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마귀환 5권
서경 신무협 소설
1.자금성에 부는 바람
씨이익.
용무린의 입가에 흰 선이 쭉 그어졌다.
이미 그 미소의 의미를 몸소 겪어 보았던 상관웅의 몸이 가늘게 떨렸다.
흠칫!
‘이 무슨 추태란 말인가?’
그제야 자신의 위치가 어떤 것인지 새삼 자각이 일었다.
더불어 불같은 분노와 복수심이 치솟았다.
‘오냐, 잘 걸렸다. 이제야말로 내가 받았던 치욕을 백배 천배로 돌려주리라.’
자신은 금의위의 북진무사다.
이곳은 자신의 텃밭이나 마찬가지인 자금성, 감히 무부 따위가 혼자의 몸으로 들어와 어떻게 할 수 있는 성질의 곳이 되지 못한다.
‘지금부터 지옥을 보여준다.’
굳이 자신이 직접 나설 필요도 없다.
“들어라! 황상을 시해하려는 역적이다. 저놈을 잡아라.”
역적이라는 말에 오문 앞은 난리가 났다.
“북진무사님의 명령이다. 모두 나서라!”
“저 역적 놈을 포박하라!”
“우와아. 역적을 잡아라!”
너도 나도 한 다리를 걸치겠다는 듯 우르르 몰려나왔다.
금의위는 물론이고 황성을 수비하는 경위지휘사사 소속 군사들 역시 뭉텅 쏟아졌다.
‘크크큭. 어때?’
명령을 내린 상관웅이 비릿하게 웃었다.
‘죽여. 죽여 봐.’
용무린이 손을 써서 병사들을 죽이기를 손꼽아 기대했다.
그래주기만 한다면 단숨에 조정의 중론을 모아 오군도독부를 움직일 생각인 것이다.
‘도주해도 상관없어. 내가 이미 황상을 시해하려는 역적이란 말을 내뱉은 이상 너는 황상 시해 미수로 수배가 내려질 테니까.’
그 과정에 비룡문이 쓸려 나가는 것은 덤이었다.
그런데…….
피식.
“경솔한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똑 같네.”
용무린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풀썩 웃었다.
“우와아!”
“와아!”
은빛 번쩍이는 경갑 차림의 금의위와 병사들이 벌떼처럼 밀려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용무린은 태연했다. 좋은 구경거리 만난 듯 빙그레 웃기까지 했다.
그 사실이 너무 기이해서일까?
아니면 용무린의 전신에서 뿜어지고 있는 기세가 태산 같기 때문일까? 금의위와 병사들 중 누구도 먼저 덤벼들지는 못했다.
그들을 한 번 쓱 훑어 본 용무린이 상관웅을 불렀다.
“어이, 상관웅.”
“뭐냐?”
“누가 그러더라. 궁중에 허언은 없다고 말이야.”
말을 마친 용무린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걸렸다.
‘저 자식이 왜 저렇게 당당하지?’
살짝 뒤가 켕겼지만 어차피 내친걸음이었다.
이제와 꼬리를 말 수는 없는 일, 상관웅은 당당하게 고함을 질렀다.
“물론이다. 하니, 네놈이 황상을 시해하려는 역적이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을 것이다.”
허언이 없으니 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너를 역적으로 몰아 죽일 것이라는 뜻!
피식.
풀썩 웃어 보인 용무린이 품에 손을 집어넣었다.
번쩍번쩍 빛이 나는 무엇인가를 꺼내 높이 들었다.
바로 황룡패였다.
“황룡패를 배알하나이다!”
“황룡패를…….”
용무린을 모시고 왔던 황룡위사 이백여 명이 일제히 오체투지를 했다.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움찔!
“뭐, 뭐야? 황룡패?”
“허억! 금서철권의 그 황룡패?”
“정말? 진성왕야께 내렸다던 그 패야? 확실해?”
“빨리 오체투지나 해 이 멍청아! 죽고 싶어?”
용무린을 에워쌌던 금의위와 경위지휘사사 소속 병사들 사이에 소란이 일었다.
“화, 황룡패를 배알하나이다!”
“황룡패를…….”
그러다 용무린의 손에 들린 황룡패를 알아본 금의위가 먼저 오체투지를 했다. 그 뒤를 따라 파도처럼 병사들이 오체투지를 했다.
‘뭐야? 일이 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서 있는 사람은 오직 두 사람이었다.
한 사람은 황룡패의 주인인 용무린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얼떨떨한 표정의 상관웅이었다. 그런 상관웅을 향해 용무린이 고함을 버럭 질렀다.
“황상께서 친히 내리신 황룡패를 보고서도 고개를 뻣뻣하게 들다니! 네놈이야말로 역적이로구나!”
“그, 그게…….”
상관웅이 말을 더듬었다.
금의위 북진무사가 된 지 이제 불과 삼 개월 여, 궁중의 법도를 익히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복잡할 때인 그가 황룡패의 무상신위까지 알 수는 없었던 것이다.
“황룡위장!”
“하명하시옵소서, 황룡패주시여!”
오체투지하고 있던 황룡위사들 중 대장 격인 사내가 큰 소리로 복창을 했다.
“감히 황룡패주에게 역적이라는 누명을 씌우는 것으로도 모자라 황상께서 친히 내리신 황룡패의 권위까지 무참히 짓밟는 놈에게 내릴 수 있는 벌은 무엇이냐?”
“금서철권을 증명하는 황룡패는 황상께서 직접 내리신 무상 권위! 황룡패주에 대한 역적 누명은 삭탈관직에 가산 몰수 그리고 삼족을 멸하는 것이 가할 것이고, 황룡패의 권위를 짓밟은 벌에는 참형이 가한 줄 아뢰옵나이다.”
“들었지?”
용무린이 상관웅을 향해 서릿발 같은 시선을 보냈다.
‘망했다.’
똥 밟은 표정을 짓고 있던 상관웅은 어쩔 줄 몰라 했다.
황룡패를 보는 것도 처음이지만 너무 급격히 사태가 바뀌니 뭘 어떻게 해야 할지를 알 수 없었던 거다.
스릉.
용무린이 풍뢰를 뽑아들며 외쳤다.
“황룡패주로서 즉결처분을 하겠다. 모두 물렀거라!”
“충!”
“충!”
오체투지를 하고 있던 모두가 일제히 복창하며 뒤로 물러났다.
움찔!
상관웅이 화들짝 놀라 몸을 떨었다.
‘싸울까?’
도무지 판단을 내릴 수 없어 내공도 어정쩡하게 끌어 올려졌다. 그런 상관웅을 향해 용무린이 나직한 목소리로 이죽거렸다.
“너도 상관엽 그 인간처럼 축융마공을 익혔냐?”
“……!”
상관엽을 들먹이니 상관웅의 눈빛이 싸늘하게 변했다.
당황하긴 했지만 역시 용무린이 자신과 상관세가의 원수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으니까.
“마공을 펼쳐봐. 그걸 증거로 삼아서 너희 상관세가 일족을 깡그리 쓸어줄게-엣!”
후욱.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용무린은 거리를 좁혔다.
‘빌어먹을!’
상관웅이 내심 이를 갈았다.
용무린을 죽일 순간만을 그리며 신마단을 복용했고 죽어라 무공을 익혔는데 그것을 펼쳐보지도 못할 처지에 놓이고 말다니!
‘그래도 네깟 놈이야 충분히 죽일 수 있어.’
굳이 마공을 펼치지 못한다 하더라도 초절정 수위의 내공으로 펼쳐내는 권강을 당해낼 수 있으리라곤 생각하지 않는다.
‘할아버지를 상대했을 때는 틀림없이 방수가 몇 놈 더 있었을 거야.’
그러니 지금 저놈만 짓밟아 놓는다면 이 혼란스러운 상황도 능히 헤쳐 나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이아아아-아!”
상관웅은 세찬 고함과 함께 가문의 비전권법인 천붕칠권을 펼쳤다. 과거 용무린을 거칠게 몰아붙였던 상관혁련이 즐겨 펼치던 무공 중 하나였다.
후웅. 후웅. 콰아아.
천붕거압의 초식에 이어 천붕파멸아의 초식이 용무린을 향해 밀려들었다. 초절정 수위의 내공을 지녔음을 증명이라도 하듯 주먹 형태의 권강이 뚜렷하게 보였다.
헤실.
한 차례 환하게 웃어 보인 용무린의 풍뢰가 상관웅이 펼친 권강을 너무나도 손쉽게 잘라버렸다.
스악. 사아악. 퍼어엉. 푸스스.
마치 두부라도 되듯 권강이 갈라졌다. 한 줄기 바람이 되어 사라져 버렸다. 고함소리가 무색할 정도였다.
촤악.
그 사이 풍뢰가 상관웅의 팔을 스쳤다.
굵은 핏줄기가 툭 튀어 올랐다.
“이게 끝이야? 마공은 정말 안 익혔어?”
어느새 뒤로 물러난 용무린이 고개를 갸웃하며 질문을 던졌다. 초절정의 내공을 지닌 상관웅의 안력으로도 따라잡기 힘들 만큼 빠른 운신이었다.
“그럴 리가 없는데?”
“닥쳐라, 이놈!”
“쯧쯧쯧. 하여간 머리 나쁜 놈은 안 된다니까? 황룡패주에게 놈이라니? 죽을죄가 한 가지 늘었잖아, 바보야.”
“닥쳐, 닥치라고!”
상관웅이 이를 갈며 주먹을 휘둘렀다.
후웅. 후웅. 콰아아-.
그때마다 권강을 바탕으로 한 천붕칠권의 초식들이 튀어나와 용무린을 압박했다.
물론 소용없는 짓이었다.
휘리릭. 촤악. 휘릭. 스가악.
풍뢰는 너무도 간단하게 권강을 잘라냈다. 같은 수준의 도강도 아닌 듯 도의 표면에 빛만 살짝 머금고 있는데 어떻게 저럴 수 있는지 정말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어떻게 도기 따위로 내 권강을 파훼할 수 있지?’
피잇. 파아앙. 스각. 휘이웅.
상관웅이 뿜어낸 권강은 뿜을 때마다 게 눈 감추듯 사라졌다. 허무하리만큼 쉽게 바람으로 변했다. 상관웅은 정말 미칠 것만 같았다.
“으아아! 죽어, 죽어, 죽어엇!”
“노났구나. 감히 황룡패주에게 ‘죽어’ 라고 했겠다?! 너 죄목 한 가지 또 늘었어, 인마.”
아무리 기를 쓰고 초식을 펼쳐도 용무린은 너무나도 간단히 권강을 무위를 돌렸다. 그때마다 잊지 않고 작은 생채기를 수도 없이 만들어냈다.
‘크크큭. 약 올라 죽겠지?’
당연히 일부러 그러는 짓이었다.
목을 날리려면 벌써 열 번도 넘게 날릴 수 있었지만 용무린은 그러지 않았다. 상관웅의 화만 계속해서 돋웠다. 실수로라도 마공을 펼치기를 바랐다.
당연히 상관웅 역시 그런 상황을 느끼고 있었다.
‘감히 나를 가지고 놀다니! 나를 또 다시 놀림감으로 만들다니-이!’
어림친위군 지휘인 육만천에게 치욕을 선사하느라 일부러 고함을 크게 질렀다. 사람들을 잔뜩 불러 모았다. 거기에 더해 역모라고 외치기까지 했다. 이번에는 군사들까지 몽땅 몰려들었다.
한데, 그 사람들 앞에서 되레 이런 치욕을 맛보다니!
“죽인다, 죽인다, 반드시 죽여 버린다-아!”
분노로 인해 머리가 회까닥 돌 지경이었음에도 상관웅은 마공을 펼치지 않았다.
콰웅. 콰웅. 후우웅.
고지식할 정도로 정직한 형태의 천붕칠권만 뿌렸다.
“거 참, 마공을 펼쳐 보라니까? 멍청해서 너는 그것도 못 익혔어?”
용무린은 계속해서 상관웅의 속을 긁었다.
파캉. 휘잉. 스각. 후우웅.
숨 쉬는 것보다 더 쉽게 권강을 쪼갰다. 바람으로 되돌릴 뿐이었다.
“으아아아-아!”
상관웅은 괴성을 지르며 죽자고 권강만 뿜었다.
물론 마음 같아서야 기를 쓰고 익혔던 축융마공을 펼치고도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눈이 너무 많았다.
마공을 펼친다고 해도 승부를 장담할 수 없었거니와 펼치게 된다면 이제야 겨우 자금성에 뿌리를 내린 자신의 가문이 풍비박산 나게 된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띨띨한 자식, 널 잡아 가둔 후 어떤 월척이 걸려드는지 지켜나 봐야겠다.”
스파앙.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용무린의 신법이 변했다.
마치 공간이동이라도 하듯 거리를 좁혔다. 섬뜩한 빛을 머금은 풍뢰가 춤을 추었다.
촤악. 촤촥.
“흡!”
벼락이라도 맞은 듯 상관웅이 몸을 떨었다. 머릿속에서는 벌써 수도 없이 용무린의 심장을 터뜨리고 머리를 으깼지만 몸은 움직일 수가 없었다. 풍뢰가 순간적으로 사지근맥을 잘라내 버렸기 때문이었다.
‘빌어먹을! 마공을 익힌 것이 드러나는 한이 있더라도 펼쳤어야 했어. 놈을 죽여 버렸어야 한다고.’
그제야 용무린의 말뜻을 이해한 상관웅이다.
죽은 자는 말이 없는 법, 아무리 용무린이 황룡패주라 한들 죽은 후라면 가짜라고 몰아붙여도 되는 일이었다. 아버지의 힘이라면 충분히 가능했을 것이다.
피식.
“늦었어, 인마.”
휘슷. 투우웅.
코앞으로 다가온 용무린의 손바닥이 상관웅의 단전 어림을 짚었다. 불사신기를 뭉텅 밀어 넣었다.
“……!”
상관웅의 눈이 부릅떠졌다.
단전으로 밀려든 정체 모를 내력에 꽁꽁 숨겨두었던 신마단의 기운이, 축융마공의 내공이 눈 녹듯 사라져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으, 으아아-악!”
“시끄럿!”
“읍!”
상관웅이 목이 터져라 비명을 질렀다. 용무린은 아주 간단히 상관웅의 아혈을 제압해 버렸다. 이어서 마혈까지 단단히 제압했다. 잠깐사이 상관웅은 고깃덩어리 신세가 되었다.
“이봐, 어림친위군!”
“예, 예?”
멍하니 있던 어림친위군 지휘 육만천이 화들짝 놀라 대답을 했다.
“뭘 멍청히 보고만 있나?”
“하, 하명하소서 황룡패주시여.”
“어림친위군 본영에 저놈 가둘 곳이 따로 있나?”
반짝.
육만천의 눈가에 회심의 빛이 돌았다.
황실의 가족들을 지키는 어림친위군의 특성상 조금이라도 황실가족을 해하려는 기미가 있는 자들을 가두고 취조하는 은밀한 곳이 있었던 것이다.
“있습니다. 은밀하고 단단하여 외부에서의 침입은 어렵지만 그만큼 취조하기에는 좋은 곳이옵니다.”
씨익.
“좋았어. 그곳으로 저놈 끌고 가.”
“충!”
어림친위군 지휘 육만천이 신이 나서 대답했다.
“가자, 이놈!”
자신에게 수모를 안겼던 상관웅을 짐짝이라도 되는 듯 어깨에 둘러맸다. 어림친위군 본영 지하에 마련된 취조실로 날 듯이 뛰었다.
“이봐, 너!”
용무린은 쥐처럼 눈알을 굴리던 환관 하나를 불렀다.
“네, 넷? 저 말씀이십니까?”
“그래 너. 넌 줄 알면 튀어와 인마. 뭘 눈알만 굴리고 있어? 빨리 안 와?”
“하, 하명하소서!”
대답과 함께 환관이 달려와 부복했다.
사례감 소속 환관이었는데 장인태감을 지근거리에서 모시다 보니 눈치를 보는 것이 비정상적으로 발달이 되어 있는 듯 보였다.
“너는 말이다, 지금 즉시 나 황룡패주가 황상을 뵙고자 한다고 사례감에 알리고 준비를 시켜라.”
“황제폐하를 친견하시겠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래. 어림친위군의 본영에 있을 테니 어서 빨리 웃전에 아뢰고 결과를 가져와. 알아들어?”
“네이.”
간드러지게 대답한 환관이 다람쥐처럼 달려 사라졌다.
‘길게 끌어 좋을 게 뭐 있겠어?’
일처리는 본디 속전속결이 가장 좋은 법이다.
상대에게 생각할 여지를 주지 않고 빠른 해결을 보는 것!
‘오자마자 미끼를 잔뜩 던졌으니 어디 어떤 놈들이 바늘에 걸릴지 두고 보자.’
용무린은 개구쟁이와 같은 미소를 머금은 채 육만천이 향한 곳으로 움직였다.
척. 처처척.
황룡위장과 위사 이백여 명이 그 뒤를 따랐다.
웅성웅성.
아침부터 벌어진 이 소란에 모두가 입방아를 찧었다.
“세상에, 황룡패주가 나타날 줄이야.”
“그것보다, 그분 무공 봤어?”
“우와, 교위분들을 한꺼번에 박살내던 북진무사를 어린아이 가지고 놀 듯하다니!”
“하늘 밖에 하늘이 또 있음을 오늘에야 알았네.”
“그러게 말이야.”
황룡패를 내세워 당당히 자금성에 나타난 용무린과 무적인줄로만 알았던 북진무사의 패배와 체포에 이은 구금 소식이 빠르게 번지기 시작했다.
오문 앞에서 벌어졌던 일은 한 식경을 넘기지 않고 자금성 전체로 퍼졌다.
내각의 구심점인 대학사의 집무실.
“뭐라? 황룡패주?!”
내각 대학사이면서 동시에 육부의 이부상서를 겸하고 있는 호유용의 눈이 부릅떠졌다. 소식을 들고 온 환관이 더욱 더 고개를 조아리며 답했다.
“그러하옵니다, 대인. 오문 앞에 모여든 모든 사람들이 금서친림이라 적힌 황룡패를 목격했다고 합니다.”
“이럴 수가!”
입을 쩍 벌렸던 호유용이 급히 되물었다.
“황룡패주라 하면 진성왕야 한 분 뿐인데, 설마하니 그분께서 친림이라도 하셨다는 말이더냐?”
“그렇지는 않사옵니다. 금서친림 황룡패의 권위를 행사한 자는 이제 갓 약관을 넘긴 젊은이로 보였다고 합니다.”
“뭬야? 이제 갓 약관을 넘긴 젊은이?”
“네이.”
“정체가 대체 뭔데? 설마하니 진성왕야의 아들인 친왕세자나 군왕이라도 된단 말이더냐?”
“아니옵니다. 진성왕야의 장자인 친왕세자나 둘째인 군왕은 분명 아니었나이다.”
“하면?”
점점 높아지는 호유용의 노성에 환관은 나감하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현재로서는 알 수 있는 것이 없나이다.”
“……!”
“더욱 난감한 일은 황룡패주가 사례감에 황상의 친견을 요청했다는 사실입니다.”
“허어, 갈수록 태산이로군.”
“황룡패주는 언제든 황상을 친견할 수 있는 무상 권위가 있사옵니다.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사례감께서도 곤혹스러워하고 계십니다.”
“그럴 테지.”
당연히 그럴 것이라는 듯 호유용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오문 앞에 북진무사가 있었을 터, 어림친위군의 육만천과 작은 소란이 있었다는 보고를 들었다. 북진무사는 황룡패주를 대하고 어떻게 대응했느냐?”
황망하다는 듯 환관의 고개가 더욱 조아려졌다.
“일전의 겨룸이 있었나이다.”
“뭐라고? 황룡패주와 북진무사가?”
“네-이.”
“큰일이로구나. 북진무사의 용력이라면 황룡패주의 안위가 크게 상했을 터인데…….”
호유용의 말에 환관이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저, 그것이……. 황룡패주께서 북진무사를 일패도지 시킨 후 어림친위군영으로 끌고 갔나이다.”
“……!”
호유용이 잠시 말을 잃었다.
도무지 믿을 수가 없는 일의 연속에 어떻게 해야 할지 판단이 서질 않는 모양이었다.
“북진무사께서 먼저 황룡패주를 역모라고 몰아 붙였고 그 후 황룡패주가 북진무사를 공개적으로 역모라 역공격을 했사옵니다.”
“역모? 지금 역모라 했느냐?”
“분명히 그러합니다, 대인.”
“허어, 큰일이로구나. 궁중에 허언은 없는 법이거늘 어쩌려고 역모라는 말을 먼저 입에 담았단 말인가?”
북진무사가 황룡패주를 이겼으면 또 이야기가 달라진다.
하지만 졌다고 한다. 거기에 더해서 어림친위군영에 잡혀가기까지 했다니!
‘자신의 용력을 너무 믿었던 게야.’
천하는 넓고 기인이사는 구름과 같다.
새삼 선현들의 고언이 떠오르는 호유용이었다.
“……후우. 알았다. 물러가거라.”
“네이.”
길게 한숨을 내쉰 호유용이 손을 휘저었다.
환관이 고개를 조아려 보인 후 물러났다.
그때를 기다렸다는 듯 호유용은 공손히 두 손을 모으고 뒤돌아섰다.
대체 언제 나타났는지 주렴 뒤에 태산처럼 앉아 있는 그림자가 보였다. 호유용은 그림자를 향해 허리를 깊이 숙이며 입을 열었다.
“일이 그렇게 되었다고 합니다. 어찌 하올지…….”
세상에, 육부의 이부상서를 겸하고 있는 내각대학사가 이토록 공손히 대하는 사람이라니!
아득.
“감히 북진무사를 끌고 가다니!”
주렴 속 인물은 황룡패주의 등장이 주는 변수 따위보다 북진무사를 일패도지시킨 후 끌고 갔다는 소식에 더 분노하는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속마음은 조금 달랐다.
‘이런 멍청한 놈. 신마단을 복용하기 전이나 지금이나 어찌 그리 달라지는 것이 없단 말인가?’
역시 자신에게 아들이란 그분(?) 하나뿐인 것 같다.
‘그렇다고 그대로 내버려 둘 수는 없지.’
가문의 이름을 짓밟고 먹칠을 했던 놈은 용무린 하나만으로도 족했다.
‘황룡패주고 나발이고 짓밟는다.’
수틀리면 진성왕까지 역모로 엮어 쓸어버릴 것이다.
“먼저 어떤 놈인지 정체부터 알아야하겠다.”
“당연한 말씀입니다.”
“최대한의 정보력을 동원해라.”
“물론입니다.”
“환관과 나인을 가리지 말고 최대한의 정보력을 동원해라. 황룡패주가 누군지, 대체 어떻게 해서 황룡패를 얻었는지 목적은 뭔지 등등 깡그리 알아내.”
“맡겨 주십시오. 한데, 황룡패주가 요구한 황상과의 친견은 어찌 처리하올지…….”
“놈의 정체를 알 수 있을 때까지 잠시 시간을 벌어라.”
“오래 끌 수는 없사옵니다. 황룡패주의 친견 요구는 언제 어느 때고 원할 때 할 수 있는 무상권위가 부여되어 있는 터라…….”
“말이 많다. 끌라면 끌어!”
주렴 속 그림자의 노성에 호유용이 찔끔했다. 고개를 깊이 조아렸다. 그제야 주렴 속 사내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황상께서 와병중이라는 사실은 그 역시 이미 듣고 왔을 터, 친견까지 잠시는 시간을 벌 수 있을 게다.”
“알겠습니다, 주군.”
호유용의 입에서 서슴없이 주군이라는 호칭이 나왔다.
정말이지 놀라운 일이었다.
승상이나 다름없는 위치의 사내가 황제를 제외한 다른 누군가에게 스스럼없이 주군이라 칭하다니!
주렴 속 사내의 입이 계속해서 열렸다.
“금의위 도독을 만나 내 뜻을 전하거라.”
“명하소서.”
“북진무사는 황제 직속인 금의위의 고위직이니 옳고 그름은 금의위에서 가려야 할 것이라 전하면 될 게다. 역모에 관한 말이 나왔으니 더더욱 그러할 터, 수단 방법 가리지 말고 북진무사를 살려오라 일러라.”
호유용이 조심스레 말을 덧붙였다.
“북진무사의 용력으로도 넘을 수 없었던 것이 황룡패주입니다. 가능하겠습니까?”
잠시 생각에 잠겼던 주렴 속 사내의 입에서 싸늘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본가의 장로 셋을 보내주겠다.”
“오오!”
호유용의 입에서 탄성이 절로 새어 나왔다.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의 용력이 북진무사에 못지않음을 이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힘이라면 충분히 북진무사의 목숨을 살려 돌아올 수 있을 것이다.”
“충!”
호유용의 입에서 힘찬 대답이 흘러 나왔다.
스슷.
만족한 듯 주렴 속 그림자가 소리도 없이 사라졌다.
“일단 금의위 도독을 만나야겠지?”
그 후 삼고와 삼공을 만나서 의논을 하면 될 것이다.
호유용이 바쁜 걸음으로 집무실을 나섰다.
***
같은 시각 어림친위군영.
상관웅을 하옥시킨 지휘 육만천은 그대로 지휘사이자 제독인 관일영을 찾았다. 오문 앞에서 있었던 일을 상세하게 보고했다.
“……하여, 북진무사는 군영 지하의 취조실로 압송하였고 주변에 어림친위군 중 근무에 나서지 않는 이들과 금의위에 밀려난 군세를 주변에 깔아 두었습니다.”
“그렇단 말이지? 잘했다.”
어림친위군 제독 관일영은 속이 시원하다는 듯 얼굴 하나 가득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암울하기만 하던 형세 속에 한 줄기 빛을 만난 듯 환한 미소였다.
“황룡패주께서는 지금 어디에 계시느냐?”
“보고를 위해 올라올 때 취조실에 드셨습니다. 아마 지금쯤 친히 북진무사를 심문하고 계실 것이옵니다.”
관일영 곁에서 침묵을 지키고 있던 병부상서 진후상이 불쑥 입을 열었다.
“네가 보기에 황룡패주의 성품은 어떻더냐? 그분께서 우리의 힘이 되어 주실 수 있을 것 같더냐?”
육만천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삽시간에 벌떼처럼 몰려드는 금의위와 군사들을 앞에 두고서도 당당하기만 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 모습을 과연 무어라고 표현해야 할까? 장판교를 일기필마로 가로 막았던 초나라의 연인 장익덕에 견주면 조금 비슷할까?’
장비가 막아섰던 백만대군은 아니었지만 육만천의 눈에는 뭇 금의위와 경위지휘사사 소속 병사들 앞에서도 빙그레 웃던 용무린이 그와 엇비슷해 보였다.
‘거기에 더해 나로서는 감히 덤벼 볼 엄두도 내지 못하던, 아니 오금을 저리게 하던 북진무사를 어린아이처럼 가지고 노는 모습이라니!’
무부는 아니었지만 무예를 익힌 한 사람의 사내로서 경탄이 절로 터질 지경이다. 사랑에라도 빠진 듯 육만천은 두 눈 가득 흠모의 빛을 띄우며 답했다.
“소장이 다른 것은 잘 모르겠습니다만, 한 가지만은 확실합니다.”
“……?”
“경위지휘사사와 금의위가 파도처럼 밀려들고 있음에도 그분은 눈 하나 까딱하지 않으셨습니다. 부끄럽지만 싸워보기도 전에 저를 굴복시켰던 북진무사를 어린아이 다루듯 하셨으며 황룡패를 사용함에 있어 주저함이 없었습니다.”
자신이었다면 역적 운운하는 순간부터 다리가 풀렸을 터인데 용무린은 그저 풀썩 웃기만 했다. 그 미소가 육만천의 뇌리에서 떠나지를 않았다.
“그 말은 곧 그분의 성품이 올곧고 강단이 있으시다는 뜻인가?”
병부상서 진후상의 계속되는 질문에 육만천은 주저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북진무사를 보자마자 대뜸 ‘어이, 상관웅. 또 너냐?’ 라고 하셨습니다. 과거 북진무사와 은원이 있었음이 틀림없습니다. 그런 분께서 그자들과 같은 자리에 설 이유가 없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
“……!”
어림친위도독 관일영과 병부상서 진후상의 시선이 마주쳤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진성왕야께서 우리에게 원군을 보내주셨다고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맞소이다. 더 두고 보았다가는 불측한 무리들에게 황상의 옥체가 저어할까 두려운 나머지 진성왕야께서 나서신 것이라고 봐야 할 것 같소이다.”
“불과 백 일 남짓한 시간에 이토록 세가 기울었습니다. 갈수록 심각해져만 가는 분위기를 반전시키기 위해서는 이 기회를 잡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 역시 그렇게 생각하오이다. 이 기회를 놓친다면 천추의 한이 남을 것입니다.”
결심을 굳힌 듯 두 사람이 동시에 일어섰다.
“황룡패주를 뵙시다.”
“그러는 것이 좋겠소이다.”
“가자.”
“제가 모시겠습니다.”
육만천이 한 발 앞서 걸음을 옮겼다.
그 뒤를 관일영과 진후상이 따라 움직였다.
***
어림친위군영 지하 이층에 마련된 취조실.
거꾸로 돌려놓은 의자에 앉아 용무린은 상관웅을 상대로 이것저것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상관세가에서 몇 놈이나 침투했냐?”
“……!”
당연한 이야기지만 원독 어린 시선으로 쏘아보기만 할 뿐 상관웅은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이런 곳에 너처럼 띨띨한 녀석을 혼자 보냈을 리 없고, 가주인 상관초웅도 왔냐?”
“……!”
“너처럼 상관초웅도 한 자리 차지하고 있냐? 관직은 어떻게 되냐?”
“……!”
계속해서 표독한 눈으로 쏘아보기만 하는 상관웅.
할 수만 있다면 씹어 먹기라도 하겠다는 듯 용무린을 향해 이를 드러내고 있었다.
“후후훗.”
그런 상관웅을 지그시 바라보던 용무린의 입가에 헤실 미소가 떠올랐다.
“입질이 올 때까지 기다리려니 그냥 말로 묻기만 하는 거야 인마. 좋게 이야기 할 때 불어. 장담하건대 내가 손을 쓰면 너는 삼각을 넘기지 않고 모든 것을 술술 불게 될 거야. 알아들어?”
“흥! 내 입에서는 한마디도 들을 수 없을 거다, 이 빌어먹을 자식아.”
상관웅이 참지 못하고 으르렁댔다.
풀썩 웃어 보인 용무린의 입에서 뜻밖의 이야기가 흘러 나왔다.
“너 말이다. 운룡표국, 아니 운룡장의 수뇌부가 마교 놈들의 하수인 노릇을 하고 있다는 것쯤은 알고 있지?”
“…….”
상관웅은 다시금 입에 자물쇠를 채웠고 용무린은 혼잣말을 하듯 말을 이었다.
“운룡표국 놈들이 불회곡으로 동남동녀들을 운송하고 있던 것을 내가 찾아냈거든? 행선지도 움직임도 몰랐던 내가 어떻게 운룡표국의 움직임을 찾았고 결과적으로 동남동녀 스무 명을 찾아낼 수 있었게?”
“……?”
상관웅의 눈에 묘한 빛이 일렁였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지 솔직히 궁금하긴 한 모양이었다.
“혈루곡주란 놈이 꼭 너와 같았지.”
씨이익.
섬뜩하게 웃어 보인 용무린의 입에서 두렵기 짝이 없는 말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통각신경이라는 게 있어. 척추를 살짝 으스러뜨린 후 몇 가닥밖에 안 되는 그 신경다발을 송두리째 움켜쥐면 굳이 큰 힘을 들이지 않고도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을 줄 수 있게 되거든?!”
꾸울꺽.
상상만으로도 두려운 것인지 상관웅이 마른 침을 크게 집어 삼켰다.
“혈루곡주란 놈도 이각을 넘기지 못하고 죄다 불었어. 혈루곡이 마교에서 심어 놓은 비밀세력이라는 것을 밝히고 찾아가 박살내는 것이 훨씬 더 오래 걸렸지 아마?”
스윽.
용무린은 자리에서 일어나 상관웅 앞으로 다가갔다.
한 발자국씩 거리가 줄어들 때마다 상관웅의 몸이 가늘게 떨렸다. 불사신기를 살짝 끌어 올린 용무린의 손바닥이 상관웅의 아랫배에 살짝 닿았다.
“어헉!”
불사신기가 스며들자마자 불에 덴 듯 상관웅이 소스라치게 놀랐다. 이미 단전을 제압하고 있던 불사신기가 폭발하듯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그때 상관웅의 귀에 입을 가져간 용무린이 사신의 속삭임인 양 읊조렸다.
“고민이 살짝 드네. 아무리 그래도 안면이 있는 녀석인데 내가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기도 하고, 알아 내야할 게 산더미인데 그냥 멍하니 지켜보기만 하는 것도 조금 그렇고…….”
바로 그 순간, 문이 열리고 육만천이 조심스러운 동작으로 다가왔다.
“황룡패주께 아룁니다. 어림친위군의 제독과 병부상서가 뵙고자 찾아왔습니다.”
“어림친위군의 제독과 병부상서?”
“그러하옵니다, 황룡패주시여.”
용무린의 눈에 호기심의 빛이 돌았다.
‘그동안 오늘 같은 반전의 기회만 노리고 있던 사람들일까? 아니면 나라는 동아줄을 부여잡고 더 위로 올라갈 생각만 하고 있던 사람들일까?’
일단 만나보면 알 것이다.
“들라 해라.”
“명.”
똑 부러지게 대답한 후 육만천이 물러갔다.
오래지 않아 관일영과 진후상이 들어와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포권을 취해 보였다.
“황룡패주를 배알합니다. 어림친위군 제독 관일영이라 합니다.”
“황룡패주를 배알합니다. 병부상서 진후상이라 합니다.”
용무린은 대뜸 자신이 할 말부터 꺼냈다.
“황제폐하의 현 위치는?”
움찔!
관일영과 진후상 두 사람이 동시에 몸을 떨었다. 고개를 푹 숙였다. 침통한 목소리로 답했다.
“석 달 전 침전인 건청궁에 들었던 것을 끝으로 모두지 알 수가 없습니다.”
“눈과 귀가 불과 열흘 만에 쓸려 나갔습니다. 그 후부터는 황제폐하의 옥체가 어떠한지조차 알 수 없는 형국입니다, 황룡패주시여.”
두 사람의 침통한 목소리에 점점 힘이 실렸다. 뜨겁게 바뀌었다.
“북진무사를 일패도지시켰던 그 힘으로 부디 어떤 상태에 놓여 있는지조차 모르는 황제폐하를 구출할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황상폐하를 보위하고 조정의 기강을 바로 세울 수만 있다면 이후 저희 두 사람 낙향을 해도 행복할 수 있겠나이다, 황룡패주시여.”
목소리와 표정에서 그들의 진심이 오롯이 묻어났다.
어떻게 하든 권력을 독점하고 혹세무민하는 무리들을 몰아낸 후 다시 황제를 옹립해 조정을 정상화시키고 싶어 하는 마음이 엿보였다.
‘적어도 나라는 줄을 잡고 더 높은 권력을 탐하려는 자들은 아니었네.’
그나마 다행이었다.
이런 충신들이 곳곳에 숨어 때를 기다리고 있어준 덕에 자금성을 정상화시키는 작업이 힘도 덜 들고 탄력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지금부터 적아를 구분할 것이다.”
“저, 저희를 도와주시려는 것입니까?”
“정녕 조정을 좀먹는 무리들의 손아귀에서 황제폐하를 구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피식.
“그럼 내가 지금 놀러 온 것으로 보이나?”
“……!”
“현 조정에서 내가 지금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은 오직 셋, 지금 내 앞에 서 있는 너희들뿐이다. 하니, 우리와 한 배를 타고 있는 사람들의 명단을 가져와라. 내가 직접 찾아가서 본 후 적아의 판단을 내리겠다.”
“그, 그게 가능한 일입니까?”
“저희도 짐작만 할 뿐 아직은 확신하지 못하고 있는데 어떻게…….”
관일영과 진후상이 말꼬리를 늘였다.
용무린의 입가에 보기 좋은 미소가 걸렸다
“믿어라. 다 방법이 있다.”
혈고에 당한 놈들이라면 소검 비연의 탄주로 단숨에 알아낼 수 있다.
‘절대로 내 눈을 피할 수 없을 걸?’
군중 속에 숨어 있다 하더라도, 귀를 막아도 소용이 없을 것이다. 탄주와 함께 주변을 통째 잠식해 버리는 불사신기에는 반응을 보일 테니까.
‘일단 혈고에 당한 놈들을 먼저 골라내야 자발적 참여자들을 가려낼 수 있겠지.’
무림맹에서도 그러했다. 혈고에 당해 완벽하게 다른 성향의 사람이 된 자들과 자발적 참여자들이 뒤섞여 있었지만 한꺼번에 골라낼 수 있었다.
‘시간은 걸리겠지만 충분히 골라낼 수 있어.’
바로 그때였다.
밖이 부산해지는가 싶더니 이내 우렁찬 고함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어림친위군은 강제구금하고 있는 북진무사를 어서 금의위의 손에 넘겨라!”
“역적에 대한 누명과 그 진실을 밝혀낼 권한은 황상께서 우리 금의위의 손에 맡기셨다. 하니, 어서 빨리 강제 구금하고 있는 북진무사를 내놓아라!”
씨이익.
용무린의 입꼬리가 길게 말려 올라갔다.
“이제야 입질이 왔네.”
입질이 왔으니 이제는 당길 차례인 거다.
용무린은 거침없는 발걸음으로 밖으로 향했다.
조금은 긴장한 표정을 한 관일영과 진후상 그리고 육만천이 그 뒤를 따랐다.
어림친위군영 밖은 그야말로 도와 검과 창으로 무장한 금의위와 경위지휘사사의 병사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는 중이었다.
“무, 물러가라!”
“이곳은 어림친위군영이다.”
“이, 이것은 월권이다.”
이백여 명밖에 되지 않는 어림친위군, 그 중에서도 많은 수가 본연의 임무를 위해 자리를 비운 터라 현재 남아 있는 어림친위군은 백여 명밖에 되지 않았다.
어림친위군이 용기를 쥐어 짜 대거리를 했지만 미약하기만 했다. 금세 묻혔다.
“닥쳐라. 어서 빨리 강제구금하고 있는 북진무사를 곱게 돌려보내라.”
“역모에 관한 조사 권한은 금의위에 있다는 것을 모른단 말이냐?”
“……!”
금의위 도독 우현과 남진무사 이승의 계속된 외침에 어림친위군들의 목소리는 묻힐 수밖에 없었다.
“많이도 몰려들었네.”
용무린이 모습을 드러낸 순간이 바로 그 즈음이었다.
“보자, 월척이 몇 마리나 걸려들었을까?”
숫자 따윈 신경 쓰이지도 않는다는 듯 용무린은 서릿발 같은 눈으로 주변을 훑었다.
“네놈은 누구냐?”
“이런 시건방진 애송이를 봤나? 감이 뉘 앞이라고 월척 운운을 하는 게냐?”
겁도 없이 우현과 이승이 고함을 버럭 질렀다.
“나?”
한 차례 풀썩 웃어 보인 용무린의 용천혈에 불사신기가 스며들었다.
“황룡패주.”
후욱.
자신의 신분을 밝히기가 무섭게 용무린은 신법을 전개했다. 순간적으로 거리를 좁혔다. 금의위 도독 우현과 남진무사 이승을 덮쳤다.
빠악. 뻐억.
“화, 황룡……. 어헉!”
“귀, 귀하께서 정녕……. 커헉!”
화들짝 놀라 말을 더듬던 우현과 이승이 동시에 비명을 터뜨렸다. 용무린의 주먹에 턱과 복부를 얻어맞으면 누구라도 그럴 수밖에 없으리라.
“그래! 내가 황룡패주야.”
퍼억. 퍽퍽퍽. 와득. 와득.
용무린의 손속은 정말이지 독했다.
우현의 턱이 부서지고 이승의 갈비뼈가 왕창 주저앉았으며 팔과 다리가 이리저리 말도 안 되는 방향으로 꺾였음에도 용서가 없었다. 계속해서 두들기며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내뱉었다.
“황룡패? 조금 있다가 보여줄게. 일단은 더 맞자.”
뿌아악. 빠아악. 뻐버벅.
“큽! 허억. 우와악.”
“끄아악. 크헉.”
우현과 이승의 입에서는 끊임없이 비명이 쏟아졌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금의위와 경위지휘사사의 병사들이 고함을 질렀다. 용무린 앞으로 밀려들었다.
“도독을 구원하라!”
“적이다. 쳐라!”
충분히 튀어 나올 수 있는 말들이었다.
용무린이 황룡패주라 자신의 신분을 밝히긴 했지만 결정적으로 증거인 황룡패는 보여주지 않았으니까.
“와아아!”
“이야아-하!”
주제파악이 안 되는 것인지 아니면 공명심이 강하거나 수적우세라는 것을 믿고 있는 것인지 금의위와 경위지휘사사의 병사들은 잘도 달려와 도와 검과 창을 들이밀었다.
“황룡패주를 수호하라!”
“어림친위군은 나서라. 죽음으로 황룡패주를 수호해야만 한다.”
관일영과 진후상도 죽음을 불사했다.
어차피 이 자리에 황룡패주와 함께 있는 모습을 들킨 이상 저들의 반대편에 섰다는 것을 공공연히 드러낸 셈이니 삶과 죽음을 함께 해야 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바로 그 순간, 용무린이 한 발 빨리 행동을 개시했다.
버언쩍. 피이이잉.
눈부신 섬광 한 줄기가 주변을 크게 휘감았다. 그 뒤를 따라 지극히 은밀하며 나직한 그 무엇인가가 파도처럼 밀려와 휩쓸었다.
서걱. 서걱. 서거거거걱.
챙그랑. 탱강. 채채챙.
“우왓!”
“어헉!”
밀려들던 금의위와 경위지휘사사의 병사들이 그 자리에 모두 굳었다. 도대체가 손짓 한 번에 수십여 명의 무기를 동시에 잘라낸 사람을 향해 빈손으로 뛰어들 수는 없는 법 아니겠는가?
“껄렁한 놈들이 주제도 모르고 달려들기는?!”
장난처럼 내뱉어진 목소리에 얼음장과 같은 냉기가 담겨 있었다.
“감히 황룡패주에게 무기를 들이댄 죄를 물을 테니 얌전히 차례를 기다려. 명심해. 두 번은 참지 않는다. 다시 덤비면 네놈들이 몇이든 깡그리 죽여 버릴 테다.”
오싹.
등에 소름이 쫙 돋은 금의위와 경위지휘사사의 병사들은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 뒤로 쭉 물러났다. 경세적인 무위와 황룡패주라는 권위가 하나가 되니 도저히 어찌해 볼 수 없는 거력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용무린은 뒤를 향해 손을 뻗었다.
“두 사람, 이리 좀 와 봐.”
“명!”
“명!”
관일영과 진후상이 다가왔다.
“금의위와 경위지휘사사 소속 병사들인 건 알겠는데, 얘들 둘 직급은 뭐지? 대뜸 나서서 싸가지 없는 소릴 지껄이는 것을 보니 꽤 높을 듯한데 말이야.”
“왼편의 은빛 경갑을 입은 자는 금의위 도독 우현입니다, 황룡패주시여.”
“그 뒤의 경갑을 입은 자는 남진무사 이승입니다.”
“월척은 못 되고 준척들이었구나.”
용무린의 입에서 생각지도 못했던 말이 튀어 나왔다.
지금까지 무소불위의 권력을 지니고 있던 두 사람의 지위를 생각하면 정말 믿지 못할 발언이었다.
용무린은 품에서 황룡패를 꺼내들었다.
차차착.
“황룡패를 배알합니다.”
“황룡패를 배알합니다.”
관일영과 진후상 그리고 육만천을 비롯한 어림친위군 전원이 오체투지를 했다. 큰 소리로 금서친림 황룡패주의 현신을 외쳤다.
“지휘 육만천!”
“하명하소서!”
“지금 당장 취조실로 내려가 북진무사 상관웅을 이곳으로 끌고 오라.”
“충!”
육만천이 날 듯이 취조실을 향해 뛰었다. 오래지 않아 육만천이 상관웅을 끌고 나왔다.
“놈! 이쪽이다. 빨리 걷지 못할까?”
포승줄에 칭칭 감긴 상관웅은 육만천이 이끄는 대로 이리저리 휘청거렸다.
황룡패를 높이 쳐든 용무린이 크게 고함을 질렀다.
“황실종친마저도 조사한 후 증거만 있다면 즉참을 할 수 있는 무상의 권위가 여기에 있다.”
“금서친림!”
어림친위군이 동시에 외쳤다.
그 기세가 어찌나 강렬했던지 몰려들었던 금의위와 경위지휘사사 병사들의 심장을 옥죄었다.
“황궁에 허언은 없는 법, 저 가증스러운 놈들이 감히 본 황룡패주를 역모로 몰았다. 지금! 이 자리에서! 누가 과연 역모를 획책했는지 보여주리라!”
우르르릉.
천둥과도 같은 떨림이 좌중을 휩쓸었다.
용무린은 관일영을 향해 추상과도 같은 명령을 내렸다.
“황룡패주의 권위로 명령을 내리노니, 어림친위군 제독 관일영은 감히 사특한 마교의 무리와 내통을 하고 그 내공을 익힌 마인 상관웅의 단전을 파훼하라. 산공의 과정에 흘러나오는 마공의 정체를 보게 될 것이다.”
“명!”
똑소리 나는 대답과 함께 관일영이 검을 뽑아 들었다.
상관웅을 향해 다가섰다.
“하, 하지 마. 하지 마-아…….”
소스라치게 놀란 상관웅이 도리질을 쳤다.
“닥쳐라, 역적아!”
스릉.
검을 뽑아 든 관일영까지 상관웅을 역적으로 단정 지었다. 싸늘한 목소리로 쏘아 붙였다.
불과 백 일 남짓한 시간동안 놀라울 정도로 세를 확장한 의문의 세력에 맞서기 위해서였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용무린의 말을, 상관웅이 마교에 혼을 판 마인이라는 것을 믿었던 것이다.
스윽.
관일영의 검이 상관웅의 단전으로 향할 때였다.
후욱. 스파앙. 쌔애액.
세 줄기의 움직임이 벼락처럼 일었다.
두 줄기는 용무린을 향해 쏘아졌고 나머지 한 줄기의 움직임은 상관웅의 단전을 짓쑤시려는 관일영을 막기 위한 시도였다.
씨익.
“월척은 확실히 입질이 늦단 말이-야.”
우우우웅-.
헤실 웃어 보인 용무린이 기다렸다는 듯 풍뢰를 뽑아들었다. 불사신기를 잔뜩 머금은 풍뢰가 가늘게 몸을 떨었다. 신비로운 공명음을 발했다.
반짝.
풍뢰의 도신에 옅은 빛이 걸렸다.
누가 봐도 겨우 검기나 머금은 것으로 보였을 만큼 형편없이 약해 보였다. 신비롭게 울려 나오던 공명음이 무색할 정도였다.
‘저 정도라면 일초지적밖에 안 된다.’
‘단숨에 머리를 으깨어주마.’
용무린을 향해 짓쳐들던 두 사내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죽어라, 이 역적아!”
“네놈을 시작으로 역모에 연루된 네놈의 가문까지 깡그리 쓸어 주리라.”
확실히 용무린의 얼굴과 비룡문까지 아는 눈치다.
‘상관웅을 구하러 왔을 테니 어쩌면 당연한 것인가?’
상관웅에게도 질문을 했듯 상관세가의 주축들은 이곳 자금성을 새로운 둥지로 선택했을 터, 가주인 상관초웅을 비롯해 직계혈손에서도 특별한 존재들만 가려 뽑아 왔을 테니 자신의 얼굴 정도는 알아보리라 생각했다.
버언쩍. 쿠와아아-.
시린 빛과 함께 장엄하리만큼 강렬한 기의 폭풍이 일었다. 그 중간에 커다란 권강 덩어리가 솟아올랐다. 용무린을 향해 작살처럼 쏘아졌다.
“너흰 그래서 안 돼.”
하여간 보는 눈도 더럽게 없는 놈들이다.
스아악. 사아아악.
풍뢰가 부드럽게 전면을 휘감았다.
수라잔월의 초식이 초승달에서 시작해 만월로 변하며 권강 덩어리를 스쳐 지나갔다.
퍼어엉. 휘스스슷.
“하늘 밖의 하늘을 보여 주마, 이 우물 안의 상관세가 종자들아-앗!”
파앙. 휘이이잉.
용무린의 비웃음이 끝나는 순간만을 기다렸다는 듯 두 권강 덩어리가 두 쪽이 났다. 허무할 만큼 손쉽게 바람으로 변해 사라졌다.
움찔!
두 사내가 화들짝 놀랐다. 잠시 멈칫했다.
용무린이 대놓고 상관세가를 입에 담았기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들이 뿜어낸 권강을 검기 따위로 저렇듯 쉽게 파훼한 이유를 알 수 없어서였다.
따아앙.
“흡!”
휘리릭.
상관웅을 구하려고 관일영을 향해 달려들었던 마지막 사내마저 신음소리를 흘리며 뒤로 물러났다. 두 사내 곁에 내려서야만 했다.
피이잉. 씨시시싯.
그 사이 시위를 하듯 가볍게 주변을 한 바퀴 휘돈 소검비연과 천잠사가 용무린의 팔에 되돌아왔다.
세 사내의 면면을 확인한 용무린이 픽 하고 웃었다.
“오! 우리 구면이었네?!”
상관웅을 구하려다 뒤로 밀린 사내의 얼굴이 땡감을 씹은 표정이 되었다. 용무린의 말마따나 서로 구면이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