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함정 속으로 (46/104)

3.함정 속으로

하북성의 도지휘사사가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소식은 곧바로 상관초웅의 귀에 들어갔다.

“뭐라? 하북성 도지휘사사의 병력들이 출동 준비를 갖추기 시작했다고?”

“그러합니다, 주군.”

용무린의 수중에 떨어진 호유용을 대신해 수발을 들던 이부 좌시랑이 고개를 깊이 숙여 보였다.

“이런 빌어먹을!”

상관초웅의 주먹이 절로 콱 쥐어졌다.

군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말은 곧 진성왕 혹은 오군도독부를 움켜 쥔 총병관 양무광이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말과도 같았기 때문이었다.

상관초웅의 분노를 돋운 소식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놀랍게도 왕부장사사와 왕부호위지휘사사마저 거병을 준비한다는 급보가 들어왔다.

“허어…….”

낮은 탄식과 함께 상관초웅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입에 담진 못했지만 오만가지 생각이 떠돌았다.

‘조정 대신들을 휘어잡기 위해 너무 많은 시간을 끌었던 것이 실책이었던가?’

애초에는 병권부터 손에 쥐려 했었다.

하지만 오군도독부를 틀어쥐고 있는 양문광과 그의 아들은 이미 초절정의 고수였고 양가장의 고수들 역시 많이 등용이 되어 있는 터라 쉬이 접근할 수 없었다.

병부의 상서라도 종속시키려 했었지만 어떻게 눈치를 챘는지 지난 석 달여 동안 등청도 하지 않고 모습을 완벽하게 숨겼다.

‘그래서 나머지 조정대신들이라도 완벽하게 내 휘하에 종속시켜둔 후 차근차근 접근해서 혈고에 감염시키려고 했던 것인데…….’

솔직히 용무린만 나타나지 않았어도 슬슬 그런 시도를 할 계획이었다. 한데, 용무린이 황룡패주의 신분으로 나타남으로 인해 모든 일정이 꼬였다.

‘아냐. 아직은 괜찮아.’

상관초웅은 약해지려는 마음을 애써 북돋았다.

겨우 냉정이 되돌아왔다. 머리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칼날 같이 상황을 직시하기 시작했다.

‘황제가 내 손아귀에 있어. 놈들도 함부로 움직일 수는 없을 거야.’

진성왕에게 금서철권을 증명하는 황룡패가 하사된 것은 오로지 황제에 대한 충성을 전제로 한 것, 함부로 군사를 움직였다가는 금서철권의 명예도 날아가고 역적의 오명을 뒤집어 쓸 것이다.

‘양문광 역시 마찬가지, 도지휘사사의 병력이 움직이는 것은 경고에 불과해. 더는 함부로 움직이지 말라는 무언의 표현, 이를 테면 무력시위겠지.’

자신이 취해야 할 방향이 또렷이 그려졌다.

‘도지휘사사와 왕부장사사 그리고 왕부호위지휘사사까지 한꺼번에 움직이기 시작했으니 일단 그들의 눈에 거슬리는 움직임만 없으면 되겠군.’

자금성 내부를 호위하는 황제 직속 근위병과 금의위 그리고 자금성 내, 외부까지 통괄하는 경위지휘사사의 움직임만 자제하면 될 듯했다.

‘그 사이 나는 그 짜증나는 애송이를 처리하는 거야.’

황룡패주라는 감투까지 쓰고 나타난 가문의 숙적이자 골칫덩어리인 용무린. 어쨌거나 그놈만 제거하면 모든 우환은 사라지는 것이다.

‘그래. 그걸로 상황 종료야.’

죽은 자는 말이 없는 법!

용무린을 죽인 후 황룡패주의 등장 자체를 참칭한 역모의 주제자로 돌릴 생각이다.

‘그런 후 비룡문까지 싸잡아 멸문 시켜버리는 것이지.’

용무린을 제거한 후 황룡패를 빼앗는다면 진성왕도 명분이 서질 않는다. 아직 황제는 살아 있고 자신의 손아귀에 있으니 더 이상 군사를 움직였다가는 역모라는 올가미에 걸릴 테니까.

‘총병관인 양문광도 마찬가지! 황제가 내 손아귀에 있는 한 그 이상의 움직임은 곧바로 역모라 불러도 무방할 터, 협상장에 끌어낸 후 혈고를 쓰면 끝이야.’

그렇게까지 생각하니 속이 홀가분해졌다.

용무린을 제거하고 나면 훨씬 더 날아갈 것 같으리라.

‘그렇게 만들기 위해서라도 어서 움직이자.’

생각을 모두 정리한 상관초웅의 입에서 추상같은 명령이 쏟아졌다.

“그곳을 에워싸고 있는 황제 직속 근위병과 금의위 그리고 경위지휘사사의 병사들을 모두 뒤로 물려라.”

“모두 말씀이옵니까?”

“그래, 모두.”

“충!”

이부 좌시랑이 고개를 깊이 숙여 보인 후 뒷걸음질을 쳐 물러났다.

“어차피 놈은 혼자야.”

완벽한 올가미를 만들기 위해 그 많은 병력들을 필요로 했었던 것이지 힘이 모자라거나 약해서 불러 모았던 세력은 아니었다.

“가자.”

상관초웅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경위지휘사사 본영을 향해 움직였다. 그곳에 운룡장주와 운적풍이 있기 때문이었다.

“운룡장주. 흐흐흐. 아들과 함께 나를 좀 도와줘야겠어.”

상관초웅의 입가에 섬뜩한 미소가 걸렸다.

***

다시 하루가 지났다.

태양이 중천에 떠오를 무렵, 쉼 없이 말을 달렸던 양문광과 그의 아들 양경홍은 어림친위군영 지하에서 용무린과 얼굴을 맞댈 수 있었다.

어림친위군 제독 관일영과 병부 상서 진후상이 가져온 명부를 들여다보고 있던 용무린은 반갑게 두 사람을 맞이했다. 두 사람의 이름 역시 명부에서 아군으로 분류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진짜배기 무인이다.’

용무린은 두 사람을 일별하는 순간 그 사실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허허롭게 보이지만 묵직하게 일렁이는 저력이 피부로 느껴졌던 거다.

‘자세나 감춰진 기세 모두가 칼날 같구나.’

연공실 따위에서 얻을 수 있는 성취가 아니었다.

전장에서 수도 없이 창을 휘두르고 살아남은 후에야 비로소 얻은 경지일 것이다.

‘언제 한 번 겨뤄보고 싶은걸?’

한 사람의 무인으로서 정말이지 호승심이 돌았다.

양문광은 성정도 정말 대쪽 같았다.

“황룡패를 직접 보고 싶소이다.”

다른 사람들 같았으면 황룡패주라는 지위 앞에 대뜸 오체투지부터 했을 테지만 눈 한 번 깜박하지 않았다. 정녕 용무린이 진성왕과 한 배를 탄 황룡패주가 아니라면 다시 되돌아갈 기세였다.

“……!”

“……!”

장손이라 밝혔던 양경홍과 그 뒤에 늘어서 있던 양가장의 세 장로 역시 마찬가지, 용무린이 진성왕의 대리자인 황룡패주가 아니라면 언제든 출수할 눈빛이었다.

“얼마든지!”

용무린은 품속에서 황룡패를 꺼내 들었다.

하늘로 날아오르는 황룡 형상 양 옆으로 각인된 금서 친림이라는 글귀를 확인한 후에야 비로소 양문광과 양경홍이 무릎을 꺾었다. 큰 소리로 군례를 올렸다.

“황룡패주를 배알하오!”

“황룡패주를 배알하오!”

그 뒤에 늘어서 있던 세 장로들 역시 동시에 군례를 취했다. 큰 소리로 외쳤다.

“어서 일어들 나세요. 이 패, 못된 놈들을 몰아낼 때까지만 제가 빌려 쓰는 거예요. 아시잖아요. 원래 이 패의 주인은 진성왕야라는 거…….”

다른 사람들을 대할 때와는 달리 용무린의 입에서는 대뜸 존대어가 튀어 나왔다. 벌떡 일어나 앞으로 다가갔다. 깊이 부복하고 군례를 올리는 양문광의 손을 잡아 일으켰다.

한 사람의 무인으로서 순수한 노력으로 지고의 경지에 오른 무인에 대한 예의인 것이었다.

‘어쩐지 화운장로님이나 일각대사님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라 그냥 막 대하기가 좀 그렇단 말이지.’

그것이 솔직한 심정이었다.

간만에 보는 제대로 된 무인이자 머리에 허연 서리가 앉은 분에게까지 본디 자신의 것도 아닌 황룡패주로서의 권위를 지킨다거나 대접을 받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런 용무린의 마음이 느껴졌던 것일까?

씨익.

양문광이 활짝 웃으며 일어섰다.

군례를 대신해 정중히 포권을 취해 보였다.

“어떤 분께서 황룡패주의 새로운 주인이 되셨는지 궁금했었는데, 직접 뵈니 마음이 놓입니다.”

말과 함께 양문광이 빙그레 웃었다. 그 역시 용무린이 그랬던 것처럼 용무린 안에 깊이 감추어진 저력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

아직까지 부복하고 있었지만 그 마음만은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는지 양경홍 역시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양 총병관께서 오시는 줄 알았으면 집무실에서 기다렸을 것을, 이런 곳에서 인사를 나누게 되었네요.”

“평생 전장을 돌아다녔던 몸입니다. 괘념치 마십시오.”

말 한마디 한마디가 든든했다.

“미처 보고도 못 받았는데……. 오문이 아닌 다른 곳으로 들어오셨나 봐요?”

양문광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웃으며 답했다.

“역도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 시구문을 통과했습니다. 떠나오며 무력시위를 조금 해놓았더니 생각대로 병사들을 뒤로 많이 물렸더군요. 그래서 몰래 들어오기 쉬웠습니다.”

“세상에, 시구문을 통과하셨다고요?”

용무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진심으로 놀랐다.

시구문이란 자금성에서 환관이나 궁인 등이 죽으면 통과하는 쪽문으로 지체 높은 총병관이 지날 곳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황제폐하의 옥체를 보위하는 일입니다. 시구문을 통과하는 일 따위 아무것도 아니지요.”

정녕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양문광의 얼굴은 편안하기만 했다.

‘하여간 대대로 충신이라 추앙받는 무적 장군 양업의 후손답구나.’

용무린의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자자, 모두 일어들 나죠.”

계속되는 용무린의 채근에 양경홍과 세 장로가 일어섰다.

빙그레 웃으며 용무린을 바라보았다. 그때 양문광의 시선이 용무린의 등 뒤로 향했다. 호유용이 제압되어 축 늘어져 있었다.

“저놈입니까? 역적의 수뇌가?”

“쟤요? 아뇨?! 잔챙이에요. 진짜 머리는 따로 있지요. 상관초웅이라고…….”

그렇게 자금성을 통째 집어 삼키려는 역적의 수괴에 대한 정보를 입에 담을 때였다.

“급보입니다.”

밖에서 화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라!”

용무린의 허락이 떨어지자 낯익은 어림친위군의 별장이 들어와 부복했다. 입을 열었다.

“지금 자금성 전역에 황제폐하의 교지가 내려졌습니다. 초파일인 오늘 술시 초 곤녕궁 북쪽의 어화원에서 황룡패주와의 친견이 있을 터이니 불측한 무리들이 난입하지 못하도록 경계에 유념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곤녕궁 북쪽 어화원? 술시 초?”

그곳일 줄 알았다는 듯 용무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다. 물러가라.”

“충!”

별장이 물러나자마자 곁에 있던 양문광이 고개를 갸웃했다. 우려 섞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뭔가 이상합니다. 황상께옵서 친견을 어찌 삼대전인 태화, 중화, 보화전이 아닌 내정 북쪽의 어화원에서 한단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패주시여. 황제폐하께옵선 이미 역도들에게 볼모로 잡혀 혼수상태에 빠져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양경홍마저 우려의 뜻을 전했다.

그 뒤에 늘어서 있던 양가장의 세 장로들 역시 같은 의견이었던지 불가함을 피력했다.

“어화원은 암수들이 몸을 숨기기가 좋은 곳입니다.”

“그러합니다. 필시 흉한 내심을 숨기고 있을 것입니다.”

“와병을 핑계로 장소를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것도 좋은 방법일 듯합니다.”

모두 용무린을 위해서 하는 말이었다.

그걸 잘 알지만 용무린은 고개를 가만히 흔들었다. 빙그레 웃으며 입을 열었다.

“가야만 해요.”

“패주!”

설득해 볼 요량으로 양문광이 입을 열었지만 뒤이은 용무린의 말에 곧 생각을 바꿔야만 했다.

“그곳에 일만 번째 방으로 가는 출입구가 있어요. 그 안에 누가 있는지 아시죠?”

“……!”

“술시 초 어화원. 우리가 비로소 황제폐하를 구출하는 시간과 장소인 거예요.”

반짝.

양문광의 눈에서 번갯불과도 같은 광채가 뿜어졌다.

“맡겨만 주십시오, 패주. 이 한 목숨 버리는 한이 있다 하더라도 기어코 황상의 옥체를 보위토록 하겠소이다.”

“이 한 목숨 바치겠나이다, 패주시여.”

“기꺼이 이 목숨을…….”

“충!”

양문광에 이어 양경홍과 세 장로가 형형한 눈을 빛내며 외쳤다.

“죽은 후에는 어떻게 황제폐하를 지키시려고요?”

“예에? 그, 그것은…….”

생각지도 못한 반문에 양문광이 말을 더듬었다.

‘하여간 단순하다니까?’

양가장은 무림세가와 군부세력의 양면성을 동시에 지녔다고 알려져 있었지만 오늘 보니 군부세력의 냄새가 더욱 짙었다. 황제에 대한 충성심 앞에 목숨 따위 아무것도 아닌 듯 굴었다.

“황제폐하의 목숨도 무사히 구하고 우리도 살아 돌아오는 방향으로 해야죠.”

그것이야말로 꿩 먹고 알 먹는 셈이다.

“그거야 뭐…….”

양문광이 얼떨떨한 표정으로 말꼬리를 늘였다.

그런 양문광을 보며 풀썩 웃어 보인 용무린은 품속에서 피독제왕주를 꺼내들었다. 뒤에 시립해 있던 좌장사 이벽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황상의 옥체를 보위하지 못한다면 이따위 피독제왕주가 무슨 소용이 있나? 라고 하셨다고요?”

“그러합니다, 패주.”

씨익.

“그렇다면!”

용무린은 대뜸 피독제왕주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불사신기를 집중했다.

후우웅. 파스스슷.

피독제왕주는 오래지 않아 가루가 되어 버렸다.

“허억! 화, 황룡패주시여. 그, 그 귀물은…….”

좌장사 이벽이 소스라치게 놀라 고함을 질렀다.

용무린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가벼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황상의 옥체도 보위하고 우리도 살기 위해서 그러는 거예요. 막말로 이거 차고 있는 나 혼자만 살아서 뭐해요? 좌장사는 그렇게 죽고 싶어요?”

당연히 아니다.

“…….”

좌장사 이벽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우우웅. 웅웅웅.

용무린은 가루가 된 피독제왕주의 가루를 움켜쥔 채 계속해서 불사신기를 집중했다. 터질 듯 움켜쥔 손아귀 사이 신비로운 빛이 일렁였다.

“후우우.”

일다경 가까이 불사신기를 집중시켰던 용무린의 주먹이 펼쳐졌다.

반짝. 반짝.

오리 알만 하던 피독제왕주는 피독제왕사가 되었다. 그것도 불사신기를 가득 머금은…….

‘저 정도라면 독뿐만이 아니라 마공 앞에서도 어느 정도 보호는 될 수 있겠지.’

“받아요.”

“예? 아, 예.”

좌장사 이벽이 뭔가에 홀린 듯 다가와 앞섶을 펼쳤다.

“어화원 내부로 진입할 고수들에게만 골고루 나누어 주도록 하세요. 작은 향낭에 나눠 담으면 될 거예요.”

“패, 패주시여.”

좌장사 이벽이 감격한 듯 목소리를 흐렸다.

피식.

“남의 것으로 인심 쓰는데 제게 감격할 것 없어요. 어서 나누기나 하세요.”

“명!”

좌장사 이벽이 뒤로 물러났다. 저만큼 있던 육만천이 잽싸게 밖으로 뛰었다. 용무린이 말했던 것처럼 향낭 따위를 가져올 생각인 것이다.

“호법을 좀 부탁해요.”

“염려하지 마십시오, 패주. 신의 주검을 넘지 않는 한 감히 패주께 해를 끼칠 순 없을 것이외다.”

무엇 때문인지 용무린을 대하는 양문광의 목소리가 한층 더 격해졌다.

‘조금만 기다려라, 상관초웅. 내가 간다.’

용무린의 눈이 지그시 감겼다. 불사신기를 끌어 올렸다.

휘이이이.

오래지 않아 용무린을 향해 대자연의 기운이 바람의 형태로 휘몰려들기 시작했다.

술시가 다가오자 전투 준비를 완료한 용무린은 어림친위군영을 벗어났다.

양문광과 양경홍 그리고 양가장의 세 장로와 관일영을 비롯한 어림친위군 일백여 명이 용무린의 뒤를 따랐다.

기세 때문인지 주변이 적막했다. 곤녕궁을 휘돌아 어화원이 가까워지고 있음에도 그 흔한 새들의 지저귐 소리조차 들려오지 않았다.

피식.

“한산하네. 미리 주변 정리 좀 했나?”

어화원으로 이동하던 용무린이 풀썩 웃었다.

내정에 속한 곳으로 향하니 본디 조용하긴 할 테지만 이 정도까지는 아닐 터였다. 환관과 나인과 궁녀들이 바삐 돌아다녀야 할 테지만 지금은 돌림병이라도 돈 듯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하하하. 마음껏 싸우기에는 되레 좋지 않겠습니까?”

양문광이 따라 웃으며 말했다.

“역시 제 마음을 다 읽으시네요. 하하하.”

용무린이 호탕하게 웃을 때였다.

표독한 인상의 고위 환관을 필두로 한 떼의 환관 무리가 용무린 일행 앞으로 몰려나왔다. 고개를 깊이 숙이며 목소리를 높였다.

“황룡패주를 뵈오이다!”

“황룡패주를 뵈오이다!”

용무린은 슬쩍 뒤를 향해 물었다.

“얘들 뭐야?”

“상선태감과 내관태감입니다, 패주.”

어림친위 도독 관일영으로부터 똑소리 나는 답변이 흘러 나왔다.

“적색으로 분류된 녀석들이네?”

“그러합니다.”

“……이, 이쪽입니다.”

“이쪽으로 오소서…….”

적색 분류 운운하며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보이자 상선태감과 내관태감이 재빨리 옆으로 비켜섰다. 길을 텄다. 친견장소까지 안내를 하려는 듯했다.

“필요 없어.”

“예에?”

“궁중의 법도가…….”

상선태감과 내관태감이 흰소리를 더 하기 전 용무린이 말을 잘랐다. 뒤를 향해 외쳤다.

“뭐해? 저놈들 다 때려잡아.”

“충!”

간결한 대답과 함께 관일영이 외쳤다.

“쳐라!”

“이놈들!”

“차앗!”

기다렸다는 듯 어림친위군이 달려들었다. 상선태감과 내관태감 그리고 나머지 환관들까지 직위 여하를 막론하고 짓밟았다.

퍼억. 빠악. 퍼퍼퍽.

“이, 이런! 무도한……. 커헉.”

“친견을 앞두고 어찌……. 우와악!”

상선태감과 내관태감이 항변을 하려다 턱이 박살났다. 눈을 뒤집어 까고 혼절했다. 그런 두 태감을 향해 용무린이 이죽거렸다.

“전투가 이미 시작됐는데 무슨 개 풀 뜯어 먹는 소릴 하고 있어 자식들이…….”

용무린은 뒤가 껄끄럽지 않도록 착실히 마혈을 제압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양문광도 나섰다.

그렇게 나아간 걸음, 어화원의 아름다운 정경이 코앞으로 들어왔다. 주변을 한 번 슥 훑어본 용무린이 풀썩 웃어버렸다.

“자식들, 쥐도 아닌데 많이도 숨어 있네.”

“아무래도 뒤를 노릴 생각이었던 모양입니다, 패주.”

“후훗. 꿈도 야무지네요.”

“하하하. 그러게 말입니다.”

용무린은 양문광을 향해 불쑥 입을 열었다.

“속도를 내려면 아무래도 창이 더 좋겠지요?”

“물론입니다.”

무슨 뜻인지 바로 알아차린 양문광이 양경홍과 세 장로를 한 번 힐끗 돌아보았다. 그 시선의 의미를 잘 아는 양경홍과 세 장로가 행동을 개시했다.

후욱. 휘슷. 휘리릭.

거의 동시에 주변으로 퍼졌다.

흠안전을 중심으로 배치된 각종 전각과 정자와 누각들 그리고 울창한 나무와 괴석들 사이를 누볐다.

“이놈! 예서 무얼 하느냐?”

쌔액.

“쥐새끼 같은 놈이로고!”

피이이잇.

어둑한 그늘에 몸을 숨기고 있던 동창의 고수들을 향해 양가창법을 펼쳤다.

“들켰다. 쳐라.”

“이야아-하!”

“차아앗!”

들불을 만난 듯 이곳저곳에서 동창의 고수들이 튀어 나왔다. 도와 검을 휘둘렀다. 절정의 수위에 다다른 내공과 무공을 뽐냈다.

하지만,

채챙. 퍼억.

“크아악.”

쉬카캉. 푸우욱.

“커헉!”

평생 전장에서 살아오며 숱한 실전 속에서 발전해온 양가창법 앞에 암투나 벌이던 동창의 고수들은 맥을 추지 못했다. 추풍낙엽처럼 쓰러졌다.

“뭣들 하느냐? 오늘 끝을 본다.”

“뒤란 없다. 모두 나서라.”

“이야아-아!”

“하아압!”

혹시나 하는 마음에 숨죽이고 있던 동창의 고수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양경홍과 세 장로를 에워쌌다. 공격을 퍼부었다.

“저런 멍청한 놈들. 우린 그냥 꿔다 놓은 보릿자루인 줄 아는가 보지?”

한 차례 신랄하게 비웃어 준 용무린의 시선이 관일영에게로 향했다.

“가자! 어림친위군의 위력을 보여라!”

“충!”

관일영과 어림친위군 백여 명이 파도가 되어 밀려갔다.

쉬각. 카캉. 패애액.

“크악.”

카앙. 카카캉. 피잇.

“커헉!”

동창 소속 고수들의 진영이 빠른 속도로 허물어졌다.

‘내가 나섰으면 벌써 끝났을 테지만, 이럴 때는 골고루 공을 세울 기회를 주는 게 맞아.’

지루했지만 용무린은 용케도 참았다.

***

황궁보고 안에서도 가장 깊은 곳에 위치한 공간.

“시작되었습니다, 주군.”

버언쩍.

“시작되었다고?”

병필수당태감의 보고에 상관초웅의 눈이 서슬파란 빛을 뿜었다.

“그러합니다, 주군. 한데, 황룡패주와 어림친위군만 온 것이 아니라 합니다. 양업의 후손인 양문광과 그의 장손 그리고 세 가신까지 함께 왔다고 합니다.”

“뭐라? 총병관인 양문광과 유격장군 그리고 양가장의 세 장로 말이더냐?”

“예, 주군. 예정대로 뒤를 차단한 채 옥죄어 들지는 못할 듯합니다. 어화원 주변에 숨겨두었던 아이들이 무더기로 쓸려 나가고 있습니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상관초웅은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예상을 하지 못했던 전력이었지만 그들을 계산에 넣는다고 해도 아직 이쪽의 전력과 준비가 월등했던 것이다.

“상관없다. 어떻게든 안으로 끌어들이기만 해라.”

옥죄지는 못해도 가둘 수는 있다.

이 안에 마련된 것은 사람이라면 버틸 수 없는 것들, 능히 짓밟아 줄 수 있으리라.

“충!”

병필수당태감이 나간 후 상관초웅은 뒤를 돌아보았다.

황금빛 호화로운 침대에 이립을 갓 넘겨 보이는 청년이 핼쑥한 얼굴로 누워 있었다. 그 청년이 바로 당대 명제국의 황제였다.

“크흐흐흣. 네 목줄을 쥐고 있을 때 놈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정말 궁금하구나.”

이내 웃음기를 거둔 상관초웅의 시선이 뒤로 향했다.

약왕보고라 쓰인 편액이 보였다.

그 안에서 진한 약 향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

한 식경이 채 지나기 전에 동창 소속 고수들은 모두 거꾸러졌다. 바닥을 기었다.

“끄으으.”

“허으…….”

여기저기에서 살아남은 자들의 신음소리가 흘러나왔지만 대뜸 단전을 파훼한 후 내버려뒀다. 굳이 챙길 필요도 없었지만 그냥 놔둬도 동창 소속 환관들이 알아서 다 챙겨갈 것이다.

용무린은 어화원 중심에 자리한 흠안전으로 향했다.

천일문을 지나 쌍용이 각인된 답도를 오르니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안이 모두 드러나 보였다.

“혀, 현천상제상이 어찌…….”

이곳을 익히 잘 알고 있는 어림친위제독 관일영이 말을 더듬었다. 흠안전은 길일에 황제가 제사를 모시는 사당으로 정중앙에 북방신인 현천상제상과 제단이 있어야 했는데 씻은 듯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흠, 뭐가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저곳으로 들어가면 되는 것이로군.”

용무린은 현천상제상과 제단이 있었던 곳을 대신해 나타난 지하 계단을 향해 성큼성큼 걸었다.

“황룡패주시여. 그곳이 어딘지도 모르고 진입하는 것은 위험할지도 모…….”

“괜찮아.”

관일영의 말을 용무린이 툭 잘랐다. 그런 후 짧게 말을 이었다.

“이곳이 바로 황궁보고로 가는 출입구야.”

“예에?”

“화, 황궁보고 말씀이십니까?”

양문광과 관일영이 동시에 기성을 발했다.

그들로서도 황궁보고의 입구가 이곳이라는 것은 금시초문이었던 것이다.

“그래. 이 안에 황제폐하께서 혼수상태에 빠져 우리 도움만 기다리고 계시지.”

용무린은 슬쩍 고개를 돌려 흠안전 출입구 양쪽에 늘어선 해치상을 보았다. 해치상의 눈이 미세하게 들어가 있는 것이 똑똑히 보였다.

‘저것이 출입문을 여는 장치. 반대쪽 해치상의 눈을 모두 누르면 감쪽같이 복구되겠지?’

진성왕이 보내준 서신에 다 나와 있던 내용이었다.

“가자고.”

그 말을 끝으로 쑥 들어가 버리는 용무린.

더 이상의 설명 따윈 필요 없다는 듯 양문광을 시작으로 모두가 계단을 향해 발을 내디뎠다.

용무린의 눈앞에 상당한 크기의 지하공동이 나타났다.

어지간한 무림세가의 연무장쯤 되어 보이는 곳으로, 커다란 동경을 수십 개 연이어 배치하여 밖에서 들어온 햇빛으로 실내를 밝히고 있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흠, 이곳이 안전지대라는 것인가?’

횃불을 쭉 밝혀둔 중앙의 외길에 발을 디디는 순간부터 온갖 기관과 함정이 발동할 것이다.

‘그때부터가 진짜 시작인 셈이지.’

얼마나 지독한 곳인지 호기심이 일 때였다.

“패주. 제가 앞장을 서겠습니다.”

양경홍이 대뜸 앞으로 나섰다.

과연 본 전투에 앞서 일기토의 대결에 내세울 유격장군다운 패기였지만 용무린은 허락하지 않았다.

“함정이 있어. 내가 해결해야만 해.”

용무린은 진성왕이 전해준 시를 떠올리며 주변을 면밀하게 살폈다.

‘전칠좌상화취 화향폭류옥수…….’

반짝.

‘저건가?’

잠시 후 용무린의 눈에 무엇인가가 걸렸다.

바닥에 깔린 일곱 번째 청석의 왼쪽 벽 상단에 꽃 모양의 조각이 달려 있었던 것이다.

‘저걸 취하라? 누르라는 것인가? 아니면 당겨?’

그런 생각을 하며 발을 내딛는 순간이었다.

철컥. 크그긍.

용무린이 통로 일곱 번째 청석에 당도하는 순간 기관이 작동하는 듯 둔중한 소리가 들리더니 좁은 벽면 양쪽이 동시에 열렸다.

피쉬잇. 쏴아아아-!

왼쪽 벽에서는 타는 듯 매캐한 독연이 오른 쪽 벽면에서는 정체 모를 푸른 빛 액체가 쏟아졌다.

“우웃.”

스파앙. 쿡.

즉시 신법을 전개해 뒤로 물러나며 용무린은 꽃 모양의 조각에 지력을 날렸다.

철컥. 크그그긍.

활짝 열렸던 좌우 벽면이 다시 복귀되었다.

그런데…….

치이이. 치이이이이.

독연과 푸른 빛 액체가 뒤섞인 곳의 청석이 녹아들기 시작했다.

“젠장. 청석을 녹여 버리다니! 엄청난 액체네.”

용무린마저 흠칫 놀랄 정도의 함정이었다.

독연과 액체가 혼합이 되어야만 위력을 발휘하는 정체 모를 액체는 다행히 역한 냄새 자체로는 인체에 큰 해를 끼치지는 못했다. 직접 닿아야 하는 모양이었다.

“봤지? 다들 조심해.”

뒤를 향해 경고를 보낸 용무린은 다시 한 발 한 발 앞으로 나아갔다.

철컥. 피시시시시-잇.

두 번째는 단순한 독 함정이었다.

물론 지독한 독이었다. 연무에 살짝 스쳤을 뿐인데도 옷이 누렇게 삭아 버릴 만큼 지독한 독이었지만 한 사람도 죽은 이가 없었다.

스파앙. 쿡. 콰악.

“제길. 이번에는 조금 늦었네.”

파훼법을 알고 있었음에도 늦은 이유는 기관이 파훼할 수 있는 기관이 낡고 찌든 탓이다.

‘조금 더 내력을 추가해야겠구나.’

이미 흘러나왔던 독이 있었음에도 모두가 멀쩡할 수 있었던 것은 용무린이 가루로 만들어 나누어 준 피독제왕주 가루 덕이었다.

뭉클. 뭉클.

독은 용무린을 스쳐 양문광과 어림친위군에까지 흘러갔지만 신기하게도 사람들을 빙글 휘 돌았다. 피독제왕주 가루가 지닌 힘이었다.

독은 오래지 않아 환기구를 통해 깨끗이 사라졌다.

그래도 사람들은 연속된 독 함정에 몸을 떨었다.

‘후우, 젠장. 이게 없었으면 죽었네.’

‘감사합니다, 패주. 그 귀물을 아낌없이 나누어주신 덕에 제가 살았습니다.’

‘절대로 이 은혜를 잊지 않겠습니다, 패주.’

모두가 충성심 가득한 시선으로 바라봤지만 용무린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다른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기본적으로 바닥을 밟거나 벽을 건드려야만 기관이 작동을 하는군그래.’

두어 번 함정을 겪어 보니 대충 알 듯했다.

‘그렇다면 답은 의외로 간단한데?’

파훼를 하는 방법은 이미 다 머릿속에 있다.

지금까지 경험으로 보아 그 정보는 모두 사실로 증명이 되었다. 굳이 이렇듯 천천히 확인을 하며 시간을 끌 필요가 없는 거다.

“지금부터 속도를 높이겠다.”

“예? 위험하지 않으시겠습니까, 패주?”

양문광의 목소리에 우려가 섞였다.

씨익.

용무린의 얼굴에 개구쟁이와 같은 미소가 번졌다.

“괜찮으니 일각 후에 천천히 따라 오세요. 기관이 모두 파괴된 것을 확인한 후 진입하는 것 잊지 마시고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용무린은 몸을 던졌다.

후우우욱.

용무린은 한 줄기 바람을 이끌며 함정 속으로 빨려들 듯 사라졌다. 그리고 잠시 후,

철컥. 크그긍.

“하앗!”

쿠왕. 콰아앙. 쿠콰콰쾅.

기관과 함정이 작동하기가 무섭게 우렁찬 기합소리가 터져 나왔다. 기관과 함정 부서지는 소리가 통로 전체로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휘이유. 설마, 설마 했는데……. 정말 무지막지한 분이시로구나.”

양문광이 혀를 내둘렀다.

앞서 겪었던 두 번의 경험을 통해 어떻게 해야 기관을 돌파할 수 있는 것인지 그 역시 감을 잡긴 했지만 저렇듯 거침없이 돌파할 수 있을지의 여부는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통과야 할 수 있었겠지만 많이 다쳤겠지.’

기관과 함정의 지독함으로 보아 어쩌면 치명상을 입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제 겨우 린아 또래로 보이는데 저런 강대한 무력을 지닌 사내는 소자도 처음 봅니다, 아버지.”

“그래, 이 아비도 하린이가 떠올랐느니라. 참 잘 어울리는 한 쌍이겠다.”

“예에?”

“……으응?”

동문서답에 유격장군 양경홍은 눈을 휘둥그레 떴고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양문광은 요란하게 헛기침을 했다. 급히 말을 얼버무렸다.

“커, 커허험험. 일각이 다 되었다. 가자.”

타다닷.

경쾌한 신법을 펼쳐 용무린의 뒤를 따랐다.

‘잘 어울리는 한 쌍이라…….’

양문광의 뒤를 따라 신법을 펼치는 양경홍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번졌다. 금지옥엽과도 같은 여식의 곁에 선 한 사내의 얼굴이 그려졌기 때문이었다.

쿠르릉. 콰쾅. 쿠그그긍.

육중한 그 무엇인가가 끊임없이 파괴되는 소음과 진동이 황궁보고 끝까지 번졌다.

“뭐야? 대체 뭐가 어떻게 되어가는 거야?”

알 수 없는 불안감에 상관초웅은 짜증이 확 치솟았다.

콰콰쾅! 쿠르르릉. 푸스스스.

폭음과 진동음이 점점 더 가까워졌다. 자신이 자리한 공간의 천정에서 돌가루마저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그만큼 적이 가까이 다가왔다는 뜻이리라.

“크, 큰일 났습니다, 주군.”

병필수당태감이 헐레벌떡 달려와 부복하며 외쳤다.

“적이 파죽지세로 모든 기관과 함정을 돌파하고 있나이다. 독과 화염도 쇠뇌와 철전도 그 무엇도 통하지 않습니다. 깡그리 때려 부수며 일직선으로 달려오고 있습니다.”

“……!”

상관초웅의 입이 쩍 벌어졌다.

병필수당태감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어, 어떻게 그럴 수가?’

황궁보고에 투입된 독만 해도 끔찍한 수준의 것들이었다.

혼합되면 청석마저 녹여버리는 독액에 그 다음은 한 호흡만 들이켜도 폐가 녹아버리는 부식산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 다음에도 피부에 닿으면 불이 붙어 버리는 화혈독까지 아낌없이 쏟아 부었다.

‘그런데 어떻게 통과할 수가 있어, 어떻게?’

한 번이라면 모르겠지만 독 함정만 모두 십여 개소, 칠보절명산과 같은 극독이 발라져 스치기만 해도 죽음을 면치 못하는 쇠뇌와 철전과 투창 함정이 또 십여 개에 나머지 함정과 기관을 모두 합하면 무려 오십여 개에 달하는 죽음의 덫의 연속이었다.

‘인해전술로 돌파한다고 하더라도 최소 오천의 병력은 있어야 겨우 넘어설 수 있을 것으로 계산했거늘!’

그런 함정과 기관진식을 한 인간의 능력으로 모두 다 격파하며 뚫어내다니!

“어찌합니까, 주군?”

계속되는 질문에 상관초웅은 신경질적으로 외쳤다.

“어찌하긴 뭘 어찌해? 전면전이다. 소보에게 준비된 마령인들을 깡그리 투입하라고 전해.”

삼고의 하나인 소보의 직위는 자신의 아우인 상관종명에게 맡겼다.

가장 중요한 전력이랄 수 있는 완성된 마령인들의 제어와 관리를 위해서는 혈육 이외에 따로 맡길 사람이 없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상관초웅의 명령이 계속해서 떨어졌다.

“그 뒤에는 어제 겨우 이동 설치를 마친 비장의 무기를 가동한다. 깡그리 통로에 집중해. 놈들이 몰려들면 지체 없이 쏴. 걸레로 만들어 버리란 말이야.”

“충!”

병필수당태감이 대답과 함께 물러갔다.

미완성이 아닌 완성된 마령인 삼백 명과 비장의 무기가 준비되어 있음에도 상관초웅은 불안했다. 어쩐지 용무린이란 애송이가 그것들마저 뛰어 넘어 자신 앞에 나타날 것만 같았다.

‘아무래도 준비를 해야 하겠구나.’

결국 자신까지 나서야 함을 직감한 상관초웅은 죽은 듯 잠들어 있는 황제의 얼굴을 한 번 내려다본 후 약왕보고를 향해 사라졌다.

“오옴 도로도로 오움 타아!”

“오옴 다라니야라 마라니 오움 타아!”

약왕보고 안에서 흘러나오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주문 소리가 시간이 갈수록 높아졌다. 그에 따라 약 향도 점점 더 짙어졌다.

***

막다른 공간에 도착한 용무린은 조용히 호흡을 골랐다.

“쓰으읍. 후우우. 쓰으으읍. 후우우우-우.”

상당한 내공의 소모가 있었지만 조용히 심호흡 몇 번 하는 것으로 상당부분의 내공이 회복되는 것이 느껴졌다. 동공으로서의 효능과 불사신기 특유의 공능으로 불사신기가 점점 완성에 다다르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휘이이이. 후우욱.

용무린의 호흡을 따라 주변의 공기가 통째 일렁였다.

그 거대한 존재감이라니!

단전을 향해 밀물처럼 쑥 빨려 들어왔다 불사신기만 남긴 후 탁기를 데리고 빠져나가는 모습은 경이로울 정도였다.

움찔!

저만큼 뒤 통로 끝에 고개를 내밀었던 양문광과 양경홍이 화들짝 놀라 걸음을 멈추었다. 부릅뜬 눈으로 용무린의 존재감에 숨을 죽였다.

‘세상에, 혼자 그 많은 기관과 함정을 때려 부쉈으면서도 저렇게 멀쩡할 수 있다니!’

‘독연과 화염에 옷가지 조금 녹아들고 눌러 붙은 것 말고는 피 한 방울도 흘리지 않았잖아?’

‘황룡패주를 중심으로 일렁이는 저 거대한 기운을 봐. 하늘과 땅이 통째 몰려드는 듯해.’

양가장의 세 장로 역시 경이로운 시선으로 용무린을 바라볼 뿐이었다.

물론 남들이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든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용무린은 선 자세로 취하던 조식을 마무리했다. 다른 생각으로 넘어갔다.

‘기관과 함정에 대한 설명이 있는 곳은 방금 돌파한 화염과 독을 바른 쇠뇌폭우가 끝이었는데, 이젠 뭐가 더 있을까?’

지금부터는 미지의 공간으로 발을 디뎌야 한다.

신경이 곤두서지 않을 수가 없다.

바로 그때!

타닷. 타다닷. 휘릭. 휘릭. 휘리릭.

경쾌한 발걸음 소리와 함께 검은 일색의 복면인들이 쏟아져 나왔다.

반짝.

용무린의 눈에 반가운 빛이 일렁였다.

“왔구나!”

혹시나 저들이 나타나지 않을까 기대했었다.

그런데 역시나 나타났다. 짜증이 나거나 화가 나는 대신 반가웠다. 고마웠다.

필릴리. 필리리리리-잇.

기괴한 운율의 피리 소리가 울려 나오기 시작했다.

뭉클. 뭉클.

“크르르.”

“크아아-아.”

휘슷. 화악.

피리 소리가 들리자마자 복면인들이 반응을 보였다. 상당한 마기를 쏟아내며 이를 드러냈다. 공격을 개시했다.

‘어라? 예전보다 더 세졌는데?’

두 번이나 겪어 본 놈들이라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과거보다 훨씬 더 강해졌다.

“위험합니다, 패주.”

“물럿거라, 마물들아!”

휘릭. 스팡.

양문광과 양경홍이 화들짝 놀라 고함을 쳤다. 용무린의 앞뒤를 가로막고 섰다. 창을 움켜쥐었다.

바로 그 순간,

“나머지는 모두 뒤로 물러섯!”

재빨리 외친 후 용무린은 소검비연을 꺼내들었다. 불사신기를 끌어 올린 후 손가락에 실었다.

따앙. 따라랑. 따당. 따리라랑.

소검비연이 마치 편종이라도 된 듯 경쾌한 운율을 쏟아냈다. 그 소리에 실린 불사신기가 공동을 삽시간에 뒤덮었다. 동굴에서 목소리가 울리고 증폭되듯 청석과 좁은 통로를 따라 공명이 되고 증폭이 되어 퍼져 나갔다.

우웅. 웅웅웅.

불사신기를 머금은 경쾌한 운율에 황궁보고 전체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흠칫. 퍼덕.

흉흉한 기세로 밀려들던 마령인들의 몸이 거짓말처럼 굳었다. 벼락이라도 맞은 듯 몸을 떨더니 파들파들 떨었다. 눈을 까뒤집었다.

“크아아!”

“끄아아아!”

섬뜩한 비명을 지르며 괴로워했다. 바닥을 뒹굴었다.

필릴리. 필릴리리리이-잇.

기분 나쁜 피리 소리가 더욱 날카로워졌다. 그에 실린 기분 나쁜 내공이 부쩍 강화되었다.

“아쭈?! 해보자 이거지?”

불사신기가 뭉텅 쏟아졌다. 소검비연에서 쏟아지는 불사신기의 공명음이 전보다 훨씬 더 높아졌다. 피리소리가 점차 잦아들었다.

따앙. 따라랑. 따라리랑. 따랑.

“크크큭. 자, 얌전해지자. 내 말 들어. 응?”

“크와악.”

“커으으…….”

놀랍게도 이지를 잃은 채 바닥을 나뒹굴고 있던 마령인들의 행동에 변화가 일었다. 몸부림이 누그러지는가 싶더니 놀랍게도 정말 얌전해졌다.

따아아앙. 따랑. 따아-앙.

소검비연의 탄주가 마무리로 접어들었다. 탄주에 실린 불사신기가 갈수록 높아졌다. 그 기세가 어찌나 강력한지 공동 전체가 덜덜 떨렸다. 곧이라도 무너져 내리려는 듯 천정에서 돌가루까지 떨어졌다.

바로 그 순간,

쩌어엉.

“크아아악.”

마령인들이 쏟아져 나왔던 통로 저 편에서 무엇인가가 박살나는 소리와 함께 처절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이내 조용해졌다.

그 소리와 비명이 신호라도 되는 것일까?

아니면 마령인들을 조종하던 누군가가 소검비연의 탄주에 당한 것일까?

척. 처처척.

마령인들이 칼날 같은 자세로 도열을 했다. 그대로 용무린의 명령만 기다렸다.

“이럴 수가!”

“저 흉폭하던 마인들이 얌전해졌어.”

“움직임을 멈췄어. 어떻게 된 거지?”

뒤따라 들어오던 관일영과 육만천을 비롯한 어림친위들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크크큭. 다 내 것으로 만들었다.”

용무린은 통쾌한 듯 웃음을 터뜨렸다.

아직도 기억 속에 남아 있던 몇몇 마교의 사이한 제령대법을 응용해 소검비연의 탄주로 마령인들을 혈적의 통제에서 빼앗아 버린 것이다.

“어떻게 된 것입니까 패주?”

“뭐 별 것 아니에요. 어떤 놈인지는 모르겠지만 제어권을 빼앗은 것뿐이에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하며 용무린은 통로를 나섰다.

과연 통로 끝에 비명소리의 주인이 덩어리 피를 토하고 죽어 있었다. 상관초웅의 아우 상관종명이었다. 상관초웅의 기대와는 동떨어진 어이없는 죽음이었다.

“쯧쯧쯧. 안 되겠으면 튈 것이지 왜 굳이 내공 싸움은 걸어가지고…….”

“……!”

뒤따라 왔던 양문광의 입이 쩍 벌어졌다.

“보자……. 혈적은 박살났고, 저 복면 쓴 놈들도 더 나올 것 같지 않으니 이번 공세는 이걸로 끝인가?”

“패주께서는 이런 놈들을 어찌 그리 잘 알고 계시는 것입니까?”

처음으로 겪어보는 양문광이 질문을 던졌다.

겉보기에는 이제 겨우 이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용무린이다. 양문광으로서는 마교의 사이한 대법까지 거침없이 부숴버리는 것으로도 모자라 빼앗기까지 하는 내력을 도무지 알 수 없었던 거다.

“어찌 알기는요? 두 번이나 겪어 봤으니 알죠.”

계속해서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하는 용무린을 보며 양문광과 양가장의 고수들은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허어, 겨우 두 번 겪어 본 것으로 이 정도면 몇 번만 더 겪어 봤다간 마교의 뿌리까지 다 뽑아 버리겠네.’

‘저게 대체 말이야 방구야? 사람의 능력으로 어떻게 저런 게 가능해?’

그러거나 말거나 용무린은 다시 심호흡을 했다.

일각도 채 되지 않는 짧은 시간 동안의 조식으로 소모된 불사신기를 상당 부분 채웠다.

“자, 그러면 또 가 볼까?”

따랑. 따다당. 따앙.

소검비연에서 경쾌한 음율이 흘러나왔다.

그러자 멀뚱멀뚱 도열해 있던 복면인들이 용무린보다 앞서 전진해나기 시작했다.

“혈고는 이곳에서 나가면 제거해 줄게. 일단 너희들 힘 좀 빌리자.”

지금부터는 진성왕의 전서에도 나와 있지 않은 곳이니 안전을 위해 그들을 앞세우는 것이었다.

휘릭. 타다닷.

문제없다는 듯 복면인들이 속도를 높였다.

“……!”

“……!”

양문광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의 얼굴에 기막힌 표정과 안도감이 함께 떠올랐다.

그렇게 통로 끝으로 향할 때였다.

쿠와앙. 콰아앙. 쿠콰콰콰-앙.

귀청이 찢어지는 듯한 굉음과 함께 거대한 충격파가 밀려왔다. 선두에서 내달리던 복면인들 오십여 명이 한꺼번에 찢어졌다. 허공으로 훌훌 날렸다.

“크흡!”

용무린마저 화들짝 놀라 불사신기를 불러 일으켜야만 했을 정도로 큰 폭발이었다.

티잉. 티티티티팅. 터어엉.

복면인들을 오십여 명이나 찢어내고도 모자라 용무린을 향해 날아들었던 무엇인가가 불사신기에 가로막혔다. 우박처럼 뒤로 튕겼다.

후두둑. 후두두둑.

비처럼 떨어져 내리는 육편조각과 혈우.

“뭐, 뭐야?”

용무린조차 놀라움을 금치 못할 때 양문관이 크게 부르짖었다.

“화포다!”

“바닥에 떨어진 탄환이 콩알만 한 것으로 보아 백자연주포입니다. 커다란 탄환도 보입니다. 벽력포일 것입니다.”

양경홍이 말을 받았다.

“화포?”

“맞습니다, 패주. 화포입니다. 군문에서 사용하는, 그것도 북원의 기마대를 마주한 곳에서만 사용하는 막강한 위력의 화포입니다.”

“하!”

용무린이 기가 막힌 표정을 지었다.

화포라니!

이런 곳에 화포가 설치되어 있으리라곤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다.

슬쩍.

“통로 끝에 넓은 공동이 있습니다. 거리는 이십여 장쯤 됩니다.”

슬쩍.

“화약을 지포로 충전하고 있습니다. 군영에서 사용하는 방식입니다. 아, 방금 화포 재정비가 끝났습니다.”

양경홍이 모서리에서 밖을 살핀 후 알려왔다.

“이런!”

양문광이 안타까워하며 발을 굴렀다. 자신의 실수를 책망했다.

“화포를 재장전하는 틈을 노렸어야 했거늘!”

“재장전하는 시간이 긴가요?”

용무린이 물었다.

“그렇습니다. 위력은 강하지만 재장전하는 시간이 상당하니 그 틈을 노렸어야 했습니다.”

“그렇군요.”

“저의 무능입니다, 패주. 생각지도 못했던 곳에서 화포가 등장하는 바람에…….”

양문광이 죄를 청했다. 용무린은 고개를 흔들었다. 풀썩 웃었다.

“답이 나왔는데요 뭐.”

용무린은 대뜸 소검비연을 꺼내 들었다. 복면인들을 돌아보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어떤 사연들을 가지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틀림없이 본의 아니게 잡혀 그런 처지가 되었겠지? 혈고를 풀어주고 싶었는데, 솔직히 그래봐야 역적의 편에 선 너희들의 죄가 이미 너무 크다.”

일이 모두 끝난 후 혈고를 없애준다고 해도 죽을 가능성이 더 컸다. 말했듯 이미 역적의 편에 서 있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럴 바에야 황제폐하를 구하는 일에 일조를 하고 죽는 편이 더 낫겠지.”

용무린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복면인들의 눈은 한결같이 멍했다.

따앙. 따라랑. 따라라랑.

소검비연이 경쾌한 음율을 쏟아냈다. 그 소리를 듣자마자 복면인들은 일제히 통로 밖으로 신형을 날렸다.

그리고…….

쿠와앙. 콰아앙. 쿠콰콰쾅.

기다렸다는 듯 화포가 차례차례 불을 뿜었다.

통로를 향해 정확히 조준된 포신에서 작은 쇠구슬 오백 개가 담긴 백자연주포 세 문과 거의 사람 머리통만한 철구를 쏘아내는 벽력포가 순차적으로 쏘아졌다.

퍼억. 퍼퍼퍼퍼퍽.

좁은 통로 탓에 복면인들은 쇠구슬과 포탄에 고스란히 노출이 되었다. 절정 수위의 내공에 팔다리가 떨어져 나가도 무리 없이 움직일 수 있는 괴물들이었지만 화약의 힘으로 쏘아진 쇠구슬에는 소용이 없었다.

푸확. 퍼퍼억. 콰지직.

순간적으로 분해가 되었다. 육편이 되어 허공으로 떠올랐다. 혈우가 되어 떨어졌다.

‘지독하구나, 화포라는 것은.’

용무린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삼백여 명이나 되던 복면인들은 화포 여덟 발에 불과 수십여 명 밖에 남지 않았다. 통로가 좁은 탓도 있었지만 그만큼 화포의 위력이 강했기 때문일 것이다.

“네 발 다 쐈습니다, 패주.”

포 소리에 집중하던 양경홍이 고함을 질렀다.

휘슷.

그 순간을 노려 용무린의 발이 땅을 박찼다.

“이젠 내 차례다, 이 빌어먹을 자식들아-아!”

반짝.

용무린의 손에 들린 소검비연이 서늘한 빛을 머금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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