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함정
용무린의 머릿속으로 백리세가에서의 일과 상관세가의 정보가 빠르게 스쳐 지났다.
“일장로 부일기였던가? 나머지는……?”
용무린은 이내 귀찮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싱겁게 웃었다.
“에이, 이 상황에 잡졸들의 이름 따위가 뭐가 중요하겠어?! 끽 해봐야 비슷비슷한 장로나 직계 떨거지들이겠지. 안 그래?”
“네, 네 이놈!”
“감히 너 따위가 우리를 무시하다니!”
“이런 시건방진 놈!”
일장로 부일기와 상관세가의 이, 삼장로가 발끈했다.
“감히 황룡패주를 참칭하다니! 내 오늘 너를 응징한 후 너의 가문에 죄를 묻겠다!”
일장로 부일기가 호기롭게 외쳤다.
아직도 자신들 셋의 힘이라면 용무린을 어찌해볼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물론 지금 이 순간 용무린만 어찌할 수 있다면 그들의 뜻대로 될 것이다. 죽은 자는 말이 없는 법이니까.
“그런 걸 희망사항이라고 하지 아마?”
마지막으로 이죽인 용무린이 고함을 버럭 질렀다.
“뭐하나, 관일영! 시행하라!”
“명!”
관일영이 소리 높여 답했다.
푹.
그대로 상관웅의 단전에 검을 꽂았다. 확 비틀었다. 강제 산공을 시키는 거다.
“크아악!”
상관웅이 죽는다고 고함을 질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부일기와 두 사내가 이를 갈았다.
“이, 이런 쳐 죽일 놈!”
“가, 감힛!”
“반드시 네놈을 죽이고 역모에 가담한 네 가문 역시 깡그리 쓸어버리리라.”
픽.
용무리는 같잖다는 듯 풀썩 웃어 버렸다.
“너희 걱정이나 해 이 멍청이들아.”
그 순간,
뭉클. 뭉클. 콰아아!
찢겨나간 상관웅의 단전에서 그동안 불사신기의 힘에 도망치고 짓눌려만 있던 신마단의 힘이 폭발하듯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씨익.
활짝 웃어 보인 용무린이 마지막으로 이죽거렸다.
“어때? 때깔이 꽤 검지?”
용무린의 말처럼 상관웅의 단전에서 뿜어져 나온 신마단의 기운은 검은 연기와도 같은 형태로 보였다. 하늘로 솟구친 후 허무하게 사라져갔다.
아무리 무공에 문외한이라 해도 한 눈에 알아차릴 수밖에 없도록 드러난 검은 기운에 사람들은 웅성거렸다. 옆에 있는 동료와 수군거렸다.
“저, 저게 뭐야?”
“맙소사.”
“어, 어떻게 사람의 몸에서 저런 색의 기운이…….”
금의위들이나 경위지휘사사의 병사들이나 모두가 같은 생각들을 했다. 상관웅의 단전에서 폭발하듯 터져 나오는 마기를 보며 절대로 정파의 내공은 아니라고 느꼈다.
“크아아아!”
뭉클. 뭉클. 콰르르.
몸부림을 치면 칠수록 사납게 뿜어져 나오는 농도 짙은 어둠에 금의위와 경위지휘사사 소속 병사들은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 주춤 뒤로 물러났다.
“뭣들 하는 것이냐? 쳐라!”
“공격해라!”
“공격하란 말이다!”
일장로 부일기와 이, 삼장로가 목이 터져라 고함을 질렀다. 어떻게 하든 상황을 혼란으로 유도하려 들었다. 하지만 누구도 움직이려 들지 않았다. 그 순간 움직인 것은 오직 한 사람뿐이었다.
“좋아, 소원이라면 공격해주지. 차아앗!”
스파앙.
용무린이 먼저 움직였다. 공간을 가르며 짓쳐들었다.
섬뜩한 빛을 머금고 있던 풍뢰가 부일기와 나머지 두 장로를 한꺼번에 휘감았다.
“우웃!
“이야아하-아!”
“차앗!”
화들짝 놀란 사내들이 발작적으로 주먹을 쳐냈다.
창졸지간에 펼쳐낸 방어초식이었음에도 사내들의 주먹에서는 권강 덩어리가 잘도 튀어 나왔다.
그러나……
쉬각. 퍼엉. 휘스슷. 스가각. 퍼엉. 휘이이잉.
권강은 너무나도 쉽게 갈라졌다. 바람이 되어 이리저리 흩어져 버렸다.
휘슷.
그 사이를 용무린이 부드럽게 파고들었다. 쭉 뻗어낸 풍뢰가 예의 서늘한 빛을 발했다.
“으아아아-압!”
“어림없다아-아
“이야아-하!”
일장로 부일기와 이, 삼장로가 목이 터져라 고함을 지르며 권력을 쏟아냈다. 상관세가 직계와 고위 장로들만 익힐 수 있는 철혈권법과 뇌신탈명권 그리고 천붕칠권의 초식이 동시에 펼쳐졌다.
버언쩍. 투투퉁. 후우-웅.
세 장로들의 주먹에서 튀어나간 권강덩어리들이 용무린의 몸을 덮어갔다.
바로 그 순간,
휘슷.
용무린의 손을 떠난 풍뢰가 저 홀로 삼 장여를 날아가더니 전면을 틀어막았다. 돌개바람처럼 휘돌기 시작했다. 그 끝을 따라 용권풍이 피어올랐다.
콰아아우-웅.
용권풍은 삽시간에 세력을 확장하더니 권강덩어리들을 한꺼번에 집어 삼켰다. 그대로 갉아 없애 버렸다.
“어헉!”
“이, 이럴 수……?”
“어, 어떻게?”
일장로 부일기와 이, 삼장로가 소스라치게 놀랄 때였다.
보이지도 않는 무엇인가가 소리조차 없이 날아들었다. 세 사람의 심장을 차례차례 굴비 엮듯 꿰어 버렸다.
퍼버벅!
“……!”
부일기와 이, 삼장로의 눈이 부릅떠졌다.
무슨 무기로 어떤 초식에 당했는지조차 눈치 채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스륵. 착. 휘슷. 턱.
제 스스로 돌아온 풍뢰와 소검비연을 받아 든 용무린의 입에서 아량이 베풀어졌다.
“알고나 가라. 수라전륜아와 비연무흔단이다.”
진천수라도의 오초식 수라전륜아는 용권풍이 되어 권강덩어리를 갉아 버렸고 비연무흔단은 초식 이름처럼 흔적도 없었다.
부일기와 이, 삼장로의 심장 어림에서 엄청난 양의 피가 쏟아졌다. 힘없이 다리가 꺾였다. 풀썩 주저앉았다.
“이, 이런 말도 안 되는…….”
“미, 믿을 수가 없……. 흐으.”
이, 삼장로는 말도 채 끝내지 못한 채 절명해 버렸다.
일장로 부일기는 지금 자신이 있는 곳이 어디인지도 잊었는지 혼잣말을 되뇌었다.
“지, 진마단을 세 알씩이나 복용했는데……. 초절정의 무인 셋을 어, 어떻게 혼자서…….”
그 앞으로 저벅저벅 걸어온 용무린은 싱겁게 웃었다. 엉뚱한 대꾸를 했다.
“어떻게는 뭐가 어떻게야? 너는 내가 심장을 살짝 비켜 뚫었으니까 살아 있는 게지.”
타다닷.
더 이상의 말은 생략한다는 듯 용무린은 마혈을 짚었다.
부일기의 단전에도 불사신기를 불어 넣었다. 그 안에 깃들어 있던 진마단의 내공을 꽁꽁 묶었다.
“자, 이렇게 쓸 만한 포로 하나 더 추가한 셈인가?”
“허으으.”
그 말과 함께 씨익 웃는 용무린의 얼굴이 어찌나 무서운지 일장로 부일기는 괴이한 신음소리를 끝으로 정신을 놓아 버리고 말았다.
“얘도 끌고 가.”
“명!”
육만천이 날 듯이 달려와 부일기를 끌고 갔다. 이미 오래전에 정신을 잃은 상관웅과 함께 다시금 지하 이층의 취조실로 데려갔다.
“뭐, 대충 약이라도 발라줘. 아직은 죽으면 곤란해.”
“예, 알겠습니다.”
육만천이 고함을 지르듯 대답했다.
용무린의 시선이 멀거니 서 있는 금의위와 경위지휘사사 병사들에게로 향했다.
“보자.”
움찔.
용무린의 한마디에 파도 같은 움직임이 일었다.
방금 전에 보여준 용무린의 신위는 그만큼 충격적이었던 것이다.
“죽을래? 아니면 살아서 곱게 취조 당할래?”
천여 명에 다다른 군세를 상대로 홀로 협박이라니!
하지만 놀랍게도 그 협박이 먹혔다.
“……?!”
“……?!”
챙강. 챙그랑. 철컹.
서로의 얼굴을 돌아다보던 금의위와 경위지휘사사의 병사들이 무기를 버리기 시작했다. 살려만 달라는 듯 무릎을 꿇었다.
“일일이 취조하기엔 시간이 너무 걸리겠지?”
조금 걸러야만 했다.
용무린은 불사신기를 끌어올린 후 소검비연을 가볍게 두들겼다.
따라랑. 따랑.
무림맹의 수뇌부마저 벗어날 수 없었던 운율이 금의위와 경위지휘사사 병사들 천여 명을 통째 휘감았다.
잠시 후,
“우와악!”
“아악!”
역시나 펄쩍 뛰는 사람들이 있었다. 예상했던 대로 혈고에 종속된 사람들이었다. 불사신기가 가득한 탄주를 듣게 된 그들은 비명을 쏟으며 정신을 놓았다.
“방금 쓰러진 놈들 따로 추려. 그리고 나머지 놈들은 소속과 이름만 파악한 후 저쪽 구석에서 무릎 꿇고 손들고 있으라고 해.”
“명!”
“방금 말씀 들었지?”
“빨리 움직여 자식들아!”
“무릎 꿇고 손들어!”
백여 명 남짓의 어림친위군이 기세 등등 외쳤다.
열 배나 되는 금의위와 경위지휘사사의 병사들의 그 통제에 고분고분 따랐다. 어림친위군이 연무장으로 사용하는 공간 구석으로 몰려가 얌전히 무릎을 꿇은 채 손을 들었다. 참으로 믿지 못할 광경이었다.
“거기 두 사람!”
용무린이 뒤를 향해 손짓을 했다.
어림친위군 제독 관일영과 병부상서 진후상이 부리나케 뛰어 왔다.
“봤지?”
“예? 아, 예.”
“그러합니다, 황룡패주시여.”
바짝 긴장한 두 사람이 목소리를 높였다.
“곧 대대적인 청소에 나설 거야. 가서 내가 말한 대로 인명부를 만들어 와.”
“명!”
“명!”
똑소리 나는 대답과 함께 두 사람은 재빠른 동작으로 사라져 갔다.
“자, 그럼 나는 들어가서 구면인 사람과 정다운 이야기나 나눠볼까?”
상관웅에게까지 손을 쓰기엔 조금 꺼려졌었지만 일장로 부일기는 절대 아니었다.
‘빠르고 간단한 게 좋잖아?’
혈루곡주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통각신경을 제압할 생각이었다. 황제의 현 위치와 주변 상황을 빨리 알아내기 위해서는 그보다 더 좋은 방법이 없었다.
“크, 크아아악!”
오래지 않아 지하 취조실 이층에서 처절한 비명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용무린은 눈 한 번 깜박하지 않았다.
‘왜? 이게 뭐가 어때서?’
지금은 불분명하지만 한동안 자신의 전생이 신마 진무량이라고 생각해왔던 것 때문인지 확실히 용무린의 생각과 행동은 일반적인 정파인들과는 많이 달랐다.
***
어림친위군영에서 벌어진 일은 술시 초가 되기도 전에 다시 자금성 전체로 번졌다. 황룡패주의 등장에 놀라 퇴청까지 미루고 있던 조정대신들 귀에 다 들어갔다. 뜻이 맞는 이들끼리 삼삼오오 모여 수군댔다.
“허어, 황룡패주의 용력이 정말 대단한 모양이외다.”
“그러게 말이오.”
“그 무시무시한 북진무사를 일패도지시키더니 금의위와 경위지휘사사의 일천 명을 홀로 물리치다니요!”
“맞소이다. 거의 상산의 조운 자룡에 비할 맹장인 모양이외다.”
용무린이 보여준 무력에 대한 추앙이 넘쳐났다. 물론 그 뒤에는 은밀한 목소리들이 뒤따랐다.
“불과 하루 만에 상황이 급변하고 있소이다.”
“맞는 말씀이외다. 황룡패주께서 친림을 하시다니요.”
“저런 막강한 무인을 황룡패주로 내세운 진성왕야의 내심을 확실히 알 수 있겠소이다.”
“공께서도 그렇게 느꼈소이까? 나 역시 그렇게 느끼는 중이었소이다.”
늙고 노회한 무리들인지라 확실히 분위기 감지가 빨랐다.
목소리가 더더욱 은밀해졌다.
“이제 슬슬 중립적인 모양새를 취하는 것이 좋지 않겠소이까?”
“좋은 말씀이외다. 우리가 비록 유림출신들이 뭉친 동림파의 득세가 싫어 사례감과 손을 잡고 반대 입장에 서 왔지만 황룡패주께서 저렇듯 존재감을 내세우고 있는 작금에 까지 그러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사례감 쪽에서도 가만히 두고만 보지는 않을 테지요?”
“당연히 그러하지 않겠소이까? 하루 만에 이런 풍파가 일었소이다. 가만히 두고 보았다가는 그대로 휩쓸려 나갈 터, 살기 위해서라도 움직일 것이외다.”
“그러니 우리는 더더욱 중립을 표방해야 할 것 같소이다. 모름지기 소나기는 피해가야 하지 않겠소?”
“맞소이다. 우리는 가만히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읍시다.”
“허허허, 거 좋은 말씀이오.”
“하하하하.”
이부를 제외한 호부, 예부, 형부, 공부, 병부의 신료들 대부분이 그렇게 생각했다. 황룡패주의 등장이라는 변수 앞에 몸을 사렸다.
물론 그들이 짐작했듯 날카롭게 반응하는 사람들도 아직 많았다.
쾅!
“뭐야? 몰려갔던 금의위와 경위지휘사사의 병사들이 싸우지도 아니한 채 무릎을 꿇었다고?”
“이런 멍청한! 함께 갔던 금의위 도독 우현과 남진무사 이승은 무얼 하고 있었는데 일이 그렇게 되었단 말이더냐?”
사례감의 수장인 장인태감 여군위와 내각 대학사 겸 이부상서인 호유용이 대노했다. 참지 못하고 책상을 내리쳤다. 고함을 질렀다.
“저, 그, 그게…….”
사례감의 소감이 송구하다는 듯 말을 더듬으며 보고를 이었다.
“먼발치에서 지켜보던 환관과 나인들 말에 의하면 황룡패주의 손에서 번갯불이 잠시 일자마자 우현 도독과 남진무사가 쓰러졌다고 합니다.”
어이가 없었는지 잠시 입을 벌리고 있던 호유용이 급히 질문을 던졌다.
“……내가 특별히 보내주었던 고수들은? 그 고수들은 대체 무얼 하였는데?”
그 질문에 소감의 얼굴은 더더욱 곤혹스러워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대로 전하기 어려울 정도로 자신이 들었던 말이 황당무계했기 때문이었다.
“무엇하느냐? 어서 말을 하지 못할까?”
“네이.”
장인태감의 채근에 소감이 냉큼 고개를 조아렸다. 조심스레 답했다.
“저, 그, 그것이……. 황룡패주가 용권풍을 만들어 냈는데, 그 용권풍에 휘말렸다고 합니다.”
“요, 용권풍?”
“네이, 그러하옵니다. 대인. 황룡패주가 손을 잠시 흔들자 용권풍이 일었고 보내주셨던 세 고수들이 거의 동시에 가슴에 피를 뿜으며 쓰러졌다고 합니다.”
“……!”
“……!”
장인태감 여군위와 호유용의 눈이 서로 마주쳤다.
두 사람은 입을 쩍 벌린 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소감의 말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한데, 기이한 것은 세 고수들 중 한 분이 황룡패주의 정체를 알아본 듯했다 합니다.”
“뭐라? 황룡패주의 정체를 알아 봐?”
“황룡패주의 정체가 대체 무엇이라 하더냐?”
“그것까지는 듣지 못했다 합니다. 그저 ‘네 가문에도 역모의 죄를 묻겠다.’고 했다 들었습니다. 그것으로 미루어 보아 틀림없이 황룡패주의 정체를 알고 있는 것으로 사료되옵니다.”
“허어.”
“거 참…….”
두 사람은 다시 말을 잃었다.
북진무사에 이어 금의위 도독과 남진무사 그리고 주군이 보내준 세 고수까지 몽땅 잃었는데도 알아낸 정보가 겨우 저 따위라니! 주군에게 뭐라고 보고를 해야 할지 정신이 아득해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이런 머저리 같은 놈들!”
그들의 등 뒤에서 얼음장 같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흠칫.
소스라치게 놀란 장인태감 여군위와 내각대학사 호유용이 황급히 고개를 조아렸다. 보고를 하던 소감은 아예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되었다. 내 너희들에게 화가 난 것이 아니다.”
“감사합니다, 주군.”
“황송합니다, 주군.”
여군위와 호유용이 죽다 살아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주렴 속에서 말이 이어졌다.
“소감은 그만 물러가라.”
“네-이.”
황제 앞에서 물러나듯 소감은 엎드린 채 뒷걸음질을 쳐 밖으로 나섰다. 실로 대단한 위세였다.
실내에 잠시 침묵이 일었다.
주렴 속 여군위와 호유용의 주군이 생각에 잠긴 것이다.
‘세 장로 중 하나가 황룡패주의 정체를 알아보았다고?’
어쩐지 느낌이 쎄했다.
발바닥에 박힌 작은 가시 하나가 탈이 나서 곪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세 장로 중 강호의 후기지수를 그나마 가장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은 당연히 대외활동이 그만큼 많았던 일장로 부일기일 터…….’
그랬다. 주렴 속 인물은 바로 상관세가의 가주 상관초웅이었다.
‘감히 누구도 범접 못 할 대지’는 바로 이곳 자금성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자신의 마지막 임무는 머지않아 오실 그분이 앉으실 이 자리를 지키며 터를 닦아 놓는 일인 것이다.
하지만 얼굴은 완전히 달랐다.
상관세가주로서의 익히 알려진 얼굴이 아니라 늙고 볼품없는 주름진 얼굴이었다. 정체를 말하지 않는다면 누구도 그를 상관세가주라 짐작하지 못하리라.
자금성에서 상관초웅의 위치는 삼공 중 하나인 태사.
실권은 없는 명예직이지만 황제 앞에서도 당당히 소신을 밝힐 수 있는 최고위직 중 하나였다.
‘일장로 부일기가 서슴없이 죄를 묻겠다고 할 정도로 확실히 그 정체를 알고 있는 가문이 대체 어딜까?’
상관초웅의 뇌리에 어떤 이름 하나가 스쳐 지났다.
‘비룡문…….’
찌릿.
비룡문이라는 이름을 떠올리자마자 심장이 아려왔다.
당연하게도 뒤이어 떠오르는 용무린이란 이름 석 자 때문이었다.
‘설마, 그 애송이가 황룡패주?’
설마가 아니었다. 황룡패주에 용무린이라는 이름을 대입하자마자 모든 궁금증이 한꺼번에 풀리는 느낌이었다.
‘하긴, 이제 갓 약관을 넘긴 듯 앳된 얼굴에 상상하기 어려운 무위를 지닌 애송이에 그놈을 빼면 대체 누가 어울리겠어?’
벽소추? 백리천월? 무당의 후기지수라 불리는 청풍이나 청명? 개방의 차기 후개감으로 불리는 방건?
‘모자라도 한참은 모자라지 암.’
상관초웅의 고개가 저절로 흔들렸다.
용무린이라면 상관웅이 그토록 허무하게 붙들린 이유도 충분히 이해가 가는 일이다.
그놈은 이제 겨우 일류의 내공을 지녔을 때도 상관혁련을 죽였으며 얼마 후에는 상관엽 숙부마저 넘어 선 괴물이었고 비룡문으로 달려와 자신의 심모원려를 물거품으로 만든 전력이 있기 때문이었다.
‘빌어먹을 자식이 어떻게 여기까지…….’
생각하면 할수록 기가 막혔다.
전생에 무슨 원한이 맺혔다고 이렇듯 사사건건이 자신과 상관세가의 대업을 가로막고 나선단 말인가?
‘그래 좋아, 마지막 기회가 왔다고 생각하자.’
매번 어긋났지만 이번에야말로 놈을 제거할 기회라고 생각하면 되는 거다.
‘더 물러날 곳도 이젠 없어.’
이판사판이다. 놈을 지금 제거하지 못한다면 이곳에서마저 밀려난다는 뜻이고 그것은 곧 오래지 않아 오실 그분을 볼 수조차 없는 중죄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이곳에서 죽는 게 낫지.’
죽어도 그냥은 안 죽을 거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최소한 그놈과 비룡문을 끌어안고 갈 생각이다.
‘먼저 용무린 그 애송이부터!’
“여군위.”
“하명하소서 주군.”
“지금 즉시 동창의 고수들을 모아라.”
“자금성 인근을 암행 감찰중인 아이들까지 죄 불러 모읍니까?”
“잔챙이들은 필요 없다. 절정의 무위가 되는 아이들만 따로 추려야 한다.”
“그렇다면 서른 남짓입니다, 주군.”
“좋다. 불러라.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명!”
복명과 함께 여군위가 뒤로 물러났다.
“호유용.”
“하명하소서, 주군.”
“상선감과 어용감에 언질을 넣어줄 터이니 심복들과 함께 그 물건과 인력을 받아오라.”
“그 물건과 인력이라시면 혹시…….”
“그래.”
상관초웅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이미 이야기가 진행된 상태인 듯 호유용은 바로 알아들었다.
“명! 차질 없이 시행하겠나이다.”
호유용 역시 물러났다.
홀로 남은 상관초웅은 이를 부드득 갈았다.
아득.
“이번에야말로 죽인다, 애송이.”
상관웅이 아무린 천덕꾸러기 신세라 하나 엄연히 자신의 아들이다. 그분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상관웅 역시 아픈 손가락임은 분명한 터, 몇 번이고 상관웅을 짓밟은 대가를 치러줄 생각이다.
“오늘에야말로 모든 원한을 갚는다.”
함정을 팔 것이다.
살아서는 절대로 빠져나올 수 없는 함정에 몰아넣은 후 벌레처럼 짓밟아 주리라. 그래야만 상관혁련과 상관엽의 원한과 자신의 일을 망친 것에 대한 갚음이 조금이나마 갚아질 수 있으리라.
***
취조실의 비명은 일다경을 넘기지 않았다.
일장로 부일기는 꼭 혈루곡주만큼 버티다 유년시설 계집종의 목욕을 훔쳐보던 죄까지 떠올렸을 만큼 아는 것은 모두 불었다.
“거 참, 생각보다 심각하네.”
용무린의 표정은 밝지 못했다.
부일기의 입에서 흘러나온 정보가 그로서도 꽤 충격적이었던 것이다.
“황제는 가사상태에 빠진 채 마지막 일만 번째 방에 누워 있고, 삼공 중 둘과 삼고의 둘, 그리고 여타 조정대신 중 칠 할을 잠식했다고?”
그야말로 입이 쩍 벌어지는 수준이었다.
무림맹이 잠식당했을 때보다도 훨씬 더 심했다. 그때는 단지 무림의 일일 뿐이지만 지금은 자칫 잘못하면 이 나라가 통째 뒤집어진다.
“혈고에 당했든 욕망에 휩쓸려 자진 합류를 했든 조정대신들이야 나중에 처리를 하면 될 터인데 황제의 안위는 조금 다른 문제란 말이야?”
진성왕이 자신을 내세운 이유가 바로 황제를 무탈하게 보위하기 위함이다.
상관웅과 금의위 그리고 경위지휘사사의 병사들과 툭탁거려 작은 이득을 취한 것 따위 황제의 안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일만 번째 방이라…….”
그 유명한 황궁보고를 말함이다.
태조 홍무제로부터 지금까지 이어오며 진상을 받거나 약탈을 했던 보물들 중 최고의 것들만 모아놓은 천하에 유일무이한 보고.
그 안에는 간장, 막야와 같은 희대의 보검부터 시작해서 온갖 희귀한 영약들이 산처럼 쌓여 있다는 말이 전설처럼 전해 내려오고 있었다.
“하긴, 그 정도는 되니 그놈의 활생단을 그렇게 소화제마냥 마구 만들어낼 수 있었겠지.”
의성 신우량이 만들었다던 활생단의 출처가 그곳일 줄은 정말 몰랐다. 물론 신우량이 직접 그곳에서 만들어내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 비방만큼은 그의 것이 확실했다.
“의성 신우량이 얼마 전까지 그곳에 갇혀 있었다고 했으니 이곳의 일을 처리하는 대로 뒤를 쫓으면 될 것이고, 지금은 눈앞에 닥친 일을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한데…….”
혼자서는 역부족이라는 생각이 처음으로 용무린의 뇌리에 스쳐 지났다.
뚫고 들어가는 것이야 자신의 무력으로 어떻게 가능할 수도 있다지만 황제를 안전하게 구해 나오기에는 고수나 병사들의 숫자가 너무 부족했다.
“아니, 아니지. 시작도 해보기 전에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나답지 않아.”
잠시 생각에 잠겼던 용무린은 정공법을 택하기로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최후의 결전장이 될 곳은 황궁보고가 빤한데 정보가 너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좋아, 일단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해보자.”
용무린은 즉시 서신 한 장을 썼다.
지금까지 알아낸 것들을 간략하게 적은 후 진성왕부를 향해 비응을 날렸다.
“황궁보고 진입은 답신이 오면 생각해 보고 지금은 옥석구분이나 해야겠다.”
용무린의 눈이 지그시 감겼다.
관일영과 진후상이 명단을 가지고 올 때까지 불사신기 수련을 하며 작전을 짤 생각이었다.
***
어느새 아침 해가 밝았다.
자금성의 일이 걱정되어 밤새 잠을 설쳤던 진성왕이 잠시 눈을 붙였다가 일어났을 때 비응이 도착했다.
용무린의 전서는 왕부장사사의 전서병 손을 거쳐 좌장사 이벽에게로 전달되었다. 이벽은 전서를 들고 날 듯이 달려 진성왕의 침전을 찾았다.
“기침하셨습니까, 왕야? 좌장사 이벽 입실이옵니다.”
“왔는가? 들어오게.”
“방금 황룡패주로부터 전서가 당도했습니다.”
“오! 그래?”
전서를 받아든 진성왕은 단숨에 읽어 내려갔다.
그리고 잠시 후…….
“이런 무도한 놈들!”
진성왕의 입에서 노성이 터졌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전서의 내용이 참기 힘들 만큼 진성왕의 화를 돋웠기 때문이었다.
“천하의 불측한 무리들이 감히 황제폐하의 옥체를 볼모로 삼다니! 어떻게 했는지는 아직 모르지만 이미 가사상태로 만들었다고? 내 그럴 줄 알았다. 어쩐지 병필수당태감의 손에 교지나 비답만 내리시더라니!”
화를 참기가 어려운 듯 진성왕의 눈썹이 역 팔자를 그렸다. 미루어 내용을 짐작한 좌장사 이벽은 그저 송구한 듯 고개를 조아릴 뿐이었다.
“일만 번째 방이라…….”
진성왕이 눈을 지그시 감았다.
인자하던 선대 황제폐하의 얼굴이 떠올랐다.
-네가 정녕 황태자를 옹위할 생각이라면 마땅히 선물을 내릴 터, 하나 골라 보거라.
‘이런 일을 짐작이라도 하셨던 것인가?’
그냥 내어줘도 무방했을 것을 선대 황제는 굳이 자신을 황궁보고로 이끌었다. 정확한 위치와 출입 방법 그리고 각종 기관들의 위치와 작동방법까지 모두 알려 주었었다.
‘그만큼 나를 믿으셨다는 뜻이겠지.’
그런 큰 믿음과 사랑을 받았던 덕에 자신이 지금껏 잘 살아올 수 있었다.
‘이제야말로 그 믿음과 사랑에 보답을 할 때!’
생각보다 빠르게 일이 진행되는 셈이었지만 이미 쏘아진 화살이었다. 최선을 다해 용무린을 도와야만 한다.
툭.
진성왕이 목걸이를 잡아 뜯었다.
담백한 자색 끈 끝에 매달려 있던 큼직한 은색 구슬이 진성왕의 손에 들렸다. 진성왕은 그 구슬을 좌장사 이벽에게 내밀었다.
“받아라.”
“와, 왕야! 그, 그 물건은?”
이벽이 채 말을 맺지 못했다.
진성왕이 내민 물건의 가치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구슬의 이름은 피독제왕주.
사천의 명문 당가에 몇 개 있다는 피독주와 운남에서만 수십 년의 시간을 두고 하나씩 발견된다는 웅황제독주 따위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귀물이었다.
피독주나 웅황제독주가 백독에서 천독을 제어한다면 선대황제의 허락을 받아 황궁보고에서 들고 나온 이 피독제왕주는 만독을 물리치는 효능을 지녔다고 한다.
“황상의 옥체를 보위하지 못할 바에야 내게 이 피독제왕주가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
“받아라. 지금 즉시 말을 달려 황룡패주를 찾아 건네 주거라. 녀석에게 이게 꼭 필요할 게다. 그리고 내가 건네는 서신 또한 잊지 말고 전해야 한다. 알겠느냐?”
“목숨을 걸고 완수하겠나이다.”
피독제왕주를 받아 든 이벽이 고함을 지르듯 복명하며 고개를 조아렸다. 진성왕은 만족한 얼굴로 붓을 들어 날아갈 듯한 필체로 몇몇 당부와 시를 한 수 적었다.
진성왕의 서신을 받아 든 이벽은 재빠르게 움직였다.
기수 다섯을 대동한 채 그대로 말을 달렸다.
전성왕은 뒤이어 우장사를 불러 추상같은 명령을 내렸다.
“지금 즉시 왕부장사사와 왕부호위지휘사사에 내 명을 전하거라. 황제폐하의 목숨이 경각에 달렸으니 지금 즉시 거병준비를 하라 일러라.”
“충!”
우장사가 눈을 칼날 같은 목소리로 답하고 나섰다.
오래지 않아 자신이 명한 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질 것이다.
“고수의 손이 필요하다 했지?”
적당한 곳이 떠올랐다.
진성왕은 지체 없이 한 장의 전서를 더 썼다. 비응에 매어 날려 보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구나.”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으니 이제는 하늘의 뜻을 기다릴 뿐이었다.
***
이틀이라는 시간이 훌쩍 지났다.
좌장사 이벽은 날 듯이 말을 달렸다.
마방에 들러 지친 말을 바꿀 때가 아니면 쉬지도 않고 박차를 가했다. 그 덕에 시간을 단축할 수 있었다. 해가 중천에 오르기 전 자금성에 도착했다.
“오오! 좌장사 이공 아니시오?”
“그간 적조하였습니다, 이공.”
좌장사 이벽이 오문을 통과하자 주변에 있던 관리와 환관들이 다가와 알은 체를 했다. 얼굴 하나 가득 넉넉한 미소를 떠올리고 점잖은 목소리로 말은 했지만 눈빛만큼은 간사하게 굴러다녔다.
“미안하오. 중한 일부터 처리한 후 다시 인사드리도록 하겠소이다.”
이벽은 칼 같은 태도로 그들의 접근을 차단했다.
절도 있게 포권을 취해 보인 후 잽싸게 어림친위군영을 향해 내달렸다.
“……!”
“……!”
잠시 서로의 눈을 들여다보았던 관리들과 환관들은 저마다의 보고를 위해 게 눈 감추듯 사라졌다. 십중팔구 한식경이 지나지 않아 이벽의 입궁 소식이 자금성 전역으로 번져나갈 것이다.
***
“황룡패주를 뵈오.”
용무린 앞에 선 좌장사 이벽이 정중히 군례를 올렸다.
“어라? 좌장사께서 직접 오셨네요?”
용무린은 얼른 다가가 이벽을 일으켰다. 빙그레 웃으며 말을 이었다.
“어지간히 중한 걸 가져오셨나보네요? 그렇죠?”
“허허허, 주변을 좀…….”
이벽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용무린이 육만천을 슬쩍 돌아보았다. 무슨 뜻인지 알아들은 육만천은 슬그머니 밖으로 나갔다. 조용히 문을 닫고 멀어져 갔다.
그때를 기다렸다는 듯 이벽은 품속에서 피독제왕주를 꺼냈다.
“뭔가요?”
“살아생전의 선대 황제폐하께옵서 진성왕야께 내리신 귀물입니다.”
‘설마, 그건가?’
용무린이 알 듯 말 듯한 표정을 지었다.
이벽의 목소리가 조용히 이어졌다.
“피독제왕주라 합니다. 만독을 물리치는 효능을 지닌 것으로 진성왕야께서 언제나 지니고 계시던 것입니다. 황룡패주께 필요할 것이라며 내어주셨습니다.”
‘역시 그쪽이었네…….’
용무린의 눈이 살짝 커졌다.
피독주나 웅황제독주 정도만 되어도 굉장한 기물인데 피독제왕주가 튀어나오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여기 서신이 있습니다.”
“……서신?”
“왕야께서 보내시는 것입니다.”
용무린은 진성왕의 친필서한을 받아 읽었다.
수고를 치하하는 말과 당부 그리고 일만 번째 방의 위치와 진입 방법과 함께 깊은 뜻이 함축된 것으로 보이는 시가 한 수 쓰여 있었다.
“전칠좌상화취 화향폭류옥수…….”
시를 읽어 내려가는 용무린에게 좌장사 이벽이 말을 덧붙였다.
“일전에 보내셨던 전서에 대한 화답입니다. 안에 들면 자연적으로 알게 될 것이라 하셨습니다.”
무슨 뜻인지 충분히 알 것 같았다.
‘황궁보고에 설치된 기관의 파훼법이라면 확실히 들어가 봐야 알 수 있겠군.’
용무린의 고개가 크게 끄덕여질 때였다.
밖이 부산해지는가 싶더니 육만천의 목소리가 우렁차게 들려왔다.
“황룡패주께 아뢰오. 사례감의 장인태감이 찾아왔나이다.”
반짝.
‘왔다!’
용무린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좌장사 이벽이 자연스럽게 용무린의 뒤에 시립했다.
“들라 해라.”
“명!”
우렁찬 대답이 들려온 후 오래지 않아 문이 열렸다.
포동포동 살이 오른 얼굴에 기름기가 좔좔 흐르는 사례감의 장인태감이 안으로 들었다.
흠칫!
여군위가 가늘게 몸을 떨었다.
음침하고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취조실에 처음 들어와 봤기 때문이 아니라 질식할 만큼 무거운 기운을 은연중 뿜어내는 용무린 때문이었다.
‘침착하자.’
여군위의 시선이 의자에 앉아 뒤로 몸을 기댄 용무린에게로 향했다.
‘저 애송이가 바로 황룡패주로군.’
조용히 앞으로 다가와 공손히 두 손을 모았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목소리로 인사를 했다.
“황룡패주를 배알합니다. 장인태감직을 맡고 있는 여군위라 하…….”
“됐고, 언제 어디로 가면 되냐?!”
“니다……?”
여군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런 여군위를 보며 용무린이 하얀 이를 드러냈다.
“황제폐하와의 친견 날자와 시간이 정해져서 온 것 아니야? 언제 어디로 가면 되냐고?!”
계속되는 채근에 여군위의 얼굴이 잔뜩 굳었다.
‘네놈이 언제까지 그리 뻣뻣한지 보자.’
여군위가 품속에서 두루마리 하나를 꺼내들었다. 쫙 펼치며 큰 소리로 외쳤다.
“황룡패주는 황명을 받으라!”
여군위의 입가에 비로소 득의양양한 미소가 걸렸다.
진성왕이라 하더라도 황명을 전하는 이 순간만큼은 자신 앞에 무릎을 꿇어야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피식.
같잖다는 듯 풀썩 웃을 뿐 의자에 깊이 앉아 다리를 꼬고 있던 용무린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움찔.
화들짝 놀라 오체투지를 하려는 좌장사 이벽이 멈칫했다. 무형의 힘이 강제로 막았기 때문이었다.
‘이, 이게 어떻게 된 일……?’
깜짝 놀라 용무린을 바라보았지만 용무린은 이벽을 향해서 시선도 돌리지 않았다. 싸늘한 눈초리로 여군위의 하는 양을 바라볼 뿐이었다.
꿈틀.
여군위의 눈두덩이 요란하게 움직였다. 분노한 얼굴로 고함을 버럭 질렀다.
“무엄하다! 황명 앞에 어찌 그리 무례할 수 있단 말인가? 제 아무리 황룡패주라지만 황제폐하의 친서 앞에 예를…….”
“닥쳐!”
후욱. 뻐억.
여군위의 말을 중간에 툭 자른 용무린이 바람처럼 짓쳐들었다. 턱을 시원스럽게 돌려 버렸다.
“커헉!”
여군위의 손에서 황명이 담긴 두루마리가 떨어졌다. 용무린은 두루마리를 잡아챈 후 이벽을 향해 던졌다. 이벽이 화들짝 놀라 받아 들었다.
“야 이 간신배야!”
뻐억. 빠악. 퍼버버벅.
무자비한 구타가 시작되었다.
“우왁. 끄아악. 커어억.”
절정 어림의 무공을 지니고 있던 여군위였지만 어떻게 손을 써 볼 생각도 하지 못했다. 용무린의 움직임은 그만큼 빨랐고 강했다.
뻐억. 와득. 퍼억. 와드득.
용무린의 주먹과 발이 닿는 곳마다 뼈가 수수깡이나 되는 듯 잘도 부러졌다.
“이미 황제폐하께서 일만 번째 방에 혼수상태로 갇혀 계신 것을 알고 있는데 뭐가 어쩌고 어째? 황제폐하의 친서? 그 친서 어디에서 누가 썼어?”
퍼억. 퍽퍽퍽.
“크악. 커어억.”
“친서에 옥새는 또 어떻게 찍었는데? 빨리 말 안 해?”
빠바바박. 와드득.
“우와악. 끄으으…….”
비명을 지르다 못한 여군위의 눈이 흰자만 남았다. 뒤로 스르르 넘어갔다. 물론 용무린은 그렇게 되도록 두고만 보지 않았다.
“이제 시작이야 인마!”
타앗. 타다다닷.
용무린의 손이 가볍게 여군위의 혈도를 두들겼다. 간단한 수준의 추궁과혈이었다. 하지만 투입된 내공은 절대적인 수준의 불사신기.
파르르. 울컥.
“커허…….”
격렬히 몸을 떨어 보인 여군위는 덩어리 피를 쏟아낸 후 호흡이 되돌아왔다. 다시 눈을 떴다. 정신을 차렸다.
씨이익.
용무린의 입가에 흰 선이 쭉 그어졌다.
“다시 시작해 볼까?”
움찔.
“아으으…….”
여군위의 얼굴에 절망이 어렸다.
***
상관초웅이 고함을 버럭 질렀다.
“뭐라? 장인태감이 아직 어림친위군영에 도착을 하지 않았다고?”
“그렇다고 합니다, 주군.”
“……!”
황룡패주에게서 회답이 돌아오지 않아 어찌된 영문인지 알아보았던 상관초웅은 어이가 없었다. 황제의 친서를 품고 간 장인태감 여군위가 아예 도착을 하지도 않았다니!
아득.
“이런 멍청한 놈이 대체 어디서 무얼 하는 게야?”
시국이 어떤 시국인데 한눈을 판단 말인가?
“동창 고수들의 보고와 적재적소 배치를 위해 잠시 시간을 필요로 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주군. 진성왕부의 좌장사 이벽까지 어림친위군영에 들어갔다 하지 않습니까?”
호유용의 설명을 듣던 상관초웅의 고개가 천천히 끄덕여졌다.
‘그럴 수도 있겠군.’
함정으로 유인을 하는 것도 좋지만 그 함정이 튼실해야만 유인하는 보람이 있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무력은 보잘 것 없지만 좌장사 이벽이란 인물은 진성왕부를 대변하는 얼굴 같은 존재, 진성왕부의 개입은 기정사실이니 준비를 튼튼히 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래도 놈의 대응을 알려면 어서 빨리 그 애송이에게 시간과 장소를 알려줘야만 해.”
“그건 그렇습니다, 주군.”
급한 마음에 상관초웅은 다시 명령을 내렸다.
“소감.”
“네이.”
“너는 이 길로 장인태감을 찾아 함정을 공고히 하는 일에 매진하라 해라. 굳이 어림친위군영으로 갈 필요가 없다고 말이야.”
“명!”
소감이 즉시 밖으로 향했다.
“호유용.”
“예, 주군.”
“옥새를 내어줄 터이니 지금 즉시 여군위가 가지고 간 것과 같은 친서를 한 장 더 써서 황룡패주에게 전하고 오너라. 그놈이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잘 살피는 것 잊지 말고.”
세상에, 황제의 상징인 옥새마저 자유로이 사용할 수 있는 권력이라니!
“명!”
호유용이 고개를 깊이 조아리며 복명했다.
***
반 시진 후 어림친위군영 지하 2층 취조실.
씨익.
“이렇게도 되는 거였구나? 오늘 좋은 거 하나 알았네.”
몽롱하게 눈이 풀린 채 너부러진 여군위를 내려다보며 용무린은 보기 좋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하여간 네가 일등공신이다.”
용무린은 지금껏 쉬지 않고 연주를 한 소검비연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혈고에 종속된 자들을 상대할 획기적인 비책 하나를 마련해준 것에 대한 보답이었다.
‘이런 죽일 놈들!’
반대로 좌장사 이벽과 지휘 육만천은 분노를 참기 어려운 듯 어금니를 콱 깨물고 있어야만 했다. 여군위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들이 그만큼 충격적이었던 거다.
그때 밖에서 별장 하나가 뛰어 들어왔다. 절도 있게 군례를 취하며 보고를 했다.
“지금 내각 대학사이자 이부의 상서인 호유용이 당도해 있습니다.”
“호유용? 걔는 또 무슨 일이래?”
“황제폐하의 친서를 받으라 하였습니다.”
“……?!”
용무린의 눈이 동그래졌다.
‘이것 봐라?’
여군위를 잡아 가둔 후 함께 왔던 환관 나부랭이들까지 깡그리 포박했다. 흔적을 지운 후 슬쩍 황제의 친서를 받지 못한 모양새를 취했더니 다시 찾아온 것이다.
좌장사 이벽과 지휘 육만천도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지금껏 용무린의 곁에서 여군위가 몽롱한 눈으로 토설해내는 비밀을 다 들었는데 또 황제의 친서가 당도했다는 말을 들으니 황당했던 것이다.
“어찌하올지…….”
“어쩌긴? 비어 있는 옆 취조실로 이동해 있을 테니까 그곳으로 들여. 그리고 나머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잘 알고 있지?”
호유용이 안으로 들면 그와 함께 온 병사나 기수 혹은 환관들을 제압해 누구도 이곳을 벗어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을 말했다.
“명!”
척하면 착이었다.
이미 한 번 경험을 했던 별장의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 씩씩하게 답한 후 밖으로 나섰다.
씨익.
용무린의 입꼬리가 슬쩍 위로 말려 올라갔다.
“그래, 자꾸만 와라. 한 놈이라도 더 잡으면 증거도 늘고 나야 편하고 좋다.”
지원군이 올 때까지 마냥 이렇게 한 놈씩 찾아와 줬으면 할 정도였다.
비어 있는 옆 취조실로 이동하며 서로 눈을 마주친 좌장사 이벽과 지휘 육만천이 빙그레 웃었다.
자리를 옮긴 후 오래지 않아 내각 대학사이자 이부의 상서인 호유용이 취조실 안으로 들어섰다.
“황룡패주를 뵈오이다. 내각 대학사이자 이부의 상서인 호유용이라 합니다.”
“그래, 반갑다. 와줘서 고마워.”
“……?”
고개를 살짝 갸웃했던 호유용은 여군위가 그랬던 것처럼 곧바로 돌변했다. 품에서 두루마리를 꺼내 펼치고선 득의양양한 얼굴로 고함을 질렀다.
“황룡패주는 황제폐하의 명을 받…….”
용무린이 두 주먹을 번갈아 오도독 소리 나게 꺾으며 일어났다.
“자, 그러면 또 한 번 시작해 볼까?”
후욱.
호유용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바람처럼 짓쳐들었다. 통쾌할 정도로 빠르게 주먹을 뻗었다.
뻐어억. 와드득.
호유용의 가슴 어림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려 나왔다.
그 한 주먹에 갈비뼈 네 대가 부서져 버린 것이다.
“……커헉!”
취조실 바닥에 꿈틀거리는 호유용을 지그시 내려다보며 용무린은 소검비연을 빼들었다.
“이 녀석도 혈고에 종속당했을까?”
이제는 종속당해 있으면 더 좋을 것 같았다. 실험도 더 할 수 있고 탄주의 운율도 더 가다듬을 수 있으니까.
“어디, 네게도 이 방법이 통하는지 한번 확인해보자.”
따라랑. 따랑. 따리라랑.
가볍게 두들기는 손가락을 따라 소검비연이 기묘한 운율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흠칫.
“우와악!”
호유용은 입이 찢어져라 고함을 질렀다.
“너도 종속당했구나.”
용무린이 반갑다는 듯 미소 지었다.
따라랑. 따랑. 따리라랑.
“크윽. 크으윽. 흐으으…….”
탄주가 계속될수록 비명은 조금씩 줄어들었다. 그 대신 호유용의 눈이 몽롱하게 풀리기 시작했다.
따라랑. 따랑. 따리라랑.
“말해봐. 상관세가 말고 운룡장 쪽 인사도 자금성에 들어와 있나? 숫자는 몇이나 되지? 그중 책임자는 누구야?”
“그, 그것은…….”
호유용의 입에서도 여군위와 비슷한 수준의 정보들이 쏟아졌다.
***
호유용까지 오리무중이 되자 비로소 상관초웅은 여군위 역시 용무린의 손에 잡힌 것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아드득.
“이런 무엄한 놈을 봤나? 감히 황제의 친서를 지니고 간 고관을 뒤로 빼돌리고 억압을 해?”
물론 진짜 황제가 내린 친서는 아니었다.
황제의 친서랍시고 가지고 간 두루마리의 내용은 자신이 지시한 대로 써진 것이었고 옥새 역시 자신의 호주머니에서 나간 것이지만 너무나 불쾌했고 화가 났다.
“함께 갔던 사례감의 환관들과 근위병까지 깡그리 잡아 가뒀다 이거지?”
그러지 않고서야 하늘로 솟은 듯 수하들이 몽땅 사라질 수는 없는 것이다.
“그곳의 준비는 어떻게 되었느냐?”
“8할 정도 마무리가 되었다 합니다, 주군.”
납작 엎드려 있던 소감의 대답에 상관초웅은 고함을 버럭 질렀다.
“내관감과 어용감의 태감에게 최대한 빨리 마무리를 지으라고 일러라.”
“알겠나이다.”
납작 엎드려 있던 소감이 뽀르르 뒤로 기어 나갔다.
“그 빌어먹을 자식을 어떻게 꼬여 낸다?”
톡. 톡. 톡.
손가락으로 의자 손잡이를 두들기며 상관초웅은 깊은 생각에 잠겼다. 함정이 준비가 다 끝난다고 하더라도 보내는 족족 저렇게 잡아 가둔 후 입을 씻으면 함정으로 끌어들일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
“이런 무도한 놈들!”
무적 장군 양업의 손자인 양문광이 노성을 터뜨렸다.
그를 분노하게 만든 것은 한 장의 전서, 바로 진성왕이 보낸 것이었다.
“혹여 군부가 움직이면 역모로 몰릴까 저어하여 지금껏 지켜만 보았거늘 감히 황상을 혼수상태로 만든 후 황궁보고에 유폐했다니!”
용무린을 통해 들은 모든 정보가 담긴 전서 한 장에 그동안 침묵에 잠겨 있던 양문광이 떨쳐 일어섰다.
“지금 당장 협수부총병을 들라하라!”
“충!”
수하가 힘찬 대답이 튀어나온 지 오래지 않아 은빛 갑주 차림의 중년 사내가 들어섰다.
“찾아계시옵니까, 대인.”
“이것을 보라.”
오군도독부 총독이자 전시 총병관인 양문광은 진성왕야에게 받은 전서를 내밀었다. 협수부총병이 그것을 받아 읽었다. 잠시 후,
“이런 대역무도한 놈들!”
협수부총병 역시 눈을 부릅떴다.
양문광과 다를 바 없이 분노했다. 노성을 터뜨렸다.
“병부상서에게 연통을 넣어라. 지금 이 순간부터 오군도독부는 전시체제로 돌아갈 것이다.”
“당연한 말씀입니다. 무도한 무리들에 의해 황상의 옥체가 이미 볼모로 잡혀 있습니다. 참아서는 아니 됩니다. 움직여야 합니다.”
“자금성을 수호하는 경위지휘사사와 근위병 그리고 금의위와 동창의 고수들이 모두 적들의 편에 섰다. 그들을 견제해야만 한다.”
“알겠습니다. 지금 즉시 그들의 움직임을 봉쇄하도록 하겠습니다.”
똑소리 나는 대답과 함께 협수부총병이 밖으로 뛰어 나갔다. 오래지 않아 오군도독부 전체에 비상이 걸릴 것이고 자금성에서 반나절 거리에 위치한 하북성 도지휘사사의 병사들이 출병 준비를 갖출 것이다.
‘도지휘사사의 병력 오천이 움직이면 자금성에 숨어 있는 쥐새끼들이 함부로 움직이지는 못할 터!’
이제는 부족하다는 고수를 메워야 할 차례다.
양문광은 다시 일갈했다.
“지금 당장 유격장군을 불러오라!”
“충!”
유격장군은 자신의 장자인 양경홍을 말한다.
가문의 창법인 양가창법을 이미 구성 경지에 이르도록 익힌 고수로 전쟁 발발 시 일기토의 선봉을 맡길 생각에 앉힌 무관이었다.
오래지 않아 양경홍이 들어와 군례를 올렸다.
“찾으셨습니까?”
“가자. 황상께서 위험에 처하셨다.”
양문광은 자신의 큰아들이자 유격장군인 양경홍의 얼굴을 보자마자 벌떡 일어섰다. 곁에 세워둔 창을 들었다.
“충!”
질문 따위 더는 필요 없다는 듯 양경홍 역시 곁에 나란히 세워두었던 양가창을 집어 들었다. 양문광의 뒤를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