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분노 (47/104)

4.분노

타닷. 쌔액. 스파앙.

점점 더 빨라지는 용무린의 속도가 공기를 압축했다. 공간을 접듯 거리를 좁혔다.

“막앗!”

“어서 빨리 장전 마치고 쏴!”

놀라운 속도로 거리를 좁히는 용무린을 보면서도 몇몇 동창 고수가 응전의 태세를 취했다.

물론 소용없는 짓이었다.

피이이이-잉!

소검비연이 빛이 되어 쏘아졌다.

지포에 쌓인 화약을 끝도 없이 화포에 집어넣는 동창 소속 환관들을 휩쓸었다.

촤악. 스가가각.

“커헉.”

“으아악.”

“크악!”

전면의 화포에서 움직이던 일곱 명에 달하는 동창 고수의 목이 거의 동시에 떠올랐다.

“하아앗!”

득달같이 달려든 용무린이 화포의 포구 어림을 불사신기를 끌어 모아 후려쳤다.

터어어엉.

범종이 울리는 듯한 굉음과 함께 한 뼘도 넘는 두께의 화포가 우그러졌다. 둥근 원이 반달이 되었다. 두 번 다시는 쏘지 못할 것이었다.

“감히 군문의 화포까지 끌어와 쏘다니!”

“이 역적 놈들!”

“죽어랏!”

패액. 피잇. 푹푹푹푹푹.

뒤이어 신법을 전개했던 양문광과 그의 아들 그리고 세 장로가 벽력포를 준비하던 동창 고수들을 덮쳤다. 양가창법을 펼쳐 사정없이 짓쑤셨다.

“크악.”

“커헉!”

동창 고수 일곱이 한꺼번에 불귀의 객이 되었다.

그와 비슷한 시간, 백자연주포를 준비하던 동창 고수들이 복면인들의 손에 의해 박살이 났다.

“괴, 괴물들이다.”

“폐를 뚫었는데 어떻게…… 크아악.”

팔다리가 끊어져도 아무렇지도 않게 공격을 펼치는 마령인들의 손에 의해 삽시간에 허물어졌다.

“바퀴를 무너뜨려라.”

“두 번 다시 사용할 수 없도록 만들어!”

“동창 놈들이다. 쳐라.”

“황상을 보위하는 길이다. 정정당당은 나중에 따지고 일제히 달려들어라!”

마지막 백자연주포와 동창 고수들은 어림친위군의 손에 고철덩어리가 되었다. 물론 제독 관일영과 지휘 육만천의 공이 가장 컸다.

일각이란 짧은 시간에 정리가 모두 끝났다.

용무린의 시선이 전면을 틀어막고 있는 거대한 철문으로 향했다.

“히야, 두꺼워 보이네.”

터엉. 텅.

살짝 두들겨 보니 한 뼘 어림은 족히 되어 보였다.

“안으로 잠긴 듯합니다, 패주.”

“그렇겠지요.”

용무린의 시선이 매섭게 철문 주변을 살폈다.

‘분명히 밖에서도 여는 방법이 있을 터인데?’

진성왕도 모르고 있었다면 분명히 근래에 들어 설치된 철문이리라.

“패주. 시간이 없으니 제가 나서도 되겠습니까?”

“총병관님께서요?”

용무린의 눈이 동그래졌다.

무공으로 열려면 자신도 가능하지만 시간이 꽤 걸린다. 한데 자신보다 떨어지는 것이 분명한 총병관이 자신만만하게 나선 것을 이해할 수 없어서였다.

“저것들을 사용할 생각입니다, 패주.”

양문광의 시선이 아직도 잔뜩 쌓여 있는 화약으로 향했다. 빙그레 웃어 보였다.

“아하!”

그제야 알겠다는 듯 용무린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좋죠. 하세요.”

“감사합니다. 그러면 뒤로 물러나 주시길…….”

양문광의 청에 용무린은 짓쳐들었던 통로 끝으로 물러났다. 용무린을 따라 어림친위군과 이제는 겨우 삼십 명 남짓 남아 있던 복면인들까지 움직였다.

양문광과 양경홍 그리고 양가장의 세 장로가 네 문의 화포를 순회했다. 남아 있던 지포에 싸인 화약을 잔뜩 모아 철문 앞에 설치했다.

몇몇 지포는 풀어서 흑색화약을 조심스레 바닥에 깔아 도화선을 만들었다. 용무린이 몸을 숨기고 있는 통로까지 길게 선을 그렸다.

“자, 이제 모든 준비가 다 되었습니다.”

“불만 붙이면 끝입니다, 패주.”

양문광과 양경홍이 자신만만해하며 웃었다. 용무린이 활짝 웃어 보이며 명령을 내렸다.

“가죠, 황제폐하 구하러.”

“물론입니다, 패주.”

양경홍이 창을 바닥에 거칠게 내리쳐 불똥을 만들었다.

치잇. 치이이익.

화약에 불이 붙었다. 빠른 속도로 타들어 갔다. 철문 앞에 설치된 화약을 파고들었다.

버언쩍. 쿠콰콰콰콰아-앙!

작열하는 새하얀 빛과 함께 엄청난 폭음과 충격파가 일었다. 공동 전체가 무너져 내릴 듯 뒤흔들렸다. 천정에서 큼직한 돌조각들이 떨어져 내릴 정도였다.

“휘유, 깔끔하네요.”

“허허허, 군문 외의 곳에서 사용하기에는 위험한 물건이지요.”

그래서 민간에서 화기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철저히 통제를 하는 것이리라.

“그러게요.”

종잇장처럼 찢긴 채 활짝 열어젖혀진 철문을 보며 용무린이 고개를 흔들었다. 동감을 표했다. 철문 너머 이십여 명에 달하는 정체 모를 고수들이 있었는데 하나 같이 온전치 못한 모습으로 죽어 있었던 것이다.

“다 왔네요.”

활짝 열린 철문 넘어 편액이 보였다.

용사비등한 필체로 황궁보고라 각인이 되어 있었다.

용무린은 불사신기를 잔뜩 끌어 올린 후 마지막 문을 밀어 보았다.

스르르.

두터운 문은 예상 밖으로 잠겨 있지 않았다. 소리도 없이 열렸다. 그 대신 몇몇 고수들이 쭉 늘어서 있었다. 용무린을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씨익.

용무린의 입가에 흰 선이 쭉 그어졌다.

중앙에 서 있는 사내의 정체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 운적풍. 너도 여기 있을 줄 알았다.”

화운장로가 풍운단과 의천단을 이끌고 찾아갔을 때 수뇌부가 깡그리 도주했다고 알려주었다. 자금성에 들어서자마자 상관웅과 마주했으니 어쩌면 운적풍 또한 이곳에 있으리라고 생각했었는데 보기 좋게 맞았다.

하지만 놈의 태도가 기이했다.

‘뭐야 저 녀석?’

자신의 의지로 무공을 펼치던 상관웅과는 달리 운적풍의 표정은 멍했다. 흡사 혈고에 종속당해 이지를 상실했던 복면인들이라도 되는 양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이상합니다, 패주.”

“분위기가 좀…….”

양문광과 양경홍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

혹시나 싶었던 용무린은 대뜸 소검비연을 꺼내들었다. 불사신기를 집중해 가볍게 두들겼다.

따앙. 따라랑.

하지만,

“……!”

“……!”

놀랍게도 운적풍과 그 옆의 장년인과 다섯 노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혈고는 아니라는 뜻이네?”

용무린이 혼잣말을 할 때 뒤에 있던 양경홍이 불쑥 앞으로 나섰다.

“제가 베어버리겠습니다, 패주.”

과연 유격장군다운 패기.

하지만 용무린은 재빨리 양경홍을 말렸다.

“멈춰.”

흠칫.

양경홍이 그대로 멈춰 섰다. 용무린을 돌아보았다. 운적풍과 늘어서 있는 괴인들을 쓸어 보는 용무린의 눈에 싸늘한 한기가 돌았다.

“그놈들 마물입니다.”

“예에?”

“마물?”

양문광과 양경홍의 반문에 용무린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마교 대법으로 재탄생한 놈들이에요.”

용무린의 뇌리에 몇몇 마교의 사이한 대법들이 스쳐 지났다. 혈고를 사용하는 것보다 더욱 지독한 마물들, 틀림없이 그 중 하나로 생각되었다.

바로 그때 용무린의 말이 사실임을 증명이라도 하겠다는 듯 걸쭉한 웃음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크하하하. 어린 아해가 식견이 제법이로구나.”

“맞느니……. 우리가 바로 저 쓸 만한 물건들을 만들어 낸 장본인이다.”

거침없는 발걸음으로 모습을 드러낸 두 노인.

나이는 추측할 길이 없을 정도로 많아 보였지만 눈빛만큼은 지금껏 용무린이 만나 본 그 누구보다도 더 깊고 심유해 보였다.

‘강적이다.’

보는 순간 바로 알 수 있었다.

두 노인을 따라 일렁이듯 출렁대는 기운을.

자연스럽게 마시고 내쉬는 호흡 속에도 진한 마기가 섞여 있는 것으로 보아 무림맹에서 용무린을 초주검이 되도록 몰아붙였던 운위영 급으로 판단이 되었다.

‘어쩌면 그 이상일지도.’

그리고…….

“그 빌어먹을 애송이 놈이 지금껏 모든 일을 망쳐온 장본인이외다.”

지독히 차가운 눈으로 용무린을 쏘아보는 노인이 마지막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런데 더 놀라운 사실은 그 노인의 손아귀에 파리한 안색의 청년의 목줄이 잡혀 있다는 사실이었다.

“폐, 폐하!”

“태사! 삼공의 수좌인 당신이 어찌!”

“이 역적아! 어서 폐하의 옥체를 풀어드리지 못할까?”

관일영을 비롯해 노인의 정체를 아는 모두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고함을 버럭 질렀다.

노인의 정체는 바로 삼공의 수좌인 태사.

황상의 총애를 가득 받던 그가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를 도무지 알 수 없었다.

“크크큭. 이 판국에 답답하게 있을 필요가 없지.”

뜻 모를 이야기를 끝으로 태사가 자신의 얼굴을 잡아 뜯었다. 주름이 가득하던 얼굴이 한 꺼풀 벗겨졌다. 생소한 장년인의 얼굴이 드러났다. 지금껏 알려졌던 태사의 얼굴은 인피면구였던 것이다.

“허억. 너, 너는 누구냐?”

“웬 놈이냐?”

“정체를 밝혀라.”

모두가 화들짝 놀랐지만 용무린은 담담했다.

상대가 자신의 정체를 밝히지 않고 있었지만 이미 충분히 짐작이 갔다.

“상관초웅. 반가워, 상관세가주.”

피식.

“빌어먹을 애송이. 눈치 한번 빠르군.”

상관초웅이 싱겁게 웃었다.

“나쁜 자식인 건 이미 잘 알고 있었는데, 그래도 이건 조금 심했다. 어떻게 운적풍과 운룡장주까지 죄 이렇게 만들 수 있지?”

겨우 저 꼴이 되려고 그렇게 마교와 붙어먹은 것은 아닐 터, 운적풍과 운룡장주 그리고 운룡장의 혈족들이 생각할수록 어리석게만 느껴졌다.

“지금부터 하는 말을 다른 놈들까지 듣게 할 필요는 없겠지? 두 분 노사께서는 탈백마령인을 먼저 풀어주시기 바랍니다.”

“우리 먼저 재미를 보라 이건가?”

“클클클, 좋지.”

느물거리며 웃던 두 노인의 입에서 묘한 진언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오옴. 마라니 마라도로 오움 타아.”

“오움. 마라니 마라도로 오움 타아.”

그 순간 흐리멍덩하던 운적풍의 눈에 매서운 빛이 돌았다. 운룡장주와 다섯 혈족들의 눈에서도 새카만 기운이 풀풀 날렸다.

“가라, 탈백마령인들아!”

“적들의 뇌를 부수고 골수를 들이켜라.”

“크아아아!”

“크아앙!”

휘슷. 스파앙.

운적풍과 운룡장주, 아니 이제는 탈백마령인으로 전락한 사람들이 순간적으로 짓쳐들었다.

“이노-옴!”

가장 먼저 양문광이 나섰다. 놀라운 속도로 거리를 좁히는 운적풍의 앞을 가로막았다. 양가창법을 펼쳤다.

버언쩍. 후와앙.

보기 드문 창강이 운적풍의 심장을 노렸다.

따아앙. 파캉. 카카캉.

양문광과 운적풍은 이내 격렬하게 얽혔다. 양가창법의 정수와 진마묵검이 서로의 목숨을 노렸다.

“이놈! 네 상대는 나닷!”

휘슷. 피잇.

유격장군 양경홍이 짓쳐들며 운룡장주를 노렸다.

탈백마령인의 힘은 애초에 지니고 있던 무공에 영향을 받는 모양인지 양경홍 역시 운룡장주를 맞아 손색없는 대결을 벌였다.

‘적어도 일, 이다경 사이 어떻게 되지는 않을 것 같군.’

문제는 운룡장주의 혈족들로 만들어진 탈백마령인 다섯이었다. 양가장의 세 장로가 제각각 하나씩을 맡았음에도 둘이나 남았다.

“크아아!”

“크르르르. 카아아!”

짐승과도 같이 울부짖으며 관일영과 육만천을 비롯한 어림친위군 백여 명을 향해 짓쳐들었는데 일장에 관일영이 뒤로 밀렸고 육만천이 피를 토했다.

그 뒤는 보나마나였다.

퍼엉. 퍼퍼펑. 와득. 뻐어억.

“크아악!”

“커헉!”

어림친위군들이 속수무책으로 쓰러져갔다.

따랑. 따라랑. 따리라라랑.

용무린이 재빨리 소검비연을 탄주했다. 멀뚱히 보고만 있던 복면인들이 그제야 참전했다. 탈백마령인들을 매섭게 공격했다.

“저쪽은 다 짝을 찾았으니 우리도 시작해 보자꾸나.”

“덤벼라 애송아.”

결코 방심할 수 없는 두 노괴가 용무린을 향해 두 팔을 벌렸다. 자존심이나 명예 따위는 생각지도 않는 듯 두 사람이 한꺼번에 덤빌 생각인 모양이었다.

“거, 좋지.”

겁나지도 않는 듯 용무린은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풍뢰와 소검비연을 꺼내들었다.

그런데,

“두 분, 잠시만 제게 시간을 주십시오.”

“……?”

“……?”

놀랍게도 상관초웅이 두 노괴를 말렸다. 다소 불쾌한 듯 눈을 부라리는 두 노괴를 향해 급히 말을 이었다.

“저 애송이에게 피맺힌 원한이 너무 깊으니 제가 먼저 손을 써야만 혈육과 가문의 빚을 조금이라도 갚을 수 있겠습니다.”

그 정도로 원한이 깊다고 하는데 뭘 어쩌겠나?

“……먼저 기회를 주지.”

“기회가 왔을 때 실컷 즐기도록.”

두 노괴는 입맛을 다시며 뒤로 물러났다.

기다렸다는 듯 상관초웅이 앞으로 나섰다. 종이 인형이라도 되는 듯 한손으로 틀어쥐고 있던 황제를 앞으로 척 내세웠다.

“잘 봐라 애송아.”

꾸우욱.

용무린의 반응을 보고 싶다는 듯 상관초웅이 손아귀에 힘을 더했다. 그렇지 않아도 어둡던 황제의 안색이 한층 더 핼쑥해졌다.

“네가 구하러 온 황제가 바로 내 손아귀에 있느니라. 어떠냐? 구하고 싶지 않으냐?”

“거 참 이상한 인간일세. 그럼 내가 지금 여기까지 놀러온 것으로 보여?”

꿈틀.

인상을 써 보인 상관초웅이 스산한 목소리로 뇌까렸다.

“잘 판단해라, 황룡패주. 황제의 생사여탈권이 네놈 주둥이에 달렸느니라.”

용무린의 얼굴이 살짝 구겨졌다.

다른 때 같았으면 벌써 짓쳐들어 공격을 퍼부었을 터인데 황제의 목줄을 틀어쥔 채 앞으로 내밀고 있으니 그러기가 영 껄끄러운 것이다.

“움직이거나 입은 열어 말은 하지 못하고 있지만 황제 놈의 귀는 열렸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고스란히 다 듣고 있지.”

‘휴, 그건 정말 다행이네. 심각한 약물이나 대법을 펼치지는 않았구나.’

용무린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선택해라, 애송이 황룡패주여. 너는 팔 하나를 희생해서 황제의 목숨을 구할 생각이 있는가?”

“내 팔 하나를 자른다면 황제폐하를 풀어주겠다고?”

“그래. 풀어주지. 단, 지금 내 눈 앞에서 자른다면 풀어 주겠다. 어떠냐? 자르겠느냐?”

이것은 복수이자 황제의 목숨을 가지고 하는 유희다.

상관초웅의 눈을 가만히 쏘아보던 용무린의 입이 불쑥 열렸다.

“싫어!”

“뭐, 뭣? 싫다고?”

너무나 단호한 태도.

일말의 망설임조차 없는 대답에 오히려 상관초웅이 놀랄 정도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용무린은 황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황제폐하. 황룡패주 용무린입니다. 저는 폐하께서 복수를 원할 것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금껏 당해왔던 것을 생각하면 아시겠지만 제가 팔 하나를 자른다고 해도 절대로 풀어줄 놈들이 아니거든요.”

맞는 말이었다.

팔 하나를 자른다면 또 다른 팔 아니면 다리를 자르라고 할 놈이었다. 결코 쉽사리 풀어줄 리가 없다.

“지금 이 순간 저놈에게 있어 황제폐하와 저는 장난감일 뿐입니다.”

“이, 이놈. 팔 하나만 자르면 풀어준다니까?”

다급해진 상관초웅이 고함을 질렀다.

용무린이 더 큰 목소리로 그 말을 받아쳤다.

“지랄 마, 이 개자식아. 그럴 것 같으면 지금 당장 황제폐하를 풀어드려. 그러면 내가 내 팔 하나를 자르겠다.”

“……!”

“어때? 그건 싫지?”

“내, 내가 널 어떻게 믿고?”

“그럼 난 널 어떻게 믿고 팔을 자르겠냐 이 멍청아?”

“……!”

상관초웅은 또 할 말이 없어졌다. 용무린의 말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폐하. 이렇게 치욕스럽게 목숨을 부지하느니 저 같으면 차라리 깨끗하게 죽겠습니다. 하지만 염려하지 마십시오. 복수 하나만큼은 확실하게 해드리겠습니다. 깡그리 죽여 드리지요. 그리고 보위는 황태자께서 이을 수 있도록 제가 책임지고 도와드리겠습니다.”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용무린이 움직였다.

휘슷.

바람처럼 몸을 날려 상관초웅 앞으로 파고들었다. 소검비연이 빛을 머금은 채 앞으로 쏘아졌다.

버언쩍. 피이잇.

제대로 된 비연일섬의 초식이 상관초웅의 목을 노렸다.

“네가 이래도!”

상관초웅이 목을 틀어쥔 황제를 그 앞에 들이밀었다.

그대로 초식이 전개된다면 소검비연은 자신이 아니라 황제의 목숨을 취할 터였다.

바로 그 순간,

튀이잉. 씨시시시싯.

용무린의 손가락이 천잠사를 뜯었다. 일직선으로 날아들던 소검비연이 둥근 호선을 그렸다. 뒤이어 천잠사가 파도처럼 너울대며 황제의 뒤에 숨은 상관초웅을 노렸다.

“이놈!”

“꺼져랏!”

잠자코 지켜만 보고 있던 두 노괴가 달려들었다. 소검비연을 후려쳤다. 천잠사의 움직임을 봉쇄했다.

따아아앙! 카라라랑!

소검비연과 천잠사가 훌훌 뒤로 튕겼다.

“네놈들이 나설 줄 알았다-아!”

버언쩍!

갑자기 두 노괴의 눈앞에서 눈부신 광채가 폭발했다.

휘우우우-웅.

신비로운 공명음을 이끌고 피어오른 것은 바로 풍뢰.

도대체 언제 던져냈는지, 용무린의 손을 벗어난 풍뢰가 빛을 뿌렸다. 그물처럼 두 노괴를 휘감았다. 진천수라도의 두 번째 초식 수라광망이었다.

“어리석은 놈. 비도 따위로 본좌를 어떻게 할 수 있을 것 같더냐?”

좌측에 있던 노괴의 오른손에 먹구름과도 같은 강기가 엉겼다. 그대로 풍뢰를 후려쳤다.

쿠와앙.

수라광망의 초식이 너무나도 쉽게 깨어졌다.

풍뢰가 짓쳐들던 것보다 더욱 빠른 속도로 튕겨졌다. 어디론가 사라졌다.

“죽어라, 애송아.”

휘슷.

그 사이 오른쪽에 있던 노괴가 거리를 좁혔다. 합장을 하고 있던 두 손바닥을 쭉 펼치며 밀어냈다.

콰르르.

피처럼 붉은 색의 강기가 손바닥의 형체를 고스란히 갖춘 채 쏟아져 나왔다.

“크아아압!”

용무린도 지지 않고 두 손을 내밀었다.

기교 따윈 필요 없다는 듯 불사신기를 끌어 모아 정직하게 장력을 맞받았다.

쿠와앙. 콰아앙.

귀청이 터질 듯한 폭음과 함께 붉은 색의 강기가 해체되었다. 하지만 용무린의 손바닥도 함께 찢어졌다. 손목과 팔목 어림이 쩍쩍 갈라졌다. 굵은 핏물이 마구 흘렀다.

쉬이익. 콱.

하지만 아직 여력이 많이 남았다는 듯 용무린은 계속해서 손을 뻗어냈다. 장력을 펼쳐냈던 노괴의 손바닥을 그대로 깍지 끼워 잡았다.

“하아압!”

그 상태에서 불사신기를 거칠게 밀어붙였다.

“이런 어리석은 놈을 봤나? 내력 대결을 하자고? 오냐 좋다, 어육을 만들어 주마. 크크큭.”

노괴가 비릿하게 웃으며 내공을 늘렸다.

그와 동시에 여유로운 동작으로 옆을 돌아보았다.

그 시선의 의미를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는 나머지 노괴가 성큼 다가왔다. 용무린의 관자놀이를 노리고 주먹을 찔러냈다.

“크크크. 끝이다, 애송아!”

후우우웅. 콰아아-.

노괴의 주먹에 다시 한 번 먹구름과도 같은 강기 덩어리가 엉겼다. 용무린을 향해 쏘아졌다. 내력 대결을 위해 두 손이 봉쇄된 용무린의 목숨이 위태로웠다.

씨익.

용무린은 되레 웃었다. 한마디 툭 내뱉었다.

“걸렸어!”

섬뜩한 미소와 심상치 않은 말이 떨어지는 순간이었다.

버언쩍.

한 줄기 벼락이 강림했다.

훌훌 날려 어디론가 사라져버린 줄로만 알았던 풍뢰가 찬란한 빛과 함께 공간을 단축했던 것이다.

‘젠장. 도신 안에서만 휘돌아야 할 불사신기가 밖으로 다 쏟아져 나왔네.’

그랬다면 저렇듯 화려하지 않고 은은하기만 했을 것이다.

하지만 뭘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그래서 더욱 무섭게 느껴졌다. 무려 일 장이 넘는 도강을 품은 채 스스로 날아올라 제 혼자 초식을 펼치는 도라니!

움찔! 흠칫!

위기를 직감한 두 노괴가 살짝 몸을 떨었지만 어검술의 절대적인 빠름과 파괴력 앞에 뾰족한 수는 없었다.

“서, 설마……?”

버언쩍.

번갯불처럼 풍뢰의 빛이 스쳐지나간 순간 주먹을 뻗어내려던 노괴의 목과 몸뚱이가 분리가 되었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단전에 구멍이 뻥 뚫려 버렸다.

푸스슷.

주먹에 맺혔던 먹구름과 같던 강기가 허무하게 흩어졌다.

번쩍.

노괴 하나를 잡아먹은 풍뢰가 스스로 방향을 틀었다. 허공에 빛으로 이뤄진 선이 쭉 그어졌다. 그 선에 놓인 것은 황제의 목줄을 틀어쥐고 있던 상관초웅의 팔.

스각.

“……!”

상관초웅의 팔이 어깨 어림에서부터 뚝 떨어졌다.

털썩.

그 서슬에 황제의 몸이 바닥을 뒹굴었다.

“어, 어어?”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 없다는 듯 말을 더듬는 사이 풍뢰가 하나의 초식을 더 펼쳤다.

수라비격일뢰!

버언쩍. 스파아-앗!

천공을 쪼개는 뇌전이라도 되는 듯 풍뢰가 공간을 갈랐다. 파고들었다.

퍼어어억.

상관초웅의 심장을 뻥 뚫어 버렸다.

겉으로는 마공의 흔적조차 나타나지 않을 만큼 놀라운 경지에 이른 마인이었지만 어검술로 펼쳐진 진천수라도의 초식에 허무하리만큼 쉽게 당했다.

‘어, 어떻게 이럴 수가…….’

상관초웅은 이 현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한 인간의 힘으로 그 많은 기관과 함정을 뚫고 나와 자신이 준비한 모든 것을 파괴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것으로도 모자라 음양자의 대제자와 둘째 제자를 상대하면서도 자신의 손에서 황제를 구하고 자신까지 죽일 수가 있는 것인가?

하늘이 원망스러웠다. 그리고 너무나 미웠다. 용무린을 내려 보내 상관세가의 군림을 막아낸 하늘이 참을 수 없을 만큼 증오스러웠다.

털썩.

바닥을 나뒹구는 상관초웅의 눈에 불사신기에 휘말려 입이 찢어져라 비명을 지르는 음양자의 둘째 제자의 모습이 보였다.

‘부, 부디 이 원한을 갚아주길…….’

누군가에게 복수를 부탁하며 상관초웅의 의식이 끊겼다.

“크아악. 크아아악!”

용무린과 내력 싸움에 돌입했던 음양자의 대제자의 입에서는 처절한 비명이 끝도 없이 흘러나왔다. 마공을 상대함에 있어서 불사신기가 얼마나 위력적인지 다시 한 번 증명되는 순간이었다.

퍼억. 퍼퍼퍽.

노괴의 칠공에서 분수와도 같은 피가 튀었다.

그 사이로 불사신기에 도주하듯 밀려나온 마공의 힘이 현기처럼 휘날려 사라져갔다.

“끝이다아-앗!”

용무린이 불사신기를 한껏 더 끌어 올렸다.

퍼어어엉.

가죽 북 터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음양자의 대제자가 삼 장 어림이나 뒤로 튕겼다. 바닥에 너부러지는 노괴의 몸은 이미 넝마였다.

“그, 그분께서 반드시…….”

“뭐라고 씨부리는 거야?”

퍼억.

일장에 노괴의 입을 잠잠하게 만들어 놓은 후 용무린은 황제를 조심스레 안아들었다.

“황제폐하. 황룡패주 용무린입니다. 지금부터는 제가 모시겠습니다.”

“……!”

입을 열어 대답할 수는 없었지만 황제의 얼굴은 조금 편안해 보였다.

“끝이다!”

스파앗. 퍼어억.

“꺼져랏!”

휘우웅. 스가악.

전투는 오래지 않아 마무리가 되었다.

운적풍의 심장에 큼직한 구멍을 뚫어 놓은 양문광과 운룡장주를 해치운 양경홍이 전투에 가담했기 때문이었다. 탈백마령인들은 이내 쓰러져야만 했다.

“황제폐하!”

“폐하의 용태는 어떻습니까, 패주?”

“폐하아-아.”

양문광을 시작으로 살아남은 모든 이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황제의 안위를 물어왔다.

“쉿!”

용무린은 사람들을 조용히 시킨 후 황제의 맥문을 잡았다. 불사신기를 조심스레 투입하며 입을 열었다.

“폐하. 황룡패주입니다. 지금 하는 일은 진맥입니다. 폐하의 옥체를 구속하고 있는 금제를 파악하는 대로 풀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용무린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온 정신을 집중해 황제를 구속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파악했다.

잠시 후 용무린은 고개를 갸웃거려야만 했다.

걱정했었던 것과는 달리 황제의 몸이 너무나 깨끗했었기 때문이었다.

‘왜지? 어째서 황제폐하에게만은 혈고도 그 어떤 대법도 펼치지 않았지?’

그저 단순히 마혈만 제압해 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토록 혈고를 펑펑 남발했으면서도 황제에게는 어째서 쓰지 않았던 것일까?

‘에이, 모르겠다. 깨끗하면 좋은 거지 뭐.’

마교 놈들이랑 앞으로도 계속해서 부딪힐 터 언젠가는 궁금증이 풀리겠지.

그렇게 편하게 생각하기로 한 용무린은 황제의 몸을 구속하고 있는 마혈을 풀었다. 너무 오랫동안 제압해 둔 터라 기혈이 쇠약해져 있었기 때문에 조심해야만 했다. 불사신기 역시 부드럽고 천천히 움직여갔다.

‘응?’

그러던 어느 한 순간이었다.

‘이게 대체 뭐지?’

뭔가 미묘하고도 이질적인 기운이 황제의 몸속에서 감지되었다.

‘황제폐하의 진원진기는 분명히 아닌데…….’

그렇다고 마기도 아니었다.

불사신기를 이렇게 불어넣는데도 버티고 있을 마기란 존재하지 않으니까. 하지만 이상한 일은 그 이질적인 기운은 황제의 몸에 완전히 뿌리 내린 듯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피부에 생긴 점과 같다고나 할까?’

신기한 일이었다.

불사신기로도 씻겨 나가지 않는 이 이질적이고도 미묘한 기운의 정체는 대체 뭘까?

‘모르겠다. 내가 의원도 아니고…….’

꺼림칙했지만 용무린은 그냥 무시하기로 했다.

깃들어 있기만 할 뿐 황제의 몸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고 있지 않기 때문이었다.

‘일단 마혈이나 풀자.’

용무린은 이질적인 기운에서는 신경을 끈 후 마혈을 푸는 일에 주력했다. 그리고 얼마 후,

반짝.

드디어 황제의 눈이 떠졌다. 빛이 돌아왔다.

씨익.

용무린이 활짝 웃으면서 황제의 귀환을 반겨주었다.

“돌아오신 걸 환영합니다, 황제폐하.”

“그, 그 목소리는……? 그대가 바로 황룡패주……?”

황제의 눈이 점점 더 커졌다. 상관초웅의 말처럼 귀가 열려 있었던 모양이었다.

“맞습니다, 폐하. 제가 바로 황룡패주 용무린입니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황제가 무탈하다는 것을 확인한 모두가 오체투지를 했다. 큰 소리로 부르짖었다.

“황제폐하 만세, 만세 만만세!”

“황제폐하 만세, 만세 만만세!”

그 소리가 어찌나 우렁찬지!

흠칫!

이제 막 정신을 차린 황제가 놀라 몸을 떨었다.

그런 황제를 위해 용무린은 불사신기를 불러 일으켰다. 명문혈에 가만히 손을 붙인 후 부드럽게 밀어 넣었다.

“……!”

황제의 눈이 동그래졌다.

내부를 채워가는 불사신기의 따스한 힘 때문이었다.

“고맙구나.”

용무린을 돌아본 황제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걸렸다.

용무린은 굳이 대답하는 대신 환한 미소를 지어 보일 뿐이었다.

황제가 몸을 일으켰다.

불사신기를 돋워 용무린이 부축했다.

황제의 눈가에 물기가 번졌다.

자신을 위해 달려와 준 사람들, 지금 이 순간에도 상처에서 피를 쏟고 있는 사람들을 보고 감격한 것이다.

“고개를 들라!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감격에 겨운 것은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총병관 양문광을 비롯한 모두가 황제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눈시울을 붉혔다.

“여기서 이럴 것이 아니라 밖으로 나가시지요, 폐하.”

“그래. 그러자꾸나.”

황제가 발을 성큼 내디뎠다.

휘청.

넘어질 듯 신형이 흔들렸다. 마혈을 제압당해 누워만 있었기 때문이었다. 곁에 있던 용무린이 잽싸게 부축을 했다. 다시 명문혈에 손을 붙인 후 불사신기를 흘려 넣었다. 황제가 곧 기력을 되찾았다.

***

용무린은 황제를 건청궁으로 모셨다.

하고 싶고 처리해야 할 일은 많고 많았지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역시 제압되어 있느라 약해진 황제의 몸을 건강하게 만드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당장에 어의가 소환되어 왔다.

그러나 놀랍게도 황제는 어의를 보자마자 그대로 호통을 쳐 돌려보냈다.

“썩 물러가렷다!”

“폐하. 옥체를 돌보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황후가 나서 보았지만 소용없었다.

황궁보고에 갇혀 있는 동안 열려 있던 귀는 많은 정보를 알게 해 주었고 황제에게 누구도 믿지 못하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다 필요 없다. 내 이 기회에 철저히 옥석을 구분해 낼 것이다.”

기력을 되찾은 후 피바람을 예고하는 일갈이었다.

“폐, 폐하. 저, 저는…….”

어의가 사시나무처럼 몸을 떨었다.

“물러가렷다. 나는 아무도 믿지 못하겠다!”

“폐하.”

황후가 다시 입을 열었지만 황후에게마저도 엄한 소리가 떨어졌다.

“황후도 그만 물러가시오.”

황제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은 현재 극소수였다.

자신을 구했던 용무린과 총병관 그리고 관일영을 비롯한 어림친위군들 뿐이었던 것이다.

“어서 물러가지 못하겠소!”

“폐하. 흑…….”

그 서슬이 어찌나 퍼런지 황후도 눈물을 흘리며 물러나야만 했다.

대신 약해진 황제의 몸을 돌본 것은 용무린이었다.

용무린이 불어넣어 주던 불사신기를 기억하고 있던 황제가 자꾸만 그것을 요구했던 것이다.

‘후우. 애초에 맛을 보여주질 말았어야 했는데…….’

후회해도 소용없는 일이었다.

내심 한숨을 내쉬며 용무린은 계속해서 불사신기를 운용해 황제의 명문혈에 밀어 넣어야만 했다.

황제가 기력을 되찾는 시간 동안 용무린이 항상 곁을 지켰다. 그러다보니 대화를 나눌 시간도 많았고 실제로도 많은 대화를 나눴다.

황궁보고의 파손된 기관장치 수리에 대해서는 비룡문과 제갈세가를 천거하는 등 국정 전반에 용무린의 입김이 상당 부분 섞일 수밖에 없었다.

대화는 상관세가와 마교에까지 이르렀다.

“태사가 사실은 상관세가주가 인피면구를 쓰고 있었던 것이라고?”

“그렇습니다, 폐하.”

“진짜 태사는?”

“죽어서 이미 얼굴 가죽을 빼앗긴 것입니다. 인피면구라는 뜻이 바로 그것이니까요.”

“허어. 정녕 악독한 놈이로군.”

“예, 악독한 놈이었습니다.”

“상관세가는 마교에 종속된 가문이었던 것이고?”

“비슷합니다, 폐하.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마교에 종속된 가문입니다.”

황제가 주로 질문을 던졌고 용무린은 자신이 아는 한 착실히 대답을 했다.

아드득.

“마교가 모든 일의 원흉이로군.”

황제가 이를 갈았다.

하지만 놀랍게도 용무린을 보기만 하면 바로 안색이 풀렸다. 소리 높여 웃었다.

“하하하. 하지만 내게는 황룡패주가 있지.”

마치 알에서 갓 깨어난 병아리가 어미를 보고 각인을 하듯 금제에서 풀리자마자 처음 마주한 용무린에게 비슷한 감정을 느끼는 것만 같았다.

“어떤가, 패주? 마교 놈들이 또다시 수작을 부린다면, 그때도 나를 구하러 와 주겠는가?”

“물론입니다, 황제폐하.”

어쩐지 닭살이 돋는 느낌이었지만 용무린은 냉큼 대답했다. 시원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마교가 황권을 장악한 후 무림을 상대로 전횡을 저지르는 것을 막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황제에게는 용무린의 즉답이 충성으로 읽혔다.

‘좋아, 그렇다면?’

무엇인가 중대한 결심을 내리게 했다.

그때 어림친위제독 관일영과 병부상서 진후상이 들어와 자신들이 작성했던 인명부를 바쳤다. 황제가 빠른 속도로 인명부를 읽었다.

쾅!

“이 많은 놈들이 죄 역적과 한패란 말인가?”

황제의 입에서 고함이 터져 나왔다. 분노를 감추지 않았다. 서탁을 내리쳤다.

“송구하옵니다, 폐하.”

“하지만 사실이옵니다. 그 안에 기재된 인명부는 그간 저희들이 황제폐하를 구하기 위한 힘을 모으기 위해 접촉했던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습니다.”

“내 그렇게 잘해 주었거늘, 그럼에도 나를 배신하고 역적의 편에 서다니!”

당장에라도 피를 부르는 명령을 내릴 것 같던 황제가 돌연 용무린의 의견을 물어왔다. 역시 각인 효과가 크게 작용한 것 같았다.

“어떤가, 패주? 적색으로 기재된 이 인물들을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

“일단 적색으로 기재된 이름들은 하나같이 사특한 무리들과 한통속인 자들이라 보시면 됩니다.”

“역시 그런가?”

“하지만 그 중에서도 옥석을 구분해야 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폐하. 적색 안에는 혈고라 불리는 마교의 마물에 타의로 종속당한 나머지 그렇게 된 자들과 자신의 이익을 위해 자의로 손을 잡은 자들이 섞여 있기 때문입니다.”

“그걸 대체 어찌 가려낸단 말인가?”

황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천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속담을 들지 않더라도 그 일이 무척 지난한 것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씨익.

용무린이 보기 좋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저만 믿으십시오, 폐하. 제게 따로 방법이 있습니다. 폐하께서 보시는 앞에서 직접 가려내는 모습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오오, 그거 재미있겠군그래.”

황제도 비슷한 미소를 지었다.

용무린은 적색 인명부에 기재된 사람들 몇몇 추려 건청궁으로 불렀다. 총병관 양문광과 양경홍이 대뜸 달려가 그들을 끌고 왔다.

용무린은 즉시 소검비연의 탄주에 나섰다.

따앙. 따랑. 따라리라랑. 따앙.

불사신기를 가득 머금은 신묘한 운율에 혈고는 즉각 반응을 보였다.

“크아악.”

“커헉!”

“우와악!”

다섯 명 중 무려 세 명이나 혈고에 종속이 되어 있었다.

혈고에 종속된 셋은 입이 찢어져라 비명을 쏟으며 바닥을 나뒹굴었다. 전신에서 마기를 풀풀 뿜었다.

“이, 이럴 수가?”

황제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눈앞에서 주변을 휘감듯 뿜어지는 마기에 분노와 겁이 동시에 일었다.

“염려하실 것 없습니다, 폐하.”

용무린이 즉시 나섰다. 불사신기를 슬쩍 주변에 흩뿌리는 것만으로도 혈고에서 뿜어져 나온 마기는 봄눈 녹듯 사라져 버렸다.

“보십시오, 폐하. 저희들은 아무런 이상이 없나이다.”

“저희들의 충심을 믿어주십시오, 폐하.”

혈고가 없는 것으로 밝혀진 두 대신이 기세등등하게 외쳤다. 황제마저 ‘저들은 충신인가?’ 하고 고개를 갸우뚱할 정도였다.

“너희가 더 나빠 이 인간들아!”

곁에 있던 용무린이 코웃음을 쳤다. 싸늘한 눈으로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저 셋은 혈고에 종속되었으니 그랬다고 치고 너흰 뭔데? 혈고라는 마물에 종속되지도 않았는데도 저들과 흡사한 짓을 벌였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그게 너희들 본심이라는 뜻 아니야?”

“저, 그, 그것이…….”

“억울합니다, 패주. 저는 사례감의 장인태감이 자꾸만 꼬이는 바람에…….”

“저, 저도 그렇습니다, 패주. 이부상서가 모두 꾸민 일입니다.”

두 사람은 앞다투어 모든 죄를 호유용이나 장인태감에게로 돌렸다. 물론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병부상서 진후상과 어림친위제독 관일영이 조사한 작성해 온 인명부에는 그들의 죄과가 낱낱이 적혀 있었다.

“황제폐하께서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역적들의 손에 부화뇌동해 너희 멋대로 정책을 결정하고 정사를 처리했으면서도 뭐가 어쩌고 어째?”

“……!”

“……!”

진후상의 일갈에 두 대신은 찔끔했다. 고개를 푹 숙일 뿐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황제가 모든 것을 깨달았다. 어떻게 옥석을 가려야 할지 알게 되었다.

“꼴도 보기 싫다. 저놈들을 어서 어림친위군영으로 압송하거라. 나중에 따로 문초하겠다.”

“충!”

“가자!”

양문광과 양경홍의 손에 두 대신이 끌려 나가자 황제의 눈은 잠에서 막 깬 듯 부스슷 몸을 일으키는 세 대신에게로 향했다.

세 대신은 혼란스럽고 참담한 표정이었다.

혈고에 종속된 상태에서 자신들이 벌였던 모든 기억까지 되찾았기 때문이었다.

“저들 셋 역시 역적이라는 뜻인가?”

황제의 질문에 용무린은 판단을 유보했다. 공을 황제에게로 돌렸다.

“그것은 폐하께서 평소 저들의 행실을 반추해 보신 후 내리셔야 할 것 같습니다. 저들이 혈고에 종속되었던 것은 분명한 터, 그 후 벌어졌던 역적 행위는 본심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거야 그렇지만…….”

황제가 말꼬리를 늘였다.

그런 사실이야 잘 알고는 있지만 심정적으로 받아들이기는 조금 힘든 모양이었다.

“……!”

“……!”

이미 죽음까지 각오한 듯 눈을 질끈 감은 채 결연한 표정을 짓고 있는 세 대신을 보며 용무린이 말을 보탰다.

“혈고를 썼다는 것은 곧 그것이 아니라면 마음대로 부릴 수 없을 정도로 강직했다는 뜻도 됩니다. 하니, 폐하께서는 저들의 평소 행실을 잘 생각해 보시고 판단을 하십시오. 평소의 행실이 충직했다면 다시 쓰면 되실 것이고 아니라면 이 기회에 내치시면 될 것입니다.”

“……흠.”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겼던 황제의 명령은 뜻밖이었다.

“너희는 모두 돌아가 있거라. 따로 판결을 내리겠노라.”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말씀만 하소서. 언제든 죽음으로 보답하겠나이다.”

황제가 즉참을 명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세 대신은 크게 감격한 모양이었다. 황제의 은혜와 만만세 삼창을 끝으로 물러갔다.

“조정의 모든 대신들을 저런 식으로 검사해 볼 수 있는 것이냐?”

“물론입니다, 폐하. 그러니 어서 빨리 건강만 되찾으십시오. 그간 미루어진 정사를 돌보시려 해도 건강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야 대충 마무리하고 내가 빠져 나가지!

라는 속내가 담긴 말이었지만 황제는 다시 한 번 감동을 먹고 말았다.

“암, 당연한 일이지. 염려 말게. 내 패주의 염려를 덜게 하기 위해서라도 최대한 노력하겠네.”

황제는 실제로도 잘 먹고 잘 자는 것으로 보답했다.

빠른 속도로 기력을 회복했다. 물론 용무린과 불사신기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시시때때로 명문혈에 넣어준 불사신기 덕에 가능한 일이었다.

‘어휴, 아예 맛을 보여주질 말았어야 했다니까?!’

황제 기력 회복용 보조영양제 신세가 된 듯해 짜증이 났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애초에 맛을 보여주질 말았어야 했던 것을 스스로 먼저 나선 일이었으니까.

***

이레 후.

그동안 기력을 되찾은 황제가 드디어 떨쳐 일어섰다. 정전인 태화전에 등청했다.

“황제폐하, 납시오!”

‘왔다.’

‘드디어…….’

문무백관이 초조한 얼굴로 황제의 하명을 기다렸다.

지은 죄가 있는 자들은 고뿔이라도 걸린 듯 몸을 떨었고 병부상서 진후상과 같은 이들은 당당했다.

“지금부터 그간 저질러졌던 역모와 역적의 무리들에 관한 단죄를 하려 한다.”

파르르.

많은 수의 대신들이 몸을 떨었다.

그들을 쓸어 보던 황제의 시선이 용무린에게로 옮겨졌다.

따뜻한 미소가 번져 나왔다.

“내 이 자리에서 친히 옥석을 가려내리라. 황룡패주!”

“예, 폐하.”

용무린이 기다렸다는 듯 앞으로 나섰다.

‘이것만 끝나면 드디어 나도 자유로구나.’

답답한 황궁을 벗어나 다시금 무림정복에의 활기찬 생활로 돌아갈 수 있다는 생각에 용무린의 전신에서는 저절로 불사신기가 치솟았다.

움찔. 흠칫.

그 기세에 대신들의 몸이 절로 떨렸다.

물론 안에 깃들어 있는 혈고가 반응을 보이는 것이었다.

따앙. 따라랑. 따리리랑. 따앙.

소검비연의 탄주가 시작되었다.

“우왁!”

“크아악!”

조정 대신들 중 무려 일 할에 가까운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그 자리에 쓰러졌다. 발악이라도 하듯 벌벌 몸을 떨었다. 괴로워했다.

뭉클. 뭉클.

그들의 전신에서 마기가 새어 나왔다.

하지만 나오기가 무섭게 불사신기에 휘말려 사라졌다.

따앙. 따라랑. 따다-앙.

갈수록 강렬해지는 소검비연의 탄주.

울컥. 울컥.

결국 견디다 못한 혈고가 귀를 통해 밀려 나왔다.

파스스. 푸스스슷.

불사신기에 휘말려 스러졌다. 그 후 오래지 않아 혈고가 빠져 나간 대신들의 눈빛이 되돌아왔다. 물론 혈고에 종속되었을 때의 기억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였다.

“……!”

“……!”

그로 인해 혈고에 종속되었던 대신들은 모든 것을 체념한 듯 오체투지를 했다. 어떤 명이든 달게 받겠다는 듯 고분고분했다.

그때를 기다렸다는 듯 황제의 입이 열렸다.

한 사람 한 사람 적색의 인명부에 들어 있던 대신들의 이름을 읊었다. 호부상서 좌익현, 좌시랑 추소직 등등 혈고에 종속되지 않은 대신들이었다.

“폐, 폐하. 어찌 저를…….”

“저는 마물에 당하지 않았습니다, 폐하.”

“마물에 당해 역도들과 함께한 자들은 바로 저자들입니다, 폐하.”

자신들의 이름이 불리자 무고함을 주장하려는 듯 호부상서와 좌시랑이 목소리를 높였다.

물론 소용없었다.

이미 용무린의 설명을 듣고 자의로 역적과 함께 전횡을 일삼아 왔던 이들의 죄에 대해 깊이 생각했었던 황제의 판단을 돌릴 수 없었다.

“저들은 강직하여 혈고가 아니면 그릇된 행동을 시킬 수조차 없었던 것인데 너희는 혈고에 종속되지도 아니하였음에도 역도들과 한배를 타지 않았더냐?”

“그, 그것은……!”

“총병관은 듣거라!”

“충!”

“지금까지 호명했던 역도들을 죄 끌고 나가 주리를 틀어라. 병부상서와 어림친위도독이 조사했던 내용과 대조해 죄과를 확인하라.”

“충!”

“폐하.”

“사, 살려 주…….”

“시끄럽다, 이놈들.”

양문광이 대뜸 아혈을 제압했다. 질질 끌고 나갔다.

그 후로도 계속해서 대신들은 밖으로 잡혀갔다. 문무백관 중 자의로 상관세가의 무리에 결탁해 전횡을 부린 자들이 부지기수였던 것이다.

‘하여간 무림맹이나 이곳이나, 어째 사람 사는 곳들은 죄 똑같은 것 같구나.’

한심한 일이었지만 이것이 인간이 사는 세상의 이치였다.

용무린은 점점 더 자금성이 답답하게 느껴졌다. 물론 무림맹 역시 마찬가지였다.

‘대충 무림만 정복하고 나면 경치 좋은 곳으로 놀러나 다녀야지.’

흑야방의 녀석들처럼 조직이 스스로 알아서 잘 돌아가도록 해놓은 뒤 제갈영령과 함께 산천유람이나 다니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용무린의 그렇게 상상의 나래에 잠겨 있던 틈을 타 황제의 입에서 청천벽력 같은 명령이 떨어졌다.

“총병관은 들어라.”

“충!”

“지금 즉시 오군도독부을 총동원한 후 무림을 말살한다.”

“……?!”

놀랐는지 양문광도 즉답을 하지 못했다.

부릅뜬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입만 뻥끗뻥끗했다.

‘뭐, 뭐라고? 지금 뭐라고 한 거야?’

용무린도 화들짝 놀라 귀를 후볐다. 황제를 향해 의식을 집중했다. 귀를 열었다. 노성 가득한 황제의 명령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감히 강호의 무부 따위가 황제를 능멸했다. 조정을 찬탈했다. 어찌 그 치욕을 또 겪겠는가?”

“폐하! 그게 지금 무슨…….”

황급히 나서는 용무린의 말을 싹둑 자른 황제가 다시 한 번 놀라운 명령을 내렸다.

“황룡패주 용무린에게 무림왕의 위를 제수하겠다. 총병관은 무림왕 용무린을 보필해 강호의 무부들을 피로 깨끗이 씻으라. 후환을 완전히 없애야 한다. 알겠느냐?”

“……!”

“……!”

용무린과 양문광 두 사람 모두 아무런 말을 할 수 없었다.

‘무림왕? 나 참 누가 그런 쓸데없는 이름을 달래?’

‘맙소사. 강호를 피로 씻으라고?’

두 사람 모두 황제의 명령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피로 씻으려고 들면 할 수야 있겠지만 황제폐하께서는 틀림없이 죽는다.’

‘분노한 무림인들이 작정하고 자금성의 담을 넘는 것을 막을 수가 없어.’

‘나와 양가장의 고수들만으로는 막지 못해.’

‘천하에 누가 그 많은 고수들을 막을 수 있겠어?’

양문광과 양경홍의 생각은 같았다.

두 사람은 급히 용무린을 바라보았다. 지금 이 순간 황제의 생각을 돌릴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한 사람 황룡패주 용무린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휴우. 폐하.”

긴 한숨과 함께 용무린이 앞으로 나섰다.

“오! 황룡패주 무슨 할 말이 있는가?”

아직도 사태 파악이 안 되는지 황제가 해맑게 웃으며 용무린을 바라보았다.

‘그간 당했던 치욕과 분노는 충분히 이해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각을 돌려야만 한다.

“지금부터 제 말 잘 들으세요, 폐하.”

타이르듯 나직한 용무린의 목소리가 천천히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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