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또 너냐?
참으로 놀라운 이야기들이었다.
‘이거, 생각보다 훨씬 더 심각한데?’
용무린의 얼굴도 덩달아 어둡게 변했다.
삼공과 삼고뿐만 아니라 조정 전체로 번진 의문의 세력, 그리고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는 황제와 교지로만 내려오는 황명이라니!
‘금의위 북진무사에 이어 경위지휘사사의 부지휘사까지 생판 듣도 보도 못한 애송이들로 바뀌었다고?’
잠시만 생각해봐도 사태의 심각성에 등골이 서늘해질 정도였다. 누가 얼마만큼의 세력을 거머쥐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반란이 일어나기 딱 좋은 분위기였다.
“불과 석 달 사이 벌어진 일이야.”
“석 달? 그 짧은 시간 동안 그렇게 바뀌다니, 그게 정말 가능한 일인가요?”
다시 한 번 되물을 정도로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아무리 관이라 하나 이곳에도 무공의 경지가 높은 사람들은 있을 터, 어떻게 이렇게 쉽사리 장악당할 수 있는가 말이다.
용무린의 반문에 진성왕은 오히려 질문을 하고 나섰다.
“무림맹은 얼마나 걸렸더냐?”
“예?”
“혈고라 했더냐? 무림맹의 고강한 무공을 지닌 많은 고수들을 완벽하게 다른 사람들이 되도록 만들어버린 마물의 이름이?”
“……!”
용무린의 입이 쩍 벌어졌다.
‘맙소사. 그러면 이곳에서도?’
그렇다면 충분히 모두 이해가 가는 일이다.
혈고가 그곳에도 뿌려졌다면 석 달이 아니라 하루아침에도 가능한 일이었을 테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밖에서 보기에 너무 이상하지 않도록 시간 조절을 하느라 석 달이라는 시간을 오히려 끈 것이라고 봐야 하나?’
진성왕의 말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상식 밖의 일에 강한 논지로 반발하던 사람들의 성향이 하룻밤 사이 정반대로 바뀐 것으로 드러났네.”
“협박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협박은 아니야.”
진성왕은 대뜸 고개를 흔들었다.
“협박을 받았다면 이전까지 적대적인 입장에 있던 사람들과 그렇듯 환한 얼굴로 웃으며 함께 대화를 나눌 수가 없겠지. 지금 생각으론, 어떤 연유로 인해 하룻밤 사이 사람의 성향이 완전히 바뀌었다고 밖에 볼 수 없어.”
“……!”
용무린의 고개가 천천히 끄덕여졌다.
‘서로 웃고 떠든다면 확실히 협박은 아니야.’
조금은 허탈한 듯 진성왕의 목소리에 힘이 빠졌다.
“조정이란 본디 충신과 탐관이 뒤섞인 곳, 하나 표면상 모두가 충신의 가면을 쓰고 있는 곳이지. 그것만 생각해도 충신과 탐관을 가려내기가 만만한 일이 아닌데 지금까지 충신이라 생각했던 이들까지 말도 안 되는 일에 찬동을 하고 있으니…….”
“힘든 상황이네요.”
“힘들지. 적아 구분도 없거니와 대쪽 같은 사람은 좌천당해 밀려나는 것으로도 모자라 의문의 죽음이나 실종을 당하고 있어!”
진성왕의 목소리에 점점 힘이 실리기 시작했다.
“내게 남은 길은 두 가지. 하나는 많은 피를 보는 것이요, 둘은 적은 피를 보는 것!”
눈빛마저 활활 타올랐다.
물론 용무린에게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았지만 좌장사 이벽 같은 이마저 고개를 바닥으로 돌릴 만큼 강렬한 눈빛이었다.
“묻겠다, 무림맹의 총순찰 용무린.”
“……?!”
“그대는 내가 많은 피를 흘리기를 원하는가? 아니면 적은 피를 흘리기를 원하는가?”
용무린은 진성왕이 지금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는 것인지 대충은 알 것 같았다.
‘그러니까 지금 내가 나서서 해결을 하지 않으면 본인이 직접 나설 것이고 그렇게 되면 엄청난 양의 피가 흐르게 될 것이라는 뜻이지?’
그 생각이 옳다는 듯 진성왕의 입에서 섬뜩한 말이 흘러나왔다.
“내가 나서서 처리하기 위해서는 많은 피가 흐를 수밖에 없다. 그 과정에서 당연히 무림에도 피해가 갈 수밖에 없겠지. 왜냐하면 두 번 다시 그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아예 싹 쓸어버려야 할 테니까.”
이곳 진성왕부로 올 때부터 들었던 불길한 상상이 현실이 될지도 모른다.
‘젠장, 불길한 예상은 왜 이렇게 잘 맞는 거야?’
짜증이 확 돋았다.
하지만 그걸 진성왕에게 풀어낼 수가 없었다. 이미 그려보았듯 그래봐야 한 번 돌기 시작한 피의 수레바퀴는 멈출 수 없을 테니까.
“내가 나선다는 의미는 나조차 역적으로 몰린다는 뜻, 살기 위해서는 본의는 아니더라도 나 역시 창을 들 수밖에 없겠지. 당연히 피가 강이 되도록 흐를 수밖에 없다. 자, 선택해라 강호의 무부여. 많은 피가 흐르길 원하는가 아니면 적은 피가 흐르길 원하는가?”
별 수 없는 일이다. 진성왕이 나서기 전에 자신이 나서 해결을 하는 수밖에…….
‘아오, 짜증나. 왜 하필 나를 찍은 거야?’
이제 막 무림 정복의 발걸음을 내디뎠다.
두어 달이면 호북성의 밤을 완전히 내 것으로 만든 후 내실을 다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 후 다시 다른 성으로 세력을 확장해 나가려고 했는데 왜 날 붙들고 난리야?’
혈고라는 말을 입에 담았을 때부터 직감했다.
무림맹 내에서 벌어졌던 일로 인해 조정대신들도 그러하리라는 판단을 했을 것이고 알려진 바로는 혈고를 퇴치할 유일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 자신이라는 것 또한 조사되었을 테니까.
“내가 죽거나 황상이 승하해도 멈출 수 없다. 권력이란 본디 그러한 법, 누군가가 그 자리를 차지한다 하더라도 후환을 남겨 놓을 수는 없을 터, 완전히 뿌리 뽑았다는 판단이 들어야 비로소 멈추게 될 것이다.”
저렇게까지 말을 하는데 어떻게 더 빼겠는가?
“거, 도와달라는 말을 무지 거창하게 하시네요?!”
“그렇게 들렸느냐?”
“당연하죠.”
“결론은?”
“해줄게요.”
더럽게 입맛이 썼지만 용무린은 약속하고야 말았다.
진성왕이 승리자의 미소를 지었다.
‘그렇다고 내가 손해 보는 장사만 할 수는 없지. 그건 내 영업 방침이 아니야.’
“할 테니까 힘이나 넉넉하게 실어줘요.”
“관직도 없이 서평현에서는 씩씩하게 관인들을 박살내더니 자금성은 안 되겠더냐? 관작이라도 주랴?”
진성왕의 입가에 다소 짓궂은 미소가 걸렸다.
당연한 일 아니냐는 듯 용무린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대답했다.
“처리해야 할 놈들이 죄 고관대작인데 그러면 아무 끗발도 없이 처리해요?”
“불가하다!”
진성왕은 일언지하에 용무린의 요구를 거절했다. 잠시 뜸을 들였다가 안타까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모든 관작은 황상의 윤허가 있어야만 얻을 수 있는 법, 현재 황상의 용태가 어떠한지조차 알 수 없다. 중요한 사안에 대한 처리조차 교지의 형태로 드문드문 내려오고 있단 말이다.”
용무린은 살짝 어이가 없었다.
“그러면 정말 맨 몸으로 가서 들이받으란 말이에요? 그게 말이나 되요?”
정말 그렇게 하면 자신은 하찮은 암살자 신세가 된다.
‘그럴 수야 없지.’
진정 원하는 것이 그것이라면 미련 없이 뒤돌아서 나갈 생각이었다. 명분이나 감당할 권위도 없이 그런 일을 벌였다가는 비룡문과 부모님이 위험해지기 때문이었다.
씨이익.
그때 진성왕이 묘한 미소와 함께 입을 열었다.
“황하가 다 걷어 올려지고, 태산이 다 갈아 없어지게 될지라도 종묘사직이 건재하는 한 너희는 대대로 끊임이 없으리라…….”
“금서철권(金書鐵券)!”
시를 읊는 듯한 진성왕의 말을 용무린이 받았다.
진성왕이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품속에서 황금으로 만들어진 패를 하나 꺼내들었다.
쿵!
“황룡패를 배알하나이다.”
좌장사 이벽이 황룡패를 보자마자 오체투지를 했다. 큰 목소리로 외쳤다.
진성왕은 황룡패를 용무린을 향해 내밀었다.
“받아라. 금서철권의 주인임을 증명하는 패이니라!”
“……!”
용무린은 조금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황룡패를 받아 들었다. 진성왕의 목소리가 담담히 이어졌다.
“황상의 옹립에 공이 있어 받은 것이다. 조정대신이라면 누구를 막론하고 조사할 수 있는 것은 물론 즉결처분까지 할 권한이 있으며 그 죄상을 밝힌다면 황실의 종친이라 하여도 참수할 권한을 지닌 무상영부다.”
용무린의 시선이 황룡패에게로 향했다.
‘힘이나 넉넉하게 실어주라고 했더니 대뜸 이걸 내놓을 줄이야.’
말대로라면 거의 일인지상 만인지하의 권위를 지닌 패인데, 그런 귀물을 이렇게 대뜸 내어줄 줄은 정말 생각지도 못했다.
“가거라, 황룡패주. 황룡위사가 너를 도울 터이니, 황성으로 나아가 종묘와 사직을 오롯이 바로 잡아라. 그것이 너의 사명이다.”
용무린은 진성왕을 향해 정중히 포권을 취했다.
“되도록 적은 피를 흘리도록 해보겠습니다.”
“믿겠다.”
더 이상의 말은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진성왕은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조용히 찻잔을 들어 입으로 가져갔다. 마치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은 듯 보였다.
‘하여간 배포 하나는 정말 끝내주는구나.’
과연 좌장사 이벽 같은 인물을 수하로 부릴 만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자. 내 무림 정복에 방해되는 놈들을 치우러…….’
진성왕을 돕는 것도 돕는 것이지만 이 일은 궁극적으로 무림 정복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정리해야만 하는 일이 되었다.
‘기다려라. 확실하게 쓸어 준다.’
어떤 놈들인지는 모르겠지만 무림 정복에 더는 방해가 되지 않도록 깨끗이 정리할 생각이었다.
***
사흘이 훌쩍 흘렀다.
자금성 정문인 오문 앞 광장.
어림친위군의 지휘 육만천은 정신 사납게 서성이며 중얼거렸다.
“그 빌어먹을 놈의 애송이가 나를, 아니 우리 어림친위군을 완전히 물로 봤다 이거지?”
단단히 화가 났는지 육만천의 얼굴은 붉으락푸르락 했다.
이유는 한 가지였다.
황실 가족의 호위는 엄연히 어림친위군만의 명예로운 일이었는데 금의위가 그것마저 빼앗아 가기 위해 문제를 삼았기 때문이었다.
“북진무사? 조정에 출사한 지 이제 겨우 백 일도 아니 되는 애송이가 감히 어림친위군의 명예를 짓밟으려고 해?”
생각만 해도 열이 받는다.
몇 달 전만 같아도 말도 안 되는 일이라며 모두가 고개를 흔들 터인데 어찌된 영문인지 내각과 육부에서조차 금의위의 말에 찬성을 하고 나섰다.
“이백여 명밖에 안 되는 숫자인데 어째서 어림친위군으로 따로 분류를 하느냐고? 황성의 경비를 금의위가 도맡아 하다시피 하고 있으니 하나로 합쳐야 한다니!”
어이가 없었다. 금의위가 태조 때부터 비밀경찰 노릇을 하는 특무기관의 임무를 했기에 어쩔 수 없이 어림친위군을 따로 만든 것이거늘 감히 굴러들어 온 돌 따위가 박힌 돌을 빼내려 들다니!
“오늘 본때를 보여준다.”
이제 겨우 이십 대 중반의 애송이가 무공이 높아봐야 얼마나 높겠는가? 자신의 나이 어언 지천명, 그간 닦아온 무공이라면 애송이의 콧대를 시원하게 박살내 줄 수 있을 것이다.
‘나 역시 교위 나부랭이 너댓은 혼자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단 말이야.’
자신은 어림친위군의 최고수.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북진무사가 겁이 나지 않았다.
그때였다.
“충!”
“충!”
요란한 소리와 함께 오문에서부터 기다리던 얼굴이 보이기 시작했다.
‘왔구나!’
씨익.
회심의 미소를 지어보인 육만천은 막 오문을 통과한 애송이 북진무사를 향해 자신만만하게 외쳤다.
“이봐, 북진무사 나리! 나 좀 보지?”
“……훗, 이게 뉘시오? 이제 곧 한 식구가 될 어림친위군의 지휘가 아니시오?”
육만천을 한 번 흘깃 바라본 북진무사가 코웃음을 쳤다. 장난이라도 치듯 건성건성 포권을 취했다.
‘그래, 까부는 것도 끝이니 실컷 까불어라.’
주먹에 한껏 내공을 끌어 모으며 육만천은 이를 갈 듯 으르렁댔다.
“어이! 굴러들어온 돌, 적당히 까불어.”
육만천의 목소리가 점점 더 커졌다.
“대관절 네가 무얼 믿고 그리 오만 방자하게 구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림친위군에 핫바지저고리만 있는 것은 아니란 말이지. 알아들어?”
아침부터 벌어진 소란에 여기저기서 인기척이 들렸다.
일찍 입궐한 대신들과 환관 그리고 병사들과 경위지휘사사 소속 무관들까지 고개를 내밀었다.
‘흐흐흐. 그래 계획대로 되고 있어.’
육만천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입가에 머금었다.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저 애송이를 밟아주게 되면 십중팔구 징계야 받겠지만 바닥으로 떨어진 어림친위군의 명예는 반대로 하늘로 치솟을 것이기 때문이다.
“핫바지저고리 아닌 놈이 누군데? 너? 웃기는군. 내 눈에는 여전히 멍청하고 띨띨하게 보이는데?”
북진무사가 끝까지 이죽거렸다.
육만천 지휘의 눈꼬리가 하늘로 휙 치솟았다.
“덤벼라, 애송아. 하늘이 높은 것을 보여주마!”
“뭐야?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춤이라도 추자고?”
북진무사가 피식거렸다.
이때다 싶었는지 육만천이 기세 등등 고함을 질렀다.
“비무가 겁이 나는 것이냐?”
“아니? 나는 비무 따윈 안 해.”
“비겁한 새끼! 너 같은 놈이 어떻게 북진무사가 되었는지 금의위 수준도 알만 하…….”
북진무사가 육만천의 말을 중간에 잘랐다.
“내가 즐겨하는 것은 생사결이야.”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주변 공기가 무겁게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아니, 싸늘하기 짝이 없는 그 무엇인가가 육만천 주변으로 쫙 퍼졌다. 통째 휘감았다.
“크크큭. 어때? 생각 있나?”
얼음장 같은 목소리! 가늠할 수 없는 광기를 머금은 눈빛!
전신을 휘감는 정체 모를 거대한 압력!
오싹!
육만천의 등줄기를 타고 소름이 쫙 돋았다.
“……!”
육만천의 눈이 동그래졌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주춤 뒤로 한 발 물러났다.
본능이었다.
‘죽는다. 덤비면 죽어…….’
자신만만하게 끌어 올렸던 내공은 이미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다. 주변을 송두리째 휘감은 북진무사의 내공을 접하자마자 꼬리를 만 것이다.
저벅. 저벅.
북진무사가 느릿한 동작으로 다가왔다.
“왜 대답이 없지? 내가 즐겨하는 것은 비무가 아니라 생사결이라니까?”
“저, 그, 그게…….”
육만천의 얼굴이 파리하게 질렸다. 가늘게 전신을 떨기까지 했다. 그런 육만천의 볼을 북진무사가 가볍게 토닥이며 이죽거렸다.
“생사결은 언제든 환영이다. 알아들어?”
툭. 탁. 쫘악!
토닥임이 마지막에는 따귀로 변했다.
터얼썩.
따귀 한 대에 다리가 풀린 육만천은 어이없게 그 자리에 주저앉아야만 했다.
북진무사가 주변을 슥 돌아보았다.
고함을 버럭 질렀다.
“누구든 환영이다. 나와 생사결을 벌이고 싶은 놈이 있다면 언제든 와라!”
우르릉.
어찌나 강한 내공이 실렸는지 주변공기가 진저리를 칠 때였다.
“하, 그 자식 정말 더럽게 무게 잡네.”
오문 쪽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화악.
어떻게 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주변을 짓누르던 암울한 내공의 힘이 씻은 듯 사라져버렸다.
흠칫.
“대체 어떤 놈이…… 허억!”
화들짝 놀라 뒤돌아섰던 북진무사가 기함을 토해냈다.
생각지도 못했던 얼굴이 자신을 향해 싱글벙글 웃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용무린!
비룡문의 작은 주인이자 무림맹의 총순찰, 그리고 황룡패의 주인인 사내가 같잖다는 듯 툭 말을 뱉었다.
“어이, 상관웅! 또 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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