. 도울 일이 있으면 내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도울게.”

“알았어. 고마워.”

벽소추가 떠나간 후 용무린은 노백인과 독사와도 작별을 고했다.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말 안 해도 잘 알지?”

“예, 주군!”

노백인과 독사가 한 목소리로 답했다.

용무린은 씨익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잘 해. 지금 너희가 누리고 있는 행복을 놓치지 마!”

“물론입니다, 주군.”

“주군의 뜻을 벗어나는 일은 절대로 없을 것입니다!”

노백인과 독사가 부복하며 크게 고함을 질렀다.

“그래, 그래. 다음에 보자.”

“충!”

두 사람이 한 목소리로 답한 후 돌아섰다.

“자, 그러면 나는 어디 기분 좋게 술이나 마셔볼까?”

용무린은 자리에 앉아 술을 따르기 시작했다.

애초에는 즉시 성산으로 갈 생각이었지만 생각을 바꾸었다. 관인으로 보이는 인간들이 어째서 자신을 찾는 것인지 말을 들어보고 싶었던 것이다.

용무린이 술잔을 기울이는 사이 중년 사내와 수하들은 자신들의 방으로 물러났다.

“저를 보내주십시오. 왕부호위지휘사사로 돌아가 군사들을 끌고 오겠습니다.”

“도저히 참을 수 없습니다. 감히 무부 따위가 관인들에게 이런 수모를 주다니요!”

“서평현의 관인들을 구타하고 끌고 간 것도 눈감아 주었거늘 감히 우리에게까지…….”

분해서 참을 수가 없다는 듯 수하들이 목소리를 높였다.

그랬다. 이들은 바로 진성왕부의 사람들, 중년 사내는 좌장사 이벽이었고 다섯 사내는 왕부호위지휘사사 소속 무관들이었던 것이다.

슥.

이벽이 손을 들어 올렸다.

“……!”

다섯 사내들이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이벽은 침묵 속에 생각을 정리했다.

‘과연 소문대로의 사내로군. 무공에 입문한 지 불과 일 년 만에 초절정 경지의 강호들을 두 명이나 차례로 꺾었으며 무림맹 총순찰의 자리에 올라 저 사특한 마교의 대법에 희생될 아이들을 구해낸 사내다워.’

오늘의 무례는 솔직히 계산된 행동이었다.

주군을 모시는 신하된 자로서 명령만 수행하면 끝이 아니기 때문에 사람 됨됨이를 보려 시험을 해 본 것이다.

‘필요할 때에는 관과 무림은 별개라고 하는 해묵은 관행까지 과감히 깨버린 후 관에 고개를 숙일 줄 안다. 무림인으로서 관에 도움을 요청할 배포를 지녔지만 결코 권력이나 권세를 탐할 성품은 아닌 자라…….’

다시 한 번 자신의 주군인 진성왕야의 안목에 탄복을 하는 이벽이었다.

‘그래, 그쯤은 되어야 황궁에서 벌어지는 일을 해결을 한 후에도 뒤가 찜찜하지 않겠지.’

용무린과 같은 고강한 무공의 소유자가 황궁에 눌러앉아 황제의 총애를 받고 조정과 정사를 좌지우지하는 것을 생각해 보라!

상상만으로도 아찔했다. 승냥이를 쫓기 위해 호랑이를 들이는 셈이 될 테니까.

‘용무린은 절대 그럴 자가 아니야.’

그렇다면 답은 나왔다.

‘용무린 총순찰이 그러했듯 나 역시 필요하면 과감히 머리를 숙인다.’

자신은 관인이다.

좁게는 진성왕야의 명을 수행하며 넓게는 황상의 보위를 수호하는 사명을 지닌 사람인 것이다.

무부에 불과한 용무린조차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과감히 관례를 깨고 고개 숙여 관에 도움을 요청하는데 사명을 지닌 자신이 그렇게 하지 못할 까닭이 없는 거다.

“내일은 예로 대한다.”

“좌장사님!”

“어찌하여……!”

수하들의 입에서 이벽의 말을 수긍하지 못하겠다는 듯 불만 섞인 목소리들이 튀어 나왔다.

“……!”

그런 수하들을 이벽이 매서운 눈으로 노려보았다.

다섯 사내들이 움찔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의 말이 옳다. 해묵은 관행이긴 하나 역시 관과 무림은 별개인 셈이지. 그의 말대로 그는 우리의 수하가 아니다. 왕야의 명을 수행함에 있어 무엇이 더 옳은 것인지 항상 유념하도록 해라.”

“충!”

“알겠습니다, 좌장사님!”

간단히 상황을 정리한 이벽은 느긋하게 해가 저물고 다시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

‘내일 다시 오라 했지?’

본인의 입으로 그렇게 말했으니 밤사이 어디로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느낌이 좋아…….’

진성왕야의 고뇌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는 조정의 일이 어쩐지 단숨에 풀릴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

서로 다른 속도감을 지닌 하루가 지났다.

“아우, 잘 잤다.”

용무린은 모처럼 만에 편히 푹 자고 일어났다.

“대충 씻었으니 이젠 밥이나 먹어볼까?”

성산으로 가려던 걸음이 지체되었지만 마음만은 편했다.

어제 자신을 찾았던 관인들이 무슨 말을 할 것인지도 그다지 궁금하지 않았다.

“들어보고 시답잖으면 떠나면 그만이고 시건방진 놈들이 감히 우리 가문이나 아버지를 겁박하겠다고 나서면 아예 박살을 내주면 되겠지.”

지금은 불분명하지만 아직까지 자신을 지배하는 성격은 신마 진무량 쪽이 조금 더 강했다. 관인이고 나발이고 내 가문 특히 부모님을 겁박이라도 한다면 그날로 그놈은 끝인 거다.

“그게 황제라고 해도 상관없어. 내 모든 것을 다해,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침투를 한 후 끝을 본다.”

애초에 그럴 생각이었기 때문에 마음이 너무나 편안한 것이다.

“어라? 벌써 내려와 있네?”

일 층으로 내려오던 용무린의 눈이 둥그렇게 휘었다.

어제 보았던 중년 사내 이벽이 공손한 태도로 서 있었는데 자세부터 어제와는 확연히 달랐기 때문이었다.

“여기 동파육과 백주 한 병!”

용무린은 모른 체 자리에 앉으며 주문부터 했다.

이벽이 빙그레 웃으며 다가왔다.

“음식에도 조예가 깊을 줄은 몰랐소이다. 동파육이야말로 백주와 곁들여야만 비로소 제 맛을 알 수 있지요.”

“……?!”

용무린의 눈이 동그래졌다.

‘뭐지? 왜 이렇게 확 달라진 거야?’

다시 올 때는 예의를 갖추라고 말은 했었지만 이렇게 완전히 달라졌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어제의 행동이 계산된 것이었든지 아니면 지체 높은 인간을 많이 상대하다 보니 가식이 완벽하게 몸에 배었든지 둘 중 하나겠구나.’

가만히 이벽의 눈을 들여다보던 용무린은 상대가 전자에 더 가까울 것이라고 생각했다.

“좌장사 이벽이라고 하오 용무린 총순찰.”

정중히 포권을 취하며 이벽이 자신을 밝혔다.

용무린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정중하게 포권을 취해 보였다.

“용무린입니다. 어제는 실례가 많았습니다.”

“허허허. 무슨 말씀을……. 권력을 탐하는 쪽인지 아닌지 알기 위해 일부러 고압적으로 나서봤소이다. 이해해 주셨으면 좋겠소.”

이벽이 손사래를 치며 웃었다.

‘역시 전자에 속한 부류로구나.’

용무린의 눈이 호기심으로 빛났다.

저 정도 인물을 수하로 부리기 위해서는 보통 지체가 높아서는 불가능하기 때문이었다.

“총순찰에 관한 소문을 많이 들었소.”

“그랬나요? 악명이 조금 높았을 텐데…… 다 믿지는 않았으면 좋겠네요.”

이벽이 빙그레 웃으며 말을 이었다.

“관과 무림은 별개라는 관행을 과감히 깨면서까지 사특한 마교의 무리들에게 희생될 아이들을 구한 분인데 악명이라니?! 말도 안 되오!”

다시 이어지는 이벽의 목소리가 은근해졌다.

“한 번 깨어진 관행이니 두 번도 깨질 수 있는 법 아니겠소이까?”

“그 말씀은……?”

용무린이 말꼬리를 늘였다.

어쩐지 그 뒤에 따라올 말이 짐작이 되어서였다.

그 짐작이 옳다는 듯 이벽이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대답했다.

“맞소이다. 제가 모시는 분께서 용무린 총순찰의 도움을 필요로 하오.”

“…….”

용무린은 선뜻 대답을 할 수 없었다.

필요해서 먼저 그런 관행을 깨긴 했지만 설마하니 그걸 빌미로 도움 요청이 들어오리라곤 생각해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십중팔구 정치적인 일에 연루될 것 같은데?’

그렇게 엮이는 것은 딱 질색이다.

정치적인 일에 엮인 후 뒤끝이 좋은 것은 역사적으로도 드문 일이었으니까……. 이제야 막 무림정복의 행보를 시작했는데 골치 아픈 일에 휘말릴 까닭이 없는 거다.

‘마음이야 그런데 이렇게 나를 콕 찍어 찾아왔을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란 말이지.’

그 까닭이 너무 궁금했다.

저만한 사내를 수하로 부릴 만큼 지체 높은 누군가가 과연 어떤 일로 내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일까?

용무린의 결정을 돕기 위해 이벽이 마지막으로 부연설명을 했다.

“결자해지가 아니겠소?”

“예?”

“강호의 무부가 끼어들었소. 하면, 누가 해결을 해야 하겠소이까?”

무부가 끼어들었으니 당연히 무부가 나서서 해결을 해야 한다는 뜻!

“……!”

용무린의 두 눈이 동그래졌다.

할 말은 모두 마쳤다는 듯 이벽은 흔들림 없는 시선으로 용무린을 바라보았다.

‘이건 들어봐야겠다.’

무부! 무림인을 뜻하는 관인의 말!

개방이나 하오문도는 아니었지만 호기심이 동했다.

듣는 순간 어쩐지 느낌도 쎄했다.

용무린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쐐기부터 박았다.

“들어보고 결정하는 걸로 하지요.”

“물론이외다.”

이벽이 환하게 웃었다.

***

열흘 후 패주의 진성왕부.

‘설마, 설마 했는데 정말 여기로 올 줄이야.’

진성왕부로 들어서는 용무린은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좌장사 이벽에게 들었던 단서와 자신을 찾는 사람이 진성왕야라는 것에서 이미 이들이 부탁하려는 일이 골치 아픈 종류의 것이라는 게 확실해졌기 때문이다.

‘패주와 자금성까지의 거리는 불과 사흘, 패주 인근에 왕부호위사사가 배치되어 있으며 정병 일 만이 상시 대기 중이지 아마?’

자칫 재수 없으면 역모로 몰리는 거다.

아무리 용무린이라고는 하지만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역모에 얽혀 수십만의 대군이 움직인다면 비룡문의 힘으로는 막아낼 수 없었으니까.

‘그때는 명령을 내린 황제를 죽여도 끝나지가 않을 거야. 새 황제를 옹립하는 난감한 일이 생겨도 후환을 없애기 위해 끝을 봐야만 할 테니까.’

무림정복을 하려던 자신의 계획은 그 날로 끝난다.

더불어 비룡문과 자신 역시 마교처럼 명군의 손이 닿지 않는 첩첩산중으로 피하거나 신강이나 서장과 같은 새외로 도주해야만 하리라.

‘그냥 오지 말걸 그랬나?’

살짝 후회하는 용무린의 마음을 마치 들여다보기라도 했다는 듯 좌장사 이벽이 불쑥 입을 열었다.

“너무 심려하지 마시오.”

“예?”

“우려하시는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을 것이외다. 일이 잘못되었을 때 책임을 질 분은 따로 있으니 말이오.”

좌장사 이벽의 얼굴에 자부심이 하나 가득 피어올랐다.

“그분께서는 책임 회피 따위 결코 하지 않으십니다. 혹여 우려하시는 일이 벌어진다고 하여도 당신께서 책임을 지실 터, 심려치 마시길…….”

새삼 진성왕야라는 인물에 대해 호기심이 돌았다.

상상하기 힘들 만큼 중대한 사안임에도 불구하고 수하가 저렇듯 신뢰를 하는 사람이라니!

“이쪽이오.”

이벽이 왕부 깊은 곳으로 용무린을 이끌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멋들어진 전각이 보였다. 입구의 몇몇 무장을 제외하곤 숨겨진 호위도 느껴지지 않았다.

“해검을 하시오.”

입구를 지키던 무장이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용무린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풍뢰를 풀어 무장의 손에 맡겼다.

‘풀어 놓으나 손에 쥐나 어차피 풍뢰는 나와 한 몸이니 이참에 예의나 지켜주지 뭐.’

의지만 불러일으키면 풍뢰는 언제든 도갑을 벗어나 내 손에 쥐어질 것이다.

“드십시다.”

이벽이 활짝 웃으며 앞서 걸었다.

오래지 않아 화려하지는 않지만 무척이나 정갈한 내실에 도착했다. 뒷짐을 진 채 창밖을 내려다보고 있는 중년인이 눈에 들어왔다.

‘저 사람이 바로 진성왕야?’

맞는 모양이다.

뒷모습에 불과했지만 전신에서는 무거운 권위와 기품이 후광처럼 풍겨 나오고 있었다. 일반인이었다면 단숨에 오금이 저려 무릎을 꿇었으리라.

이벽이 부복하더니 큰 목소리로 아뢰었다.

“좌장사 이벽, 왕야의 명을 수행해 돌아왔나이다!”

이벽은 인사를 마친 후 당혹스러운 얼굴로 용무린을 올려다보았다. ‘너는 왜 아직까지 그러고 있느냐?’ 하는 표정이었다.

피식.

‘내가 왜?’

용무린은 이벽이 보내는 무언의 질문을 그대로 무시했다.

똑바로 선 채 진성왕의 뒷모습만 바라보았다.

“무엇하는 게요? 해검을 하기에, 예를 아는 무인이라 생각했거늘……. 어서 빨리 왕야께 예를 갖추시오!”

이벽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더불어 용무린의 대답에도 싸늘한 냉기가 묻어 나오기 시작했다.

“잊으셨소? 나는 무림 중의 사람, 관이나 궁의 법도를 따를 이유가 없소.”

“이런! 무림 중의 사람은 이 나라 백성이 아니란 말…….”

이벽이 막 노성을 터뜨릴 때였다.

“되었다!”

진성왕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한 말이 흘러 나왔다.

“왕야! 어찌……?”

“도움을 청하려 불렀거늘 거들먹거리면 어쩌자는 것이냐? 그만하거라.”

말과 함께 진성왕이 몸을 돌렸다.

심유한 시선으로 용무린을 살피는가 싶더니 이내 씽긋 웃었다.

“당당한 사내구나.”

“제가 한 당당 합니다, 왕야.”

피식.

“무모한 패기만은 아니었으면 좋겠구나.”

“무모한 패기 아닙니다. 솔직히 제가 좀 합니다.”

반짝.

진성왕의 눈가에 서늘한 기운이 스쳐 지났다.

“알고 있겠지? 궁중에 허언은 없다. 네 말이 사실과 다르다면 장담컨대 상상하기 어려운 고난이 너와 네 가문에 닥칠 것이다.”

무서운 말이었지만 용무린은 되레 웃어 보였다.

씨익.

“그 반대도 생각하셔야 하지 않을까요? 먼저 예를 갖추기에 그에 합당한 예를 갖췄을 뿐 제가 본래 이렇게 조신한 성격이 아니라서 말이지요.”

진성왕의 눈을 쏘아보며 한마디도 지지 않았다.

“용무린! 네가 감히!”

더는 참기 어렵다는 듯 이벽이 고함을 질렀다.

슥.

진성왕이 손을 들어 올렸다. 이벽을 뒤로 물렸다.

잠시 용무린을 쏘아보던 진성왕은 천천히 탁자에 앉았다. 미리 끓여둔 차를 잔에 따랐다.

털썩.

앉으라는 말도 하지 않았는데 용무린은 넉살도 좋게 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그 앞에 놓인 잔 하나를 들어 내밀었다.

“저도 한 잔 주십시오.”

“그래.”

가볍게 웃어 보인 진성왕이 용무린의 잔에도 손수 차를 따라주었다.

꿈틀.

오직 한 사람 좌장사 이벽만 이 상황이 못마땅해 눈두덩을 요란하게 움직일 뿐이었다.

“석 달 전쯤이던가? 조정에 이상한 일이 연이어 벌어지기 시작했다.”

진성왕의 입에서 당금 황실과 조정의 비사가 천천히 흘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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